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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하룬파로키 회고전 리뷰: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직시하는 방법

by 정강산 2018. 12. 9.

하룬파로키 회고전: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8, 11, 14- 2019, 2, 24) 리뷰: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직시하는 방법

 


정강산

 




 파로키의 작업이 문화산업 혹은 스펙터클에 포획된 이미지의 배면에 있는 실재를 드러내는 데에 진력해왔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69년에 제작된 <꺼지지 않는 불꽃(Inextinguishable Fire)>에서부터 그는 베트남전에 사용된 네이팜탄의 제조배경을 추적하며,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생산하는 기업 내부의 모습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산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그러한 생산에 묵묵히 참여하게 만드는 분업체계 등을 조명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팔에 약 400도 가량의 담뱃불을 지지고, 이어 그것을 3000도에 달하는 네이팜탄과 대비함으로써 전쟁이라는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고통과 잔혹함의 극한을 반추하게끔 했으며, 일상적인 작업을 통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전쟁병기를 만들어내는- 합리적으로 분절된 생산라인을 묘사함으로써 주관적인 것이 어떻게 객관에 매개되는지, 혹은 주체가 어떻게 체계에 공모하는지를 충실하게 드러냈다. 이때 특기할 만한 것은, 그 과정에서 실재는 단지 지시될 뿐, 낱낱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파로키의 작업에선 끔찍한 고통을 증언하는 전쟁피해자들의 회고와 학살의 직접적인 장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외려 그는 구조화된 폭력에 주목하여, 우리의 경험세계 앞에 놓인 사회적 체계로 인해 실재에 가닿을 수 없음을 논증함으로써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당시 파로키가 보여준 문법은 이후의 작업에도 꾸준히 그 형식을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소비자 생활의 어떤 하루(A Day in the Life of a Consumer)>(1993)는 위스키, 샴페인, 맥주, 치즈, 소시지, 자동차, 발포 비타민 등의 광고이미지를 몽타주한 것으로, 병렬된 광고 영상의 반복은 문화산업이 구축하는 이미지들이 공유하는 클리셰를 낯선 것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이미지 체계의 양태를 현전시키는 것이다. 파로키의 의도적인 배치로 인해 그것들은 끊임없이 비슷한 형태로 이어지며, 각 광고 간에 본래 존재했던 시차마저도 제거된 채 스펙터클의 과잉된 연속성을 드러내 보인다. 무한한 연쇄를 이루는 상품이미지들의 연속은 투명하게 체험되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불가능해졌음을 암시한다. 한편 상품 이미지에 관한한 그의 문제의식은 <스틸 라이프(Still Life)>(1997)를 비롯한 2000년대의 작업들에서 보다 상품 이미지들의 배면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옮겨가는데, 이러한 작업 틀 속에서 파로키는 이미지가 제작되고 생산되는 공정자체에 집중한다. 예를 들면, <스틸 라이프>에는 세련된 샴페인의 이미지가 상품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실체적 표상으로 등록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이미지 제작자들 간에 오고가는 대화들이 완성된 상품광고와 함께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이미지 제작자들- 즉 사진가와 연출가, 촬영감독은 상품을 어떤 명도와 채도로 촬영할 것인지, 촬영된 상품의 어떤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줄 것인지를 논의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도출해내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다. 촬영장의 풍경은 그다지 감성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세련되지도 않다. 그 풍경은 외려 무미건조하고 널부러져 오로지 촬영을 위해 설계된 날 것에 가깝다. 어떤 비루한 삶의 티끌도 찾을 수 없도록 완벽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공간은 편집, 절취, 자르기, 붙이기, 채색하기가 미처 개입하지 못한, 고단한 여느 산업 현장과 다를 바 없는 곳으로서 고스란히 제 속살을 내비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실재는 지시되지만, 소비자들의 경험세계에서 이미지들의 체계를 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이미지의 배면이 직접적으로 간취되지는 않는다. 이 낙차는 다만 문제적 상황으로서 조명될 따름이다.


