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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예술가들이여, 추상에서 규정으로 전화하라: 핌피현상으로서의 청년관을 비판하며

by 정강산 2017. 4. 1.

2015, 4, 16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Composition(1920)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나는 본 글이젊은 예술가들의 정치적 결집을 공격하는 주장으로 이용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현행미술제도가 총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가진 사람은 (아마)없을 것이다다만 그런 개혁적 움직임의 과정이 청년관에 대한 요구로 외화한 시점에서그 청년이라는 프레임을 통한 예술가들의 주체화 과정을 재고하자는 제안 정도로 이 글을 파악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청년관이라는 구호의 등장

 

최근스스로를 청년이라 칭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정치적 결집이 곳곳에서 약진하고 있다공장미술제에서 열린 토론을 통해 발생한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둘러싼 관념적 대립에서부터한해를 갈무리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힘겨운 예술적 실천의 비전을 조망하는 '안녕2014, 안녕2015?‘, 임근준의 강연을 중심으로 모인 젊은 작가들이 그 자신들을 위한 공적 전시공간으로서 '청년관'을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논의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1 이 각 사건들의 기저를 관통하는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정체화 시키는 작업을 집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인데이때 그러한 정체화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생존'이라는 기제에 추동되고 있다이는 그 자체로 분명히 괄목할만한 전환이고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사안들이다대체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어떤 구속으로부터도 탈주하려는 기질을 지닌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처한 삶의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말하자면 일군의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주체로서 호명하는모종의 전환이 과도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이러한 과정은 제도 내부의 개혁과 변혁을 가져다줄 맹아이자 지표로서 미술계 내외부의 모든 이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각 좌담회의 구호와 그 내용을 비롯한 전개과정을 돌이켜보건대그들 모두 집단적 차원에서 미술제도 내외부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재확인하고 합의하여모종의 '요구'를 조직하는 것이었기에나는 그러한 결집을 통한 요구의 움직임을 기꺼이 '운동'이라 수식하여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아무튼, '안녕2014, 안녕2015?'에서 이뤄진 논의는 결과적으로 청년관의 맹아를 틔우는 역할을 했고그 후에 전개된 '기대감소시대의 예술행동'은 청년관이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낳았다꽤나 많은 예술가들이 청년관을 요구하자는 임근준의 발의에 공감을 표했고그 요구에 힘을 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각성의 발굴은 전적으로 신세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주장하며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가져다 준 미술의 대형화가 초래한 미술관의 황폐화와 대립되는 청년작가들의 기회-특정적’ 작업의 비루함을 지적하고포화상태에 있는 미대 졸업생들에 비해 그들을 수용할 전시공간은 전무하다는 진단과 함께지금 개입하지 않는다면 청년들의 미술계진출은 요원한 것이라 역설하는 임근준의 강연은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일정부분 호소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고그들을 조직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물론 여느 운동이 그렇듯이 운동에 투신하는 예술가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허나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어찌되었든 그들이 스스로 조직되기를 자처했던 대견한 사실'은 차치하고여러모로 불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그 불편함은 일견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청년관이라는 그들의 상징적인 요구가 어쩌면 실은 얄팍한 세대론적조합주의적 기제로부터 출현한 반동적인 요구가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 ‘제도에 안착한 기성에 요구하는 신세대의 운동으로서의 청년관은 지난 해 12월 28일 교역소에서 열린 좌담회-안녕 2014, 안녕 2015?-에서 사회를 맡은 임근준의 제안으로 맨 처음 착상되었다그 뒤 올해 1월 24, ‘기대감소 시대의 예술행동이라는 제목으로 홍익대에서 열린 임근준의 강연을 통해 청년관은 더디게나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이후 젊은 예술가들이 그것을 다듬고 추려내며 청년관 논의는 운동의 궤적으로 돌입한다.

 


 

세대적 구호가 피할 수 없는 추궁 보편성의 결여

 

아직은 과정에 있기에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그들(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의 항변과는 달리그들이 인용하는 레퍼런스와 구호는 명백히 배타적 포퓰리즘*2으로부터 출현하는 모양을 띤다예컨대 '70, 80년대 이전 세대의 작가들은 이미 제도에 안착한시대의 수혜자이다'라는 주장에서부터, '새로운 작업적 경향은 젊은이들로부터 출현 한다'는 단정에 이르기까지나아가 '제도에 포섭된 기성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뿐인 젊음'이란 식의 대립구도를 상정하는 세대론적 제단 등이 그것이다예컨대 임근준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젊은 작가들을 추동했다.*3

 

한국현대미술계의 기적적 세대교체그리고 그를 외면하는 주류 미술계 – 청년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렇게 소외된 형식으로한국현대미술계의 세대교체는 실현됐다그 주역은 모두 1970년대 후반생(주로 기획자)과 1980년대생(주로 작가)들이다문제는이 사실을 기성미술계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 (비고386세대의 미술인들은 끝없이 청년 행세를 하며 좀처럼 기회를 양보하지 않는 특징을 뵌다.)’

