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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동시대를 역사화하라: 배드뉴데이즈 리뷰

by 정강산 2019. 1. 23.

동시대를 역사화하라: 배드뉴데이즈 리뷰


모더니즘 이후 예술을 논함에 있어 적어도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성에 대한 예술적 관심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식 간의 갱신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요컨대 미래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양립할 수 없으며, 구축주의와 다다이즘 또한 양립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경구를 다음과 같이 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술의 역사는 양식 투쟁의 역사이다.' 이때 '양식의 투쟁'은 단순히 어떤 상이한 학파 간 기법상의 차이들 혹은 매체 상의 차이의 표지가 아니라,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공통적인 미적 어휘를 제출함으로써 형식 속에 각인된 역사화의 시도를 의미한다. 실로 역사적인 양식들은 전부 그 자신 속에 물리적 형태를 초과하는 인지적 계기를 담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다음과 같은 테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양식은 예술의 이념이다. 그런 점에서 양식은 또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각축의 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속에서 예술은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를 알았고, 누가 적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전통이기도 했고, 허위의식이기도 했으며, 아름다움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과거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에서 앞서 언급한 테제를 적용시킬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식의 붕괴, 그것의 지속과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동시대 예술' 속에서 작품은 더 이상 시간성을 기록하는 역사기술장치로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헤겔의 예술 종언 테제는 이제서야 완전히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작업의 생산은 하나의 물질화된 이념으로서의 양식의 매개를 회피한 채 이뤄지며, 아무도 시간의 증언자로서의 양식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이한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낱낱의 단독성 속에서 조명될 뿐이다. 동시대 예술의 작가들을 데리고 양식의 범주에서 기획전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오늘날 시간성을 이해하는 예술의 방식이라면, 이제 예술은 양식의 부재를 제 양식으로 삼는 쪽으로 변화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양식의 부재는 이미 동시대의 특징적인 시간을 반영하고 있다. 답보와 공회전, 무한한 변화를 가장한 정체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간 속에서 예술은 연이어 기금과 펀딩을 받아 배설되고, 트위터를 통해 명멸하는 멈출 수 없는 쳇바퀴 같은 게임에 가까운데, 그에 대한 심상은 이렇게 요약된다: 무수히 많은 작업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변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비루하게 지속되는 예술. 누군가는 양식이야 어찌되었든,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예술에서 더 이상 양식이 인지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작업이 형식 자체로서 세계를 비평하는 방법은 사라졌다는 것이고, 양식 혹은 형식을 통한 발화라는– 여타의 사회적 실천들과 구별되는 예술의 존재론적 차이를 기입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금 예술이 스스로를 역사화 하는 장치를 찾아야 한다면, 막대는 어느 방향으로 구부려져야 할까?


이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전시 <배드 뉴 데이즈>는 사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외려 심미주의적인 관심으로 충만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열어젖힌 단절의 시간성에 대한 감각과 예술적 양식의 갱신 간에 필시 어떤 인과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 속에서, 우리는 예술에 새로운 양식을 정초시키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 무엇일지 알고자 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른 시간대를 기억하기 위해 역사의 편린들을 그러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업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해준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그랬던 것처럼, 혹은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구절이 보여주 는 것처럼, 기억한다는 것은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과거를 현재의 시간으로 이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과거는 핀터레스트와 텀블러 속에서 무한 순환을 거듭하는 물화된 이미지의 모습으로, 이베이에서 거래되는 소련군모와 훈장의 형태로, 호사가들의 고풍스러운 취향을 위해 동원되는 무수히 많은 소제 중 하나로 조각조각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레닌은 힙스터의 티셔츠 속에서 영생을 얻었다.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작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역사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제 시간은 단절되고 갱신되며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영속되는, 응결되지 않는 자연처럼 나타난다. 일찍이 어떤 이가 역사적 기억 상실증(historical amnesia), 히스테리적 숭고(hysterical sublime)라 적절히 일컬었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양식을 통한 예술의 정치가 기억의 회복을 통해 가능하리라 말하는 대신, 그 불가능성을 복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전시 <배드 뉴 데이즈>를 통해 실행했던 것은 시간성을 감지 하는 작업과 미적 서사의 실패를 요란하게 시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는 극단적인 자유 속에 가려져 있는 - 빈틈없이 통제되는 신체를 직시했고, 누군가는 모든 걸 바 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건 속에서 외려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시위에 주목했으며, 또 누군가는 과학의 눈부신 성취가 말소 하에 둔 유토피아적 서사를 복기하고, 누군가는 인간이 공동으로 응시할 수 있는 대상 중 남은 것은 개기일식 정도라는 진단을 내렸으며, 다시 누군가는 동상으로 표지화 된 역사의 잔해를 새삼스레 지켜보았다. 냉소주의와 낙관적 비관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며 가동시킨 우리의 작업들은 동시대를 역사화하기 위한 새롭고 나쁜 방법이었다. 아무도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망했다고 말하며 논의를 영점으로 갈아엎는 것은 때로 가장 적확한 진술이 되기도 한다.


이제 출발점은 좋았던 옛날이 아니라 '나쁜 새로운 날(bad new days)'로 설정되었다. 우리는 오늘이 나쁘다고 감히 말한다. 이는 역사가 없는 그 자리에 바로 역사가 있다는 진술이며, 모순이 여전히 실재한다는 선언이고, 예술이 그것을 직시 하도록 할 것이라는 선전포고이다. “예술의 갱신을 위해 동시대를 역사화하라,”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다.



웹도록 링크:

https://drive.google.com/file/d/1pwvkDJ2ZKNv9VvRY-nI8ULo4F64dEPD5/view?fbclid=IwAR3CYiB968BmGSJ7jpEW1wGRx85eGkM4YRVStyforVB3tru00TKhOpJ0P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