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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생산 혹은 재생산을 위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 가사노동논쟁, 사회재생산 이론에 대한 비판적 메모

by 정강산 2018. 12. 2.

(한국사회경제학회 2018년 가을학술대회 자료집(pp.73-99)에 선게재된 글입니다. pdf는 맑스코뮤날레 월례모임 발표를 위해 수정 및 보완된 버전입니다. 인용은 [진보평론] 80호에서 찾아 하시면 됩니다)

생산 혹은 재생산을 위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_가사노동논쟁과 사회재생산이론을 중심으로_맑스코뮤날레 월례포럼.pdf




(생산 혹은 재생산?)을 위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

가사노동논쟁, 사회재생산 이론에 대한 비판적 메모


 

정강산

 

 

1. 들어가며

 

 외환위기 이후 사회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심화되어온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신경아, 2016)은 여성이 경제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며 사회의 제영역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화되어 온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주요 평가 지표로 노동시장에의 참가[각주:1]를 상정하고 있는 유엔개발계획(UNDP)2018년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에서 한국이 아시아 국가들 및 G20에 견주어 가장 성평등한 국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2015년 이후로 이어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급격한 사회적 관심과 맞물려 여러 언론을 통해 조명되었고, 이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을 긍정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노동시장 진출과 성평등 사이에 단일한 인과관계를 세우기는 어렵다(틸리, 스콧, 2008: 12, 263, 264, 276-279; Ferragina, 2017: 1 참조). 맞벌이 가족 내에서도 가사노동이 여전히 젠더화 되어있다는 연구들이 보여주듯(조주은, 2005: 266; 조주은, 2013: 66, 124, 255; 강이수, 2007: 25, 26 참조), 적지 않은 경우 노동시장진출이란 가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작업장으로부터의 이중구속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미투운동을 통해 선명하게 제기되었던 작업장 내부에서의 차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더욱이 중간임금계층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고임금 일자리보다는 영세한 규모의 불안정노동을 중심으로 조직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여성 노동 시장 내부의 양극화가 진전되고 있다(신경아, 2016: 340, 341; 강이수, 2007: 20-22). 이 과정에서 가족임금제를 전제로 한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은 점차 2인 소득자 모델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여성고용률은 2018년의 9월 측정치를 기준으로 51.6%에 머물러[각주:2], 71.1%를 기록한 남성의 고용률에 비해 한참 뒤쳐져있기에 개별 가구 수준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의 부양모델의 유의미한 요소로서 여성노동을 셈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성 고용에 관한 한, 노동 시장에의 진입장벽과 불안정노동이라는 조건이 특히 두드러지는 셈인데, 전반적으로 증가해온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산적한 문제들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지니는 양가성과, 그에 따라 변화된 재생산영역을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요컨대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과연 무엇이었길래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여성의 종속이 또 다른 층위에서 심화된 것인가?[각주:3] 또한 점차 여성 노동인구가 증가해왔다는 사실은 이들이 처해있던 재생산영역에 어떤 종류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가? 이에 본인은 60년대 말부터 십여 년간 이어져왔던 가사노동 논쟁에서 이해된 가치론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제안된 재생산 이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어 오늘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양태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검토한 후, 점차 시장에 자리를 내주며 그 모습을 전화시키고 있는 재생산의 부문들을 고려하며 여성운동의 개입 공간을 가늠해 볼 것이다.

 

 

2. 가사노동 논쟁의 전개와 그 한계

 

1) 가사노동 논쟁의 개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오늘날 양자의 실천이 교차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하기란 요원하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하고, 계급 모순 이외의 모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문화적일 뿐이고, 최종심급에 무지하며 성별환원주의적인 정체성 정치의 경향을 띤다’: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가 말하듯(Bhattacharya, 2013), 대략 이런 모양새로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예컨대 하이디 하트만의 논문은 이미 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찾고 있었던 시기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통합시키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페미니스트인 우리에게 불만족스러운데, 이유인즉 그들은 페미니스트의 투쟁을 자본에 맞선 더 큰투쟁 속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비유[결혼]를 더 지속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더 건강한 결혼 혹은 이혼이 필요하다.”(Hartmann, 1979: 1)

 

 그러나 페미니즘은 초기 자유주의적 개혁의 흐름과 결합한 여성참정권운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후로, 20세기 중후반까지 세계 각지의 많은 좌파들 및 급진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적 실천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각주:4] 당대의 남성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르 콜론타이 등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가능성을 증언하는 화신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동거는 대략 70년대를 전후로 깨지고 마는데, 그것은 객관적 측면에선 권위적인 관료들과 국가에 대한 반발에 잇따라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서 천명했던 68을 비롯한 당대 운동지형의 정세적 측면과, 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했던 거대서사의 종언테제와 맞물린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등으로부터 연원하며, 주관적 측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가사노동 논쟁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논점이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의 역할과 위상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 논쟁에 참여했던 논자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나, 그 효과는 마르크스주의와 종별적 차이를 갖는 여성운동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젖혔다고 볼 수 있다.


 가사노동논쟁은 으레 1969년에 발표된 마가렛 벤스턴(M. Benston)󰡔여성해방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을 시작으로 하여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Benston, 1973)[각주:5], 벤스턴이 줄리엣 미첼(J. Mitchell)의 작업을 경제의 문제를 지나치게 터부시한다며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때, 보다 앞서 발표되었던 1966년의 줄리엣 미첼의 작업이 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Mitchell, 1966). 줄리엣 미첼은 자신의 논문에서 가족이 자연적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가족의 형태나 그 속에서 여성이 부여받는 역할을 문화적 대상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Ibid: 11). 그는 초기 마르크스가 오히려 푸리에에 비해 여성을 추상화된 존재론적 범주이자 인류학적 실체로서 다뤘음을 지적하며, 󰡔독일 이데올로기󰡕󰡔자본󰡕에 이르러서도 여성을 가족이라는 역사적 범주 속에서 뭉뚱그려 사고했음을 논한다(Ibid: 13-14). 그에겐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또한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서, 엥겔스는 사유재산제도의 출현시점과 여성억압을 엮어 사고함으로써 경제적 범주로 여성문제를 환원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는 베벨(Bebel)과 시몬 드 보부아르(De Beauvoir)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Ibid: 15-17). 그에 따르면 이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의 열악한 지위가 사적소유와 함께 시작된 매뉴얼화된 고된 노동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라 말하지만, 여성은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도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본적이 없으며, 때론 남성들보다 더 많이 일할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Ibid: 17). 이 연장에서 미첼은, 여성이 생산에서 핵심적인 지위에 있지 못했던 까닭은 출산, 양육, 돌봄 등의 재생산영역에서 남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음을 논증하고,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라 재생산 양식이 변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혁명적 운동은 여성이 처한 구조적 실체를 형성하는 생산(여성 임노동의 문제), 재생산(가사노동의 문제), 사회화(젠더화된 양육의 문제), 섹슈얼리티(성적 자유의 문제)’ 네 가지 범주의 결합 양상을 분석하고, 이 중 약한 고리를 타격해야 한다(Ibid: 30-37). 여성문제를 역사적으로 변화되어온 가족의 범주에서 논의했다는 이유로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대목이나 재생산양식을 생산양식과 분리하여 사고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은, 미첼이 여성억압의 조건을 초역사적 수준에서 찾으려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성역할을 고착화하는 기제로서 근대적 가족이 행사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이며, 여성의 제문제를 경제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경제와 젠더가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이렇듯 미첼의 작업은 그 각론에서 추상적이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유기적 결합 속에서 파악하는데 실패했고, 경제의 문제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보겔과 하트만, 벤스턴과 같은 보다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을 받지만(보겔, 1988: 229-231; Hartmann, 1979: 8-9; Benston 1973: 4-5 등을 참고하라),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설정 속에서 명쾌하게 조명되지 않은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던 만큼, 적잖은 이들에게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마가렛 벤스턴은 본격적으로 가사노동의 쟁점을 궤도에 올려놓았는데, 그는 그간의 계급사회 구조 분석에서 여성문제가 소홀히 다뤄졌음을 지적하며,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에 처해있는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적이거나 제도적인 수준의 요인을 넘어 생산양식과 여성이 맺는 관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Benston, 1973). 그에 따르면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조건 즉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 기초는 바로 자본주의 체계 내부에서 가사노동이 여전히 전(pre)시장적인 단계로 남아있다는 사실에 있다.[각주:6] 가사노동을 비롯한 자녀의 양육은 사용가치를 만들어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생산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생산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선 진정한 노동(real work)”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Ibid: 1-3). 벤스턴이 보기에, 여성이 상품생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단으로서의 여성은 구조적인 수준에서 노동시장에의 책임이 있다고 간주되지 않으며, 남성은 가사노동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 “화폐가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화폐경제 외부에서 일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렇게 무가치한 일을 하는 여성은, 화폐를 위해 일하는 남성들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어렵다.”(Ibid: 4) 벤스턴은 미첼이 기본적인 경제적 요인들을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가 산업화의 출현이 지금까지 여성을 해방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알지만 사회가 가사노동을 충분히 산업화시키지 못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비판한다(Ibid). 이는 사회적 생산에 대한 여성의 참여와 동시에, 가사 노동을 사회화하여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 여성해방에 대한 엥겔스의 비전에 입각한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정은 아이를 기르고 가사를 수행하는 생산단위임에도 그 기능을 인정받지 못하며, 외려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경제적 단위이자 소비단위로서 기능하지만(Ibid: 7), 산업화 자체는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사회주의 하에서 사적인 가사노동을 공적 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은 외려 복지의 증진과 해방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Ibid: 6). 나아가 그는 여성을 가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도 이론상 가능하고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해결하던 가사를 서비스 부문의 경제에 포섭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적잖은 비용과 낮은 접근성으로 인해 아직 배아적 단계에 있음을 논한다(Ibid: 9). 가사의 사회화를 저지하는 요인은 1. 자본의 입장에서 여성의 부불노동을 계속해서 이용할 필요가 있고, 2. 모든 여성을 고용할 만큼의 경제적 확장을 시도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이윤의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Ibid: 10). 따라서 벤스턴에게 가사의 영역이 합리화된 교환관계와 상품으로 대체되는 현상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서, 부정적이지만, 동시에 양가적인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사의 많은 부분이 시장에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이뤄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사회적으로 수행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벤스턴의 논의는 사회적 생산에 대한 여성의 참여, 재생산의 사회화, 생산의 사회화를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제시한 엥겔스의 논제를 다시금 구체적인 수준에서 복기시키며 여전히 유효한 논점을 제공해준다.