 또한 파로키는 이미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Ceausescu)의 마지막 연설장면을 중계했던 파운드 푸티지들과 당시의 풍경을 촬영한 푸티지들을 재편집한 <혁명의 비디오그램(Videograms of a Revolution)>(1993)은 안드레이 우지카(Andrei Ujica)와 함께 제작한 것인데, 여기서는 상이한 사회적 세력 간의 투쟁이 또한 이미지들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게 주목된다. 차우세스쿠의 연설장면을 촬영하던 당시 루마니아의 관제방송은 정권에 항의하는 군중들을 촬영할 수가 없어 카메라를 하늘로 향하게 하다가, 급기야 실재를 가리기 위한 원색의 빨간 화면을 생방송에 삽입시킨다. 반면 루마니아 시민이 캠코더로 촬영한 풍경은 정확히 정반대의 상황- 분노한 군중이 거리를 가득 채운채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재현을 둘러싼 투쟁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이어 떠오르는 것은 이미지의 역학에 대한 질문들이다: 무엇이 재현되어야 하며, 무엇을 카메라 바깥에 위치시킬 것인가? 이미지들 간의 투쟁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 그러한 투쟁을 허용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러나 파로키는 단지 혁명의 주역들의 편에 서길 거부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외려 그 쟁투의 외부에서 사태를 관측할 것을 요구한다. 방송국을 점령한 시민군들은 기념촬영을 하고, 방송국을 어떤 방식으로든 구동시키고 방송을 통해 본인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그 과정에서 누가 등장할 것인지, 어떤 발언이 전파를 탈 것인지를 의논하며 적극적인 연출 및 편집과 절취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로써 파로키는 차라리 이미지의 근원적 원죄라 할법한, 이미지가 다뤄지는 방식과 조건 자체를 문제적으로 살펴본다. 그런 점에서 본 작업은 실제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순간과 연동된 클립들에 기반 하여 이미지의 헤게모니적 충돌을 통해 이미지의 윤리를 반추하는- 매우 흥미로운 매체성찰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매체성찰적인 <인터페이스(Interface)>(1995)<혁명의 비디오그램>, <꺼지지 않는 불꽃> 등을 비롯한 자신의 에세이 필름들에 주해를 달고, 비디오 편집 및 플레이 장치의 물질적 양태를 촬영한 푸티지를 함께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비디오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조건에 대한 메타적 비평을 염두에 둔 작업이다. 여기서는 비디오의 존재론적 수준에 자리하는 기호학적 층위들이 주목되며, 이미지가 편집되고 제시되는 방법들에 따라 상이해지는 의미들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적 비평이 한 축을 이룬다. 이는 환상의 배면이자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생산되는 조건 및 그 처리 방식들, 한계들을 추적하고자 하는 파로키 자신의 대주제를 충실하게 대변하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번뜩이는 유비에서 특히 그렇다: ‘필름 편집 장치를 작동시킬 때, 손끝을 돌아가는 필름 롤 위에 댐으로써 남아있는 접착제나 끊긴 부분을 감지하는데, 이때 손 자체는 필름의 작동과 별 관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통해 필름의 이상을 인지한다는 점이 나타난다. 비디오 장치를 작동시킬 때는 테이프를 만지는 일 없이 단지 버튼을 눌리면 된다. 필름과는 다른 종류지만 마찬가지로 손끝으로 하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필름의 접착상태를 확인하는 손동작이나 비디오 장치를 가볍게 조작하는 손동작은 돈을 세는 동작과 묘하게 유비된다. 양자 모두 섬세함과 정확함을 요구한다. 화폐를 통해서 본질과 현상이 얼마나 일치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즉 파로키는 그 작동이 물질성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비디오 및 필름 장치들이 실은 손끝의 동작들로 이루어진 물질적 과정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화폐를 정확하게 세기 위해 제안된 특수한 손의 감각과 유비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오늘날 이미지가 근거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을 통해 지시하며,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테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노동의 싱글 숏(Labour in a Single Shot)>(2011-2017)은 세계 각국의 16개 도시에서 촬영된 다양한 노동의 모습을 각각 2분 내에 컷 없이 제시한다. 자연사 박물관에서부터, 방직 공장, 피아노 레슨실, 주방, 길거리, 관광지의 포토존 등 수많은 장소들에서 수행되는 노동은 파노라마처럼 전시장 전체에 펼쳐져 동시적으로 상연된다. 압도적인 클립의 양으로 나타난 다양한 노동들과, 그와 함께 놓인 <리메이크-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ir Workplaces)>(2012-2014)에서 노동자들이 수많은 인파를 만들며 일제히 퇴근하는 장면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매개한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새삼스레 질문하게 한다. 왜 우리는 일하는가, 혹은 더 나아가 왜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가. 그러나 그는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서술하지 않는다. 아마 파로키가 염두에 둔 것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 각각의 개별적 노동을 매개하는 가치를 촬영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은 물리적 실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에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관계이다. 여기서 그는 구체적 노동을 촬영하는 데에 성공하는 동시에- 그들을 노동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활동으로 호명하는 사회적 관계는 괄호 속에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을 재현하는 데에 실패한다. 그러나 노동과 퇴근 장면의 교차 제시는 강렬한 낙차의 심상을 이끌어 내며, 무리를 이룬 노동자들이 암시하듯 노동이 집단적이라는 사실을, 일이 끝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나아가 노동을 수행한다는 것이 갖는 함의를 희미하게나마 지시하려 한다. 이는 비록 워크샵 형식의 프로젝트에서 도출된 클립들로 이뤄진 작업이지만, ‘무언가 생산되는 곳에 대한 파로키 특유의 관심을 가장 솔직한 형태로 보여주는 미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실재와 환상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게임을 비평하는 <평행I-IV (Parallel I-IV)>시리즈(2012-2014)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점차 복잡계와 현실을 품어가는- 그럼에도 현실과 매우 구별되는 가상현실의 발전과정을 계보학적으로 서술하는 대목이라기보다, 외려 그들이 여러 그래픽 모형들과 장치들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영상말미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파로키는 점차 평면에 머물렀던 디지털 이미지들이 원근법을 구현하며 실제 세계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화되어온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특정한 종류의 인간 노동에 의존하며, 환상과는 거리가 먼 실재의 영역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응시한다. 마우스와 단축기들을 통해 더디게 조립되는 가상현실 속, 나뭇잎, 파도, 구름 등의- 대상들과, 게임의 그래픽이 미처 포섭시키지 못한 맵 지면 아래의 텅 빈 공간, 플레이어가 통과할 수 없는 격자표시된 구역 등의공백들에 주목하며, 그는 하나의 상품으로 완성되어 나타나기 이전의 단계에서 이미지들이 겪어야하는 절취와 편집의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플레이어들이 가닿을 수 없는,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근거하고 있는 소여의 디지털 체계이다. 여기서도 실재는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환상을 산출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에 있는 한 직시할 수 없는 무엇으로서 제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좀 더 구부려 말하자면, 파로키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분석할 때 사용했던 방법론을 전유하여 그것을 이미지의 영역에서 확장시켜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연장에서 그는 이미지가 현실을 침범하며 새로운 평행우주를 개척하고 있는 현상을 낙관하지도 않지만, 윤리적으로 개탄하지도 않는다. 외려 이는 오늘날의 이미지가 처한 문제적 상황으로 조명되며, 표상과 대상, 환상과 현실의 구분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서 분석된다. 이로서 드러나는 것은 모든 환상은 실재의 끝자락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