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제 2장 “존재와 실존” 165-206p 발제문.
정강산
인용구의 모든 강조는 발제자에 의한 것입니다.
핵심어: 주체, 객체, 매개, 부분, 전체, 존재론, 연루상태, 단일한 것(das Eine), 긍정적인 존재(positives Sein), 존재적인 것, 현존재, 존재자, 존재론적인 것, 존재교리의 양가성(Ambivalenz)
아도르노는 이 장에서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지탱하는 전제들을 분석하고, 그것을 비판하며 해체하는 데에 논의를 집중한다. 하이데거의 전제들에 대한 반 테제로서 그가 내세우는 주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유발한 기제들은 문제적이지만 주-객의 도식은 이미 현실의 조건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제 3의 것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조명과 특혜는 결국 주체-객체의 범주로 소급되며, 이 점을 무시하는 한 모든 존재론은 기만에 그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하의 인용구들에서 전개되는 아도르노의 논의들은 이 기조 문장의 변주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은 때론 철학적 방법론의 기술적 측면에서 이뤄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도르노가 이해한 역사유물론의 전제들과 변증법의 계기들을 중심으로- 즉, 부분과 전체, 주체와 객체의 “매개됨”을 준거로 하여 채워져 있다.
“한때 객관적으로도 구속력 있다고 간주되던 신학적 내용이 세속화된 것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 신학적 내용을 변호하는 자는 주관성을 통해 그 내용을 구제하려들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의 교의도 이미 잠재적으로는 그런 입장을 취했다. 칸트 철학의 모습은 틀림없이 그러했다. 그 이래 계몽은 불가항력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주관성 자체도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 과정 속에 끌려들어갔다. 이로써 구제의 기회는 어떤 한계가치까지 하강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구제의 희망은 구제를 포기하는 데에서, 아무 유보조건 없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세속화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출발점은 이에 따르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한에서 참이다. 그러나 그가 헤겔과 별 다름없이, 구제되어야 할 것이 그로써 직접 현전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점은 거짓이다.
(...)
존재가 사유되기 시작한 이래, 개념적 반성으로서의 존재 자체도 사유에 붙잡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존재철학 자체의 증언상 이 사유에 의해 해체된 의미가 존재 속에 있다고 광고하자마자 존재철학은 실패한다.
(...)
만일 하이데거처럼 존재를 그 외연논리적(umfangslogisch)개념과 구분하려 한다면, 존재자와 추상의 범주들을 제거하고 나면 칸트의 초월적 물자체 개념보다 주술적 파토스 말고는 아무것도 나을 것이 없는 어떤 미지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이데거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사유라는 말도, 사유되어야 할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 없게 된다. 즉 개념 없는 사유는 어떠한 사유도 아닌 것이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라면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제인데, 이 존재가 모든 사유규정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다는 점으로 인해 존재에 대해 사유하라는 호소는 공허해진다“.(166-167)
우리는 여기서, 아도르노에게 ‘개념’과 ‘논리’가 파악되는 계기가 양가적이고 변증법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일하지 않은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즉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뤄지는 “동일성 사유”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자연지배에 따른 사회의 지배와 합리화를 유발하는 근본적인 기제로 제시된다. 이 동일성 사유는 대상화하지 않는 모방적 표현이라 할법한 mimesis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아도르노가 예술을 자본주의의 타자로 상정하며 그에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이때 동일성 사유와 논리적으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언어, 개념, 논리 등이다. 항상적인 고통을 발생시키는 부조리한 세계에 존재하나 그러한 세계를 “없애가지”며 대상(세계)에 대한 폭력 없이 미메시스를 담지 하는 유일한 공간으로서의 예술은, 결국 주어진 세계와의 완벽한 화해(합일)를 거부하고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려있음으로써 “예술적 부정성”이라는 진리의 계기를 담지 한다.
