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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제 3세계라는 보편사: 저 낮은 거대서사를 위하여

by 정강산 2018. 10. 26.

(서교예술실험센터 연구지원 프로젝트 오픈 렉쳐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3세계라는 보편사: 저 낮은 거대서사를 위하여



정강산

 

 

3세계= 개발도상국?


스피박이 한 대담에서 나를 제 3세계 여성이라 분류하지 말라고 주문했던 것은 제3세계의 이념이 퇴락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일 것이다.[각주:1] 물론 그는 본인이 대도시의 중산층 출신임을 언급하며 흔히 제3세계 국적 출신들에게도 국가적, 인종적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변적이고 복수적인 정체성이 관류함을 얘기하고자 했겠지만, 3세계를 통해 스스로를 기꺼이 재현했던 지식인들(예컨대 이집트의 아이샤 압둘-라만, 소하이르 알-콸라마위, 후다 샤라위, 세자 나바라우이, 나바위야 무사, 멕시코의 아말리아 카바예로 데 카스티요 레돈, 도미니카의 미네르바 베르난디노, 브라질의 베르타 루츠 등의 페미니스트들, 또는 프란츠 파농과 에메 세제르를 비롯한 작가들)을 떠올려 볼 때, 스피박의 신경질적인 응답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요컨대 제3세계라는 개념은 이제 일말의 급진성도 없이 편견을 실어 나르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족쇄이자 낙인으로 여겨진다.

 

허나 본 렉쳐에선 3세계(The Third World)”라는 기획을 상실된 역사의 마지막 (유토피아적-즉자대자적) 서사의 사례이자 생산양식의 적대를 상징화해낸 대항기표로서 조명하고자 한다. 발전도상국, 남반구의 저개발국가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것으로 보이는 3세계라는 개념이 과연 어떻게 서사이자 대항기표로서 조명될 수 있을까? 우선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본 개념이 제안되었던 시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1950년대의 일이었다. 1951년 브라질의 한 잡지에서 3개로 분할 된 세계에 대해서 논했던 알베르 소비는, 1952814일 파리의 <르 옵세르바퇴르>에서 명시적으로 3세계를 논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앙시엥레짐을 거부하며 새로운 계급으로 출현한 부르주아지를 제 3신분으로 표현했던 시에예스의 논의를 참조하여, 3세계를 제 3신분에 유비했다: “궁극적으로, 무시당하고, 착취 받으며, 경멸당한 이 제 3세계는 제 3신분처럼, 중요한 존재가 되길 원한다.”[각주:2] 소비를 통해 성문화된 이 개념은 영어권에선 64년 피터 워슬리의 작업(The Third World: Culture and World Development) 이후로 정례화 되었기에 다소의 시차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가들이 어떤 정치적 이상과 열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본의 전지구화와 제3세계의 관계


