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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Lenin's Three Theoretical Arguments About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레닌의 세 가지 이론적 주장

by 정강산 2017. 5. 20.

Ivan VladimirovForeigners in Leningrad(1937)


<Lenin's Three Theoretical Arguments About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레닌의 세 가지 이론적 주장>


By Etienne Balibar / 19 May 2017

[번역: 정강산]

 

22회 프랑스 공산당 대회를 기념하며. 원문 출처: l'Humanité

 

1976, 프랑스 공산당은 서유럽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전략적 단계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그라함 로케Grahame Locke는 그가 버소의 1977년 목록으로 번역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On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역주: 국역본 <민주주의와 독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심지어 공산당의 의회라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없앨 수 없다. 그것이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이 저서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떤 정책 혹은 정부나 기관의 특정한 형식의 설립을 포함하는 하나의 전략이 아니라, 반대로,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에서 연원하는, 공산주의로의 과도기에 대한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현실성이다. 즉 그것은 어떤 역사적 경향의 현실성이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그 자체의 내부에서 발달되기 시작하는 경향이다(ch. 5). 그것은 사회주의를 향한 하나의 가능한 이행의 경로”, (예컨대 1917년의 러시아 이후에서처럼)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하에서 선택될수 있거나 되어야하는 경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산업적으로 발전된서유럽에서 그 외의 다른 선택민주적경로를 거부할 수 있기 위한 경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거나 정책의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엄청난 혼란의 단어들과 비용들에서를 제외하면, 계급투쟁이 폐기될수 없는 것 이상으로 폐기될수 없다.

 

이하의 발췌문에서, 발리바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착상에 대한 이론적 구성을 그린다.

 

모든 이들이 레닌이 결코 (이후 진행된)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관한 한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이 발견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1848년 혁명들과 파리코뮌의 짧고 파편적인 경험들의 주된 경향을 빼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들에 관한 실제 사례들을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레닌에 관해 말하자면, 문제는 다르다. 즉 맨 처음부터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진정한 경험과 대면했다. 이때 이 경험은 예외적으로 어렵고 모순적이었다. 레닌의 분석과 그의 주장들의 목적을 형성한 것은 그것이 러시아에서 발달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모순들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은 쉽게 교조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레닌주의는 오랫동안 공산당에 의해 그래왔듯 완결된 이론이자 닫힌 체계로서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그러나 만약 이들 모순들과 그들의 역사적 원인들에 관한 피상적인 인식에 만족하는데 머무른다면, 당신이 이론의 기준과 역사의 기준 사이에서, 실제 삶과 실천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단순하고 그릇된 생각에 만족하는데 그친다면, 레닌의 주장들을 단순히 계속 변화하는 상황들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좀처럼 역사에 적용되지 않으며, 이들 역사적 모순들은 난해해지고, 그 모순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계는 보이지 않게 된다. 당신은 주관적 환상의 지배에 빠지는 것이다. 레닌의 구체적인 분석에서 그의 전술 구호는 일반적인 역사적 경향을 파악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개념을 공식화하기 위한 영구적 노력으로 표현된다. 만약 이 착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역사적 경험을 배울 수 없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우선 당신이 레닌에서 발견한 이론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일괄적으로 설명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은 레닌에 의해 계속해서 반복되고 시험된 세 논점들 혹은 세 범주의 주장들의 개요에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동일한 형식에서, 명백히 혹은 암시적으로 러시아 혁명 기간을 다루고 있는 레닌의 텍스트의 모든 페이지에서 발견되며, 특히 중요한 상황, 혁명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마르크스주의 원칙들에 기초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깨닫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전략들의 수정에서 매번 나타난다. 이 세 주장들은 무엇인가?

