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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탈정치의 정치화 속에서 주체화된 이들과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by 정강산 2022. 6. 7.

(2022년 6월 1일 맑스코뮤날레 콜로키움 "한국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맑스코뮤날레의 계보와 유산 그리고 미래" 토론을 위해 작성한 글)

 

 

 

탈정치의 정치화 속에서 주체화된 이들과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강산

 

 

무엇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이냐는 질문을 차치하고,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흔적 일반을 더듬어보자면-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자체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하 러시아, 일본 등 해외 유학생들에서 연원했으며, 이것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 조선노동당 등으로 이어져온 시원이 된다. 한국전쟁에 이은 분단 이후의 극도의 반공주의 하에서 그와 같이 세력화된 좌파의 명맥은 사실상 전멸에 가깝게 끊겼으나, 70-80년대의 학생운동과 더불어 서서히 다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80년대 후반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대자적인 이념형으로 맥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소련의 몰락과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 사실상 당대의 논쟁 성과는 역사적으로 해소되게 되지만, 민주노총의 좌파/중앙파/우파의 세력관계를 보든, 현재 진보정당들의 구도를 보든, 이들에 대한 입장차로 크게 갈리게 되는 학계의 경향을 보든, 큰 틀에서 보면 사구체 논쟁 당시 형성된 세력관계의 변용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후면에서 다시 언급할 테지만, 이제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분파 질서 전체가 다시금 도전받고, 재조직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무튼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수용과 변천에 관련된 연구는 많기도 할뿐더러, 심광현 선생님의 지적대로 이 자리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 마르크스주의 자장 내에 있는 한국의 정치세력의 통사를 훑기보다는 심광현 선생님이 제안하셨듯 코뮤날레 자체의 비전을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심광현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코뮤날레의 지향 전반(좌파조직의 통합에 기여, 참여계획경제론과 같은 이행 모델의 구축, 현존 억압적 국가장치-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재구성 방안 제시, 새로운 문화교육적 접근 등)에 동의하며, 다만 그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코뮤날레가 상대해야할 객관적인 조건들에 대해 운을 띄워보려 한다. 이는 심광현 선생님의 제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제가 코뮤날레에 임할 때 느껴왔던 난관과 관련된 고민 지점들이다.

심광현 선생님의 발제문을 통해 선생님의 개인사와 더불어 코뮤날레의 역사를 다시금 되짚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착찹함도 느껴졌다. 20031회 대회의 압도적인 흥행 이후, 사실상 코뮤날레의 영향력 자체는 점차 하향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선 참가자가 제가 처음으로 기억할 수 있는 2013년의 6회 대회 이후로 21년의 10회대회 까지 점차 줄어왔다. 물론 이변이 있긴 했다. 20073회 대회 때 기획된 영코뮤날레의 성과가 2017년 제 8회 대회 때 젊은 신진연구자들의 대거 합류를 만들어내는 듯싶었던 것인데, 그것은 잠깐 명멸했을 뿐 이내 각자의 조직 내지 개인으로 해산되었다.

