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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지속가능성을 위해, 그러나 정의를 위해: 정의롭게 지속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제언

by 정강산 2021. 8. 21.

(<지속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부산현대미술관. 2021.5.4-9.22)의 전시도록에 선게재된 글입니다.

인용은 지면을 참고하셔요-)

 

 

지속가능성을 위해, 그러나 정의를 위해: 정의롭게 지속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제언

 

정강산

 

폭염은 소리와 형체 없이 다가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각주:1]

-E. 클라이넨버그

 

 

 소극장, 영화상영관, 클래식 콘서트 홀 등 여타의 예술 공간에 견줄 때 미술관은 비교적 무궁무진한 사회적 실험실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여기엔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후로 개방된 예술의 자기인식에 힘입어 미술이 자신의 조건을 반추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보았던 경험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1970년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출발하여 이내 미술사의 한 켠을 석권한 제도비판 미술은 그러한 경험이 생산적으로 지양된 웅변적인 사례일 것이다. 요컨대 제도비판 미술은 미술 자신이 근거하는 지반과 제 조건을 명시적으로 상대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초중반을 수놓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반미학적 실천들을 (역설적이지만) 미학적으로 결산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각주:2] 당대에 제도비판이 보여주었던 신선한 충격은 곧 그것이 하나의 가능한 장르로서 안착하게 되면서 과거의 파급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러한 미술사적 지표와 무관하게- 위기 혹은 전환의 시대에 미술()의 모델을 발본적으로 성찰하는 시도는 일정한 진리가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속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이하 지속가능한 미술관’)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제스쳐와 제도비판적 모티프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하는데, 이는 본 전시가 지속가능성이라는 미술 외부의 사회적 이용요구에 대한 미술관의 복무를 표명하며, 미술의 관성 하에서 배면에 가려져있던 그 특정한 제도적 양태를 추궁하기 때문이다. 본 전시의 명시적 주제에 견주어 볼 때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한- 위대한 최후의 아방가르드였던 기 드보르(Guy Debord)의 필름 작업 <스펙터클의 사회>(1973)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전시의 총론이 기대는 미술사적 근거를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물론 교육의 장이자 학교 내지 집단의 공적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호명하든(로드첸코의 노동자 클럽), 부르주아적 산보의 공간으로 미술관을 호명하든(개를 위한 미술관), 난민들의 재활 훈련소로서의 미술관을 호명하든(올라퍼 엘리아슨의 Green Light), 여느 소장전에서처럼 박물관으로서의 미술관을 호명하든, 착취와 위계적 폭력의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호명하든(산티아고 시에라의 문신 시리즈)- 그것은 언제나 지속가능한모델로 성립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근대 이후 미술관에서 벌어진 모든 실험과 실천들은 일시적인 상징적 가능성의 현전을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예술에 그 이상의 의무를 부과하려 했던 것이 바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처절한 시도였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적지 않은 이들이 미술관을 이해할 수 없는 허풍들이 난무하는 부질없는 이벤트의 장이자 휘발성의 공간이라 여길 수 있지만, 동시에 바로 이런 이유로 미술관은 미지의 유토피아를 향한 운동을 쉬지 않을 수 있다. 미술이 세계의 모든 실정적 요구에서 벗어난 부정성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논리로부터의 그 철저한 존재론적 이격에서 연원하는 까닭이다. 그런 미술관이 이번엔 환경적 지속성을 실험하는 공간을 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업의 편제에 있어 <지속가능한 미술관>생태적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골간으로 삼아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작업들을 선보인다. 국내외의 작가 총 57명이 참여한 만큼 그 스펙트럼이 넓기에 온전한 요약은 불가능하겠으나, 대략 공장식 축산의 기계화된 야만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컨베이어벨트와 결합된 살점덩어리들을 페인팅으로 구성하는 하민지의 작업[<가로막는 장애>(2019)], 미술관 외부에 조성된 자연환경에 자연적 재료를 통해 개입하는 바깥미술회의 작업들[<구멍난 강>(2021), <호흡>(2021) ], 제 기능을 잃어 교환 불가능하게 된 무용한 물건으로 이루어진 안규철의 작업[<두 대의 자전거>(2014)], 마스크를 재활용하여 관람용 의자를 제작한 김하늘의 작업[<Stack and Stack(In Pandemic)>(2020)] 등에서부터, 폐식용유에 플라스틱 부활절 달걀을 담가 그 추이를 관찰하게끔 한 에이미 야오(Amy Yao)<유령 서퍼(Phantom Surfers)>(2016), 기후변화에 적응된 가능한 미래 과수원의 프로토타입을 개념적으로 탐구하는 해리슨 부부(The Harrisons)<생존비품 5: 휴대용 과수원(Survival Piece V: Portable Orchard)>(1972) 등이 비교적 명시적으로 전시의 총론을 암시하는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생태 자체가 전면에 부각되는 미술적 실천은 화이트큐브로 표상되는 모더니즘적 공간의 정태성과 고착성, 영원성에 대한 발본적인 안티테제를 표방했던 1960-70년대의 대지미술(Earth art)과 더불어 부상하여 이내 자연과 환경의 제 문제를 다루는 생태미술(Ecological art)로 외연을 넓혀왔으며, 당연하게도 적지 않은 선례들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 한하자면 1981년부터 대지/생태미술을 맥락화 해온 바깥미술회의 작업들, 2009년의 내성천 프로젝트에서부터 시작된 리슨투더시티의 녹색 액티비즘, 2010년대 중반부터 문화에 의한 자연의 구축과 매개를 비판적으로 살펴온 이소요의 기획 등 굵직한 흐름들을 꼽을 수 있으며, 갤러리 팩토리의 <식물사회>(2014), 서울시립미술관의 <식물채집>(2016), 북서울 시립미술관의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다>(2019) 등 생태와 자연을 축으로 삼은 크고 작은 기획전 역시 적지 않게 이뤄졌다. 허나 <지속가능한 미술관>이 이러한 흐름 내에서 다소 결을 달리하는 지점은, 그것이 강도 높은 절약적 규준들을 전시 과정 전체에 걸쳐 부과한다는 데에 있다.