오늘날 제 3세계를 정의하는 여러 문건을 찾아보면, 새삼스럽지도 않게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앞서 지적했듯 그것이 빈곤, 저발전상태에 놓인 개발도상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굳혀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3세계라는 용어는 소련이 붕괴한 이후로 경제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적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련의 붕괴와 제3세계의 이상의 몰락이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이에 흔히 제출되는 답변은 애당초 제 3세계가 냉전을 배경으로 태동한 기획이었기에 냉전의 종식 이후론 그 문제의식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설명은 추상적이다. 3세계의 몰락은 소련을 한 축으로 두던 유토피아적 서사의 소멸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정치체제와 대타협을 하게 된 소련은 점차 자본주의 체제와 구별되는 종별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며 독립을 요구하는 여러 위성국들의 요구와 시민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해체되기에 이른다. 점차 식량과 고부가가치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소련이 80년대 중반부터 석유가격의 하락을 맞이하며 열악한 경제상황에 놓여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소련의 내적 모순을 고려해야 하나, 근본적으로는 191711월 건국초기부터 미국과 서유럽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체제와 벌인 경제적 발전이라는 경주에서 패배를 시인하게 된 계기가 바로 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 노선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동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제 3세계 기획의 몰락인데, 이 과정에서 제3세계는 싱가포르로 대표되는 친서방적 발전국가 모델의 부상과 국제금융 기구에 진 부채로 점차 대안적 경제 블록 및 국제 질서의 구축이라는 이상을 져버리게 된다. 군비축소를 외치면서도 결과적으로 군비경쟁에 손을 뗄 수 없었던 중국, 인도,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 보이듯, 혹은 상대적으로 국내 계급투쟁에 무신경했던 것에서 보이듯, 3세계 국가들의 내적 모순을 언급하지 않을 순 없으나 전지구적 금융체계의 심화와 달러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줄기차게 가해진 외적 요인을 강조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모두는 세계 체계적 수준에서의 자본축적체제의 전도사로서의 IMF와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마셜플랜을 통한 제1세계 국가들 간의 경제블록이 점차 지구 전역으로 퍼져가고, 이내 전 세계적 경제 질서의 표준이 되어가는 과정과 관련된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기 이후 채택된 변동환율제는 금융시장의 탈규제를 이끌었고, 70년대말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이루어진 대처와 레이건의 금융자유화 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의 한 축을 형성하며 6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유로마켓의 팽창에 따른 금융세계화를 완성시켰다.[각주:3]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국가의 쇠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요컨대 모이쉬 포스톤(Moishe Postone)이 지적하듯, 사실 과거 20년의 자본주의 발전은 국가 개입주의를 약화시키고 거기에 한계를 부과함으로써 이전 시대의 명백한 추세를 역전시켰다. 이것은 서구의 복지국가 위기-케인스주의의 종언을 예고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적 동학을 명시적으로 재확인한-를 통해서나 동구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당들의 위기 및 붕괴를 통해 분명해졌다[각주:4]는 것이다. , 자본주의로부터 여전히 공동성을 보호하는 보루로 남아있던 사회국가의 소멸과, 사회주의의 소멸, 3세계 기획의 소멸은 자본주의가 전지구적 수준에서 완성되어가는 과정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동일성의 완성을 가리키는 금융'세계화'라는 개념이 어렴풋이나마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타자, 즉 체제 외부적 ()공간의 상실이며, 이는 곧 제3세계 기획의 퇴조를 총체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브릿지


가능한 외부의 상실이란 곧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보게 될 다른 세계(another world)’라는 대항적 거대서사의 소멸을 의미하고,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생산양식이 완전히 자연(nature)’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다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인간 모두가 처해있는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한 어떤 서사도 내놓지 못하는 인지적 장애상태에 처해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3세계의 기획을 살피는 것은 가능한 외부의 흔적을 더듬고 세계를 총체화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당연하게도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3세계라는 기획은 1927년의 반제국주의 연맹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55년의 반둥에서의 아시아 아프리카회의, 61년의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회의, 비동맹운동을 거쳐 급진적인 전국가적 의제이자 운동으로서 발전해나가는 흐름 속에서 제안된 개념이었다. 식민지의 경험을 공유하는 여러 국가들에게 제3세계란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및 마셜플랜 등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블록을 형성한, 미국과 서유럽을 비롯한 여러 친서방 국가들로 구성된 제1세계, 소련을 비롯한 여러 현실사회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제2세계로부터 구별되고 독립된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열강들의 팽창주의와 극단주의적 냉전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의 의제로 발전해간 이들 프로그램에서 정치적, 경제적 평등주의, 민족자결주의, 국제주의(프랑스에 맞서 베트남 해방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호치민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히 교류했었다는 최근 밝혀진 사실처럼) 등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68혁명에 큰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68년이라는 연대기적 순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60년대의 총체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각주:5] 50-60년대는 유럽 신좌파와 시민사회운동이 대두한 시점일 뿐만 아니라, 유럽이 과거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며, 체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영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프로젝트들의 영감들이 번뜩이던 때였다.

 

이들 중 내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사례는 다소 제한적이고 지엽적인 것이다. 단 몇 줄로 제3세계라는 거대한 기획을 온전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 1984년엔 카리브 지역까지 아우르며 ‘ECLAC; CEPAL’로 개명한다.)의 기획들을 개괄하며, 3세계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가 가졌던 비전을 살펴본 후, 종속이론 등에 주목하며 이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반추하고, 이들이 한국의 시-지각적 장 및 문화예술에 미친 효과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 기획의 한 측면으로서 종속이론은, 국가 간 불균등발전과 불평등한 위계로 조직된 제국주의 이후의 경제 질서를 총체화했던 20세기의 급진적 보편서사로 조명될 것이다.