이러한 그의 논조는 종교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 삶을 소외시키는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를 염두에 두고 제기된, 비합리성과 “힘에의 의지”, 관점주의 등에 대한 특권으로 요약되는 니체 식의 언어(표상 혹은 동일성)비판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그는 한편으로 니체주의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아도르노와 니체를 연결하는 작업은 양자의 바그너 해석과 교육론 등의 상동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사실 아도르노 자신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니체를 참조하기도 하기에, 그를 포스트구조주의자로 셈하는 많은 논의들에선 인식론적으로 양자를 종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내세우며 이성을 공격하는 니체와 달리, 동시에 이성의 고유한 생산적 공간을 마련한다. 요컨대 예술작품들이 지닌 전체 세계와의 관계에서의 맥락과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념과 논리가 필요하며, 예술은 그런 한에서 언어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현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개”라는 모티프의 중요성과도 관계가 있다. 그에게 개별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은 언제나 전체와 객관적인 것에 매개되어 있는 것으로서, 유물론적 사고의 핵심은 여기서 “객체의 우위”를 입증하고 관철시키는 일련의 사유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영화를 경계하는 근본적인 까닭이, 작품의 ‘없애갖는 성격’과 “매개”의 계기를 상실한 채 구체적인 낱낱의 현사실성들을 곧바로 제시하는 데에 있었던 것처럼, (사유에 의한 ‘없애가짐’이 없이)즉자적인 사실들, 부분들이 전체와 “매개됨”을 사유하기 위한 변증법의 요체는 사유 없이 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계몽을 비판하는 동시에 계몽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개념과 논리로 지탱되는 사유의 해악을 본질적인 층위에서 비난하면서도 그것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 즉, 그에게 주체와 객체의 분할은 변증법적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그는 하이데거의 ‘주관, 객관 이전의 작인으로서의 기분’, 혹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공격에 관해 “개념 없는 사유는 어떠한 사유도 아닌 것”(167)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존재라는 표현의: 발제자 주]아우라 속에서는 매개의 계기가 고립되며 그로 인해 직접적인 것을 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라는 양극과 마찬가지로 매개도 실체화되어서는 안 된다. 매개는 그 양극의 짜임관계(Konstellation)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매개는 매개된 것에 의해 매개된다. 하이데거는 매개를 마치 비대상적 객관성인 듯이 과장한다. 그는 조야한 사실들(facta bruta)의 둔탁한 상태와 세계관적 헛소리 사이의 상상적인 중간지대에 자리 잡는다.(168)
(...)
'이다(Ist)'는 문법적 주어와 술어 사이에 실존판단(Existentialurteil)의 연관관계를 만들어내며, 이로써 존재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순수하게 그 자체로 보면, 계사(Copula)[연결사; 연결문: 발제자주]로서 한 종합(Synthesis)의 보편적, 범주적 사태를 의미하면서, 스스로 어떤 존재적인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그것은 별 생각 없이 존재론의 편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된다.(...)계사는 그 자체의 의미로 보아 단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그것은 자립적이지 않다. 하이데거는 계사를 의미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인 그런 관계를 계사가 초월한다고 오해한다”.(169-170)
‘이다’라는 표현의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로부터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순수성”을 얻어낸다. 즉 어떤 상태, 현상, 대상 등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이다’는 하이데거에게, 주체도 객체도 아닌 제 3의 것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는 은어로서 제시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는 “‘이다’의 의미 속에 상정되어 있는 특수자 속의 매개되고 매개하는 업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 가까운 것으로서 “종합의 범주적 성과를 소여상태(Gegebenheit)로 실체화”하여 “실존판단의 내실과 범주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거칠게나마 마르크스의 작업에 유비해보면 이해가 될 수 있을 텐데, 예컨대 변증법의 체계 자체에 대한 메타서술과 변증법을 담지한 형식은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변증법 자체에 대한 서술은 부재하지만 그의 작업(특히 <자본>)은 변증법적이며, 따라서 그에게 변증법이란 종합의 범주적 성과로서 제시된 것이지 이미 존재하는 소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사회주의의 이후에 달성가능 한 공산주의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 개념 사이의 간극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사실상 전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한 1960년대의 알튀세르의 지적 개입이라는 일회적 사건을 제외하곤)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이는 하이데거의 논의 중 존재와 존재자의 도식에 대입시킬 수도 있는 것으로,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효과로서만 도출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양자의 관계가 전도된 채 제시된다고 할 수 있다.
