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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미투(MeToo)’가 새로운 표준을 만들 수 있을까?(Can #MeToo lead to a new "normal"?)

by 정강산 2018. 2. 27.

(본 글은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의 의뢰로 번역된 글입니다. 다음의 링크에는 관련 주제에 관한 좋은 글들이 더 있습니다. http://www.anotherworld.kr)


역자 후기: 미투운동을 둘러싼 짧은 논설을 번역했습니다저자들에 관해 소개하자면에바 마리아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국제사회주의기구(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활동가로서 <자코뱅(Jacobin)>과 <사회주의적 노동자(SocialistWorker)>를 비롯한 여러 저널에 기고해왔고일라 옐레세티는 <101명의 변화의 주역들미국을 바꾼 반역자와 급진주의자들>에 기고한 저자이자 <국제사회주의 리뷰(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의 필자로서 시에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물입니다저자들은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지만그와 별개로 그들의 주장은 나름의 울림이 있는데요패리 앤더슨도에른스트 만델도 트로츠키주의자였음을 떠올리며노선의 차이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들 주장의 액면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저자들은 가해와 피해의 인과가 모호하여 그에 대한 반응이 첨예하게 갈렸던 미국의 코미디언 아지즈 안사리(Aziz Ansari)의 사례를 돌아보면서여러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양성간 성적 동의를 얻는 과정과 여성의 성적 결정을 둘러싼 새로운 논의를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나아가 그들은급진주의자들의 역할이란 미투운동에 제동을 거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이 유효한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미투운동은 1.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남성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가 실질적으로 붕괴하는 과정에서 확대되어온 여성의 노동시장으로의 진출, 2.이에 따른 문화영역에서의 여성 재현 방식의 변화, 3.이들에 후행하는 사회 전체적 인식의 진전, 4.SNS로 대표되는 수평화된 정보 전달 플랫폼의 등장, 5.성적 차이의 제문제를 의제로 삼아온 학자/활동가들의 운동 선례 등에서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된 흐름입니다저자들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은 아닙니다만이들의 주장을 생산적으로 확장하자면 상기한 여러 변화들에 개입할 만큼 좌파들이 충분한 준비가 되었는지 재고해보자는 제안으로도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그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의 주장은 쉽게 무시하기 어려운데이는 좌파정치의 본령은 물질화 된 운동 형식의 부재를 한탄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저항이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사실이 왜 이 시점에서 필연인지를 규정하고 그에 개입하는 일에 있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투운동이 기본적으로 조직화 되지 않은 SNS상의 폭로와 고발을 주된 실천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허나 동시에 권력담론으로 분석하든 성적담론으로 분석하든여러 사회적 집단 내부에 편재하던 성적 위계와 억압이 명백히 지목되는 효과를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미투운동을 대중적인 수준의 문화혁명으로 간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여러 부침들에도 불구하고 미투 이후 사람들의 성 인지력과 넓은 의미의 성적 관계의 양상은 예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물론 개인적 경험에 대한 도덕적 성토를 넘어개인의 성적 윤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장치로서의 물질적인 사회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에 개입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하겠지만요(역사적인 여러 문화혁명들이 이 지점을 충분히 고려했다면 더 구체적인 성과를 얻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수행적 발화 자체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겠으나 물질화되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금세 휘발되며결정적으로이데올로기 장치들은 개인에 선행합니다.

 

