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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사회 재생산 이론: 마르크스의 <자본> 너머 (Social Reproduction Theory: going beyond Marx’s Capital)

by 정강산 2018. 2. 27.

(본 글은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의 의뢰로 번역된 글입니다. 다음의 링크에는 관련 주제에 관한 좋은 글들이 더 있습니다. http://www.anotherworld.kr)


마르크스주의 사회재생산 이론에 관한 짧은 아티클을 번역했습니다. 본문에서 필자 콜린 바커(Colin Barker)는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가 편집한 󰡔사회재생산 이론: 계급의 재배치와 억압의 재조정(Social Reproduction Theory: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Pluto, 2017)󰡕을 소개하며, 이 작업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총체적인 설명 모델을 계승하는 일임을 논증하고, 마르크스 이론의 지속적인 갱신과 재생산영역에 대한 주목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재생산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은 것도 확실합니다. 사실상 가족 영역에서의 여성의 노동을 비롯하여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는 일관되지만 단편적으로만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연합 및 상호 포섭을 위한 논의는 급진 정치가 상대해야할 장소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간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의 경향들은 노동계급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사회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 및 문화의 영역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집니다.

이 중 리스 보겔(Lise Vogel)이 80년대 초반에 제안했던 사회재생산 이론(「마르크스주의와 여성차별: 단일 이론을 향해(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Toward a Unitary Theory)」, 1983)은 70년대 영미권에서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간 가사노동 논쟁의 연장에 있습니다. 가사노동의 정의에서부터 가치론을 이해하는 여러 논자들의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쟁점은 크게 다음과 같이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1.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핵심적이며, 가치를 생산한다. 
2.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개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이 논쟁을 경과하며 적잖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급진 페미니스트들에게 일종의 대안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은 이중체계론이었는데, 이에 따르면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가장의 권력과,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동시에 놓임으로써 이중의 속박에 구속됩니다. 따라서 여성은 이중의 구속에 대한 적대적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중체계론은 여성의 억압기제를 시장과 독립된 가정영역에서 찾으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규정력을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신이었지만, 가부장제 혹은 가족구조와 자본주의 간의 위상차, 그들이 맺는 유기적 연관 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각각을 분리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기계적인 구분에 머무르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 제시된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사 및 돌봄 영역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도 이들을 '재생산'의 범주에 정박시킴으로써 가사/돌봄노동이 '생산'영역과 달리 가치의 발생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논증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논의들에서 생산양식과 완전히 독립되어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가사노동 및 가부장제 등의 요인을 자본주의 재생산의 범위와 역할 속에서 파악하며, 이중체계론의 이원적 방법론을 넘어, 가사/돌봄 노동을 생산양식과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포착하려했던 시도였습니다.

요컨대 보겔의 작업에서 성차의 문제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양식에 매개된 것으로서 조명되며, 가사노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성별분업 및 차별은 자본주의적 노동양태, 계급문제 등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겔의 작업이 2013년 영미권에서 재출간 된 뒤로 다시금 촉발된 논의 속에서 티티 바타차리아는 적극적으로 사회재생산이론을 주창합니다(미국의 퍼듀 대학에서 남아시아 역사 교수로 재직하며 마르크스주의, 젠더, 인종주의 등의 문제에 천착해온 그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활동가이기도 한데요, 올해 1월엔 낸시 프레이저 등의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WeStrike’ 캠페인에 참여하여, ‘#metoo’로 드러난 성폭력의 문제를 노동의 권리에 대한 쟁점 및 열악한 근로조건, 경찰의 폭력, 임금차별, 인종주의 등 자본주의의 제문제의 일부로 포함하는 사설을 작성하고 3월 8일 여성들의 파업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이 속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벽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되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며, 비판적으로 계승되어야할 전통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예컨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재생산 이론이 전체적인 수준에서 여전히 가사/돌봄의 범주를 전체 생산과의 관계 속에서 보지 못하기에 적잖은 논자들이 마르크스의 작업을 ‘노동가치론’비판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보겔 류의 사회재생산 이론이 성차와 노동 간 관계의 문제를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 계급투쟁의 영역에서 생산적으로 확장해 낸 성과를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이들이 없으나, 한국에서도 90년대까지 위와 같은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오늘날의 상황은 적잖은 시차감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시대가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누군가 말했듯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은 피해-가해의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수준에서 제기된 이론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작업이 외려 요청되는 시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쪼록 일독을 권합니다.


