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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부정을 위해 객체를 파악하기: 유토피아의 이론가로서의 아도르노

by 정강산 2017. 6. 23.


Kasimir malevich, suprematismo dinamico(1915)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수많은 이들이 앞 다퉈 근대성을 비판하며 헤겔을 죽은 개 취급했다. 그의 철학은 단선적인 역사 진보에 대한 목적론적 관념론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폭력적인 이원론적 변증법을 통해 차이를 말살하는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졌고, 근대의 과정을 비극적인 재앙으로 점철시킨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헤겔을 돌파했다고 설레발을 치는 갖은 담론적 흐름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을, 혹은 없어져야 함을 역설하는 여러 논의들을 마주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허나 적어도 개념을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라면, 과연 헤겔을 그렇게 쉽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헤겔을 계승하면서도 헤겔을 돌파한 길을 열어 보여준 마르크스 이외의 학자로서 첫 번째로 손꼽힐 수 있는 인물은 아마 아도르노일 것이다. 예술에서부터 사회학, 철학을 망라하는 그의 저작들은 수많은 학자들에게 영감의 보고가 되어주고 있는데, 특히 오늘날 그의 논의가 각별한 까닭은 바로 상기(上記)한 이유에서이다.

 

본 논문(정대성,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에서 미메시스적 화해와 주체의 자율성 연구󰡕, 󰡔철학논집 34󰡕, 2013)의 목표는 주로 아도르노의 문예론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오던 미메시스 개념으로부터 그 정치철학적 함의를 살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래로 아도르노의 문건들에서 종종 암시되고 출현되는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자아와 대상의 동화, 대상과 화해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논의의 짜임은 1.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과 관련된 대략적인 개요를 그린 후, 2.미메시스의 용례와 위상을 소개하고, 3.사회비판으로서 미메시스 개념에 내재한 난점을 언급하는 순서로 되어있다.

 

신화와 계몽의 상동성

주술화와 탈주술화의 변증법

 

우선 첫 번째 항에서 지적되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을 현대적 병리현상의 결정적 계기로 간주하는 데서 더 나아가 계몽 자체가 현대의 병리현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때 계몽은 칸트적 의미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합리성, 이성의 지도로 재편"하는 과정과, 이성적 주체의 확립을 위해 일체의 권위와 전통을 넘어서고자 하는 흐름을 가리킨다(칸트는 법과, 종교, 관습들은 이성을 통해 검증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저자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특징은 계몽의 위와 같은 해방적인 측면이 지닌 배면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 아도르노에게 "계몽은 결국 이성에 의한 인간 본성의 지배를 강화하고, 나아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역시 규정하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계몽의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제시된다. 이는 베버가 제기한 '합리화, 탈수줄화로서의 근대'라는 관념에 걸쳐있으며,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대상화하는 이성이다. 노동력 상품의 편재와 분업의 발달과 시장의 확대에 힘입어 "총체화된 사회의 연관관계", 즉 상호분리와 병행되는 상호의존이 심화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그것만을 문제 삼는 (원래 베버의 용어인)기술적 합리성이 그 자체 목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지배적으로 된다. 이러한 기술적 합리성은 명문화되고 체계화된 법에 잇따르는 물신주의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구성해낸 것이지만, 어느 순간 인간의 삶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자기 논리를 지닌채 인간의 이성을 외려 규정하고 고착시킨다. , 기술적 합리성은 아도르노에게 지배의 합리성이며, 이러한 합리성은 도구적 이성의 원인이자 효과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계몽을 신화와 연결 지어 사고한다. 으레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용어들은, 아도르노의 견지에선 자기보존욕구로부터 비롯되어 자연에 대한 지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곳으로 수렴한다. 달리 말해, "신화는 재연, 즉 의례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고, 계몽은 '실재'를 관념의 영역으로, 사유의 범주로 정초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의 지배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화는 곧 계몽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도르노는 이 합리적 사유의 원형적 예를 호메로스(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서사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음유시인으로서, B.C. 8세기 중엽의 인물로 추정된다)의 오디세우스 신화로부터 찾는다.