문법에서 ‘이다’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능동형으로서의 존재라는 기저범주(Substratkategorie)와 결합될 경우, 존재는 즉자로서 사용되지 않고 단지 그 존재하는 것 모두에 대한 관계 속에서 상호적으로 사용될 뿐이다.(171-172)
하이데거는 동일성 속의 비동일성을 변증법적으로 통찰하는 경계선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존재 개념 속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이 모순을 억누른다. 어쨌든 존재라는 말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은 그 개념과 그것이 뜻하는 바 사이의 동일성을 비웃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것을 동일성으로서, 그 타자성(Andersheit)이 없는 순수한 자체 존재(reines es selbst Sein)로서 다룬다.(...)‘이다’가 단순한 주관적 기능도 아니고 사물적인 것, 존재자 혹은 전통적 사유에 따르면 객관성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제 3의 것인 존재라고 칭한다.(...)‘이다’가 결코 단순한 사상도 단순한 존재자도 아님을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두 가지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찬양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희미한 보편성을 통해서라고 할지라도 ‘이다’에 대해 어쨌든 생각만이라도 하려들면, 한편으로는 존재자에 또 한편으로는 개념들에 도달한다. 이 계기들의 짜임관계는 단 하나의 유일한 본질로 환원될 수 없다. (173)
여기서 아도르노는 존재자에 대한 질문이 아닌, 존재자를 가능케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론자 하이데거’의 작업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존재자”와 “개념들”의 우위를 제시한다. 아도르노에게 존재란 애초에 “유일한 본질”로 소급될 수 없고, 그때 그때의 맥락으로부터 탈각된 채 독립적으로 논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이는 그가 객체의 선차성(동시에 주체의 편재성)을 그 자신의 작업의 가장 중요한 테제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개념과 판단이 분리 불가하다고 말하며,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 자체에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까닭은 개념과 판단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이다’와 같은 존재론적 맥락을 지닌 특정한 개념을 사유할 것을 주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판단”하는 주체라는 범주자체라는 것이다: “(...)모든 개별 개념들이 이미 그 자체로 분류법적 논리학이 소홀히 하는 판단들과 얽혀 있다.(...)판단은 개념들의 단순한 종합이 아니다. 왜냐하면 판단 없이는 어떠한 개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존재나 ‘이다’의 매개상태 속에는 주체가 포함되어 있다”.(174) 그런 의미에서 아도르노는 결과적으로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넘을 대안으로서의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주관성에 부여하는 절대성이 주-객의 분할을 넘을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주체 및 객체와 전혀 무관하게 있을 수 없”(175)다는 것이다.
허나 동시에 아도르노는 존재를 존재자를 초과하는 것으로서 상정하는 하이데거적 계기(하이데거는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존재와 존재구조는 모든 존재자 및 어떤 존재자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규정성 너머에 위치한다. 존재는 초월적인 것 자체다” 존재와 시간, 38p. 본문 176p에서 재인용)가, 유일성, 개체성, 단독성의 상실의 다른 표현으로서의 아우라의 상실로부터 야기된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이를 양가적인 것으로, 즉 부분적으로 옳은 것으로서 조명 한다: “존재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 혹은 사건들의 총괄개념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반실증주의적 인식을 통해, 사실성을 넘어서는 개념의 특성을 합당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언어로 만드는 어떤 잉여부분(das Mehr)이 없다면 어떠한 개념도 불가능할 것이다”.(175) 그러나 매개되지 않은 “어떤 직접적인 것”을 희구하는 순간 사유는 원시적인 것에 대한 낭만화로, 즉 “태고주의”로 귀결된다: “그러나 현존재와 대비되는 존재라는 말 속에서 메아리치는 소리, 즉 모든 것이 그 자체 이상의 것이라는 말은 그것의 연루상태를 의미하지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이 연루상태가 초월성으로 되며, 이로써 개별 존재자에 부가된다.”(같은 곳) 결국 아로드노에게 이러한 “근원”을 상정하는 하이데거의 초월적인 존재의 계기는 역사로부터 이탈한 “퇴행”이자 “절대적 가상”인 것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하이데거의 초월적 존재로부터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겠다는 식의, 철학자들에게 고유한 욕망을 읽어낸다. “이로써 사유의 유동적 성격은 사유가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 불가능한 것 자체로까지 격상된다. 말하자면 비대상적인 것이 고유의 본질과 어떤 윤곽을 지닌 대상으로 된다. 그것은 또 바로 그 때문에 손상되기도 한다.(...)하이데거는 철학의 표현 불가능한 측면을 직접 주제로 취급함으로써 철학을 다시 정체시키고 마침내 의식을 폐기해버리기에 이른다.”