페기 모튼(P. Morton)은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명확한 성격을 규정했다. 그가 보기에 가족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가능케 하는 단위이자(Morton, 1971: 211), 노동력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단위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때 여성이 가사노동을 통해 수행하는 역할은 지대하다(Ibid: 214). 모튼은 가사영역의 산업화와 노동력 시장으로의 진출에 내기를 거는 벤스턴의 주장이 부적절하다고 간주하는데, 이는 벤스턴에게 가족이라는 단위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과 이미 상당한 여성노동을 이용하고 있는 경제영역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Ibid: 214-216). 모튼은 점차 생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가고 있는 여성들을 셈하며, 이들이 산업역군으로서 형성한 방대한 노동력의 풀이 그 자체로 저임금을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Ibid: 223). 이런 심화되는 모순 속에서, 점차 가정과 작업장이라는 이중의 속박에 처하게 되는 여성의 조건은 그러나 또한 여성주체의 급진적 저항을 가능케 하는 힘이기도 하다(Ibid: 224).


 이와 비슷하게, 리즈 보겔(L. Vogel)은 가사노동에 대한 변증법적인 인식론적 전환을 시도했다. 보겔은 벤스턴과 같이 가사노동을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정의하며, 이를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견주어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Vogel, 1973: 25-26). “여성은, 그들이 가족 내에서 일하는 한, 순수하게 유용한 노동을 수행한다. , 그들은 [축적이 아니라]즉각적인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남성은, 그들이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노동자인 한, 상품 생산을 위해 노동을 한다. , 그들의 노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양자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Ibid: 25) 보겔에게 가사노동은 명백한 억압이라기보다는 양가적인 것으로서, 때로는 외려 소외된 노동, 자본가에게 고용된 채 수행되는 경제적 노동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이자 보루이다.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교환가치 또한 생산하는 노동은 오직 자본의 지배 하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Ibid: 26). 또한 그는 전(pre)산업적 단위로서 가족을 조명하며 이를 전산업적 생산단위인 소농과 가내 직공에 비유한 벤스턴의 작업(Benston, 1973)을 비판하며, 외려 봉건제 하에서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 연장에서 그는 으레 농노-여성, 영주-남성으로 양성관계를 유비하는 논의는 여성을 흑인에 비유하는 논의들이 그러하듯, 순전히 은유적인 기능만을 가지기에 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녀관계는 계급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op. cit: 27). 이어 보겔은 가사노동과 마찬가지로 임노동에서도 젠더와 함께 가로질러진 분할이 존재함을 역설하고, 불평등한 임금차이가 점차 자본주의의 전개과정 속에서 평준화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측이 잘못되었음을 꼬집는다(Ibid: 34-35).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위기에 처한 자본이 비용 절감을 위해 여성 노동력을 전유하려한다는 사실인데(Ibid: 42), 이는 점차 많은 여성들이 임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과 가사에 종속되는 과정 양자에 집중하여 사회주의적 전략을 재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Ibid: 43-44). 보겔의 주장은 일견 가사노동을 심미화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의 구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를 통해 페미니즘의 의제에 개입할 수 있는 전략적인 결론으로서 당대의 논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적으로 상당히 정합적인 설명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에 우리가 살펴볼 성과인 사회재생산 이론의 논리적 근간이 된다.


 한편 달라 코스타(M. Dalla Costa)와 셀마 제임스(S. James) 등은 자본이 그동안 무상으로 전유해왔던 노동력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지불받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해야한다고 간주한다.[각주:7] 물론 69년의 벤스턴의 작업에서부터 언급된 바이긴 하지만, 가사노동논쟁의 핵심 논제 중 하나였던 무급 가사노동 착취 및 (‘공장과 구별되는 재생산의 장소로서의)사회적 공장라는 테제가 비로소 명문화된 것은 이들의 작업에 이르러서다. 가사노동이 잉여가치 생산을 수행한다는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가사노동은 단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했듯 사회적 생산의 외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임금제도 내에서, 가사노동은 단지 잉여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생산에 필수적이다(Dalla Costa and James, 1971: 16). 주부는 각 가정영역에서 노동력이 원할히 재생산되도록 함으로써 자본의 재생산과 긴밀히 관계하지만(Ibid: 11, 17), 그러한 사실은 남편의 지배 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Ibid: 19). 코스타와 제임스에게 여성운동의 의제는 오로지 고용된 노동에만 관심을 갖는 노동계급정당의 방향에 의해 제한되어 온 것으로 여겨지며, 노동을 통한 해방은 가정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불가능하다(Ibid: 18).[각주:8]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정주부를 평화롭게 집에 남겨두지 않는 투쟁 방식을 만드는 것이고, 결코 지불되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며 거리를 가로지르는 이곳저곳의 시위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즉 외려 우리는 가사노동과, 가정주부로서의 우리의 역할과, 우리 존재의 게토로서의 가정을 거부하면서, 가사노동의 구조 전체를 즉시 무너뜨리는 투쟁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 문제는 단지 가사노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부의 전체 역할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Ibid: 20)


 보겔은 미첼과 벤스턴에 비해 코스타와 제임스의 주장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보겔, 1988: 235-236), 이들의 주장에는 개념상의 혼란을 품고 있는 구절들이 있다. 예컨대 주부의 노동이 시간 측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pre)자본주의적 단계”(op. cit: 12)로 남아있다는 주장과, 가사노동이 잉여가치 생산에 필수적”(Ibid: 16)이라는 주장은 (예컨대 신자유주의의 자본순환과정을 분석하며 시초축적의 단계에서 보이는 수탈은 자본주의의 상수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하비의 경우와 같이)순수한 자본주의란 불가능하며, 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 부문을 통해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서술로 확장되지 않으면 양립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즉 가사노동의 지위가 자본주의에 특정적인 역사적인 것인지, 초역사적인 것인지를 규정하는 대목에서 코스타와 제임스는 다소 동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들이 논문의 초반부(Ibid: 1-6)에서 보여준 여러 분석들과 중반부의 개념들(Ibid: 11,12,16)을 비교하면 보다 명백해진다. 요컨대 그들은 여성의 역할이 자본주의적 노동분할에 의해 만들어져 온 지점에 주목하는 분석을 전개하겠다고 밝히며, 노동계급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일이 자본주의 생산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여성들의 지위에 결정적이기에 논의의 중심을 그들에게 맞추겠다고 말한다(Ibid: 1). 이 연장에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근대적 가족을 만들어 온 과정을 개괄하고, 생산의 사회화가 공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후로 남성과 어린이가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어왔음을 묘사함으로써 가정주부로서의 경험, 노동자로서의 경험 등으로 분리된 여성의 경험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지점을 묘사한다(Ibid: 2-5). 동시에 가사노동은 전자본주의적 조건이자 단계’(Ibid: 11, 12)인데, 이 때 가사노동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생산이 침투하지 못한 영역으로 간주되면서도 이를 통해 잉여가치 생산은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Ibid: 16). 보겔이 가치와 무관하게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전자본주의적 영역으로서 가사노동을 조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던 모순을, 코스타와 제임스는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임노동 체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가사노동을 착취의 장소로서 조명하고자 했던 그들의 시도는 앞선 논자들보다 실천적으로 첨예하지만 아슬아슬한 결론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필요노동 시간이 줄어들거나 가사기술이 발달해도, 여성은 가사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다는 지적이나[각주:9], 노동계급 여성으로 분석의 범위를 구체화하겠다는 제안, 또는 남성이 가정의 노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임금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공장에 종속되었다는 사실과 아이가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어 근대적 학교교육을 받음으로써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기구에 편입되는 과정을 동시에 파악할 것을 강조한 주장(그리하여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규율이 입체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등은 그들의 논의에서 부당하게도 주목되지 못했던 지점이라는 것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각주:10]


 페데리치(S. Federici)는 이들과 공명하며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각주:11] 페데리치에게,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돈을 요구하는 것을 초과하는 함의를 지니는 일종의 상징적 프로젝트이다. 요컨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은 혁명적인 관점일 뿐 아니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나온 유일한 혁명적 관점이며, 궁극적으로 전체 노동계급을 위한 것이다(Federici, 1975: 2). 그는 가사노동을 임노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소외된 노동으로 간주하며 주부가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이 여성 고유의 자질, 능력과 무관한 역사적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Ibid: 2-3). 이러한 맥락에서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을 소외되지 않은 영역으로 남겨두는 논의를 거부하고, 그러한 주장이 돌봄, 양육 등을 젠더화 시키는 데에 공모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Federici and Cox, 1975: 8-9) 여기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노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노동계급이야말로 그 모순을 지양할 수 있다는 대다수 좌파들의 가정인 생산중심적 계급론 또한 거부된다(Ibid: 3). 무엇보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정밀하게 만들어진(true) 작품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 자본은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뒀다.”(Federici, 1975: 3) 따라서 여성은 젠더화된 가사, 돌봄 등 재생산에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역사화해야 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원한다는 것은 여성본성의 표현으로서의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정확히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날조해온 역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요구는 우리의 자연(nature)이 끝나고 투쟁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이다(Ibid: 4). 페데리치가 가사노동을 여성 본질주의적 관점에서 낭만화 시킨 로페이트 등을 비판한 것은 정당했지만, 그가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했던 것 또한 임금을 낭만화 시켰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페데리치의 주장에는 가사노동이 젠더화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임노동이 남성의 성역할에 부과되었다는 측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며[각주:12], 따라서 코스타나 제임스에 견주어 보다 투박하게 남성의 인격화된 지배를 상정할 여지를 열어놓는다. 또한 재생산영역에서 이뤄지는 여성의 셈해지지 않는 노동들에 대해 화폐의 형태로 지급되는 보상이 외려 가사를 시장화 하는 결론과 연결될 수 있다는 양면성을 고려한다면, 가사에 대한 임금요구를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 정치적 관점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Ibid: 1)은 임금에 대한 추상적 파악 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각주:13]


 하트만은 여성문제가 한 번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 원인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문제로서 다뤄진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체계와 여성의 관계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Hartmann, 1979: 2). 그에 따르면 이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카우츠키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며, 자레츠키(E. Zaretsky)와 달라코스타를 비롯한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마저도 그러한 경제주의적 프레임에 갖혀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실제 노동과정을 간과하게 만들었다(Ibid: 2-6).[각주:14] 그는 남성과 자본은 때로 여성노동을 전유하는 데에서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지만, 산업화와 함께 진전되어온 가족임금제로부터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서로 공모하며 동일한 위상에서 여성억압의 기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Ibid: 14). 이 속에서 여성노동은 남성의 지배와 자본의 통제라는 이중의 목적에 봉사하기에, 급진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각각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중의 구속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범주를 개발하는 일이다(Ibid: 21-22).


