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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장 조제프 구Jean-Joseph Goux, 3장 "화폐경제와 관념철학", <상징경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후Symbolic Economies: After Marx and Freud>, Cornell Univ Pr, 2000. 번역

by 정강산 2017. 7. 20.

Kasimir Severinovich Malevich, Black Circle(1923)



일러두기


*원문의 이탤릭체는 강조로 표기했다.

*옮긴이 각주는 별표를 붙인 숫자로 표기했다. ex) *1

*본문의 각주는 후주로 처리했다.



번역: 정강산



 

3: 화폐경제와 관념철학Monetary Economy and Idealist Philosophy


<Symbolic Economies: After Marx and Freud>, Cornell Univ Pr, 2000. 번역문

일견 상품은 쉽게 이해되는 평범한 종류의 물건처럼 보인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형이상학적 교묘함과 신학적인 재치로 가득한 기묘한 물건임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 <자본>

 

대체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구성은, 다양한 행위영역들에 일반적인, 특정한 지배적 상징화양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착상으로부터, 물질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조응 혹은 모순에 대한 질문은 새로이 작용하는 차원을 취한다. 그 연결 유형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 법적, 성적, 종교적, 기호적signifying실천, 그리고 그 외의 실천들과 표현들에서 나타나듯, 그 밖의 것들 사이에서, 상징화의 경제적 양식과 상징화 양식 사이를 지배하는 조응 혹은 모순을 확립하는 데에 이른다. 이 실천들과 표현들의 특수성은, 이들이 함축하는 치환의 양식에 관해, 즉 상징화 과정에 대해 우리가 그 심오한 공통성을 발견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상징화의 기호적 양식(그것이 글들과 미적 생산품들, 공간의 사회적 조직과 같이 형체가 있는 형식뿐만 아니라 지식과 의식의 형식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상징화의 경제적 양식(이는 물질적 교환에서 성립하며, 사회적 실체들, 즉 상호 작용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교환 양식을 연결하는 생산 관계에서 성립한다)을 포용하는 논리 역사적 통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요를 따라, 나는 화폐경제, 기호경제, 그리고 철학적 양식을 연결하는 논리-역사적 상호관계를 그려내 보고자 한다.

 

플라톤과 일반적 등가물

몇몇 역사적 지표들에 대한 신속한 조사는 플라톤의 철학이 수립 되었던 사회역사적 조직tissue과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을 보여줄 것이다. 당대의 불충분한 자료의 토대로 했던 엥겔스의 생각과 반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 도시국가가 씨족들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과 교환 양식”*1과 견줄법한 경제적 단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아시아적생산/교환양식에서 고대생산/교환양식으로의 변동은 본래 (율법학자, 회계관, 기술자를 통해 경제적 삶을 통제하고 국가의 부를 집중시킨)왕정 중심의 미케네*2 왕조에서 (더 이상 왕조가 아니라 공중의 회의public Forum를 중심으로 한)도시국가의 조직으로의 이행기에 발생했다. 이 이행기는 또한 음절수에 의거한 표기법syllabic writing(크레타 족에 의해 소개된 선형적인Linear B)의 소멸과,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빌려온 B.C 9세기 말경의 알파벳 표기법의 출현을 의미했다.

 

관념철학의 첫 번째 최고봉인 플라톤주의를 고대 생산/교환양식의 상승하는 단계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미케네 시가와 아테네의 황금기 사이에 있는 역사이다. 여기서 교환경제에서의 사건들은 빠른 순서로 이어진다. 거의 완전하게 발음에 의거한phonetic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최초의 표기법이 B.C. 1300년 무렵 나타난다. 대략 800년경엔, 아시리아와 시리아 왕은 은괴, 즉 단일한 형태와 무게의 금속 조각에 국가 표기를 찍었고, 이는 중요한 거래에서 무게를 잴 필요를 제거하였다. 아이기나와 코린트의 그리스 국가들이 주화를 주조하고, 소매를 할 수 있는 돈을 쉽게 다루었던 것은 B.C. 600(이는 플라톤의 연대기와 병렬되는 상당히 중요한 시기이다) 무렵이었다. 그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화폐의 발명이라기보다 동전의 발명이었는데, 이는 교환1에서의 혁명을 동반했고 동시에 고리대금의 행위를 도입했다.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차용뿐만 아니라 내적인 변화들이, 한 사회가 화폐의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의 일반적 등가물에 조응하는 물질적, 기호적인 실천들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이 내적 변형은 이러한 변화가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서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스 사회는 일반적 등가물들의 굳게 확립된, 단일의, 비변증법적인, 억압적인 지배와 함께, 단일한 정치적기관의 내부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모든 형식들(화폐, 문자, 친족, , 종교, 심지어 성까지)을 이어받고 개발했다. “그리스의 기적전체는 이러한 동시에 발생한 패키지, 즉 이 특권화 된 새로운 결합에서 등록된 것이다.

자연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결정적인 승리는 노예제에 기초한 고대 생산양식에서 그 자신의 첫 번째 고전적인 형식을 찾았다. 여기서부터, 주체들이 연루되고 주체들을 구성하는 교환관계가 구조화하면서, 주요한 대립들oppositions이 사회적 삶 전반을 지배한다. 다시 말해 재산이 있는 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결정적인 예속, (자본이 되는)화폐에 대한 재화(생산물)의 예속,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젠더화 된 개인들이라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상상적이고 기호적인 기능에 있어 생식기관의 상징적 의미에서도 그러한데, 여기서 남근적 사항reference은 부분 대상들이나 음전하negative charge로서의 여성의 기관보다 긍정적으로 설명된다), (사회적 역할과 상징화된 기능에서)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예속, 이러한 예속의 뒤에 서있는 의식의 전능과 함께 단어(표음 법)에 대한 이미지(도상적 비문)의 이데올로기적 예속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적 개념화의 영역으로 옮겨와서, 이 적대들의 체계는 최종적으로 정신의 범주에 의해 획득된 물질 범주에 대한 지배를 의미한다. 허나 이 대립의 체계는 아직 자신의 법칙을 단념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자 한다. 비대칭적인 대립들, 즉 무의식/의식, 이미지/단어, 여성/남성, 어머니/아버지, 재화/화폐의 대립들은 동일한 역사적 과정 내부에서 화폐경제를 특징짓는 계급 이분법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 철학 영역에서 물질/정신처럼 짝지어진 범주들은, 그들의 연대, 그들의 심오한 일치conformity 속에서 이 모든 대립들을 표현한다.” 허나 이러한 일치는 복잡하다. 이 대립들은 합쳐질 수도, 다른 하나로 대체될 수도 없다. 그들 사이의 특정한 일치를 가리키는 것은 그들을 등가물로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는 기술적으로,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초래한 역사를 통해서, 그들 각각이 새로운 발견을 요청하는 효과들과 매개들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계급 분할과 관계한다. 오직 상징화의 변증법적 과정에서 취해지는 사회적 조직에 대한 이론, 생명에 필수적인 행위들의 사회적 교환에 대한 이론만이-물적 기초와 상부구조 사이의 기계적인 경제적 이분법을 넘어서면서-단어의 인류학적 의미에서, 이 사회경제적 총체성 혹은 문화의 역사에서의 이 단계를 설명할 수 있다. 더욱이, 만약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대립 혹은 외려 역사 속에서의 유물론에 대한 관념론의 지배(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역사 혹은 전pre역사에 걸쳐 발견된다는 의미에서)가 이 모든 비대칭적 대립들 안에서 탈코드화 되고, 드러나고, 설명될 수 있다면, 이 체계적인 결속에 대한 발견은, 지금 여전히 철학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지식(인지)gnoseological적 체계화의 다른 수준에 대한 방법을 열어젖히면서, 철학에 대한 이론을 구성할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젖줄인 고대의 생산/교환양식의 논리 역사적 참신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집트(이집트의 아시아적생산양식과 함께)에서 교환경제는 꽤 발전되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이 화폐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모든 재화를 평가하기 위해 기준이 사용되긴 하지만, 그것이 직접 교환에 개입하지는 않는 것이다. 재화의 가치는 표준적인 단위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표준 단위로 평가된 다른 재화와 교환된다.2 이 단위는 따라서 그 자체 교환에 참여하는 일 없이, 물물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된 참조사항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화폐의 첫 번째 형식은, 교환과 교역의 낮은 단계에 조응하며, 여기서 화폐는 여전히 실제 교환 도구라기보다 재화의 질에 대한 척도로서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 여전히 척도는 순전히 가상적일 수 있다.”3 , 실제 교환 조건과 떨어진, 부동의 참조점에 대한 거울과 같은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이 기준의 관할권 하에서는, 재화들은 다른 재화들에 대한 교환 속에서 순환한다. 여기서 가치 기준은 그들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일 없이 상품 교환을 승인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이 교환 형식은 틀림없이 점차 B.C.1300년 무렵 얼굴 없는, 추상적인 신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일신론의 출현을 유발한다(혹은 그와 조응한다). 모자이크 시대의 고대 유대Judea(고대 팔레스타인의 남부지방: 역주)에선 성소에 맡겨진 표준 셰켈은화와의 관계에서 재화들이 평가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화폐는 재화의 보편적 등가물이 되고 은 주체들에 대한 보편적 등가물이 되는, 사회적 교환의 변증법적 생성과 함께-즉 양자에 돌려진 통합과 초월에 대한 동일한 가치와 함께-,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화폐의 결속과 신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화폐 제조를 위한 작업장의 흔적을 탐지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그들이 신성한 건축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신전 또한 화폐 주조소이자 공적 금고로서 기능했다.”4 화폐적 자본은 신성의 집중과 동일한 사회적 논리와 함께 하는데, 즉 종교적 센터들은 자본의 지렛대인 것이다. 단일한 경향이 사도신경credo, 믿음credence, 신용credit을 결합한다. “매일의 거래들은 신성의 보호와 통제 하에 위치하며, 이 신성의 조각상은 시장에 설립되었다. 신용은 신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즉 사제들은 그리스 국가의 최초의 대은행가였다.”5 훗날 버클리Berkeley가 특이하게 다른 구성 속에서, 우리의 인식들각각에 관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신에 대한 믿음, 신용 발행된 (종이)화폐에 대한 변호를 동일한 신앙주의라는 측면에서 수렴하는 것으로 관련지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이 일관된 논리-역사적 담보를deposits 상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증하는 교환 행위와 함께, 교역의 중요성이 커지고, 그에 동반되는 사회적 격변들과, 마르크스가 사용한 은유에서 반영된 화폐에 대한 고대의 의식적인 신성화는 논리-역사적으로 무의식이 되면서 필연적으로 두 번째 국면으로 넘어간다. 실로, 화폐적 경제는 새로운 계급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엥겔스는 아테네 시대에 관해 이렇게 썼다. “교역, 화폐, 고리대금, 토지 소유, 저당mortgage의 팽창과 함께 한줌의 계급의 손에 쥐어진 부의 집적과 집중은 빠르게 진행되었다.”6 새로이 통합하는 힘에 의해 귀족 중심주의와 영토적 탈집중화가 이어졌다. 따라서, 차일드Childe에 따르면, “이오니아에서, 이어 전체 그리스 반도에서, 새로운 상인계급들은 성공적으로 토지 귀족에 대립했다. 토지 재산과 나란히, 화폐적 부는 행정권에 참여하는 것, 의회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 혹은 의회를 선출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즉 과두정이 귀족정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7 이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반향은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인 등가물은 논리적으로 이성과 법, 합리성과 보편성을 동반한다. 화폐 기구의 일반적인 사용의 효과들은 다양하고 급진적이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로 이르게 된다.

