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riticism

픽셀화되는 세계, 혹은 픽셀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의 세계의 논리

by 정강산 2022. 1. 2.

(<픽셀화되는 세계>(공간힘. 2021.9.28-10.24)의 도록에 선게재된 글입니다)

 

 

픽셀화되는 세계, 혹은 픽셀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의 세계의 논리

 

정강산

 

 

1.

2000, 인터넷 환경이 열어젖힐 새로운 경제적 지평에 대한 장밋빛 전망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추동되었던 닷컴버블이 터진 이후 인터넷 경제는 파행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IT 기업들이 도산하게 되었지만 몇몇 기업들은 인수 합병을 비롯, 당시 투자된 자본을 통해 얻어진 기술적 성과들을 독점적으로 통합시키며 생존하게 되고, 이내 점차 웹 생태계를 재편해가며 산업의 헤게모니를 전환시켜왔다. 그리하여 90년대 초만 해도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나 엑손 모빌(Exxon Mobil)과 같은 전통적인 에너지 기업, 혹은 월마트(Walmart), 프록터 앤 갬블(Procter & Gamble)과 같은 유통 및 소비재 회사가 전 세계 시가총액 최상위를 석권했다면, 오늘날 그 자리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을 비롯한 IT,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채우고 있다. 동시에 이는 여러 문제계가 대두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예컨대 웹과 관련된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종의 대두로 말미암아 비물질노동과 물질노동을 구분하는 사유흐름이 생겼으며,[각주:1] 넷상의 정보처리기술의 발달에 따라 저작물의 복제와 전용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가능해진 조건은 카피라이트, 카피레프트 논쟁을 야기했고,[각주:2] 추가 생산비용이 ‘0’에 수렴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 정보적 상품이 등장함으로써 정보재 가치논쟁이 대두되었다.[각주:3] 그와 더불어 디지털 기술을 통한 개인 데이터의 전유 및 관리가 용이해지며 디지털 통제와 감시의 문제에 대한 주목 또한 생겨나게 되었다.[각주:4]

 컴퓨터 공학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화는 위와 같은 전에 없던 인식론적 도전들을 제기함에 이어 새로운 삶의 패턴 또한 발생시켰다. 우리는 이제 구체적인 현장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보다 웹 쇼핑을 즐기며, 신용카드와 직불카드를 비롯한 전자결제 시스템으로 현금 없이 상시 지불하거나, 자료를 수집해야할 일이 생기면 도서관을 가기보다 우선 구글링을 선호하고, 무게가 나가는 종이책 대신 스캔된 pdf 파일이나 이북(e-book)을 보유하고자 한다. 만화방이나 대여점에 들리는 것은 웹툰과 웹소설 등으로 인해 옛말이 된지 오래이며, 음악을 듣는 방식은 음반의 직접구매라기보다는 사운드 파일을 다운받거나 온라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되었고, 극장을 가거나 TV를 보는 일보다는 유튜브,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것이 양질의 시청각 컨텐츠에 접근하는 유효한 방식으로 여겨지는 추세이다.