 이와 비슷한 논지에서, 델피(C. Delphy)는 역사유물론이 생산과정에서 규정된 계급의 적대를 다루는 데에 집중했기에 모든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억압을 설명하는 데에 실패했고, 계급투쟁의 부차적 결과로서 여성억압을 설명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여타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여성운동의 필요성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폐지로는 불충분한 여성해방의 조건을 인식할 수 있는 이론의 필요성을 논한다(Delphy, 1980: 23- 24). 그리하여 그는 가사노동과 양육이 부불노동이라는 점, 그것이 여성의 배타적인 책임으로 되었다는 점 등을 보여주며 가족을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착취의 장소로 조명하려 했던앞선 논의들(미국의 마가렛 벤스턴, 수지 올라(Suzie Olah), 쿠바의 이사벨 라기아(Isabelle Larguia), 프랑스의 페미니즘 맑시즘 행동(F.M.A. group) )을 언급하고, 이들에 기반하여 여성에 대한 계급 분석, 가사의 본질과 가사의 생산양식 간의 관계, 여성운동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하려한다(Ibid: 25). 이에 따르면 교환과 시장의 영역에서 배제된 것은 여성이지, 여성이 만든 상품이 아니다. 심지어 가정 내에서 소비될 생산뿐만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생산에서도 여성의 노동은 배제되며, 그 수혜는 여성의 친척과 남편, 아버지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특히 영세 사업장, 농촌, 가내 수공업 등 가족이 생산의 단위가 되는 경우 두드러지는데, 따라서 농부, 상인, 장인 등 가족 내 생산에 아내는 단지 주부가 아니라 이미 생산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산물을 남성에게 전유당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Ibid: 26-28). 따라서 델피에게 여성의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며 사회적 생산 및 잉여가치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오류이며(Ibid: 26), 스스로의 소비를 위한 생산과 교환을 위한 생산이 유기적으로 동시에 이뤄지는 종류의 생산에 종사하는 농촌의 여성들은 이미 남성과 함께 사용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교환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Ibid: 29). 그는 교환을 염두에 둔 생산에서는 여성에 대한 수탈이라는 가족 내 생산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함께 점차 여성의 부불 노동이 가사노동의 영역에만 적용되고 있고 그 조차도 줄고 있음을 언급하지만, 그러한 현상은 앞서 언급한 착취만으로는 남성이 여성 노동력을 온전히 전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여성이 가정 내에서 일하든 밖에서 일하든 그 임금을 전유하는 것은 남성이라고 결론을 내린다(Ibid: 32). 그래서 델피는 자신의 논문 제목이 암시하듯, 여성운동의 주적을 가부장 체계(patriarchal system)”로 간주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에서의 역할에 따라 계급의식이 결정된다는 허위의식에 맞서 가부장 체계로부터 규정되는 가부장적 계급의식의 우위를 역설한다(Ibid: 39). 델피의 주장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던 프랑스의 특수한 상황- 즉 가구가 (소규모 농장과 상점 등의 가족기업을 비롯한)가족노동경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기혼 여성의 활동 영역이 가정과 시장을 넘나들었던 조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틸리. 스콧, 2008: 276 참조). 여성 노동의 전유에 관심을 기울이는 델피의 주장에서 상당 부분이 농장, 작업장, 그 외 가족 사업에서 일하는 프랑스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는 것이다(Molyneux, 1979: 7). 이러한 델피의 논의가 적지 않은 급진페미니스트들에게 강력한 참조점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가내 생산양식에 초점을 둔 그의 논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개에 따라 변화된 가족양상 속에 놓인 여성억압의 기제를 놓치고 있으며, 여성 내부의 계급 분할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층적인 수준의 여성억압을 남성의 인격적 지배라는 단일한 차원으로 소급시키고 있다. 덧붙여 몰리뉴(M. Molyneux)가 지적하듯, 그는 이러한 형태의 여성 부불노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들은 비교하지 않을 뿐더러, “여성의 종속을 단순히 결혼 관계로 축소하면서 어머니의 역할과 노동시장에 대한 여성의 정착이라는 억압적인 양 측면을 설명하길 생략한다.”(Ibid: 7).

 

2) 가사노동 논쟁의 한계

 

 위에서 살펴보았듯, 가사노동 논쟁은 재생산의 정의, 가사노동의 역할, 가사노동의 가치생산 여부, 여성 노동의 양태 등을 논제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역시 가사노동의 가치생산 여부라 할 수 있는데, 가치론을 이해하는 여러 논자들의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결론은 크게 다음과 같이 양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핵심적이며, 가치를 생산한다.[각주:15]

2.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개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전자에는 미첼, 달라 코스타, 페데리치, 하트만, 델피 등이, 후자에는 벤스턴, 모튼, 보겔, 자레츠키 등이 포함될 수 있다.[각주:16] 이러한 가사노동논쟁의 구도가 가치론을 중심으로 분할되었다는 점은, 당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주의 운동의 비전을 규정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로 표상된 자본주의 비판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양 진영이 더 이상 아무런 접점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나, 비판적으로 조명될 지점 또한 있다. 특히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입장에 섰던 미첼, 달라 코스타, 제임스, 페데리치, 하트만, 델피 등 논쟁의 한 축을 형성했던 이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들 또한 공유하고 있는 한계를 간략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가치 개념의 혼동을 들 수 있다. 특히 코스타와 제임스, 페데리치 등은 가치라는 개념을 윤리적 의미에 가깝게 독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임노동자를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행위자로서 규정하는 마르크스의 논의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그 연장에서 달라 코스타와 제임스는 가사노동을 사회적 공장으로서 조명함으로써 그것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한 바 있고(Dalla Costa and James, 1971: 16), 페데리치는 여성의 부불노동을 통해 자본이 잉여가치를 전유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 자본은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뒀다.”(Federici, 1975: 3)


 그러나 가치를 생산하는, 시장에서 판매되고 구매되는 노동이라는 개념이 전통적으로 시장 외부에 위치했던 노동에 견주어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실로 가사노동이 (상품교환의 근거가 되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것과, 그것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양립가능 한 것이다. 오히려 가치는 곧 소외와 직결되는 것이었는데, 예컨대 초기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의 현실화는 너무나 심하게 탈현실화로 나타나서, 노동자가 아사에 이르고 말 정도로 탈현실화된다. 대상화는 너무나 심하게 대상의 상실로 나타나서, 노동자는 필수 불가결한 생활 대상들뿐만 아니라 노동 대상들까지 상실하고 만다. (...)노동자는 (...)자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에게 그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마르크스. 엥겔스, 1991a: 73)

 

또한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찾아 놓고 있는 동안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동안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을 토막 내어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판매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마찬가지로 경쟁의 모든 부침들, 시장의 모든 변동들에 내맡겨져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오직 가장 간단하고, 가장 단조롭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만을 요구받는 단순한 기계 부속품이 된다.”(마르크스. 엥겔스, 1991b: 406-407)

 

 그리고 이는 후기의 마르크스에게도 표현을 달리하여 마찬가지로 유지되는 인식이다. “노동수단은 노동자를 때려죽인다.”(마르크스, 2008a: 581) 또한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생산한다. (...)자본가를 위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즉 자본의 자기 증식에 이바지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마르크스, 2008b: 700) 즉 마르크스에게 가치의 생산은 곧 착취의 문제이자 사회형태의 문제였고, 따라서 누군가가 가치의 생산에 참여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그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부분으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 주관적으로는 그가 소외의 조건에 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각주:17] 그리고 가사노동, 양육 등을 비롯한 재생산영역에서 여성들이 수행했던 종류의 활동이 위와 같은 의미에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치를 윤리적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가사를 비롯한 재생산노동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매개적 관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무급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를 낮게 유지하는 데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갈취하도록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임금이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유동적인 것이기에 노동력의 가격에 정당한 수준은 없다는 점을 간과한다. 임금이 고정 값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은 애초에 주부가 빼앗긴, 으레 받아야 할 가치를 상정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치의 실체를 투입된 노동량으로 간주하고 그에 정당한가격을 요구하는 것은 리카르도를 비롯한 초기 정치경제학자들의 작업으로도 가능한 것이지만, 마르크스의 작업은 외려 그러한 가치가 물신주의의 중핵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일이었다(마르크스, 2008a: 144-145 참조).


