본문 바로가기
Study

홍태영, "근대인의 자유와 대의제 정부: 시에예스와 콩스탕을 중심으로", <국민국가의 정치학>, 후마니타스, 2008. 발제문

by 정강산 2017. 4. 3.

Del av triptyken Kommunister, Picking up the Banner (1957).


홍태영, "근대인의 자유와 대의제 정부:  시에예스와 콩스탕을 중심으로", 국민국가의 정치학』, 후마니타스, 2008. 70-100p. 발제문


핵심어: 국민, 공화국, 이중권력, 대의제, 민주주의, 일반의지, 공포정치, 상퀼로트, 자유, 상업


“근대인들은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그리스적 어원의 민주주의를 그것의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이라는 이유와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의 발달을 거치면서 형성된 ‘근대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통해 대의제라는 형식으로 실현하려 했다. 현대에서 참여 민주주의 내지는 심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의 내용을 풍부화하려 했지만, 그 역시 넓은 의미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70)


"근대적 의미의 대의제가 쟁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혁명에서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 with out representation라는 구호와 함께 촉발된 미국혁명은 당시 영국 의회에서 지배적이던 대표에 대한 개념, 즉 ‘실질적 대표’에 대한 일정한 문제 제기였다
(...)여기에서 미국인들은 인민의 대표자들이 “지성적이고 뛰어난 사람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장점들과 확고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연방주의자들은 민중적 정당성과 엘리트에 의한 정부라는 요소를 결합시키기 위해 ‘자연적 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71)


"새로운 정치 주체로서 ‘국민’의 탄생과 그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형성의 문제는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다양한 쟁점들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당장 제기되는 문제는 국민에 의한 주권이 어떻게 조직될 것인가였다. 즉, 그것은 ‘헌법’의 문제였다. 또한 동시에 헌법의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는 문제가 ‘봉기’의 문제였다".(72)


헌법의 정치와 봉기의 정치 간의 대립은 정치적 실천의 문제에서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간의 대립, 주권의 문제에서 ‘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정부 참여에서 인민의 전적인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의 경우와 달리,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인민은 상존했다".(73)


공화주의의 백가쟁명

*시에예스

“국민은 우선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국민의 의지는 항상 합법적이며 법률 그 자체다”. 즉, 그에게 헌법은 근본적이고 이는 제헌권력의 대상이 된다.

A.권력의 세 가지 형태 구분.

1.구성된 권력: 법률의 제정 및 행사와 관련된 입법부와 행정부
2.제헌권력: 정치적 조직화 자체를 가능케 하는 대명제를 제정하는 권력
3.임명권력: 투표에 대한 권리
“인민은 스스로 유일한 임명 권력을 행사하며, 그것은 자신들의 실질적인 권리를 행사하게 될 사람들을 선택하고 위임하는 것이고, 또한 그 권리에 의해 공적 기관을 구성하게 한다”


B.시에예스의 대의제 모델
“근대의 유럽인들은 고대인들과 거의 유사하지 않다. 우리 근대인들에게는 상업, 농업, 제조업 등이 문제될 뿐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서 거대한 작업장들을 만들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소비와 생산을 더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근대적 단절에 대한 인식이자, 1770-85년 사이 이뤄진 정치경제학- 스미스와 중농주의 연구에서 도출되는 노동분업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서, 그에게 노동 분업에 따른 대의제의 관철은 합리적인 것이다: 노동분업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된 이익”을 가져다 주며, 따라서 “사회적 국가의 공통된 이익과 개선은 통치를 하나의 특수한 직업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식은 페티옹과 콩스탕, 부아시 당글레 등의 학자들이 18세기 말에 대의제를 하나의 넘을 수 없는 실질적인 조건으로서 규정하는 흐름과 함께하며, 이후 언급될,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의 공포정치가 보여준- 인민과 대표를 동일시하는 경향을 통해 인식론적으로 해소되기도 한다.


