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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신자유주의,오디션,아트스타코리아: 만국의 예술가여 단결하라

by 정강산 2017. 4. 3.

2014, 4, 14에 작성된 글

Alexandr rodchenko, chess table design(1925)


"우승자는 창작지원금 1억 원과, 유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기회, 해외 레지던시를 누릴 기회를 받게 됩니다. 끼와 열정, 재능이 있는 아티스트를 모집 합니다"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아트스타코리아가 3월 30일 첫 방영을 시작했다. 방영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방영 이후에도 도처에서 갑론을박이 뜨겁게 펼쳐지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프로그램의 기획은 명실상부한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논쟁의 핵심적 주장들은 거칠게 다음과 같이 분리될 수 있을 텐데, 초야에 묻혀있는 재능 있는 예술가를 발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그 프로그램을 치켜세우는 의견과- 애초에 예술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지적하며 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담지 하는 의견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형태로 귀결되곤 하는 논쟁의 양상을 바라보며 어쩌면 사실, 아트스타코리아의 존재 기저에는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이 지면은 그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더듬어보고 갈피를 잡기 위해 마련되었다.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해,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헤집어 보고- 아트스타코리아와 예술의 대중화의 관계, 나아가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질과 신자유주의의 착취구조에 대해 조금이나마 반추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지원자들의 작업이 티비를 통해 전파된다