 

그들 중 처음은 국가권력을 다룬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들을 요약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국가 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적 권력이며, 이 계급은 사회에서 지배 계급으로서 권력을 그 수중에 쥐고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모든 국가 권력은 계급 독재라고 말할 때 의미한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하나의 계급 독재이다(부르주아 독재). 반면 노동대중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또한 계급 독재이다. 이를 더 정확히 해보자. 즉 이 주장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에 기초한 현대사회에서, 국가 권력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완벽한 방식으로 잡혀있고 이들은 어떤 계급과도 권력을 공유하지 않으며 그 자신의 부분들을 분할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실현되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들이 무엇이든, 다시 말해 각각의 자본주의적 사회 형성의 역사에서-끊임없이 계급투쟁의 발전에 의해 위협받는-그들의 국가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이용해야만 하는 특정한 형식들이 무엇이든, 사실이다.

 

첫 번째 테제는 다음의 결과들을 도출한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맞선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적 대안, 프롤레타리아트, 즉 자본에 의해 착취 받는 임금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국가권력에의 평등하고 완전한 점유이다. 부르주아지가 국가권력을 나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 또한 다른 계급들과 그것을 나눌 수 없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이 완전한 점유는 그들의 변형과 역사적 다양성과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모든 형식들의 본질이다. 허나 어떤 대안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즉 우리는 외려 계급투쟁은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의 국가 권력으로 향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어떤 특정한 방식에서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 권력을 쥘 수 있게 되는 순간이나, 그 속에서 권력이 작동할 특정한 형식들을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그것이 자동적인automatic”이었던 것인 양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을 우리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계급투쟁의 발전은 계획될 수도, 기획될 수도 없다.

 

두 번째 주장은 국가 장치를 다룬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를 요약할 수 있다: 지배 계급의 국가 권력은 역사 속에서 존재할 수 없고, 국가 장치-레닌이 항상 빌리는 마르크스의 메타포 중 하나를 사용하자면, 그 핵심(원리적 측면이지만 단지 측면에 그치지 않는-레닌은 결코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이 국가의 억압적인 장치나 기관들로 이루어진-“국가 기계State machine”의 발달과 기능에 대한 물질적 형식을 취함이 없이는 실현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이들은: 한편으로, 경찰과 법적 장치뿐만 아니라 상비군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론, 국가 행정(정부) 혹은 관료제이기도 하다(레닌은 이 두 용어를 대개 동의어적으로 사용한다). 이 테제는 밀접하게 관련된 다음의 결과를 도출한다: 부르주아 국가 권력의 타도(전복)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존재하는 국가 장치의 파괴 없이는 불가능 한데, 이 국가 장치를 통해 부르주아지의 국가권력은 물질적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 장치가 파괴되지 않는 한-이는 복잡하고 어려운데-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발전할 수 없고 그것의 역사적 책무, 즉 착취적 관계들의 전복과 착취와 계급이 없는 사회의 창조를 완수할 수 없다. 이 장치가 파괴되지 않을 때까지, 장치들이 자리 잡는 역사적 형식들이 무엇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이며, 착취는 지속될 것이다.

 

레닌의 주장들이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양자의 위에서 직접적으로 태동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두 문제들은 분리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당신은 일반적인 국가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특정한)이론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단지 하나의 단일한 이론이 있을 뿐이다.

 

내가 제시했었던 처음의 두 주장들은, 이미 명백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포함되어 있다. 물론 레닌은 사회민주당에 의해 공식적으로 가르쳐진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판본을 따라왔던 와해와 검열로부터 그들을 구조해야만 했지만, 그들이 레닌에 의해 발견된 것은 아니다. 이는 이 지점에서, 레닌 자신의 역할과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의 역할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허나 만약, 내가 말해온 이론의 핵심에 관심을 제한한다면, 이 역할이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처음으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실천의 장에 삽입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결합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과 대중들 사이에, 한편으론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 사이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이 결합은 결코 이전엔 실제로 자리를 잡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는 비록 마르크스 이후 노동운동에서 조직화에 관한 중요한 진보가 취해졌지만, 그 자율성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그것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독립성과, 따라서 그 실제적인 정치적 힘에선 상당한 축소를 동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레닌주의로의 변형이었고, 이것은 그 운동이 새로운 시도를 취함으로써 역사적 침체를 극복하도록 했다.

