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항문화공론장 바리케이드'에 선게재됨(2026.10.23)

기념비의 정치와 학살의 고유명: 5·18과 4·3의 정치적 무의식
정강산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남은 구조이며
기억은 사라진 것들의 귀환이다.
기억은 미래를 지배한다
개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억은 인류가 생명으로 써 내려갈 교향곡의 서주(intro)에 해당한다. 서주는 곡 전체의 구성에서는 짧은 부분이나, 그 후에 올 제시부(exposition)와 전개부(development), 나아가 재현부(recapitulation)와 종결부(coda)에 이르는 곡 전체의 음악적 긴장과 전개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특히 서주가 강하게 설정된 곡에서는 마지막 코다에서 처음의 서주가 다시 반복되는 바, 서주로 출발하여 서주로 끝나는 구조를 갖게 된다. 이 경우 서주는 단순한 도입부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집약하는 매개자라 해도 좋다. 그와 비슷하게 기억 속에는 우리의 미래가 잠재되어 있다. 이는 당신이 기억하는 것이 곧 당신인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잠언은 기억에 내재한 이 같은 독특한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1 기억은 과거의 사태에 표지처럼 정박되어 있으나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미래를 향해 도약하며, 현재를 거쳐 매 순간 폐기되고 다시 생산된다. 그리하여 오웰은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길 잊지 않았다.2 여기서 우리는 현재->과거->미래로 흐르는 시간성의 작용과 순환을 확인하는 바, 현재의 힘 관계(power relation)가 우선 과거를 규정하고, 이것이 곧 미래를 주재하는 구도를 볼 수 있다. 그 한가운데 시간의 매개자로서 기억이 있다.
같은 이유에서 기억은 유한한 생명이 세계를 헤쳐가기 위한 제1의 수단으로서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되며, 인간이 향유하는 기쁨, 분노, 사랑, 슬픔의 근원이 된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우리’와 ‘타자’, ‘안’과 ‘밖’을 가르는 가장 강력한 척도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건국신화와 구전설화들은 공동체 내부의 동일성을 함양하고자 적극적으로 기억을 발명한 사례를 보여주며, 오늘날의 뉴스는 ‘시민적 교양을 위한 새로운 소식’이라는 외피를 통해 국민국가를 작동시키는 공동의 기억을 심어둔다. 이 때문에 지배자들은 기억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현재’를 지배했던 이들은 ‘기억할만한 것’들을 ‘기념’하며 과거를 지배했고, 그로써 미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아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경구는 역사가 기억 혹은 기념 전쟁에서의 전리품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포착하며, 그 전쟁의 패배자들에게는 어떤 자비도 배풀지 않았음을 적시하고 있다.
“역사주의는 실로 누구에게 이입하는가? 그 답은 당연하게도 승자에게다. 모든 지배자는 이전 정복자들의 상속자들이다. 따라서 승자에게 이입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지배자들에게 이익이 된다. (...) 승리한 자는 누구든 오늘날까지도 개선(triumphal) 행렬에 참여하며, 그 행렬에서 현재의 지배자들은 쓰러져 누운 자들을 밟고 지나간다.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그 행렬에 실려 전리품이 운반된다. 그 전리품은 “문화재(cultural treasures)”라 불린다.”3
기념비에 새겨진 주권(sovereignty)의 이동
기념의 방식은 종교적 의례, 집단적 축제, 신화의 전달, 정전(canon)의 학습, 일상적 규율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으나, 기념물-기념비(memorial-monument)를 세우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4 그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했던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누비아 접경지대에서 이집트의 국력을 과시했던 아부심벨 신전, 중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권을 두고 자치 도시 간 크기 경쟁을 벌인 시에나 대성당과 피렌체 대성당 등 실제 동기야 어쨌든 명목상 신을 기리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고,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고구려 장군총처럼 권력자의 영생을 공표하는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한편 신과 왕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왕권의 정통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전했던 고대 근동의 함무라비법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등은 비석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피사 대성당에 부속된 피사의 사탑과 신라 황룡사에 부속된 9층 목탑 등은 당대의 지배적 종교를 매개로 국가의 권위를 전시하는 마천루를 보여준다. 기념비는 보다 직접적으로 교훈적인 뉘앙스를 취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충(忠), 효(孝), 절(節), 의(義)라는 유교 이념에 모범이 된 이들에게 간이 대문 역할을 하는 패방을 세움으로써 표창을 내렸고, 조선은 남편이 죽은 뒤 재혼하지 않거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해 혹은 자결한 여성의 기상을 상찬하는 열녀문을 전국각지에 세웠다.
이처럼 전근대의 기념비가 주로 종교와 신화 혹은 군주, 장군, 귀족 가문의 업적이나 국가의 승리 및 영광을 대상으로 했다면, 근대 이후의 기념비는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 간 산업혁명의 여파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를 확립시키고, 그로써 세계 각지에서 신분제를 철폐하며 군주가 아니라 ‘국민’에 주권을 귀속시킨 민족/국민국가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본래 성당으로 건축되었던 파리의 팡테옹(Panthéon)이 프랑스 혁명 이후 1791년 사회에 공헌한 시민들을 안치하는 묘지이자 기념관으로 용도 변경된 것은 기념비의 근대적 전환이 이뤄지는 최초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1858년 세워진 덴마크의 ‘용감한 보병(Den tapre Landsoldaten)’ 기념비5,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어간 자국 군인들을 추모하고자 1920년 영국과 프랑스가 동시에 개장한 이후 각국이 뒤이어 비슷하게 채택한 전몰자 기념비(The Cenotaph) 및 무명용사의 묘(The Unknown Warrior; Tombe du Soldat inconnu) 등이 연이어 건립되었으며, 이는 국민주권의 이념이 ‘기억할만한 것’을 재조정한 사태라 해도 좋다. 물론 그 실질적 기능은 일상적 의례나 국가적인 기념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체적 유대를 확인하는 장소라는 데에 있는 만큼, 전근대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기념비를 통한 국가의 자기비판
그러나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근대국가가 공화주의에 의거하여 국민주권을 표방함으로써 민의의 대표자들은 각 사회 세력의 역학에 따라 교체되는 경향이 생겼으며, 정부의 실정(fault)을 영원히 덮어 가릴 수 없게 되었고,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참사 등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그 사상과 신분과 무관하게 동일한 ‘국민’으로서 예우해야 하는 항상적인 압력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의 자기비판을 추동하는 기제가 되었으며, 국가 스스로가 기념비를 통해 자신의 치부를 기억하며 드러내고 봉합하는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근대 이후의 기념비가 지니는 종별성(specificity)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2007년 미국은 17-18세기에 걸쳐 뉴욕 정착지 변두리에 형성된 약 2만여 명 흑인들의 잊힌 무덤에 ‘아프리카인 매장지 국립 기념비(African Burial Ground National Monument)’를 세웠는데, 흑인들의 유해가 발견된 그 터는 현재 맨해튼 중심부로, 도시 내 교회 공동묘지에 흑인을 매장하는 것이 불법화되자 당시 마을 외곽의 황야에 전용 매장지를 만든 것이었다.6 리틀빅혼 전적지 국립 기념비(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 역시 본래는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미 육군 제7 기병 연대 병사들을 기리는 것이었으나, 2003년 인디언 추모비(Indian Memorial)를 추가로 설치하며 희생된 원주민 전사들을 함께 추모하게 됐다.7
1995년 일본 역시 지방 정부 수준에서나마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을 설치하여 일본군과 오키나와 시민들을 비롯, 강제 동원 등으로 희생된 조선인, 대만인, 미군, 영국군 등 2차 대전 막바지의 오키나와전투에서 희생된 20여만 명을 기리는 기념비를 제작했으며,8 한국은 미군과 군경에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을 추모하는 위령탑과 기념조형물을 2002년 제주 4·3 평화공원에 설치했고, 2004년엔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학살된 수백 명의 거창 시민을 애도하는 위령탑을 거창사건 추모공원과 더불어 건립했다. 그 밖에도 1997년 준공된 국립 5·18 민주묘지 내 5·18 추모탑과 더불어, 2016년 개관한 인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의 추모탑, 곧 완공될 안산 4·16 생명안전공원 내 세월호 추모비, 현재 협의 중인 이태원 참사 추모시설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잘못의 기억을 실질적으로 되새김질하는 것과 무관하게 건축적/미학적 프로젝트로 손쉽게 청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나,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 혹은 공화주의의 내적 모순에 따라 근대적 기념비의 스펙트럼에 성찰과 반성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가미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기념비란 국가 이성의 성숙도와 진보 단계의 실체를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지표라 해도 좋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 국가의 정신적 실체는 무엇을 어떻게 기념하는지로 평가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셈인데, 이는 본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 ‘미래를 예비하는 곡의 서주’가 잘못(fault)에 대한 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변증법적 과정이 기념비를 매개로 근대 국가 내에 안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 성찰성으로 말미암아 근대 이후의 기념비는 반성을 허용치 않았던 전근대의 기념비와 달리 일종의 열린 공간이 되고, 본격적인 전장(battlefield)으로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기념비의 관성과 솟아오른 기억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전근대와 근대를 관통하며 변하지 않아 온 기념비의 양상이라 할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언가 거대하고, 단단하며, 높이 솟은 것을 통해 특정한 과거의 사태를 보편적인 상징으로 표상하며 기억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예컨대 5.18 추모탑은 시민군들을 리얼리즘적으로 재현한 거대 청동부조와 더불어, 신성한 영역과 속세의 경계를 표시하는 당간지주를 상징하는 높이 40미터의 각진 두 기둥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높이 솟은 양 기둥의 중앙에 부활을 상징하는 알이 놓여 있다. 한편 거창사건 위령탑은 당시 국군에 죽임당한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 돔 사이로 18미터 곡선형의 원뿔 모양 기둥이 솟아 승천하는 영혼을 상징하는 식이다.