사회 재생산 이론마르크스의 <자본너머

(Social Reproduction Theory: going beyond Marx’s Capital)


 

By Colin Barker - 8 December 2017

콜린 바커- 2017128

번역: 정강산



 

맨체스터 rs21(21세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의 콜린 바커(Colin Barker)는 저서 <사회 재생산 이론: 계급의 재배치와 억압의 재조정> 발행에 맞춰 최근 런던서 있었던 <역사 유물론> 컨퍼런스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콜린의 발표를 재 간행한다.

 



원문 링크:

https://www.rs21.org.uk/2017/12/08/social-reproduction-theory-going-beyond-marxs-capital/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1]에 의해 편집된 새로운 훌륭한 작업에 의해 설명되었듯, 사회 재생산 이론(SRT)은 양쪽의 강력한 혼합물이자 매우 생산적인 사유 방식이다. 그 출발점은 마르크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법한 어떤 책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는데, 즉 마르크스의 <자본> 3권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자본>은 잘 알려졌듯 미완의 작업이다. 3권은 마르크스가 계급들(과 필경 계급투쟁)에 관해 논의하려는 부분에서 갑자기 중단된다. 본래 마르크스는 국가, 국제 무역, 세계시장과 위기에 대한 저작을 포함하여 6권짜리 작업을 계획했다.[2] 허나 내가 아는 한, 남아있는 그의 원고들에는 가장 흐릿한 개요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대에 관해 서술하면서, 그는 논의 전체를 그가 1870년대에 맹렬하게 작업했던 러시아 소농 농업의 구성 요소의 측면에서 고쳐 쓰려 했다. 그는 경쟁에 관해 계획되어 있는 더 추가된 작업을 언급한다. 허나 잉여가치가 산업적, 상업적 이윤과 이자, 지대로 분배되는 방식들에 관한 제 3권의 논의는 추가된 형식-즉 국가 조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3]

 

그리고, 당연하게도 SRT의 출발점에 다름 아닌 마르크스는 자신의 중요한 이론적 발견인 노동력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에 관해 진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그의 거룩한 작업은 매우 구멍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데에 유용한 지침을 가지고자 한다면, 더 많은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필요한 덧붙임과 보충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접근이 상이한 탐구 방식들을 거쳐 발전되어왔다.

 

첫 번째 전략은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더 완전한 일련의 범주들과 개념들을 제공해줄 자원을 마르크스 바깥에서 찾는 것을 수반한다. (때로 이 바깥에서의연구는 마르크스주의가 어쨌든 결정론, 환원론, 경제주의, 유럽중심주의, 물론 유토피아주의에 의해서도- 갖가지로 결함을 갖는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따라서 국제 관계론의 학도들은 국가 체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채워주기 위해 현실주의로 선회했다. 이론가들은 젠더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억압과 계급에 대한 이원적(dualist)’ 이론을 제공하는 가부장제 이론에 주목했다.

 

이원론이외에 인종주의와 다른 형태의 불평등을 추가하는 것은 몇몇 이론가들을 상호교차성이론으로 향하게 했는데, 여기서 여러 자율적인 체계들은 서로의 궤도를 가로지른다. 만약 더 심화된 복잡성을 마주한다면, 역시 더 많은 요인들이 열거되었다.[4]

 

두 번째 전략은 그 빈틈과 침묵에 의해 제기된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관점으로 ‘<자본>의 한계를 탐구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단일한 지위를 지키고, 이를 마르크스의 사유 범주 자체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리스 보겔(Lise Vogel)[5], 마이클 A. 레보위츠(Michael Lebowitz)[6] 등에 의해 취해진 경로인데, 이 집단 내에서 폭넓게 대변된다. 이러한 전략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가 충분히 명백하게 말하지도, 제기하지도 않았던 문제들을 쫒는 것을 수반한다.