 


수입대체산업화와 종속이론의 대두


아르헨티나 태생의 경제학자인 라울 프레비시(Raúl Prebisch)1930년의 대공황 이후로, 자유무역을 옹호했던 자신의 노선을 반성하며 일종의 보호무역주의로 입장을 바꾸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지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무역이, 대공황과 무역시장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로 인해 외려 아르헨티나 경제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0년부터 불평등한 국제무역과 국가간 권력차 등이 일국의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1948년 유엔의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49프레비시 선언이라 알려져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발전과 그 근본문제들을 제출했다. 이 논문은 위원회 차원에서 각국의 임원들에게 배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등사판으로 인쇄돼 여러 신생국 건국위원들의 손에 들어갔다.”[각주:6] 여기서 프레비시는 미국과 서유럽 등 선진국의 주요 수출품이 제조업 상품들인 반면,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수출품은 천연자원이나 농작물처럼 가공되지 않는 1차 산품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양자 간에 근본적인 무역 불균형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론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간 수준에서도 일종의 층으로 나뉘어진 중심부와 주변부가 존재하고, 중심부는 고부가가치의 최종재를 판매함으로써 주변부와의 비대칭적인 무역구조로부터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 받는 반면, 주변부는 수요의 소득탄력성과 가격탄력성이 낮은 1차 산품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닌 채 중심부와 교역을 진행하는 한 만성적인 저성장상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레비시에게 중요한 것은 1차 산품 수출국들이 국제무역에서 보다 결집된 힘을 지닐 수 있도록 경제권역을 통합한 블록을 결성하는 것, 수입-수출에 휘둘리지 않는 경제를 위해 내수를 강화하는 것, 나아가 산업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하던 최종재들을 자국의 산업역량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비교우위를 잃게 될 것을 경고하며 수입대체산업화 기획을 비판하는 경제학자들을 겨냥하여,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비판에 올렸다. 경제 성장을 위해 지리적 수준에서 특화되어 타국에 대해 비교적 우위를 갖는 상품을 생산하고 육성해야한다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프레비시에게 식민지 경제를 통해 성장한 선진 공업국들이 전유하기 좋은 기만적인 논리였다. 요컨대 영국이 방직, 방적 산업에 특화된 것은 산업정책 및 식민지로부터의 수탈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연의 이상한 힘에 의한 리카도 식 비교우위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과 남미지역 국가들에 의해 수입대체 산업화가 남용되어 심하게 폐쇄적인 무역과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과도한 재정정책으로 이어졌지만[각주:7] 이러한 프레비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을 이해하는 하나의 준거로서 제시된 것으로, 수입대체산업화(ISI) 모델의 기조를 마련했으며 남미를 중심으로 4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어온 발전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구조주의적 경제사, 종속이론 등에 영감을 주었다. 프레비시뿐만 아니라 UN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라틴아메리카 대표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1945년 제안된 국제무역기구ITO의 초안작성에 개입하여 48년 아바나에서 개최된 유엔 무역과 고용에 관한 회의와 제네바, 런던에서의 준비회의에서 구식민지 국가들이 보호관세를 이용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ITO는 미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해 끝내 결성되지 못했지만, 3세계 대표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선진 공업국들에 유리한 조항 일색이었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IMF체제에 맞서 64년 설립된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프레비시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를 중심으로 제3세계의 경제의제를 방어했고, 마찬가지로 프레비시를 중심으로 결성된 제3세계 블록 G77을 통해 1세계 시장으로의 수출증대, 1차산품의 가격인상, 배상금, 배상차원의 관세우대를 요구했다.”[각주:8]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를 비롯한 이러한 기구들은 냉전상황 속에서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원조경쟁을 심화하는 요소이기도 했으나, 근대화론과 구별되는 제 3세계 특유의 경제기조를 지탱해준 준거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1970년대 이후 이른바 동아시아의 경제기적이 있기 전까지 서구 선진국을 향한 행렬에 가장 근접한 지역은 남미였다. 풍부한 자원과 산업화의 경험 그리고 서구와 유사한 종교/문화적 배경의 부분적 공유는 이 지역을 선진국 진입의 가장 우선적 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ECLA, CEPAL을 중심으로 한 남미 지식인 집단의 구조주의적 경제처방은 사회주의권을 제외한 비서구지역의 발전이론 수립에 있어 거의 유일한 독자적 학문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근대화론에 따르는 서구적 경험의 답습을 통하지 않고도 비서구권이 발전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각주:9]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의 헤게모니 속에서도 UN을 생산적인 국제적 플랫폼으로 전유했던 범 남미를 아우르는 국제주의적인 비전을 확인할 수 있다.