물론 그 강조된 수직성과 기하학적 추상성 등은 모더니즘적 기념비의 특성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나, 경외감을 자아내거나 즉자적인 감각적 압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고대 피라미드의 양상으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은 셈이다. 감각적 압도와 더불어, 여기서 우리는 조형물과 언어가 별다른 오차 없이 1대 1로 대응 관계를 이루는 구도를 볼 수 있으며. 일체의 모호함 없이 직관적으로 명징한 테제와 같은 심상을 얻게 된다(“우리가 잘못했으므로 가여운 영혼들이여, 이제 부활/승천하소서”). 그리하여 전국각지의 기념비를 서로 바꿔 각 장소에 설치해도 큰 무리가 없게 된다.
이 같은 형상은 기본적으로 교육 여부와 무관한 보편적인 인간의 직관에 호소하는 기념비의 본질적 관성에서 연원하지만, 상당 부분은 잘못 앞에서의 숙연함을 생성하기 위해 침범될 수 없는 숭고(sublime)를 자아내는 쉬운 방법을 채택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함에서 연출되는 숭고는 잘못된 과거의 사태 자체에 착근된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념비를 통해 잘못을 성찰하겠다는 최초의 동기가 무색하게도 어느 정도 과시적이며 다소는 공격적이다. 관성적인 기념비적 실천은 신민에 대한 복종심을 고취하고 성찰 없는 동원을 위해 세워진 전근대적 기념비와 그 형상의 측면에서 일정 부분 겹친다. 이는 역사적 사태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역사 다원주의나 수정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기념비가 사회적 기억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만큼 첨예한 숙고와 기능을 담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기념비의 스테레오타입인 거대하고 수직적이며 단단한 물성은 사회적으로(혹은 ‘대타자’에 의해) 욕망되는 모든 ‘긍정적인’ 속성을 표상하는바, 따라서 라캉(Lacan)적 의미에서 남근(Phallus)적인데, 그와 같은 남근적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 역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의 왕도라기에는 이미 그 희생자들 자체가 지배자들-남근의 역사적 대리자들에 의해 스러진 자들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같은 통상의 기념비 생산 양태는 국가가 다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겠다는 설립 동기뿐만 아니라 그 형태에서까지 성찰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자각을 예비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반기념비’적 실천으로 표현되어왔다.
반기념비 담론의 계보: ‘Gegendenkmal’에서 ‘counter-monument’까지
독일어로 ‘반기념비’를 가리키는 ‘게겐뎅크말(Gegendenkmal)’은 2차대전 이후 독일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과거사 청산 작업과 기억 전쟁의 독특한 산물이다. 1960년대를 거쳐 과거 독일 제국과 나치 시절의 전쟁기념비들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며 독일의 비판적인 시민들은 상기한 기념비의 특성으로부터 파시즘의 흔적을 읽어냈는데, 이 같은 맥락에서 함부르크에서는 1차 대전 참전군인들이 세운 제76보병연대 전몰자 기념비가 문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전쟁기념비의 존치를 둘러싼 논쟁은 과거의 기념비를 치워 없애기보다, 해당 기념비를 재맥락화하거나 그것이 표방하는 이념에 반하는 ‘대항적 기념비’를 세우는 방향으로 정리되었고, 이에 1970년대 후반 실질적으로 반기념비의 구상이 논의되기에 이른다.9
그리하여 “반기념비(Gegendenkmal)”라는 용어가 공식 지면에 등장한 시기는 최소한 1982년 함부르크 당국의 공모전 문서로 확인되며, 이후 참여 작가로 최종 선정된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조각가 알프레트 흐를리츠카(Alfred Hrdlicka)의 작업 「함부르크 화재폭풍(Hamburger Feuersturm)」(1985)과 「카프 아르코나 탈출자 집단(Fluchtgruppe Cap Arcona)」(1986)이 설치된 직후 1987년 이뤄진 미술사 연구자 디트리히 슈베르트(Dietrich Schubert)의 비평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언급된 바 있다.1011 이러한 조건에서 1989년 미술사학자 페터 슈프링어(Peter Springer)는 기존 기념비의 인근에 설치됨으로써 그것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며 기념물과 장소의 의미를 새로 쓰는 실천을 “반기념비”12로 이론화했고, 다양한 반기념비의 사례들을 발굴했는데,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문제적 기념비와 공간을 점유하는 새로운 기념비를 통해 단일한 기억의 장소를 비판적으로 이중화하는 변증법적 과정 자체다.13

한편 홀로코스트(Holocaust)14 연구자 제임스 영(James E. Young)은 이 같은 용례를 확장해 전통적인 기념비의 특성을 전복하는 기념비를 “반기념비(counter-monument)”로 호명하여 본 개념을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시켰다. 영에 따르면 반기념비는 전통적 기념비의 영속성, 영웅주의, 명확한 메시지 등을 거부하는 동시에 사라지거나 변화하며, 관객의 해석과 참여를 강조하는데, 그는 대표적 사례로 함부르크 하르부르크 구에 설치되었던 「반파시즘 기념비(Mahnmal gegen Faschismus)」(1986-1993), 베를린 노이쾰른의 「존넨알레 강제수용소 기념비(Denkmal für das KZ Sonnenallee)」(1994), 독일 카셀 시청 광장의 「아슈로트 분수(Aschrottbrunnen)」(1987) 등을 꼽는다.15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는 요헨 게르츠(Jochen Gerz)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Esther Shalev-Gerz)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시민들의 왕래가 많은 번화가에 설치되었는데, 최초에는 1미터 두께에 12미터 높이의 알루미늄 기둥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둥의 표면은 시민에게 개방되어 독일의 과거에 관한 소회를 적을 수 있도록 했으며, 표면이 가득 찰 때마다 기둥을 지하로 내려보내 이후 8년에 걸쳐 최초의 기념비 형태를 지워냈다. 그리하여 오늘날 관객은 다만 기념비가 있었던 흔적만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기념비가 매개하는 기억의 과정은 빠른 결론을 내놓기보다 운동성과 숙의 과정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한편 노르베르트 라더마허(Norbert Radermacher)가 제작한 「존넨알레 강제수용소 기념비」는 거리가 어두워지면 조건부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 형식이 보행자를 감지하는 센서를 통해 행인의 발치에 해당 장소의 과거 이력을 적시한 프로젝터를 투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동원이 일어났으나 현재는 어떤 관련 흔적도 남지 않은 존넨알레 거리 위로 과거 강제수용소에 대한 정보를 담아 투사되는 빛은 여타의 지표 없이 장소에 얽힌 기억을 소환하길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념비의 함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빗겨 간다. 또한 그것은 기념비가 그 직접적인 형상의 부재를 통해서도 기억의 임무를 촉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슈로트 분수」의 경우 본래 유대계 사업가 지그문트 아슈로트(Sigmund Aschrott)가 카셀 시청 앞에 기증한 12미터 높이의 피라미드형 분수였으나, 1939년 나치에 의해 ‘유대인 분수’라 불리며 파괴된 것이었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이 분수를 다시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호르스트 호하이젤(Horst Hoheisel)은 원본 분수의 형상을 복원하되, 그것을 그대로 설치하는 대신 음각으로 땅을 파 묻어버렸다. 그리하여 관객은 부활한 분수 앞에서 다만 지하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는 독일 그 자신이 부순 분수를 그대로 복각해 내기보다, 그 분수가 없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현대 독일의 태도로서 바람직하다는 첨예한 추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역시 기념비의 현전(presence)을 무화하면서도 실로 철저한 기억에 가닿는 흥미로운 예시를 보여준다.