한편 미투운동은 여성운동을 추동하는 고유의 심급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으레 페미니즘에 연대할 것으로 가정되어온 좌파성향의 인물재야의 인물전위적인 예술계의 인물진보적 교단의 지도적 인물 역시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이는 반대로 '미투운동'과 '타임스 업 운동'이 일반적으로 계급의제 내지 좌파운동과 썩 관련이 없는 (더 나쁘게는 천문학적인 개런티를 누리며 대형배급사들과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잇는 카르텔의 중심으로서혹은 제국주의적 문화상품의 지배적인 코드를 생산하는 장소로서 악명 높은)헐리우드에서 연원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컨대 그들은 1970년대 포르투갈이 그랬듯 영화 산업을 국유화하자는 제안에는 몸서리를 칠 수 있겠으나으레 윤리적 쟁점이 되는 성적 차이의 문제에는 기꺼이 연대의 의사를 내비칠 수 있었습니다마찬가지로 성적 차이의 문제를 결정적인 운동의 의제로 간주하지 않는 고전적인 좌파는(얼마 전 건너 듣기론 칠레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타 인종 여성을 강간하고도 자서전에서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서술한 바 있다고 합니다가까운 예론 아들 전태일의 분신 이후 평생을 노동운동을 지원하는데 힘쓰셨던, '노동자들의 어머니'라 불린 고 이소선 할머니도 활동 당시 가부장적인 측면으로 여성 조합원들의 원망을 살 때가 종종 있었답니다경제적 측면에서의 반동에는 즉각 예민한 반응을 보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격차는 보다 일상적인 예들에서부터 해석학적 대립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컨대아이들의 젠더의식을 올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여자 아이가 모델로 등장하는 장난감 총을 판매하는 회사혹은 못생기고 뚱뚱한 여성이나 특정 신체부위가 없는 장애인의 형상을 본 따 재현의 영역에서 이탈되어 온 타자를 모티프로 만든 레고 및 인형 시리즈를 출시한 회사 등이 최근 북미에서 꽤 각광을 받고 있는데이들이 생산한 제품들이 매진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그것은 젠더 의식이 자라나는 시기의 아동들에게 꼭 필요한 급진적 장난감이자 문화적 실천일까요그게 아니라면 정치적 쟁점마저도 기업을 통해 사적으로 매개되는 포섭에 대한 증거이자 새로운 시장과 수요를 개척해내라는 자본주의의 정언명령을 나타내는 사례일까요혹은 양쪽의 주장 모두 각자의 진리계기를 가질까요.

 

이런 맥락의 연장에서 포괄적인 변혁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제문제를 사고하는 과정에 적녹보라 패러다임이 있을 것입니다여기서 각 운동이 근거하는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기대고 있는 이론이 다룰 수 있는 영역과 그 한계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지만동시에 유아론을 배제하고 상호 포섭을 시도하며 보편적 체계를 겨냥한 개입을 조직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 경향이라면이론의 정치는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만큼 외려 그 경계를 침해하고 서로의 위상과 설명력을 검증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교차성이론사회재생산 이론비판적 실재론혹은 가부장제에 관한 제 2물결 페미니즘의 논지들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 등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제 학문과 사회 각 심급들 간의 관계와 위상의 문제)에 답하려는 시도들입니다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소여의 정체성 정치의 양태를 마냥 긍정하기보다는 그 한계를 파악해가며 여러 운동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그런 점에서 저는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동시에 -주의자로서 세계에 대한 설명력을 장악하는 과업을 쉽사리 방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도 제 3세계 페미니즘 혹은 우머니즘(Womanism)등이 대두될 때부터 예고되었던 것입니다만특히 한국에서 미투를 통해 드러난 것은변혁운동이 고려해야할 요소들이 과거에 비해 훨씬 다변화 되었다는 점이 되돌릴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이게 된 지점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해방의 정치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시빌리테civilité(시민인륜;시민다움)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정치의 또 다른 대상으로 이데올로기 영역을 지목한 발리바르의 작업이 시사하는 바처럼요이러한 변화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그리고 그 긍정성과 부정성은 무엇인지 등을 따지며 본문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투(MeToo)’가 새로운 표준을 만들 수 있을까?

     (Can #MeToo lead to a new "normal"?)



에바 마리아(Eva María), 릴라 옐레세티(Leela Yellesetty)

번역: 정강산

 


#미투(MeToo) 운동은 여성이 어떻게 성차별과 억압을 경험하는지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서도 이 운동은 처음에 파렴치한 성폭력범들을 고발하면 시작됐지만,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은 성폭력적 문화와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대됐고, 아지즈 안사리와 관련된 사건이 이런 토론을 더욱 확대시킨 바 있다.(관련기사: http://www.huffingtonpost.kr/2018/01/15/story_n_19004734.html?utm_id=naver) 아래 글은 이런 쟁점들을 다루며 미투 운동의 의의와 과제들을 살펴본다.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인 에바 마리아(Eva María)와 릴라 옐레세티(Leela Yellesetty)가 썼다. 이 글을 번역해 준 정강산 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출처: https://socialistworker.org/2018/01/29/can-metoo-lead-to-a-new-normal

 

 

지난 3 개월 간,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와 백악관과 같은 곳에서 유력한 남성이 저지른 성희롱과 성폭력에 의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게 퍼진 경험에 대항하여 당당하게 얘기해오고 있다.

 

처음으로, 몇몇 용감한 여성들이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 래리 나사르(Larry Nassar), 로이 무어(Roy Moore),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와 같은 남성들에 대해 폭로와 고발을 했고, 이 남성들 중 많은 이들은 결국 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에 직면해야 했다.

