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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비동맹을 향하여, 미네르바의 올빼미들이 날갯짓을 할 시간

by 정강산 2020. 6. 9.

1. 서동진은 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다. 학자는 분과학문의 틀 내에서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고, 지식인은 세계의 모든 문제에 관해서, 가용한 모든 수단을 통해 입장을 내는 사람이다. 학자는 실정성 속에서 즉자적 앎을 생산하지만 지식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정성이 아니라 정세이고 실천이며, 따라서 그가 생산하는 것은 이념이다. 즉 지식인은 이데올로그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도 학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순수이성의 역동의 최고점에서도 그 기저에 묵묵하게 운동하는 실천이성(인간주의적 도덕의 이성이라기보다는 세계 속 행위로 나아가게끔 하는 수행적 이성으로서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학자가 실정성 속에 갖혀 고전과 텍스트를 섬기며 훈고학을 한다면, 지식인은 고전과 텍스트를 지나간 실재의 흔적으로 사고하며 따라서 그것을 당면한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재료로 복속시킨다. 마치 마르크스가 헤겔 및 발자크, 괴테, 셰익스피어 등에 대해 그랬듯이. 학자에게는 언제나 주어진 세계만이 있을 따름이지만, 따라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세계의 사실들뿐이지만- 지식인에게는 현재의 세계 속에 이행 가능한 유토피아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지식인의 작업에는 항상 정보의 실정적 총체를 초과하는 잉여가 자리 잡는다.

 <변혁운동의 방법론 비판>을 통해 사구체 논쟁 속에 개입한 서동진, 동성애와 자본주의의 매개를 살피며 사회주의적 게이 운동에 기대를 걸었던 서동진, 푸코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뜯어보고자 했던 서동진, 예술 작품에서 자본주의의 규정성을 찾는 서동진 등등... 분절화하는 시야에서 실정적으로 파악된 그의 궤적은 좌충우돌처럼 보일지 모르나 변증법적 시선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실재에 대한 여러 변주된 비판들이었다. 그가 갈색의 세계사의 역자 박소현과 함께 책임 편집을 맡아 쓰고 엮은 본 저서 <비동맹 독본>을 나는 상기한 의미에서 학자의 작업이 아니라 지식인의 작업으로 읽는다. 다시 말해, <비동맹 독본>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민족들의 기획을 통한 자본주의 비판의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하는 실천이성의 지향 속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2. <비동맹 독본>에는 김기현, 김예림, 미카엘 뢰비, 박소현, 백승욱, 비자이 프라샤드, 서동진, 스테판 휴프너, 신은실, 에카 쿠르니아완, 이석호, 자일스 찌 웅파꼰, 장세진, 홍인식 등이 필자로 참여하였고, 이들은 각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인물 등의 범주에 따라 근대화론’, ‘구조조정 정책’, ‘라울 프레비시와 종속이론에서부터 민족경제론/민족문학론’, ‘반둥회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인도공산당 등에 이르는 제 3세계 기획을 둘러싼 역사적인 78개의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책의 구성에서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후식민적 조건과 이에 편승한 정치-경제적 지배계급을 고발하며  3영화라는 기획 안에서 운동과 매개된 영화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Solanas)와 옥타비오 헤티노(Octavio Getino)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La hora de los hornos; The Hour of the Furnaces)>(1968)의 스틸컷으로 만든 몽타주가 앞뒤로 책의 본문을 감싸고 있는 형태라는 점, 3세계 국가들의 독립연표, 반둥회의 참가국들을 나타내는 다이어그램, 체게바라의 이동궤적과 연도별 국제적 블록들의 모습, 3세계 국가들의 GDP 변화율을 가리키는 도표 등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면의 한계를 딛고 제 3세계 기획에 입장하기 위한 하나의 교제로서 입체적인 재료들을 갖추려 했던 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구성을 통해 <비동맹 독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3.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자본주의의 모순은 인간을 계급으로 호명하는 동시에 민족으로 호명하기도 한다. 세계 체제 내에서의 국가간 경쟁, 혹은 제국주의라는 동학이 그 객관적 단면이라면, 주관적 수준에선 '민족'이라는 기표 하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인민들이 있었던 셈이다. 알다시피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갈라졌다: 한편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즉자적 긍정성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이들이 있었다면(예컨대 1차대전 당시 볼셰비키와 리프크네히트 등 일부 인사를 제외한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혹은 나치가 '아리아 민족'을 부르짖으며 적대를 유대민족의 표상으로 실정화 시켰던 것처럼), 다른 한편으론 대자적 부정성 속에서 세계와 관계하는 해방적 주체들 또한 민족이라는 이름을 떠맡았다(예컨대 인도네시아의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더불어 베트남혁명에서부터 쿠바혁명에 이르는 주체들에서 보이듯).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는 박정희 체제 특유의 보수적 민족주의에 오염되고, 민족주의적 운동의 역사적 한계들로 인해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이지만, 남미 전 권역을 비롯하여 카리브해 일대 국가들에 대한 차베스의 호혜적 원조, 블랙팬서당과 아일랜드공화국군에 대한 북한의 지원, 쿠바 의사단의 인도적 지원 역시 모종의 민족주의적 기획 아래 이뤄졌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라는 민족주의는 없다. 한편으로 나치식의 극우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수많은 반식민지 투쟁의 추동력이 된 좌파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지닌 가공할 파괴력은 자본주의의 정세에 따라 실로 입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서동진이 지적했듯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은 자유주의자들이 으레 오해하듯 상상의 산물이자 그저 가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산적으로 발명되어야할 집단성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어온 조건에 대한 계보적 탐구에 가까울 것이다(133쪽 참조). 이 책이 조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후자의 기획으로서 비동맹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이라는 이름을 통해 이뤄진 급진적인 연대와 변혁의 실험들이다.  <비동맹 독본>은 한때 민족이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먼지 덮인 기록을 들춰내고자 한다.

