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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다나카 다쿠지, <빈곤과 공화국>, 박해남 역, 문학동네, 2014. 167-226p. 발제문

by 정강산 2017. 6. 11.

Diego Rivera. In the Arsenal. 1928


4: 연대주의

1: 도입

4장 전체의 테마는 연대주의이다. 우선 저자는 1890년대 중반 급진-급진사회당의 지도자였던 레옹 부르주아* 등이 주장했던 정치이념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사회경제학/사회적공화주의/사회주의와 대항하며 186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유지된 일정한 사상조류로서의 연대주의(사상)solidarisme”를 검토하겠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뒤르켐이 자세히 검토되는데, 이는 다나카 다쿠지가 2000년대 초 피에르 로장발롱의 수업을 들으며 본서의 초고를 작성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로장발롱은 초기 자본주의의 산업재해를 해결하기 위한, 리스크 관리의 기술로서의 연대주의(, 사회)의 역사를 추적하며 사회의 유물론을 그려낸 프랑수와 에발드를 참조하여 <새로운 사회문제La nouvelle question sociale>(1998)에서, 사회보장의 원리로서의 사회적인 것과 복지시스템이, 기술 발달에 따른 책임의 특정가능성의 증대, 노동의 의지가 없는 이들의 출현, 연대 단위 해체 따위의 이유로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조건을 발견할 필요성과 능동적 복지국가로의 전화를 강조했다).

 

그는 연대 개념에 대한 선행연구를 요약한다: 주로 부채와 관련된 법적 공동책임을 일컫는 말이었던 연대1840년대 피에르 르루에 의해 정치사상의 용례로서 사용된 이후 바스티아(상호이익론), 오귀스트 콩트(유기체론), 루이 블랑(국가주의), 프루동(상호주의)등 다양한 논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합리화하는 분과 학문들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제 2제정기에는 낭만주의적 함의가 짙은 우애대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제3공화정기엔 일련의 논자들에 의해 철학적 세련화를 거치며 레옹 부르주아의 <연대>(1896)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의 뒤르켐에 의해 사회학의 핵심 범주로 기능한다. 이렇듯 19세기 연대 개념은 여느 개념들이 그러하듯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연대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기존의 연구들(헤이워드, 뒤부아, 루미야)은 제3공화정기의 연대주의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집합주의를 절충한 애매한 사상이자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며 이를 비체계적인 문화의 표현에 가깝다고 보는 한편 근래 영미권 연구에서 이 시기의 연대 사상은 대산업 자본가와 중소 자본가 간 타협의 산물로 표현되며,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e로 불리기도 한다. 허나 최근 프랑스에는 위와 같은 해석들과 달리 연대주의를 보험으로서의 사회라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한 것으로 상정하는 흐름이 생겨났다(자크 동즐로, 프랑수와 에발드 등).

 

다쿠지에 따르면 자신의 연구는 연대주의가 가진 고유의 논리와 체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최근 프랑스의 연구 흐름에 보다 기울어 있지만, 1. 철학적 연대론과 이데올로기화된(물질화 된) 연대론을 구별하고, 2. 3공화정 시기 연대주의에 대한 합의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위의 연구들과 구별된다(허나 이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자크 동즐로가 <사회보장의 발명>(1985)에서 사회의 발명을 유물론적으로 탐구할 때부터 봉합된, 닫힌, 질서정연한, 법칙적인 사회라는 관념은 반박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3공화정 초기 (온건)공화파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공화 체제의 확립으로서, 이를 통해 이들은 의회 내 왕당파에 대응하고 자코뱅주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대응하고자 했다. 이들은 도시 중산계급을 그 공화정을 지지할 주체로 보았으며, 그 시민윤리를 확립하기 위해 초등교육의 세속화와 의무화를 추진했다. 이후 공화정의 기반이 잡힌 1880년 무렵부터는 급진공화파가 이를 이어받아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전문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이들은 법률가, 학자, 관료, 의사 등 직업적 전문화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룬 새로운 엘리트들이었다). 이는 크리스토프 샤를에 따르면 제3공화정기 대학제도 개혁에 따라 시험과 전문교육을 통해 새로운 엘리트가 등장한 것이었으며, 이때 정치적 참여를 수행한 이들은 근대적 지식인intellectual’의 원사가 된다. 그리고 이 시기 급진주의 이데올로기를 학문 장에서 체현한 것이 19세기 말 대학과 학계를 풍미한 뒤르켐과 그 학파였다: , “정계에서 새로운 엘리트 층을 구성한 급진 공화파가 가진 연대 사상은 학계의 지식인들(..) 새로운 학문체계로의 재편 과정을 통해 헤게모니를 획득한 사회학으로 표현되었”(176)던 것이다.

