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31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Proun 19D(1920)
예술과 노동의 종합에 관한 젊은 예술가들의 시도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가져왔던 이율배반적 성격을 근거로 하여 비판적으로 재고하자는 필자의 주장이 호도된 것 같아, 논의의 결을 파악할 수 있는 부록을 적시하는 기분으로 글을 작성한다. 본 글을 지난 3월 29일에 집단오찬 페이지에 게시된 글-‘예술가들이여, 예술을 그 자체로 옹호하라’-의 연장에서 파악해주길 바란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이뤄진 예술과 노동의 구분
‘Work’와 ‘Labor’의 용어 구분은 예술과 노동의 어원학적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시도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예술과 노동의 대립적 성질을 주장하기 위한 논리적 과정으로 제시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인류 역사 전체에서 ‘노동’의 의미가 다양하게 변화됐고, 때로는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학도나 언어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별 대수로울 것이 없다. ‘노고가 모든 것을 극복하리라’는 식의 노동에 대한 긍정은 지배계급 혹은 총체로서의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고안해낸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예술(Work)과 노동(Labor)의 구분은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되고 있었던 19세기 후반에,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던 경제학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동학을 규명하고자 했던 맑스의 작업-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 따라 도출*1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적인 사실의 세계를 관측하고 수선하는, 즉 주어진 세계를 관리하는 데에 중점을 두는 ‘정치경제학’을 재사유하여, 그 ‘닫힌 상태’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는 작업을 일컫는 말*2이다.
주어진 사실을 관리하는가, 비판하는가?
자본의 시초 축적이 이루어진 16세기경부터 부의 출처에 대한 탐구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 그리고 18세기경,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맑스 이전에 이미 부의 근원이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따라서 부와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노동’을 심미화하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사실 애덤스미스와 리카도로 대표되는 고전파 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일축 할 수 있다. 반면 맑스는 사물에 일정한 양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형이상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며,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고전파 경제학의 과학적 발견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가 구성되고 지탱된다는 점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을 비판한 인물이며, 노동의 철학자라기보다는 외려 노동비판의 사상가에 가깝다는 사실을 쉬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맑스는- 노동가치론은 철저히 ‘착취’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법칙 일반을 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가치가 인간노동에 의해 구성된다는 바로 그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격했다.
실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서고,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오늘날 세계의 도처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급적 적대와 부조리들은 바로 그런 노동에 대한 심미화와 물신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본가는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자본가는 경쟁에서 도태되어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 바로 ‘가치의 담지자인 노동’을 착취한다. 그 착취의 방식은 현실 속에서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 주요 생필품의 가격 인하, 생산라인 갱신’등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또한, 자신의 노동력 상품의 가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다른 이들과 경쟁하며, 끊임없이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상태를 유지하길 바란다.
이렇듯, 노동은 자본과 대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내부에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노동자는 ‘노동이 가치를 생산 한다’는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으로부터 탈주하기 힘든 위치에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율배반을 넘어서고 피폐한 삶의 조건을 타파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한 시도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유지되게 하는 노동의 조건일반을 타파하는 것이 되어야지, 모든 이들이 노동자가 되는 것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맥락을 고려한다면 (아직까지는) 노동의 외부에 있는 예술의 존재론은, 지켜내야만 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의 관성의 핵심에 있는 ‘노동’에 예술이 자발적으로 손을 내민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자율성과 대자성을 스스로 박탈하겠다는 자승자박적인 제스처로 보인다.
맑스의 가치비판론에 따른 노동의 위상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맑스가 가치의 실체에 관해 언급한 단락을 거칠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음의 전개와 같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기 위해서는 각기 질적으로 다른 상품들 사이를 매개하는 공통의 근거와 척도가 있어야만 한다. 상품들이 갖는 다양한 사용가치(유용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가 참고 할 수 있는 것은 ‘상품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양적인 시간단위로 환원 가능한 ‘추상적 노동’은 결국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추상화된 노동을, 맑스는 ‘가치’라 불렀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자본제적 법칙이다. 위와 같이, 오늘날의 소비주의와 상품물신 등의 온갖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상수로서 노동이 작동해왔음을 감안할 때, ‘노동없는 지혜는 사기나 속임수로 변한다’는 격언을 읊조리는 한 예술가의 되뇌임은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위와 같은 되뇌임이, 본질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관리하는’ 리카도식의 경제적 접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판단하며, 결국 노동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론의 측면에서, 노동은 예술보다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예술적 실천이 노동의 영역에 포섭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속박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 필자가 이 전의 글에서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통해 예술을 긍정한 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시도를 하라’고 주장했던 까닭은 바로 이러한 우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과 예술이 분리 되고, 노동이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행위로 전락한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하나, 그 둘을 종합하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예술의 진정한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왜 노동이 아니란 말이냐’며 분개하는 권혁빈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의 노동은 이미 예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패스트푸드 배달부가 ‘라이더’로 지칭되고, 시다가 ‘코디네이터’로 수식되며, 백수가 ‘프리랜서’로 일컬어지는 마당*3에, 예술과 노동을 종합하겠다는 포부를 품는 것은 호랑이굴에 다이빙하는 식의 모습을 연출할 뿐이다. 경제(노동)가 심미화(예술화)된 것은 오래전의 이야기이며, 공공연한 사실인 까닭이다. 경제와 노동은 끊임없이 예술을 간취해왔다.