 


종속이론과 그 변용들


중심-주변으로 구분된 세계 자본주의체제와 불균등무역이라는 테마는 60년대를 거쳐 종속이론으로 다듬어지게 된다. 피식민 국가들의 경제발전의 근간을 식민지에 도입된 근대적 도량, 제도, 문물에서 찾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유사하게, 서구의 발전모델을 척도로 하여 문명 및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근대화론은 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경향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장자유화를 발전의 핵심적인 계기로 간주하는 월트 휘트먼 로스토(Walt Whitman Rostow) 류의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등장한 종속이론은 프레비시를 비롯한 남미 지식인들의 기조를 참조했는데, 특히 66년에 나온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저발전의 발전>[각주:10]은 종속이론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제3세계의 저발전은 근대화론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구식민지 국가들에 잔존하는 봉건적 제도들이나 강한 지도자에 대한 토착적 선호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식민지배 시기부터 비자본주의 부문은 이미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요소로 편입되었기에, 봉건적 질서를 비롯한 비자본주의 부문의 잔존으로 남미의 저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다. 즉 자본주의의 미수복지역을 전제하는 발전/미발전의 구도가 아니라,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확장과 심화에 따른 중심/주변의 구도에서야말로 구조적인 비대칭적 조건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주변부의 저발전 상태의 경제는 일국의 내적 역량의 부족이라기보다 세계자본주의체제 내부에서 중심부와 맺은 무역네트워크 상의 분업으로부터 연원한다. 물론 라클라우를 비롯한 일부 논자들이 지적하듯, 프랑크의 주장엔 생산관계를 사고할 공간이 없기에, 근본적으로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을 설명하는 데에는 취약하며, 생산양식과 경제체제를 혼동하여 국가간 시장관계와 상품유통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정 사회구성체의 생산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없게 되는 한계가 존재한다. 덧붙여 아시아의 용이라 불리우는 홍콩, 한국, 대만, 싱가포르의 성장, 브라질, 칠레 등의 남미국가들의 성장 등은 주변부의 저발전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을 예증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발전을 선제적으로 이룩한 제국주의 국가들과 플랜테이션 농업 등 1차 산품 수출에 의존한 피식민지간의 구조적 비대칭성이 자본주의 불균등발전의 하나의 경향으로서 세계 경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에 주목하게 한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 종속이론에 적잖은 기여를 한 브라질의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Fernando Henrique Cardoso)에 따르면 세계경제의 정세와 국가정책에 따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상향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이는 종속이론 계열 논의의 내부에 적잖은 갱신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종속이론은 세계체계론과도 연결되는데,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근대세계체계론>[각주:11]16세기부터 두드러지게 된 농업 중심의 자본주의가 세계체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중심-준 주변부-주변부'의 구분을 도입함으로써 카르도주와 마찬가지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의 상향이동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그는 본인이 논구하는 근대세계체계를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결합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아리기에 의해 발전적으로 다듬어지는 개념이기도 하다. 사미르 아민(Smir Amin)<세계적 차원의 자본축적>[각주:12] 또한 서구 세계가 비서구지역을 경제적으로 장악하는 과정을 좇으며, 중심-주변의 역학에서 주변부의 발전은 비관적임을 밝히고, 3세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구의 경제 헤게모니를 지탱하는 장치들과 블록들로부터의 탈궤; 단절(de-linking)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장기 20세기>에서 20세기 이후 세계자본주의 중심부인 미국의 패권형성과정과 과거 세계체계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제노바)와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성쇠를 비교하는 데에 집중하며, 세계체계 패권의 이행시기엔 실물부문의 팽창 동력의 고갈이 전제된 금융부문의 팽창이 관측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인 각각의 체계적 축적순환과 현재 미국 주도의 축적순환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러한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금융화를 낳은 금융부문의 폭발적 팽창과, 그 효과로 발생한 금융위기를 고려할 때 미국헤게모니의 점진적 이양을 점쳐볼 수 있으며, 그 연장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권이 새로운 축적순환을 가동시킬 헤게모니적 장소가 될 것을 제안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종속이론은 여러 갈래로 발전되어온 만큼 단일하지 않으나, 경제체제와 국가체계간 위상차를 연결지어 사고하며 전지구적 수준에서 자본의 흐름을 파악하려하며, 3세계의 정치경제적 가능성을 고려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 종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70년대부터 한국에 점차 소개되어온 종속이론은 80년대를 거치며 사회구성체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예컨대 안병직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및 이대근의 주변부자본주의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경유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은 모두 종속이론의 영향 속에서 제기된 이론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을 이끌어온 운동정파들- CA, NL, PD 등의 분절에도 종속이론의 영향이 스며있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특히 19805.18 민중항쟁을 거치며 당시 시민군에 대한 군의 진압이 국군통수권을 쥔 미국의 암묵적인 승인을 전제로 했을 것이라는 학생운동가들의 심증을 확고히 하는 데에도 종속이론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3세계의 이념적 요소로서 한국에 도달한 종속이론은 한국 운동사회의 정치적 에토스의 한 축을 형성하며, 민중미술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행사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종속이론 없는 민중미술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특히 70년대 말부터 두드러지게 관측되는- 코카콜라와 텔레비전 등으로 드러나는 소비문화에 대한 알레고리와, 군인, 탱크, 미사일 등으로 나타난 제국주의의 표상들, 흰 옷을 입은 민중들 등의 요소들은 이미 당대에 대항기표로서 체화된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민중미술을 1920년대를 시발점으로 둔 멕시코의 벽화운동, 1930년대 이후의 중국의 판화운동, 동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속된 프랑스의 네그리튀드 운동 등에 뒤따른 연속적인 기획으로서 간주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때 민중미술은 식민지의 경험과 이식된 자본주의라는 조건을 공유함으로써 첨예한 모순 속에 놓였던 제3세계인들이 전체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자국의 미적 문법을 재배치하는 보편적인 흐름의 한 갈래로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민중미술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현실동인이 창립된 시기(1969)를 고려할 때 그것을 전적으로 독자적 흐름으로 볼 수도 있으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발흥이 세계자본주의체계의 모순에 대한 국지적이고도 전체적인 반응이었음을 고려할 때, 현실과 발언(1979), 임술년(1982), 두렁(1983), 민족미술협의회(1985) 등을 비롯하여 백가쟁명을 거듭하며 80년대를 수놓은 민중미술 단체들이 종속이론으로 표상되었던 제3세계적 이념과의 공명 속에서 동력을 얻었음은 명백하며, 이런 견지에서야 우리는 20세기를 제3세계의 세기로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이 당대 미술의 돌파구가 되었음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텐데, 비록 아시아의 용의 일원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제3세계의 이념을 배반했으나,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한국 근대성의 조건을 보편사적 수준에서 반성했던 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은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제국주의론 이후로 세계자본주의의 양태를 총체적으로 그려내려 진력했던 종속이론과, 그 젖줄로서의 제3세계적 기획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각주:13] 헤겔식 표현을 빌리자면,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계기는 특수자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순간에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하건대, 다른 세계, 다른 형태의 발전모델이라는 비전은 다른 방식의 미적 문법에 대한 희구로 이어졌으며, 각각 제3세계, 종속이론, 비판적 리얼리즘을 통해 구현되었으나 이들은 전체 자본주의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동시적이고 보편적인 유토피아적 제스쳐로 소급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와 미적갱신