 

2: 연대의 철학

2제정 말기부터 제3공화정 초기는 생물학주의의 전성기(<종의 기원>(1855), <자연발생설의 검토>(1861), <실험의학 서설>(1865) 등에 이어 인종학에서부터, 이에 영향을 받은 철학의 전회들: <형이상학과 과학>(1858), <모랄의 과학>(1869), <자연법칙의 우연성에 대하여>(1875), <실증과학과 형이상학>(1879) )였으며 이 시기 공화파 철학자들은 1848년 세대의 낭만주의에 거리를 두고, 인식론적, 인간론적 원리탐구에서 출발하여 공화국을 지탱할 모랄을 철학적으로 도출하려 했다. 저자는 우선 이러한 과학적, 실증주의적 전회에 지대한 영향을 준 콩트와 르누비에를 검토한다.

 

콩트

콩트는 실증적 정신은 신학적 정신(현상 뒤에 본질이 있고 이를 신으로 제시하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지배적인 정신)과 다르고, 형이상학적 정신(신 대신 자연 등의 존재론적 본질을 상정하여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려는, 근대적 정신)과도 다르다고 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실증적 정신은 관찰 가능한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상호관계와 법칙만을 탐구하는 정신이다. 이는 일종의 과학적 관점주의라 할 법한 특징을 지니는 인식론이다. 콩트는 사회현상을 물리학의 대상인 무기물과 구별되는, 유기체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으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증적 발견은(..) 가장 일반적 사실로부터 시작하며, 그 일반적 사실이 다음의 일정한 구체적 세부 연구를 해명하는 데 불가결한 시야를 마련해준다.” 이때 일반적 사실인류의 발전을 가리키며, 이는 우리가 객관세계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우리의 인식은 항상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한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함의하는 것이다. , 복잡한 현상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꿰뚫는 법칙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인류의 진보라는 관점으로 묶어내야만 하는 것이다(한편 이는 귀납적인 연구 방식과 주어진 관찰 가능한 것으로 출발해 일반 법칙을 도출하는 실증주의와 겹치면서도 구별된다. 콩트의 인식론은 사실 실증주의라기보다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과학적, 인간적 관점주의로 파악하는 것이 오해를 덜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르누비에

한편 르누비에는 이런 콩트의 이론을 전유하여 추상 수준에서 공화주의에 적합한 사회상을 구축했다. 185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출판된 <비판철학 총론>의 제 1권에서 그는 표상표상되는 것’, 즉 인식과 대상,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인식론을 부정하고, 이를 현상의 두 측면으로 간주한다. 그는 여기서 표상 외부의 물자체와 실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현상만을 강조했다(한편 이는 유아론(객관,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자아라는 식의 관념)의 철학적 버전 혹은 후설의 현상학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그는 인간이 서로 관련된 현상들을 인식하려면 그러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카테고리, 즉 형식(칸트가 말한 감성의 형식과 다르지 않은)이 필요함을 말한다(관계, , 공간, 시간, , 생성, 인과성, 목적, 인격). 그 중 인격이라는 범주를 그는 강조하는데, 이 카테고리는 다른 모든 범주들을 인간의 관점에서 포괄하며, 이것이 없이 인식은 구체적 내용을 지닐 수 없게 되며 추상화, 일반화된다. 즉 인격이란 자아와 비자아를 구별하는 의식을 가리키며, 인간들의 관계를 규정하고, 인간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범주이다. 그는 인식론을 현상 간 법칙에 대한 탐구로 한정하고, 현상들을 통합하기 위한 핵심 카테고리로서 인격과 인간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콩트와 유사하다. 이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상대하는 인식론으로서 사회과학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실증주의적 인식론(인간 주체가 종합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는 인식으로서의 실증주의)1860년대 이후 자유, 도덕과 관련된 개념을 사유하는데 문제가 되는데, 이는 실증주의가 사실판단에 근거하며 가치판단을 차단하는데서 오는 혼란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절충주의 학파의 루이 리아르는 실증주의를 수용하여, 현상을 넘어선 절대적인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반면 도덕과 자유는 무차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동시에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여기서 저자는 부트루를 잠시 소개하는데 이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론, 혹은 우발성의 유물론과 유사하여 눈길을 끈다. 후에 양자의 논리구조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푸예