 

이를 계기로 연대와 자신감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여성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타임스 업(TimesUp: 201811300여명의 할리우드 업계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단체이다. 이들은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력/성차별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걸 끝낼]시간이 됐어라는 모토를 내걸었으며,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고 관련 캠페인을 진행할 것을 공표했다_역주)’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헐리우드의 선창은 여성들을 함께 모으고, 그들이 자신들을 학대한 자들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도록 고무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성주의적 인식에서의 이 새로운 진전들 덕에 여성에게 다른, 안전한 장소로 되어가는 세상에 관해 얘기했다. 다음날엔, 5천만 명의 사람들이 이미 그녀의 비디오를 돌려본 상태였다.

 

그러나 유명인사 아지즈 안사리(Aziz Ansari: 코미디언이며 미국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도 유명했다)와의 데이트에 관해 최근에 퍼진 어떤 글은, 이에 반발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미투 운동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이 운동의 힘을 약화시킬지 혹은 강화시킬지에 관한 광범위한 논쟁을 열어젖혔다.

 

형태를 갖춰나가고 있는 새로운 여성 운동과 함께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사회주의자로서 접근하는 방법은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들 고발을 둘러싼 중요한 대화를, 어떻게 완전한 젠더 평등과 성적 자유를 쟁취할 것인지에 관한 장기적인 논의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안사리에 관한 논쟁을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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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리에 관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혼란을 유발했고, 논란을 야기했는지에 관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대부분의 여성들(그리고 여성들이 데이트하는 남성들)에게 흔한 경험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온라인 매체 <베이브(Babe)>의 한 기사에서, “그레이스(Grace)”라는 익명으로 글을 쓴 한 여성은 안사리와의 데이트를 “[그녀의]인생에서 최악의 밤이라 묘사했다. 그녀의 경험에서, 안사리는 그녀가 불쾌하며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나타내는 언어적, 비언어적 신호를 무시했다.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자신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음날 문자를 보내기 전까지 그녀는 안사리에게 그날 밤 자신이 그의 아파트에서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는지 알리지 않았다.

 

안사리는 자신의 입장 표명문에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인정했고, 자신은 그녀의 불쾌함을 몰랐으며, 만약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더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타임스 업운동에 대한 자신의 계속되는 지지를 표명하면서, 그것이 그 업계를 위한 필수적인 진전이라는 데에 동의하며 글을 마친다.

 

그레이스의 경험은 최근의 공개적인 ‘#미투의 경험들과 다르게 읽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흔히 있는 일이며, 고발당한 남성(안사리)가 여기서 여성의 편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허나 거기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재밌는 데이트라 기대한 것이 이내 끔찍한 것으로 느껴진 후에 눈물을 흘리며 집에 가곤 했던 몇몇 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상대로, 이 이야기에 대한 반응들은 언론과 소셜 미디어에서 양극으로 나뉘어졌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미투 운동이 모든 남성들을 쓸어가면서 처벌하려는 성적 공황혹은 마녀 사냥으로 치달아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다른 이들에게, 이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섹스, 동의, ,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가장 친밀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해 훨씬 거대한, 그러나 필수적인 논의를 열어젖혔다.

 

명백히, 우리 모두는 안사리가 와인스타인이나 나사르와 같지 않다는 데에 동의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적인 연쇄 범죄자(serial predator)라는 증거는 없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를 깨어있는 페미니스트의 동지로서 제시해왔다. 사실, 그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타임스 업 배지를 차고 온 걸 봤기 때문에, 그레이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도록 자극된 측면도 있다.

 

허나 시사잡지 <아틀란틱>의 캐이틀린 플래너건(Caitlin Flanagan)등의 필자들에게,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결국 본질적으론 나쁜 데이트였던 것을 “3,000 단어의 리벤지 포르노로 만들며 무고한 남성의 경력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플래너건은 그녀 세대의 여성들은 안사리의 행동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싸우거나 떠날 만큼 충분히 강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바리 웨이스(Bari Weiss)<뉴욕타임스>에서 <베이브>에 실린 그레이스의 그 글이 여성들의 권한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을 여자의 무기력함에 대한 상징으로 바꾼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안사리를 방어하는 그 글들 중 어느 것도 벌어진 일에 대한 사실에 관해 논의하거나, 심지어 그 일들에 놀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그 과정에서 동등하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여성들이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그에 잘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들은 거북한성적 경험을 성적인 공격과 등치시킴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실제로 잠재적인 동지들을 소외시키고 페미니스트가 진짜학대와 공격의 사례에 마주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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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의 자라나는 힘에 대항하여 어떤 반동이 구성되면서, 이러한 종류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어오고 있는데, 이는 전체 관련 업계나 최소한 워싱턴 D.C.의 정치권에서 힘의 토대를 변동시킬지도 모를 위협을 가한다. 페미니스트적인 모양새를 취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 주장들은 여전히 매우 뻔한 것이다.