대략 이 같은 구도로 제기된 제임스 영의 비평은 이후 수십 년간 비판적 연구자들이 자국의 ‘반기념비’를 조명하거나 반기념비의 세계적 전개를 추적하는 흐름을 형성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람직한 기념비가 가져야 할 논리적 성찰성과 그 형식을 어느 정도 규명해냈다고 해도 좋다.16 그러나 제임스 영에 의해 호명된 ‘반기념비’란 기존 기념비 실천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머물기보다 참여>관조, 과정>실체, 부재>현전 등 전범적(exemplary)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사회적 기억의 문제를 그 실제 양태와 무관하게 미학화하는 측면 역시 없지 않다.
반기념비라는 기념비, 혹은 기념비의 현대미술화
독일의 반기념비 방법론이 담론 고관여층에게 일종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경향을 탈신비화하기 위해서는 반기념비가 조형물이 매개하는 감각을 비판적으로 연구해온 현대미술 전통에서 제작된 기념비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편이 좋다. 실로 그것이 종래의 기념비와 달리 체험의 구체성과 성찰성, 반직관성, 일시성 등을 강조하는 것은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퍼포먼스 방법론의 변주에 가깝다. 예컨대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는 형상의 측면에서 미니멀리즘(단순한 사각의 기둥), 관람의 차원에서 퍼포먼스로부터 비롯한 참여미술(글과 낙서 등을 통한 관객의 개입), 효과의 측면에서 개념미술(‘사라지는 기념비’라는 역설적인 심상)의 복합체라 해도 좋으며, 아슈로트 분수의 경우 ‘부재의 복원’이라는 아이디어를 전면화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의 범주로 확실하게 소급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기념비에 관해 오늘날 반기념비 옹호자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때로 전통적인 구상 조각가들에게 현대 조각가가 갖는 우월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과연 그와 같은 낡고 진부한 조형언어로 X라는 첨예한 주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해 반기념비에서 발견되는 형상의 모호성, 조형 언어적 기표와 그 기의 사이 거리의 이격, 표상에 결합된 관습적 의미(상징) 대신 작품에 부여된 자체의 내적 논리(알레고리)의 강조 등은 ‘기념비의 현대미술화’로 치환할 수 있는 만큼, 그 자체로는 그다지 부러워하거나 모범으로 삼을 것이 없다. 오늘날 현대미술이란 일정한 조건 속에서 적당한 훈련만 된다면 그저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대적 현실성을 담보하는 데서 전자메일이 유효한 수단으로 대두되었다 한들 그것이 손편지에 대한 우월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기념비의 영역에서 특정한 양식이 최신의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억 문화의 왕도를 보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같은 반기념비가 따라야 할 전범으로 성립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기념비화되는 모순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외려 중요한 것은 반기념비 실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여러 다른 기억의 전장과 연동된 형세이며, 어떤 잘못에 관한 기념 자체를 가능케 한 물질적·문화적 조건과 투쟁, 나아가 기억의 재생산과 전이(transference) 자체가 사회 전 영역에서 어떻게 관철되는지의 여부다. 이 본질을 잊는다면 반기념비 실천이란 모호하고 세련된 조형언어로 포장된 현대미술식 엘리트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기억 전쟁에 관한 한, 특정한 양식의 기념비 유무를 셈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지점을 살피는 것이 외려 더 적확한 태도임은 명백해 보인다. 요컨대 과거의 잘못된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시민교육 등이 잘 이뤄지는가?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과 재활의 지원은 충분한가? 나아가 타자에 대한 배척과 대량학살을 추동하는 일체의 조건에 비타협적으로 대응하는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사회 전체의 일반의지가 과거 잘못의 반복 불가능성을 장담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잘 만들어진 반기념비를 초과하는 지평에 자리하는 구체성을 파악할 것을 전제한다.
독일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과거사 청산의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되지만, 그것은 비교적 최근 시민교육과 법제도라는 일부 영역에서 만들어진 신화에 가깝다. 세간의 피상적인 인식과 달리 독일에서 나치 전범들이 처벌되는 일은 동독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서독 엘리트들의 반성 부재에 더해, 서독지역을 점령한 소련 이외 연합국들(미국, 영국, 프랑스)이 체제의 반공적 관리를 위해 우익 엘리트들을 지원한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전후 1949-1963년에 걸친 아데나워 총리 시절, 서독 정부는 연합국들의 묵인과 방조에 힘입어 경제 재건과 사회 통합을 위해 나치 경력자들을 대거 사면하고 공직에 복귀시켰다. 정부, 법조계, 군부 등 사회 요직에서 나치 전범들에 의한 관리 체제가 그대로 이어졌으며, 이 같은 흐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나치에 부역한 구세대가 경제의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나치 역사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주로 1940년대생들로 이뤄진) 68세대가 부상했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세대론적 ‘패러다임 전환’처럼 제기될 수 있었다.17 한편 탈나치화가 한갓된 비판을 넘어 실효적인 사회적 조치로 관철되는 시점은 그보다도 늦었다. 68세대가 30-40대 언저리에 접어들어 사회 전 영역에 포진해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70년대 말경 제정된 법률과 교육과정 등을 통해 ‘반성적 시민교육’은 뒤늦게나마 확보되었으나,18 그것은 이미 나치 집권으로부터 40-50년이 흐른 뒤의 시점으로, 나치 범죄의 온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더불어 독일은 나치 집권 이전 아프리카 등에서의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에서의 학살에 대해서는 2021년 전까지 사실인정조차 하지 않았을뿐더러, 인정 이후에는 ‘법적 배상’ 대신 ‘일부 피해국에 대한 개발 원조’로 입장을 우회함으로써 과거 식민지 국가들의 집단적 청구 가능성을 차단한 바 있다.19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이 막대한 규모로 다시금 자행되어 국제적 공분과 경악을 낳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이뤄지는 독일의 대이스라엘 무기 판매는 어떤가? 독일은 이스라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는 데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차지해왔으며, 2003년 이후 20년간의 수출량만 해도 38억 달러(약 5조 1753억 3400만원)에 이른다.20 이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미·독일의 오랜 중동정책과 병행한 것으로, 미국과 유럽 등의 집단 서방이 중동 역내를 관리하기 위해 지원해온 높은 백인 비율의 제국주의적 병참국가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인종주의적 진실을 동시에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호전성은 서방의 지정학적 이해와 분리될 수 없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적 지배와 학살이 지속되는 물질적 조건 역시 이 같은 국제적 군사·정치 동맹의 구조 속에서 재생산되어왔다. 말하자면 독일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통해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도록 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맡아왔다.