 

허나 주어진 사회적, 도덕적, 지적 의미에 입각한다면, 통화의 확립은 그 시작에서부터 법률제정자들의 일반적인 사업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날인이 찍힌 금괴를 발행하는 귀족적 특권은, 국가가 귀금속의 원천을 장악하고 귀족들의 기구를 위한 도시의 인감을 대체시키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적합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정확한 수적 가치부여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서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을 성문화하고, 규제하고, 조직하는 수단이었다.“8

 

화폐와 함께, 자연과 상상에서 의례와 이성으로의 변동,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가치평가에서 만장일치의 동의에 근거한 일반적인 척도로의 변동이 발생한다. 베르넌트Vernant는 이렇게 쓴다. “의식적인 수준에서, 신들에 대한 불손으로서의 부에 대한 낡은 이미지-정념적인 힘과 종교적인 함의들로 가득 찬-에 대해서 법적 경향은 nomisma*3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대체하고, 따라서 가치의 사회적 표준, 다양한 현실성들에 대한 일반적 척도를 허용하는 합리적인 장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교환을 평등하게 한다.”9 자연 사이의 대립을 설정한 플라톤의 이원론 이상으로 이 고대의 교환양식과 새로운 교환 양식의 대립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nomos화폐nomisma를 이어주는 어원학적 연결을 보여준다.10

 

따라서 신화로부터 철학으로의 경과가 일어난다. 동전과 알파벳 문자의 사용, 혹은 더 간단히, 모든 영역에서의 표준 단위의 사용, 일반적 척도의 사용은 상호 동의에 기반 했다. 이로부터 가치에 대한 관념적인 척도, 플라톤주의 전체 혹은 가장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플라톤주의의 지층중 하나로부터 도출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정신의 조응(상동성)만이 우리에게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이해할 수 있는 모델, 본질에 대한 세계의 사회적 원천을 발견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에서 실제 돈의 선구자들인 이 덩어리, 스틱, bars들을 대부분 눈어림이나 손대중으로 판단했던 것이었던 한,11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 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허나 도시가 아테네 도시의 상징인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찍힌 4드라크마 은화를 주조하고 보장했을 때, 모든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라는- 즉 플라톤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 추정에서 모두에 의해 인정된 정확한 척도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의견과 올바른 과학,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경계를 건너야만 했다.

 

허나 나는 이 새로운 경제적 교환의 형식의 어떤 직접적이고 기계적인 영향이 개념 혹은 보편적 척도라는 사유 즉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사유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실로 불가피하고, 충분한 혹은 심지어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하는 기계적인, 직접적이고 인과적인 효과 때문에 과잉결정 되는 것이다. 나의 테제는 교환 혹은 대체를 포함하는 모든 실천들이, 상징화 과정의 논리적 변증법에 대한 단일한 단계와 단일한 형식에 맞춰 조정되는 경향이 있으나, 동시에 이 과정의 논리는 각각의 교환 영역에 특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영역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광범위한 출현이 다른 상징적실천(종교적, 성적, 법적, 지식학적gnoseological) 영역들에서의 일반적 등가물에 선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외려 꽤나 그럴듯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 문명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한편으로 본질에 대한 반성의 출현, 즉 사물의 실체에 대한 반성의 출현과, 다른 한편으로 화폐가치의 확장 사이에 강한 연결을 인식해온 제임스 A.K. 톰슨James A.K. Thomson에 대한 베르난트의 비판12, 나에게 정당해보이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오직 논리 역사적 접근만이 설명할 수 있는 형식의 일치에 대해 논쟁하고 싶다고 할 때,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불일치들을 보여주거나, 시대에 뒤진 것을 지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오직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역사의 개념만이, 상징화 과정의 논리적 변증법으로부터, 조응하는 영역이라는 개념과 전 지구적으로 패턴화된 경제적 교환이라는 개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어떤 토대적 경제주의의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급진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맨 처음으로 고대적 생산양식에서, 뒤이어 모든 지역들에서 명백해진 것은 예속적 위치에 있는 다원적이고plural 상대적인 형태*4와 그것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일반적 등가 형태 사이의 분할이다. 이 대립은 언어적, 화폐적, 제도적, 부모적, 종교적, 법적, 성적 기능들에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정신범주에 대한 물질의 철학적 예속에서도 발견된다. 상품과 화폐사이의 관계는 두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해석을 보장하는데, 이는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플라톤 철학의 모티브인 관념적 전도를 폭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화폐가 모든 다른 상품들에 대한 어떤 특별한 상품의 결정화된 반영일 따름이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반면, 화폐 물신주의에 연결된 이데올로기적 인식은 이 반영의 방향을 전도시킨다. 그것은 재화를 화폐형식의 단순한 반영으로 만든다. 금속의 화폐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상품들 중의 상품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모든 다른 상품들을 그 자신 속에 숨긴 채 쥐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이 부의 화신의 옆에서,” 변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는 바람직하고 바라는 모든 것으로 변할 것이며,” “모든 다른 부의 형식들은 단순히 외관(外觀)들일 뿐이게 된다.”13 플라톤에게, 감각적인 물질적 현실은 단지 이상적 형태의 반영일 따름이다. 이 완벽한 모델들 앞에선, 물질적 세계는 본질에 순응하면서 단지 모방으로 구성될 뿐이었는데, 이는 현상들의 세계이며, 대용물들의 세계이다. 대략적으로 말해, 플라톤적 형상들(모델들, 관념적 표준들)과 구체적인 세계 사이의 관계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지되면서 이와 정확히 철학적으로 평행한 (물신화된)일반적 등가물과 상대적 (가치)형태 사이의 관계로 치환되었다. 보편적 등가물들(, 아버지, 언어)이 그들이 관리하는 세계로부터 분리되면서, 플라톤의 원형적인 관념은 유형의 현실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관념적인 광학적 환상은 가시적인 물질적 세계를 일반적 등가물들의 반영으로 간주하는데 있으며, 반면 일반적 등가물은 가시적인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집중된 반영, 거울상을 구성한다. 일반적 등가물에 대한 물신은 화폐의 제도적 발생을 제거하는 원인이자 효과일 뿐만 아니라, 물질과 반영의 결정적인 전도로 이끄는데, 이 전도는 관념론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전도는 한 계급의 관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 플라톤은 보편적 등가물과 상대적 형태 사이의 관계를 보편적 등가물의 관점으로부터, 즉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쥔 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인식했다. 지각할 수 있는 물질(재화들, 구체적인 기호들)은 불완전하며, 관념(화폐, 개념)에 대한 부수적인 반영이다. 반면, 상품을 생산하는 노예계급은 일반적 등가물과 상대적 (가치)형태 사이의 관계를 후자의 관점(상대적 가치형태: 역주)으로부터 인식한다. 즉 화폐 혹은 관념은 물질적 현실성의 반영이다. 구체적인 생산물과 비언어적 기호가 먼저 오는 것이다.