 덧붙여 낮은 임금을 받으며 연명하는 가구에서는 무급가사노동이 안정적으로 수행되기 어렵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가사노동이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전반적으로 낮게 유지하게 한다면, 그것이 저소득 계층에서도 두드러지게 관측되어야 할 것이나, 실상 여성의 전업주부화는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계층들 사이에서(윤자영, 2018: 16; 강이수, 2007: 18 참조) 두드러지는 현상이었다.[각주:18]극빈층의 아내나 사별 여성은 (대개 임시직 노동자로서)가내 공업이나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대부분 전일제 노동자로 일했다. (...)이런 부류의 가족임금경제는 극빈층 가족에서 가장 일반적이었다.”(틸리. 스콧, 2008: 278) 몰리뉴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하에서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요한 장소로서 가사영역을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책임질 만큼 충분히 높은 곳에서만 가능하다.”(Molyneux, 1979: 5) 따라서 여성에게 임금을 벌어 오라는 압력이 있다는 것은 그들 가구가 궁핍하다는 표시였던 것이다(op. cit: 279). 또한 노동력의 가치는 축적의 일반적인 수준과 축적률, 주어진 사업이나 생산부문의 이윤 수준, 1차부문과 2차부문 간의 관계, 일반적인 기술적 수준과 같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다양한 결정 요인들 내에서 노동력 가치 형성에 대한 가사노동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낮다.”(op. cit: 10) 이는 분석의 범주로서의 생산/비생산 노동 개념이 규범적 개념으로 오해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정성진, 2013: 26).


 두 번째로는 노동 개념의 확장을 꼽을 수 있다(김원태, 2013: 240 참조). 예컨대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노동력 재생산을 협소한 범위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역시 생산되어야 하고, 노동력이 화폐 가치를 갖는다면 그 안에 대상화된 평균적인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양을 반영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재생산노동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소비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축소함으로써 재생산노동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말았다”(페데리치, 2013: 165)

 

 이는 좌파는 여성에게 실질적인 힘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모든 투쟁을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노동계급으로 간주해온 생산적 역할에 가사노동자로서의 여성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Federici and Cox, 1975: 19)이라는 주장과 연결되는 서술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재생산에서 가사와 양육의 위상을 깊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은 후술할 사회적 재생산이론의 합당한 문제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여타의 고용노동과 가사노동을 동일한 수준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당대 여러 논자들의 투박한 전제를 반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맥락에 따라 시장에서의 교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생산양식에서 특징적으로 대두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간과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소요되는 (생필품 등의)비용의 측면에서 재생산을 논의했던 것은, 무엇보다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노동을 수행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이 결정되는 역학을 규명하기 위함이었고, 여성 또한 여느 남성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범주를 가로지르기 때문이었으며, 가정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의 성격과 삶의 재생산 비용으로서의 노동력의 가격 사이의 관계를 논하기 위함이었다. 베로니카 비치의 말대로, “자본주의 생산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이해되어야 하는 배경은 자본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 수단과 가족의 분리이기 때문이다(Beechey, 1977: 48). 가족과 일터가 분리되는 과정은 동시에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을 의미한다.

요컨대 경험세계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노동은, 이런저런 신체적 소요를 야기하는 구체적 노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용관계 속에서 이뤄지며 화폐와의 교환 속에서 수행되는 임금 노동인 이상, 구체적 노동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거쳐 이중화되고, 동시에 생산, 교환, 유통, 분배의 전 과정에 유기적으로 참가하는 추상적 노동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을 구분한 까닭이며, 전자를 사용가치에, 후자를 교환가치에 조응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 성질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은 내가 처음”(마르크스, 2008a: 96)이라 설명한 이유이다. , 마르크스에게 (상품)‘생산개념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매개된 것이며, 그 속에서 특징적인 것이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용례에서 생산노동이란 ‘(자본주의적)’, 혹은 ‘(가치를 생산하는)’이란 표현을 전제한 상태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떤 물적 존재는 상품이 아니면서도 유용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인간노동의 산물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산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것이지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단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즉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엥겔스 주: 또한 단지 타인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중세의 농민은 영주에게 바치기 위해 세곡을 생산했고, 성직자를 위해 십일조 곡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세곡과 십일조 곡물은 모두 타인을 위해 생산된 것이면서도 상품이 되지는 못했다. 상품이 되려면 생산물은 교환을 통해 그것이 사용가치로서 쓰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아가야만 한다.}”(Ibid: 95)

 

 이때 사회적 사용가치라 함은, 곧 노동자가 어떤 재화를 생산할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 한 채, 시장에서의 교환을 염두에 둔 생산을 실행하는 작업장에 고용되어 전체 산업과의 분업 속에서 사용가치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동자의 생산물은 상품으로 나타나고, 상품은 단지 동질의 노동이 응결된 것일 뿐이며, 또한 그것들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도 마찬가지로 직물이나 실에 대한 생산적 행동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노동력의 지출로서만 간주된다.”(Ibid: 100) 바로 이러한 무차별한 인간노동의 지출로서 셈해지게 되는 노동은 죽은 노동’, 추상적 노동으로서, 그러한 속성을 통해서 그것은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목적이 정해진 형태로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고, 이 구체적인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그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Ibid: 102) 여기서 이중적으로 수행되는 노동은 임노동이 보편화된 조건 하에서의 노동이 실행되는 형식이며(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수수께끼와도 같은상품의 이중성을 형성하는 기제이다. 상품형식이 담지하는 교환가능성은 바로 총노동의 부분으로 승인된 개별 노동, 즉 사회적 평균 노동으로 수렴하는 추상노동으로서, 이는 곧 노동자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자본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용관계 바깥에서는 그러한 이중성을 통한 가치 형성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경제 부문에서 셈해질 수 없는 영역에서의 유용노동과, 그와 구별되는 노동의 상이한 역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각주:19]


 세 번째로는 추상적 수준에 머무른 재생산 개념을 들 수 있다. 재생산영역은 일찍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장소로서 미첼의 작업(Mitchell, 1966)에서부터 꾸준히 주목된 것이었으나, 이후의 논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재생산의 개념은 생산과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여성억압과 이론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기되었다. (...)가부장제의 개념과 관련하여, 재생산이라는 용어의 실체적 의미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다. 몇몇은 단순히 가족의 명백한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과 재생산을 동일시했다. (...)재생산 개념을 정의하는 데에 따르는 문제는 그 잠재적 의미의 광범함에서 비롯된다.”(Vogel, 2014: 27-28)

 

 보겔이 지적하듯, 당대의 논의 지형에서 재생산영역은 집안일 및 양육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들은 정작 출산을 통한 노동인구의 재생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으며(보겔, 1988: 240 참조),[각주:20] 가사노동, 양육, 출산 간의 역학과 위상을 규명하진 못했다. 요컨대 가사노동과 양육과 출산 중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무엇인지, 그들 중 여성억압에 1차적인 작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노동력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요인은 무엇인지, 만약 가사노동이 상품생산에 기여한다면, 양육과 출산은 어떤 방식으로 생산과 관계를 맺게 되는지 등 중요한 질문들이 해명되지 못한 채 남겨지게 되었다.

네 번째로는 노동시장에 대한 여성의 편입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이는 가사노동논쟁이 결혼과 연동된 가사노동 이외의 억압 요인들을 인식하는 데에 취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양식과 여성의 문제를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는 미첼의 작업(Mitchell, 1966) 이후로, 노동계급정당이 여성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뤘음을 성토한 코스타와 제임스의 작업(Dalla Costa and James, 1971: 16),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 거부감을 표현한 콕스와 페데리치의 작업(Federici and Cox, 1975) 등을 거쳐 마르크스주의와의 불행한 결혼을 성토한 하트만의 작업(Hartmann, 1979)에 이르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고려가 부재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경제영역을 완전히 남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비록 여러 논자들이 여성이 가정 내부에서 일하든 외부에서 일하든 가사가 여성의 책임으로 남았다는 데에 착안하여 논의를 전개했으나, 정작 경제적 수준에서 변화된 여성억압의 조건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었다. 루이스 틸리와 조엔 스콧에 따르면, 이미 1900년대에 이르러 가정과 일터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여성들 또한 집에서 거리가 먼 곳이나 가구 환경과 떨어진 곳에 고용되며, “과거에 여성이 고용되어 있었던 부문이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여성직무가 출현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이 사무직이나 판매직, 초등교육과 같은 직업에 진입하면서, 이 분야의 남성 노동자를 대체하며, “새로운 유형의 여성화된교용이 특히 서비스 부문에서 빠른 속도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틸리. 스콧, 2008: 232). 예컨대 1910년대 중반의 영국의 초등학교 교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5%에 달했으며(Ibid: 229), 1956년의 파리에선 여성이 전체 사무직 종사자의 54%를 차지했고(Ibid: 227), 1954년만 해도 프랑스 전체에서 의류와 섬유 제조업 부문에 종사하는 여성 비율은 각각 81%, 56%였다(Ibid: 224). 또한 미국의 여성 경제활동인구 비율은 195028.6%에서 196040.45%을 거쳐 1999년의 60%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상승폭을 기록했다.[각주:21] 그 연장에서 가사노동 논쟁의 당사자들은 여성의 고용이 지니는 양가적 의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베로니카 비치(V. Beechey)가 말했듯,

 

노동자의 가족 구성원 전체가 노동시장으로 들어올 때 노동력의 가치는 낮아지는데,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 비용이 모든 노동인구에게 퍼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노동일은 줄어들고, 더 많은 잉여가치가 추출된다. 이것은 현대 산업의 초기 단계에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이 광범하게 고용되어 있었던 면직 산업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마르크스가 일반화한 보편적인 경향이다.”(Beechey, 1977: 52)

 

 

3. 사회적 재생산이론의 개관

 

 한편 이 논쟁을 경과하며 적잖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급진 페미니스트들에게 일종의 대안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은 이중체계론(dual system theory)’이었다. 아이리스 영(I. Young)이 비판적으로 명명한(Young, 1981: 44) 이 입장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앞서 간략히 언급했던 하트만의 작업을 꼽을 수 있다(Hartmann, 1979: 21). 이에 따르면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가장의 권력과,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동시에 놓임으로써 이중의 속박에 구속된다. 따라서 여성은 이중의 구속에 대한 적대적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중첩되는 영역을 가지지만 각기 상이한 대상과 설명력을 지닌 독자적인 체계이다. 이중체계론은 여성의 억압기제를 시장과 독립된 가정영역에서 찾으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규정력을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여성억압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한 시도였지만, 가부장제 혹은 가족구조와 자본주의 간의 위상차, 그들이 맺는 유기적 연관 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각각을 분리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기계적인 구분에 머무르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아이리스 영이 지적했듯, 적잖은 이들에게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을 대충 수습하려는 것이었고(op. cit: 44),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젠더 불평등을 해명하는 문제를 연기시킨”(Arruzza, 2016: 11)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심급들을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이러한 경향은 계속해서 추가적인 억압 기제들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성했는데, 예컨대 계급, 젠더에 '인종'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로제나일(S. Roseneil), 월비(S. Walby)등의 삼중체계론에서 이중체계론의 아포리아는 그대로 반복되며 드러나게 된다(Ibid: 12).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대부분이 이러한 이중체계론을 공유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op. cit: 44), 보다 유기적인 역학을 제시하는 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곧 사회재생산 이론[각주:22]으로 발전되기에 이른다.