는 사실로 짐작하건대, 아트스타 코리아의 기치가- 예술의 대중화를 겸해 재능 있는 신예작가들에 대한 지원제도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설령 아트스타코리아가 승승장구하여, 매스컴에 예술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소위 ‘예술 하는’ 사람의 삶과 작업을 소비하게 된다고 해서, 예술이 대중화 되었다고 단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유인즉 무엇인가가 대중화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양태를 뒤 바꾼 뒤에야 비로소 측정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 많은 프로그램을 해부하기에 앞서, 이것이 표방하는 예술의 대중화는 어떤 의미에서의 대중화를 지향하고 있는지, 어떤 층위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부터 파헤쳐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대중화의 층위에 대해 말하자면, 특정 형태의 매체를 통해 어떤 물질 혹은 관념이 광범위하게 소비 될 것을 담보하는 상황에서의 ‘대중화’와, ‘예술의 대중화’라는 실천(시도)속에서의 대중성, 이 둘 사이에서의 간극이 분명히 존재하며, 아트스타 코리아는- 기표는 동일하나 그 기의가 서로 달라- 전혀 다른 의미로 전유되고 있는 이 두 가지 대중이라는 개념을 마치 하나의 것 인양 오해하고 있거나 곡해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 그것이 정의하는 대중화의 양태란 ‘사람+사람+사람..=대중’의 형태로서 이는 양의 논리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인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욱 더 광범위한 규모의 대중화를 꾀했다’라고 표현 할 수 있게 되며, 절대적 양의 증가에 따라 의미를 획득하는 모종의 숫자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이때의 대중화는 앞서 얘기한 것과 달리, (현실과 동 떨어진 채 그 내부의 관습과 규범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폐쇄회로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의 예술을 배격하고) 모든 이들이 예술가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며 현실과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동시에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한때의 정치적,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아방가르드에 가까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대중화’의 층위를 고려할 때, 아트스타코리아가 분별없이 대중화라는 용어를 남용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표방하는 기치가 양적비율의 증가로서의 대중화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해 보인다. 허나 미술제도 혹은 예술가들의 삶의 양태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양적비율을 늘리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개념이 CJ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작- 아트스타코리아에서 내걸고 있는 ‘예술의 대중화’라면, 즉, 셈법의 논리로 특정 사안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측정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대중화’라면, 그것은 꽤나 진부하고 천박하다. 문제는 특정 대상의 양적 비율의 증가라기보다, 그 대상이 널리 퍼질 만한 가치가 있는지,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자체가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되묻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으로 예술가들의 삶의 질 또한 향상되리라는 믿음은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한가. 달리 표현하자면, 아트스타코리아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리라 믿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트스타코리아를 통해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혜택을 제공받는 예술가는 단 한명의 우승자일뿐더러, 인심 쓰더라도 톱 3-최후의 3인 정도가 남아있는 콩고물에 대한 간접적인 수혜자가 될 것이고 대중들은 미화된 예술가들의 삶과 작업을 스펙터클로서 소비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결국, 최종적인 승자는 우승자로서의 개인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CJ 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매입해둔 주주와 투기꾼들이 될 것이다(실제로 차지량 작가가 아트스타코리아의 첫 방영 이후 공개한 출연계약서를 보면, 작가들에게 지급되는 출연료가 없음은 물론이고 방송에서 생겨난 작업의 저작권은 cj에 귀속된다. 출연 작가들이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포함되어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승자가 의기양양하게 혹은 감격에 겨워 심사위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수상소감을 떠벌리고 있을 때, 주주들이 CJ로부터 배당금을 수령하고 있을 때, 오디션에 나올 겨를도 없이 작업을 위해 혹은 삶을 연명하기 위해 카페베네에서 멍한 눈빛으로 우승자의 수상소감을 바라보며 접시를 닦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접시를 닦고 있을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의 대중화를 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이 프로그램이 빠뜨리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무엇을 위한’ 대중화여야만 하는지에 관한, 납득할 수 있는 당위라는 점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특정한 사안 혹은 현상에 관한 공론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향유하게끔 하는 것이 대중화의 의미라면, 대중화될 대상은 마땅히 스스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담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명확한 정체성이 없는 상태에서의 대중화는 대책없는 단순 재생산(이를테면 고흐의 해바라기를 모사하는 미술 취미반 아줌마들의 증가 라던지)이라 할법한 비대함을 낳거나, 산으로 가거나(슈퍼스타케이 준결승에 진출한 로이킴과 최준영의 서든 캐릭터 출시처럼, 아트스타코리아의 우승자의 이미지가 게임아이템으로 소비된다던지), 망할것(말 그대로 썩은 작업들이 횡행한 나머지 점진적으로 ‘예술’이 붕괴되는 모습이 연출된다던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업들이 방송 시청률 상승을 위한 눈요깃거리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그들이 방송을 통해 구체적 이념 혹은 정치적 행동 방식으로서의 예술을 제시 했을 리는 만무하니, 거칠게 말하자면 아트스타코리아로부터 우리시대의 병적인 집착- 포스트 모던에서 허우적거리는 작가, 예술가, 큐레이터를 보게 될 것이라 예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맹목적인 해체와 권위에 대한 비판으로 표상되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포스트모던은, 다양성을 제외한 모든 가치를 배격하고 철저한 상대주의를 야기하는 동시에 예술을 비롯한 수많은 학문들(철학,건축,역사,문학 등)로부터- 끝내 우리의 삶으로부터 보편적인 공통의 세계를 앗아갔으며, 이는 동시대예술이 극복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보편적 가치,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실은 예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예술의 대중화를 꾀하겠다고 과감히 주장하는 아트스타코리아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이거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는 국내 명문 예대도, 남들 다 간다는 외국 유학도 가지 못했던 다수의 예술가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이 미술 시장에서 해결해줄 문제가 아니며 소비될 오락 프로그램이 해결해줄 문제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정기적인 소득이 없어 갖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궁핍에 시달리는 작가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예술의 대중화를 도모할 책무는, 예술가들의 정치적 조직화와 그에 따른 운동의 몫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달려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의 대중화’로부터 벗어나서, 그 새로운 이름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 이유는 대중화라는 단어 자체가 이 글을 통해 우리가 확인했듯이 이미 너무나도 오염 된채 도처에서 남용되어- 더 이상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을 일치 시키려 했던 아방가르드의 몰락 이후, 예술의 속물적 대중화에 맞선, 변혁과 변화의 역량을 가진 주체적인 예술 대중화 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는가. 그 형태와 이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쩌면 아트스타 코리아에서 자신만만하게 내걸고 있는 것처럼 ‘젊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끼와 재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은 젊은 예술가들이 펼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 않을까. 스스로 예술임을 자처하는 대상이라면 ‘무엇이든’ 예술의 영역으로 치환 될 수 있다는 말 뒤에 가려진 것이, 실은 ‘아무것도’는 아닐까.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현실과 유리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예술이 아니라, 1억 원의 상금과 가나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 국내외 레지던시 기회를 위해 카메라 앵글 앞에서 온건하고 보기 좋게 포장된 예술이라면- 예술가들이, 동시대에서 어떤 예술 형식이 유효하며 작가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마땅한지를 스스로 치열하게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큐레이터, 평론가, 수집가들의 입을 통해 그 자신의 예술적 가치가 측정되고, 제단 되고, 평가받고 끝내 ‘탈락’되는 대상으로서 밖에 남을 수 없는 시스템에 스스로 몸을 던져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예술의 종말 혹은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슈퍼스타K, K팝스타, 위대한 탄생 등의 수 없이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례를 되새김질 하건대, 참가자들의 자발적인 경쟁과 탈락과 눈물 없이 듣기 힘든 슬픈 과거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해괴한 구조를 지닌 오디션 프로그램 속에서, 이젠 젊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작업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은, 비통하고 서글픈 일이다.