 한편 실제 산업의 생산 수준에서 일어날 변화로서 주목되어온 것은 자동화인데, 이는 농업에서는 온도와 습도를 자동 혹은 원격으로 조정하며, LED 등으로 햇빛을 대체하거나 컨베이어 벨트식 화분라인을 통해 작물 생산성을 높이는 등의 스마트 팜(smart farm), 제조업에서는 공장의 설비들에 연동된 IoT(Internet of things)를 통해 생산현황의 전 과정을 데이터화하여 분석하고, 필요한 조치들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등 혁신 사업체들의 등장에서 두드러진다.[각주:5] 유통업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아마존(Amazon)의 키바(Kiva) 로봇은 물류창고를 그리드 단위로 구획하여 이동하며 배송품의 선별작업과 수집, 포장과 선적에 이르는 공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했고, 그리하여 20% 가량의 비용절감을 이뤄냈다.[각주:6] 현대제철과 포스코를 비롯한 대형 철강 회사들에서는 일찍이 소규모의 관리 인력을 제외하면 생산공정에 별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업무 전반을 자동화시켰으며, 현대차 또한 자동화 장비를 점차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각주:7] 더불어 근 몇 년간 대형마트, 심지어 소매점마저도 무인 결제시스템을 통해 노동력을 감축해왔고, 회전율이 높은 대형 요식업계에서는 이미 서빙 로봇을 통해 음식을 나른다. 이처럼 각 산업영역 전반에서 노동력 투입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최근 유행했던- 실체조차 불분명한 4차 산업혁명에 관련된 기대와 공포,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소멸의 악몽은 위와 같은 풍경들에서 연원한다. 좌우를 망라하는 기본 소득의 논자들이 가장 크게 기대는 근거 또한 이와 같은 자동화된 산업의 단면일 정도로, 현재의 기술적 조건은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각주:8]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플랫폼 기업들의 부상이 자리한다. 이러한 기업들은 대개 자체적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조작과 배치를 통해 이용자들의 활동을 매개하며, 거기서 파생되는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를 기반으로 이윤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컨대 아마존,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구글-유튜브 등은 기밀에 붙여진 자체 알고리즘을 통해 사용자들이 만들어내는 컨텐츠들과 정보들을 유통시키며, 검색기록을 비롯한 서버 내 상호작용을 채집하고 분석하여 그들이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에 관한 광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이들 데이터베이스는 광고주와 기업들에게 팔리거나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는 데에 주로 이용되어 이 플랫폼 기업들의 주요 수익원을 담당한다.[각주:9] 한편 한국의 택시호출 앱시장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카카오T, 국내 배달앱 시장을 석권해온 배달의민족, 세계 유수의 숙박체인 업체들이 보유한 물량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숙박시설을 보유한 에어비앤비 등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이들 기업들은 일체의 투자와 책임 없이 기존의 산업적 기반과 시설을 전유하여 노무제공의 풀(pool)에서 발생하는 중개료를 수취하는 기생적인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사회적 교환행위가 발생하는 장에 인터페이스를 설치하고 그로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물론 클라우드 서비스를 비롯하여 재화를 직접 대여하는 식의 플랫폼 기업 또한 있으나, 이들 모두는 특정 기술과 재화의 점유에 기반한 지대추구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수렴한다고 하겠다. 구글, 페이스북 등은 자신의 서버에 등록되는 컨텐츠를 직접 생산하지 않으며, 카카오T와 배민은 기사를 고용하지 않는다. IT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재화를 대여하는 아마존 웹 서비스는 이미 구축된 서버와 소프트웨어 등을 그저 임대한다.[각주:10]