 

그 반영이 현실 자체로서 인지되도록 하고 현실을 단순히 덧없는 외양으로서 반영하는 문제를 유발하는, 그리고 결국 플로티노스Plotinus(이집트 태생의 로마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205?-270: 역주)에 이르게 되는, 이 심화된 전도는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 사이의 관계들을 드러내고, 어떻게 특정한 측면에서(만약 우리가 일반적 등가물의 발생을 상대적인 물질적 형태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관계들이 관점의 전도로서 묘사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대칭성에 의존하면서, 기계적으로 유물론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관념론 철학(이는 상징화의 실제 사회적 과정에 대해 뒤집힌 관점의 불완전한 개념적 표현이다)을 뒤집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로 이 뒤집힘은, 만약 그것이 완전해야하고 실효가 있어야 한다면, 감소하는 전도가 미끄러지게 하고, 이행시키지 않은 채 놔두고, 혹은 억압한 것에 대한 복잡한 복구(이는 관념론 철학에 의해 제공된 개념적인 관점에서부터 예견될 수 없는 것이다)를 요구한다. 비록 이 억압된 요소들이 그 자체로 관념론의 전도된 관점에 대한 산물이자 효과라 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관념론이 억압하는 것은 단순한 관념론 철학의 전도-관념적 뒤집힘에 대한 뒤집기-를 통해서 회복될 수 없다.

 

더욱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화폐에 대해 분기하는 개념들이 체계적으로 그들 각각의 철학에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가치를 구현하는 시장 가치와 화폐적 재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려에 있어 이 두 철학자의 상이한 사유는, 유심론자와 관념론적 접근에 대한 식견의 상이한 수준에 연결될 수 있고,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문제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 통화는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주화일 뿐이다.14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물론 그는 통화를 가짜이자 완전히 관습으로서 간주된다고 인식했으나- 화폐는 내재적인 가치가 없으며, 그 가치의 기호가 표시된 것이라는 점을 주장했다.15 따라서 플라톤에게 가치는 근본적으로 화폐적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것이고, 그는 임의적인 것으로서의 화폐라는 개념을 옹호했으며, 이는 철학과 정치경제학에서 버클리Berkeley와 스튜어트Steuart를 통해 관념론적 경향을 유형화하게 될 개념이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법률적인, 화폐가치에 대한 화폐(연구)numismatic” 특징을 주장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인 가치를 그 금속의 물질에 돌린다. 우리는 두 철학자들의 각각의 화폐 개념에 충실히 반영된 분리되는 관념들로 인한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난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한명은 하늘 방향을 가리키는데 반해, 다른 이는 그러나 완전히 그것을 뒤집으려는 일 없이, 측정하고, 플라톤주의적 고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세속적인 한계들로 모으기 위해 훨씬 아래쪽에 가닿는다.

 

화폐와 언어

서양 철학의 전체 역사의 도처에서, 우리는 단지 표면적 현상이 아니라 실제 사회역사적 조응의 집중되고 격리된 인식인 화폐와 언어에 대한 끈질긴 비교를 찾는다. 언어에 관한 논쟁들을-우발적인 시적 외삽이 아니라 꽤나 일관성 있게 치환의 위치에서-떠돌아다니는 화폐적 은유는, 경제적 교환 양식과 기호 교환양식 사이의, 지금으로선 아직 감춰져있고 미발달된 조응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강조해온 사회역사적 기초 위에서, 나는 이 철학적 은유들의 실질성을 설명하고, 그들의 간헐적이고 흩어진 양상(제노Zeno에서부터 로크Locke, 니체, 베그르송을 거쳐)의 뒤에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명백한 교환의 체계를 밝혀내고 싶다. 철학적 관념론과 화폐 경제의 공통적 근거는 명백해질 것이다. 즉 그들의 전반적인 지향 속에서 양자는 상징화과정이라는 동일한 사회역사적 국면에 속하고, 증후적인 측면에 제한되지 않으며, 외려 교환 형식의 발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른 용어에 우리가 빚진 넓은 의미에 자리한다.

 

개념과 화폐를 나타내는 용어, 가치를 나타내는 용어 양자 모두 비슷한 변증법적 과정들에서 연원하는 보편적 등가물들이다. 그들은 다수와 유형의 것들 너머의 본질들을 표상한다. 제조된 상품들에 대한 풍부하게 다양한 자연적 경향들은 교환가치에 의해 승화된다고 마르크스는 쓴다. 화폐는 상품의 이상적인 본질인 것이다.” 시스몽디를 인용하면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반복한다. 화폐를 통해서 가치는 가치를 만든 상품으로부터 자신을 뜯어낸다. 마치 형이상학적이고 상상적인 속성처럼 말이다.”16 이러한 분석에 사용된 용어들은 명백히 이 과정과 관념론적 환상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특히 그 기원에 있어서, 유형의 세계와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즉 지상과 천국 사이의 분리를 의미하는 플라톤적 형상을 가리킨다. “모든 상품의 공통적인 실체그들의 물질적 소재나 물리적 특징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따라서 교환가치로서 그들이 가진 공통적인 실체이다.” 이제 화폐는 그것이 직접 이 비물질적인 공통의 실체를 표상하려하는 한, “상품 세계에서의 그 확산과 분열과는 반대로, 간결한 요약의 방식으로 일반적인 부를 구성한다.” 따라서 화폐는 상품들의 특수성과 독특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상품들에 무관한,” 숭고한 것으로 유지될 수 있게 된다. 화폐는 갑자기 유통에 대해 단순한 매개체로서 나타났던 그 보조적인 역할로부터 상품세계의 군주이자 신으로변하게 되며, “상품들이 그 세속적인 형식을 나타내는 반면, 화폐는 상품에 대한 신적 존재를 나타낸다”17라고, 마르크스는 명백히 서술한다. 두 세계-상품들의 물질적 세계, 가치와 화폐의 관념적인 세계-간의 분할로 이르게 되는 경제적 교환 과정과, 플라톤 철학에서 인식된, 유형의 세계와 인식으로만 도달 가능한 세계 사이의 분리를 향하는 과정 사이의 일치를 더 명백히 강조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비록 후자의 발달은 역사적으로 전자의 직접적인 기계적 효과가 아니라 해도-즉 나는 그 효과는 직접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두 계기들은, 논리-역사적 동시성에 있어 일치한다.