 달리말해, <지속가능한 미술관>은 한편으론 불필요한 자원사용의 지양이라는 목적 하에, 형식적인 수준에서 매우 철저한 제한을 걸어둔다. 화이트 큐브의 순백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으레 전선 정리에 사용되는 마감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조명의 밝기를 최소한으로 하거나, 작품정보를 담은 캡션을 이면지에 연필로 수작업하여 부착하거나, 베니어판 가벽 구조물에 석고를 입히지 않는다거나, 스크리닝을 비롯한 전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의 전력량을 확인하는 등 전시의 세밀한 제반 공정에 에너지 절약의 기예들이 개입한다. 심지어 해외 작품들을 항공편이 아닌 선박으로 들여오거나, 운송이 곤란한 경우 설계도를 받아 현지에서 재제작하거나 해외의 작업 설치 전경을 온라인으로 실시간 송출하는 정도로 그 절약의 강도가 포괄적이고 치밀하다. 환경오염 및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으레 낭비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지적하곤 하는 주류 생태주의자들의 비판으로부터 면제권을 가지기에 충분해 보이는 본 전시의 이러한 측면은, 모종의 잠정적인 미술관 모델로서- 동시대 전시의 조건에 대한 메타적이고 비판적인 접근이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인류세, 혹은 기후위기가 진정으로 실재하는 경향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리고 이 속에서 사회의 제 부문이 변화해야만 한다면, 미술관 역시 현재의 관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미술관을 관람/소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성과를 내보이고, 그를 통해 이런 저런 기업과 기관의 자원을 끌어 모으고, 그 규모를 유지-확장하며,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간들(미술관장에서부터 학예사와 연구보조, 디자이너, 작가, 비평가, 테크니션, 미화원, 경비원, 시설관리자, 전시철거반 등)의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시 미술관을 관람/소비 대중에게 노출시켜야 하는 관성 속에서, 당연히 케이블은 PVC전선 보호관에 깔끔하게 정돈되어야 하고, 조명은 밝아야 하며, 캡션은 빨리 생산되어야 하고, 작품 설치에 관한한 전력은 가감 없이 지출되어야 하며, 해외의 작품은 비행기를 통해 속전속결로 들여와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지속가능한 미술관>은 볼거리의 생산에 매여 있는 미술관의 경로의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과들을-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외부효과[각주:3]를 고려한 채 가능한 한 조율하고자 하는 것이다(물론 후면에서 간략히 언급하겠으나, 이것이 미술의 환경적 지속성을 모델링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성 하에서는 전시되는 작품 상당부분을 소장품 내지 기성 작업 위주로 조직한 측면 역시, 작품 또한 위와 같은 미술관의 관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것은 더 이상 생산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반미학적인 제스쳐로 소급된다.