 

그 서사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남기 위해 항해 도중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고 선원들에게는 귀를 막게 함으로써 시험을 통과하는데, 아도르노는 이것을 "자신의 특정한 본능적 충동(내적 자연)을 억압함으로써, 즉 자기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자기를 보존하는 목표에 도달"한 주체가 출현하게 된 알레고리로 읽는다(허나 아도르노는 들뢰즈와 같이 욕망을 전면에 내세워 그것을 실체화시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체성은 외부의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의 자연을 억압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메로스적 자아는 칸트에 이르러 개념을 통해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칸트에게 주체란 내적 자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철저히 이성에 복종할때만 자율을 획득하는데, 아도르노는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언명령으로서 부과되는 이러한 칸트의 이성은 억압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아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 출현한 것이며, 혼란스런 리비도의 에너지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칸트의]도덕법의 명령형식은 억압의 내면화를 전제한다."

(Th. W. Adorno, Negative Dialectics, New York: Seabury Press 1973, p. 268. 본문 202p에서 재인용)

 

이는 언어를 존재의 필연적인 감옥으로 사고하는 아도르노의 사유를 예거하며, 주체(이성)와 언어(상징)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연관 지었다는 점에서는 흥미롭게도 라캉의 문제설정을 선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자연과 타자에 대한 억압에 기초해 있는 칸트의 자율성은 타자 뿐 아니라 자아 자체도 병리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아도르노에게서 계몽의 이성은 신화적 사유의 극단적 발전 형태이며, 그것은 이성은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삶의 영역, 즉 외적 자연, 내적 자연,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03p)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아도르노가 기대를 거는 것은 "이성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비동일자를 보존"하는 일,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의 보존"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이를 "비희생적 비동일성"이라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대상에서부터 시작되는 인식을 보유하고, 자신을 갱신하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어법을 빌리자면 '물신화' , 혹은 '합리화'(베버) 되었거나 '사물화'(루카치) 되지 않은, 개념을 초과하는 대상으로부터 개념을 정립할 것을 요구하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태도는 객체의 우위’, ‘객체의 우선성’, ‘객체의 선차성등으로 번역되는 “Vorrang des Objektes” 라는 아도르노의 핵심 개념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개념의 요지는, 세계, 객관, 사회, 대상은 개인, 주체에 앞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실체적 자아나 선험적 자아의 무연고성, 내지 독자성"은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는 이것이 아도르노와 헤겔의 상동성과 분기를 설명해준다고 말한다. 즉 아도르노의 객체에 대한 주체의 구성론은, 헤겔이 칸트의 자율적인 이성론을 비판하며, 현실 속에서 자아는 칸트의 그것처럼 독자적인 실체로서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말했던 점(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해보라)에서 수렴한다. 반면 헤겔이 칸트를 비판하며 내놓은 변증법은 동일성 속으로 긍정적으로 종합되는 계기를 강조하여 목적론으로 치닫는다는 점을 주장하는 대목에서 아도르노는 헤겔과 구별된다. 이는 아도르노가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류의 존재론을 비난하고 주-객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주-객의 긍정적인 종합을 비판하는 복잡한 입장을 취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즉 헤겔에 대한 긍정과 동시에 부정을 보여주는 부정변증법의 핵심은, -객의 동일성으로의 종합이 끊임없이 모순에 의해 분열됨으로써 외려 간단한 화해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을 통해 개념과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내적 완성이 아니라 개념을 초과한 것이 있음을 보이는 것, (..) 개념이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서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허나 아도르노는 동시에 그러한 본질이 사회에 내재해있기에,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멈춰선 안 된다고 말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사회학 강의󰡕(2014) 2-4강을 참조하라).


