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원죄의식, 기회주의적 반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2차 가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윤리적 외피를 쓰는 모습을 보노라면 몇 년간 쭉 이어지는 수컷자아비판이 썩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도 이젠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폭로자의 모든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남성됨을 반성하는 것은 PC한 도덕적 자아이상을 충족시키는 나르시시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으며, 관계의 윤리가 애매한 조건에 걸쳐있던 와중에 일어난 동료/연인 간 실수와, 학생을 성폭행하고 임신을 막기 위해 배를 걷어차 갈비뼈를 부서뜨린 케이스 모두를 '파렴치한 악'으로 대충 묶어 처리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실천이 아니다. 여성주의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몸을 담았던 이들은 성폭력의 쟁점에 관한한 페미니스트들이 얼마나 입체적이고도 기민하게 대처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약자와 강자, 선과 악이 그리 뚜렷하지 않고, 양자가 일치하지도 않는 정도로는 세상이 복잡하게 구획되어 있다는 점을 안다.
그러니 최소한 그들만큼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어떤 사건이 정황상 제 아무리 확고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반대편의 반론을 듣거나, 사건이 확증되기 전까지는 부디 뇌피셜을 멈췄으면 한다. 스스로 '피해'를 입었음을 주장하는 이들의 첫 번째 고백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언제나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많은 경우 '피해자', '약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최초 폭로는 사건 이해에 있어 단순히 반쪽짜리 이상의 것이지만, 한편으론 반쪽이하로서 함량 미달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약자'가 매번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편 혹은 애인에게 자신의 외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강간'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의 몇몇 케이스들을 보면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남성이 무고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미투의 제문제에 생산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에 내재한 중층적이고 애매한 지점까지도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건이 피해자성을 옳지 못한 방식으로 전도시키는지, 피해자성을 통해 주체의 급진화를 도모하는지는 언제나 개별 사안 속에서, 해당 싸움이 종결되는 국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 모든 폭로와 동시에 선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반성폭력 운동의 내부비판을 비롯하여 여러 결의 페미니즘을 보다 진지하게, 입체적으로 보라는 말밖엔 되돌려 줄 말이 없다.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여러 단위의 성폭력상담소와 이런저런 여성주의 단체들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가 무분별하게 오용되는 경향을 염려해왔고, 비판해왔다(지금은 이들마저 조리돌림을 당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부러 적시하진 않을 것이다). 으레 친밀함의 표현이라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개입하는 사안인 만큼, 더불어 물증이 잘 남지 않는 사안인 만큼, 피해내용의 경중에 따라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자기변호까지 종합하여 정황을 면밀히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들은 숱한 용례에서 사건의 진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투박한 광기를 옹호하며 선정적으로 남용 되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피해주장자를 향해 대뜸 '꽃뱀'이라고 하는 것과, 피해 주장에 일관성이 있는지 여부를 되물으며 폭로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현재 그러한 주장은 흥미롭게도 '안티 페미니즘'이자 '2차 가해'로 여겨진다. 이는 성폭력 케이스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 중 한 부분이지,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페미니스트들은 '약자'를 자처하는 쪽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을 것이라는 순진한 전제가 외려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날뛰며 사건을 입체적으로 보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몽둥이로 후려칠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정확히 현재의 상황과 같은 경우 말이다. 그리고 그 염려는 최근 몇 년 간 SNS상에서 벌어진 온갖 소극들을 통해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미투의 합리적 핵심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사안을 사려 깊게 봤으면 좋겠다. '말의 무게를 성찰하라'는 윤리적 성토는 사안을 깊게 보려는 이들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피해사실 확증 이전에 '성폭력범', '가해자', '가해공모자', '2차 가해자', '맨스플레인' 따위의 레토릭으로 사안을 뭉뚱그려 전도된 폭력과 공모하며 징벌적 윤리의 쾌감에 탐닉하는 이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폭로의 형식을 지탱하는 심리적 개인의 경험에 대한 과도한 특권부여와 무한한 신뢰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전일적인 관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은 윤리의 과잉상태에서 외려 잊기 쉽다. 중요한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반대로 기울게 하는게 아니라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실천을 휘발성의 폭로와 약자성에 천착하는 일이 아닌 '이데올로기 장치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규정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그와 별개로, 이하의 인용문은 최근 몇 년간 성폭력 이슈를 소비해온 이들을 향한, 결코 과격하지 않은, 합리적으로 동의함직한 이선옥씨의 문제제기다. 이런 류의 주장을 '반혁명적 시도', 혹은 '명예자지', ‘착한 페미니즘’이라 일축할 수 있을까? 오른손엔 "맨스플레인" 왼손엔 "2차 가해"를 든 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악함과 자신의 고고한 젠더의식을 앞 다투어 구별 짓는 대중들의 논리를 비판할 수 없다면, 누군가 말했듯 이선옥씨는 '한남권력에 기생하는 명예자지'에 불과하게 된다. 헌데 나는 그런 반동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며 멍하게 노 젓고 싶지는 않다. 노를 저으려거든 제대로 저어야 한다. 최소한 함께 노를 젓고 싶도록 예의를 갖추거나.
"폭로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려는 노력 없이 비난에 동참하지 마라. 그 행위는 정의를 수행하기보다 누군가의 삶을 파괴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비난의 글을 쓰려는 손가락을 멈추고 당사자의 반론이나 해명에도 귀를 기울이고, 폭로자의 주장도 다시 살펴보고 그런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 그 과정을 거치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다."
"강간문화, 젠더감수성, 데이트폭력, 여성혐오, 가스라이팅,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등등 뭘 던지기만 하면 논쟁 없이 그냥 정식 개념화 해버리는 이상한 상황이 진보매체에서 반복되고 있다. 하나하나 다 따져봐야 할 개념들이고, 매우 거칠게 제기되고 있는데도 이를 공론의 장에서 차분하게 다뤄보려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반지성적인 태도가 전 매체를 망라해 지금처럼 일관되게 나타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세상의 절반을 위함으로 진정한 평등을 이루려는 선의가 이토록 집약된 상황인데, 왜 세상은 점점 성별갈등과 대립만 깊어질까? 성평등한 사회를 거스르는 반동의 물결로 취급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
불편부당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차분하고 지성적으로, 좀 느리더라도 이것이 진보매체다운 기사다 하는 글을 보고 싶다. 공정하고 좀 더 정의로운 방식으로도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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