 사실 사회재생산이라는 범주를 통한 분석의 경향들은 노동계급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사회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 및 문화, 제도의 영역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지만[각주:23] 여성운동 진영에서 용례화 된 사회재생산은 1. 청소와 빨래, 밥 짓기 등을 비롯한 가사활동 전반(노동자 계급의 일상과 노동력의 재생산), 2. 노인과 병자, 아이를 기르고 보살피는 돌봄과 양육(가족 구성원 삶의 재생산), 3. 자녀의 출산(노동인구의 생물학적 재생산)등을 아우르는 것으로 범주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리스 보겔(Lise Vogel)은 이러한 재생산의 용례를 사회적 재생산, 혹은 생산 조건의 재생산 즉 노동력의 재생산과 인간 혹은 생물학적 재생산”(Vogel, 2014: 28)으로 규정하며[각주:24], 80년대 초반, 자신의 저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차별: 단일 이론을 향하여(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Toward a Unitary Theory)󰡕를 통해 사회재생산 이론을 체계화 시켜낸 바 있다. 당시 재생산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여성운동의 전선을 규정하는 일이자 여타 저항운동과 여성운동이 맺을 역학을 규명하는 일이었기에[각주:25],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의 관심은 가사 및 양육 영역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도 이들을 '재생산'의 범주에 정박시킴으로써 가사/돌봄노동이 '생산'영역과 달리 가치의 발생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논증하며, 이중체계론의 비유기적 방법론을 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Ibid: 157-182). 이는 기존의 논의들에서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가사노동 및 가부장제 등의 요인을 자본주의 재생산의 범위와 역할 속에서 파악하고, 가사, 양육, 출산을 생산양식과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포착하려했던 시도였다. 보겔은 다음과 같이 쓴다: “레나테 브리덴탈의 말대로,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는 보다 거대한 역사적 변증법 내에서의 변증법이다. 즉 생산양식의 변화는 재생산양식의 변화를 야기한다.’” 그에게 이 변증법은 무엇보다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Ibid: 27).

 

 “비록 자본주의적 지배의 시대에 동등한 권리의 지위와 가사노동의 성격에서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착된 것으로 남아있다. 많은 계급사회에서 그러하듯, 지배계급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최소한의 필요노동 등 여러 방식으로 노동력 재생산을 안정화한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요구될 것이고, 여성에 의해 불균등하게 수행될 것이며, 필시 남성 우위의 시스템을 동반할 것이다. (...)노동계급 가족은 본질적으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혈족 기반의 장소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가족의 가구는 노동력의 담지자를 보존하고 갱신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책임을 지닌다. 필요노동의 가정적 부분을 수행하는 것은 노동계급 가족 가구의 물질적인 회전축을 이룬다.”(Ibid: 176-177)

 

 따라서 노동계급가족은 노동력 재생산과정에서의 성별화된 분업을 통해 여성억압의 보고가 되며, 여기서 임노동자를 위해 무급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상황은 객관적으로 양성간에 적대적인 관계를 야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것이 유발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수준의 불평등 역시 객관적으로 계쟁의 무대를 열어놓는다:

 

이 같이 사적 가족 가구 내의 항상적인 긴장감 속에서 여성억압은 순전히 초역사적으로 적대적인 [가사]노동의 성적 분할에 근거한, 가족 속에서 구현된 남성에 의한 억압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과 불평등의 영구화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성적 분할이나 가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에 필요한 가사노동이다.”(Ibid: 177)[각주:26]

 

 요컨대 보겔의 작업에서 성차의 문제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양식에 매개된 것으로서 조명되며, 가사노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성별분업 및 남성우위는 자본주의적 노동양태, 계급문제 등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것으로 제시된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계급구조가 재생산을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게끔 규정하는 1차적인 작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보겔의 작업이 2013년 영미권에서 재출간 된 뒤로 다시금 촉발된 논의 속에서, 티티 바타차리아는 적극적으로 사회재생산이론의 강점을 주장했다(Bhattacharya, 2017). 이 속에서 마르크스의 작업은 완벽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되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며, 비판적으로 계승되어야할 전통으로 조명된다. 콜린 바커(C. Barker)는 바타차리아의 논의를 소개하며, 사회재생산 이론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과정은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하거나 자본과 국가의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노동자들을 직장으로 데려오는 것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필요 자원이나 재생산 수단에 인간 활동을 적용하는 과정들에서 노동력은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한다.”(Barker, 2017)

 

 바타차리아는 사회재생산이론이 바로 다음과 같은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젠더 권리들을 계급 문제와 분리시킨다면, 젠더 권리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여성 CEO들이 모든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여 행동하겠는가? (...)노동자 계급은 일터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 노동자는 또한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그녀의 아이들은 공공 공원에서 놀고 지역의 학교에 간다. 그리고 때로 그녀는 은퇴한 어머니에게 요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달리 말해,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하는 주요 기능들은 일터 외부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누가 이 과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가? 자본주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생산 영역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맹렬히 사회적 재생산을 공격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공적 서비스들을 공격하고 돌봄(care)의 부담을 개별 가족들에게 넘기며 사회적 돌봄을 축소시키는 이유이다. 즉 노동자 계급 전체를 취약하게 만들고 작업장에서의 공격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Bhattacharya, 2013)[각주:27]

 

 이는 사회재생산 이론이 위기의 각 국면에서 재생산이 재조정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과거에 직접 시장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여러 영역을 사유화하고 상품화 하는 방식으로 재조직화 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브레너(J.Brenner)와 라슬렛(B.Laslett)을 참조하며 아루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social) 재생산은 전체 사회의(societal)재생산 과정 내 필요노동의 부분으로서 기존의 삶을 유지하는 일과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일의 중심성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이러한 일은 주로 가족 단위 내에서 수행되지만, 항상 필수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가족 내에서 혹은 복지 형태로 국가에 의해서, 혹은 시장 내에서 수행되는 이 일의 비중은 자본주의 하에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상황들에 따라 변화한다.”(Arruzza, 2016: 10-11)

 

 그는 금융 위기와 경제 위기 만으로는 현재 자본주의의 사회(societal) 생산/재생산 양식의 위기를 설명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재생산을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안정화, 지배, 소외 과정의 앙상블"로서 간주할 것을 요청하고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젠더, 인종관계에 관련된 [생산과]상이한 사회적 배치를 야기했다고 말한다.(Ibid: 11). 이 연장에서 리욱스(S. Rioux)는 사회재생산 이론의 프레임이 지리학적 수준에서 미개척된 공간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재조직화 경향을 비롯한 이주노동까지도 전지구적 재생산의 배치 조정의 과정으로서 주목하도록 한다(Rioux, 2014: 6)고 주장한다.

한편 사회재생산의 근본 개념이 기능주의적이며 생물학적 결정론, 환원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은 보겔이 생물학적 재생산을 포괄한 이후로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이어져온 사회재생산 이론의 주장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사회의 모든 부를 만든다면, 노동자는 누가 만드는가?”(Bhattacharya, 2017: 1) 위와 같은 주장을 염두에 둔 채, 바레트(M. Barret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재생산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보증하는 것이 생물학적 재생산에서의 여성 역할이라 주장하는 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 기능주의의 위험과 관련되며 (...)두 번째로, [재생산 개념에 기댄]그러한 분석이 어떻게 (세 가지 모든 의미에서의)재생산과 생산의 관계를 적절히 탐구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는 (필시 생물학적 재생산을 가리키는)재생산 관계가 가부장적인 것이자 자본주의 생산관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서술될 때 특히 첨예해진다.”(Barrett, 1988: 20-21)

 

 예컨대 세콤베(W. Seccombe)와 같이 주부의 노동이 경제적 수준에선 일상적이고 세대적인 기초 위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선 자본주의 생산에 의해 요구되는 지배와 예속관계를 재생산한다고 간주하는 경우,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자체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여성억압의 구체적인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Ibid: 23). 또한 젝슨(S. Jackson)에 의하면, 사회재생산 이론의 용례에서 보이는 개념구분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생산과 재생산의 이러한 구분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고, 무의미하며, 모든 생산과정이 동시에 재생산과정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반한다. 우선 무언가 생산되지 않으면 재생산도 있을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생물학적 재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을 뒤섞는 문제를 야기한다. 여성의 노동이 프롤레타리아 혹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라 할 때, 그 함의는 여성이 아이를 가지기에 재생산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재생산되는 모든 복잡한 방법들은, 여성의 종속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생식적 능력으로 축소된다.”(Jackson, 1999: 19-20)

 

 아루자는 이러한 입장이 여성억압을 해명함에 있어 여타의 환원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개념에 기대어 대안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오히려 억압의 기제를 해명함에 있어 이데올로기로 우회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생해왔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시초축적 과정이 젠더이데올로기와 젠더 불평등을 만드는데 근본적으로 기여했다는- 제기됨직한 반대 주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Arruzza, 2016: 21). 그에 따르면,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 자체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가 없지만, 오히려 재생산과 성적 차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이 구체적인 특징을 지니는 특정한 사회적(societal and social) 재생산양식에 위치하기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Ibid: 22)

사회재생산 이론에 이르러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가사노동이 잉여가치 생산에 직접적으로 복무한다는 이론적 오류가 소거된다는 것이다. 리욱스의 말대로, 오히려

 

