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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시간 혹은 회화: 종합(불)가능한 양극에 대하여(<뽈뽈뽈>2020.8.14-9.10, 아트스페이스휴, 전시 서문)

by 정강산 2020. 10. 8.

<뽈뽈뽈>은 회화와 시간-운동의 관계설정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주제를 동시대의 지형 내에서 고민해보는 스케치적인 전시다. 이러한 전시의 기본 방향은 대략적으로나마 회화사를 훑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회화의 역사에서 시간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사례는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미래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파 작가들은 도시와 기계, 산업주의적 문명의 역동성에 열광하며 자연스레 움직이는 대상들에 주목했으며, 대상의 잔상을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운동성(시간성)을 표현하는 법을 탐구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No.2>(1912)는 미래파의 영향 하에서 이뤄졌던 회화의 확장시도를 잘 체현하고 있다. 한편 시간성을 말소하여 평면 자체로 환원된 공간에 대한 탐구야말로 추상표현주의의 요체라 본 그린버그 식의 독해와는 반대로, 추상표현주의의 정점에 있는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이미 고정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모더니즘적 회화를 넘어, 순수한 운동의 기록으로서의 회화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무작위로 색을 칠하고 뿌리는 행위(에 따른 시간의 궤적)’ 자체가 작업의 대상으로 전면화 된다. 달리 말해 폴록의 작업은 감상을 요구하기보다, 캔버스 위의 불균질하고 임의적인 안료의 배치를 규정하는- ‘(주체의)운동 자체의 현전을 보도록 했다. 여기에 우리는 비정형의, 살덩이로 보이는 무언가가 유동성 속에서 전환하고 변용되는 순간들을 그려낸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로부터 잠재적 시간(Aion)과 현실적 시간(Chronos)이라는 개념적 시간성들을 통해 형상의 생성에 따른 감각의 시간의 발생을 발견하는 들뢰즈식 사변 또한 추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시간성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논외로 한다면, 미술사 내에서 이뤄진 회화형식과 시간성의 결합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위협받는 회화의 존재론을 재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컨대, “ ‘OO’이후로 회화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시간성에 대한 역사적인 회화()의 모든 포섭전략의 기저에 있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본 전시 <뽈뽈뽈>이 취하는 질문 역시 바로 이와 같은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요청되는 회화의 확장과 관련된다. 회화의 종별적인 공간을 고수하는 것은 이제 어떤 갱신이 없이는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몸짓을 반복하는 일이기에, 직접적인 물리적 시간과 운동이 도입되어야한다는 것(강주형, 이승훈), 혹은 최대한의 기법적 일탈과 실험을 이어나감으로써 평면의 시각적 환영성에 메타적인 작업들을 생산해야한다는 것(김윤섭)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뽈뽈뽈>의 세 작가들은 스마트폰, PC스크린 등 점차 편재하는 디지털 평면에서 상연되는 무빙이미지의 시대에, 회화의 위상을 발본적으로 고찰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는 세 작가 모두 애니메이션과 출신들로서 자연스레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일지도 모른다.


강주형은 인물군상들이 다소 산발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붓의 터치가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그것은 어느 대학교의 조감도이거나(<The School>(2013)), 놀이터이거나(<The Playground>(2018)), 나무를 진채 시골의 논밭을 가로지르는 트럭이 보이는 풍경들이다(<Moving Tree>(2020)). 그러나 개별 작업들이 포착하는 장소 각각의 의미와 인물들이 구성하는 서사는 어떤 내적 일관성도 없다. 달리말해 각 작품들을 연결하는 공시성에서, 풍경과 인물들은 임의적으로 선별되어 있다. 이는 집적된 붓터치로 묘사된 대상들을 적절하게(혹은 자연스럽게) 운동시키는 것이 작업 전반의 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묘사된 대상들은 나름의 동선을 가진 채 꿈틀거리는데, 이전까지의 작업들에서 풍경 전체의 생기를 위해 운동이 외삽되는 측면이 두드러졌다면, 가로수 나무를 단일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3D 모델링으로 운동시키는 <The Tree>(2020)에서부터는 운동성과 펜 터치의 유기적인 결합에 대한 탐구가 보다 전면화 된다. 3D 모델링 툴을 비롯한 동시대의 재현장치가 허용하는 기술적 조건 하에서 구축 가능한- 자연물의 운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묘사, 강주형의 작업들은 이 언저리를 맴돈다.