이 지점에서 반기념비란 다만 기념비가 현대미술의 방법으로 표현된 것일 뿐 그 이상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다지 과도한 격하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담론 고관여층이 반기념비에 대해 부여하는 후광은 오히려 독일의 과거 잘못을 덮어 가리거나 미화하는 알리바이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타자에 대한 절멸적 폭력을 가하는 실체적 힘 자체가 철저히 반성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반기념비는 현재로 도약하지 못한 채 고립된 과거 모순의 상징적 해소에 불과하며, 기억 전쟁을 둘러싼 여타의 사회적 조건을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지 않는 한 반기념비는 전근대의 기념비와 마찬가지로 물화(reification)와 신화화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21 그러나 반기념비가 신화가 되는 순간 나치 독일의 악의에 대한 반성은 피상적이고 쿨한 지적 유행이 되어버림으로써 기억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역사적 승자들의 틈새 취향을 만족시키는 니치한(niche) 전리품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기념비의 방법론은 선진적인 기념문화와 과거사 청산을 보증하는 백지수표가 될 수 없으며, 조형물에 기억을 부과하는 하나의 수단 정도로 이해되는 것이 적당하다. 이는 반기념비 실천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한계와 자기만족, 역설적 위험에 관한 진단으로, 따라서 우리는 그 같은 비판적 조형물을 만들수 있는 작가들에게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로써 역사의 회복이 곧바로 이뤄지진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이 같은 비판은 다만 독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모범적 반기념비 사례로 꼽히는 마야 린(Maya Lin)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1984)는 하늘로 솟구치는 대신 대지에 상처를 내듯 지면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 들어가는 누운 V자 형태의 검은 화강암 구조물을 통해 베트남 전쟁이 미국 사회에 남긴 슬픔과 과오를 암시하는 탈권위적 기념비로 언급되나, 희생자들을 위무하다가도 우리의 논의가 그 같은 기념비 자체에서 멈출 때, 그것은 명분 없는 제국주의적 전쟁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다 끝내 정신병에 걸린 람보(Rambo)들을 자신의 후광으로 가리지 않는가? 이때 남는 것은 예술가의 이름과 소극적 과시성을 띠는 한 사회의 한갓된 양심, 진보한 현대미술의 수준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한국에 고도화된 반기념비는 없으나 맹아 형태의 반기념비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 사례를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백비」, 원지호의 「미리 지어진 전쟁기념물」 등에서 찾는 전진성의 연구는 기념비의 양식적 비판이라는 차원에서는 제기될 수 있으나 한 사회의 기억 문화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데서는 본질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22 그는 고전적 기념비에 “기념비적 역사”를, 반기념비에 “민주적 기억문화”를 대입하여 양자를 대비하고 있으나(“기념비적 역사에서 민주적 기억문화로,” 즉 ‘고전적 기념비에서 반기념비로’), 앞서 상론했듯 반기념비가 그 자체 기억 문화의 진보성을 확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같은 대비는 다기한 기억 전장의 형세를 한갓된 기념비의 형상으로 소급하여 사태를 단순화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나는 물화된 (반)기념비의 외부에서 한국 사회에 고유한 기억 전쟁의 전선(battlefront)을 더듬어보며 그 전장의 형세를 가늠해보길 권한다. 기억과 관련된 전쟁과 그 양상 및 결과는 기념비의 영역을 초과하는 실재로부터 표현되며, 하나의 기념비에서는 좀처럼 감지하기 어려운- 기억하는자들 사이의 역관계(power relation)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는자이며, 기억을 둘러싼 거대한 흐름과 배치 속에 놓인다. 기념비는 다만 그 속에서 미세한 결절점을 표지할 따름이며, 물화되지 않는 기억의 역동(dynimics)이 그때그때 드러내는 역관계야말로 신화화된 반기념비들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를 간략히 조망하기 위해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을 집약해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거의 사건으로서 5.18 광주 민중항쟁과 4.3 항쟁을 가로지르는 기억의 전장을 살피기로 한다.
무(無)기념비의 5·18 망월동 묘지,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앞서 언급했듯 이른바 ‘신(新)묘역’으로 알려진 광주 북구 운정동에 위치한 국립 5.18민주묘지의 추모탑만으로 5.18 광주 민중항쟁을 둘러싼 기억 문화를 평가한다면 우리는 다만 고전적 기념비의 납작한 심상만을 얻게 될 것이나, 5.18의 기억은 바로 인근 수곡동에 자리 잡은 ‘구(舊)묘역’에 보다 생생하게 착근되어 있다.23 ‘망월동 묘지’ 혹은 ‘망월묘지공원’으로도 알려진 구묘역은 5.18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본래 안장되었던 시립묘지가 위치한 장소로, 구묘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전두환 부부의 방문 기념비가 눕혀진 채 땅에 박혀있다.

본래 이 기념비는 전두환 부부가 1982년 3월 광주 인근의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흉흉한 민심으로 인해 한동안 숨겨진 채 보관되다, 이후 전두환 비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광주·전남 시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1989년 1월 13일 완전히 부서졌다.24 파괴된 기념비는 그 직후 망월동 묘지로 옮겨져 시민군의 무덤들이 내려다보는 묘역 입구의 바닥에 깔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묘역의 방문객들은 참배를 위해 오가는 중에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움직여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의 이름을 밟는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서 5월 광주의 기억은 높이 솟은 것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학살 책임자의 이름과 그 기념비를 밟고 나아가는 수행을 통해 재생된다. 달리 말해 구묘역에는 어떤 기념비도 세워져 있지 않지만, 그 땅을 기꺼이 밟기로 한 그 순간에, 어떤 기념비보다 강렬한 기억의 재생산 과정이 상연되는 셈이다.

한편 땅에 파묻힌 비석 근처에는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비석을 짓밟고 가달라”25는 문구가 적시되어있는데, 이는 앞서 인용한 발터 벤야민의 인용문(“모든 지배자는 이전 정복자들의 상속자들이다. (...)승리를 거둔 자는 누구든 오늘날까지도 개선(triumphal) 행렬에 참여하며, 그 행렬에서 현재의 지배자들은 쓰러져 누운 자들을 밟고 지나간다.”)과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역사 혹은 기억 전쟁을 관통하는 전복적인 시적 진리를 펼쳐 보이는 듯하다. 실로 이 장소는, 지배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밟고 지나가며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과거 승자의 잘못에 대한 분노로 그들을 뒤쫓아 끝내 그들을 눕혀 죽음의 역사를 밟고 나아간다는 의미를 수행적으로 달성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망월동 묘지는 반기념비 없이도 승자에 의해 쓰인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거부하며, 승자의 전리품인 바의 기념비의 권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어떤 반기념비보다 반기념비의 정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억 전쟁에 관한 한, 기념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5.18의 현재적 재현을 두고 벌어진 스타벅스 사태, 배제고 사건 등에서 시민사회가 보여준 대응 능력 등이 더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기념비 자체야 어찌 됐든 5.18 광주항쟁에 관한 기억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980),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 「깃발」(1988), 「봄날」(1997), 「오래된 정원」(2000), 「소년이 온다」(2014) 등의 5월 문학, 「황무지」(1989), 「꽃잎」(1996),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등의 영화, 유족회 주도의 5·18 추모제(1981-), 시민사회 주도의 5·18 전야제(1988-), 정부 주도의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1997-), 청년 주도의 5·18 청소년문화제 레스페스타(2004-) 등의 다기한 추모·기념행사, 커뮤니티와 뉴스의 댓글 창, 참배객들의 수행적 실천을 아우르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형성된 헤게모니에 의해 보완되기 때문이다.
앞서 열거한 수많은 문화적 실천들이 암시하듯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5.18은 비교적 의식화된 기억으로 자리 잡은 편에 속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절한 기억 전쟁의 결과다. 신군부에서 유포한 북한개입설과 김대중 배후설 등이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정설로 통용될 만큼 5.18은 수세적인 국면에 놓여 있었고, 학생운동 세력과 재야의 진보적 시민사회를 제외하면 5월 광주의 참상은 사실상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항거한 광주의 평범한 시민들은 십수 년간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 “폭도”로 표현됐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1994년에 이르러서야 광주항쟁의 당사자들은 신군부를 내란 및 살인혐의로 고소할 수 있었으나, 1995년 7월 검찰은 그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에 맞춰 신군부의 집권을 ‘고도의 정치적 변혁행위’로 간주하여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폭발한 여론을 동력으로 삼음으로써만 당시 국회는 5.18 특별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고, “12·12사건 및 5·18사건”에 대한 특별수사와 재판을 통해 1997년 최종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5.18’이란 박정희 사후 기회를 틈타 1979년 12.12쿠데타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국회를 폐쇄하고 야당 정치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려 하자 그에 맞서 항쟁한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 계엄군과 충돌한 사건을 가리킨다는- 지극히 건조한 사실이 한국 사회의 공통감각이 되는 데는 약 20년에 걸친 전쟁이 필요했다. 그 결과 우리는 ‘광주폭동’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기억을 얻은 셈이다.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교착(stalemate)
5월 18일이 광주폭동 혹은 광주사태가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우리의 기억에 자리 잡은 것은 바람직하다. 그로써 희생자들은 망월동 묘지 인근에 조성된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되었고,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80년 5월 광주가 다만 ‘민주화운동’이라는 기표에 정박될 수 있겠는가? 계엄군에 의한 전체 도시의 봉쇄 속에서도 일체의 약탈과 소요 없이 질서를 이룬 고도의 시민성, 식량이 부족한 와중에도 이어진 주먹밥의 나눔과 부상자를 위한 헌혈 대열을 만든 연대와 자율성, 막대한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정의에 대한 감각의 그 모든 순간은 한갓된 ‘민주화’를 한참 초과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5월 광주가 ‘민주화운동’으로 소급되어 기억되는 것은 5.18을 둘러싼 기억 전쟁의 성취임과 동시에 동시에 우리의 전선(battlefront)이 고착된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5.18이 제6공화국, 즉 87년 체제를 완성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시원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온건한 영역에서만 기억되는 것은 90년대를 거쳐 한국 사회의 주류로 부상한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를 표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전쟁이 더 나아가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것은 87년 체제를 부수고 다시 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시민군이 일견 명시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적 경향을 보였는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5.18이 내재적으로 지닌 급진성 때문이다. 그러나 5.18의 기억을 전유한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는 삼권분립을 견지하며 자본축적과 체제안정을 비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도모할 뿐,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개인의 소비할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이상 그 밖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는 데에 있다.