 그런 점에서 근래 디지털 인프라 및 데이터 관리 기술에 기반한 이른바 플랫폼 기업의 대두는 전연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의 특정한 기술적 발현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 말해 플랫폼 자본주의의 작동 양상은 임대업과 중개업이라는 지대 추구적인 산업의 경향이 현재의 기술적 조건 속에서 매개된 결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데이터’, ‘인터넷’, ‘디지털등의 질료적 측면 배면에 자리하는 연속성을 강조하여 보는 것은, 그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노동의 양상에 주목하기에도 유용한 입장을 제공한다. 플랫폼 기업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데이터와 알고리즘 등의 소프트웨어 및 원격전산을 가능케 하는 하드웨어의 가동에 뒤따르는 자동화와 관련된 경향을 제 축으로 삼으면서도, 자본주의에서 제거할 수 없는 잔여로서의 노동에 기대며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배달 중개 서비스 업체들은 AI를 통해 수요 공급 현황에 맞춰 배달료를 유동적으로 조정하며, 이는 배달원들의 과속과 불안정한 노동환경을 조성한다. 배달 배차의 분배 역시 AI를 통해 이뤄지는데, 배차를 거절하면 이후의 배차를 지연시키거나 배달계정을 정지시키는 등 점진적으로 페널티를 부과한다. 또한 사측은 GPS로 연결된 중앙통제시스템 상에서 라이더들의 이동현황을 매 순간 체크하며, 별도의 보고 없이 이동을 멈추게 되면 배달원에게 연락을 취해 사유를 묻는다. 여기서 노동은 AIGPS라는 신기술의 세련된 외피 하에 이뤄지지만, 그 기술은 노동방식과 강도를 사측의 구상대로 조정하려는 고전적인 자본주의적 노무관리의 목적에 전적으로 충실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라이더유니온의 활동으로 가시화된 플랫폼 노동과 관련,[각주:11] 문제가 되고 있는 배달원들의 특수고용상태는 일찍이 건설업, 택배, 대리운전, 보험설계, 퀵배달, 화물트럭운송, 학습지 등의 중개 및 용역사업장들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고용관계 외부에서 개인사업자의 신분으로 도급계약을 맺지만, 실질적으로 사측의 통제와 관리 하에서 노무를 수행하게 되며- 근로기준법 상의 근로자로 인정을 받지 못해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2000년대 초부터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전국보험모집인노조, 퀵서비스노동조합 등의 조직화 시도가 있어왔고, 기나긴 투쟁 끝에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특수고용직의 직종이 늘어왔다.[각주:12]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IMF 구제금융으로 심화된 한국의 신자유주의 이후 유연해진고용관계 속에서 확대된 불안정노동의 조건을 전제한다. 요컨대 플랫폼 기업이 노무를 제공받는 방식은 극한에 이른 노사관계의 비대칭성을 반영하며, 이를 가능케 한 이전의 사회적 맥락과의 연속성 속에 있다. 이처럼 현재 선진기술사업의 기저에 있는 연속성을 보는 것은, 플랫폼 기업들의 성장과 그들이 구축하는 공유경제에 대한 예찬을 지양하고 그 논리를 파악하는 데에서 결정적이다.

 

2.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연속성의 지평에서 플랫폼 경제를 보면 2010년대 중후반의 한국 미술계를 주름잡았던 기술 중심적, 매체론적 편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상기한 닷컴버블 이후 자본의 재편 과정이라는 실재가, 어떤 시좌에서는 납작함이라는 디지털 특정적 심상과 엄지세대혹은 디지털 신인류의 출현 내지 포스트 인터넷 시대로 비쳤던 반면, 어떤 시좌에서는 공기처럼 편재하는 불안정노동과 이윤원천으로 데이터를 전유하는 (플랫폼/감시) 자본주의의 신경향이라는 쟁점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각주:13] 그런 점에서 담론으로서의 납작함에 의해 역설적으로 납작하게 짓눌려버린 삶의 실재가 바로 새로운 기술적 조건 속에서 항상화 된 불안정노동과 감시, 산업 역학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꽤나 개연성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공간 힘의 전시 <픽셀화되는 세계>(2021.9.28-10.24)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개입하여, 현재의 기술적 조건이 가능케 하는 삶과 지각(perception)의 변화된 양상을 추적하는 동시에 그러한 기술들이 극복하지 못한 세계의 연속적인 논리를 더듬어보려 하는 시도이다. 큐레이터 김효영은 기획의도에 관해 시간당 생산량(Units Per Hour) 개념을 설명하며, 그것이 “21세기 플랫폼 산업에서 개개인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혁신, 혁명 따위로 불리는 플랫폼 기술은 곧 바로 자본에게 포섭되어 고용 없는 노동의 세계를 현실화했다.(...) 모든 공공의 것을 구획하고 잠식해 버린 플랫폼의 세계에서 인간의 신체와 모든 행위들은 데이터화되어 으로 치환된다[각주:14]며 전시의 지향을 뚜렷하게 강조한다. 기획전의 차원에서 볼 때, 한국에서 디지털을 비롯한 동시대의 기술적 조건들을 사회와의 관계 하에서 비판적으로 반성하려는 시도는 디지털의 존재론/매체론 및 세대론으로 점철된 2010년대 중후반의 전시들의 파고 속에서 좀처럼 나타나지 않다가[각주:15] <불온한 데이터>(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더블비전>(2020, 아르코미술관) 등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된 바 있다. 요컨대 <픽셀화되는 세계>의 방향은 이와 같은 디지털의 타율성을 조명하는 계보에 놓인다.