 

이제, 물질과 관념(혹은 물질과 가치) 사이의 이 분리는 이미 가장 근본적인 교환형식의 미발달된 상태에 내재되어있었다는 것이 알아차려져야만 한다. 실로 이 근본적인 형식은, 그 비교 혹은 평가에 대한 가정에 의해, 즉각적으로 신체로서의 상품과 가치로서의 상품 사이의 차이를 함축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가장 단순한 상품 형식, 즉 그 속에서 그 가치가 다른 모든 상품들과의 관계로서 표현되지 않는 상품형식, 그러나 그자신의 자연스러운 형식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시키는 것으로서, 그것은 화폐형식의 전체 비밀을 담지 한다.”18 “관념화의 원천은 부적절한 차이들을 삭제하는, 두 상이한 것들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에서, 즉 공통적 척도의 관점에서의 평가에서, 즉 사회적 교환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 기능 자체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교환가치로 가정된 한 생산물은 그 본질에 있어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연적 속성으로부터 구별되는 특징에 놓이게 된다. 즉 그것은 하나의 관계로서, 일반적으로 더 정확히는 한 상품이 아니라 모든 상품에 대한, 모든 가능한 생산물들에 대한 관계로서 가정된다.”19 우리가 근원을 찾고, 즉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철학적 대립인 물질의식 사이의(“자연적 특성들관계사이의) 대립의 형식들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과, 그 발달 속에서의- 사회적 교환의 과정 이외엔 아무데도 없다.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승인된, 주된 철학적 경향들과 필수적vital 행위들에 대한 사회적 교환과정-따라서 그들의 계급적 위치-에 있어 주체의 공간 사이의 연결은 더 이상 단지 역사적 관측이 아니라 논리 역사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이 분석은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통일을 물질과 의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가장 기본적인 교환은 관념론의 씨앗을 담지하며, 이는 우선 상징화과정이 일반적 등가의 형식을 취할 때 정점에 달한다. 물질과 가치 사이의 분리는 곧 명백하게 되는데, 이 속에서 대상은 근본적으로 가치를 표상하며, 반면 그 물질로서의 존재는 부차적인 것이다. 물질과 가치간의 분열, 이는 말하자면 일반적인 지배에 저항하고, 교환원리에 불균일하고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대상의 측면(그 자연적인 형태, 특질), 반면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비교되고, 측정되고, 동질화될 수 있는 것 사이의 분열이다.

 

상징화의 복잡한 사회적 과정은 관념론적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논리적으로추상화를 심화시키는데(물질에서부터 그리고 투자된 구체적인 힘에서부터), 이는 모든 필수적인, 그러나 기본적인 행위들의 사회적 교환에서 암시된 것이다. 그 환상은 일반적 등가의 상징화 과정의 단계에 의해 주체-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후 강조되었듯, 이는 항상 사회적 교환에서의 지위에 의해, 즉 방대하고 복잡한, 경제적, 언어적, 성적, 법적, 등등의 상징적과정에서 차지하는 공간에 의해 주체로서 구성된다-가 설립될 때 그 역사적 정점에 도달한다. 이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또한 신경증적 주체가 될 수도 있다.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주체들은, 사회적 관계들 혹은 교환들에 있어 주체들의 공간과의 일치 속에서, 사회적 상징화의 지배적인 과정의 일반적 등가에 의해, 정치적, 법적, 상호주체적 과정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경제적 측면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는 사유, 의식, 정신(우리는 여기에 가치, 의미 본질과 형식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의 우위와 물질의 종속을 승인하는 관념론이 왜 지배계급의 철학적 이데올로기가 되는지에 관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로 기호화되고 상호주관적인 상징화 과정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주체보다 신경증적 주체단일한 지위를 포함하면서, 상징의 일반적 등가단계에서 구성된 왜곡과 과장은 편집증이 될 것이다.

 

화폐의 순환으로 귀결되는 경제적 상징화과정과, 개념화가 정점에 달하는 기호의 상징화과정 간의 비교로 돌아가 보자. 상품에 내재한 특정한 차이들이 화폐의 순환과 경제적 가치에 의해 지워지는 것처럼, 개념 역시 단독적인 상들 간의 차이들을 삭제하며 다양한 표상들에 공통적인 것들만 유지한다. 개념은 또한 사물의 본질처럼, 형이상학적인, 분리된 특성이 된다. 화폐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 내부에서 지속되는 일반적 등가물”20이 된다. 통화와 개념적 용어 모두 추상화, 보편화, 공통적으로 내재한 것으로의 축소의 작동을 수행한다. 따라서 개념에 대한 비판은, 화폐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운동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측면의 사이에 끼어들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화폐와 개념은 보편화하지만 추론speculation(억측)의 위험을 동반한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화폐와 개념은 평범한 것이 된다. 한편으론 순환하는 가치나 의미가 자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다른 한편으론 같은 과정이 차이를 지우는 것이 관측될 수 있다.

 

부정적인 면을 고려해보자. 통화는 개념적 추론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말소에 대한 은유가 될 것이며, 또한 다른 방식을 따라서, 독특성의 침식, 즉 주화의 사용이 마모wear를 유발하듯, 일상적인 사용을 통해 언어에 해를 가하는, 선명함의 평준화에 대한 은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논리, 개념의 분절은 평가절하에 대한 이 상image, 헤겔적 관념론의 추상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 정신의 화폐를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논리는 정신의 화폐이고, 인간과 자연의 추론적인 사유-가치, 어떤 현실적인 명확한 특징과도 무관한 그들의 본질,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사유소외된 것이고 추상적이며 실제 자연과 인간을 무시한다.”21

 

만약 개념적 축소가 그릇된 것이고, 과장이며, 일방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반면 그것이 참되고, 옳으며, 작동하는 것이라면, 과장inflation과 추론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과학적 축소이다.

 

추상적 이성의 특별한 사례는 과학적 이성이며, 그 주체는 객관적인 인간, 관계들과 그 밖의 것들을 인식하고 개념 속에서 사유하는 인간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일반적인 기원들과 그들의 실제 특질들에 의해, 감정의 복합체가 이름을 부여받는 것을 통한 판단인 과학적 개념은, 사회에서 상품과 마찬가지로 과학 내부에서 행동한다. 그들은 시장의 상품들처럼 체계 내부에서 함께 모인다. 더 이상 어떤 실질적인 것의 이름도 아닌 최고의 과학적 개념은 화폐와 같다. 예를 들면 원자, 혹은 에너지의 개념이 그렇다.”22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여기에 플라톤의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정신적 비판이 있다-유사한 상동성은 화폐적 은유에 대한 헨리 베르그송의 의존을 결정한다. “정신이 격리시키고 개념 속에 저장하는 형식들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스냅사진일 뿐이고,” “형식들은 시간 위로 그러한 것처럼 공간외부에 배치되어야만 한다.”23 베르그송은 개념의 이 비현실적인 특징을 공격하는데, 여기서 사물의 영원한 불변하는 본질은 감각에 의한 인지의 범위 너머에 있다. 물론, 베르그송에게, 그것은 물질적 기초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사물들의 아름다운 직관적인 유동성이 고착되고, 지속의 흐름이 중단되고, 정신적 에너지의 순수한 운동이 체계화되는 것이다. 여전히, 엄격히 기획된, 우리가 그것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플라톤에 대한 이 정신적 비판에서도 화폐적 은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한다. 주화의 다양성과 변동성은 변화하지 않는 것인 금의 통치권과 대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뒤에 남겨두는 것 없이(그의 메타포에서 상품에 공간을 주는 것 없이), 베르그송은 이 피상적인 대립에서 서로 다른 사유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다룬다. 베르그송을 따라 묻자면, 플라톤의 철학이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거래가 발생하고 있고, 무슨 계약들이 처리되는가? 이윤은 어디에 있고, 이익은 무엇인가? 금전적인financial 작동은 어떻게 실행되는가? 플라톤의 철학은 영원과 시간 사이에서 한조각의 금과 잔돈small change-너무 작아서 상환될 부채 없이 지불이 계속되는- 사이의 그것과 동일한 관계를 확립한다. 부채는 금조각으로 한 번에 지불될 수 있다. 신은 세계를 영원하게 만들 수가 없어, 시간을 주었는데, 이는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말했을 때 플라톤이 그 훌륭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24 베르그송은 그것이 소매 거래 없이, 각 특정 물건에 대한 판매와 간편한 거스름돈 없이, 높은 단위에서 도매로 지불되기 때문에 사유의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를 비판하는가? 혹은 반대로, 베르그송은 영원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통해서, 명백히 지불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거스름돈에 있어 지불할 목적이 없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오점을 발견하는가? 어느 경우에나, 그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철학적 투자에 대해 쓴 것, 즉 철학적 위치에서 완벽히 이해된 투자에 의한 가치 시장에 대해 보장되는 것의 관점에서,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으론 일반적인 상징화 과정 속 철학적 주체의 공간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 “그것은 상이한 가치들에 대한 주화처럼, 다른 것에 대한 기쁨 혹은 고통 혹은 두려움의 한 영역을 교환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화폐가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의 모든 상징token은 교환되어야만하고, 그것이 바로 지혜다. 사실 용기와 자기 통제, 도덕성 혹은 한 마디로, 참된 선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혜이다.”25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징후적인 대체인데, 이것에 의해서 높은 가치의 주화와 거스름돈 사이의 사소한 대립은, 다시금 중대하게 화폐와 상품 간 영속적인 대립에 자리를 잡는다. 이러한 대체에서, 생산과 순환 사이의, 혹은 최소한 상대적인 형태들과 보편적인 등가 형태 사이의 현실적인 대립(혹은 적대), 비록 왜곡되었지만, 관념론적 사색의 내부에서 반사된다. 화폐적인, 순환성의, 사색적인 교환의 영역을 떠나지 않고, 우리는 엄밀히 말해, 이 영역 밖으로 우리를 데려갈 하나의 표상된 대립을 본다. 여전히 일반적인 상징화 과정의 보편적 등가단계에 의한 철학적 주체의 설립이 여기서 사실상 명백하고 의식적이라는 점은 남아있다. 더욱이, 그것은 마치 특정한 철학 양식(관념론)과 특정한 생산과 순환의 양식(물물교환의 모든 형식들에 대한 초월성으로서의 화폐 경제) 사이의 역사적 일치가 이 화폐적 은유 속에서 일별되고 표현되지만 동시에 환유적으로 대체되는 것과 같다.