 

그 과정에서, 광범하게 상호 관련된 필자 집단 전체는 <자본>의 범위를 넘어 마르크스주의 언어를 심화시키고’, ‘확장하고’, ‘보충하고’, ‘넓히거나 늘리려 했다.[7] [8]

 

적어도 이 판본[콜린바커 자신의 저서 <사회재생산 이론>]에 등장하는 저자들의 경우 사회 재생산 이론은 두 번째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전략의 한 부분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핵심적인 전제 조건을 확인하는 일과 관련된다.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의 중심에는 유동적인 가치(value in motion)’가 있다.[9] 가치는 생산 단계를 거치고(여기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 계속해서 넓어지는 인간 사회 행위 영역들을 통합하고 종속시키는 확장된 사회적(societal) 재생산의 반복되는 순환에서 실현 단계와 분배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그 운동은 그 자체로 직접 시장 교환의 법칙과 전제들에 종속되지는 않는 일련의 전체적 조건에 의존한다.

 

마르크스는 이들 중 하나, 즉 생산의 숨겨진 거처에 관해 폭넓게 논의했는데, 이때 시장에서 구매된 노동력은 자신의 자유를 잃게 되며 그 에너지가 추상적 노동으로 전환되면서 자본의 횡포한 법칙에 복종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은 끝나고, 예속이 지배하게 된다.[10] 부자유는 다양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필수적인 기초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힘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I>의 시초 축적(혹은 더 낫게는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 밖에선, 특히 자본주의적 발전에 관한 부분을 차치하면 상품 생산과 교환의 전체 체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힘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적 힘의 배치와 조직화는 자본주의 생산 속에서 공동 구성적(co-constituting)이고 지속적인 필요성으로서 수반된다.[11]

 

사회 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의 다른 전제조건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그 자체의 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한 상품인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에 관해서 말이다.

 

어떻게,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목적으로 노동력은 생산되는가? 실로 이것이 생산활동 자체인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시함에 따라 이러한 질문들이 나타났지만, 다른 생산적인 질문들처럼 이들은 그 함의가 탐구되면서 자신들의 기원을 넘어서 분기했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과정은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의 과정 속에서 노동력과 노동 조건들 사이의 분리를 재생산 한다. 완전하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이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과정, 즉 재생산 과정은 단지 상품들과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 그 자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Capital I>, 723-4, 강조는 필자)

 

자본주의적 생산은, 계급과 그 적대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한다.

 

이 계속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에서 임금 노동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

 

ο 기존의 노동자들은 매일 재생산(regeneration)되거나 유지되어야한다.

 

ο 그러한 재생산과 보존은 또한 어린이, 노인, 병자, 그리고 그 외의 부양가족을 포함하여- 노동자가 아닌 이들을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

 

ο , 노령, 죽음으로 떠난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낳아지고 양육되어야 한다.

 

잉여 가치를 생산하거나 자본과 국가의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노동자들을 직장으로 데려오는 것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필요 자원이나 재생산 수단에 인간 활동을 적용하는 과정들에서 노동력은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한다[12].

 

놀랄 것도 없이, 그 기원을 고려할 때, 사회재생산에 관한 문헌 대부분은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주요한 장소로서 가족-가정(family-household)을 주목해왔다. ‘가사노동의 성격과 그것이 정치경제의 나머지 영역과 맺는 관계에 대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탐구로 시작된 것은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어 왔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들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의 이들 사안에 대한 탐구였다. 그 관련 쟁점은 단지 이주노동의 새로운 흐름을 유발하는데 있어 지속적인 박탈 혹은 시초 축적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세계 시장에 대한 책이 없는 것이 인종주의의 체계적인 조직에 관한 우리 이해에 기여했을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13]

 

(마르크스가 매우 칭찬한)공장 감독의 업무와 보건의료관리들의 보고서에 대한 약간의 관심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재생산의 조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같은 다른 조건들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관련 사안은 물론 이후 150년의 과정에서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사회재생산 이론에 의한 검토 범위와 계급투쟁에서 모든 종류의 연대를 위한 영역을 가족-가정을 넘어 상당히 확장시킬 것이었다.