 그리하여 본 전시의 특징은 디지털이 매개하는 사회적 실재를 다루면서도, 디지털의 물성 자체나 매체에 대한 강조는 저만치 물러나 있는 작업들로 채워져 있다는 데에 있다. 전시된 작업들 중 디지털 기반의 툴(tool)들을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는 송기철의 작업부터가 그렇다. 그의 <고체와 공백은 어떻게 점으로 부서지는가>(2021)는 여러 용도의 디지털 재현 장치들과 특정한 오브제들이 오버랩 된 프린트 이미지 3점을 하나의 축으로 삼으면서, 실제의 풍경들이 이런저런 디지털 재현 프로그램에 매개되어 시뮬레이션 되고 있는 영상을 또 다른 축으로 삼는다. 영상 내 여러 프로그램들은 CCTV 상에서 이동 중인 사람들을 형형색색의 픽셀들로 분해하여 재현하거나,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실선을 생성하며 이동 동선을 정확히 추적하거나, 각 인물들을 넘버링하여 개체로서 범주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 감시, 유통, 군사훈련 등과 관련된 수많은 현장에서 사용됨직한 적나라한 영상 속 장면들은 익명적이고 자동적인 작동을 가장하는 디지털 재현 기술의 (물신적)양태를 암시하는 동시에 나머지 3점의 이미지들을 이해할 지표로서 맥락화된다. 영상 옆에 함께 제시된 이미지는 심하게 파손된 자동차와 거대한 암석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자동차의 파손된 접면과 암석의 모서리들은 어떤 인과를 암시하는 듯한 녹색 실선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견 암석과 자동차 간의 충돌을 재구성하는 시뮬레이션의 시각화로 읽히는 이 장면은, 그러나 연결된 실선의 엄청난 개수로 인해 곧바로 그 정체가 모호해진다(충돌에 대한 증명치고는 실선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미지는 두 점 이상의 사진의 픽셀 값을 분석하여 유사한 값이 나온 사진들을 이어 붙여주는(본래는 와이드 샷의 풍경을 구성하기 위해 이용되는) 툴을 통해, 서로 무관한 이미지를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파손된 자동차와 암석 사이에는 어떤 인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툴은 서로 무관한 것들 사이에 표피적 인과를 부여하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무리 없이 붙여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심상은 피상성이라 할법한 것으로, 기술은 실체에서 미끄러지는 동시에 본래의 용도를 초과하는 목적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 이때 송기철은 (영상 속에서 나타난) 자율화된 채 알고리즘에 따라 운동하는 기술의 외양이 무색하게도- 기술이 특정한 의지 아래 오용되거나, 전유되거나, 매개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가 제시한 다른 이미지들 역시 마찬가지로 기술의 바닥에 가까운 심상을 가리킨다. 풍경사진 위로 오버랩된 안면인식 기술의 이미지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디지털의 유령이 된 인간에 대한 모종의 회화로도 읽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식별가능한 안면의 부재 속에서 안면을 인식하는 오작동을 연출함으로써 기술의 공회전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불어 픽셀의 엣지가 보일만큼 크게 확대되어 정체를 알 수 없으나 필시 인간으로 추측되는 검붉은 디지털 사진과, 위성사진이 서로 겹쳐진 채 예의 녹색 실선으로 이어져있는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신체와 공간의 추상화에 대한 심상으로 관객을 이끈다. 디지털 상에서 줌인된 만큼 인간은 으깨진 채로, 세계는 거칠게 납작해진 평면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그로써 송기철은 디지털을 참조한 만큼 균질하고 깔끔한 작업의 표면과는 달리, 질척이고 끈적이며 음험하기까지한 그 배면을 얘기한다.