 알다시피 일정한 권역을 공유하는(근대 이후로는 대체로 '국가'라는 행정적 영토에 내속적인 방식으로 관철된)문화적, 언어적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단위로서- 민족을 둘러싼 통상적인 반응은 대략 다음과 같은 구도 속에서 반복되어왔다: 첫 번째: 전통 및 문화의 유구함과 우월성의 담지자로서의 민족을 상상하는 보수주의자의 버전, 두 번째: 억압과 몽매에 가까운 환상이지만 기회주의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민족을 상상하는 자유주의자의 버전, 세 번째: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자 비판적으로 견인-극복되어야 할 우방으로서 민족을 상상하는 사회주의자의 버전(여기에 예외가 있다면 오토 바우어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족문제에 생산적으로 개입했던 사례와 사회주의 혁명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의 작업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도식적 이념으로 굳어져버린 반응들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실재 민족이라는 이름에 내기를 건채 가능한 세계를 얻고자 했던 주체들의 시선으로 시차적 이입을 해볼 수 있다면, 유토피아적 정념으로 가득 찬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은- 그리하여 이 책이 보고자하는 실재의 주요한 측면이다. 마치 라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독립전쟁을 벌였던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이 상상했을 어떤 세계의 질서처럼 말이다. 오랜 기간 자본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로 있다 독립한 신생국가들은 기존의 제국주의적 국제 동맹 체제를 거부하고 군비경쟁을 멈출 것을 제안하며, 대안적인 경제의 모델을 그리는 등 그 상상의 놀라운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본 저작이 그려내는 전체 성좌는 하나의 정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기획으로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제3세계 프로젝트의 단면- ‘가능한 다른 세계에 가닿는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조차 생소한 사건들과 개념들을 살피면서 말이다.

 

4. 이를 말년에 찾아든 탈식민적 감수성에서 연원한 작업으로 보거나 '낡디 낡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시대착오적 천착으로 독해하는 것은 이 작업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보다 이 작업은 역사적 사실로서 주어져 있었던, 그러나 총체화 된 체계를 상대하는 중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어떤 가능(/했을) 외부를 찾기 위한 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지젝이나 바디우의 간지 나는 메시아적 공산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땀 냄새 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정적인 수준에서 이는 서동진을 비롯하여 이 책의 적잖은 필자들이 기대고 있던 이념-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일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시선에서, 역사적인 국제적 민족운동을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실로 마르크스주의적 작업이 될 수 있다. 현재 자본주의적 소여를 내부라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이며, ‘외부에 대한 세속적이고 규정적인 비전이기 때문이다. 이 과잉은 자본주의의 체계 자체에 대한 비판의 필연적인 일부이기도 하다(이 지점에서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보다는 외려 파시즘과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물론 파시즘은 인종적 단일성과 목가적 유기성을 희구했다는 점에서나, 적대를 소수자들에게 투사했다는 점에서나 결코 세속적일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의 기획은 수카르노, 나세르 등이 잘 보여주듯-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비전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비자이 프라샤드가 <The Poorer Nations>, <3세계의 붉은 별> 등에서 지적한 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재편과 소련의 붕괴, 비동맹운동의 몰락이 서로 내적 인과 속에서 일치한다는 것은 제 2세계와 제 3세계 사이에 맺어진 역사적인 물질적 조력관계를 넘어, 양자가 어떤 가능한 외부로서 공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역사적 이유를 은밀하게 탐색하는 기획으로서도 본 저작은 마르크스주의적이다.