 

화폐에 대한 철학적 은유에 함축된 대립은, 일반적으로, 금의 통치권과 거스름돈 사이, 나쁜 주화와 참된 주화 사이, 귀금속과 종이 화폐, 혹은 종종 화폐와 상품들 사이의 그것이다. 스토아철학의 설립자인 제노가, 소피스트들의 잔꾀와는 대조적으로, 언어는 표면상의 가치에 있어 신뢰받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의미와 진리의 내적 깊이가 추구되어야한다고 강조하고자 했을 때도, 그는 화폐적 이미지를 사용했다. , “그의 잘못된 웅변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그는 질서 잡힌 연설은 잘 주조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 주화인 알렉산드리아의 화폐와 같으며, 반면 부정확하지만 의미가 풍부한 단어는 아티카의 4드라크마 주화와 같다고 대답했다.”26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적 기호의 물질들과 비가시적이고 기호들이 언급하는 관념적인 의미 사이의 극단적인 격차와, 주화의 물질적 실체와 이 주화들의 가치 사이의 평행한 차이는 꼼짝없이 외양과 우연한 사건의 물질적 세계와 사물의 본질과 그들의 의미, 가치, 진리가 어떤 종류의 인식할 수 있는 매개도 없이, 어떤 장치의 기만적이고 작위적인 우회로, 심지어 교환도 없이, 그들 자체로 인지되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 사이의 독특성(허나 이는 스토아 철학에서 중심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명확하지도 않다)으로 이어진다. 헤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위조 화폐는 진리에 대한 지knowledge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금의 영역에서의 화폐, 실제 주화 대신 위조 화폐는 의심 없이 개인들을 속여 왔을 것이다.(..)허나 의식이 그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확실성을 찾는 그 가장 깊은 현실성에 대한 지 속에서, 기만에 대한 사유는 완전히 기초가 없다.”27 공식적으로 틀린 담론은 우연적인 것이지만, 심지어 완전히 기만하거나 거짓을 말하면서, 우리의 초라한 세계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기만은 진리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의미의 풍부함을 구속하지 않는다. 여기, 알려진바 물질적 기표와 관념적인 기의 사이의 미리 준비된 분리는, 그것을 전달하는 화폐적 은유를 따라, 철학적 관념론에 대한 과잉결정된 승인이다.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기본 금속 조각이나 직사각형의 종이에게 시장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취약하고, 임의적이며, 작위적이다. 이 두 작위적인 연결은 동일한 현기증 나는 효과를 갖는데, 이는 로크로부터 빌린 비유가 설명을 수행하게 될 것처럼, 오직 동일한 질서의 보장만이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미묘함과 그것이 촉진시키는 불명확한 모호화를 가능케 할 것으로 여겨지는 보편적인 기만의 가치에 의해, 그것이 충분히 성숙한 파열이 될 때, 우선 관념이 물질로부터 분리되고 해방되어 그에 무관하게 나타나는 한, 우리는 기호의 작위성의 관념적 효과와, 이 동일한 분리에 대한 경험주의적 공포 사이의 인상적인 협동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유에 대한 표시를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도록 하려하는 단어들은, 어떤 자연스러운 의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부과로서, 내가 그들을 때로 한 가지 때론 다른 것에 대해 세울 때, 그것은 명백한 속임수이고 남용이다.(..)그리고 논의를 제기하고 배워가면서, 일반적으로 지혜와 배움에 대해 동일한 종류의 절차가 받아들여진다. 허나 나에게 그것은 부채를 계산하는 것에 있어 계산기를 잘못 두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부정직함처럼 보이며, 진리는 돈보다 더 큰 관심과 가치에 달려있기에, 더 큰 속임수 같다.”28

 

극단적인 기만, -위조지폐보다 더 심각한-궁극적인 거짓말은 가짜 기표이다.

 

가짜 기표에 대한 경험주의의 철학적 사유의 불안한 단언은,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관념론이 초월적 기표의 불멸의 보물에 의해 매혹되기를 더 쉽게 만든다. 그 완전히 보장된 가치와 함께, 금 조각은 쉽게 이 기의에 대한 은유적인 표지가 된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썼다. “인간의 사색과 행위에 의해 전체를 창조하는 일반적인 사유가 있다. 반면, “우리가 일반성 속으로 번역해야만 하는 유사성들사이에, “사물의 근본적인 근원으로 자연스레 나아가는 무언가가 있다.”

 

꽤 긴 우회로를 통해 그들과 함께 그들이 연결된 유사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로 유익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유용할 텐데, 현실 자체에 내재한 객관적 일반성이라 불릴 법한 것에 대해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과도하게 인쇄된 은행권이 금고에 남아있는 금에 대해 적은 가치를 지니듯 완전히 인위적인 종류들에 그들의 견고한 무언가를 부여하며, 그들이 그러하듯 수에서 제한되기에,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그들이 발산하는 신뢰에 대해서도 중요하다.”29

 

순수하게 사색적인개념의 팽창은 대상적인개념들에 대한 내용reference에 의해 제한되어있다. 베르그송의 주장들이 현실에 내재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사색적인 담론의 연결망에 있으며, 종잡을 수 없는 통화에 대해 응고성을 보장하는 금 본위제금 준비량 양자에 있다. 허나 베르그송의 명백한 은유에 관한 우리의 추론적인 분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금고 속의 금, 더 중대하게는, 환유와 은유의 재정과 사전에 부유하는 기표 사슬을 고정시키는 정박지점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은유이다. 그리고 이 주요기표들의 존재는, 은유적 지위를 점유하고, 잠재적 기표로서의 기의에 대한 이해를 보존하면서, 주로 아버지의은유의 중심성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의고착의 영역에서, 금에 대한 내용은 주체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버지의 지위와, 자신의 자리를 은유적으로 취할 수 있는 금의 위상에 대한 전 지구적 사회역사적 상징화과정 내부에서 동형성isomorphism을 맞춘다. 베르그송의 화폐적 은유는 이러한 상동성에 기반하며, 그 안엔 그의 승인에 대한 의미import와 무의식적인 진실의 부과가 있다.