 한편 이은희의 <Longing>(2020)은 여러 영화에서 달리기 장면을 발췌한 영상과 러닝머신 위에서 재활중인 환자의 다리를 클로즈업 한 영상이 병렬되어 제시되는 투 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목적을 알 수 없지만 어딘가로 달려가는 인물들은 언뜻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에 쫒기는 듯도 하며, 반복적인 훈련을 수행하는 듯도 하지만, 그들이 왜,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는 결국 명확히 알 수 없다. 옆의 영상에서 등장하는 재활중인 인물 역시 베일에 싸여 있다. 그는 어떤 정보도 없이 다만 묵묵히 걸을 뿐, (어떤 사건으로), 어떻게(어떤 생각으로) 걷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 같은 양 영상이 몽타주됨으로써 나타나는 효과는, 모호성을 더욱 배가한다. 요컨대 어떻게든 달리고 있는 신체들과, 재활 훈련에 임하는 신체는 어떤 관계를 맺는지, 재활중인 인물은 다시금 달리고 싶어 하는지, 혹은 강제로 달릴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 관객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Longing>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양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타자의 신체는 불가해하게, 그저 있다. 그렇게 이은희는 신체라는 것이 심연과도 같은 무엇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진술한다. 타자의 신체와 주체의 파악 사이의 간극, 괴리의 감각을 논하는 <Longing><픽셀화되는 세계>의 부분으로 배치됨으로써- 어떤 기술적 조건의 변천 속에서도 인간의 신체는 제거할 수 없는 잔여로서 남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축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장진영의 <오래된 현재, 흩날리는 미래>(2021)는 학습지 교사, 트럭운수 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이하 특고노동자’)의 인터뷰 영상과, 그들의 쟁의장면, 플랫폼 노동을 조망하는 시사프로그램들의 클립들이 콜라주된 비디오 작업으로서, 플랫폼 경제에서 재편된 불안정노동이 갖는 사회적 계보를 들춘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여러 직종의 특고노동자들은 법적으론 사장이면서도 실제로는 노동자로서 일하는- 스스로의 역설적인 지위에 관해 토로한다.[각주:16] 그러나 인터뷰는 노동자들의 모습 전부를 드러내지 않는데, 영상은 화면 내에 창처럼 작게 뚫린 격자를 통해 인터뷰 현장의 일부만을 비추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장면은 블랙으로 처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격자를 통해서만 그들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시대에 편재하는 노동을 온전히 인지하고 이해할 수 없게 된 파편화된 지각 양상을 반영하면서도, 픽셀과 같은 무언가가 관객으로 하여금 말 그대로 좁아진 시야를 갖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어 등장하는 플랫폼 노동의 현황을 검토하는 시사프로 영상들은 특고노동자들의 인터뷰와 몽타주 됨으로써- ‘디지털로 매개된 채 내가 원할 때, 자유롭게 시간을 내어 일할 수 있는바의 첨단의 근로문화를 오래된 고용의 관례 하에서 맥락화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영상의 상당 부분을 채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쟁의 장면들이다. 영상 속 쟁의들은 격앙된 목소리와 욕설, 날카로운 외침들을 주로 담고 있는데, 으레 여느 쟁의들에서나 나타나는 풍경이긴 하나 그러한 장면들은 절취되어 연속적으로 제시됨으로써- 노동자들의 쟁의를 일사 분란한 전투라기보다는 개인의 비명/절규/소요에 가까운 무엇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를 통해 장진영은 조직된 노동자 대오가 옛말이 되어버릴 만큼 처절하게 내몰려버려, 건드리면 터져버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이는- 불안정노동 하의 인간의 조건을 묘사한다. 작업의 제목 오래된 현재가 플랫폼 노동을 다기한 특수고용노동의 계보와 연관 짓는 것이라면, ‘흩날리는 미래란 바로 이처럼 열화된 인간의 조건 자체를 주목하라는 요청에 가까울 것이다.