 

세대교체는 이미 이뤄졌다단지 청년 세대의 주역들이 그럴듯한 기회와 장소에서 소외돼있을 따름...’

 

브랜드 자산이 된 법인형 중장년 작가들이초대형 미술관에서 대형 작업으로 세속적 성공을 구가하는 사이방만한 대학 제도를 통해 과잉 공급된 20-30대의 젊은 미술가들은골방과 각종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전전하며 불확실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프로젝트 공간과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나는 40세 미만의 신인청년 작가들의 연쇄 개인전을 위한 프로젝트 전시 공간을 서울관에 요구한다.’

 

각종 심사 과정에서 심사 위원 구성에 30대 이하의 청년 심사위원을 포함시킬 것왜 청년은 언제고 심사 대상이 돼야만 하는가?’

 

청년예술인 여러분현대예술계의 문화적 사막화한번 막아봅시다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화로 위기를 돌파해봅시다서울관이 구세대의 어제의 미술만을 위한 지루한 공간이 되도록 수수방관하지 맙시다.‘

 

일견 정확하고 합당해 보이는 위와 같은 진단과 주장은일군의 청년작가들이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이라는 임시 조직을 꾸려 활동을 해나가게 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모르나체제의 보편성을 간과한 분할적 운동이 지니기 마련인 한계와 맹점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알다시피 미대 혹은 예대를 갓 졸업한 젊은 작가들이 그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재생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작품을 팔아서 삶을 연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하고막상 작업을 해도 학연과 지연을 통해 전시 공간이 주어지는 일이 태반이며그나마 접근 가능한 소규모의 대안 공간들마저 월세 혹은 전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다 이내 고꾸라지는 까닭이다허나 이러한 작업환경의 불안정성과 열악함미술 제도의 부조리접근성 측면에서의 불평등과 빈곤은 결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며세대적으로 분할되지 않는다이유인즉 체제란 역사적 시간성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이전에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는 정치용어로서사용하는 사람마다 의미의 결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여기서의 포퓰리즘이란, ‘대중추수주의’, ‘인기영합주의’, 혹은 좌파 포퓰리즘’, ‘우파 포퓰리즘’ 이라는 식의세간에서 통용되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대 그들이라는 대결구도를 상정하는 태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3) 임근준 블로그http://chungwoo.egloos.com/4065727

 


 

세대’ 너머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광범한 소외

 

파견미술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판화가 이윤엽과 그의 수많은 동료들그와 관련된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소속의 많은 작가들은 십수년간 작업을 지속하고 있지만그들의 작업은 소위 제도의 스펙트럼이 뻗치는 전시 공간(예컨대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아트선제일민미술관 등의)에서 여태 전시된 적이 없다그들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든 그러지 않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데왜냐하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민중미술의 미적 태도는 특수한 경우(예컨대 터전을 불태우라는 제목으로 선보인 작년 광주비엔날레의 기획과 같은)를 제외하곤어디서든 사생아 취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미대를 졸업하고비싼 서울의 물가를 감당하지 못해 지방 구석구석으로 내려가 곳곳에서 작업실을 차린 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로운 작업을 계속 지속하고 있는 숱한 70,80년대 이전 세대의 작가군들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이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포트폴리오는 지역단위사업에 불려나가 시장 혹은 학교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거나조악한 카페에서 몇 점의 그림을 그려 전시하는 것이다덧붙여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했지만 여태 제대로 된 자기 피알의 기회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근근이 입에 풀칠만하다결국 대전과 안산충주 등 근교로 내려가는 비-유학파 작가들(물론 이들 또한 대부분이 80년대 이전 세대이다)은 대관절 어떤 세대에 포함되는 것인가? ‘제도의 물을 톡톡히 먹은’ 유학파작가들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이런저런 잡다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을 마치 이 잡듯 뒤져기한 없는 유목생활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스케줄을 짜고날짜에 맞춰 기획서를 들이밀어 조마조마한 합격 여부를 기다리는 것만이 그들이 당장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다대형작업을 만들어내는 이들 중에서도상품성이 좋고시공간적작업적 전략을 잘 세운 이들만 이른바 작가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대형작업이 곧바로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도 실은 설익은 것이다.*4