 

우선, ‘피해자 책임전가가 있다. 만약 그녀가 내키지 않았다면, 왜 바로 떠나지 않았는가? 만약 그가 그녀의 비언어적 신호를 접수하지 않았다면, 왜 그녀는 당장 그를 따귀 때리지 않았는가? <CNN>의 애슐리 밴필드(Ashley Banfield)가 질책했듯, “당신은 유쾌하지 않은 데이트를 했고, 당신은 떠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당연히, 이는 폭력이 뒤따를지 모른다는 완전히 정당한 공포에서부터, 상대방에게 상냥하고 기분을 맞춰주도록 여성이 사회화되는 것(이 또한 어떤 점에서 생존 전략이다), 당신이 좋아하고 신뢰했던 누군가가 태연하게 그렇게 나오는 것에 대한 혼란으로 얼어버리는 것까지 - 어떤 여성이 그러한 상황에서 당장 떠날수가 없는 많은 이유들을 무시한다.

 

허나 그걸 떠나서, 어떻게 행동해야만 했는지에 관해 조언을 받는 이는 왜 단지 그레이스인가? 한 해학적인 트윗은 이러한 이중잣대(성에 관한 많은 문제에서 남자보다 여자에게 엄격하게 적용되는 도덕률을 가리키는 용례로 많이 쓰인다_역주)를 이렇게 비꼬았다. “내가 아는 전부는, 만약 아지즈 안사리가 그의 성적으로 잘못된 행위가 전국가적 뉴스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상해지자마자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녀가 문을 막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레이스가 피해자를 연기한다고 비난하는 동일한 글들은, 안사리에게 피해자 배역을 맡기는 데에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죄는 독심술사가 되지 못했던 것뿐인데도, 그의 경력은 파괴되었다고 선제적으로 표명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현대적 데이트에 관한 책을 쓰고, 자신의 작품 <마스터 오브 제로(Master of None: 안사리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성희롱과 동의에 관한 주제를 예민하게 다룬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높은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외려 알 프랑켄(Al Franken)처럼, 그의 진보적 진정성은 왜 우리가 좋은 사람들중 하나를 비판할 형편이 아닌지에 관한 이유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안사리의 행동들은 그것들이 강간의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나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투 운동을 비난하며 특히 폭력적 공격, 오싹한 행동과 단지 서투르게 껄떡거리는 시도들 사이를 분별하는 데에 대체로 무능한 여성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몇몇 이들은,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서 함께 취급하고 있다. 안사리의 행동이 결국 폭행인지 여부에 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이것이 단지 나쁜 데이트이상의 것이라는 점은 명확히 해야 한다.

 

실제로, 안사리가 부정하지 않았던 <베이브>의 기사에 따르면, 그녀가 불쾌함을 표현했을 당시엔 물러서면서, 다시 이어서 그녀를 밀어붙이며 그는 그날 저녁 내내 동의의 선을 피해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것이 폭행에 대한 법적 정의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나쁘지 않다거나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레베카 레이드(Rebecca Reid)가 썼듯,

 

당신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단지 나쁜 데이트였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숨겨야만 하는 걸 의미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다른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고소하는 일이나 소송하는 일과 무관한 어떤 대화 말이다. 그것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에 관한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게 불법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여성이 참아 내야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여성을 폐물처럼 취급한다면, 그녀가 결국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는 높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강간 피해자의 경험을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확장하고 연쇄 학대자들(serial abusers)이 작동할 수 있는 더 넓은 사회적 맥락 - 직장과 침실 모두에서 여성의 욕구와 욕망이 어김없이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 을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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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미투에 관한 논의를 그레이스와 같은 경험들을 포함시키는 데까지 확장시키는 것이 분명히 어떤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레이스에게 일어났던 것이 공격이었다면, 이제 어떤 점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적으로 공격받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가? 만약 안사리가 성적 범죄자라면, 대부분의 남성들 또한 범죄자들인가?