 

이것은 우리를 내가 언급했던 세 번째 주장으로 데려간다. 이 세 번째 주장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룬다.

 

그것은 그 전사(前史),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의 선례적 요소들에 없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항상 그들의 입장을 공산주의자로서 나타냈고,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말할 것도 없다)라는 용어를 오로지 명백히 어떤 양보로서 채택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실로 우리는 이 포지션이 부재한다면(이 입장이 함축하는 주장이 부재한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허나 그들은 그것을 길게 발전시킬 여지가 없었다. 이 책무는 레닌에게 떨어졌고, 이를 수행함에 있어 그는 러시아 혁명의 시기 계급투쟁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작업에 기초했으며, 그의 작업은 따라서 그 강한 의미에서 혁명의 산물이었다. 이제 이 주장은 숙명(죽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기간 이전 처음의 두 주장들이 겪어온 숙명(죽음)이다. , 그것은 마치 처음의 두 주장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잊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운동과 레닌주의의 역사에서 망각되고”, (극적인 결과들과 함께) 와해된다.

 

첫째로, 공산주의자 선언과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매우 추상적인 형식화가 그려진다: 유일한 공산주의는 계급이 없는 사회이고, 모든 착취의 형식들이 사라진 사회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들은 최후의 가능한 역사적인 착취의 형식이기에, 이것은 생산과 사회적 삶의 전체에 있어 오직 공산주의적 사회관계만이 실로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으며, 오직 그들만이 실로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양립불가하며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론적인 관점과 특히 실천적인 관점 양자에서 매우 중요한 일련의 결과들을 함축한다. 즉 그것은 사회주의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지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하나의 형식도 아니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길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을 질서로 밀어 넣음으로써 별개로 얻게 되는 두 개의 상이한 목표들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사회주의, 그리고 일단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완성되고, 그것이 발전되고”(혹은 높은 수준에서 발전되거나), 즉 완전해지고, 그것이 그들이 말하듯 공산주의의 기초를 만들어내고- 두 번째로 공산주의로의 이행, 공산주의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의 달성이 매우 긴 역사적 기간까지 뻗치는(의심의 여지없이 노동자들과 이론가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모순적인), 오직 하나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출발과 투쟁, 전략, 전술들을 올바르게 정의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즉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그들이 끌고 가는 인민대중 전체는 독립적인 목표로서의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며, 그에 대해 사회주의는 단지 수단이자, 1차적인 형식이다. 이 개념의 유물론적 의미에 있어 어떤 다른 관점도 그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공산주의적 이념과, 공산주의적 조직(비록 그것의 역할이 명백히 결정적이라 할지라도 사실 당은 그 수단들 중 하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기에, 공산주의적 조직이 더 정확할 것이다)에 의해 제공된 수단과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한다. 마지막 분석으로, 대중들은 자본주의사회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공산주의를 향한 경향을 발전시키기 위해 싸우는데, 이 경향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강화하고 힘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추상적인 형식으로 언급할 매우 중요한 결과가 뒤따른다. 즉 사회주의의 이론은 공산주의의 관점으로부터 발전될 때 오직 가능한 것이며, 사회주의의 효과적인 실현 역시 실천에서 공산주의적 입장에 기초하여 오직 공산주의의 관점에서부터 가능해진다. 만약 이 입장이 상실된다면,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만약 그 성취의 예외적인 어려움들이 우리로 하여금 실천에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게 한다면, 비록 그것이 여전히 우리의 이론에 자리하거나 먼 이상으로서 논의된다 해도, 최소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단절을 대표하는 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구축은 불가능해진다.

 

이는 이들 주장들의 모든 함의들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완전한 분석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것이 형식화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자 특정한 오해와 근거 없는 목표들을 반대하는 하나의 질문이다."

 

http://www.versobooks.com/blogs/3228-lenin-s-three-theoretical-arguments-about-the-dictatorship-of-the-proletari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