 또한 전시 구성에 있어 특기할만한 것은 어마어마한 양으로 전시 동선의 중간 즈음에 놓인 쓰레기 더미인데, 이는 망가진 석고보드와 베니어 판, 각목과 고철, 페인트 통, 리플렛들로 이뤄진 폐기물의 산- <전시폐기물>이다. 전시장 내의 작품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전시폐기물>은 본 전시를 조직한 큐레이터의 작업이라 할 법한 것으로, 이전 전시를 철수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잔해들을 모아 쌓아둔 것이다. 여기서, 여태 수없이 이뤄져온 전시들에서 한결같이 막대한 규모로 쏟아져 나왔을 폐기물들은[각주:4] - 관객에게 개방되지 않은 채 전시의 배면으로 사라지는 대신, 전시장의 한복판에 불려나와 모종의 볼거리로서 제시된다. 이것이 본 전시의 반미학적인 지향을 가장 웅변적으로 집약하는 대목임은 명백하다. 이와 같은 도발은 미술관의 관리직을 맡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했을 수도 있고, 사회의 제 요구로부터 벗어나 고고한 체 하는 미술관의 에토스를 못마땅해 하는 누군가에게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 수도 있으며, 전시에서 파생되는 환경적 소요들을 짐작하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경악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생태/기후변화의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철저하게 납득시키고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여느 이미지들과 닮아있다는 점은 재고해봄직하다.

 달리말해, 근래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보도 자료들이 앞 다투어 생산하는 묵시록적인 생태적 파국의 이미지나, 인간 활동에서 파생된 막대한 규모의 인위적 부산물에 대한 이미지들 역시 동시대 저널리즘의 관성에 의한 것이라면, 일종의 승부수였을 <전시폐기물>은 외려 본 전시의 역린이 될 수도 있다. 서사는 연대하게 하며, 이미지는 방관하게 한다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언급을 부러 반복할 필요는 없겠으나[각주:5], 이미지를 통한 대상의 현전이 생생하고 적나라할수록- 대상이 갖는 상세한 맥락과 원인을 구체적인 보편성에 입각하여 규정적으로 맥락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존망 위기,” “세계가 불타고 있다,” “인류 재앙 경고,” “절체절명[각주:6]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제시되곤 하는- 망망대해 위 한조각의 빙산에 몸을 누이고 있는 북극곰의 사진이나, 상당한 규모로 진행된 2019년의 아마존 우림 산불 사진이나, 인도 뉴델리의 쓰레기 산을 촬영한 사진은 극단적인 기아를 표상하고자 유니세프(UNICEF)에서 동원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진만큼이나 추상적이지 않던가?[각주:7] 예컨대 유니세프 식의 기아와 궁핍의 이미지들은 피상적인 사건의 지표로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질지 모르지만, 어째서 아프리카에 그와 같은 극단적인 빈곤이 만성화되었는지에 관한 (예컨대 제국주의적 침탈에 따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파괴적인 이식과 그에 따른 공동체의 붕괴/내전 발발 및 불평등의 심화 등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힘들을 드러내는 데에 무력하다. 물론 <전시폐기물>이 관객으로 하여금 미술관의 반환경적 관성을 반성하게 하기보다 그 자신을 외설적인 사건으로서 탐닉하게 했는지의 여부를 단언할 수 없으나- 위와 같은 맥락에서 그것이 일회적인 시각적 현전에 고착된 채 생태적 스펙터클로 소급될 것인지, 혹은 생태적 각성을 촉구하는 생산적인 계기로 거듭날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물음을 한 켠에 노정하며, <지속가능한 미술관>은 생태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입체적인 시좌 또한 시사한다. 전시의 아카이브 겸 작품으로서 전시장의 도입부에 설치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제작한 에너지 절약 및 환경보호 포스터들(<1980-2020년대 인쇄 및 TV 광고>)1980년대부터 현 시점까지를 아우르는데, 이러한 포스터의 연대기 속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자연에 대한 시대적 상상의 결절점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예컨대 과거의 포스터가 자연을 자원으로서 상상하며 그에 대한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편이었다면, 현대에 들어 그 논조는 점차 생태적 위기감과 비인간 생물에 대한 동정심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현저하게 이행한다. 이러한 대목은 개발독재의 우민에게 표상 가능한 자연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적응한 시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연사이의 격차를 암시하며, 그로써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의 불투명성을 예증한다.[각주:8] 한편 큐레이션 된 작품의 연대기적 배치를 통해서도 비슷한 층위의 효과가 나타난다. 수묵화의 형식으로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우거진 녹음을 묘사한 허백련의 <매림서실>(1941)이 자연에 대한 20세기 초반의 목가주의적 상상을 보여준다면, 난개발된 도시의 위로 오수가 낙하하는 장면을 그린 임옥상의 <하수구>(1982)와 새빨간 민둥산 위로 송전탑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모습을 제시하는 정진윤의 <고압선>(1985)은 한국의 근대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기이하게 황량한 자연의 낯섬을, 이어 밀폐된 유리관 속 생화의 꽃향기를 공기오염으로 인식하고 가동되는 공기청정기를 설치한 김상진의 <공기청정기>(2011)는 인간이 상정한 객관성이 생태적 주관성과 불화하는 지점을 보여주며[각주:9], 끝내 하민지의 <가로막는 장애>(2019)에서 자연은 공장식 축산의 배면에 있는 이윤원리에 매개된 것으로 조명된다. 대상(이 경우엔 자연’)에 대한 즉자적이고 직접적인 앎이 어떻게 역사에 의해 점차 전개되고 규정적으로 전화해가며 대자적으로 이행하는지를 보여주는 헤겔적 정신현상학의 미술적 예시를 상론하는 듯한 위와 같은 대목은, 자연이라는 대상이 어떻게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되고, 문화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는지를 상론한다.