(180) 한편 그에게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마치 언어를 하나의 사물로서 대하는 어린아이의 미숙함과 유비되는 것인데, 까닭인즉 “(...)습득된 어휘를 통해 방향을 잡는 한에서 바로 어린이의 직접성은 자체로 매개되어 있으며, 원인과 제1원리의 천착도 미리 형식화되어 있”고, 어린이에게 “언어는 어떤 인공물로서가 아니라 자연물로서 체험”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주-객의 매개관계를 사유하지 못한 채 어린이가 언어를 물신화시키듯, 주-객 이전의 태초의 상태에 대한 하이데거의 애착 또한 개념을 물신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과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초월성은 가상도 아니고 인위적이지도 않고 근거 없지도 않은 것으로서의 본래성에 대한 욕구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철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는 의구심 혹은 표면 현상에 대한 불만인 철학 특유의 충동, 곧 본질과 가상 사이의 구분이 평준화 되었는데,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183)
이어 아도르노는 본질주의에 대한 정당한 저항에 하이데거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는 “현상들 뒤의 진정한 세계가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테제”의 구조를 유지하며 단순히 전도시킨 “무반성적 계몽”, 즉 실증주의 역시 “자료가 아닌 것이나 은폐되어 있는 것을 신화나 주관적 투사라고 배척”함을 고발하고, 하이데거 또한 존재의 거주함을 본질로 상정함으로써 이러한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본래성의 파토스 속에 떨림음처럼 남아 있는, 사물화된 의식에 대한 저항은 좌절된 것이다”.(184) 이때 하이데거의 논의는 결국 개개인들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머무르는데, 이는 “비판의 잔여부분은 현상, 곧 주체들을 향하게” 되며, “본질의 책임은 단지 주체들의 책임에 의해 표현되고 재생산될 뿐이므로 본질은 아무 탈 없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존재론이 존재자에 대한 물음에 머물러 있었다고 주장하며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촉구하고, 존재야말로 존재자를 가능케 하는 근거라 했던 하이데거의 테제에 아도르노는 정면으로 반테제를 제시한다. “존재와 존재자의 변증법, 즉 어떠한 존재도 존재자 없이는 사유될 수 없으며, 어떠한 존재자도 매개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은폐한다”(187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작업으로부터 존재자를 지워버리려 하지만, 아도르노에 따르면 “존재자로부터 정제된 존재는 자체가 배척하고 있는 존재자를 다시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한에서만 근원적 현상”이기에, 존재자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부채를 지적해야 한다. 그는 존재론적 차이의 모호성, 동어반복성 즉 일종의 순환논증의 오류를 지적한 뒤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존재적인 것 없이 존재론은 불가능하다는 존재론의 난관, 즉 존재적인 것에 대한 존재론적 원칙의 의존성,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론의 이 스캔들이 존재론의 구성 요소로 되고 있다.(...)존재자 없이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사실이, 존재의 본질에는 존재자의 존재라는 점이 속한다는 형식으로 환원된다. 이로써 참인 것이 허위로 된다.(188)” 요컨대 이것은, 존재는 현존재 혹은 존재자에 관해 후행하는 것이지만, 하이데거가 “존재자는 존재의 존재방식”이라 주장할 때, 이는 존재자를 근거로 하여 증명되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선험으로서, 전미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아도르노는 헤겔의 존재론을 언급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논리학> 중 “생성(Werden)”을 논하는 각주에서 헤겔은 존재가 곧 무라고 말하는데, 그 결론은 대략 다음의 논리과정을 거쳐 도출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비규정성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이때 공간과 시간의 무규정성은 단지 그것이 “있다”는 표현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단순히 “있다”는 것은 바로 존재의 문제이다. 따라서 비규정성은 존재를 규정한다. 존재의 규정성으로서의 비규정성은 순수한 추상적 부정으로서, 곧 ‘무’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비판하며 헤겔이 “비규정적인 것을 무와 동일시”함으로써 성급하게 (존재자, 현존재와 관계하는 구체적으로 다양한 시공간을 점유한)“존재적인 것”을 (존재 자체에 대한 메타원리를 서술하는 초월적인 ‘있음’자체와 관계하는)“존재론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관념론 전통의 연장에서 주체의 우선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이는 헤겔이 상정하는 비동일자와 동일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실상 비동일자 없이는 아무런 동일성도 없지만, 그의 경우 총체적인 것인 이 동일성이 존재론적 우위를 장악”(193)하며 “불가해한 것을 개념들로 존중하는 대신 그것의 보편개념, 즉 불가해성의 개념 아래 그것을 포함시킴으로써 삼켜버린다”(같은 곳)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여기서 헤겔을 언급하는 이유는 헤겔이 저지른 오류를 하이데거가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즉 “추상을 통해 생겨난 것이 더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헤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또한 “존재적인 것의 존재론화를 구름으로 덮어놓”는다는 것이다. 그 뒤 제기되는 것은 실존주의자들; 존재론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존재의 분리와 다를 바 없이 주체의 분리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매개된 것을 직접성이라고 보는 환상으로 귀결된다. 존재가 개념에 의해 매개되어 있고 그래서 주체에 의해 매개되어 있듯이, 그 반대로 주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또 주체의 결단은 무기력하고 단지 내적일 뿐이다.(197)