문민정부 이후 집권세력으로서 역사의 승자가 되자마자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영삼 정부는 5.18 특별법을 제정한 데 이어 1997년 5월 18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며 정부 주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는 5.18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법률을 통과시켰으나, 그것은 신군부를 비롯한 군사독재 잔당의 정치적 숨통을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틀어쥘 명분으로 5.18을 채택한 것에 가까웠다. 1995년 구속·기소되어 1997년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17년을 선고받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 임기 말 김영삼의 사면과 대통령 당선인 김대중의 동의하에 불과 최종심 확정 8개월 만에 “IMF 위기 속 국민 대화합”이라는 기묘한 명분으로 사면된 것은 그와 같은 자유주의 세력의 ‘5.18의 전유’를 압축해 보여준다.
그들이 5.18을 ‘민주화운동’에 가둔 이유는, 자유주의의 프레임에서 5.18이란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유화 등으로 대표되는 87년 민주화를 달성하는 조건에서만 의미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 해도 좋다. 1988년 여야합의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꾸려진 이후,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어 199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제정되는 순간까지 꾸준히 덧입혀진 ‘민주화’라는 기표는 5.18의 불온한 반란적 성격, 즉 ‘민중항쟁’으로서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밀어낸다. 그로써 고도의 자치를 이루며 국가에 맞선 절대적 공동체와 더불어, 시민의 자유와 자율을 파괴하는 권력에 대립하여 봉기할 권리를 제 원리로 갖는 공화주의의 근본적 실체가 드러난 진리의 순간은 지워지고, 5.18의 기억은 다만 ‘민주화’로 나아가는 도정에서의 고결한 희생 정도로 윤색된다.
앞서 언급했던 망월동 묘지에 파묻힌 전두환 기념비가 민주당계 정치인들의 선거철 ‘포토 스팟’이 된 것은 이 같은 교착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후보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 문재인 전 대통령, 이낙연 전 국무총리, 김동연 전 경기도지사,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등 무수한 정치인들이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인증샷을 남기는 것은 5.18이 대한민국의 국가 이성에 자리 잡은 진보의 표징인 동시에, 비석 밟기를 우회하는 국민의힘 등 수구 우익을 ‘적당히’ 견제하는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의 기술적(technical) 수단이며, 한편으로는 ‘민주화’로 채색되어 안전하게 거세된 5.18의 기억을 관철하는 기억 전쟁의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기념비를 밟는 것 자체도 그리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념비를 밟는 행위가 어떤 기억을 재생하느냐는 것이고, 5.18의 어떤 부분을 현재의 순간으로 생생하게 길어오는지의 문제다. 실로 망월동 묘지의 바닥을 밟는 순간은 ‘민주화 영령’에 대한 감사를 넘어, 역사적 승자들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일순간 학살 기계로 변모하는 국가장치의 억압적 성격에 대한 경계, 역사의 밑바닥에서 산화한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와 연민, 군사독재를 정당화한 분단체제와 한국의 반공주의적 태생에 대한 발본적 자각으로까지 전개되길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5월 광주에 대한 보다 충실한 기억인바, 민중항쟁으로서의 5.18을 재생하는 일이다.
현재 망월동 묘지의 비석이 무수한 참배객들의 발길로 닳아 없어지는 가운데, 지역 사회에서는 비석의 ‘전두환’ 글자 보존을 위해 유리를 덮는 안, 새로 보강해 이름을 선명히 하는 안, 닳아 없어질 때까지 두자는 안 등이 각축하며 5.18의 기념비 아닌 기념비를 ‘기념비화’하는 논의가 한창이다. 그 결론이 어디로 향하든 그것은 광주의 기억을 충실하게 떠올리는 순간에 가닿는 계기로서만 중요하며, 5.18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사건’으로서의 4·3과 ‘대한민국’의 부정성(negativity)
한편 5.18에 비하면 4.3은 한국의 국가 이성에 전혀 안착하지 못했다. 1948년이라는 그 명시적 출발점으로부터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2000년에 이르러서야 특별법 제정에 따른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특별법상 명칭 역시 ‘제주4·3사건’이라는 건조한 이름으로 고착됐다. ‘4·3희생자 추념일’이라는 이름하에 국가기념일 제정이 이뤄진 시점은 그로부터도 한참 지난 2014년이었다. 달리 말해 한국은 오랜 시간 4,3을 피해왔다. 그러나 4.3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한국의 기억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장을 형성한다. 5.18이 ‘민주화’라는 기표로 한국 사회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면, ‘사건’으로 격하된 4.3은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형성한다고 해도 좋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위치한 백비는 그와 같은 한국의 망설임과 주저함, 망각을 반영하는바, 어떤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덩그러니 놓여 자신의 적확한 이름을 부여받길 기다리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백비가 놓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은 바위 동굴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4.3 당시 미군을 비롯, 대한민국 국군 및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로 이뤄진 토벌대를 피해 제주 각지의 동굴로 피신한 시민들의 발길에 이입하게 한다. 한편 백비를 둘러싼 공간은 원통형으로 높이 솟은 채 뚫려 있어 자연광이 비치지만, 그 방 자체의 막대한 깊이로 인해 참배객은 높은 데서 비쳐오는 빛을 다만 바라만 볼 뿐, 바깥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지하에 갇힌 듯한 심상을 갖게 된다. 4.3 당시 동굴 밖의 빛을 바라보며 죽어간 제주 시민들의 감각과 더불어, 4.3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인지적 지체를 이보다 충실히 재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세련된 ‘반기념비’의 특징을 충분히 공유하며 현대미술적으로 정합적인 내재적 의미를 담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기억 전쟁에서 4.3이 당도한 국면 자체다.
그렇다면 4.3은 왜 ‘사건’으로 성글게 봉합된 상태로 방치되며, ‘항쟁’은커녕 ‘운동’으로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4.3의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26
1948년 4.3의 시원은 그로부터 약 1년 전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념식 직후 기마 경찰이 말로 어린이를 치고도 아무런 조치 없이 떠나자 분노한 시민들은 사과를 요구하며 경찰을 쫓았으나, 이를 폭동으로 간주한 제주경찰서 대원들이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하여 십수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경찰의 느닷없는 발포는 일제에 불복하는 ‘불령선인’들을 무자비하게 분쇄했던 일본 제국 경찰의 기풍 하에 ‘정당방위’로 선전됐고, 그에 맞서 좌파 성향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주도로 3월 10일 압도 다수의 제주 시민들이 참여한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에 미군정은 경찰 지원 병력과 우익 단체들을 대거 파견해 파업 가담자 수천 명을 체포 및 구금하며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급기야 고문으로 시민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렇게 1947년 초부터 시작해 약 1년에 걸친 탄압 끝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서와 우익 단체 단원들의 집을 습격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은 실로 5월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 총기를 탈취해 무장한 시민군의 정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제주의 무장대는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등 국내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추진을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동시에, 경찰과 우익 단체들을 앞세운 탄압을 중단하라는 지극히 합당한 요구를 내걸었다.