냉정하게 평가할 때, 오늘날 제3세계 기획은 제1세계 국가 및 IMF에 대한 막대한 부채와 내적 모순에 의해 빛을 잃었으며, 수입대체 산업화와 종속이론으로 표상되던 대안적 발전모델 또한 일부 신생국들의 세계 자본주의체계로의 적극적인 편입을 통한 성장으로 인해 강력한 반례에 직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설명력을 잃게 되었고, 민중미술 또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이념을 표상할 수 없게 되었다. 앞서 지적했던 금융세계화에 잇따른 자본의 전지구화는 이들 대안적 기획들의 패배에 대한 지표이며, 외부적 공간에 대한 유토피아적 서사의 붕괴다. 즉 피식민 국가들이 근대화론에 맞서 다른 세계를 만드는 주역이 될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서사는 붕괴된 것이다. 이제 하나의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 제안되었던 3세계전지구적 남반구라는 지리적 수준의 개념으로, 불평등한 국가 간 위계를 경제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표상시켰던 종속저개발이라는 자연화 된 경제의 지표로 나타나며, 결과적으로 근대화론의 승리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상품을 중심으로 구획되고 조직된 사회적 관계는 역사상 가장 심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에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모순은 현재의 생산양식이 일종의 자연으로 드러나는 정도와 비례하여 그 해결이 난망하게 된다. 이때 모순을 상징적 수준에서 봉합하고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문화 및 예술의 두 계기로서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성격은 사회적으로 전개되며, 이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의 작품들을 분석하기 위해 필수적인 준거가 된다. 요컨대 그에게 역사(총체적 생산양식)라는 실재는 항상 서사를 통해 지시되지만 서사를 통해서도 합일 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런 한에서 서사에 매개되어있고, 서사에 의해 굴절되어 있다. 따라서 존재하는 서사의 기능과 역할 및 그 내용과 형식을 다시금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임무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상을 회복하는 중요한 통로인 것이다. 이러한 제임슨의 논의를 경유하여, 우리는 서사가 여전히 예술의 수준에서 보존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서사란 편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의 자연화는 그에 대한 메타서사의 소멸을 의미하나, 그 또한 하나의 서사 모델의 승리에 따른 헤게모니의 변동 효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선 거대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거대서사를 이루는 중심 논리로서 드러나는데, 이는 이미 20-30년전 미술 장에서 두드러지게 관측되기 시작한 가능한 유토피아일시적 공동체 만들기프로젝트 등을 통해 형식화 된 바 있다. 일찍이 비숍이 지적했듯, 사회참여예술 및 관계미학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90년대의 사회적 전환이 제3세계와 소련의 몰락과 사회국가의 퇴락을 야기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관철된 이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어떤 변화와 갱신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폐색감을 견디지 못한 여러 논자들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컨템포러리 등의 신조어를 남발하지만, 그것이 의미있는 미적 갱신을 위한 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누군가 현재의 조건으로부터 미학적 돌파를 원한다면, 3세계의 기획이 제국주의단계의 자본주의를 총체화 함으로써 20세기를 견인한 비전을 빚어냈듯, 전체에 대한 총체적 규정으로부터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우리가 현시점의 자본주의 분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할 이유이다.