코뮤날레의 실적 부진에 대한 토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코뮤날레 역시 전체 세계의 변화 속에 떠 있는 한 조각배로서 부지불식간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접어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모종의 이념을 지닌 조직체의 쇠락은 코뮤날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한국사회에 관한 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운동을 주창했던 비제도권의 교사들은 2010년대 이후로 점차 교육이념에 일말의 동조도 없이 세련된 교육소비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등록시키는 학부형들과의 마찰을 빚고 있다. 공동육아 운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마을 전체가 키운다는 이상이 요구하는 실천들에 품을 내줄 수 없는 부모들이 늘어나며 문을 닫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민주노총의 의식화된 간부들 사이에서는 조합원의 증가추세가 무색하리만치 점차 조합주의적인 성격이 짙어져 가는 데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있다. 전교조는 전반적인 고령화와 더불어 조합원 수가 급락하는 추세이다. 진보정당운동은 어떠한가? 지난 2020년의 총선과 올해 대선의 결과가 보여주듯 참담한 득표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변화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학생사회의 정치적 양태이다. 사실상 2013년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기점으로 한국의 역사적-변혁적 학생운동은 완전히 사멸해버렸다. 주현우씨가 철도민영화와 밀양송전탑 사태를 두고 쓴 그 대자보는 당시 학생사회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울림을 남겼지만, 이미 그 자체로 총학생회를 기반으로 한 조직적인 운동의 동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함을 반영하고 있는 징후이기도 했다. ‘이렇게 답답한데, 당신들은 잘 살고 있느냐는 것이 자보의 요체였고, 이어진 수많은 대자보들 역시 그에 심정적으로 공명할 뿐,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그것은 사구체 논쟁의 세계관에 젖줄을 대고 있던 세대의 마지막 단말마와 같은 것이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2016년의 미래라이프 신설 반대 이대 시위는 학내 민주화라는 쟁점과 겹쳐있어 미묘하지만, 그 주요 동기중 하나는 학생 자신들의 학위에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이 미칠 인플레를 우려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한 팜플렛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여성학의 산실이자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합대학인 이화에서 뷰티, 웰니스라는 산업을 '학문'으로 인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신입생들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집안 형편으로 인해 전문대졸 혹은 고졸로 업무 현장에 뛰어들어 경력을 쌓은 여성들에게 정식 대학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 이 사업의 포장된 취지입니다. (...)미래라이프 사업은 "학위장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2019년 서울대 학생들의 조국 규탄 시위는 어땠는가? 왜 학벌의 최정점에 있는 이들이 조국 전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 사태에 들고 일어났는가? 그 동기는 조국 전 장관의 자녀가 인맥을 통한 논문작성을 통해 자신에 비견될 학벌에 접근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벌 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밀려나있다(따라서 계급 재생산, 나아가 계급 사회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ISA로서의 학교라는 위상은 고려조차 될 수 없다). 양 시위에서 정치색(?)’을 암시하는 참여자들을 비롯, 운동권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구조를 보는 데에 요구되는 추상으로서의 이념을 그들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2017년부터 21년까지 진행되어온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청년세대들의 반응과 정확히 동일한 기제에서 나타난 증상이다. 공개채용을 위해 뼈빠지게’ ‘노력한 이들의 행렬에, 그만큼의 투자도 하지 않은 이들이 무임승차를 한다는 것이 그러한 반응의 골자였다. 이들은 항간에 공정성이 논의되었던 대표 사례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정성 자체가 아니다. 공정성이란 결국 스스로를 인적 자산으로 여기는 이들의 자기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적자산으로서의 자기의식 자체가, 결국 모든 이념의 소멸을 예시해준다. 그와 같은 자기의식 속에서, 모든 이념은 그 배면에 특정한 인맥과 특권을 창출하려는 음험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된 사회진보연대의 학생 조직인 전국학생행진에서의 변증법적(?) 윤석렬 지지의 논리는 그와 같은 사태가 좌파적으로 의식화된 이들에게도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었다. 위 사례들에서 보듯 학생사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붕괴되어 학생들의 경험 세계에서의 동력이 사라졌을 때, 자정과 투쟁의 정향은 자체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한 이론가의 권위에 기대어 기상천외한 논평을 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515, 연세대의 한 학생은 노조의 쟁의에서 나오는 소음으로 수업에 방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임금인상, 샤워실 설치, 정년퇴임에 이은 인원 충원을 요구하는 연세대의 청소, 경비노동자들을 형사고발하였고, 나아가 시험 기간 노조의 메가폰 소리에 입은 정신적 피해에 관해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계획까지도 밝혔다. 이 손해배상 소송을 집단적으로 제기하기 위해 그는 오픈 채팅방을 만들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거기에 동조했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경악은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87년의 이한열과 22년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의 심원한 간극에서 비롯된다.

대안교육에서 민주노총에 이르는, 앞서 지적한 이념적조직들의 연이은 쇠락과, 학생사회의 이와 같은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자신의 동물적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주체화되기를 거부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주체 즉 이념 부재의 이념으로 주체화된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완성이 아닌가? 인적 자원으로의 자기의식 속에서 동물적 삶이 정치적 삶을 잠식하고 나아가 정치적 삶을 재규정하는 것(이는 비권 학생회운동권 학생회에 대항하는 구호가 된 여느 대학의 총학 경선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것이 좌파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난관이 아닌가?

코로나 이후 과감한 재정정책들과 양적완화, 산업국유화 등을 보며, 혹은, ESG등의 신경영지표의 도입으로 자본의 생태적 조정이 준비되고 있다는 진단 하에- 신자유주의의 극복을 논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자본자유화에 따른 비정규직의 체계적 생산, 노조에 대한 공격, 주체화 양식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극복되었는가? 당장 시대정신과도 같은 공정담론은 사실상 공정한 경쟁을 그 내용으로 바, 가진 것은 노동력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신자유주의로의 동화를 완벽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은 거의 동화 속 이야기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 어떤 의미에서든 한국 맑스주의의 기원을 따져 묻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기까지 한 지경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감상이 드는 것이다.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무적으로 보는 지점은 대선시기 민중경선에 대한 논의가 좌파단위에서부터 자연스레 도입되었다는 점, 진보정당들 사이에서 이번 22년 지방선거 단일후보 결의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러한 흐름은 과거의 앙금이야 어찌되었든, 총체적으로 판을 짜지 않으면 좌파들이 공멸할 것이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생산적인 위기감의 발로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맑스코뮤날레의 향방에 대해 심광현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사항들이 실행되기 위해, 공기와도 같은 것이 된 신자유주의적 윤리에 맞서 입체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 선취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이 어떤 방식일지 제게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철저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서 이념(이행)논쟁을 되살릴 필요성을 느낀다. 이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총체적인 비전의 제출의 필요성과 관련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국 대학교에 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가 나붙은 2013년 말- 2014년 초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발생한 뒤 약 30년에 접어들 무렵의 시기이기도 하다. 즉 전투적 학생운동의 단말마를 알렸던 그 시점은 사회구성체 논쟁의 동력을 받았던 한 세대가 실제로 저무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이념논쟁은 실재의 역동 앞에서 단지 보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불가해하고 새로운 사태를 물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현 자본주의의 단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총체적인 이념을 다시 정립하는 작업이 급선무로 보인다. 이념을 잃은 세대에게 이념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이념의 설명력을 갖추는 것 외엔 방도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