 이러한 전시의 주요 단면이 암시하듯, 자연이란 소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종종 잊곤 하는 것은 자연이 실체인 동시에 또한 담론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생태위기 혹은 기후변화를 이해하는 여러 버전의 서사를 떠올려보자. 그 범위는 현 생활수준 및 기술적 발전을 퇴보시키는 일 없이 과학적 조정을 통한 생태와의 공존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에코모더니즘에서부터, 기술문명으로 대표되는 근대성 자체에서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는 하이데거적 목가주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계적 전유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유비하는 에코페미니즘, 인간중심주의를 위기의 제 1원인으로 상정하는 생태중심주의, 묵시록적 세계관과 결합한 종말론적 환경주의, 자연을 잠재적 가치의 원천으로 간주하며 시장을 통해 환경에 대한 부정적 외부효과를 조절할 수 있음을 설파하는 자유시장 환경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폭 넓다. 자연이라는 즉자는 언제나 이처럼 경합하는 모델들에 의해 매개된 채 대자로서 현상한다. 물론 담론으로서의 자연을 논하는 것이, 인류세나 기후위기가 시사하는 생태적 변화의 규모나 실재성을 평가절하하는 데에로 나아가선 안 될 것이다. 환경적 외부효과에 대한 고려 없이 파괴적으로 조직되어온 역사를 직시하는 작업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 사태의 규모에 대한 강조와 집중이, 으레 충격요법을 표방하며 다만 생태적 파국의 사후적인 양태를 피상적으로 주목한 채- 사태의 본질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식을 즉자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적 위기를 논함에 있어, 우리는 그와 관련된 무수한 발화와 실천들이 갖는 각각의 노선이 어느 즈음에 위치하는지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어떤생태적 이상을 꿈꾸며, ‘어떤집단을 생태적 주체로 호명하고, ‘어떤세력에게 보다 큰 의무를 지울 것인가? ‘인류라는 추상적인 단위보다 구체적으로 분화된 대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가? 이는 생태와 자연의 문제를 다루는 미술적 실천에서도 결정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지점이다.