 

주체와 객체를 넘어선

화해의 계기로서의 미메시스

 

한편 언뜻 보면 적어도 󰡔계몽의 변증법󰡕은 일종의 제1철학을 만들려는 초역사적인 철학적 기획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기서 주로 등장하는 자기보존 욕구와 동일성 사유라는 개념 때문에 그러한데, 예컨대 마치 인간 주체에 새겨진 자기보존 욕구'동일성 사유'라는 특징이 있어 그것이 어떤 역사적 단계나 사회구성체에든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마법의 개념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자기보존욕구를 논하는 것은 생산의 우위, 혹은 대상세계의 물질대사를 절취하는 행위의 우위, 그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제도와 집단들의 우위를 설정한 것과 상충되지 않을 것이다. 객체가 선차적이라는, 일종의 구조주의적 계기를 지닌 이 개념 속에선 주관주의가 철저히 배척된다. 자연지배는 인간이 정착하여 생산을 조직할 때부터 필연적으로 예고되어있었던 것이고, 사회지배 또한 근본적으로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맞서 생산을 안정적으로 조직할 필요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전화되는 사회지배에서 동일화사고와 자기보존욕구를 논하는 것은 그가 1차적으로 경제적 심급들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것을 시사한다(후에 언급하겠지만, 아도르노에게 동일성 사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암시하는 교환원리라는 개념과 논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제 두 번째 항에서는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초과하는 태도, 인식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의 미메시스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검토되는데, 그에 따르면 미메시스란 계몽적 이성의 억압적 동일화(Identifizierung) 능력에 대비되는 자아의 타자에의 동화(Assimilation)”를 의미하며, “자연의 우선성을 받아들이고,”(이때 자연은 생태주의적 자연이 아니라 객관세계, 즉 사물들의 세계로서의 자연에 가깝다) “모든 종류의 물화를 거부하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계기를 지칭한다. 이는 예술이론을 비롯한 범철학 내부에선 모방(Nachahmung)으로 번역되며, 플라톤에게는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에 견주어 격하된 형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창조적인 것으로 평가된 이후 여러 변용을 거쳐 서술, 재현, 표상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매김 한다(허나 엄밀히 말해 저자의 소개와 달리 서술, 재현, 표상 등의 범주들은 사실 미메시스와 외려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미메시스란 주관-객관이 존재하지 않는, 소외되지 않은 유토피아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개념에 가까운 반면, 재현은 이미 주-객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저자가 서술한 미메시스의 용례는 외려 모방, 원본 아닌 것, 시뮬라크르 등의 위상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어 저자는 위의 사례들과는 반대로 20세기의 예술은 미메시스 개념과 결별하는 경향(앞서 지적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이는 사실 미메시스 개념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 개념과 결별하는 것에 가깝다)을 갖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예술이 점차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과 관계가 있다. 즉 어떤 대상의 반영이어야만 했던 예술은, 점차 그 자체 독립된 표현의 위상을 강하게 갖게 되며, 이는 아방가르드, 혹은 모더니즘 예술로부터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위와 같이 자율화된 예술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미메시스를 담지한 단독성을 예술로부터 발견한다. 이유인즉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은 그것이 세계를 정확하게 모사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혹은 참다운 미래세계를 규범적으로 열어보여주는가에 있으며, “예술작품은 현실에서 질료를 가져오지만, 그것들을 재배치하여 부분과 전체가 서로 종속되지 않은 그런 세계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미메시스를 통해 얻어지는 아름다움은 자연미’(자연적 아름다움)인데, 이는 숭고미를 자아내는 것과는 상관없이, 주관과 객관 사이의 지배의 변증법을 넘어선 자연스러움, 즉 양자의 화해된 상태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던의 선구자 혹은