 

노동 계급이 주택, 도시 생활의 질, 교통, 교육, 물과 위생, 건강과 약, 연금, 노동 시간(그리고 여행), 음식의 질, 전시와 가스, 연료의 공급 등을 빌리고 구매하는 조건들은, 계급투쟁 자체와 계급투쟁이 수행되는 사회운동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요구하며 다른 많은 사안들과 함께, 전지구에 걸친 계급투쟁에서 중심적인 부분을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14] (최근 한 페이스북 상의 토론에서는 국가와 사회재생산에 관해 추가된 판본에 대한 아이디어가 논의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티티 바타차리아가 그것을 편집하는 데에 도움을 주길 희망하고- 이를 필시 필요로 할 것이다.)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단지 경제적 범주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 그녀 혹은 그 자체, 활동하는 생산자, 명백히 사회화된 역사적 존재, 마르크스와 그람시가 다양하게 명명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행위들의 결합 혹은 중심 자체이다.[15]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재생산에 대한 행위자라면,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행위자로서의 그들 자신이다.

 

가치의 기준을 제공하는 추상 노동은 추상적인 인물의 산출물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위치하며 역사를 구성하는 실제 개인들의 산출물이다. 노동자/생산자는 관념, 역사, 사회적 관계, 기술, 문화[수준에서의 분할]와 함께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개인이다.

 

이 개인, 노동자(혹은 노동계급의 구성원), 그들 자신에 대해 세계에 관한 어떤 종류의 감각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행위 하려하는 적극적인 철학자인데, 여기서 만족으로 간주되는 것은 동시에 적극적인 반영 혹은 반영적인 활동이며, 이전의 역사적 발전의 산물 자체이다.

 

마이클 레보위츠가 자신의 저서 <자본 너머(Beyond Capital)>에서 보여준 그 논의에 대한 기여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결정적이다.[16] 레보위츠는 -비록 마르크스가 노동시간에 관한 19세기의 쟁투에 긴 장을 할애했더라도- 임금에 대한 노동자와 자본 간의 투쟁이 <자본>의 구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자본의 재생산회로에 대립하는 필수적 측면과 더불어, 노동력 생산과 판매에 관한 두 번째 회로를 전제한다.

 

이 회로에서 수행되는 노동은 자본의 직접적인 비호 하에 떨어지지 않는다. 자본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 부과하는 한계 내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이들은 자력으로 과업을 수행한다. 나아가, 이 회로의 동인(drivers)’는 노동자 자신일 뿐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동기도 잉여가치의 경쟁적인 축적에 추동되는 이들과는 완연히 구별된다.

 

이들 동기는 노동자 자신의 필요이고, 단순히 소비를 위한 물질적 재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 자기 계발, ‘그들 스스로의 신체적, 정신적 힘에 대한 자유로운 행사를 위해, 즉 사회적 삶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두 가지 회로들 사이의 상호 관계는 계급투쟁의 진정한 핵심이다.

 

<자본>에서 빠진 것은 단지 경제적범주로서 노동력의 생산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특히 자본에 대립하는 노동자들의 자기활동의 원리이다.

 

이는 <자본>을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읽는데 있어, 자본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이 제공하는 사회의 해부학 내부에서 지속되는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포함하기 위해, 우리가 그 적수가 있는 음울한 과학’(19세기에 활동한 영국의 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에 의해 지어진 조롱 섞인 단어로서, 그는 경제학이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규정되는 자율적인 시장법칙을 강조하며 통치자의 역할을 축소한다고 비판했다)의 한계를 넘어 도약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한 가지 원리, 즉 가치의 자기 팽창에 기초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시각 너머, 그 중심에 대립하는 원리들 간의 투쟁이 있는 어떤 하나의 더 열린 체계로 우리를 이끈다.