그러한 대치 과정에서 5.10 남한 단독선거가 강행되었으나, 흉흉한 민심으로 인해 제주 선거구 대부분에서 투표가 무효처리 될 만큼 참여가 저조했고, 이에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 결국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 육지의 군 병력을 대거 투입한 이승만 정부는 무장한 제주 시민들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며 참혹한 학살을 개시했다. 수십 개 마을이 불타 사라지고, 소각된 집이 약 4만 채에 달했다. 그로써 공식 집계로만 최소 약 11000명의 사망자와 4000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으며, 집계되지 못한 실제 규모로는 3만여 명의 죽음이 추정될 만큼 가공할 폭력이 자행됐다.27 희생자들의 유족은 가장 보수적으로 추산된 것이 약 10만 명에 이른다. 1949년 초까지 수개월에 걸친 학살 끝에 당국은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을 회유하여 사면을 약속하며 하산을 유도했으나, 군을 믿고 내려온 시민들은 곧이어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과 더불어 ‘보도연맹원’ 혹은 ‘입산자 가족’으로서 모조리 학살당했다. 여기까지가 4.3이 전개된 대략의 경과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 같은 4.3의 경과 자체가 한국이 4.3을 ‘사건’으로 정박시키려는 이유를 보여준다. 요컨대 4.3은 일제로부터 형성되어 청산되지 않은 경찰 등 관료 엘리트들의 연속성,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대중적 열망을 분쇄하고 남한 단독선거를 진행한 우익 정치세력의 탐욕, 건국 초기부터 무자비한 폭정으로 시민들을 학살한 대한민국 국가장치의 정통성 부재를 그대로 드러낸다. 더불어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온전한 공화국으로 설 수 없음을 명시했고, 그로써 1948년 7월 17일 공표된 제헌헌법에 적시한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절을 그 뿌리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대중적 흐름이었다. 따라서 4.3을 ‘운동’ 혹은 ‘항쟁’으로 인정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그 자신을 최초의 순간부터 부정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헤겔(Hegel)식 표현을 빌자면, 4.3은 대한민국의 가상적 완결성을 그 자체에서부터 무너뜨리는 부정성(negativity)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권력자인 수구 우익은 물론이려니와, 지난 20-30년간 신흥 지배세력으로 대두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2026년 현재까지 78년에 이르는 시간 중에서 약 절반의 시기를 반공 우익 독재국가로 구조화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발본적으로 부정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4.3의 이름을 정하는 데 있어 ‘사건’보다 적당한 것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4.3을 다만 ‘사건’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4.3의 인지적 교착상태를 드러내는 것이기보다, 우익들의 책임 면피, 자유주의자들의 비겁함을 위해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결과에 가깝다고 해도 좋다.
4·3이라는 연속체(continuum)
한편 수구 우익들은 소위 ‘무장대’로 표현되는, 봉기를 일으킨 남로당계 제주 시민들에 의한 피해가 10%를 상회한다는 사실을 들어 제주도민이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4.3의 ‘폭동’적 성격을 부각한다. 반면 같은 이유에서 자유주의자들은 4.3에 ‘항쟁’이라는 이름을 기꺼이 붙이길 주저하거나, 사태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그것이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전부는 4.3의 기억에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본질을 흐리고 있다. 이는 동유럽의 유대인 파르티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소비보르(Sobibór) 수용소 폭동 등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독일의 탄압에 맞서 이뤄진 개별 유대인들의 저항 속에서 독일인들의 인명피해가 심심찮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홀로코스트’의 죄악과 독일의 책임을 희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 과정 당시의 반작용으로 적잖은 독일인이 죽었다 해도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책임이 되는 것이 아니듯, 미군정 및 남한 정부에 의해 1947년 3.1절 기념일부터 시작된 제주 시민들에 대한 학살은 결코 그에 대항하여 무장한 제주 시민들의 책임으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4.3은 미 육군 제24군단이 통치했던 한반도 이남의 군정(military government)과 대한민국의 폭정에 맞서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열망했던 ‘항쟁’이자 그에 대한 ‘학살’이었다는 건조한 사실에 가닿기에는 현재의 전황이 녹록지 않다. 기억의 지배적 표상은 승자의 전유물인바, 어찌 됐든 ‘대한민국’은 승리하여 수십 년째 지속하고 있고, 수구 우익과 자유주의자들의 연이은 권력 교체에도 한미동맹만은 “철통같은” 것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 같은 조건 속에서나마 4.3을 온전히 기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4.3을 넘어-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착근된(embedded) 우익의 연속적 반공학살과 수십 년간 지속된 백색테러의 한 단락을 표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어쩌면 4.3이 다만 ‘4.3’으로 고립되어 기억되는 일 자체가 그것을 ‘사건’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실로 4.3은 미군(정)과 반공 우익 정부가 반공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빨갱이’와 ‘폭도’로 호명된 평범한 사람들을 무수한 시공간 속에서, 그러나 일관되게 학살한 하나의 야만, 하나의 연속적 흐름(sequence)에 놓인다. 그것은 미군정의 실정에 맞서 일어난 대구 10.1 봉기를 향한 살육(1946), 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주도한 여수·순천항쟁에 대한 분쇄(1948), 대한민국 전역에서 ‘사상 교화’를 명목으로 수십만 명을 강제 가입시켰던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학살(1950), 형무소 재소자들의 ‘적 동조’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1950)과 대전 골령골 학살(1950), 피난 중이던 시민들에게 폭탄과 기관총을 난사한 노근리 학살(1950), 빨치산 소탕을 명분으로 실행된 거창 양민학살(1951), 간첩 조작을 통한 진보당 해산과 당수 조봉암에 대한 처형(1958) 등에 통합된 하나의 결절점이다.
그 전 과정에서 미군을 비롯,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은 나치가 부럽지 않을 만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움직였으며, 그 희생자는 추정되는 단순 합으로만 약 30만 명 이상에 이른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이 약 1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역사적 기억에 접속한 이들의 분노가 일본 제국 못지않게 대한민국 그 자체에 돌려지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다.28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의 모국을 향한 한국인들의 발본적인 분노를 보기란 어려운데,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에 새겨진 분단이,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무한 공급의 마취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앞서 언급한 모든 학살과 살육은 그 막대한 규모에도 불구, 분단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다소간의 희생으로 합리화된다. 한반도의 남북전쟁을 ‘6.25 전쟁’으로 기념하며 (공산세력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한 국군 장병’과 ‘호국영령’을 호명하는 만큼,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반공학살의 희생자들은 정확히 후경(background)으로 밀려난다. 이는 원폭 피해를 강조하며 식민지배의 가해 사실을 후경화하는 일본의 관성과 거울상을 이룬다. 이 속에서 4.3이 전체와 분리된 하나의 시점으로 기억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4·3을 고유명으로 상상하기: 데스 밸리(Death Valley)와 백룸 머더(Backroom Murder)
다시금 헤겔(Hegel)의 표현을 빌자면, 4.3을 특수한 지엽적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에 보편을 담지한 개별적 사태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홀로코스트(The Holocaust)가 담론화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 ‘ὁλόκαуστον(holókauston; 홀로카우스톤)’에서 유래한 ‘holocaust’는 본래 ‘완전히 불타버린 제물’을 가리키는 종교적 용어였으나,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대화재’,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재앙과 학살’ 등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 바 있다.29 그렇게 수백 년간 일반명사로 사용되어온 이 개념은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문자로 표기되는 고유명사로 성립했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체를 가리키는 유일한 이름-‘The Holocaust’-으로 격상될 수 있었다.30 당시 미국에서 방영된 4부작 드라마 「홀로코스트(Holocaust)」(1978)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 반응을 끌며 그 같은 용례를 이끌어냈다는 평가가 있으나, 나치에 의한 유대인 피해를 지속적으로 담론화해온 전후 작업의 축적과 더불어 뒤늦게나마 나타난 독일 내 68세대의 청산 의지가 맞물리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는 결코 고유명이 될 수 없었다고 해도 좋다.