 

아무튼이와 같이 청년도 아니지만제도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존재들은문제가 한층 복잡하고 포괄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제도 외부의 작가들은 청년인가기성인가제도가 특정 계층의 인물 군상들을 지속적으로 소외시킨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면우리는 위와 같은 제도 내부의 장르적 위계와지역적 위계를 포함한 보편적인 소외에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그렇게 공통의 지반문제설정을 토대로 하여 미술일반의 대표성을 획득한 운동이 생길 때야말로 비로소 시각성의 각축과 함께 미적형식의 갱신이 발생할 여지가 마련된다예컨대 제도의 진입으로부터 유리된 모든 이들을 (상징적 측면에서라도)아우를 수 있어야 하며운동의 주체로 포괄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5 이처럼, ‘미술제도와 그로부터 소외된 청년이라는 도식이 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충분한 당위가 없는 것이라면그것은 예술 일반과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와나아가 세계 일반이 그 구성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보편적 성질을 간과한 데에서 기인 할 것이다.

 

*4)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최근의 예로는 최정화이불서도호 등등의대형작업을 제외하면도처에서 생산되지만 전시되지 못한 채 작가의 작업실에 처박혀 있는 작업들이 훨씬 많으며대부분의 대형작업은 작가의 작업적 결단에 의한 무리한 빚을 통해 구성되는 경향을 띤다이는 미술계 전반의 필드워크를 다녀본 이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5)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시행된은행과 증권가에 대한 천문학적인 액수의 구제금융에 의해 추동되어 발생한 월가점령시위는 실제로 대부분 대학생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그들의 구호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다그들은 한자리 꿰찬’ 기성세대들과월가의 퇴폐적인 불로소득자들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자본주의 체제 일반을 겨냥한 시위를 조직했다.

 


 

예술일반과 세계전체의 현주소

 

결국 위의 상황들을 감안할 때소외되어 있는 것은 청년 세대의 주역들이 아니라예술 일반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그리고 더 멀리서 조감할 수 있다면소외되어 있는 것은 비단 예술에 그치지 않고자본주의적 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 일반에까지 이른다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 예술가들의 주요 의제인 청년관에 관한 요구가 체제의 보편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지금의 시대를 어설프게 진단하고자 한폴 크루그먼의 기대감소시대라는 개념이 시공간적 지평의 반동적 단절을 일컫는 단어라면그 시대의 결은 누구하나라도 빗겨나가는 법이 없을 것이다그렇다면청년들이 효과적으로 필드에 진출할 수 있다면 미술계 내부의 근본적인 부조리가 사라질 것이라 가정하는 임근준의 생각을체제자체의 문제를 미술계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편협한 심미주의적 시각이라고 여길 순 없을까그리고 미술 일반의 문제를 특정 세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배타적 조합주의의 시각이라고 여길 순 없을까이는 청년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혐의다.*6

 