푸예는 이에 개입하여, <현대의 사회과학>(1880)에서 과거 1세기 동안의 사회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고 두 가지의 사회관이 있음을 지적한다. 유기체적 사회관과 계약론적 사회관이 그것인데, 전자는 기능적 분업에 따라 연대를 통해 사회가 성립된다는 주장이다(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아르케 정치, 혹은 들뢰즈가 공격하는 유기체주의의 전형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유기체란 소여의 분할과 위계, 질서의 메타포이다. 반면 푸예에게 유기체는 보다 기능론적 의미로서 긍정적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공통의 목적인 전체의 보존을 위해 각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협력할 때에만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일부가 되므로, 개체의 고립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이때의 부분과 전체의 순환을 생명의 순환이라 칭했으며, 인간사회를 이러한 사실적 상호의존을 통해, 동의에 기반한 자발적 유대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의 유대는 우애이다. 이어 푸예는 더 나아가 이러한 우애가 개체를 수단으로 강등시키고 억압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의와 법에 기초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통해 이러한 유기체를 보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즉 계약론과 유기체론은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으며, 개인은 하나의 유기체인 사회에 속할 때 비로소 만인이 나눠 갖고 있는 권리를 내재화 한다. 허나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계약은 이 유기체를 지지하고, 구속하기도 해야 한다. 그는 이 개인- 사회관계의 순환을 넘어서기 위해 힘으로서의 관념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관념이 곧 물질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주장과 조응한다. 즉 관념이 곧 물질성을 지닌다는 것이 국가에 적용될 경우, 이는 곧 당위로서의 법이 현실에 정초한다는 것, 즉 존재하는 당위로서 법을 사고할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존재와 당위, 개인과 사회(), 주체와 객체를 종합해 존재론과 인식론을 동시에 사고한다는 뜻이며, 이는 개인이 우선하냐, 사회가 우선하냐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헤겔식 변증법의 쟁점이기도 하다(한편 여기선 인간 행위와 인식을 규정하는 근거로서 객체이자 주체인 국가의 출현과 부르주아 사회가 상대하는 객체이자 주체인 상품의 출현의 동시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힘으로서의 관념개념은 사회권droit social으로 표현되고, 개인의 자율이라는 이상을 물질적 제도들의 다발로서의 사회와 동시에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들의 계약, 권리는 곧 사회의 연대와 일치하게 된다: “우리는 푸예와 르누비에의 사상에 유기체적 사고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고방식은 차이를 가진 요소들이 집합을 이룬 상황에서 차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관계를 관찰하고 총체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경험적 성격과 초월적 성격을 매개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성을 다룸으로써 이들은 개개인의 사실적 평등보다 더 원초적 차원에서 개개인의 동등성을 권리로서 개념화했고, 이러한 동등성을 위협하는 사실적 상태를 교정하기 위해 재분배정책과 보험제도를 정당화했다.”(191-192p) 이러한 맥락에서 르누비에는 부조의 권리와 노동의 권리의 실현, 누진과세, 일반적 보험제도 도입을 주장했으며, 푸예 또한 공통의 국법을 따르는 개인들이 행위를 통해 참여함으로써 갱신하는 계약으로서의 준계약을 강조했던 것이다(푸예의 준계약 개념은 알튀세르 이후의 이데올로기 개념, 더 정확히는 발리바르의 시민 인륜civilite의 정치 개념과 어떤 측면에서 유사하다).