인간학은 구체적인 것으로 등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기만적으로 된다.(...)실존은 전체에 대립하여 고안된 것이지만, 전체와 분리되어 철학으로 양식화되기만 하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도 마치 자신이 전체인 듯한 태도를 취한다.“(198)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등 존재의 문제설정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광의의 존재론철학의 자장 내에 있는 이들의 주장을 검토하며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개인이 없다면 그의 의식도 없을 터인데, 의식을 지니는 개인은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물며, 사실적인 것(Faktizitat)”, 즉 존재자일 뿐 준재는 아니다. 존재에는 주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념이기 때문이다.(...)이 존재자가 사유할 수 있다고 해서, 마치 그러한 존재자가 직접적으로 본질적인 듯이 그 존재자로부터 존재자로서의 규정을 삭제할 수는 없다“.(199-200)
이제 아도르노는 ‘지금-여기’에 실존하는 ‘나’라고 하는 주체 우위의 존재론 철학의 전제를 반박하며, ‘나’라는 개념의 취약성을 논한다. 즉 존재론은 “개인의 인식론적 반성형식 또한 사회적으로 매개된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의식이 왜 어떤 다른 자의 의식에 선행하는 것이어야 하느냐는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체를 사회에 앞선 존재자로 오해하는 것은 주체의 필연적 착각”이고, “‘나의’라는 말 속에서는 사유재산관계가 언어적으로 영구화되었으며, 논리적 형식으로 되어버렸다”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아도르노가 목표하는 것은 존재론자들이 은연중에 공모하는 유명론과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교환원리를 통해 조직된 사회와 그 속에서 규정되는 이데올로기(주체의 우위라는 범주)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그의 논의를 지탱하는, “사회는 주체에 앞선다”라는 테제는 그가 말하는 “객체의 우위”가 단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리킨다. “순수한 현존”이라는 계기가 보편자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될 때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이 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주체에 앞선 사회, 즉 객체의 우위를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주관성은 칸트가 기능적이라고 지칭한 본질을 통해 확고하게 미리 규정된 실체들을 용해시키지만, 주관성에 대한 존재론적 단언은 그로 인한 불안을 가라앉힌다.(...)기능적 개념인 주관성은(...)절대적으로 확고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가 상호 침투하여 이루는 주체와 객체의 짜임관계(Konstellation)인 진리는 결코 주관성에 환원시킬 수도 없고, 역으로 존재에 환원시킬 수도 없다”.(202)
한편 이 대목에선 일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어오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진리 모델에 맞서 존재자의 탈은폐를 통한 존재의 드러남을 진리로 간주한 하이데거 모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데, 주체에서 “진리인 것은 주체 자체가 아닌 것에 대한 관계 속에서 전재될 뿐, 결코 주체의 양태존재(Susein)에 대한 고압적 단언을 통해 전개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비롯한 존재론자(“실존주의 학파”)들은 “진리를 주관성으로부터 구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주체와 객체의 짜임관계, 혹은 주체와 객체의 매개됨으로서의 진리는 결국 역사적 정세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미학이론>에서 제기된 그의 논의에 비추어 보자면, 이는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세계에 대한 미메시스적 동화와 비판을 동시에 수행하는 계기(구체적으론 역사에 대한 무의식적 기술로서의 예술이 될 것이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와의 매개가 없이 도출된 하이데거식의 진리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논박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아도르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점진적으로 구상되어온 “존재자에 대한 물음”으로 점철된 종래의 제1철학과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철학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제1철학의 연장에서 하이데거를 파악한다.