C.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구분
그는 “시민들이 스스로 법률을 만들고, 직접 공직자를 임명”하는 직접적 통치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와 “공적필요가 요구하는 배려와 감시를 전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정부형태”로서의 대의제를 구분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정부는 “민주주의적이기를 중단하고 대의제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인민은 자신들의 대표자들에게 영향력만을 행사하면 될 뿐”이다.
“실제적인 공통의 의지”와 “대표되는 공통의 의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인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후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쟁점을 무시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는 “모든 입법이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적 정신에 의해 쇄신되어야”함을 주장하는 언급들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회’의 도식 속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반복되리라는 점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적어도 대의제의 유효성을 논구함에 있어선, 그것이 “민주주의적 정신에 의해 쇄신되어야”한다는 추상적 명제가 어떤 제도적 장치에 의해 보완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

*로베스피에르
“혁명 정부의 원리에 관한 보고(1793년 12월 25일)”, “국민공회가 마땅히 따라야 할 정치 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1794년 2월 5일)” 등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입헌 정부의 목표가 공화국을 보존하는 데 있다”면, “혁명 정부는 공화국을 세우는데 있”으며, 혁명 정부는 “비상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 프랑스 내외부의 반혁명의 흐름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공화국 정부로 하여금 “공권력을 공격하는 다양한 분파들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좋은 시민”을 만들기 위해 “정신을 공화주의적 덕성과 고대적 수준으로 고양”시킬 필요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용례를 따르자면 이러한 주장은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장악력과 갱신이 소구되었다는 것인데, 이 시도는 “덕성”과 ‘공포에 대한 복종’을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로 내세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평화시의 민중 정부의 활력소가 덕성이라면, 혁명시의 민중 정부의 활력소는 덕성인 동시에 공포입니다. 덕성이 결여된 공포는 흉악하지만 공포가 결여된 덕성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 준엄하고 확고부동한 정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공포는 덕성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공포정치는 로베스 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들의 (과도기적)정의관을 잘 표현해주며, 그들 스스로 “여론「인민:인용자 주」의 살아 있는 몸”을 형성한다는 가정 위에서, 인민과 대표를 동일시하는 와중에 관철된다.
/

*콩스탕
“공화국이 이미 설립되었기 때문에 공화국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제정에 대한 지지와 왕정복고의 알리바이를 제공한 「헌장」에 대한 지지 등을 통해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곤 하나, 이는 그가 평화를 원하는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자유’를 중심에 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모든 특수 이익들이나 계급 이익들에 의해 동요하지 않는” 새로운 정체체제가 필요하며,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수 이익을 억압해선 안 되기 때문에, 권력을 분립시켜야 한다.


그의 권력분립론은 왕권, 행정부 권력, 지속적인 대표권력, 여론의 대표권력, 사법권력으로 나뉘는데, 여기서 그는 왕권을 ‘중립적 권력’으로서 규정하고 이를 “의회 권력과 행정부 권력 그리고 상원과 하원 사이의 극단적인 대립”을 중재하는 “보호권력”이라 말한다. 이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당시 입헌군주제에 영국의 사례다(콩스탕의 모델은 오늘날 영국을 비롯한 일본, 태국 등의 정치체에서 형태적으로 확실히 관철된다). 한편 ‘개인의 자유’에 방점을 둔 그의 논의는 대의제의 필연성과 효율성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권력들 간의 상호 감시와 투표를 통한 ‘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견제’를 독려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를 최초로 3권 분립의 필요성을 체계적으로 논구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현재 지배적인 정치체의 형식을 규정하는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의 이론적 전사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

*테르미도르: 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폐지되는 혁명력 11번째 달을 가리킨다. 국민공회의 중도파, 공안위원회의 온건파, 즉 소위 지롱드 파(지롱드 지방의 부르주아 계급이 주를 차지했던- 온건 공화주의자들의 집단들을 가리킨다. 1847년 라마르틴의 「지롱드 당사」에 의해 사후적으로 명명된다)에 의한 반혁명을 두고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한다.