 “사회재생산론자들은 인간이 일상과 미래의 필요를 부양하기 위해 협력하는 방식을 강조하면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역사적 분석에 있어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필요한 것은 노동력 상품과 사회적 절차들, 모든 생산과 교환의 바탕이 되는 공동체의 창조와 유지와 관련된 인간관계에 대한 일상적이고 세대적인 재생산이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필요노동과 잉여가치로의 노동일의 분할이 은닉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임금 형태의 물신주의에 대한 [생산중심적인]두 번째 표현물을 구성하며, 삶 자체의 유지와 재생산에 본질적인 사회적 관계의 전체 클러스터를 은폐한다고 주장하면서 더 나아간다.”(Rioux, 2014: 4)[각주:28]

 

 이는 가사노동논쟁을 정제시켜낸 긍정적인 계기이지만, 여전히 해명해야할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생산과 재생산의 거리를 지나치게 벌릴 경우 양자가 총체적인 자본 순환의 수준에서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있다는 주장은 사회재생산론자들의 논거이나, 상론되는 작업에 따라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기도 하다. 바타차리아를 비롯한 여러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산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장소로서의 재생산 영역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회의 총노동 속에서 무차별한 인간노동의 지출로서 동질화된 추상적 노동,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을 통한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경험세계에서 생산이 일정 정도로 재생산영역에 의존하는 것과 별개로, 화폐로 매개되는 고용관계 내부의 사회적 실체로서의 '평균 노동'- 논리적으로 재생산을 선행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할 이후 생산의 우위를 지탱하는 자본의 논리 자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생산은 생산의 효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인과는 바로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물론 몇몇 논자들은 생산 영역만을 강조하는 경향들을 문제적으로 조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자체이며, 그러한 분리 속에서 생산은 필연적인 가상으로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실제로 멈춰져서는 안 될 엔진의 동력이고, 누구도 그것이 멈춰질 것이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는 작업은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을 통해 보여주었듯, 분할 자체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나, 그에 맞서 재생산영역을 강조하는 것은 외려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라는 문제적 현상을 그 외부에서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이 이중체계론에서부터 가시화된 이원론을 미처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Depaolis, 2018)은 바로 재생산영역을 상정한 그들의 전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각주:29]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사노동논쟁에서 뒤섞여온 논점들을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범주를 통해 정리하였지만,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한 것 이외엔 하나의 일관된 이론이라기보다, 재생산영역을 생산과 별도의 역학을 갖는 독자적인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중요성을 생산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볼 것을 주장하는 느슨한 요구에 가까워 보인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사회재생산 이론의 논자들에게 사회재생산이란 점차 미개척된 공유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거나, 혹은 강탈에 의한 축적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조명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각주:30] 예컨대 바타차리아는 공간적 사고의 중요성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두개로 분리되어있지만 결합된 공간이 있다. 가치 생산의 공간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공간이 그것이다. 그러나 (...)노동력은 단순히 집에서 보충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세대적으로 재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개별적인 노동력 재생의 장소를 형성할지 모르나, 그것만이 어떤 특정한 사회의 노동계급이 생산되는 조건과 관습, 쾌적함의 정도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공 교육과 건강관리 시스템, 공동체 내의 레져 시설, 연금과 노인 수당 모든 것이 함께 역사적으로 결정된 관습을 구성한다.”(Bhattacharya, 2017: 7)

 

 그러나 복지 및 공공영역 일반이 재생산과 등치될 경우, 경제적, 제도적 수준에서 조망되는 사회 전체 체계의 재생산과 보다 한정된 범위의 가족, 양육, 생식의 재생산을 구분하는 사회재생산 이론 애초의 논점은 흐릿해지며, 재생산은 그 범위가 광범해져 자신의 특정된 대상을 갖지 못하게 된다. “사회적 재생산은 널리 저평가되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적 기획의 열쇠는 사회 재생산에 대한 작업을 물질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안정화시키는 것”(Winders and Smith, 2018: 12)이었다는 윈더스와 스미스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그것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작업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각주:31] 한편 마르크스는 일찍이 근대적인 가족형태와 여성 및 어린이의 예속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예속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맺는 관계를 언급한 바 있다:

 

 “가족 안에서의 노동의 자연스러운 분할에 기초하고 있는 (...)[생산영역에서의]노동의 분화와, 서로 대립하는 개별 가족단위들의 사회적 분화로 인하여, 노동과 그것의 산물인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양적, 질적으로 동시에 (...)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의 핵심, 즉 이것의 최초의 형태는 가족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아내와 자식들은 남편의 노예이다. 가족 안에 있는 이 잠재적인 노예제도는, 비록 아직 미숙한 단계이지만 최초의 사유재산이며, 심지어 이 초기 단계에서조차 가족은 그것을 타인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권력이라 부른 현대 경제학자들의 정의와 완벽히 일치한다.”(Marx and Engels, 2000)

 

 차이의 정치와 적대의 정치를 구분하며 반자본주의 투쟁의 총론 안에서 여타의 운동세력들이 연합할 것을 주장하는 여러 논의들이 무색하게도, 마르크스는 여기서 페미니즘의 독립적인 공간을 염두에 둔 것처럼 가족을 경제적 수탈의 공간으로 간주하는 묘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르크스의 1차적인 관심은 사회적 관계가 객관적인 상품생산의 조건에 의해 매개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었다.[각주:32] 이런 측면에서, 역사적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설정은 마르크스의 논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여기에 착안하여,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1차적으로 가족을 생산에 매개된 억압의 공간으로 조명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전선을 제시해왔다. 이는 재생산이론이 마르크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바타차리아의 단언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온 기조이다(Bhattacharya, 2017: 14). 그리고 그 억압의 양태가 역사의 국면마다 다른 형태를 띤다면, 가장 긴요한 작업은 소위 가족임금제 이후’, 혹은 가족의 붕괴 이후’, 여성억압의 자리가 어디가 될 것인지에 대해 답하는 일이다. 여성운동이 동력을 상실하고 보수화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찾는 작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답하는 일은 사회재생산 이론의 프레임을 비판적으로 대질하며 재생산 영역의 변화를 가늠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4. 산업역군 혹은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여성과 재생산 영역의 변화

 

 가족임금제를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초로 간주했던 하트만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옳은 진술이지만 또한 그릇된 진술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가족임금이 가정에서 여성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성 역할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옳은 진술이지만, 가족임금의 해체가 곧 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없애는 작업과 직결될 것이라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그릇된 것이었다. 일찍이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했듯(프레이저, 2017), 고숙련, 고임금, 고성장 산업을 기반으로 지급되었던 1인 남성 가장 모델과 연동된 가족임금제는 탈공업 사회에서 점차 축소되며 새로운 형태의 분배와 사회적 관계의 재배치를 요청했으나, 이제와 분명해진 것은 그것이 취약한 조건을 감내하는 산업역군으로 여성을 전환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각주:33] 정확히 말해, 가족임금제의 해체는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제거하는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 억압의 기초를 심화시켜 왔다. “점증하는 노동시장 불안정성의 결과로서의 가족임금 모델의 쇠퇴, 불안정한 고용, 특히 남성 실질임금의 하락, “열악한 노동조건의 일반화, 노동의 임시직화, 저임금 일자리와 불안정 고용을 포함하여, 노동력의 여성화를 야기했다”(Rioux, 2014: 6)는 진단은 오늘날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각주:34] 지난 30-40년간의 두드러진 변화라고 할 수 있을 노동력 시장의 여성화는 제조업 부문에서 서비스업 부문으로의 전환을 반영하는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체제의 등장, 신자유주의적 고용유연화, 상향평준화된 학력 수준, 경제적 자립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전환들이 맞물린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강이수, 2007: 7 참조), 그 중에서도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은 고용유연화의 범주이다. 한국의 경우, "주된 소득원인 안정적인 남성 임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저축과 내 집 장만이 가능했기 때문에여성이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 후 취직해서 사무실의 이 되었다가 결혼과 동시에 노동시장을 떠나는 것“(윤자영, 2018: 16)80-90년대 초반까지의 풍경이었다면, 오늘날 여성은 불안정한 임금을 받는 남성가장을 보조하기 위해 기혼 상태에서도 취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201710월 기준으로 유배우 가구는 1,2224천 가구이며, 이중 맞벌이 가구는 5456천 가구로서 전체 유배우 가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준이다.[각주:35] 그와 동시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불안정한 일자리에 내몰린다. 비정규직 전체 근로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며, 전체 임금 근로자 대비 비정규직 비율은 200126%에서 200437%, 2013년 이후로 33%를 넘기지 않고 있지만 임금 근로자중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성별 간 비중은 2018년 상반기 기준 여성 41.5%, 남성 26.3%로서, 불안정노동 부문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각주:36] 이러한 현상은 계급, 인종, 젠더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도록 한 글로벌화의 과정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각주:37]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생산의]탈집중화와 함께 이루어진 초국적기업들의 합병과 성장, 생산시설의 이전과 재조직화, 하청계약”(Acker, 2004: 2)으로서, 이들은 일국적 수준을 초월하는 동시에 국민국가의 법제도와 영토를 따라 작동하며 계급, 인종, 젠더 질서에 개입한다. 한국 역시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예외적인 지역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냈던 최근 난민을 둘러싼 반응들과, 코리안드림을 품고 온 동남 아시아계 및 중동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심화된 이데올로기적 공격, 구조조정 시도에서 여성을 주부라는 성역할에 근거해 정리해고 1순위에 올리는(윤자영, 2018: 17) 관행 등은 이러한 개입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일면일 것이며, 무엇보다 불안정성을 대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여성노동의 현황은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공공기업의 민영화, 연공서열제의 약화와 연봉제 및 성과급의 편재, 비정규직을 비롯한 탄력근로제의 체계적인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고용유연화 정책 등 IMF를 통해 관철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전체적으로 증가해온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의 배면에는 취약 노동계층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다(강이수, 2007: 20).