 예컨대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주류 생태주의자들은 탄소와 메테인(methane)을 비롯한 온실가스를 주범으로 꼽거나, 화석연료에 의존해온 근대적 산업 혹은 라이프스타일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정보가가 없는 진술에 가깝다. ‘인간은 화석연료 사용을 통해 탄소를 배출한다. 이 탄소는 온실가스로서 지구의 복사열을 흡수하여 지구의 온도를 높인다’: 이는 얼핏 객관성을 지니는 진술인 듯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 상황을 야기한 심층적인 추동력에 관해 침묵한 채 건조한 기계적 묘사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탄소자체가 아니라 막대한 탄소배출을 필연화하는 동학(dynamics)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핵심적인 기점으로 두는 인류세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의 함정에 빠진다.[각주:10]인간은 지구의 지배종이 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그 여파는 지질에 영향을 줄만큼 막대해졌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진술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그와 같은 구도가 산업혁명을 추동하고 그 규모를 확대재생산 해온 기제에 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이든, 인류세이든, 이들이 현 조건에 대한 진술로서 가진 진리가가 올바르게 평가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개념을 보다 전개시킬 필요가 있다. , 왜 인간은 화석연료를 무절제하게 사용해야만 했는가? 인간의 섭식과 생리적 활동들은 어떤 구조적 힘 속에서 지질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가?[각주:11] 무엇이 그들을 추동한 규정적인 기제인가? 이는 결국 기후 및 지질변화의 주된 작인으로서의 인간이, 어떤 세계의 원리 내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직시해야 함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경우 간과되는 것이지만, 이 헤게모니적 개념 양자가 기대고 있는 시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기후변화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제 5차 평가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 이후로 인위적인 탄소배출량과 대기 중 온실가스양, 지구 평균 기온은 정비례하여 상승해오고 있으며, 이는 기후위기가 1800년대에 걸친 출발점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2] 한편 폴 크루첸(Paul Crutzen)1784년의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극지 얼음층의 이산화탄소 및 메테인 포화도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18세기 말로 인류세의 시작점을 꼽는다.[각주:13] 이 모든 것이 소급되는 소실점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발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 노동과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확립됨에 따라 만인이 상품생산과 판매를 통해 경쟁해야만 하는 역사적 체제가 성립되었고, 이 시스템이야말로 증기기관/화석연료/탄소라는 중립적인 대상을 더 많은 생산과 이윤을 위해 만인이 경쟁적으로 전유하도록 해온 실체인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유사 이래 인류의 생존을 책임져 온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를 매개하는 바의- 노동은, 자본주의에 이르러 자본의 실체로서 자연과 불화하도록 조직된다. 그로서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간과 자연 간의 신진대사는 균열되며, 근본적인 층위에서 자본은 자연과 모순관계에 놓인다.

 물론 자본은 자신이 자연과 모순관계에 있음을 공공연히 천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생태적 마케팅을 통해 녹색세탁을 주도한다. 예컨대 네이버는 메일 정리를 권장하며 메일함 용량을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것이 전력 사용량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탄소배출량 감소에 기여할 것이라며 팝업창을 띄운다. 한국토지주택공사는 그린 리모델링 우수사례를 선발하여 국토부장관상을 수여하며 녹색건축 패러다임을 의제화한다. 문재인 정부는 그린뉴딜을 통해 파리협약에서 공언한 탄소배출 기준치를 충족시키겠다고 호언한다.[각주:14] 초국적기업들은 ESG(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라는 새로운 경영/투자지표를 통해 지속가능한 투자를 내걸고 생태친화적 혁신에 앞장설 것을 천명한다.[각주:15] 구글, 페이스북,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IT산업의 선두주자들은 파리협약을 탈퇴하겠다는 트럼프를 보이콧한다.[각주:16] 이들은 이미 자본이 생태를 축으로 축적 과정을 재조직하는 환경적 조정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각주:17]