이승훈 또한 비슷한 관심을 공유한다. 즉 회화를 동적인 것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기획인 것이다. <Balcony Drawing>(2012)이 무빙 드로잉이라 할법한 형식으로 발코니의 시간이 변화하는 것을 가볍게 실험한다면, <The Room for Women in 2016>(2020)에서는 붓 터치의 축적을 통해 입체적으로 형성된 여러 신체들의 질감을 운동시키는 방식이 연구된다. 이어 <문앞>(2020)은 단일한 대상-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가는 남성-의 동작 자체를 통해 붓 터치라는 전통적인 작화법과 3D 모델링이라는 재현장치 간의 보다 유기적인 결합을 모색한다. 이승훈에게서도 선별된 장소와 인물들을 관통하는 맥락은 소거되어 있으며, 회화적으로 묘사된 신체의 동작 자체를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것이 쟁점이 된다. 다만 강주형의 작업에서 인물들이 풍경의 후경 혹은 배경으로 배치되는 것과 달리, 이승훈은 인물 및 신체적 운동의 묘사 자체를 보다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적인 신체의 질감과 운동-시간의 가능한 결속, 이는 이승훈이 향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한편 김윤섭은 평면의 환영성을 고수한 상태에서 가능한 기법들을 실험하는 작업들(<광야를 헤매는 광인>(2011), <광야를 헤매는 광인>(2020))과 동시에 환영성 자체를 냉소하는 작업들(<Types of Cap-lion and Palm tree>(2020), <걷는 사자>(2020))을 제출한다. 전자가 잉크 혹은 유화물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각적 효과들을 전면화하고 있다면(가령 <광야를 헤매는 광인>(2020)에서는 그림 위에 젯소를 덧칠하고 그것이 마른 뒤 남은 붓터치를 다시금 펜으로 묘사하여, 화려하고 난폭한 소용돌이와 같은 형상을 돌출시키는 부분들이 두드러진다), 후자는 환영적 평면 내부에 조야하게 그려진 실제의 애니메이션 스틸컷을 삽입함으로써 전자에 메타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그림판의 낙서 수준으로 조야하게 그려진 <걷는 사자>에 등장하는 사자가 그 회화적 버전인 <Types of Cap-lion and Palm tree>의 귀퉁이에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Types of Cap-lion and Palm tree>에서 충실하게 그려진 대리석 사자 조각상이 드러내는 조형성과 자체의 미감은, 그 고정성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 그려진 짤방과도 같은 조야한 사자의 운동(<걷는 사자>) 보다 주목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김윤섭의 작업은 플래시(Flash) 애니메이션 혹은 점선면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재현장치의 등장 이후 더욱 급격히 상실된 회화의 힘과 붕괴된 회화적 종별성에 대한 알레고리를 나타낸다.


상술했듯, 이들은 회화의 갱신과 이미지의 운동에 대한 당위를 논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조건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1.일찍이 회화적 환영성이 모더니즘 회화에서 공격받았던 맥락에 더하여, 60-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등 회화적 아방가르드가 급격히 경매 및 갤러리 제도로 흡수됨으로써 후퇴한 이후 평면의 환영에 대한 메타적 비판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 과정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동시대미술을 거쳐 예술의 시공간 전체가 글로벌 아트로 통합되고, 일종의 조류로서 회화 사조라 할법한 것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즉 회화의 환영성은 부술 것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런 조건을 무릅쓴 채 회화적 환영성을 재고할 것을 요청하는 김윤섭의 제스쳐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2.누적된 드로잉의 터치와 3D모델링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시간성을 회화의 장 내로 편입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는 미지수다. 3D모델링을 활용한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일찍이 80년대 중반에 단편 분량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낼 만큼의 성과를 거뒀으며, 이는 <토이스토리>(1995)와 같은 대중적 장편영화를 구성해내는 데에까지 거듭났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뒤로 우리는 3D의 모델링의 향연을 마주하고 있다. 편재하는 디지털 평면이 전제하는 무빙이미지의 몰입감을 회화의 장내로 재전유하고자 하는 것이 강주형과 이승훈의 관심이라면, 이들의 시간 회화는 통속적인 몰입감에 견주어 형식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단절할 수 있을까.


한편 최근의 대중적인 뉴미디어 전시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고전이 되는 회화의 장면들 자체를 말 그대로 운동시키며, 그로써 시간을 주무른다. 그러나 거기서 그림은 관람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한 경험과 체험 자체가 된다. 회화는 성공적으로 무빙이미지의 대열에 합류하지만, 역사적인 회화의 경향들은 반성되거나 반추되기보다 오히려 이미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순전한 이미지의 표면 자체로 고착되는 것이다. 그때 운동을 통한 시각적 환영성의 극단에서 도달한 것은 회화의 갱신이라기보다는 회화 고유의 반성적 공간의 상실, 혹은 인공호흡기를 단 채 기이하게 수명을 연장한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로서의 뒤틀린 회화이다. 이 모든 것이 회화에 시간성을 도입하는 시도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뽈뽈뽈>의 작가들이 회화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간성의 성격에 대해서도 질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회화는 꼭 움직여야 할까? 그것은 어떤 운동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화의 갱신인가, 회화로의 복귀인가? 회화에 직접적인 물리적 시간성이 도입되는 순간, 회화 특유의 반성적 공간은 소멸되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며 작품과의 거리 속에서 반성하는 관람자의 모델 또한 이미 되찾을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되지 않을까. 혹은, 이들의 시도는 새로운 관람의 방식을 창안함과 더불어 회화를 성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뽈뽈뽈>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열어 놓으며, 동시대 회화의 재생산 조건을 반추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