안타깝게도 멘토, 심사위원, PD, 참가자들을 비롯한 아트스타코리아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지는 않다. 허나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깨닫기는 힘들었으리라 십분 이해해줄 수도 있다. 이유인즉, 그 책임은 자발적인 경쟁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공공연히 소비해왔던 우리에게도 뒤따라오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그것은 지금의 현실이 작동하는 전체적인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아트스타코리아는, 예술 또한 이러한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조소하며 새삼스럽게 뭘 호들갑들이냐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소비 해왔다. 텔레비젼에 영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슈퍼스타k, k팝스타, 보이스코리아, 위대한 탄생, 도전 슈퍼모델, 마스터 셰프 코리아, 프로젝트 런웨이’ 등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으니,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과 그 파급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들이 이제껏 다뤄왔던 주제는 대중가요, 춤, 디자인, 모델, 요리 등이었으나, 아트스타코리아의 등장과 함께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이제 현대미술마저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기획될 수 있다는, 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다. 허나 그조차도 마냥 새삼스럽지만은 않은데, 이유인즉 현대미술. 무용. 가요. 요리. 패션 등은 각 분야의 알레고리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오디션’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 그것은 단순히 방송프로그램의 한 형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분야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법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디션이란 사실 다른 게 아니라, 자발적인 경쟁을 추동하는 체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할 것이며, 오디션의 형식을 취한 방송 프로그램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징후 혹은 환유로서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 세계적으로 방영되어왔던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제목을 보면 그 개별적인 제목들로부터 모종의 일관성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각자의 국가 이니셜을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내세운다는 점이다. 2001년 영국의 Pop idol을 시작으로 미국의 American idol(2002), 독일의 Deutschland sucht den Superstar(2002) 오스트레일리아의 Australian Idol(2003), 한국의 슈퍼스타k(2009), 중국의 C-pop Star(2013)등 수많은 변주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오디션이라는 시스템을 차용하여 자국의 인장을 세긴 것을 통해 우리는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별로 자국민의 재능과 능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여겨져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자발적인 경쟁과 능력에 따른 보상으로 대표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청률 석권과 열기를 대변해주며, 제목 앞에 붙어있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니셜이 증명해주듯 세계적인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때 우리는, 사실상 이 힘이 전 지구적으로, 전체적인 기류로서 작동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끊임없는 경쟁구도와 대립, 그리고 단 한명의 우승’으로 귀결되는, 뻔한 내용을 가진 오디션 프로그램에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왜 그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서, 앞서 짧게 언급했던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그 성질에 관한 개괄이 필요할 듯하다.


