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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민주와 인권으로 잠긴 '잠금해제'

by 정강산 2019. 11. 12.

http://www.mise1984.com/magazine?article=2331

 

민주와 인권으로 잠긴 ‘잠금해제’ — VOL.418 우리가 몰랐던, 미술관 교육 ::: 美術世界 MisulSe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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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가진 울림은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념들이 불과 30여  전만 해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으며, 역사에 뿌려진 피의 거름 위에서 나타난 하나의 효과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을 거쳐 정치체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한 데에는 당연하게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정치권의 자유주의자들, 시민단체들과 진보적 종교계 등의 지속적인 저항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오묘한 울림을 주는 이념으로 재편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값진 것임은 틀림없으나 무언가 빠져있는, 그러나 많은 이들로부터 필시 감동과 긍지를 자아낼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이념. 이를 성취해낸 적지 않은 386세대의 인사들은 ‘민주화 세대’로서의 자긍심을 공공연히 표현할 정도이며, 〈남영동 1985〉(2012), 〈변호인〉(2013), 〈1987〉(2017)   시기를 다루는 상업 영화도 하나의 장르(이를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민주화물?)로서 자리 잡는 추세이다.

 

한편 ‘민주화’ 이전 시기, 당대의 암울하고 서슬퍼런 분위기를 응축한 대표적인 장소가 있다면, 지금은 철거된 남산 중앙정보부 6국과 더불어 대공분실을 빼놓을  없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냉전, 반공, 권위주의, 박정희 체제의 흔적이 박제된 곳이자, 좌익, 반체제적 인물, 나아가 평범한 시민들을 구금하고 고문하며 때론 죽이기도 했던 악명 높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1976년 공안 당국의 의뢰를 받은 김수근에 의해 지어졌던 대공분실은 2005년 경찰청 인권 센터로 재편된  올해 민주인권 기념관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잠금해제》(기획: 김상규)는 민주인권 기념관의 기획전으로서,  건축물에 1970~80년대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기억’과 ‘드러냄’을 중심으로 조직된 작가들의 반응을 보여준다.

 

별관의 옥상에 설치된 잭슨홍의 <빈칸>은 작품의 세부사항이 기재된 캡션을 확대해놓은 모양의 옥외 간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간판 위 캡션에는 대공분실이 건립된 년도(1976)와 소재(철근 콘크리트 흑벽돌)가 적혀있으나 작품의 제목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빈칸으로 남겨져있다. 공란으로 남겨진 이 건축물의 이름은 역사의 운동에 따라 변화할 것이며, 장소의 의미를 관람자 스스로 찾아보라는 제언처럼 말이다. 정이삭은 원형계단, 벽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의 지붕판 등 대공분실의 공간적 요소들을 조합한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계단 너머>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는 공안의 목적에 따라 조직되었던 개별 공간들을 새로운 형식 속에서 상징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원형계단은 막힌 공간이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로 구조화되어 있고 반투명한 재질로 구현된 벽 또한 닫힌 상태를 지양하는 것이다. 진달래&박우혁의 <적색 사각형들>은 대공분실 조사실의 창문에 적색판을 설치하여 해당 공간을 검은색 벽돌 마감으로 처리된 건물의 외면에서 돋보이도록 한다.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좁은 폭으로 세로로 길게 난 창문은 음험한 당대의 분위기에 대한 환유로 나타난다. 홍진원X일상의 실천은 빨갱이라는 키워드로 검색 가능한 게시물, 댓글, 뉴스 등의 스크립트 및 사진을 조사실 벽면에 빔으로 투사하고 나레이션을 덧붙여 강정마을, 전교조, 5.18, 4.3, 민주노총 등 여러 부문의 단위와 사건들을 유령처럼 포섭해내는 프리즘으로서의 빨갱이를 조명한다. 제목 또한 빨갱이인 이 작업은 한 언어가 놓인 계보를 통해 근현대의 풍경을 펼쳐 보이는 일종의 타임라인 파노라마인 셈이다. 김영철의 <감각의 증언>은 음울한 배경음과 함께, 세로로 긴 화지위에 산발적으로 기록된 고문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이 가득찬 방을 보여준다. 취조실의 전구조명을 연상시키는 빛은 화지 위를 간헐적으로 비추게 되어있는데, 이는 취조와 관련된 기억을 실체화하려는 시도로 독해된다. 언메이크 랩의 <평범한 장치>는 대공분실 식당 동의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을 시소형의 나무 구조물에 떨어지도록 하여, 물방울이 낙하 할 때마다 구조물에 설치된 터치스크린에 그것이 기록되게 하였고, 그에 맞춰 물방울 소리가 증폭되어 나오는 설치작업이다. 여기서 식당의 일상적인 누수는 물고문의 섬뜩한 풍경과 유비된다. 백승우의 <사인볼> 시리즈는 남영동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들을 격자로 배치하여 사인볼에 넣어 회전되게끔 했는데, 이는 역사의 반복성을 암시하며, 한편 <복사 촬영> 시리즈는 대공분실의 방음벽, 취조 상판, 빨간 벽돌 등의 공간요소들을 촬영한 결과물을 해당 대상들 앞에 배치한 작업으로서, 당대를 재현하려는 시도의 구성적인 엇갈림, 미끄러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조금씩 결이 다른 접근을 취한다. 그런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스테이트먼트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영동 및 70-80년대의 편린들이 대개 감각지각적이고 경험적인 주체의 심상으로 향한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예컨대 절망의 상징”, “참혹했던 시간과 기억”, “악의”, “국가폭력”, “악몽”, “야만”, “감각적 마비등은 그들 대부분이 특정한 서사적 틀로서 전제하고 있는 당대의 심상이다. 전시의 서문이 말하듯, 역사는 항상 재규정되고 재구축된다는 의미에서 은폐된 것’, 따라서 드러내야 할 것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경험적이고 감각지각적인 신체로 환원된 주체의 이야기 근처에서 맴돈다면, 얼마나 역사를 드러낼 수 있을까? ‘동물적 신체’, ‘인권 유린과 탄압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로서 70-80년대를 상정하고, 그 반대편에 민주/인권을 둠으로써 당대를 기억한다는 설정이 전제하고 있는 사각지대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사각지대란, 권위주의 개발독재 시기의 적대는 민주/인권을 초과하는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을 빨갱이’, ‘좌익용공세력’, ‘불순분자로 나타나게 한 모순의 객관성 말이다.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 분단모순 등으로부터 과잉 결정된 70-80년대의 여러 항쟁들은 으레 87년의 쾌거로 셈해지는 민주화인권을 포괄하나 끝내 민주/인권으로 봉합될 수 없는, 좀 더 불순한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87년 당대에 민주주의라는 기표는 마치 마법처럼 사회의 제계층들을 접합시키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끝내 접합이 불가능한 부분들을 안전하게 봉합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썼던민주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즉 누군가는 민주화 과정으로서의 87년을 역사의 완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 민주주의란 이를 초과하는 이념이었음이 분명하며,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 또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과연 그때에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권위주의 혹은 과두제의 반대항으로서 의사결정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능하게 하는 정치체의 모델만을 의미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쩌면 비단 정치 제도의 교체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 나아가 문화 전반에서의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잠금해제>민주인권이라는 프레임으로 70-80년대를 서사화함으로써 동시대의 헤게모니적 서사로서의 민주화담론에 공모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서사로서 포착될 수 없는 근본적인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잠금해제>민주화라는 기표가 억압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따져 물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