 

3: 연대 이데올로기의 성립

1880년대 무렵 공화정의 법적 기초는 확립되어, 이후 연대주의를 상황에 맞게 제도화하는 일이 공화파의 주된 관심이 되었다. 학계에선 심리학과 사회학이 부상하고 있었고, 정계에선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등장에 따라 보수파와 온건공화파의 제휴, 일부 사회주의 세력과 급진공화파의 제휴 사이에 사회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형성되었다. 누진과세, 사회교육, 사회보험의 도입 등을 주장한 급진 공화파는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의회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19세기 말 정권 장악 이후 일련의 사회입법을 추진한다. 이하에선 이 시기 급진당의 지도자였던 레옹 부르주아와 사회학의 창시자였던 뒤르켐의 사상을 요약한다.

 

부르주아

부르주아는 생체 각 기관의 상호의존을 통해 생물학적 연대를 체화하고 있는 유기체를 근거로, 이를 사회에 유비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즉 그에게 사람들은 각자 자율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사회화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사회 전체의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다.” 여기서는 진보가 각 부분들, 즉 개인들의 지적, 신체적 성장을 통해서만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허나 그는 자연은 부정의한 것은 아니지만 정의의 외부에 있다고 말하며, 자연적 연대와 사회적 연대를 구별했다. 그는 푸예의 준계약 개념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고, 사회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사회에 대한 부채자다.” 요컨대 그는 개인에 대한 사회의 선차성을 강조하며 사회의 유지와 발전의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했던 것이다. 준계약은 이와 같은 권리와 의무에 대한 소급적 동의를 의미하며, 가상상태에서의 상호동등성, 즉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생겨날 상호의무를 소급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는 이에 따라 1. 사회는 개인에 선행하며, 2. 평등은 조건의 평등이며, 예측불가한 사고에 대해선 상호부조해야 하고, 3. 중간집단, 공제조합(코포라시옹, 아소시아시옹)의 자율적인 상호 부조를 유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도출한다. 즉 그의 연대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유사 계약관계에 기초한 상호의무를 의미한다.

 

뒤르켐

뒤르켐 사상의 요소들의 특징은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거리를 두며, 사회문제를 모랄의 문제로 파악하고, 통계학적이고 실증적 지식의 축적을 중시하고, 관찰에 근거하며, 국가가 아닌 중간집단의 역할을 강조하고, 국가와 법을 사회의 표상과 도구로 파악하는 것 등인데, 이는 사회적인 것에 관한 19세기의 논의들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뒤르켐은 그 자신의 초기 저작 <사회분업론>(1893)에서 분업의 궁극적 목표를 논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는 분업이 해명되어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사회의 본질과 목적을 다루지 않고, 사실들을 관찰하여 일반법칙을 확정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콩트, 르누비에, 푸예와 연속성을 지닌다. 여기서 그는 개인이 어떻게 더 자율적으로 되면서 사회에 더 의존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해명한다(이러한 모티브의 원조는 스팬서가 지적한- 근대 사회의 분리와 통합의 동시적인 증대 경향이며, 뒤르켐 또한 스팬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계적 연대와 구분되는 유기적 연대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전자는 공통의 습속과 종교에 기반한, 분업의 미발달 상태에 있는 전통사회에 조응하며, 후자는 분업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들이 외려 긴밀한 의존관계에 놓이는 근대 산업사회에 조응한다. 허나 이는 내적 도덕에 의해, 즉 근대 사회에 고유한 집합의식conscience collective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뒤르켐이 말하는 집합의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개념과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 즉 이는 개개인이 지닌 관념인 동시에 독자적으로 개별자를 관리, 규율, 통치, 규정하는 대상화된 외적 존재인 것이다. <자살론>(1897)<개인주의와 지식인>(1898)에 따르면 근대 사회의 집합의식은 인격personne에 대한 숭배, 도덕적 개인주의individualisme moral, 인간성humanite에 대한 종교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자인 동시에 신이 되는 하나의 종교다.” 즉 이전의 전통적 집단과 계층이 해체되고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개별 역할을 담당하게 될 때, 이들의 공통 속성은 추상적 인간성이다(그리고 이는 상품에서 질적 측면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무차별한, 추상화된 인간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분석과 조응한다. Jean Joseph Goux장 조셉 구의 <상징적 경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후symbolic economie: after Marx and Freud>에 따르면 이러한 측면에서 법 물신주의는 상품물신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미 확정된 기능에 적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당신 스스로를 준비하라, 뒤르켐이 설명하는 도덕의식의 정언명령을 떠올리면 이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재화가 그것이 분업, 노동력의 상품화를 통해 추상화 되는 한에서만 시장과 결합하고 상품으로서 승인 되는 것은, 부여된 역할을 충족함으로써 개인이 사회와 결합하고 시민으로서 승인될 수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미 예고하고 있다). 즉 여기서 인간성(혹은 인권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대한 집중과 강조가 생겨나며, 이러한 추상적 인간성에 대한 헌신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개입하는 사회가 소구됨으로써 유기적 연대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사회 분업론>에서 사회집단의 상호관계가 잘 조정되지 않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아노미anomie’라 칭하는데, 이는 모랄의 부재, (사회의)비정상 상태로부터 야기된 항상적인 분쟁상태를 일컫는다(이후 <자살론>에서는 이를 산업사회의 상수로서 설정한다). 그에게 사회문제란 이러한 모랄 문제의 집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재분배뿐만 아니라, 개인의 모랄에까지 침투하여 정상화 시킬 수 있는 조직이 요청된다. 이에 따라 그는 동일한 직능집단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동업조합(가족, 종교조직, 지역조직과 구별되는)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빈민의 구제, 공제보험, 교육과 문화활동에 이르는 다양한 역할을 이 동업조합에 기대했으며, 그의 이론 내에서 이 동업 조합은 곧 정치조직으로서도 기능하게 된다. 반면 그는 국가를 동업조합의 자치를 장려하고 개인을 교육하는 역할에 한정하며, 그 자신의 민주주의론을 국가와 중간집단간의 소통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연대주의의 특징을 요약한다: 1. 연대주의는 자연적인 상호의존관계와 사회적 연대를 구별하며, 이는 추상적 인간성에 대한 헌신을 통해 뒷받침된다. 2. 연대는 국가의 직접적 개입이 아니라 개별 인간들 사이에 생겨난 상호의존관계에 기반 한다. 3.연대의 논리는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자율을 긴밀히 결부시킨다.