1970년대 이후, 완전고용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안전장치들을 구축해왔던 복지형 자본주의- 케인즈주의는, 점증하는 이윤율의 저하로 말미암아 그 효율성을 의심받게 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경제체제의 도입이 이루어지게 된다. 새로운 경제체제는 효율적이지 못한 방만한 경영과 권위적인 관료주의로 인해 복지국가에서 이윤율은 저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자본축적과 시장에 개입하는 큰 정부를 배격하고 국가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치안 이외의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이 무엇이든, 공적운영은 비효율을 낳게 되니, 개인과 민간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함을 역설하며(자본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비롯한, 자본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형태의 훼방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케인즈주의를 몰아내고 경제 질서의 패권을 잡은 새로운 시스템의 이름이 바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먹구름이다.


이 기치는 미국에서부터 출발하여, 이윽고 일부국가를 제외하곤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채택하는 만국의 정언명령이 되는데, 이때 신자유주의의 도래가 의미하는 것은 경제;분배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안전보장제도의 몰락과, 고용유연화, 금융화, 민영화, IMF를 위시한 세계경제의 질서 재편, 그에 따른 자본의 탈영토화이기도 하다. 썩 문제랄 것이 없어 보이며 고상하기 짝이 없는 이 단어들은 달리 말하자면, 실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할 수도 있을 테다. 주주들의 배당금을 위해 사내인건비를 최소한으로 산정하여-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도록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국가 간의 상이한 환율에 대한 차익을 노린 채 금융투기를 일삼는 투기꾼들을 양산하며,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명목으로 (수도, 전기, 가스, 철도, 의료, 교육 등의) 공적서비스를 사기업에 매입하고, 제 3세계의 국가들이 부채를 갚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IMF를 통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미국 혹은 서구권 국가들의 기업이 해당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잠식하게 하거나(한국도 1997년의 외환위기 당시 대부분의 공공서비스를 외국의 투기자본에 내주어야 했다), 동남아시아나 중국과 같이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노동시간, 환경규제 등의 법률이 엄격하지 않은 곳으로 공장을 이전하여(2010년의 한진중공업 사태는, 사측이 규제가 덜하고 인건비가 싼 필리핀으로 공장을 이전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비윤리적으로 기업 활동을 일삼는 세기말적 풍경을 만들어 낸 것이 다름 아닌 고용유연화, 금융화, 민영화, IMF, 자본의 탈영토화 등으로 표상하는 신자유주의라고 말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보장받고 존중 받아야할 권리들과 가치들이, 천박한 이윤율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주변화 되고 소외된 이들을 책임지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고- ‘공공의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던 문제들이 이제 ‘개인’이 떠맡아야할 몫이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실버라이나, 솔로몬, LIG, 등의 숱한 보험회사들과, 미즈사랑, 산와머니, 러시앤케시를 위시한 고리대금회사들, 틈만 나면 자산을 관리해주는 펀드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서는 은행들의 위세가 위풍당당한 것도 썩 이해 못할 일은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보험회사들이 보험금 지급을 하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단서들을 달아놓는지, 대출회사들의 이자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은행들이 우리가 맡겨둔 돈을 어떤 비열한 방식으로 불리거나, 날리는지는 썩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목돈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고- 당장 쓸 돈도 필요하고, 이왕 있는 돈은 좀 더 많아야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터무니없는 일회적 방편인지는 고려할 사항이 아닌 까닭이다.
누군가 자기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들을 껴안기는 커녕 도리어 근본 없는 인간으로 몰아붙이기를 일삼고,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져야할 문제로 환원 시키는- 긴장, 불안, 분열로 구성된 체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며, 지금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총체로서의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일 것이다.


