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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노동 없는 지혜는 사기나 속임수로 변한다”고 되뇌는 한 예술가에게 부쳐

by 정강산 2017. 4. 1.

2015, 3, 31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Proun 19D(1920)


예술과 노동의 종합에 관한 젊은 예술가들의 시도를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가져왔던 이율배반적 성격을 근거로 하여 비판적으로 재고하자는 필자의 주장이 호도된 것 같아논의의 결을 파악할 수 있는 부록을 적시하는 기분으로 글을 작성한다본 글을 지난 3월 29일에 집단오찬 페이지에 게시된 글-‘예술가들이여예술을 그 자체로 옹호하라’-의 연장에서 파악해주길 바란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이뤄진 예술과 노동의 구분

 

‘Work’와 ‘Labor’의 용어 구분은 예술과 노동의 어원학적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시도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예술과 노동의 대립적 성질을 주장하기 위한 논리적 과정으로 제시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인류 역사 전체에서 노동의 의미가 다양하게 변화됐고때로는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학도나 언어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나에게는 별 대수로울 것이 없다. ‘노고가 모든 것을 극복하리라는 식의 노동에 대한 긍정은 지배계급 혹은 총체로서의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고안해낸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예술(Work)과 노동(Labor)의 구분은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되고 있었던 19세기 후반에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던 경제학을 비판하고자본주의의 동학을 규명하고자 했던 맑스의 작업-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 따라 도출*1 된 것이다그렇다면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무엇인가그것은 경험적인 사실의 세계를 관측하고 수선하는즉 주어진 세계를 관리하는 데에 중점을 두는 정치경제학을 재사유하여그 닫힌 상태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는 작업을 일컫는 말*2이다.

 


 

주어진 사실을 관리하는가비판하는가?

 

자본의 시초 축적이 이루어진 16세기경부터 부의 출처에 대한 탐구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중상주의와 중농주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그리고 18세기경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맑스 이전에 이미 부의 근원이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따라서 부와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노동을 심미화하거나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사실 애덤스미스와 리카도로 대표되는 고전파 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일축 할 수 있다반면 맑스는 사물에 일정한 양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형이상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며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고전파 경제학의 과학적 발견을 인정하면서도바로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가 구성되고 지탱된다는 점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 지점에서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맑스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을 비판한 인물이며노동의 철학자라기보다는 외려 노동비판의 사상가에 가깝다는 사실을 쉬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다시 말해 맑스는노동가치론은 철저히 착취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법칙 일반을 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가치가 인간노동에 의해 구성된다는 바로 그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격했다.

 

실로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서고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고그 한계를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오늘날 세계의 도처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급적 적대와 부조리들은 바로 그런 노동에 대한 심미화와 물신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말하자면자본가는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자본가는 경쟁에서 도태되어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바로 가치의 담지자인 노동을 착취한다그 착취의 방식은 현실 속에서 노동시간의 연장노동강도의 강화주요 생필품의 가격 인하생산라인 갱신등으로 나타난다마찬가지로 노동자들 또한자신의 노동력 상품의 가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다른 이들과 경쟁하며끊임없이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상태를 유지하길 바란다.

 

이렇듯노동은 자본과 대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내부에 있는 것이고그에 따라 노동자는 노동이 가치를 생산 한다는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으로부터 탈주하기 힘든 위치에 있는 것이다위와 같은 이율배반을 넘어서고 피폐한 삶의 조건을 타파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한 시도는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유지되게 하는 노동의 조건일반을 타파하는 것이 되어야지모든 이들이 노동자가 되는 것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위와 같은 맥락을 고려한다면 (아직까지는노동의 외부에 있는 예술의 존재론은지켜내야만 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자본의 관성의 핵심에 있는 노동에 예술이 자발적으로 손을 내민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자율성과 대자성을 스스로 박탈하겠다는 자승자박적인 제스처로 보인다.

 