 불균등발전이 자본주의적 모순의 한 단면이고, 국가간 경쟁이라는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실재의 자본주의적 동학이 전개된다는 점을 감안 할 때, 따라서 자본주의는 또한 국가 간 모순이라는 형식으로도 작동한다는 점을 떠올릴 때, 민족이라는 권역 내부의 자본주의적 모순과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은 근대국민국가간의 관계에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관계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에 비견될만한 적대를 산출했다는 사실이다. NATO GATT, IMF의 설립에서부터 베트남 전, 걸프전, 이라크전, 아옌데 정권의 몰락, 고난의 행군, 그리스 부도, 베네수엘라 경제제재 등등으로 이어져온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조건에서, 후식민적 상황에 놓인 국가들에 대한 북반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지배와 약탈, 그에 맞선 초국가적 동맹(서동진이 "국제주의적 민족주의"(136)라 부른)을 통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색은- 역사적 제3세계 기획 속에서 일찍이 명멸했지만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가능성이자 돌파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국제 혁명의 선도기지이길 언젠가 포기했던 코민테른(3인터네셔널)의 공백을 메우고 섬광처럼 등장한 대안적인 국제협력과 연대의 단위가 어쩌면 바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로부터 구체화된 3세계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살필 수도 있지 않을까.

 

5. ‘민족주의자냐, 마르크스주의자냐라는 스탈린의 양자택일적 질문 앞에서 호치민이 대답한 둘 다"라는 가능성- <비동맹 독본>은 여기에 대한 답을 모색했던 눈부신 시도들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일찍이 한미 동맹을 통해 제 3세계 기획과는 반대방향으로 나갔던, 아시아의 용으로서 비동맹운동의 의제를 꺾이게 한, 동시에 박정희 식 민족주의에 의해 해방적 민족주의의 계보가 가려지고 차단되었던 한국에서 꼭 나왔어야 할 책이지만, 동시에 그 출간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민족이라는 이름이 저만큼 물러나 충분한 역사적 거리감이 주어졌을 때야 비로소 첫 번째로 날아오른 미네르바의 올빼미일지 모른다. 어떤 집단적 이름도 갖지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어떤 외부도 상상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비동맹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자 날아오르는 올빼미. 이제 더 많은 올빼미들이 날아오를 차례다.


 마지막으로 책의 한 구절을 발췌한다


“(...)흑인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와 같은 민족주의는 단지 국민국가의 국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상상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경계를 넘어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자들의 국가를 가로지르는 국제주의적 연대를 가능케 한 전류였다. (...)앤더슨의 말을 좇자면, 민족/국민은 이미지로서 마음에 그려진 상상의 정치 공동체이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특히 출판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출현하면서 급격히 자리 잡았다. 출판 자본주의란 세속적인 대중의 말로 쓰인 신문과 소설 같은 것들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민족(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에 속한 사람들로서의 민족)으로 차츰 생각하고 그려내도록 한 조건을 가리킨다. 이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통의 시간을 상상하게 만들도록 했다.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사건들은 이제 민족의 시간 속에 속한 사건들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1919년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와 같은 상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상상과 표현으로서의 민족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역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지배였다. 식민주의의 지배하에 놓인 이들은 자신들을 같은 운명에 놓인 우리로서 묶어줄 수 있는 이미지가 간절했다. 그 이미지는 바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국민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의 검은표범당은 흑인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들은 미국에서 인종주의적 지배에 시달리는 우리로서 흑인 민족이었다. 오랜 세월 식민주의 굴레에 놓여 있던 아프리카인들 역시 아프리카 민족주의, 즉 범아프리카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저항의 이데올로기로서 제3세계 프로젝트와 함께 빛을 발했다. 그러나 제 3세계 프로젝트가 패배한 이후 상황은 변했다. 비자이 프라샤드는 <갈색의 세계사>에서 이렇게 쓸쓸히 술회한다. “3세계 의제가 종말을 고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에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자라났다. 한때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차지했던 공간은 각종 사상의 복고적 형태로 채워졌다. 종교적 근본주의, 인종주의, 다시 살아난 구사회계급이 제3세계 프로젝트의 잔해 아래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앞선 시대의 민족주의를 대체한 새로운 민족주의를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그것은 피억압 민중의 상상이던 민족주의를 납치해 이제 다시 힘을 되찾은 왕년의 지배계급들의 이데올로기로 재가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 자체를 성토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제국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이르는 긴 역사적인 시대를 거치며, 종속에 시달리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그려내기 위해 민족이라는 이미지에 매달려왔다. 민족주의를 위험하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멀리하고 싶다면 먼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요청하는 식민주의가 사라진 세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3세계 프로젝트는, 그런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제주의적 민족주의를 왕성하게 실험한 사례로서 깊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134-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