 이어 석경목의 <The Death of Light>(2019)는 카메라의 광감도(ISO)[각주:17]를 극도로 높여 찍은 마천루의 풍경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감도는 이미지 각각 10000, 16000, 25600, 51200으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피사체를 뚜렷하게 포착하기에는 한참 벗어난 채로 상승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뿌옇게 일어난 화소들의 노이즈는 마천루들을 어떤 깊이감도 없이 평평하게 만들고 만다. 더불어 각각의 마천루들은 배경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화면에 꽉 차게 촬영되어, 마치 자신이 지상에 세워져 있음을 망각한 듯 독자적인 전체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The Death of Light>의 문제계는 마천루로 집약되는 무차별하게 균질화된 공간과, ‘그 속에서 편재하게 된 빛으로 표상되는 무시간성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조너선 크레리가 지적했듯, 테크노 자본주의에 이르러 시간은 완전히 식민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비대해진 조명은 밤낮의 구분을 지워버리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해 업무는 여가시간을 침투하며, 온라인을 통해 소비와 판매는 24시간 내내 이뤄지도록 재편된다.[각주:18] 오늘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빛은 어둠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기보다는,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서, 이는 소비자본주의의 촘촘한 균일함을 예증하는 현상학적 지표가 된다. 조너선 크레리의 표현을 빌자면, 여기서 시간은 전통적인 속박에서 초탈하여, ‘(non) 시간으로 도약한다.[각주:19] 그리고 이와 같은 잠의 종말이야말로 동시대의 플랫폼 경제를 지탱하는 축이라 할 법한 것이다. 고고하게 높이 떠 있는, 그러나 편재하는 빛으로 납작해진 석경목의 마천루 이미지들이 암시하듯이 말이다.

함께 전시된 <Indifferent Scenery>(2021)는 영화들에서 배경이 되는 익명의 엑스트라들을 클로즈업하여 재생한 3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여기서 조명되고 있는 주변적 인물들은, 너무나 배경으로 밀려나 있어 얼굴조차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뭉개져있다. 그러나 으레 씬(Scene)이라는 전체는 그와 같이 짓눌러져 뭉개진 인물들을 필연적으로 지니는 바, 서사 전체를 발본적으로 뒤흔들 가능성 역시 이미 그처럼 배경이 되는, 익명의 인물들로 인해 이미 주어져있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영화-장면의 맥락과 서사, 영화-이미지의 주체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로 쓸 잠재성으로서, 배경은 거기에 이미있다. <The Death of Light>가 휘황찬란한 기술의 배면에 있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자폐적인 공고함을 가리킨다면, <Indifferent Scenery>는 그러한 사태를 지양할 모종의 가능성에 대한 작가 나름의 진술에 가까워 보인다. 누가 현재 세계의 상태를 현실적으로 지양해낼 것인가, 그 주체는 대중인가, 시민인가, 민족인가, 인민인가-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인가 프레카리아트인가 등등으로 이어지는 질문에 관해, 석경목은 그 가능성은 이미 이 체계 속에 주어져 있음을 말하려 한다.

 

3.

 상기한 바와 같이, <픽셀화되는 세계>는 디지털적 표피 하에 작동되어온 연속적인 논리들에 주목하며 그 실체를 캐묻고 있다. 따라서 본 전시에 부제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픽셀화될 수 없는 잔여로서의 세계의 논리가 될 것이다. <픽셀화되는 세계>가 그 귀결로서 가리키듯, 컴퓨터, 스마트폰, 알고리즘, AR(Augumented Reality), VR(Virtual Reality), MR(Mixed Reality), 메타버스 등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동시대의 기술적 조건이 가장 명증하게 자유와 자율, 실체를 자임하는 순간에조차- 그것은 모순으로 분열된 세계의 논리에 닻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와 같은 기술적 자율의 배경에는 항상 수익성 높은 투자기회를 찾아 헤매온 자본주의의 운동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본 리뷰의 서두에 언급했던, 동시대 플랫폼 기업의 약진의 밑거름이 된 닷컴버블이 이미 저금리 상황에서 장래 높은 이윤율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되는 미개척지로서의 인터넷에 대한 주목에 의해 추동되었던 것이고, 이는 70년대부터 이어진 제조업 과잉설비에서 비롯된 장기침체를 타개할 유효한 투자처로서 인터넷이 각광받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과잉설비는 다시 전통적인 산업 생산에서 나타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고, 이윤율은 사회적 생산관계에 의해 전제된- 인간의 노동력 가치에 대한 자본의 전유의 관철 수준에 따라 등락되어 왔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대면하는 구체적인 낱낱의 실재를 추동해온 목적인은 사회적 관계의 균열 자체라는 사실을, 플랫폼 자본주의의 작동은 새삼 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 전시를 빌어 이렇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대해 침묵하고자 한다면 디지털에 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 자율화된 기술에 대해 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선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비판하고 지양하여- 디지털을 해방하라.