 

완전히 보장된 금의 가치는 의미의 초월적 보증에 관한 은유가 된다. 금 물신주의와 개념물신주의인 것이다. , 만약 물신화된 말의 의미가 아니라면 무엇이 플라톤의 이데아인 것인가? 허나 여기서, 우리는 물신화된 화폐에 대한 경제적 비판과 관념적 논리(정확히 정신의 화폐로서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 사이의 복잡하고 숨겨진 관계를 보게 될 것이다. 화폐 형태에 대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개념의 관념적 사용에 대한 분석을 수반한다. 마르크스가 공격하는 이 두 전선-헤겔의 관념적 철학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적 화폐 경제에 대한 비판-은 각 영역의 구체성과 그것의 상대적인 자율성에 의해 가려져있지 않은 잘못된 연대를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도 변증법적 유물론(헤겔변증법의 전도로서의)󰡔자본󰡕에서 제기된 경제 이론 사이의 필수적인 역사적 관계가, 그것이 으레 추구되는 곳에서보단 다른 곳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개념의 근원은 이미지에서, 특히 기원적인 이미지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서 다시, 도상학적 보증의 조건들은 억누를 수 없이 화폐적 은유를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기원적으로 감각적 이미지들로부터 나타났다고 프로이트는 쓴다. 헤겔은 이미 이렇게 상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사유는, 기호와 동일시되는, 묘사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언어-기호word-sign에 의해 전환된다.” “이미지는 죽임을 당하고 단어가 이미지의 자리를 취한다. 이것은 한 마리의 사자이고 그 이름은 사물로 넘어간다.”30 이러한 등가에 기초한 치환은 손실로 이어지는가 혹은 이익으로 이어지는가? 사유는 이 교환에서 얻는바가 있는가? 그러한 계보나 교역으로부터 추론될 추상적인 사유에 대한 어떤 폄하도 미리 방지하면서, 비네Binet는 완벽히 기획된 화폐적 은유와 함께 공격을 가한다. “백만 달러의 사유를 따라서, 우리는 값싼 이미지들을 갖는다.”31 상상의 금고 맞은편에 추상적인 사유가 서있는데, 비록 회색에 회색을 칠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 풍부하다. 헤겔과 경험주의 철학에 대립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념을 위해 이미지를 교환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이익을 의미한다.

 

허나 니체와 베르그송과 같은 이들에겐, 이미지에 대한 개념의 치환은 손실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유형들을 지정하는 단어들은 오직 가장 평범한 기능, 사물에 대한 가장 진부한 측면을 표명한다. 단일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의 개념 전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니체와 베르그송은, 상이하지만 종종 꽤 유사한 이유에서, 개념적 언어에서 연원하는 저속화통속화를 폄하한다. “잘 정의된 윤곽을 지닌 단어와 야만적인 단어는 흔한 것, 따라서 인간성의 인상에 관해 비인격적인 것을 갖추고 있으며, 개인적 의식에 대한 섬세하고 단명한 인상을 분쇄하거나 혹은 최소한 숨긴다. 오직 적어도 우리에게 속하는 그러한 사유만이 적절히 단어들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철학적 주장을 반복하며 베르그송은 이렇게 쓰는데, 이는 잘 알려져 있듯 니체의 사유에도 근본적이고 유효하다.

 

그 자신을 가능한 한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최고의 의도와 스스로를 아는 것대신에, 우리들 각각은 항상 의식으로 그에게 개별적이지 않은, 즉 그의 평범함을 불러들일 것이다. -우리의 사유 자체가 지속적으로 의식의 특성에 의해- 그 점에서 오만한 종의 천재에 의해- 투표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고-그리고 군중의 관점으로 다시 번역된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행위들은 인격적이고 독특하며 완전히 개인적인 것과 함께 비교 불가능한 태도에 있다.-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나 우리가 그들을 의식으로 번역하자마자, 그들은 더 이상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32

 

베르그송과 니체는 모두 개념의 코뮤니즘이라 불릴법한 것에 대해 개인주의적으로반응했다. 단일한 이미지들에 있어, 개념들의 평준화하는공식은 차이들을 제거하고 유사성을 강조한다. 즉 이 보편화는 상동화, 저속화, “추상화,” 통속화로서 비판된다. 이 반응은 단일한 인상들에 대한 일반화된 상품화에 맞선 대립의 모습을 띤 채 일어난다. 여기서 다시 필연적인 화폐적 은유는, 이 운동의 골자를 전달한다. “진리는 환상이 되어 잊혀진, 힘을 잃은 은유를 소진시키는, 환영이며, 도장을 잃어 더 이상 돈으로 간주되지 않고 금속으로 간주되는 돈이다.”33 소진된 이미지들혹은 단어들에 대한 비교는, 침식된 화폐에게 그 자체로 닳아빠진 위조 화폐이다. 니체에게, 각인된 생명, 가시적인 흔적은 개념의 근원에 있지만, 이미지에서 개념에 이르기까지, 마멸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인상의 활력이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을 잃었다. 개념은 도상적 흔적에 대한 승화된 은유이고, 이미지는 일상적 언어의 흔한 유포로 축소된다. 상징 교환을 통하여, 개념은 구체적인 상징화하는 신체를 폐지하고 단독적인 감각을 말소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니체는 직관적인 은유가 음모로 휘발되도록 하는 이 능력, 따라서 이미지를 개념으로 용해시키는 능력에 사로잡혀있던 것이었다. 니체에게, 개념은 은유의 잔여물”34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니체의 철학과, 그보다 더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속적인 유물론자의지위 혹은 실로 어떤 유물론적 지위를 취하기 위해선 개념의 형식화와 언어적 교환에서의 차이의 제거를 비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니체의 철학은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개념진보를 표방한다는 점을 인지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니체에게 개념은 이미지와의 비교 속에서 하찮은 실체이다. 그것은 부식된, 손상된, 희미해진 이미지, 하나의 클리셰이다. 니체는 그것의 작동적 혹은 조직적 가치의 미덕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개념이헤겔과 레닌에게-우수한 논리 역사적 단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점은 그 몰역사적혹은 심지어 반역사적접근에 있는 니체의 철학 전체를 암시한다. 기원적인 이미지로 돌아가기 위해 개념적 추상을 비난하는 니체의 퇴행적인 유물론, 과장된 개념적 추상을 추론으로서 비판하지만 과학적인 개념적 추상을 방어하고 실행하기 위한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과는 명백히, 심지어 혹독히 구별되어야한다. 헤겔, 마르크스, 레닌에게, 개념은 비록 그것이 고대의, 잊혀진 은유(환영으로서, 마르크스는 사적인 문제공적 문제”-예를 들면, 그는 늙은 헤겔을 그의 무덤에서 뒤집어놓을 것이라고 덧붙인다-에 대한 언급을 위해 각기 특수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오래된 독일 속담을 인용한다)35에 덧붙여질 수 있지만, 더 낫거나(구체적인, 필수적인 단독성으로서) 혹은 더 나쁘게(모든 사유에 정초되어 있는 은유적 혹은 유비적 환상)도 이 은유적 기원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레닌은 진리는 시작에 있지 않고, 끝에, 더 정확히는 연속성에 있다. 진리는 인상이 아니다라고 쓴바 있는데,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구체에서 추상에 걸쳐 제기된 사유는-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외려 그것에 가깝게 움직인다. 모든 과학적(정확한, 진지한, 작위적이지 않은) 추상화의 개요에서, 물질과 자연법칙에 대한 추상화, 가치에 대한 추상화 등은 자연을 더 완전히, 더 정확히, 더 완벽히 반영한다. 활발한 직관에서부터 추상적인 사유, 그리고 사유에서부터 행위까지 말이다. 즉 이는 진실, 객관적 현실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통로이다.”36

 

이미지(혹은 사물)에서 개념으로의 변동과, 더 일반적으로는 상징화 과정의 변증법적 논리는 우리를 진리가 새겨진 더 이전 상태로부터 추방시키지 않는다. 즉 외려 진보, 대체물들에 대한 더 완전하고 복잡한 조직으로의 통로가 있는 것이다.