제도 내부에 정착한 기성과 꼰대를 비판하고기성이 누린 조건과 신세대가 누릴 조건의 차이를 성토하는 것은 매우 쉽다하지만 그것이 결코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젊다는 사실은 초역사적인 테제가 아니라끊임없이 갱신되는 성질의 것이기에, ‘젊음이 그 자체로 도덕적 우월성을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이기 이전에맑스주의자로서 나는모든 저항적 운동에 적용시킬 수 있는 불문율으로서의 이론적 토대를 파악하고 있다그것은 어떤 대상을 지양하고 타도하려는 움직임이든사안의 보편성을 염두에 둔 채 이뤄져야만 한다는 원칙이다이때의 보편성이란 자본주의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체제의 보편성이다예컨대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사물에 일정한 양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을 통해 작동되는 세계에암묵적이고도 교활한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경제에실업과 빈곤이 주기적으로 양산되는 질서에어마어마한 양의 상품들이 폐기되는 한편 수많은 이들이 궁핍과 가난 속에서 스러져가는 공간에 살고 있다자본주의적 체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는 동시에 개별적인 발전양상을 보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구별이 무의미할 정도의 균질한 성질을 내포한다말하자면 이런 속에서 예술가들의 삶의 조건 또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결국 열악하고 처참한 사정은 비단 예술에 그치지 않고노동에서도 동일하게 현상하며(해고와 실업비정규직 등이는 지리적계급적세대적 차원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일 것이다.*7 다시 말해 광범하고 일반적인 사안을 지엽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모든 수식에 우리는 또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아마도 모든 젊은 예술가들이 기꺼이 따를 혁명적 지향과 방법론에 이론적 정식화를 가하고그것들을 실천했던 20세기의 혁명가들의 운동관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이는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운동에서도 여과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덧붙여 앞서도 지적했듯불안정성그것은 세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부과되는 무게이자 멍에에 가깝다그것을 공간의 범주로 축소시켜 논의하더라도 사안의 보편성이 축소되지는 않는다수많은 대안공간들의 숨통을 옥죄어왔던 공간의 불안정성’ 또한 실은, 70년대부터 서서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하에서 급증한 부동산 투기의 연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산업적 인프라 일반이 국가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며완벽히 시장에 포섭된 순간교육-의료-거주 등의 문제를 비롯한 광범한 사회적 수요들이 이윤을 위한 일회적이고 단발적인 투기에 의존하는 상품이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이러한 변화의 궤적을 따라 물리적 공간마저도 불안정하게 일그러지고접근성이 사라져왔던 것이다물론 이 속에서도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좀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을 테지만그것은 기성의 탓이라기보다체제에 적응할 물리적 시간이 단지 기성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일 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8

 

우리지금의 청년세대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언젠간 지금의 기성세대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에 적응할 테고모종의 공간을 얻은 채제도에 진입하게 될 공산이 크다허나 상황은 여전히 힘들 것이다세계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상을 복기해보면결국 예술가로서 작업을 지속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고역일 수밖에 없다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이 존속 되는 한경제적 측면에서 비-주체의 역할을 자처하는 천덕꾸러기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결코 구축되지 않을 것이고지금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잘 되어봤자 두어 번의 국제 비엔날레에 작업을 출품하고대학의 시간강사와 전문입시학원을 전전하며 비루한 예술적 실천을 지속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이는 예술의 문제만도 아니다). , 3저 호황에 맞춰 사회에 진출한 베이비붐세대 혹은 386세대라고 해서오늘날의 피폐한 삶의 조건을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6) 물론 임근준은 이제껏 파벌로 얼룩져 왔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선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역설하기도 하고미술관 내 행정직들의 관료주의타파를 위한 이런저런 제안을 하기도 하고학예연구원들의 유급 안식연구년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여성 작가의 쿼터제를 도입할 것을 힘줘 말하기도 하는 등합당하고 필요한 요구를 개진하기도 한다문제는 그런 미술계 내부의 광범위한 갱생이어째서 청년관이라는 배타적 요구로 소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미술 제도의 고질적인 불합리성과 부조리를 개혁하는 일은미술계의 꼰대기성들을 타도하고 청년관을 요구하는 일과 동일시될 수 없다본질적으로 미술제도 전반의 처참한 상황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7) 알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이 직면한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노동 내부의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일이다예컨대 오늘날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원청과 하청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으로 무수히 파편화된 조건 아래에 처해있으며이에 따라 공동의 전선을 상실했다.

*8) 같은 맥락에서 80년대 이후의 세대는 부동산을 통한 중산층으로의 진입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고 역설 하며거주와 관련된 문제를 세대적 문제로 규정하는 박해천 식의 '큐브세대'적 문제의식 또한 내겐 우습게 들린다과연 조악한 육면체로 구성된 고시원원룸 등을 전전하며 폐쇄된 공간감에 압도 된 채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들이, 80년대 이후의 세대뿐인가도처에서 들려오는 소외된 중장년층의 자살 소식을 굳이 복기하지 않더라도큐브적 공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 이들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이는 88만원 세대의 문제설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세계에 저항하는 부정의 종류 추상에서규정으로

 