 

 

  1. Lazzarato, Maurizio. "Immaterial labor" In Virno, Paolo and Michael Hardt (eds.) Radical Thought in Italy: A Potential Politic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6. pp.142-157. 라자라토의 비물질 노동에 대한 주목은 곧 네그리(Antonio Negri)와 비르노(Paolo Virno), 베라르디(Franco Berardi)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이 천착하는 주제가 되었으며, 정동적이고 인지적인 소요를 수반하는 노동 일반의 성격으로 확장되어 논의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2. Söderberg, Johan. “Copyleft vs. Copyright: A Marxist Critique." First Monday, Volume 7 Number 3 - 4 March 2002. [본문으로]
  3.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이어졌던 이 논쟁은 정보재의 가치 구성과 그 성격에 대한 규정을 둘러싸고 이뤄졌으며, 대략 정보재를 취급하는 기업의 이윤원천이 지대인지, 독점가격인지를 기점으로 입장이 나뉘었다. 본 논쟁의 개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강남훈, 강성윤, 류동민, 박성수, 이경천, 이채언, 채만수. 정보재 가치논쟁. 한신대학교출판부. 2007. [본문으로]
  4. 여러 웹들의 이용자 쿠키수집과 수시로 불거지는 카카오톡 개인정보 유출 사건들에서부터 중국의 스카이넷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감시의 사례는 다양하다.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된 사례로는 이스라엘의 민간 테크기업 NSO에서 개발된 페가수스라는 스파이웨어를 들 수 있다. 이 스파이웨어는 부재중 통화를 통해서까지 설치될 만큼 침투성이 높으며, 일단 컴퓨터 혹은 핸드폰에 설치되면 이용자의 모든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Amnesty International. “Uncovering the Iceberg: The Digital Surveillance Crisis Wrought by States and the Private Sector.” Index Number: DOC 10/4491/2021. [본문으로]
  5. 스마트팜 3.0시대"첨단기술로 일손 걱정 덜어요".” 뉴스투데이. MBC, 20201026일 방송. 이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스마트팜의 자동화 수준은 2,300 제곱미터의 농장을 두 명이 관리할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으며, 전 세계 스마트팜 규모는 300조원에 이르고, 한국의 스마트팜 규모 역시 2022년 경 6조원 가량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본문으로]
  6. Weinberg, Neal. "How Amazon launched the warehouse robotics industry." Tech Target. 7 Aug 2020. 20211024일 접속. [본문으로]
  7. 김효성. “현대차 15000명 퇴직해도···추가고용 계획 전혀 없는 까닭.” 중앙일보 2020123일 게시. 20211024일 접속. [본문으로]
  8. FOX 뉴스의 앵커이기도 한 미국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그 터커 칼슨(Tucker Carlson) 또한 글로벌화에 이어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소멸했으며 그 자리를 현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대립이 대체했다고 냉소하며 공화당과 민주당 엘리트 모두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동화가 몰고 올 위험을 경고한다. Carlson, Tucker. Ship of Fools: How a Selfish Ruling Class Is Bringing America to the Brink of Revolution. Free Press. 2019. 그러나 자동화는 대대적인 기술혁신이 발생할 때마다 이뤄져온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을 숙고함으로써 파국적인 기술결정론적 비약으로 치닫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외려 문제는 그와 같은 전환과정의 소요가 불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9. 최근 유럽에서 개인정보보호와 관련된 규제에 박차가 가해지며 올해 3월 구글이 웹 쿠키기반의 표적 광고를 중단하고 검색정보 기반의 맞춤형 광고에 집중할 방침을 발표했듯, 그 세부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본문으로]
  10. 플랫폼 기업의 유형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역. 킹콩북. 2020. 55. [본문으로]
