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1에 작성된 글
Barbara Kruger, Untitled (your body is a battleground)(1989)
2010년, SK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철원 전 M&M(SK계열 통운회사)대표는, M&M으로 합병시킨 회사에 고용되어있던 기사들에게 화물연대 가입금지를 지시했다. 그 과정에서 M&M의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를 들은 화물연대의 간부였던 한 트럭기사는SK본사 앞에서 약 1년간 1인 시위를 했고, 이에 최철원은 그를 대화로 유인하여 한적한 건물로 불러낸 후, 자신의 심복들 및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에워싸고 무릎을 꿇게 한 뒤 ‘한대 당 100만원’이라며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기사를 폭행했다. 해당 트럭기사는 그 와중에 강제로 합의서에 사인을 하고, 맷값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많은 이들은 그 사단을 ‘맷값폭행 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이 이슈가 되었을 때, 운동의 장 내부에서 노동자는 약자이니 이에 대한 고용주들의 배려와 각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 이후 SK에 사과를 요구한 트럭기사를 두고 ‘유홍준씨는 파이트 머니를 받은 것이고, 돈을 더 받기 위해 유홍준씨가 더 맞은 부분이 있다’라고 주장한 SK의 임원의 언행이 사회적 파란을 불러일으켰을 때도, 트럭기사를 상대로 한 사측의 고소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유죄판결을 이끌어 낸 담당검사가 SK계열사 윤리경영전무로 영입되었을때도 그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남성)노동자는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보편으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고, 이따금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파렴치한 폭력의 기제는 그들이 사회적 제도와 생산관계에서의 우위, 자본을 점유했을 뿐이란 점에 대한 운동 내부의 합의와 규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당시의 사건을 진지하게, 생산적으로 독해하려는 이들의 시선에서만큼은 선험적인 강자와 약자의 주종관계는 없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통해 조절 및 전복 가능한 힘의 균형이 있을 뿐이라는 암묵적인 인정이 있었다. 공동의 문제에 대한 공동의 개입을 통해 대립하고 적대하는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 구성하는 일을 광의의 ‘정치’라 한다면, 정치의 조건은 바로 양극의 비대칭성을 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정치의 조건은 바로 (저항적)운동의 조건과도 정확히 조응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해 쟁취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의해 작성된 국제노동자협회의 강령 초안이라 일컬어지는 <임시규약>의 서두는 바로 위와 같은 정치의 조건을 염두에 둔 채 쓰여진 것일 테다.
이런 점에서 맷값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화- 류승완의 베테랑은 일견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역설적으로 반정치적인 영화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하자를 가진 것이 틀림없는 재벌 2세의 폭행 및 살인미수혐의를 발견하고 고군분투하며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운 뒤, 모든 사건과 싸움이 종결된 다음에 의식을 되찾아 부스스 일어나는 노동자를 제시하는 네러티브 속에서 정치와 운동은 실종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는 위압적인 권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피해자로, 타인의 동정어린 시선과 윤리의식에 의존하는 약자로 현상한다. 이때 논리적으로 후행(後行)하는 관념은 노동자들의 문제를 알량한 선의에 기대어 대신 해결해주려는-결과적으로 더욱더 당사자들을 옥죄이는-‘대리주의’, 혹은‘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내지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이다.
더불어 영화는 모든 자본가들의 내면에는 인간성과 시민성이 부재하기에, 그들은 언제라도 노동자들을 생리적으로 위협하는 잠재적 가해자들이 될 수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역설하는 위험한 도덕적 파토스를 지닌다. 이것이 위험한 까닭은, 이러한 도덕적 파토스 내부에서 노동운동이 계급적대를 발생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지양하는 활동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 비판’으로, 한명의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도덕적 규탄으로 축소될 여지가 다분하다는 점을 비롯하여, 객관적인 현실과 어긋나는 환상이 조장되기 때문이다. 사실 의심의 여지없이,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에 비해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깔끔하며, 예의바르고, 정중할 뿐 아니라, 교양 수준이 높다(그들은 잘 차려 입고, 물질적 풍요에서 비롯된 심리적여유가 있으며, 박식하고, 대부분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물론 사측이 노조에(혹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자행한 온갖 린치와 폭력, 불법적 수탈을 통계학적 그래프로 환산한다면, 여전히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해 피해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드러날 것이 틀림없고, 이에 주목하는 작업도 필시 부분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천착하는 일은 노동운동이 될 수 없고, 노동운동에 도움을 주지도 않으며,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급적 분할이 곧 ‘인간적이고 따스한’ 노동자와 ‘잔인하고 비열한’ 자본가라는 상이한 인격을 가진 두 주체로 연결될 것이라 확신하는 베테랑의 네러티브는 리얼리즘이라기보단 포르노판타지물이란 수식이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상기(上記)한 사유의 전개는, 어쩌면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남성들의 도덕적 차별화전략에도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강남 인근의 노래방에서 여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의 내면에 여성혐오에 대한 기제가 자리하고 있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외려 문제는 여성에 대한 부채감에서 기인하는 많은 진보적 남성들의 분열증적인 자기성토로 해당 사건이 소비되는 방식에 있다. 이는 곧, 여성주의의 인플레이션 내지는 여성주의의 부재를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반례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특히 진보연하는 남성들)들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앞 다퉈 자아비판과 도덕적 자기검열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식의 자아비판은 대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남근주의에 관한 공범이다’, ‘남성은 생활세계 속에서 최소한 잠정적 가해자이다’, ‘우리 남성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누려왔던 권리와 혜택 등의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통렬히 반성할 필요가 있고, 이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저 극악무도한 파렴치한 범죄자와 다를 바 없다’, ‘광범한 폭력범죄 수치 속에서 피해자의 비중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왔으니, 이를 남성권력과 폭력성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운운(이에 대해 ‘다른 남성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며 일차원적인 면역학적 방어기제를 보이는 한심한 남성들은 애초에 논의의 대상도 될 수 없다).