 그러한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재생산의 여러 부문은 역설적으로 탈젠더화 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로 2016년을 기점으로 1인가구가 가장 보편적인 가구형태가 된 데서 알 수 있듯, 혹은 인구 1천명당 혼인 건수가 5.5건을 기록한데서 알 수 있듯- 핵가족 모델조차 해체되어가는 상황에서,[각주:38]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일상적인 활동 대부분이 개인에 의해 수행되며 점차 개인의 자족적 돌봄으로 전화되어가고 있는 추세라는 점을 들 수 있다.[각주:39] 다시 말해, 재생산의 단위로서의 가족제도는 점차 와해되어가고 있다. 1인가구의 수준에서 노동력 재생산은 젠더적 분할 너머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1인 부양 모델의 소득공급한계에 따른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인해 가정영역의 여러 요소들이 서비스 경제에 편입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지적할 수 있다. 여전히 가사와 양육이 젠더화 되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이러한 상황은 동시에 가사의 시장화라는 현상과 병존하는 것이다. 기존에 가정 내부에서 가사활동을 통해 해결되었던 여러 업무들은, 점차 플랫폼 기업들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배달 대행업체 및 대형마트 상품배달 서비스의 약진, 시간단위로 아이를 맡겨놓을 수 있는 방과 후 학원 및 사설 학원 의존도의 증가,[각주:40] 청소 및 빨래에서부터 육아와 간병 등에 이르는 가사서비스 시장의 확대(윤자영, 2015: 20)[각주:41]등에 의해 점차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 가고 있다. 가족의 해체 및 1인 가구의 증대, 낮은 혼인율과 가사서비스 경제의 확장에 따른- ‘재생산 단위의 이러한 변화는 경제불황과 높은 실업률, 긴축재정과 연동된 사회보장제도의 후퇴, 결혼에 대한 인식 변화 등으로부터 과잉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그 중심에는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주로 하여 노동시장에 참가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


 이러한 지점들이 의미하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 생산의 한복판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젠더는 위와 같은 전체 생산의 조건 위에서 자신의 독립적 공간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 오늘날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 잃을 것이 쇠사슬 밖에 없는프롤레타리아의 고전적 형상을 체현하고 있다. 때로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지나친 우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바로 오늘날의 상황에서 불안정노동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요인의 규정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5. 나가며

 

 우리는 지금까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에 이르는 제2물결의 시기에 반자본주의 투쟁과 여성해방을 연결 짓고자 분투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가사노동논쟁을 거쳐, 그 논쟁의 결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사회재생산 이론을 살펴보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노동조건과 그와 연동된 재생산 부문의 변화를 간략히 일별하였다. 돌이켜 보았을 때 역사적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서 모든 것이 해명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그들의 문제설정은 사회적 실재와 물질적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근간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여전히 중요하게 참조되어야할 준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 운동의 부문들이 아무런 상호관련 없이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주장하는 듯한 현재의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변혁하기 위한 계급적 운동과 여성억압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일원화 시키는 작업은 여전히 다듬어져야 할 과제로 남아있기에, 본인은 객관적인 사회적 생산영역에서 여성이 갖게 된 양가적인 위상을 고려하는 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음을 얘기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일한 만큼의 몫을 요구할 권리라는 자유주의의 주권적 주체로는 포착되지 않는 계급 속의 여성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논할 수 있다면 본고는 그 목적을 다한 것이다.

 

201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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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I. 1981. “Beyond Unhappy Marriage: A Critique of the Dual Systems Theory,” Sargent. L(Ed), Women and Revolution, South End Press.

Winders, J. and Smith, B. 2018. “Social Reproduction and Capitalist Production: A Genealogy of Dominant Imaginaries,” Progress in Human Geography.