 

(비록 <자본>에선 아니지만)마르크스의 저술 다른 곳에서 이는 대립하는 정치경제들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즉 자본의 정치경제와 노동의 정치경제말이다.

 

1860년대에 마르크스는 특히 이것이 표명되고, 그 속에서 어떤 발전이 이뤄졌던 두 가지 형식을 식별했다. 그것은 첫째, 노동일에 법적 한계를 부과하려는 오랜 싸움과, 둘째, 그 존재가 생산이 고용주 없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였던 협동적인 작업장의 형성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을 순응적인 것으로 제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은 교육, 전통, 관습 등에 의해 그 생산양식의 요구를 자명한 자연 법칙으로 간주하는 노동계급을 만들어낸다. 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과정의 조직은 일단 그것이 충분히 발전하면, 모든 저항을 무너뜨린다.[17]

 

그러나 이것은 일면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한번쯤 저항의 수준에 낙담할지도 모르나, 그 발전의 형식을 주조하는데 있어 임금 계약을 체결하고 파기하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진정한 자유를 포함하여, 피임과 낙태에 대한 접근과 같은 재생산 투쟁의 영역에서의 자유(와 그 부재)의 모든 방식들, 남성과 여성의 법적 권리를 평등하게 하려는 시도들, 국가복지법안의 발달, 노조를 형성하고 파업을 할 권리, 결사와 시위의 권리, 투표권, 등등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상한 설명이 될 것이다.

 

허나 만약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와 그 재생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결정적인 것으로서 재 중심화된다면, 자본 자체-그리고 그 대변자들과 국가-는 노동 자체가 활동하는 방식을 형성하려하는 데 있어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에 대한 노동의 추구는 모든 지점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면서, 자본과 국가에 대해 똑같이 단지 경제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1960년대 초의 훌륭한 에세이에서, 에드워드 톰슨은 영국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사회를 구석구석 채웠었는지’[18]썼지만, 그는 이것의 이면을 지적하는 것을 간과했다. 즉 그 활동의 형식들을 선임하고, 제한하고, 가두면서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들의 운동을 구석구석 채운 방식 말이다.

 

사회 재생산의 형태인 노동 계급의 형성은 항상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왔다. 계급투쟁은 단지 이미 형성된 존재들 사이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실로 이를 통해 대중 계급이 스스로를 위해자신들을 무언가로 되게 하거나, 되지 않게 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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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설의 좀 더 짧은 버전은 플루토<Pluto>에 의해 발행되었다.

 

 

Notes

 

[1] Tithi Bhattacharya, ed, Social Reproduction Theory: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Pluto, 2017

[2] The six-book schema appears in the Grundrisse, and are conveniently laid out in Roman Rosdolsky, The Making of Marx’s Capital, Pluto 1977

[3] This is especially odd, given that the fifth book of Smith’s The Wealth of Nations deals with the state, while Ricardo’s most famous book is entitled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

[4] A related strategy was proposed by Thompson, who proposed turning to ‘history’ to provide the categories that the narrow discipline of ‘political economy’ (into whose maw he thought Marx himself had been sucked) could not provide. (E 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Merlin, 1978

[5]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Pluto, 1984

[6] Beyond Capital: The Political Economy of Labour, Macmillan 1991, revised edition 2003

[7] The term ‘deepen’ is mine; Nancy Fraser talks about ‘extending’, Nancy Holstrom about ‘supplementing’, and Tithi Bhattacharya about ‘analytically broadening’ Marxism; while Satnam Virdee intriguingly promises a new book on ‘Stretching Marxism’.