 

버클리Berkeley와 은행계좌

명백한 논리 역사적 패턴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종이, 브론즈, 알루미늄)의 가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행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에 놓인-신용화폐의 확산과, 그리고 점차, 급진적으로 유심론에서 표명된, 철학적 관념론의 과장된 표현을 포함한다. 여기선 버클리의 사례가 조명된다. 많은 영국의 철학자들처럼, 이 철학자(물질 혹은 신체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또한 화폐 순환에 대한 이론을 제안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과 특정한 유형의 정치경제학 사이의-단순한 은유적 암시보다 더 심오한-일치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버클리는 󰡔질문자The Querist󰡕에서 이렇게 물었다. “여러 논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되는 것처럼, 화폐는 내재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가, 혹은 상품, 표준, 척도, 혹은 보증pledge인 것으로 여겨지는가? 그리고 화폐에 대한 진정한 사유는 전표 혹은 (위조)화폐counter의 그것과 함께할 수 없는가?”37 “크라운, 리브르, 파운드 스털링*5 등의 용어가 그러한 비율의 전형 또는 단위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금, , 종이는 계산, 기록, 이전에 대한 전표 혹은 화폐가 아닌가?”38 “화폐는 그들이 평화와 균형을 함께 지키는 한, 유용한 화폐가 소유되어야만 하는 다른 것들을 가리키지 않는가? 허나 그 이상으로 화폐에 가치를 두거나 탐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39

 

우리는 버클리가 화폐 도구의 작위적인 특성에 대한 개념을 극도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보았다. 더욱이, 그것이 만약 관습에 근거하고 있다면, 신용 통화 자체가 사라지고, 소멸한다. 은행 계정 혹은 현대의 당좌 계좌는 훨씬 추상적이고 경제적이다. 표장token의 물질성 자체가 없어질 수 있게 된다. 즉 단순한 흔적, 최소한으로 줄어든 표시만으로 충분해지는 것이다. “자산이 은행계좌Compte en Banc에 의해, 즉 다른 이의 은행 통장에 누군가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그토록 쉽게 전달되고 잘 보호될 수 있는 것은 상업에 있어 최고의 도움이자 격려가 아닌가?”40 통장 속의 기록, 즉 단순하고 작위적인 언어와 두 사람간의 투명한 관계말이다....이제, 버클리에 의하면, 세계가 그 자신을 우리의 인식에 투사하는 것은, 정확히 신에 의해 설립된 작위적인 기호들의 언어, 신에서 인간에 이르는 언어로서가 아닌가? 실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찰의 적절한 대상들은 자연의 권위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를 구성한다...우리가 주로 삶의 모든 거래들과 업무들 속에서 안내되는 것은 그들의 정보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들이 멀리 있는 대상을 우리에게 의미화하고 표시하는 방식은 인간의 약속의 언어와 기호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는 자연의 어떤 유사성이나 동일성에 의해 의미화된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경험이 그들 사이를 관측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습관적인 연결에 의해서 의미화된 것을 말한다.”41

 

철학적 유심론이 근본적으로, 명백히 natural sign와는 반대되는 작위적인 계획scheme에 의해 강화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여기서 갖는 것은 상징화 과정의 단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이 교리는 철학적 이데올로기에 있어, 사회적 실천 속 작위적이고 특이한 기호들(신용 통화를 포함하여)에 대해, 상응하는 것이다. 나는 유심론이 경제적 교환과정의 역사의 이 단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기계적인 효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며, 외려 두 영역 간 논리-역사적 조응이 존재함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제기된 모든 고려들은, 우리가 좁게 실증주의, 객관주의, 혹은 과학적 관점으로부터 유물론과 관념론(그리고 그들의 변형태들)간의 철학적 대립을 이해하는 것을 단념시키며, 외려 이 적대적인 철학적 교리들을 이 과정 속의 여러 논리-역사적 지점에서, 사회적 교환과정에 맞선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이제 왜 이 주요한 두 철학적 경향들이 계급갈등과 연결되는지, 왜 물질에 대한 철학적 범주와 물질에 대한 과학적 범주 사이의 구별이 완전히 정의되고 필연적인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철학적 관점에서, 물질의 범주는 오직 상징화과정, 다시 말해 사회적 교환과정의 변증법적 논리와의 직접적인 연결 속에서만 이치에 맞게 된다. 그리고 물질은 사회적 대체 과정이 등가의 작동을 통해 제거하려하는 것 이상의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다. 자연적 형태들”(물질적 특질들)과 구체적이고 필수적인 힘들로는 더 이상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허나 버클리의 유심론으로, 그것이 표현하는 교환 단계 그리고 특히 그것이 관측되는 위치로 돌아가 보자. 베르그송은 이렇게 썼다. “내겐 버클리가 물질을 인간과 신 사이에 위치한 얇고 투명한 막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더구나 명백히, “물질은 신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언어이다. 그런 까닭에, 각각의 음절들을 두텁게 하고, 그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독립적인 실체로서 확립하는 물질의 형이상학은 소리에 대한 의미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떨어뜨려 놓으며, 뒤따르는 신성한 말과 우리 사이를 차단한다.”42 버클리가, 복잡한 매개 속에서 그들이 작위적으로 되었기에 몸체의미들 뒤로 기호들의 사라짐으로부터 유심론에 대한 그의 원리를 도출시킨다는 주장보다 덜 애매한 진술은 있을 수 없다.

 

이 원리는 그 역사적 발달에 시기를 상정할 수 있는 단계와, 이 과정 속의 특정한 공간에 속하면서 교환과정의 특정한 계기와 조응한다. 만약 플라톤 철학이 일반적 등가물의 최근의 승리에 의해 빚어진 교환 과정의 논리-역사적 계기에 조응한다면, 이는 곧 실체화되고, 버클리의 철학은 차후의 단계, 즉 교환에 대한 일반적 등가 수단의 거의 완전한 승화, 극도의 감소 혹은 소멸의 단계에 조응하는데, 두 경우 모두에서 그러한 일치는 상대적 가치형태의 관점이 아니라 수동의 등가형태의 관점에서 온 것이다. 경제적 교환(이는 기호의 교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의 언어를 말하기 위해, 주조화폐에서 은행계좌로의 변동이 있는 것이다. 버클리의 철학은 확장된 화폐적, 기호적 순환에서 현실화된, 자연과 물질에 대한 부정의 극단적이고도 일방적인 표현이다. 만약, 철학적 개념화의 영역에서, 그것이 물질적 내용의 배척-물질의 존재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부정-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경탄적인 호흡 속에서 묻는다. “이 은행 계좌가 암스테르담의 금광보다 낫지 않은가?”43

 

만약 우리가 관념론 철학에 의해 취해진 특정한 특징적 형태들의 정확한 사례에 대한 분석을 귀납을 통해 확장하려 시도한다면, 우리는 후행하는 더 일반적인 확언에 이르게 된다. 즉 모든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다음의 것들과 조응하거나, 이들을 표현한다. (1) 기본 형태, 확장 형태, 일반적 등가, 그것의 뒤따라오는 형태들과 함께 보편적 등가, 모든 전환들과, 경과들과, “비표준적인변형태들을 포함하는 상징화 과정의 논리-역사적 발달 속에서를 한 계기 (2) 이 과정 속, 그리고 주로 상대적 가치형태 혹은 등가적 가치형태 혹은 둘 사이의 모순 속에서의 특정한 관점.

 

마르크스는 스스로 언어와 화폐 사이에 유사한관계를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그 조응을 작동의 측면에서, 즉 발생론적이거나 체계적으로라도 정리하지 않았고, 그것을 오직 부수적으로 언급했다. 명백히 마르크스는, 언어학과 프로이트주의 심리학의 도움이 없이는 이 연결을 모호하게 힐끗 보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정돈된 이론으로 종합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화폐와 언어를 비교하는 것을 막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언어는 이념을 변형시키지 않으며, 따라서 이념의 독특성은 용해되고, 그들의 사회적 특성은 그들을 따라 상품 옆의 가격처럼, 분리된 실체로 작동한다. 이념은 언어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덧붙이길, “처음에 순환하기 위해, 교환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 그들의 모국어에서 외국어로 번역되는 이념은 약간 더 나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허나 그때 그 유사함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외래성에 있다.”44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가격에 기의를, 상품에 기표를 비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 대응일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접근으로 보이진 않는다. 우리의 의도에서는, 언어적 기호를 화폐에, 비언어적 기호를 상품에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의미는 가치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신중한 자제(“그때 유사함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외래성에 있다”)를 급격히 없애버리는 것은, 기호-특히 언어적 기호-가 항상 이미 번역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의미, 따라서 기호의 개념은 오직 대체가능성과 함께 나타난다. 이 작동은 의미화 행위 자체에-오직 실질적으로,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야콥슨은 상징의 의미에 대한 기호적 정의상징의 다른 상징으로의 변형이라고 강조했다. 경제적 가치처럼, 의미는 항상 등가성을 전제한다. 야콥슨에 의해 인용된, 의미나 의미론적 정보에 대한 샤논Shannon의 정의는, 그것이 소집하는 개념에 유익하다. 즉 의미론적 정보는 모든 전환 가능한 코드화 혹은 작동 전환을 통해, 즉 이 모든 통역translation의 동치류equivalence class로서 끊임없이 남아있는 것이다.”45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 내적통역과 간 언어적통역 사이의 구별이 부적절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 이 경고의 제거와 함께, 질문은 더 이상 우리가 화폐와 언어 사이에 -비옥한 혹은 메마른, 옳은 혹은 그른- 이론적 일치를 확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사회의 역사는 경제적 교환 형식과 기호의 교환 형식 사이의 복잡하고 객관적인 상동성을 보여준다. 오직 교환 체계의 변증법적 논리의 과학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을 그들의 기초와 차원이 무엇이든, 그러한 일치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실행되어 왔다. 그것의 일치, 우연한 특성이라기 보단 유기적인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어떤 일치가 아니라 동형성을 논할 수 있게 한다.