  1. 다른 평가지표는 모성사망비, 청소년 출산율, 여성의원 비율, 중등이상 교육받은 인구 등이다. UN.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2018. “HUMAN DEVELOPMENT INDICES AND INDICATORS: 2018 STATISTICAL” UPDATE p.38을 참고하라. http://hdr.undp.org/sites/default/files/2018_statistical_annex.pdf [본문으로]
  2. 통계청. 2018. 11.14. 「성별 경제활동인구 총괄」, 󰡔경제활동인구조사󰡕. [본문으로]
  3. 예컨대 하이디 하트만(H. Hartmann)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족임금제가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의 물질적 근간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가족임금제 하에서 1. 여성에게 지급되는 남성보다 낮은 임금은 자연스레 여성이 주부가 되도록 유도하는 동인이 되며, 2. 결과적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열악한 지위로 인해 가정에 대한 책임이 가중된다(Hartmann, 1979: 16-17). 그러나 여성운동 진영에서 언급되는 맥락에서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직종 동일임금 요구 등은 정당한 것으로, 다만 여기선 역사적으로 강제된 경제적 참여의 배면을 지적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4. 예컨대 볼셰비키는 10혁명에 뒤이어 곧바로 1918년의 1차 헌법에서, 북한은 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발족과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 승리 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더불어(물론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화민국의 1946년 헌법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제기되었으나, 헌법 반포를 전후하여 공산당과의 2차 국공내전에 돌입하며 헌정이 실질적으로 중지되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참정권을 전면적으로 천명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여성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연대 및 러시아 혁명 직후의 선구적인 여성주의적 입법들은 줄리엣 미첼 또한 인정하는 대목이다(Mitchell, 1966: 12, 29). 급진적 민족주의자들과 페미니즘의 공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프라샤드, 2015: 84-97) [본문으로]
  5. 본 지면에선 먼슬리 리뷰에서 1969년 발행된 아티클을 1973년에 재인쇄한 책자를 인용한다. 가사노동논쟁에 대한 입문적 텍스트로는 (도노번, 1993)을, 최근의 섬세한 개괄로는 (Rousseau, 2016)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여기서 벤스턴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며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임을 지적하는 에른스트 만델의 작업(Ernest Mandel, 1967. “An Introduction to Marxist Economic Theory”, Merit Publishers.)에 기대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7. 본 글에선 (M. Dalla Costa and S. James. 1971.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Bristol)에 선게재 된 버전이 아니라 ‘PetroleusePress’에서 해당 논문(“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만을 사후에 재발행한 아티클을 인용한다. [본문으로]
  8. 오해되어온 측면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의 생산중심성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거부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에코 페미니즘의 견지에서 제기된 다음의 주장(마리아, 1999: 6)을 보라: “마르크스와 그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진보론자들은 자본주의야말로 만족을 모르는 축적논리 때문에 인간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재화와 서비스의 왕국으로 인도할 이상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익의 극대화에 대한 욕구는 동시에 “생산성 있는,” 다시 말해 노동을 덜어주는 기술의 발전, 더 일반적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극할거라고.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모든 고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천년왕국” 또는 “낙원”에의 선행조건을 제시할 거라고. 그들에게는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이렇게 창출된 부의 분배가 유일한 문제였다. 자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과학기술의 발전을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코스타의 비판은 미즈 마리아 식의 비판보다 첨예한 논점을 제공하는데, 이는 코스타가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제시되어온 ‘생산에의 참여’를 논박하는 연장에서 임노동체계를 비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이에 대해서는 (와츠맨, 2011)을 참고하라. 와츠맨에 따르면, 가사기술의 발달은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성별분업을 외려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20세기 들어와서 개인과 가정의 청결기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여성에게는 변기와 욕조와 싱크대를 깨끗하게 해놓는 것이 요구되었다. 세탁기의 도입과 더불어 청결에 대한 기준이 더욱 높아짐으로 해서 그만큼 빨래의 양도 늘어났다. 또한 자녀양육과 어머니의 역할에 부여되어 있는 중요성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평균적으로 자녀수는 줄었으나 현대의 부모역할에 대한 ‘아동 중심적인’ 접근은 어머니로 하여금 훨씬 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가전제품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광고주들의 주도 아래 더욱더 가속화되고 남용되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가사노동은 가족에 대한 주부의 애정표현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는 결국 가정이 직장의 소외되고 스트레스로 가득찬 기계적인 질서로부터 피난처 역할을 해주기를, 그리고 오락과 정서적 지지와 성적 만족을 제공하는 장소이기를 요구받는다는 것을 뜻했다.”(156) [본문으로]
  10. 이렇듯 코스타 등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단지 가사노동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을 뿐더러, 점차 재생산부문 일반으로 영역을 넓혀 가며 긴장을 완화시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생식과 복지를 비롯한 재생산영역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에 의해 포위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작업을 참고하라. (Dalla Costa, 2004) [본문으로]
  11. 이하에서 인용한 페데리치의 영어 논문들은 모두 (페데리치, 2013)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면에서는 가사노동논쟁 당시의 맥락에 충실하기 위해 당대의 년도가 반영된 자료를 토대로 인용하도록 한다. [본문으로]
  12. 초기의 임노동이 젠더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외려 달라코스타의 작업에서 지적된 바 있다. (Dalla Costa and James, 1971: 2-5)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13. 반면 시초축적의 시기에 발생한 마녀사냥을 비롯한 폭력을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맥락화 하는 페데리치의 작업(페데리치, 2011)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한 비판은 (도브, 2017)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14. 자레츠키는 가사노동과 노동의 분리를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필연적 귀결로 제시하는 흥미로운 논의를 펼친바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노동이 가정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전 근대 시기와 달리,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이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상품관계를 형성하고, 또 그것에 매개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에게 공적/사적 세계의 분할은 지극히 근대 특정적 문제이자 자본주의 역사와의 전개와 관련된 문제이다(Zaretsky, 1976). 하트만은 이 저서를 비롯한 자레츠키의 초기 논문들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하트만의 논의가 멈춘 곳에서 시작하여, 가사노동 논쟁을 개괄하며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양자의 한계지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한 작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Armstrong and Armstrong, 1983) [본문으로]
  15. 몇몇 논자들은 “재생산” 개념이 논쟁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가사노동을 재생산영역으로 파악하는 시도는 줄리엣 미첼의 작업에서부터 제기된 바 있다. [본문으로]
  16. 물론 논자에 따라 보다 섬세하고 폭넓은 분류를 제시할 수도 있다. 예컨대 김원태는 당시의 논쟁 구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가사노동이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고 따라서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자본에 의해 착취된다는 입장”. 2.“가사노동이 노동력 상품(가치)을 생산하지만,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주장”. 3.“가사노동이 노동력 상품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지만, 자본에게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 4.“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잉여가치 생산적 노동’ 범주와는 무관하다는 입장”.(김원태, 2013: 231-232) 반면 정성진은 “가사노동의 생산물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 노동력상품이라고 간주하고, 따라서 가사노동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노동이며,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입장과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임금노동과 달리 가정 구성원의 직접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만 생산하며,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유지와 갱신에 기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생산적이지 않다”는 입장으로 논의의 결을 구분한다. (정성진, 2013: 14) [본문으로]
  17. 물론 임노동에 소외를, 가사노동에 비소외를 할당하는 주장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상이하게 갈린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도노번, 1993: 144-149) [본문으로]
  18. 한편 정성진은 무급가사노동의 축소 경향이 이윤율 저하로 귀결되지 않고 외려 잉여노동의 풀을 증대하여 이윤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정성진, 2013: 19). [본문으로]
  19. 이에 대해 김원태는 ‘활동’과 ‘노동’이라는 구분을 제시하나, 동시에 활동을 낭만화 하는 논의에도 거리를 두고 있다(김원태, 2013: 253-254). [본문으로]
  20. 이러한 측면에서 보겔은 외려 출산의 문제에 주목하게 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등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수행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보겔, 1988: 241-242). [본문으로]
  21. Our World in Data, 2017. "Long-run perspective on female labor force participation rates", https://ourworldindata.org/grapher/female-labor-force-participation-OECD [본문으로]
  22. 재생산을 둘러싼 논의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연합 및 상호 포섭 및 급진 정치가 상대해야할 장소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간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고, 사회재생산 이론은 바로 위와 같은 쟁점에 답하기 위한 시도로 제출되었다. 마르크스가 재생산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은 것은 확실하다. “생산과정은 그 사회적 형태와 상관없이 연속적이어야 한다. 즉 주기적으로 똑같은 과정을 계속해서 통과해야만 한다. 사회는 소비를 중단할 수도 없고 생산도 중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적 생산과정을 하나의 연속적인 관련 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갱신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곧 재생산과정이기도 하다. 생산의 여러 조건은 곧 재생산의 조건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라도 그 생산물의 일부를 끊임없이 생산수단이나 새로운 생산요소로 재전화시키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생산이나 재생산을 수행할 수 없다.”(마르크스, 2008b: 777) 마르크스가 생산과 재생산을 이분법적으로 구획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며 일부 논자들이 사회재생산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하는(황정규, 2018; Jackson, 1999: 19) 위와 같은 구절은 사실 노동력 재생산에 특정된 언급이라기보다 생산과 소비가 총체적인 자본 순환의 측면에서 수렴하는 영역들이라는 언급에 가깝다. 한편 마르크스의 젠더론과 가족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Brown, 2012) [본문으로]
  23. 예컨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토대로 최근의 학교 교육시스템을 분석하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주체 재생산의 양태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시도(Macris, 2011)에서부터, 통제의 메커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전제(專制)적 장치들 및 물질적 이익을 근간으로 하는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사회적 재생산에 접근하려는 방향(올린 라이트, 2014), 혹은 공간적 배치와 인구조정에 초점을 맞추는 도시정책에 반해 도시의 삶 전반을 구성하는 노동력 재생산, 주택시장, 교통, 여가 등의 요소를 가정 수준에서 검토하여 삶의 재생산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것을 제안하거나(Jarvis, 2001),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해진 광범한 사회재생산의 방식들과 생산양식의 인과관계를 구상하거나(Di Muzio, 2015), 육아, 간병, 가사노동 등을 통해 노동력 재생산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등(Bezanson and Luxton, 2006; Bhattacharya, 2017)의 작업들을 열거할 수 있다. [본문으로]
  24. 보다 자세한 재생산 범주의 구분으로는 (Arruzza, 2016)을 참고하라. 여기서 아루자는 전체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societal reproduction과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삶, 제도, 노동을 갱신하고 보존하는 social reproduction을 구분하며 양자의 위상 관계를 설정한다. 이에 따라 전자를 ‘사회재생산’에, 후자를 ‘사회적재생산’에 대입하여 용례를 구체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일부 논자들은 사회재생산 이론이 생산과 재생산을 병치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매개된 성적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에 여전히 이원론을 답습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결과적으로 계급을 초월한 여성의 연대에 무게를 싣는 실천적 결론에 빠질 것을 우려한다(정진희, 2017: 49, 52; 황정규, 2018). 그러나 보겔 류의 사회재생산 이론이 성차와 노동 간 관계의 문제를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 계급투쟁의 영역에서 생산적으로 확장해낸 성과를 쉽게 무시하긴 어렵다. [본문으로]
  26. 보겔의 논의의 상당부분은 마르크스,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제 2 인터네셔널을 비롯한 사회주의적 기획 속에서 고민되었던 여성해방의 쟁점에 대한 코멘트와 가사노동 논쟁 당사자들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어 있으며, 생산 체계의 변화에 따라 재생산의 변화될 양상을 그려 보이는 데에 주력한다: ‘체트킨의 텍스트 상당 부분은 혁명적 전략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쌓는 데에 집중되어있었다.’(119)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사회에는 개별 가구에서 수행되는 가사노동의 양을 줄이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자본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이 사회적 과정의 부분이 되도록 하는 사회주의의 방향에서 나온다.’(179), ‘현존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공적 생산과 정치적 삶의 측면에 대한 여성 참여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180) ‘가사노동과 여성의 노동을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182) [본문으로]
  27. 사회재생산 논의의 여러 경향들을 ‘분리와 (불)평등’, ‘평등의 이중성의 중첩’, ‘일상적 활동과 불안정성으로 병합된 영역’, ‘개인적/전지구적 수준의 돌봄’ 등의 범주들로 개괄하는 작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Winders and Smith, 2018). 사회재생산 개념을 중심으로 󰡔자본󰡕에 대한 페미니즘적 읽기의 가능성을 살피며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자󰡕에서 제안된 마르크스 독해의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참조하는 작업은 다음을 참고하라. (Power, 2017) [본문으로]
  28. 리욱스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개념을 ‘노동력과 노동의 구분, 생산중심적 접근 내부에서의 노동 개념이 갖는 한계, 노동력의 구체화된 본질’이라는 세 층위로 나누어 분석하며 사회재생산 이론이 여러 층위의 물신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흥미로운 논제를 주장한다. [본문으로]
  29. 데파오리스의 리뷰는 사회재생산이론이 마르크스의 어떤 개념도 사수하지 않을뿐더러 생산과 재생산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추상화에 맞서 (아마 비경제영역의 중요성을 암시하기 위해 적시되었을)살아있는 경험을 내세우는 몇몇 논자들의 생철학적 진술을 반박한다. 여기서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사회재생산이론이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0.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재생산의 특징을 “돌봄의 위기”로 조명하는 프레이저의 작업과, 노동력에 대한 세대적인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하여 연금제도를 분석하는 사리타스 오란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Fraser, 2017; Saritas Oran, 2017) [본문으로]
  31. 사회재생산 이론의 최근 흐름을 보다 상세하게 개괄하며 비판적으로 요약하는 작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윤자영, 2012) [본문으로]
  32. 발리바르의 경우, 알튀세르가 언급한 바 있는 과잉결정의 문제틀을 보다 다듬어 모순의 복수성을 논하는데, 이에 따르면 단일 모순의 여러 현상 형태를 가정했던 기존의 모순론과 달리 계급적대와 성적적대는 동일한 위상에 자리매김 된다. 이처럼 모순의 복수성과 그에 따라 상이한 운동세력간의 접합을 도입하는 것은 이른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테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1991)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33. 물론 자본이 여성의 노동을 가만히 놔둔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윤자영, 2018: 16)은 90년대 이전 한국 노동시장의 젠더 분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내부 노동시장은 주로 남성을 충원하여 고용 안정과 가족부양에 충분한 연공 임금을 제공한 반면, 내부 노동시장 진입이 가로막힌 여성들은 고용안정, 근로조건, 직업적 전망이 열악한 비정규직이나 영세 사업장에 취업하여 외부 노동시장을 채워왔다.” [본문으로]
  34. 시공간을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현상 형태를 염두에 두며 각국 자유시장경제의 민간부문 노동시장 자체가 어떻게 젠더화 되어 있는지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고. (Estévez-Abe, 2009) 논의의 많은 부분이 젠더를 기능주의적으로 파악하며 국가부문의 고용형태에 대한 묘사가 누락되어 있다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에 치중되어 있으나, 노동시장의 젠더화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일별할 수 있다. [본문으로]
  35. 통계청, 사회통계국 고용통계과, 2018. 󰡔2017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부가항목) 맞벌이 가구 및 1인 가구 고용현황󰡕. [본문으로]
  36. 통계청, 사회통계국 고용통계과, 2008.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 2018. 「비정규직 고용동향」, 󰡔경제 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본문으로]
  37. 물론 글로벌화와 관련된 시기 구분과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지는 논자에 따라 갈리는 쟁점이지 만(Acker, 2004), 본 글에서 글로벌화는 전 세계적 수준에서 정보화 및 금융화가 완성되어 갔던 20 세기말에서 21세기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8. 민경혜, 2018년 4월 5일 “540만 가구 '나 혼자 산다'…1인가구 비중 가장 높아”, 뉴스 1. 2018년 11월 27일 접속. http://m.news1.kr/articles/?3281369#imadnews [본문으로]
  39. 통계청, 조사관리국 인구총조사과, 2018. 「1인 가구의 현황 및 특성」. [본문으로]
  40. 통계청, 사회통계국 사회통계기획과, 2018. 「2017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자료에 따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본문으로]
  41. “정부의 사회서비스 재정지원 사업으로 가정 대상 서비스 중개업의 규모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가사서비스 이용 층의 다양화를 고려할 때 가사서비스 시장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인식이다. 과거에는 고소득층 중심의 이용이 많았으나 지금은 1인 가구, 맞벌이 가구, 젊은 세대 등 이용자층이 다변화되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용자들도 가사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이유로 육아 및 자녀교육, 직장생활, 부모간병을 들었다. 부유층이 소비하는 사치재 성격의 서비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여성의 경제활동으로 직접 가사를 처리할 수 없는 가정에서 이용하는 서비스의 비중이 높아져 가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