냉철한 마르크스주의자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항에서는 미메시스가 갖는 한계들을 지적한 논자들의 언급이 소개된다. 여기서 저자는 우베르데하(E. Verdaja)와 벤하비브(S. Benhabib)의 비판을 논의하는데,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우베르데하의 경우, 아도르노가 이성을 거부하고 분업을 물화로 낙인찍는 한 그는 주관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개진했고, 벤하비브는 아도르노가 모든 것을 도구적 이성과 지배로 환원함으로써 각 영역들의 고유 논리를 파악하지 못하며, 따라서 여전히 근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개진한 바 있다. 이들이 보는 아도르노의 모습들은 어떤 측면에선 모두 아도르노의 작업들에 내재되어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들을 갈무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글을 정리한다. “이것은 계몽의 이성을 총체화 하고 자연과의 동화를 의미하는 미메시스를 삶의 전 영역에 투사하는 아도르노의 사유 패러다임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들은 󰡔계몽의 변증법󰡕에 초점을 맞출 경우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이지만, 자칫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어떤 학자들보다 이성적으로파악하기 위해 힘썼던 아도르노의 급진적 면모를 누락시킬 위험이 있어 보인다. 슬라보예 지젝에서부터 프레드릭 제임슨, 그 외 수많은 독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철학자들,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좌파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서의 아도르노를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의 아도르노의 모습과 그에 덧입혀진 오명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이는 아도르노에 대한 서동진의 독해에 빚지고 있다). 글을 마치며, 이를 자료들을 통해 증명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몇 가지 갈래만 제시하고자 한다.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비동일자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아도르노의 주장은 언뜻 어떤 종류의 연대나 집단적 기획도 파시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냉소처럼 여겨진다. 총체성을 거부하고 거대서사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던 리오타르를 위시한 많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옹호자들은 실제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보편성, 동일성을 비판했다. 허나 문헌학적 접근이 아니라 텍스트적 접근을 취하여 독해하자면, 아도르노의 경우엔 단순히 헤겔로 표상되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서사로부터 소서사와 개인주의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동일성을 공격하는 것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가 이러한 보편성, 동일성이 단순히 담론의 성질이 아니라, 현실에 내재하는 지배의 구조라 보았던 것에서 연원한다. , 이성 비판, 동일성 비판, 근대성 비판을 수행한 여느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달리, 그에게 '동일하지 않은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동일성 사유는 '교환원리'라는 그의 핵심 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이때 교환원리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가리키는 암호와 다르지 않다(물론 󰡔계몽의 변증법󰡕에서 동일성 사유의 필연적인 귀결이 교환원리인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분절화 된 개념과 화폐가 그 추상적 보편성에 있어 상동성을 지니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양자는 상동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동일성으로부터 개별자를 회복하고 싶다면, 공허한 보편성을 비난하며 허수아비치기를 그만두고, 현실에 존재하는 보편성, 즉 교환원리의 동일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극복하라는 것이 그의 생각에 가깝다. 요컨대 그는 추상은 바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이기까지 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부터 확인되는 상품으로서의 동일성이라는- 마르크스식의 독법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 이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여러 사물들의 질적 계기들을 사상하고 양적인 추상을 거쳐 시장에서의 교환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자본주의의 추상성과 동일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현실의 동일성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손쉽게 개별자를 구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겐, 그러한 동일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성은 비판의 대상이지 거부의 대상은 아니다(요컨대 그는 철학, 개념, 논리를 비판하나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허나 많은 논자들은 이를 망각한다. 아도르노의 역사철학과 미학이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미메시스 개념 또한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히 비표상적이며, 비재현적인, 언어 이전의 목가적인 인식의 상태를 찬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동일성 사유와 교환원리에 점령되지 않은, 구체적으로 유일한 것으로서의 개별적인 인식의 계기들을 가리키기 위해 (벤야민의 '아우라'와 유사하지만 아도르노의 방식으로 독자화 된)미메시스를 고안해냈던 것이고, 이러한 인식의 가능성을 예술로부터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도르노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인간에 의해 구성되었으나 이내 자율적인 행위자의 위치에서 작동하게 된 '교환원리'를 중심으로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이해하려 했던 측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가 헤겔식의 모델인 주체와 객체의 도식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방식으로 모순을 구조화 한다.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의미 그 자체인 것으로서의 상품이 모순이고, 개별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너무 많이 생산된 상품이 팔리지 않아 해고되는 것이 모순이며,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것, 대상의 생리를 잘 알고 있지만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모순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기원적으로 편재한다. 이는 곧 자본주의가 의미와 사실, 주체와 객체를 양산하며 자율성을 분배하고, 또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 대상화되도록 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선 주관과 객관이라는 항은 모순을 사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일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류도향, 󰡔아도르노의 비판적 유물론: 사회 형식에 저항하는 형식󰡕, 󰡔사회와철학 31󰡕, 2016

김성수, 󰡔이성과 현실 사이: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 이론에서 변증법의 역할󰡕, 󰡔국제정치논총 47󰡕, 2007


(리뷰아카이브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