*3)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게, 2009- 참고.
노동의 심미화를 지양한다
위의 모든 맥락을 고려하고,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것이, 비단 경제; 정치적 개념이아니라, 우리가 사고하고 감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주조해 내는 총체로서의 체제라는 점을 감안 할 때, 노동자이기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마냥 지지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찮다. 마치 음험한 기운이 가득서린 먹구름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듯 그들이 노동을 조감하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노동이 숭고한 것이라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과는 달리, 나는 ‘노동은 진절머리 나고, 역겹고, 비루한 것’이라고 믿는다. 거듭 강조하지만, 노동은 숭고하지 않다. 외려 숭고의 반대말에 가깝다면 모를까.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나 한번쯤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통해-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자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대를 추구하는 불로소득을 긍정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노동이 갖는 위상을 재고하자는 것에 가깝다.
자본주의 속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에, 임노동- 즉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의 노동력의 판매를 일컫는 말일 테다. 그리고 이러한 ‘(임금)노동’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의 경제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화폐를 얻을 수 있는 정당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이란, 새삼스럽게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인클로저운동과 산업혁명의 과정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노동이 숭고한 것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그 자신의 자율성과 비판의식을 잃지 않은 채 그 너머의 삶을 상상해내려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이 숭고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마땅히 지지를 보냄직 하나, 그들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이 ‘노동’이라면, 그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 너머의 사회적 관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갈망해야할 예술가들이, 노동이 인간의 생리적 활동에 대한 유일한 등가물이라 여길 때 그들은 자본의 족쇄 속으로 스스로 머리를 디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앞서 언급했듯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본의 요구가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물에 노동시간만큼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노동자들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본가의 생각이기도 하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기에, 노동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모습은, 언젠가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던 혁명적 노동자라기보다는 착취당할 권리를 주장하는 패배적인 노동자에 가깝다고 감히 주장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술을 옹호하라
예술가들은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이전에, 신자유주의 속에서의 노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지 등을 고민해야 하며, 섣부르지 않아야 한다. 예술과 노동을 종합하는 일은 예술가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과는 무관하며, 예술이 신성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취득하려는 것은, 노동이 우리에게 부과된 강제적인 과업이라는 점에서 곧 가난과 비참, 불안정한 삶을 역설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는 주체적인 투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일회적인 방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노동-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예술이 노동으로 인정된 이후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노동이라는 척도를 통해 보장 되었을 때, 그리하여 기어코 예술가들이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드디어 임금노동을 하게 되며 아마도 능력과 재능에 대한 대가를 연봉과 비슷한 형태로 지급 받게 될 것이다.
이때 능력과 재능에 따른 보상이라 하는 것은 일부 예술가들의 처우를 향상시키는 물리적 조건을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이자 장치로서의 ‘능력과 재능’ 같은 점에서 랑데부를 한다. 그렇다면 대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입한 팀제의 수혜를 받는 노동자와, 자신의 창작활동을 노동의 역학 속에서 사고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연봉으로 받는 예술가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부과된 것이 아닌 노동 너머의 사회적 관계, 해방적 관계를 탐구해야할 이들이 가장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착취와 굴레의 현현으로서의 ‘노동’의 세계에 발을 들이민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현실(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대자적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비판의 무기를 박탈당하는 것과도 같다. 현실에 포섭되는 것과, 그에 거리를 둔 채 현실을 다루는 것은 구분 되어야 할 문제이며, 서로 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예술의 조건을 노동의 외부에서 찾을 것인지, 노동의 내부로부터 찾을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서 예술가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보고, 노동보다 더욱 적절한 형태의 방안을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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