그리고 이런 끔찍한 세계 혹은 현재에 저항하는 방식은 사실 꽤나 다양하다그것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의 광기어린 폭력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고페미니스트가 싫어 시리아터키 접경에서 IS에 입단한 김모군의 맹목적인 치기를 통해 나타날 수도 있으며극우적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유럽 네오나치의 린치를 거쳐 나타날 수도 있고민주노총의 사옥 앞에서 철밥통 386에게 청년들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대한민국 청년대학생연합의 꼰대비판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OO사회라는 형식으로 드러나는 유사 사회학적 분석들을 경유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문제는 이 모든 부정과 거부의 방식이 각각 절대적이고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제어할 수 없는 분노밖에 없는)부정을 위한 부정과, (지양과 지향의 대상이 모호한)추상적인 부정은 결코 올바른 운동관과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없다한편세계 일반에 대한 총체적 규정을 통한 혁명의 방식으로지금의 세계에 저항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다그러한 저항부정은 보편적인 체제를 겨냥하여지양의 대상을 명백하게 포괄적으로 상정한다이는 20세기에나 볼 수 있었던지금은 더 이상 찾기 힘든- ‘규정적 부정이다규정적 부정이 부재하는 상황에서지양의 대상은 종종 분할된 세대적인종적성적대상으로 엄하게 설정된다.*9

 

따라서 젊은 예술가들의 정치적 결집 또한 부조리한 세계를 거부하기 위한 나름의 몸짓이라면그들의 정치적 요구청년관은 어떤 모양의 부정에 속하는지이 시점에서 되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나는 그 요구가 아직 추상적 부정에 머물러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체제를 총체적으로 규정함으로써세계와 예술론을 유기적으로 연결 지어 사고 할 수 있는 규정적 부정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양의 대상도 제도의 타성에 젖은 꼰대가 아닌 체제 일반으로 바뀔 것이고체제의 문제를 미술의 문제로 환원시키지도 않을 것이고청년관은 단 한명의 소외도 허용치 않는 미술관등의 이름으로 그 문제설정을 달리 할 것이다그렇다면 청년들이 접근할 전시 공간이 부족하다는 식의 구호가 아니라외려 예술일반이 사회에서 처한 관계를 재사유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거시적이고도 보편적인 운동의 이름을 상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그리하여 개별적인 것으로 상정된 청년이란 외침을전체적인 것으로 전유하려는 몸짓이라도 뚜렷이 드러낼 수는 없을까제도 일반으로부터 소외된 장르적지역적 분할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문제설정을 내포한 동시에전시공간과 같이 형식적이고도 상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예술적 실천의 조건 자체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이름말이다.*10 허나 지금으로써 그 이름을 제시할 역량은 아직 내게 없기에나는 예술 일반이 사회에서 처한 열악함을 비판하고그 조건을 철폐하기 위한 이름을 새로 짓고, ‘배부른 꼰대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386세대의 예술가들까지도 포용하는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자는 다소 느슨한 제안밖엔 할 도리가 없다정녕 청년관에 관한 요구가 혹자의 수식대로 공동의 문제이자 공공성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라면청년이라는 세대적 구호를 아직까지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니예술가들이여부디 추상에서 규정으로 전화하라.

 

*9) 서동진변증법의 낮잠꾸리에북스, 2014.- 참고

*10) 성소수자운동여성운동생태운동통일운동시민사회운동 등이 자본주의 체제 일반을 겨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각 운동이 가지는 다양한 주체와문제의식흐름 등을 무시한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혐의를 지우는 것이 어느새 우리 시대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혹자는 청년관에 대한 논의가 체제의 보편성을 간과했다는 주장에 위와 같은 혐의를 적용하기도 한다허나 그러한 주장은 본질적으로 포스트모던적 반동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즈음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생한사회적 안전망의 해체와 경제적 자유의 갱신은 이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주체를 초-개인화탈정치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그것은 한편으로 담론을 주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계기가 되었고그리하여 체제 일반을 겨냥한 저항의 흐름은 탈정치화 된 채 무수한 집단으로 세분화된 정체성의 정치가 강화되어 왔다알다시피 이러한 기류는 보편적인 이성적 법칙을 확립하려 했던 모더니즘적 조감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차이개별성상대성반이성 등을 강조하는)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과 일치한다이런 상황 하에서 오늘날까지도 사분오열된 양상을 띠며 뚜렷한 성과들을 내지 못하는무수히 다양하고 세분화된 저항운동은결국 우리가 세계 일반을 총체적으로 규정할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이다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심 없는 현재의 저항운동이단일한 하나의 심급을 다시금 상정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그리고 그것은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 보편적 질서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마주하고 상대하는 일이다예컨대 오늘날 모든 운동의 지상과제는 그 모든 억압과 위계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조건을 타격하기 위해총체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거시적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견을, ‘꼰대스럽다며 규탄하는 일은 여러모로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