 

초기 화폐경제와 함께 초기 사회에 당대적인 그러한 현상들 중엔, 발달된 알파벳 표기 체계의 사용과, 권력의 발견, 개념의 가치가 있었다. 화폐와 개념적 언어 사이의 결속(이 결속은 산발적이지만 끈덕진 은유들에 의해 철학 역사의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표시되거나 징후적으로 나타났다)을 입증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논리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외려 논리-역사적인 실제적인 일치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교환 양식과 그들의 발생과 구조에 대한 이론을 요청하는데, 󰡔자본󰡕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듯, 이 이론의 출발점은 상징화과정의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러한 결속을 염두에 둔 채, 우리는 생산과 교환 양식의 영역에 걸친 단일성과, 그들의 모든 양상들의 공통적인 배열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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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가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순서가 불가피 한 게 아니었다는 점은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대략 유럽에서의 봉건제에 필적하는,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 명명한 다른 생산 양식이 발생했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에서 드러난다. 이 생산양식은 유럽의 봉건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발달의 맹아를 그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내적 발전의 결과로서 자본주의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와의 조우로 인해 대체된 것이다.” Andrew Collier, <Marx>, Oneworld, 2004, p. 40.

*2) 기원전 1400-1100년경의 Mycenae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부 지역의 청동기 문화.

*3) nomisma는 화폐를 뜻하는 희랍어를 영어로 음차한 것으로, 이는 법률을 뜻하는 nomos로부터 파생된 낱말이다.

*4) 여기서 조셉구는 마르크스가 상품의 화폐적 전화를 논할 때 상품들의 상호 비교 속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상품을 상대적 가치형태라 칭하고, 비교의 기준이 되는 상품을 다른 상품에 대한 등가형태라고 칭했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본 1-1󰡕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를 참고하라.

*5) 크라운은 옛날 영국에서 사용된 5실링 상당의 화폐, 리브르는 옛 프랑스의 통화단위, 파운드 스털링은 영국 통화단위의 공식 명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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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각주

 

1. Cf. V. Gordon Childe, La naissance de la civilization (Paris“ Gonthier, 1963), and De la préhistoire à l'histoire (Paris: Gallimard, 1963) 266.

2. Adolf Erman, La civilisation égyptienne (Paris“ Payot, 1952).

3. Marx, Grundrisse 166-67 (강조는 마르크스의 것이다).

4. G. Espinas, Les origines de la technologie (Paris: Alcan, 1897) 62.

5. Espinas, Origines 63. 물론 화폐의 출현 이전에도, 사회적 부의 축적은 종교적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고든 칠드Gordon Childe󰡔바빌로니아의 수메르와 아카드Sumer and Akkad in Babylonia󰡕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원은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본축적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사원은 대형 은행의 기능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그 곳에서 신은 최고의 자본가이다.” (Naissance 105).

6. Frederick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Peking: Foreign Languages Press, 1978) 202.

7. Childe, De la préhistoire à l'histoire 266.

8. Jean-Pierre Vernant, The Origins of Greek Thought, trans. from the French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2) 94-95.

9. Vernant, Origins 95.

10.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book 5, chap. 5.

11. Esponas, Origines 59.

12. Jean-Pierre Vernant, Mythe et pensée chez les Grecs (Paris: Maspero, 1965), chap. 7; trans. Myth and Thought among the Greeks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3).

13.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201.

14. Plato, Republic 58 (II, 371b).

15. Aristotle, Politics, trans. Ernest Bark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24-25 (Book 1, chap. 9, 1257b).

16. Marx, Contribution à la critique 244; Marx, Grundrisse 261.

17. Marx, Grundrisse 271-72, 218, 221.

18. Karl Marx, Lettres sur “Le capital,” trans. G. Badia and J. Chabbert (Paris: Editions Sociales, 1964) 163.

19. Marx, Grundrisse 205.

20. Marx, Contribution à la critique 237.

21. Karl Marx, Early Writings, trans. T. B. Bottomore (New York: McGraw-Hill, 1964) 200.

22. Ferdinand Tönnies, cited in Geor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Studies in Marxist Dialectics, trans. Rodney Livingstone (Cambridge, Mass.: MIT Press, 1971) 131 (from Tönnies, 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1st ed., 78-89).

23. 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New York: Henry Holt, 1911/1926) 317 and 318.

24. Bergson, Creative Evolution 318. Cf. Plato, Timaeus 37d.

25. Plato, Phaedo 51-52 (69a-b).

26. Cited by Diogène Laerce Rodier, “Les stoïciens,” Etudes de Philosophie grecque (Paris: Vrin, 1957) 229.

27. Hegel, Phenomenology of Mind 570.

28.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New York: Dutton, 1961) 2: 91-92.

29. Henri Bergson, The Creative Mind (New York: Greenwood Press, 1968) 70, 65 (emphasis added).

30. Freud, “The Dream-Work,”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SE 15: 180-81 (Lecture 11); Hegel, Philosophical Propaedeutic 157 (section 4: “The Philosophical Encyclopedia,” #159).

31. Alfred Binet, Année psychologique 12 (1911):10.

32.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aris: Presses Univeritaires de France, 1961) 98ff; Friedrich Nietzsche, The joyful Wisdom, trans. Thomas Common (Edinburgh: T. N. Foulis, 1910) 299 (no. 354).

33. Friedrich Nietzsche, Das Philosophenbuch: Theoretische Studien; Le livre du philosophe: Études philosophiques (bilingual edition), trans. Angèle K. Marietti (Paris: Aubier-Flammarion, 1969) 183.

34. Nietzsche, Das Philosophenbuch 182, 184.

35. Karl Marx, Lettres sur “Le capital” 203.

36. Lenin, Cahiers sur la dialectique de Hegel (Paris: Gallimard, 1963) 231, 232.

37. George Berkeley, The Querist (Glasgow: Foulis, 1751) 3 (no. 32).

38. Berkeley, Querist 4 (no. 25), cited by Marx, Contribution 95.

39. Berkeley, Querist 43 (no. 310).

40. Berkeley, Querist 41 (no. 296).

41. George Berkeley,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 Work on Vision, Library of Liberal Arts (Indianapolis: Bobbs-Merrill, 1963) 92 (section 147).

42. Bergson, Creative Mind 140, 141

43. Berkeley, Querist 41 (no. 299). 버클리가, 작동으로 가져오는 용어에 주목할 만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은 1750년의 일이었다. “비록 금괴가 사라지더라도, 단위는 유지되고, 물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되고, 사고 팔리며, 산업은 진보하고, 상업의 순환은 유지되지 않는가?” (Querist 4, no. 26; 강조는 인용자.) 이제 1676년은 상이한 계산법의 출현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이러한 관계에 있어 완전한 가치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계는 보존된다. 화폐적, 언어적, 그리고 철학적 유심론은 따라서 상이한 계산법이 나타나는 상징화 과정의 특정한 논리-역사적 계기의 특징인, 인식론적 형상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본인의 저서 󰡔경제와 상징Economie et symbolique󰡕(Paris: Editions du Seuil, 1973)의 원본에 있는 추론할 수 있음과 추론할 수 없음Dérivable et indérivable” 장을 참조하라.

44. Marx, Grundrisse 162-63.

45. Roman Jakobson, Essais de linguistique générale (Paris: Minuit, 1963) 97; Shannon cited from Cybernetics: Transaction of the seventh Conference (New York, 1951)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