덧붙여 테일러주의적 대량생산라인으로 극복하기 힘들었던 효율성의 저하 및 수익률의 감소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국가들은 생산력과 품질혁신을 위해 팀제team system를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1977년에는 한국에서도 삼성물산을 처음으로 팀제 도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사회보장제도가 종언을 고하고 뒤이어 팀제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연속성은, 자발성을 내면화하는 주요한 장치 혹은 기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눈 여겨 봄직하다. 왜냐하면 팀제의 도입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가 그 이전까지처럼 노동시간에 근거한 대가로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재능에 따른 보상이라는 형태로 지급되기 시작 했고- 이는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한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그 구성원들에게 ‘자발성’을 어떠한 형태로든 확실히 체화하게끔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류는, 자신들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된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수행하는 생리적 활동을 부과된 것이 아닌 선택한 것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노동(labor)이 아닌 일(work)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기이한 현상의 실제적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게 빵 굽는 노동자는 파티쉐로, 주방일을 하는 노동자는 셰프로, 의류업에 몸담고 있는 노동자는 스타일리스트로, 간헐적인 하도급 계약으로 근근이 삶을 연명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프리랜서로 환골탈태하게 되었다. 최근 2,30년간 자기계발 담론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끌고 있는 풍경 역시, 이러한 경로를 통해 체화된 자발성의 징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이 아닌 일을 얻음으로써 우리가 잃게 된 것은, 한국의 한 사회학자이자 맑스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취가 존재하는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삶의 현실과 그것들을 꿰뚫어 보는 안목일 것이다. 


다시 오디션에 대한 가닥으로 넘어 와서 말하자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위의 배경과 그 궤를 함께한다. 알다시피 오디션의 특징은 ‘재능과 능력’이 있는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끼를 뽐내고, 과시하고 그에 따른 수혜를 받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착취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추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인재상과 비슷하게 작동하여, 참가자들과, 그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헌신과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가치를 체화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인적자원’이라 칭하며 자신이 노동이 아닌 일을 수행 하고 있다고 여길 때 그 곳이 불평등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지극히 합리적인 세계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처럼, 참가자들의 자발성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하여 능력과 재능을 보여주면 보상이 뒤 따를 거라 구슬리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은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획책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조직하려 분투하는 이들에게 훼방을 놓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거칠게 되물을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전 세계적인 수요가 증명해주는 것은, 마치 타조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고 착취의 존재를 외면하며 능력에 따른 보상을 주문처럼 외우거나, 고단한 삶의 현실을 잊기 위해 단 한명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애와 부를 보며 계급상승의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끊임없이 경쟁을 추동하는 세계에 대한 분노를 ‘재능’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뭉그러 뜨려 해소하려는 우리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이 음험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의 아트스타코리아가, 예술의 한 귀퉁이를 붙잡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절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단순히 작가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인줄 알았던 그 프로그램이, 실은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거짓들과, 이데올로기, 환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재고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던 예술은 이제 환상이 투사된 현실 속에서 헤엄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었다면. 예술의 대중화를 표방한 그 프로그램이, 알고 보면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성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의 착취구조를 내면화시키는- 스펙터클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면. 마치 우리가 물건을 상품으로 바라보고, 화폐의 숫자단위를 특정한 가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길 때 자본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한 오락프로그램으로 생각할 때 그들의 사유가 신자유주의의 환상에 잠식되어 간다면, 아트스타코리아는 마땅히 예술가이자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거부해야할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허나 이미 태연자약하게 아트스타코리아에 출전하여 자발적인 경쟁을 행하고 끼를 뽐내는 예술가들은 존재하며, 이를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으로 지켜보도록 하자고 쉬쉬하는 기류는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 언저리에는 토익, 토플, 각종 자격증 등의 갖은 스펙들로 치장하고 입사지원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자기계발서가 있으며 (맑스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자본이 있다. 아마도 당신과 나 또한 그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들이 정확히 한 점에서 랑데부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작금의 시점에서, 과연 예술은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보면 확언을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지배하는 총체적 힘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너머의 예술 혹은 삶에 대해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항하는 예술가들의 움직임이 없다면, 예술가들이 이러한 기류를 상대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아트스타코리아가 보여주는 현상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이 스스로의 종언을 고하는 날도 그리 먼 일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