[8] A not dissimilar spirit seems to lie behind Teodor Shanin’s and Kevin Anderson’s explorations of some of Marx’s less well-known writings; or indeed Paul le Blanc’s recent call for a more ‘open’ account of Marxist theory, away from ‘too narrow’ conceptions of capitalism. Teodor Shanin, Late Marx and the Russian Road: Marx and ‘The Peripheries of Capitalism’, Routledge, 1983; Kevin Anderson, Marx at the Margins: On Nationalism, Ethnicity, and Non-Western Societi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0; Paul le Blanc, ‘Explorations in Plain Marxism’ in Revolutionary Studies. Essays in Plain Marxism, Haymarket, 2017. Developments within Marxism of this kind seem to occur in some periods more than others. Under the impact of the ‘Red Years’ from 1917 and after, a whole series of thinkers sought to ‘extend’ Marxist thinking in a variety of spheres: e.g. Gramsci, Mariátegui, Pashukanis, Rubin, Vološinov, Vygotsky. Likewise the impact of the ‘sixties’ was felt in field after field of practical and theoretical inquiry across the face of Marxism, from Marxist-feminism to state theory to social work and mental illness; a little later, in response to some of the excesses of ‘postmodernism’, significant work on Marxism and language was produced, often drawing on Vološinov and Vygotsky.

[9] David Harvey, Marx, Capital and the Madness of Economic Reason (2017) offers an impressive graphic representation, comparing it with the hydrological cycle. He might also have drawn on another Harvey to illustrate the circulation of the blood.

[10] For the purposes of analysis, Marx assumes the legal freedom and equality of the labourer in the market-place, where he strikes his bargain with the capitalist. Yet this is a partial fiction. It was not until eight years after the appearance of Capital that the Master and Servant Act was repealed in Britain. Until then, workers were regularly jailed (and beaten) for ‘breach of contract’ (Heide Gerstenberger at the book launch for her new book Markt under Gewalt at the HM Conference, November 2017; Marc Steinberg, England’s Great Transformation: Law, Labour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Elsewhere, both slavery and serfdom proved compatible with capitalist production (Jairus Banaji, ‘Modes of Production in a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 Capital & Class, 1977).

[11] The means of violence, insofar as they are ‘privately produced’, are not themselves immune to the law of value. To the degree they are provided by states, another economic principle is introduced into the political economy of capitalism: state taxation and non-contractual rule. (Colin Barker, ‘Value, force, many states and other problems’ HM Conference, 2009)

[12] The main source of means of production for the reproduction of labour-power is the wage, a form deficient in terms of matching need and supply. The wage is not paid according to need, but for hours worked by the individual. Yet it must cover the needs of the entire household. In late 19th-century York, one study pointed to age-related cycles of poverty, depending on how many of the household were able to bring in wages. The best-off families were those with working teenage children. Reductions in demand for child and teenage labour, along with the extension the years of state-controlled formal education led to reductions in family sizes and increases in the proportions of married women taking outside employment. Divisions of labour, and patterns of relations between men and women,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nd indeed between grandparents and children, varied and shifted under the impact of changes in numbers of factors: demand for labour, state restrictions on children’s and women’s employments, birth rates (and the availability of effective contraception and abortion), changing forms of housework burden. The constraints of biological difference, especially as regard birth and lactation, gave men and women different ‘career profiles’.

[13] Michael Burawoy, ‘The Functions and Reproduction of Migrant Labor: Comparative Material from Southern Africa and the United State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1.5, 1976; Susan Ferguson and David McNally, ‘Precarious Migrants: Gender, race and the social reproduction of a global working class’, Socialist Register 2015: Transforming Classes, Merlin, 2014

[14] If anyone doubts that such ‘social reproduction’ questions, beyond the immediate sphere of the workplace, are central to ‘class struggle’, they should seriously consider the past four decades of neo-liberalism. Capital and its states have been attacking globally on two fronts together: on workers’ organisation in unions and on the means of social reproduction of the working class.

[15] Marx, Theses on Feuerbach;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1971:352

[16] A symposium on this work, including my own critical comments, appeared in Historical Materialism 14.2, 2006. Ben Fine and Michael Lebowitz also debated some of the issues arising from his book in Historical Materialism 16.3 2008 and 18.1, 2010

[17] Capital I p. 899

[18] Thompson, ‘The peculiarities of the English’ Socialist Register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