 이처럼 생태위기에 대한 고려와 대처가 역설적으로 그 원인인 자본에 의해 주도될 때, 미술관의 생태적 관심은 어떻게 그러한 주류의 흐름과 분기하고, 그에 파열을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기후정의[각주:18] 담론의 일종인 정의로운 전환은 유효한 참조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이행의 프레임으로서,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위기의 급박함을 인정하며, 사회 전 부문에서 생태적 이행이 대대적인 수준으로 이뤄져야함을 논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모든 인민에게 있어 정의로워야함을 강조함으로써 여느 나이브한 생태주의의 함정을 빗겨난다. 예컨대 전방위적인 불매운동을 통해 화석연료를 연소시키는 엔진을 생산하는 공장과 플라스틱 일회용품 공장을 폐쇄시켰다 해도, 그곳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급작스레 해고당하거나, 그 하청업체들이 원청회사와 동일한 부담을 나눠야 한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전환의 견지에서 문제적이다.[각주:19] 혹은, 남반구의 제3세계가, 이미 어마어마한 규모의 탄소배출을 통해 선진산업을 발전시키고 에너지 전환을 일찍이 대비한 북반구의 국가들과 동일한 의무를 부과 받는 것 또한 정의로운 전환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전 지구적 환경과 비인간 생물들에 대한 초월적인 관심은 사회적 지평 내에서 동료 인민 및 역사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보정됨으로써 보다 유효하게 맥락화 된다. 다시 <지속가능한 미술관>으로 돌아가 보자. 본 전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통해 나타난 예술의 자기비판을 참조하며 미술관의 반 생태적 위상을 대자적으로 인식하는 생산적인 기획이며, 그로써 미술관 역시 그 전환의 주체임은 분명해졌다. 이와 같은 본 전시의 선언으로 말미암아, 아직은 미분의 상태에 남아있는 그 전환의 과정에 대한 질문이 동시에 전개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본 전시가 수행한 예술의 자기비판을 보다 밀어붙이는 일이 될 것이다. 요컨대, 미술관의 생태적 전환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전환의 방식에 관해 숙의할 때- 미술관 관장에서부터 미화원에 이르는 여러 군상 중 어디까지를 원탁의 주체로 인정할 것인가? 미술관의 에너지/자원 절약 및 전환과정에서 삶이 축소되거나 (예컨대 베니어판과 석고를 공급하는 중소업체 혹은 전시장 정비업체에 고용된 노동자처럼)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이들은 없는가? 미술관이 불화해야만 하는 생태적 상상의 노선은 무엇인가? 애초에 전시 공간 정비에서 파생되는 폐기물이 제로에 수렴하는 비영리의 소규모 대안공간들은 대형 사립/국공립 미술관과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주체 내에 자리한 무수한 낙차와 균열들을, 미술은 어떻게 상대하고 드러낼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미술관>정의로운 전환의 미술적 버전을 생각해 볼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생태위기 시대의 예술의 자기의식을 재(re)의식하는 사유와 실천을 요청하고 있다.

 

 

 