*상퀼로트Sans-culotte: 공화주의자들과 부르주아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낸 당시의 빈민계층이었던 수공업자, 노동자 등을 가리킨다. 직역하자면 당시 귀족, 부르주아등이 입던 퀼로트(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Topics
1.한편 이러한 근대정치의 모순(국민-인민, 사실적 대표-실질적 대표, 대의제-민주주의, 개혁-봉기, 관리의 모델-구성적 모델, 제도의 정치-사회운동의 정치)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발리바르, 네그리, 동즐로, 랑시에르)으로, 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모순에 대항하는 대답을 찾는다(ex:발리바르의 개혁과 봉기의 변증법, 네그리의 제헌권력-직접민주주의-구성적 권력, 동즐로의 사회와 사회적인 것의 대립, 랑시에르의 정치와 아르케 정치의 대립 등). 허나 이들 모두가 놓치고 있는 것은, 정치라는 상대적 자율성을 띠는 장이 그 자신이 독립된 실천부문으로서의 ‘정치’이게끔 하는 기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구체적인 정치론을 이론적으로 상대할 대상으로서 격상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시도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주의를 보완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놓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요컨대 전체 역사적 측면에서, 클로드 르포르와 카스토리아디스를 비롯한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960-70년대에 일종의 전향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처럼, 정치론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계보학적 설명력을 갖고자 하는 일련의 흐름들이 나타난 배경은 필연적이지만, 그러한 필연을 통해 구성된, 주체적 계기로서의 이론이 제공하는 설명력은 필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한계를 갖는 부분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한계 중 하나가 경제라는 작인의 “매개” 혹은 영향을 함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2.민주주의가 대의제와 거의 동의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제1 자연화’에서도 드러난다. 허나 저자가 조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초기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열어젖힌 공화국의 이념(3권 분립과 대표의 정치)과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기획을 품고 있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절충된, 역사적 모델일 따름이다. 허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외부의 바람직한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하나의 조건으로서의 대표의 정치를 부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자유민주주의 외부의 국가들의 정치체가 전근대적 폭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개발독재시기를 거쳐 ‘민주화’라는 진전을 이뤄낸 한국적 특수성이 갖는 악명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인민이란 애초에 실존적 존재론을 다소간 담지 할 수밖에 없기에, 인민의 자기 통치라는 테제 자체가 경제적 사회관계들에 대한 숙고 없이 정책적으로 봉합된다는 것은 사실상 원천적으로 불가능 할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민주주의적 내용을 지닌 제도로서 논의되어온 것들을 소개하는 항목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국민 배심원제, 헌법 배심원제, 공론장 형성을 통한 일상적 정치활동과 언론의 자유 등.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도들이 어떤 한계들을 갖는지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정치 자체의 논리 속에서 이루어졌을 때 어떤 맹점을 보이게 되는지 목격한 바 있다(베네수엘라가 직면했던 2004년의 반혁명, 기업들의 광고 수입에 의존해야하는 언론구조 등). 그렇다면 그러한 나름의 한계들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울 수 있는 제도 혹은 실천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민주주의의 내부에 답이 없다면, 어떤 방식을 통해 자기-통치의 모델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3.근대의 대의민주주의의 조건을 형성하는 시에예스의 작업 속에서 민주주의적 인민은 그 자신의 대표자들에 대한 “영향력만을 행사하면 될 뿐”인 집합적 존재인데, 이는 이른바 한국의 촛불 혁명에서 특징적으로 관찰되기도 한다. 허나 시에예스의 주장들이 당시 쇠락하던 왕권과 귀족가문들, 신흥부르주아 계급의 출현, 영국의 점진적인 자유주의적 개혁, 상퀼로트들에 대한 정부의 실정이라는 역사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듯, 촛불 시위가 보여준 비폭력성과 정연한 질서 또한 마찬가지의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조건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관조 할 수 있다면, 그러한 집회 양상은 소시민들의 모자란 급진성 때문이 아니라, 근대적 분업 체계 혹은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이 심화된, 토대의 어떤 계기들이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물신을 관철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에예스가 말하듯 모든 사회적 생산이 임노동을 통해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정치는 전적으로 하나의 직업으로서 현상하며 전문가들의 공학적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많은 이들이 87년 체제의 완성이라 말하는 것은, 정확히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에서, 토대로부터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양태들이 규정되는 과정을 적시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촛불 혁명에 대한 비판이 분업 비판이 되어야함을,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성숙과 심화에 대한 관심이 생산력-생산관계의 계기들로서의 토대에 관한 관심이 되어야함을 의미하지 않을까. 근대사회의 복잡한 노동분업으로부터 조달되는 임금과 이윤의 문제를 타격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비폭력의 정언명령은 한편으로 필연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