 

4: 연대의 제도화

19세기 말 주도권을 쥔 급진공화파는 연대주의에 기초하여 누진과세, 주택/위생정책, 질병, 산업재해, 장애, 노령에 대한 사회보험의 도입과 의무화를 추진했다. 이 절에서는 프랑스 복지국가를 둘러싼 기존의 해석들이 우선 검토되고, 19세기말 당시 경합한 각종 조류가 일별된 뒤, 사회적인 것에 관한 실천과 제도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성되었는지가 비교된다.

 

기존 연구를 이념적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사회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작용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적 해석은 대개 급진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배제하고 엘리트들 간의 제휴와 역할에 강조점을 두며(필립 노드, 폴 더턴, 앙리 아츠펠), 자유주의적 해석은 노동계급의 압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이를 통해 사적 영역, 즉 공제조합 등의 주도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음을 강조한다(샌퍼드 엘윗, 재닛 혼). 반면 급진주의적 해석은 급진공화파의 역할을 강조한다(주디스 스톤). 이들은 각각 1. 보수주의자의 온정주의에 기초한 노동자 보호의 시도, 2. 산업자본가 층의 자유주의와 결합한 제한적 리스크 관리의 테크놀로지, 3. 국가 개입을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급진공화파와 수정사회주의의 정치 연합에 방점을 찍고 있다. 반면 저자는 자신의 연구가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그 형성이 결정적이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각각의 작용인들을 병렬한다.

 

연대주의가 정치영역에선 급진공화파를 통해, 학계에선 뒤르켐과 그 학파에 의해 관철된 반면, 다른 접근들은 각자 상이한 장에서 조직되었다:

 

1. 정치경제학은 7월왕정기부터 지속된 도덕정치과학 아카데미정치경제학 협회<경제학자 저널>등에서 제기된다.

2. 사회경제학은 르플레학파의 잡지 <사회개혁>과 이 학파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새로운 사회경제학자들이 설립한 사회박물관에서 제기된다(인민에 대한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중간집단의 결사로서 7월왕정기에 형성된 저축금고와 공제조합은 2제정, 3공화정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확대되는데 이 흐름의 결실이 19세기 말 공제조합/협동조합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사회박물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3. 노동조합운동은 전국 노동조합. 협동조합연맹’(1886), ‘노동거래소전국연맹’(1892) 등에서 주로 제기된다.