그런 점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홀로코스트’로서 고유명이 되어 전 세계 언론과 대중의 어휘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기억 전쟁의 승리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31 본래 나치에 의한 유대인 절멸 정책과 대량학살은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1933년부터 독일이 패전한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뤄진 잡다한 사건과 집행으로 구성된다. 일상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에서부터, 이른바 ‘뉘른베르크법’(1935)으로 알려진 ‘국가시민법’과 ‘독일 혈통 및 명예 보호법’을 통해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과 더불어 유대인과 독일인 간 혼인 및 성관계를 금지한 사태, 나치 돌격대를 통해 독일 전역의 유대인 거주지를 초토화한 수정의 밤(1938), 독일 및 오스트리아 지역 유대인들의 강제수용소로의 이주(1938), 유대인에 대해 다윗의 별 식별표 강제 부착을 시행하는 법안의 통과(1941), 우크라이나 카메네츠-포톨스크 인근 게토에 수감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1941),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통한 가스실 학살(1941),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서의 학살(1942),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의 학살(1942), 이른바 ‘수확축제 작전(Aktion Erntefest)’을 통해 루블린/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와 트라브니키 및 포니아토바 강제노동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수만 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숱한 개개의 고립된 사건들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라는 대문자 기표를 통해 ‘전체’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나치 독일의 죄악을 가리키는 고유명을 향해 일관적으로 소급된다. 이 속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계기는 다만 외따로 떨어진 특수가 아니라, 자신 내부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일체의 죄악과 그에 따른 인간 윤리의 준거를 새로 쓰는- ‘보편’을 담지한 구체적인 개별자로 성립하게 된다. 폴 포트(ប៉ុល ពត;; 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기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을 가리키는 고유명인 ‘킬링필드’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명을 통해서만 잡다한 살육의 집행들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를 구원한다.
반면 4.3은 어떤가? 대구 10.1 봉기에서부터 보도연맹 학살과 진보당 당수 처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단일한 고유명으로 성립하지 못한 채 낱낱의 잡다로 흩어지며, 그로써 어떤 보편적 의미도 산출하지 못하는 특수한 사건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지만 새삼스러운 역사의 교훈을 얻는바, 국가의 잘못을 고유명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은 사회 전 영역에서의 투쟁에 따라 잘못의 주체가 패배함으로써만 달성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와 같은 패배는 이뤄진 적이 없다. 1960년 이승만을 끌어낸 4·19 혁명 직후 제주대 학생들은 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하여 4.3 피해실태를 조사하며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이와 더불어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와 시민들의 운동에 따라 1960년 제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통해 최초의 현지 출장 조사와 피해 신고 접수가 이뤄졌으나, 그 모든 흐름은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인해 일거에 중단됐다. 동시에 군부는 전국각지의 진상조사위와 유족회 활동을 ‘반국가 행위’이자 ‘이적행위’ 및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용공행위’로 규정하며 관련자들을 대거 투옥하고 처벌했다.32 한편 4.3 당시 희생자들을 합동 안장한 제주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를 비롯, 학살 피해자들이 세운 전국의 기념비는 파괴되고, 묘지 역시 파묘되었다(이 같은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적 반기념비’를 논하는 것은 꽤나 사치스럽다).
그렇게 반공학살과 백색테러의 시퀀스는 다만 형태를 달리했을 뿐 꾸준히 전개되어왔다. 유족회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시작으로, 평화통일을 주장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 대한 사형(1961), 인혁당 사건 간첩 조작을 통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 배후 지목 및 처벌(1964), ‘동해안 고정 간첩단 사건’ 등 어업 중 납북되었다 풀려난 어부들에 대한 간첩 조작과 처벌(1969), 유럽 간첩단 사건 조작을 통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1973), 유신헌법에 반하는 여론을 분쇄하기 위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소년학생총연맹) 사건 조작 및 처벌(1974),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을 통한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1975), 유신반대 운동을 이끌던 항일운동가 장준하의 의문사(1975), 민주노조 운동 과정에서 신민당사를 점거했던 김경숙의 추락사 유도(1979), 부산·마산 항쟁에 대한 분쇄 과정에서의 사상자 유발(1979)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끝내 ‘공산 폭도’를 제압하기 위한 전두환의 5.18로 연결되며 반공 우익 집단주의의 ‘거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이른바 ‘한국의 민주화’로 알려진 87년 체제를 통해 반공 집단주의로 조직된 수구 우익에 맞서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대두되었으나, 지난 2024년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이 보여주듯 그들은 다소 억제되어 있을 뿐, 결코 패배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이 적시된 사실이 무색하게도, 2026년 현재까지도 서울 시장에 의해 서울 한복판에 이승만 기념관이 추진되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의 승리를 예증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표현대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억압된 것은 언제나 귀환을 예비하고 있으며, 반공 집단주의는 다만 의식에서 밀려났을 뿐 한국의 무의식에 잠재된 채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복권을 꾀한다고 해도 좋다. 그런 점에서 고유명이 성립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지배세력의 철저한 패배라면, 한국에서 4.3을 비롯한 국가의 잘못은 결코 고유명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4.3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건국 전후로 벌어진 이승만 정부의 대량학살을 ‘데스 밸리(Death Valley),’ 즉 ‘죽음의 골짜기’라는 고유명으로 기억하게 될 날을 맞이할 수도 있다. ‘골로간다’라는- 죽음을 가리키는 한국어 고유의 표현은 주로 산간 지역의 골짜기에서 벌어진 한국의 대량학살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데스 밸리’는 4.3을 소급할 고유명으로서 충분한 개연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국가장치와 사법 기구를 통해 보다 교묘하게 이뤄진 박정희 정부 하의 점진적 학살 역시 언젠가는 ‘백룸 머더(Backroom Murder),’ 즉 ‘뒷방살인’ 내지 ‘밀실살인’이라는 고유명으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백룸’은 건물 뒤편에 있는 방 또는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비밀 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사법살인을 전담한 대공분실(Anti-Communist Interrogation Office)을 암시하는 동시에, 나름의 공을 들여 섬세한 법적 정당성을 조작해낸 반공학살의 고도화된 성격을 충실히 반영한다. 즉 그것은 공안기관의 밀실에서 기획되거나 법적 절차를 가장한 국가의 비공개적 권력 작용으로 행해진 살해의 특성을 포착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유명을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사회 전 영역에서 반공 집단주의를 비롯, 그 이념의 대표자로서의 수구 우익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겨야 하며, 그 승패의 전장은 기억 전쟁과 과거에 대한 해석을 넘어서는 지평에 자리할 것이다.
“기념비를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결국 우리는 각이한 분과와 방법, 실천을 고수하며 고유한 헤게모니적 공간에서의 진지전에 충실하되, 그것 자체의 논리에 매몰되기보다 우리가 매 순간 거대한 전선의 일부라는 사실을 유념하는 편이 좋다. 기념비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기억의 유일한 담지자가 아니며, 기억 전쟁의 총체적인 전황이 가닥 잡힌 후 거의 맨 마지막에 도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세에 따라 어떤 과거는 기억의 대상으로 성립조차 되지 못한다고 할 때, (반)기념비를 실체화하는 논의는 무력해진다. 실로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무엇을 기념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조건 그 자체로 말미암아 어떤 사건은 어떻게 해도 기념비로 기념될 수 없다. 기억과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기념비를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할 것이다.