  1. 에릭 클라이넨버그. 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홍경탁 역. 파주: 글항아리, 2018. 인쇄도서. 11. [본문으로]
  2.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의 기념비적 맥락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최성만 역. 서울: 지만지, 2013. 인쇄도서. [본문으로]
  3. 외부효과/외부성(Externality)이란 경제주체의 행위가 가격결정과정과 무관하게(외부적으로) 다른 경제주체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일컫는 경제학적 개념이다. 가령,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매연은 기업차원에서 그 자체 비용으로 집계되지는 않지만,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이 경우 그 피해양상을 부정적 외부효과라 한다. [본문으로]
  4. 본 전시의 기획자 최상호는 한 인터뷰를 통해 '평균적인 국공립 미술관 규모에서 한 번의 전시를 하고 남는 폐기물의 양이 대략 5톤 트럭의 4대 분량'이라고 전한다. Bazaar. “어느 미술관의 자아비판.” Harper's Bazaar 202175일 게시. 웹사이트. 2021810일 접속. [본문으로]
  5.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역. 서울: 이후, 2004. 인쇄도서. 135-137을 참고하라. 그러나 어떤 경우엔 이미지 못지않게 서사 역시 방관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주체의 수동화의 문제를 이미지와 서사 간 구별되는 위상학적 존재론의 문제로 이해할 순 없다고 본다. [본문으로]
  6. 김영만. “지구온난화, 인류 존망 위기··· 국제 사회, 즉각 대응 나서야.” 연합뉴스 2021810일 게시. 웹사이트. 2021810일 접속; 박장군, 전성필. ““세계가 불타고 있다극단적 기후위기, 인류재앙 경고.” 국민일보 202189일 게시. 웹사이트. 2021810일 접속; 정종오. “기후위기 대응, 절체절명··· 시나리오별 미래기후 궁금하다.” 아이뉴스24 202189일 게시. 웹사이트. 2021810일 접속. [본문으로]
  7. 녹색광고를 비롯, 기업 이미지의 녹색화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잡지, 신문 자료를 연도별로 검토하며 환경 스펙터클(environmental spectacle)을 비판하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Howlett, Michael and Rebecca Raglon. “Constructing the Environmental Spectacle: Green Advertisements and the Greening of the Corporate Image, 1910-1990.” Environmental History Review Vol. 16, No. 4 (Winter, 1992): 53-68. Print. 본 논문은 20세기 초반부터 생태에 대한 이미지가 자본에 전유당해왔음을 상론한다. [본문으로]
  8. 물론 자원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상상은 자본주의의 상수이다. 예컨대 환경정책의 기조로서 많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PES(Payment for Ecosystem Service; 환경서비스 지불 프로그램)패러다임은 자연을 그 자체로 경제적 가치 원천으로 간주하며, “환경서비스의 제공자에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생태적 보전을 도모한다. [본문으로]
  9. 생태적 주관성의 구체적인 용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이소요. “위기에 처한 생물의 모습.” 문화과학 97(2019): 103-118. 인쇄저널. 108. 한편 여기서 이소요는 홍진훤의 작업을 비판하며 고통받는 생물 이미지의 스펙터클을 경계할 필요에 관해 역설한다. 본 지면에서 내가 언급한 생태 스펙터클에 관한 대목 역시 그녀의 이 글에 빚지고 있다. [본문으로]
  10. 물론 인류세 개념의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그 시작점은 대략 고대의 농경과 벌채,’ ‘17세기의 구대륙과 신대륙의 교류,’ ‘18세기의 산업혁명,’ ‘20세기의 인구급증등으로 경합하고 있음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개관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지성, 남욱현, 임현수. “인류세의 시점과 의미.” 지질학회지 52(2) (2016): 163-171. 인쇄저널. [본문으로]
  11. 그 폭발적인 담론적 유행에도 불구, ‘인류세가 아직은 잠정적이고 가정적인 개념일 뿐이며 지질학 및 층서학계에서 온전한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은 본고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인류세를 종별적인 지질시대로 삼기에는 유의미한 퇴적층 자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나, 필자는 이 개념이 적절히 보정되었을 때에 유효한 가설적 담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본문으로]
  12. IPCC. Climate Change 2014: Synthesis Report. Contribution of Working Groups I, II and III to the Fifth Assessment Report of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Core Writing Team, R.K. Pachauri and L.A. Meyer (eds.)]. IPCC, Geneva, Switzerland, 2014. 2-5. Print. [본문으로]
  13. Crutzen, Paul. J. "Geology of mankind." Nature Vol.415 (2002): 23. Print. [본문으로]
  14. 한국판 그린뉴딜에 대한 비판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강경석, 김선철, 정건화, 채효정.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창작과비평 48(4) (2020): 223-251. 인쇄저널. [본문으로]
  15. ESG란 경제외부 요인으로 여겨져 온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의 지표를 경영 및 투자에 반영하는 기업평가 패러다임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을 비롯한 수많은 초국적기업들을 중심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워렌 버핏(Warren Buffett)CEO로 있는 세계 8위를 구가하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의 경우, ESG 랭킹 자체는 최하위권이지만, 자회사인 Berkshire Hathaway Energy는 미국 최대의 풍력 에너지 업체이며, 그 최대 보유 주식인 AppleESG의 지표의 선두주자이기에 ESG 전문가들조차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ESG가 실질적이고 포괄적인 객관적 지표로 작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Rosenbaum, Eric. “For Buffett, Berkshire, beating BlackRock ESG may be as hard as beating S&P 500.” CNBC August, 9. 2021. Website. 2021812일 접속. [본문으로]
  16. 놀랍게도 이 명단에는 엑손 모빌(Exxon Mobil)과 같은 전통적인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기업 또한 다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엑손 모빌에 한하자면, 이 또한 파리협약이 가스 생산자에게 유리한 조항으로 되어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엑손 모빌은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생산업체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17. 하비의 공간적 조정개념을 확장한 환경적 조정을 상론한 사례로 다음을 참고하라. 최병두. “자본에 의한 자연의 포섭과 그 한계.” 대한지리학회지 54(1) (2019): 113-133. 인쇄저널. [본문으로]
  18. 기후정의의 맥락과 개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민정. "기후정의와 마르크스주의." 환경사회학연구 ECO 24(1) (2020): 51-84. 인쇄저널. [본문으로]
  19. 최소한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에게 이행준비 세금을 걷어 그와 같은 사회적 비용을 충당하는 것 역시 유효한 이행의 구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의로운 전환의 방향을 국내의 구체적 투쟁 사례들과 더불어 모색하려는 다음의 작업을 참고하라. 김현우. 정의로운 전환: 21세기 노동해방과 녹색전환을 위한 적록동맹 프로젝트. 서울: 나름북스, 2014. 인쇄도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