맑스의 가치비판론에 따른 노동의 위상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맑스가 가치의 실체에 관해 언급한 단락을 거칠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음의 전개와 같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기 위해서는 각기 질적으로 다른 상품들 사이를 매개하는 공통의 근거와 척도가 있어야만 한다상품들이 갖는 다양한 사용가치(유용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면우리가 참고 할 수 있는 것은 상품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사실이다양적인 시간단위로 환원 가능한 추상적 노동은 결국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추상화된 노동을맑스는 가치라 불렀다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자본제적 법칙이다위와 같이오늘날의 소비주의와 상품물신 등의 온갖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상수로서 노동이 작동해왔음을 감안할 때, ‘노동없는 지혜는 사기나 속임수로 변한다는 격언을 읊조리는 한 예술가의 되뇌임은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나는 위와 같은 되뇌임이본질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관리하는’ 리카도식의 경제적 접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판단하며결국 노동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존재론의 측면에서노동은 예술보다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예술적 실천이 노동의 영역에 포섭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권리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속박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필자가 이 전의 글에서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통해 예술을 긍정한 채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시도를 하라고 주장했던 까닭은 바로 이러한 우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과 예술이 분리 되고노동이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행위로 전락한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하나그 둘을 종합하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예술의 진정한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왜 노동이 아니란 말이냐며 분개하는 권혁빈의 주장과는 달리지금의 노동은 이미 예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패스트푸드 배달부가 라이더로 지칭되고시다가 코디네이터로 수식되며백수가 프리랜서로 일컬어지는 마당*3예술과 노동을 종합하겠다는 포부를 품는 것은 호랑이굴에 다이빙하는 식의 모습을 연출할 뿐이다경제(노동)가 심미화(예술화)된 것은 오래전의 이야기이며공공연한 사실인 까닭이다경제와 노동은 끊임없이 예술을 간취해왔다.

 

*3) 서동진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게, 2009- 참고.

 



노동의 심미화를 지양한다

 

위의 모든 맥락을 고려하고동시에 자본주의라는 것이비단 경제정치적 개념이아니라우리가 사고하고 감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주조해 내는 총체로서의 체제라는 점을 감안 할 때노동자이기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마냥 지지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찮다마치 음험한 기운이 가득서린 먹구름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앞서도 언급했듯 그들이 노동을 조감하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노동이 숭고한 것이라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과는 달리나는 노동은 진절머리 나고역겹고비루한 것이라고 믿는다거듭 강조하지만노동은 숭고하지 않다외려 숭고의 반대말에 가깝다면 모를까당연한 말이지만누구나 한번쯤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그것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통해우리에게 부과된 것이자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지대를 추구하는 불로소득을 긍정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외려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노동이 갖는 위상을 재고하자는 것에 가깝다.

 

자본주의 속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에임노동즉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의 노동력의 판매를 일컫는 말일 테다그리고 이러한 ‘(임금)노동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의 경제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화폐를 얻을 수 있는 정당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이란새삼스럽게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인클로저운동과 산업혁명의 과정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노동이 숭고한 것이라기보다는도리어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인간이 그 자신의 자율성과 비판의식을 잃지 않은 채 그 너머의 삶을 상상해내려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이 숭고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마땅히 지지를 보냄직 하나그들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이 노동이라면그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노동 너머의 사회적 관계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갈망해야할 예술가들이노동이 인간의 생리적 활동에 대한 유일한 등가물이라 여길 때 그들은 자본의 족쇄 속으로 스스로 머리를 디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앞서 언급했듯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본의 요구가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사물에 노동시간만큼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노동자들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본가의 생각이기도 하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기에노동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모습은언젠가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던 혁명적 노동자라기보다는 착취당할 권리를 주장하는 패배적인 노동자에 가깝다고 감히 주장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예술을 옹호하라

 

예술가들은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이전에신자유주의 속에서의 노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또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지 등을 고민해야 하며섣부르지 않아야 한다예술과 노동을 종합하는 일은 예술가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과는 무관하며예술이 신성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취득하려는 것은노동이 우리에게 부과된 강제적인 과업이라는 점에서 곧 가난과 비참불안정한 삶을 역설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이는 주체적인 투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일회적인 방편이다거듭 강조하지만노동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예술이 노동으로 인정된 이후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노동이라는 척도를 통해 보장 되었을 때그리하여 기어코 예술가들이 노동자가 되었을 때그들은 드디어 임금노동을 하게 되며 아마도 능력과 재능에 대한 대가를 연봉과 비슷한 형태로 지급 받게 될 것이다.

 

이때 능력과 재능에 따른 보상이라 하는 것은 일부 예술가들의 처우를 향상시키는 물리적 조건을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이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이자 장치로서의 능력과 재능’ 같은 점에서 랑데부를 한다그렇다면 대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입한 팀제의 수혜를 받는 노동자와자신의 창작활동을 노동의 역학 속에서 사고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연봉으로 받는 예술가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부과된 것이 아닌 노동 너머의 사회적 관계해방적 관계를 탐구해야할 이들이 가장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착취와 굴레의 현현으로서의 노동의 세계에 발을 들이민다는 사실은그 자체로 현실(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대자적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비판의 무기를 박탈당하는 것과도 같다현실에 포섭되는 것과그에 거리를 둔 채 현실을 다루는 것은 구분 되어야 할 문제이며서로 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예술의 조건을 노동의 외부에서 찾을 것인지노동의 내부로부터 찾을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서 예술가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달려있다이것은 예술가들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노동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보고노동보다 더욱 적절한 형태의 방안을 찾아보자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