- 조지 오웰, 『1984』, 정회성 역, 민음사, 2003. 53쪽. [본문으로]
- 같은 책, 53쪽. [본문으로]
- Benjamin, Walter. “On the Concept of History.” Selected Writings. Volume 4, 1938–1940,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 et al., edited by Howard Eiland and Michael W. Jenning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p.391. [본문으로]
- 이하에선 ‘기념비’를 기념물 일체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 덴마크의 ‘용감한 보병’ 기념비는 일반 사병을 다룬 최초의 기념비로 꼽힌다. Erik F. Rønnebech, “FREDERICIAS HISTORIE; Artikler om begivenheder der knytter sig til byens historie” 2008. [본문으로]
- National Park Service. “New York: African Burial Ground National Monument.” National Park Service, 18 Aug. 2017, www.nps.gov/articles/afamburial.htm. [본문으로]
- National Park Service. “Indian Memorial.” 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 23 Apr. 2025, www.nps.gov/libi/learn/historyculture/indian-memorial.htm [본문으로]
- Okinawa Prefectural Government. “「平和の礎」建設の趣旨、基本理念.” 沖縄県公式ホームページ, 21 June 2024. [본문으로]
- 독일의 맥락에서 반기념비가 제기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Claudia Bade, „Für die mutigsten Feiglinge der deutschen Geschichte... Der Hamburger Gedenkort für Deserteure und andere Opfer der NS-Militärjustiz,“ zeitgeschichte|online, 1 Jan. 2016. [본문으로]
- Dietrich Schubert, „Hamburger Feuersturm und »Cap Arcona« – zu Alfred Hrdlickas Gegendenkmal in Hamburg”, kritische berichte, Bd. 15, Nr. 1, 1987, S. 8–18. [본문으로]
- 한편 ‘counter-monument’와 ‘Gegendenkmal’의 개념적 용례를 구분하는 작업으로는 다음을 참고. Quentin Stevens, Karen A. Franck, and Ruth Fazakerley, “Countermonuments: The Anti-Monumental and the Dialogic,” The Journal of Architecture, vol. 17, no. 6, 2012, pp. 951–972. [본문으로]
- Peter Springer, “Denkmal und Gegendenkmal.” Denkmal—Zeichen—Monument: Skulptur und öffentlicher Raum heute, edited by Ekkehard Mai and Gisela Schmirber, Prestel, 1989, pp. 92–102. [본문으로]
- 이 같은 독일적 ‘반기념비(Gegendenkmal)’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는 둘로 나뉜다”는 바디우식 변증법의 요약, 혹은 일자(The One) 스스로를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헤겔적 부정성(Negativität)의 현시를 읽어내지 않기란 어렵다. [본문으로]
-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자행된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James E. Young, “The Counter-monument: Memory against Itself in Germany Today,” Critical Inquiry 18 (Winter 1992): 267–296. 영이 다룬 존넨알레 기념비가 영의 작업 시기(1992)보다 늦게 표기된 것은 그것이 설계된 시기(1989)와 완성된 시기(1994)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예컨대 다음의 작업들을 참고하라. Sabrina DeTurk, “Memory of Absence: Contemporary Counter-Monuments,” Art & the Public Sphere, vol. 6, nos. 1–2, 2017, pp. 81–94. ; Sara B. Demoiny and Stewart Waters, “Remembering What We Would Rather Forget: Examining Counter-Monuments in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in Democracy at a Crossroads: Reconceptualizing Socio-Political Issues in Schools and Society, edited by Gregory L. Samuels and Amy J. Samuels, Information Age Publishing, 2019, pp. 95–111. ; 전진성, “한국의 기념비 문화에 끼친 독일 반(反)기념비의 영향: 기념비적 역사에서 민주적 기억문화로,” 『독일연구 - 역사·사회·문화』, 제44호, 2020, 245–281쪽. ; Jonathan Vickery, “The Past and Possible Future of Countermonument,” IXIA Public Arts Think Tank, 2012. [본문으로]
- 전후 독일 나치 청산의 간략한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Mueller, Tim. “A Legal Odyssey: Denazification Law, Nazi Elite Schools, and the Construction of Postwar Memory.” History of Education, vol. 46, no. 4, 2017. p.499. [본문으로]
- 나치즘 차단을 위해 교육 현장 내 강압적 교화를 금하는 등의 원칙을 세운 1976년의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 합의는 오늘날 탈나치화의 준거 중 하나로 인용되지만, 그것은 가해자성을 명시한 교육과정과 비판적 역사현장교육(dark tourism) 도입 등 1970년대에 걸친 뒤늦은 개혁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더불어 독일은 뒤늦은 개혁의 일환으로 형법 제130조 국민선동죄와 관련된 조항을 통해 나치 정권 하에서 자행된 범죄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행위를 금하기 시작했으며, 1979년 나치 살인범죄의 공소시효 폐지, 1985년 ‘나치 범죄 부정 모욕죄’, 1994년 ‘나치 범죄 부정 선동죄’ 2005년 ‘나치 찬양죄’ 등으로 관련 법을 정비해왔다. 관련하여 다음을 참고하라. Bazyler, Michael J. “Holocaust Denial Laws and Other Legislation Criminalizing Promotion of Nazism.” Yad Vashem: The World Holocaust Remembrance Center, 22 Sept. 2026. [본문으로]
- 식민지에 대한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 최미세, “독일의 과거사 진상규명의 현 상황과 한계점에 대한 고찰: 헤레로와 나마 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와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불관용을 중심으로.” 『독일어문화권연구』, no. 34, 2025, pp. 301–326. [본문으로]
- “What Has Germany’s Position Been on Israel’s Genocide in Gaza?” Al Jazeera, 7 Dec. 2025. [본문으로]
-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시민사회의 감성 구조에 착근된 역사적 반독재 투쟁의 성과들과 현재의 시민단체들 및 노동계의 역량이 아니라 1987년 체제로 소급 환원하여 그 자체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간주하는 것과 비슷한 기만적 효과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앞서 16번 각주에서 언급한 다음 연구를 참고하라. 전진성, “한국의 기념비 문화에 끼친 독일 반(反)기념비의 영향.” 백비는 어떤 비문도 없이 덩그러니 뉘어진 직사각형의 비석으로, 제주 4·3 항쟁의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백으로써 드러내며 온전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는 날 세워지고 채워지길 염원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한편 「미리 지어진 전쟁기념물」은 2018년 설치미술 작가 원지호의 개인전으로, 여기에는 나선형으로 하강하는 가설적 기념 공간의 스케치와 고전적 기념비의 요소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한 조각 작품들이 포함된다. [본문으로]
- 구묘역은 ‘망월묘역’, ‘망월묘지,’ ‘망월묘지공원 내 제3묘역’, ‘망월동 묘지’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망월동은 광주 중심부에서 해당 묘역으로 가는 진입로에 위치할 뿐 해당 묘역이 실제로 위치한 장소는 아니다. 실제 구묘역의 행정 지도상 위치는 본문에 쓴 바와 같이 수곡동이다. 그럼에도 구묘역이 ‘망월동 묘지’로 알려진 것은 ‘망월동’의 존재감을 상대적으로 크게 느낀 지역 주민들의 편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5.18 당시 희생자들은 본래 이곳에 묻혀있었으나, 1997년 신묘역이 국립묘지로 개장된 이후 그곳으로 재안장되었다. [본문으로]
- 전두환 기념비가 파괴된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증언을 참고하라. “[기자수첩] 망월묘역(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묻힌 ‘전두환 비석’ 아시나요.” 『투데이광주전남』, 2022.5.20. 본 기자수첩에서는 전두환 비석의 파괴날짜를 1994년으로 증언하고 있으나, 구묘역 현장에 세워진 팻말에는 1989년이 명시되어 있다. 한편 그 파괴 과정에 관한 또 다른 진술은, 89년이든, 94년이든 당시 부서진 기념비가 82년 직후 쭉 유지된 것이 아니라 87년 6월 항쟁 직후 한 차례 파괴되어 다시 제작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전두환 비석’ 얽힌 사연.. 이름 짓밟아 민주영령 추모.” 『세계일보』, 2021.10.24. [본문으로]
- 해당 문구는 비석을 부순 주체인 광주·전남 민주동우회가 작성한 것으로,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복받쳐 오르는 분노의 수치심을 참을수가 없어 1989년 1월 13일 이 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었나니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영령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일견 통일이라는 문구가 느닷없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나, 역대 남한의 군사독재는 부실한 정통성을 가리고 자본축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막대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으며, 실제 5.18 당시 전두환이 시민들을 진압한 거짓 명분도 그들이 ‘공산 폭도’라는 것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극우 일각에서 5.18 북한 개입설이 제기되는 만큼, 5월 광주의 과제로 산자에게 ‘남북 통일’을 주문하는 것은 나름대로 정합적인 개연성을 지닌다. [본문으로]
- 이하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4·3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 [본문으로]
-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의 역사: 피해실태.” 『제주4·3평화재단』, 2026. [본문으로]
- 독립운동 희생자의 규모는 국가보훈처가 여타 사료를 통해 추정한 것으로, 대략의 구성은 다음 회의록에서 확인된다. 대한민국 국회. “제225회 국회(정기회) 정무위원회 회의록 제7호,” 『국회사무처』, 2001. 38쪽(第225回國會 政務委員會會議錄 第7號. 國會事務處, 2001). [본문으로]
- 홀로코스트의 의미론적 계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Holocaust, n.” Oxford English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본문으로]
- 약 600만 명으로 추계되는 유대인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ow Many People Did the Nazis Murder?” Holocaust Encyclopedia, 21 July 2026. [본문으로]
- 고유명화된 잘못과 역사적 승리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경산코발트 광산 학살’의 현재적 의미를 비평한 본인의 과거 작업이 지닌 논제를 확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정강산, “미완의 질문: 보도연맹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 『PONG』 view, 2023. 10. 13. [본문으로]
-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피학살자유족회운동.” 『민주화운동사전』, 2026년 10월 8일 접속. https://dict.kdemo.or.kr/entry/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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