"존재 교리의 양가성(Ambivalenz)은 역사에 대한 존재 교리의 관계도 규정한다. 이 양가성이란 존재자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또한 존재론화하여 그 형식적 특징들에 환원함으로써 그것의 비개념적 요인 모두를 박탈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역사가 역사성이라는 실존범주로 치환됨으로써, 역사적인 것의 핵심이 사라지게 되고, 불변요인의 교리에 대한 모든 제1철학의 요구는 가변적인 것에까지 확장된다. 즉 주체와 객체의 내적 결합과 짜임관계를 규정하는 역사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역사성이 역사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중지 시킨다".(204)
상기한 주석들에서 이미 암시되었듯, 아도르노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으로부터 발견하는 것은 무매개적이고 단독적인 초역사성 혹은 비역사성으로서의 추상적인 역사성이다. 위의 단락에서 아도르노는 이와 같이 하이데거가 맥락화 될 수 없는 역사적인 것(이때의 ‘역사적인 것’은 ‘존재자’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모호한 역사성(혹은 존재)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주장한다. 즉 하이데거가 ‘죽음을-향한-진의적-있음’을 마주함으로써 현존재의 진의성(진정성)을 간취할 “결단”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때, 그렇게 매개 없는 기분과 탈은폐를 논할 때, 특정한 시공 속에서의 개별 존재자들의 구체적인 궤적으로서의 역사적인 것에 대한 고려는 상실되고, (필연적으로 주-객의 도식이 연루된)역사를 모르는 초월적인 역사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카를 뢰비트를 따라, 하이데거의 나치 가담경력은 그자신의 철학의 필연적 귀결이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존재자가 관여해야 할 영원한 이념, 혹은 존재자를 조건지어야 할 영원한 이념으로부터 남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긍정, 즉 권력에 대한 긍정밖에 없다”.(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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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일성의 해체주의자, 아도르노"라는 한 논문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근본적인 수준에서 아도르노를 동일성비판론자로서 자리매김하거나 그가 지닌 포스트구조주의와의 친화성을 조명하는 논의들은 적어도 한국에선 아도르노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해 온 것 같다. 특히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기된 “동일성 사고”라는 개념은 확실히 그런 측면의 아도르노를 부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아도르노는 사회지배와 그 안에서 주술화의 과정을 심화시키는 또 다른 전범으로서 “교환원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를 비난했던 사실이 무색하게 인류의 죄악, 고통의 근원에서, 혹은 역사의 본질에서 일종의 초역사적인 계기(동일성 사고)를 발견했던 아도르노의 모습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의 한 축으로서 역사적인 계기(교환원리)를 논증하는 아도르노의 모습이 병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동일성 사고와 교환원리라는 개념은 양립가능 한가? 혹은 교환원리 또한 굳이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기간을 상정하지 않은 채 자연 지배의 과정을 열어젖힌 동일성 사고로부터 파생된 부차적인 개념으로 간주해야 할까?