 

이 매우 평범한 사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논의가 안사리나 다른 개별 남성에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성차별적(sexist) 사회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그레이스가 자신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걸 믿는 것과, 안사리가 자신은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걸 믿는 것은 실로 둘 다 가능하다.

 

그레이스는 모욕감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그리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계선을 침해당했고, 당시에 매우 잘못되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녀는 안사리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했고, 그에 대한 실망은 두렵고 침통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집에 갔으며, 돌이켜 그 사건을 하나의 폭력으로 설명했다. 당신은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은 그녀의 권리이다.

 

안사리는 이러한 단절에 관해 혼란을 겪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성(sex)과 관계를 수행하는 것에 관해 배우는 개념들은 건강한 젠더 역학이 아니라 성차별주의(sexism)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상당부분은 일반적인 문화를 통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흡수된, 학교에서의 충분한 성교육으론 좀처럼 바로잡아지지 않는 성과 관계에 대한 매우 왜곡된 메시지에서 비롯하며, 더 나쁘게는, 단지 잘못된 교육인 금욕을 통해 강화된다. 데이비드 웡(David Wong)은 대중문화에서 비롯한 많은 사례들을 비평하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내가 데이트를 할 정도로 충분한 나이를 먹거나, 심지어 여성 친구들을 만나기 전부터도 그것은 아주 명백했다. 즉 어떤 관계에서든, 남성은 포식자(predators)이고, 여성은 먹잇감이다. 그들의 두려움과 거부의 표현들 - 방어적인 신체적 공격을 포함하여 - 은 내숭떨기 게임이고 마치 브라자에 붙은 교묘한 걸쇠처럼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젠더 불평등은 사회 내 구석구석 퍼진 힘의 불균형에 뿌리를 두고 있고, 자본주의의 요구들에 의해 명령받는다. 핵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여성의 부불 가사노동(unpaid domestic labor)과 노동인구에서의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정당화하는데 복무한다.

 

이윤 창출을 위한, 성을 비롯한 모든 것의 상품화는, 마케팅 전략에서 성차별주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내에서 일반적으로 소외된 조건들에 이르게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냉담한 현금 지불이라는 기반 하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를 객체로서,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응시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또한 착취자들보다 더 억압된, 따라서 더 취약한 이들을 향해 걷어 차 부서뜨리고우리의 분노와 불만을 분출시키도록 조장된다.

 

이러한 생각들은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사회를 조종하는 현실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며 - 비록 남성이 당하는 쪽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종종 덜 인식하고 있다 해도 - 대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고, 책임을 지도록 해야만 하는데, 이는 그러한 침해(offense)의 엄중함에 달려있으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널리 퍼진 문제는 또한 시스템의 차원에서 제도들, 문화와 의식에 도전하길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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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의 대다수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차별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회주류적 의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그것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려는 여성들 사이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자신감의 발전을 위한 공간을 열어 왔다.

 

우리는 비록 조직화되고 일반화 된 운동으로 아직 묶이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모든 이슈들을 둘러싸고 새로운 페미니스트 의식이 부활하는 것을 확인해왔다. 그러한 운동은 다른 많은 것들 속에서 상호 연관된 질문들 모두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질 수 있고, 만들어져야 한다. 힘있고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 직장과 캠퍼스에서의 향상된 권리와 보호를 위해 싸우기, 학교에서의 포괄적인 성교육, 미디어에서의 더 큰 대표성과 다양성 등.

 

사회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토론에 개입할 때조차 그들을 제한하기 보다는 외려 그 지평을 넓히도록 밀어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그 길의 모든 단계에서 이 운동과 연대하길 추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여성도 그들의 생계와 관계를 지키는 비용으로서 더 이상 학대와 희롱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여기서 용인될 수 있는 성적 접촉에 관한 기준(bar)강간이 아니면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당사자 모두가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경험이어야 한다.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닐 것이지만, 사라 솔매니(Sarah Solemani)는 이렇게 지적한다.

 

사회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관해 진지해져보자. 그것은 체계적이고, 전략적이며, 간결하고 깔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많은 저널리스트에 의해 맵시있게 선물되거나 법률 전문가에게 권위를 부여받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드는 현상이기에 사그라지고, 흐르며, 팽창하고, 수축한다. 그것은 거리와, 비공식적인 출판물에서 일어나며, 가장 중요하게는 집단적 상상력에 의해 동력을 얻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운동에 대한 상상력은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다. 사나운 여자(bit: 경멸조로 젊은 여성을 칭하는 구어_역주), 흥분한 여자, 이들이 운동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