헌데 놀랍게도, 이 속에서 ‘여성’의 주체성에 주목할 수 있는 논리적 계기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여성주의는 온데간데없고, 수컷비판만이 온 지면과 타임라인에 난무한다. 뒤이어 발생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와 권력역학 속에서의 소수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피해자,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전도된 가부장적 윤리이다. 피해자이자 약자로서 여성을 규정하는 시선의 이면에는 신체적 에너지, 근 밀도의 차이가 마치 남성과 여성간의 힘의 불균형을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라 여기는 가정(假定)이 자리하며, 이는 마치 ‘사랑의 유통기한은 3년’이라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각종 호르몬의 순수한 화학적작용으로 치환하려는 뇌과학적 설명이 주체의 차원에서 급진적인 단절의 기제가 되어온 사랑의 혁명성을 부정하고, 사랑을 도래하게 하는 주체의 상호작용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와 의지에 무지한 기계적 유물론의 산물이듯, 마찬가지로 오류와 오명(汚名)으로 점철된 기계적 유물론의 유산이다. 기계적 유물론이 지니는 맹점과 실패에 대한 사례는 하다못해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만 드문드문 읽어도 알 수 있는 것 일 테지만, 그것이 오늘날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모습은 새삼스런 압권이다.이렇게 기계적 유물론과 결합한 가부장적 윤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을뿐더러, 정확히 철저한 반(反)여성주의의 윤리적 형상에 조응한다.
여성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낼 것인지의 문제에 관해서, ‘소수자’와 ‘피해자’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잊고 있다. 최소한 소수자라는 개념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 간의 존재론적 비대칭성(힘의 비대칭성)을 타파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 ‘소수자’는 비대칭성의 불균일하고 불균형한, 모순적인 양태를 객관적으로 지시하는 동시에, 어떤 도덕적 선의를 문제의 지양 방안으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수자는 도덕성과 인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여성을 소수자로서 호명하는 한, 그들은 심지어 생물학적 남성까지도 아우르며 정태적이지 않은 실천들을 통해 힘의 균형에서의 소수자를 다수자로, ‘일반성’으로, 그리하여 결국 비대칭성 자체가 지양되고 해소되는 상태로 변화시킬 여지가 있다. 허나 ‘피해자; 약자’라는 개념을 통한 여성에 대한 호명은, 언제나 여성을 ‘타자’로서-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비 주체로서 자리매김 시킨다.이런 인식의 회로 속에서 가능한 문제 지양의 선결조건은 ‘남성’들의 은혜와 도덕적 선의에 호소하는 일, 그리고 그들의 내면화된 폭력성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일이 된다. 이때 어쩌면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악동들의 손에 쥐어진 가여운 개구리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연스레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수컷비판으로 전락하고, 여성주의적 실천의 공간은 무한히 협소해진다. 다소 과감하게 표현하자면, 정치와 운동은 꼬리를 감추고, 누가 더 진정성 있게, 세련되게, 논리적으로,피해자이자 약자로서의 여성의 위상을 인식했는가, 누가 더 멋지게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반성하며 스스로를 검열하는가, 라는 문제가 현실적인 여성주의적 실천으로 대두된다. 한편 이는 80년대 말부터 독자적 운동으로 출범되어 90년대 말부터 여성주의 운동을 견인하다시피 했던 반성폭력운동의 내적한계이자 패인 그 자체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증명이라도 하듯, 여성주의 운동의 한 갈래의 실패를 답보하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여성주의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기제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남성들은 단 한명도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남성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지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맥락에 위치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허나 그 과정에 지나친 윤리적 무게를 지우는 것은, 앞서 확인했듯 기껏해야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남성에 대한 비판에 그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선의에 기반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윤리의 외침에 가둬지고 만다. 성차별적 억압과 남성중심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을 근본목적으로 하는 보편적인 운동으로서의 여성주의는 남성들의 낯뜨거운 도덕적 자기검열과 윤리적 성토와 폭로, 자아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성주의가 매개된 사건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 되는 데에 그친다면,심지어 성별문제를 비롯한 젠더문제 일반에 대한 공론화 전략인 성주류화에 대해서마저도 그것이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성의 상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에 관한 선택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여성절제회를 조직하여 당시 뉴질랜드 여성 인구의 2/3에 달하는 인원들에게 여성참정권 법제화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아낸 케이트 셰퍼트(Kate Sheppard), 20세기 초 영국, 의회에서의 거듭된 여성참정권 법제화 부결사태에 저항하며 ‘여성에게 참정권을’이라는 구호가 적힌 외투를 입고 시합중의 경마장에 몸을 던진 에밀리 데이비슨(Emily Wiling Davison), 혁명러시아의 선봉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여성 해방의 조건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에 있음을 역설하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부의 남성들과 대립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심지어 독일 사회민주당내에서도 여성의 정치참여가 꺼려지는 일이었던 시기의 독일에서 사민당 여성회의를 출범시키고, 국제 사회주의 여성운동 조직 인터네셔널 여성협의회를 조직하고,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제정한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등 이 외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의 모습에서 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본다. 이들은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았을 것이나, 남성들의 윤리적 자기고백에는 질색을 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정치의 조건, 운동의 조건을 위해,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를 역사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위해, 그리고 여성이 주체가 된 여성주의적 실천을 위해, 이제 남성으로서의 선의에 기댄 자아비판을 모두 거둬들일 때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남성성과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남성들마저도 해방시키려 고투하는, 완고한 여성주의자가 되기로 하자. 가능한 여성주의적 정치의 조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를 추모하며.
(크리틱칼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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