 

즉 제3공화정 중기에는 급진당과 대학을 중심으로한 공화파 지식인, 사적 영역의 주도로 설립된 공제조합과 사회박물관에 모인 사회경제학자들, 노동조합과 노동거래서를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자들 간에 상이한 실천의 모델이 고안되었다. 19세기말 사회보험의 도입은 이러한 배경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1880년 마르탱 나도가 제안하고 1898년 법제화된 (공장)노동재해보상법은 직업적 리스크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삼는다(허나 이 법안은 사회경제학계서 제기된 비판을 상당부분 반영하여 특정 산업노동에 그 적용을 제한하고, 보상액도 낮게 책정했으며, 사용자의 보험 가입도 임의적인 것으로 설정했다). 이는 1904년 당시 프랑스 민법에 적시된 개인 과실 책임 원칙을 수정시킴으로써 사회권 입법의 첫 문을 열었다. 다양한 논자들의 보충을 거쳐 사회문제로서의 공장의 사고 문제는 생존권 보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외려 산업 사회에 고유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리스크에 대한 대처와 관련된, 억압할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할 문제로 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재해법안에 대해 정치경제학자와 사회경제학자 일부는 개인의 책임감 상실과 국가 권한의 강화를 근거로 이를 격렬히 비판하기도 했다(르루아볼리외, 알베르 기고 등). 한편 흥미롭게도 정작 노동운동 세력은 이 법안에 무심했는데, 아마도 이는 당시의 노동운동이 아나키즘적 성향과 조합주의적 성향이 짙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1901년 폴 기에스에 의해 제안된 퇴직연금법은 노령이라는 현상을 리스크 안에 포괄한 것으로서, (당시로선 급진주의와 결합한)연대주의와 (보수주의적 경향이 짙은)사회경제학 내부에 극심한 대립을 야기하나, 결국 1910년에 법제화된다. 이 법안의 목적은 규칙적이고 확실하며 보편적인 리스크’(레옹 부르주아)이자, 개인의 자율을 위협하는 모든 리스크 중 하나인 노령인구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르루아볼리외와 셰송 등의 정치경제학자, 사회경제학자들은 마찬가지로 개인적, 가족적 책임의 방기, 국가권력의 지배력 강화를 근거로 이를 비판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재해보상법과 마찬가지로 예산의 대폭 삭감 이후 가결되었던 것이다. 허나 이는 공제조합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부담을 기피하는 생디칼리스트들, 노동총동맹 등의 격한 반대에 부딪혔고, 철저히 의무화되지 못함에 따라 유명무실한 법이 되었다.

 

이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다나카 다쿠지는 외려 사회문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대응은 항상적인 갈등상태에 놓여있었음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1. 정치경제학, 르플레를 계승한 보수적 사회경제학은 종교와 파트로나주, 가족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2. 르플레학파를 쇄신한 새로운 사회경제학은 이러한 리스크 개념을 특정 대산업에만 적합한 것으로 파악하며, 이를 보편화시키는 데에는 부정적이었고, 3. 사회주의 또한 국가개입을 통한 보호를 추구했던 수정주의자들, 일체의 국가 개입을 부정하는 생디칼리즘 등의 노선으로 양분되었다. 4. 연대주의는 이러한 속에서 사회보험의 일반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길항은 1910년대까지 지속되다, 1914년의 1차 대전 이후 자연히 황폐화된 경제를 복원하고 신속한 안정을 취해야하는 사회적 강제가 인식되고 나서야 완만한 타협에 접어든다. 그리하여 1928년엔 사회보험법을 수정하고, 1930년엔 질병, 출산, 장애, 노령, 사망을 포괄하는 사회보험법안이 만들어졌으며, 1932년 가족수당제도와 더불어 프랑스 복지국가는 최초로 완성형이 되었다(허나 여전히 그 이면엔 보편적 권리보장을 추구하는 연대주의와, 중간집단의 자치/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추구하는 사회경제학의 길항은 2차 대전 이후까지도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가·사회 법학자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1888년 이래 국회의원으로 노동상, 상원 의장 등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연대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국제적 협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국제 연맹의 제창자로서 1919년 초대 국제 연맹 총회 의장 등을 지내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 대표로 있었다. 192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