 

2018. 10. 11.

 

 

 

 

 

 

 

 

 

 

 

 

 

 

 

 

 

 

 

 

 

  1.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 인도 캘커타에서 찍힌 소인, 새러 하라쉼 편, 이경순 역, 갈무리, 2006. [본문으로]
  2. Alfred Sauvy, “Trois Mondes, Une Planète,” L’Observateur, no.118, August 14, 1952. [본문으로]
  3. 백창재, 금융세계화와 미국: 국가, 패권, 자본, <국가전략>, 2006년 제 12권 3호, p.38. [본문으로]
  4.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3, pp.13-14. [본문으로]
  5. 서동진, ‘68혁명’과 제3세계 그리고 세계사: 68혁명을 역사화하는 하나의 시론, 마르크스주의 연구 특집호, 2018. [본문으로]
  6. 비자이 프라샤드, 갈색의 세계사, 박소현 역, 뿌리와 이파리, 2015, p.98. [본문으로]
  7. 라울 프레비시, 라틴아메리카의 역동적인 발전 정책에 대해, 하상섭 역, 지만지, 2011. 역자 후기 참조. [본문으로]
  8. 비자이 프라샤드, 갈색의 세계사, 박소현 역, 뿌리와 이파리, 2015, pp.107-109. [본문으로]
  9. 강명구, 남미의 수입대체 산업화 발전 전략: 허쉬만의 해석을 중심으로, 라틴 아메리카연구20(4), 2007, p.44. [본문으로]
  10. The Underdevelopment of Development ,Ed by Sing C. Chew, Robert Allen Denemark, Sage Pubns, 1996. [본문으로]
  11.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김명환, 나종일, 김대륜, 박상익 역, 까치, 2013. 이 저작은 안드레 군더 프랑크에 의해 서구중심주의적이라 비판을 듣기도 했는데, 프랑크는 16세기부터 세계체계의 등장을 셈하는 월러스틴에 맞서 기원전 3000년의 고대문명에서부터 세계체계의 등장을 추적해야한다고 논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12. 사미르 아민,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1, 김대환, 윤진호 역, 한길사, 1989. [본문으로]
  13. 백지숙은 흥미롭게도 민중미술을 결산하는 “2005년의 민중미술 또는 민중미술의 2005년”이라는 비평문에서, 종속이론과 세계체계론을 세계 미술장에 적용하여, 중심부의 미적 헤게모니에 대한 주변부의 미적 종속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 바로 민중미술의 급진적 역할이었음을 언급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