  11. 해외의 사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2005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아마존의 메커니컬 터크(Mechanical Turk)일 것이다. 이는 일감을 가진 자와 노무를 제공할 의사를 가진 이들을 매칭시켜주는 플랫폼으로서, 사측은 이를 통해 중개 수수료를 취하지만, 노동자는 어떤 법적 보호로부터도 벗어난 채 저임금의 하청구조 말단에 놓이게 된다. [본문으로]
  12. 물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산재보험이 전적으로 사측의 부담인데 반해,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노동자)의 경우 그 부담률은 사측과 노동자가 5050으로 부담하게 산정되어 있을 뿐더러 산재적용제외 신청을 할 수 있게 하여 보험의 의미가 유명무실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에 라이더유니온과 일단의 변호사들은 지난 2020년 초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본문으로]
  13. (그토록 디지털적인)물류센터에서 감전사한 젊은 일용직 노동자의 죽음을 사운드 설치 작업을 통해 다룬 오민수의 <전기는 흐른다>(2020, 인스턴트루프)가 여러 비평가들의 관심을 받아 온 것은 첨예한 사회적 의제와 사운드라는 비구상적 접근이 만드는 파격적인 콜라주 효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론 그 작업이 디지털-매체론-세대론의 배면에 있는 실재를 언뜻 가리킴으로써 모종의 인식론적 환기구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연원한다. [본문으로]
  14. 공간 힘. <픽셀화되는 세계> 전시 리플렛. [본문으로]
  15. “2010년대에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미술가들은 지난 세대의 미술가와 전혀 다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기에 새로운 세대가 관찰한 세상의 외피가 어떻게 미술 안으로 변용되어 흡수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뉴 스킨: 본 뜨고 연결하기>(2015, 일민미술관), “(...)을지로, 창신동, 청량리 등 서울의 구도심과 구산업지역 혹은 변두리 외곽지역의 틈새에서 독립적으로 공간을 운영중이거나 웹을 기반으로 한시적 공동작업을 영위하고 있는 대안적 공동체의 활동과 방식을 하나의 현상으로서 조망하기 위해 기획<서울바벨>(2016,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초등학교 시절 PC(Personal Computer)의 보급화를 경험하여 컴퓨터와 인터넷 문화가 체화된 세대인 1980·90년대 출생 작가들에 주목하는 <시대정신: -사이키델릭; 블루>(2016, 아마도예술공간), “(...)인터넷의 보급과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급변하고 있는 창작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작가들의 작품 구현방식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감각을 보이고자 기획된 <유령팔>(2018,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등이 그러한 파고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비평 역시 현재의 기술적 조건에 대한 매체론적이고 세대론적인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다. [본문으로]
  16. 예컨대 구몬, 웅진, 재능 등의 학습지 교사는 교재 선택에서부터 사측의 지휘 하에 놓이며, 사측이 보유한 각 회원들에 파견되어 회원비의 일부를 임금으로 지급받는다. 이들은 회원의 유지 관리 여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으며, 실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직간접적인 페널티를 받지만, 법적으로는 사장(개인사업자)으로서 규정된다. [본문으로]
  17. 카메라의 ()감도(ISO)란 아날로그 카메라에서는 필름이 빛에 반응하는 민감도의 수치를 나타내며, 디지털 카메라에서는 이미지 센서의 빛에 대한 민감도를 의미한다. 감도가 높게 촬영된 사진일수록 밝고, 감도가 낮게 촬영된 사진일수록 어둡다. [본문으로]
  18.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종말.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4. 참조. [본문으로]
  19. 그런 점에서 어두컴컴한 북한과 백주대낮처럼 밝은 남한의 대비를 보여주는 야간 위성사진으로 촬영된 한반도의 이미지를 보며 남한의 경제력을 찬탄하기보다는, 어딘가에선 여전히 밤다운 밤이라는 게 아직 존재할 수 있다는 위안을 얻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위 이미지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한영혜. “위성사진 야간불빛으로 본 경제세계 10대 빈곤국”.” 중앙일보. 2019513일 게시. 2021123일 접속.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