2.단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실천이론이란 존재하는가? 그는 이론과 실천을 엄격히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자체로 우위를 점하는 실천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아도르노는 역사의 특정한 국면 혹은 단계에서의 매개됨의 양태를 드러내보이는 인식론적 작업으로서의 비판을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여겼음이 분명하기에, 이것이 매우 협소한 질문으로 여겨질 수 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에게 품게되는 의문은 결국 최소한의 실천에 관한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들뢰즈의 "-되기", 라캉의 "환상의 횡단", 보드리야르의 "과잉순응" 등은, 이 각각의 담론체계에 관한 인지와 별개로, 설령 우연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열린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허나 아도르노에겐 결국 객체의 우위 하에서 매개됨을 사유할 수 있는 인지능력과 훈련이 결정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가능한 실천의 공간은 오직 관념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더불어 그의 철학자체도 동일성 사고와 교환원리 등으로 촘촘하게 조직된,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현재의 조건을 서술하는데에 집중되어 있으며, 비판과 부정 혹은 부정성을 담지하는 예술 외엔 그 외부를 감지할 수 있을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물론 그의 작업 구석구석에서 교환원리를 벗어난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해 지나가는 언급과, 개념을 통한 구축적인 이론을 마련하는 것은 전연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업에 돌파구 혹은 대안적 가능성이 부재한다는 점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은 현실사회주의가 거듭 실패하고 파시즘이 창궐했던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 한 지식인이 실행한 비관적인 무의식적 역사기술의 결과인 것일까, 오히려 그러한 대안적 가능성의 부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급진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ps. 칼 포퍼와의 실증주의 논쟁을 정리한 책은 한국어로 출판이 안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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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영화를 잇는 배선을 끊어야 한다. 그 배선의 자리에 놓인 것이 영화의 사진적 존재론이다. 사진적 존재론은 카메라가 비로소 가능케 한 대상의 무매개적 현존을 찬미한다(예술을 고도의 매개로 본 아도르노가 영화를 싫어한 것도 영화 이미지가 무매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념과 회화의 질료와 인간의 눈은 실패했지만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에 의해 실재의 사물 혹은 세계의 맨살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적 존재론에 바탕한 영화는 인식론적 예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예술이며, 확정 기술적 진리 담론을 폭파하고 사건 혹은 ‘되기’로서의 진리의 차원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허문영, “야만적 유희자의 초상”, 계간 문학동네 2016년 봄호 통권 86호.)
“당시 나는 벤야민에게 이 경우 볼 수 있는 물질적 모순들과 물질적 긴장들의 개별 모티프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어떤 시의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물변증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것이 근거로 삼는 개별 자료들이 전체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사회의 총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개별 경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아무리 확고해도 자체로는 이론적인 사회적 결론들, 사회 이론적 결론들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눈에 띄는 사실들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개별 계기들을 나름대로 사회적 총체의 구조와 관련지어야 한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T.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세창출판사, 2015. 158p.)
“제 1부에서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부정변증법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축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헤겔의 관념론이 정신숭배라고 비판하면서 존재숭배를 강조하지만 그 자신도 존재자를 존재 자체를 통하여 파악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존재적인 것을 존재론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와는 은연중에 주관에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비난했다. 하이데거의 존재적인 것의 존재론화는 존재자를 존재 자체를 통하여 파악하려는 시도이지만 이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윤선구,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철학사상 별책 7권 제 21호, 2006. 10p)
아도르노는 이처럼 계몽의 개념을 인류의 태고사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역사철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계몽이 도구적 이성과 그 산물로서의 지식권력을 매개로 하는 지배의 원리임을 밝혀낸다. 아도르노에게 ‘지배(Herrschaft)’는 정당성을 전적으로 결여하는 폭압적 권력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를 목적으로하는 계몽은 그 자체로 억압의 원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아도르노의 이러한 억압적인 계몽의 개념은 이론적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가? 아도르노의 억압적인 계몽개념은 무엇보다도 아도르노 자신의 철학적 기획인 계몽의 변증법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다.
(정태창, “아도르노 철학에서의 이성의 파괴: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철학사상 43, 2011. 171p)
마르크스와 루카치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인간해방’의 계기를 보았다면, 아도르노는 ‘인간해방’을 희망하면서도 오히려 계몽의 빛 속에서 탈출구가 폐쇄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보았다. 그는 루카치와 달리 ‘물화’의 원인을 상품형태에서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이성 자체에서 찾았다. 왜냐 하면 그는 진보와 억압의 역사적 변증법이 전개되는 곳이 바로 인간 주체성 자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적 교환의 합리성 자체는 도구적 이성의 극단적인 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호르크하이머와 그는 마르크스를 칸트와 니체의 눈으로 읽고, 칸트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눈으로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아도르노는 교환가치의 보편화로 인하여 인간 주체가 자신의 고유한 질적 가치를 박탈당하는 사물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화 현상은 ‘문화산업’에 의해 더욱 더 심화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문화산업은 인간을 시장의 법칙에 종속시킨다. 따라서 문화산업의 메카니즘에 종속한 인간들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총체적인 사물화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렇게 해서 사물화는 ‘관리된 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 되고, 주체는 반성과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채, 새로운 사회, 이성적 사회에 대한 전망도 희망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최종욱, “동일성의 해체주의자, 아도르노”, 진보평론, 이론 15, 1996. 246, 2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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