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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김세은 작가론: 제 1자연의 부재를 감내하기, 제 2자연에 머무르기

by 정강산 2020. 12. 20.

<김세은 작가론: 1자연의 부재를 감내하기, 2자연에 머무르기>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선게재된 원고입니다.)



정강산



무언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그려지는 대상이 주목되고 있다는 것이고, 무언가 주목된다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야 할 것, 말해져야 할 것으로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그려진 것은 지표로서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관계한다. 달리말해,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실재를 간취하는 실천이었고, 특정한 시대를 표지해내는 흔적이었으며, 해석을 요구하는 알레고리적 행위였다.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벼려내는 작업은 그와 같은 실천을 가능케 한 실재의 지평에서 적절히 맥락화 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지진계, 혹은 세계의 무의식적 자동기술장치로서의 회화(예술)의 존재론이 그 근거를 얻는 지평은 바로 이곳이다. 그렇다면 김세은의 작업은 오늘날의 세계를 어떻게 보존하고 있을까? 그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없애가짐으로써 형식화시키고 있는가? 달리 말해, 김세은은 그 자신의 작업 내에 어떻게 실재를 각인시키고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온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 사이에 그가 경유해간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확인해야한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차도를 그린 <Park-Blueprinted>(2013), 도시 한복판의 하천에 솟은 분지를 묘사한 <Isle>(2014), 교외 포장도로와 숲의 접경지를 그린 <Nearly Forest>(2015), 우거진 녹지 사이로 보이는 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묘사한 <Facade of the woods>(2015) 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인공적인 자연, 2자연에 기입된 제1자연의 흔적에 천착해왔다. 이 시기의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종의 유사 풍경, 보다 정확히는 풍경의 불가능성 자체인데, 왜냐하면 그가 그리는 대상인 자연의 모습들은 이미 인간화된 문화적 공간에 과도하게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자연의 양태는 어떤 상태로든 인간의 환경을 지시하도록 되어있다. 마치 <Facade of the woods>에서 전면에 놓인 녹지의 윗자락을 태연하게 횡단하고 있는 포장도로처럼 말이다

일찍이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가 지적했듯, 플랑드르 회화 이후로 등장해온 역사적 풍경화는 인간이 더 이상 가닿을 수 없게 된 자연의 위상을 표지한 바 있으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분리를 예증했다.[각주:1] 달리말해, ‘풍경의 성립조건은 제2자연으로서의 근대성의 공간적 재편 자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김세은의 작업에서 풍경은 관조 가능한 대상성, 인간의 외부에 놓인 것으로서의 대상성 자체마저도 상실할 만큼 제2자연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그 어떤 심미적 외부로서도 기능하지 못한다. 이때 풍경은 잃어버린 어떤 실체가 될 수 없는, 향수를 지닐 수조차 없는, 바라보기엔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그런 풍경이다. 그런 점에서 2015년경 무렵의 김세은의 작업 전반은 풍경화 이후(post)의 풍경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나타난다. 당시 그의 작업들의 배면에서 지시되는 것, 혹은 그로 하여금 인간화된 자연의 양태에 주목하게 한 실재는, 적절한 환경규제와 조경 사업 등이 생활세계의 체계를 규정할 만큼 심화되어온- 후기근대적인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이 조건은 당연하게도 세계의 모든 지면을 문화에 내속적인 것으로 포섭해 온 외부-없음의 상태와 관련된다. 결국 그가 힘주어 가리키는 심상은 동시대에서의 자연의 위상 또는 제 1자연의 불가능성, 그 언저리를 맴돈다

이렇게 포스트-풍경화의 계보 속에서 그 전형을 변주해온 김세은의 작업 경향으로부터 일종의 비약과 단절이 발생하는 것은 대략 2016년을 기점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것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전환, 혹은 구상에서 구상적 추상으로의 전회인데, 이는 이 시기 작업이 상대하는 대상의 전환과도 상응한다. 요컨대 2016년 이후로 그는 도심내의 자연의 흔적,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자투리 공간에 대한 집중으로부터 다소 우회하여, 외려 작업의 축을 도심 복판으로 보다 깊숙하게 이동시킨다. 예를 들어 <Crack>(2016), <Leftover>(2017) 등은 명백히 도시 내부에서 일종의 기능을 갖는 시설들의 단면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대상의 부위인지는 뚜렷하지 않은데, 이는 그들의 형상이 추상에 가깝게 어그러져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유휴 주차장(<Division of Isles>(2017)), 터널(<An eye>(2018)), 역전(驛前)으로 나가는 통로(<Grab and run>(2019)), 터널의 공사 현장(<Inactivate>(2019)), 고가도로의 하부(<돌출돌기>(2020)) 등을 묘사한 작업들에서 드러나듯, 그의 작업 전반이 향하는 곳은 이른바 추상화된 공간(혹은 근대적 공간)’의 역린들이다.

말하자면 16년을 즈음하여 그가 천착하기 시작한 대상은 근대적 시간성의 경험을 주조하는 대표적인 공간들, 그러나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공간들이 지니고 있는 틈, 혹은 구성적 외부, 약한 고리들인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김세은의 단절을 우선적으로 확인한다. 1자연에 대한 제2자연의 매개에 대한 심상으로부터 제 2자연 자체의 내적 균열에 대한 심상으로의 전환이 그것인데, 프로이트의 도식을 경유하자면 이는 모종의 반동형성에 가까워 보인다. 2자연의 매개에 따른 1자연의 불가능성이란 곧 외부의 부재를 가리킨다면, 2 자연의 균열이란 내적 외부의 가능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 경향에서의 단절은 초기에 천착했던 심상에서 비롯되는 자폐감을 횡단하기 위해 어떤 가능성의 공간을 찾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요컨대 그가 지속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금, , 구멍, 균열, 터널 등은 현재 도시의 제 조건을 넘어선 어떤 가능한 외부로의 이행에 대한 알레고리로 독해될 수 있다. 도시- 혹은 근대성이 이미 품고 있는 도시/근대성의 가능한 외부를 응시하려는 알레고리적 실천으로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에 주목했던 대상으로서 , 나무, 빌딩 사이 관계의 판[각주:2]이 후기의 도시적 기능 부분들의 힘과 작용, 인과성으로 변환된 것은 임의적이지 않으며,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한편 그의 후기 작업 경향에 관한 한, 형식적인 수준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도시의 부분들이 어째서 추상에 가깝게 그려져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구상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던 초기 추상화의 지평을 초월하여 분화되어간 추상표현주의마저도 먼지가 내린 정전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회화적 장 속에서, 구상적 대상을 추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떤 유효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러나 김세은의 작업이 리얼리티를 간취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인데, 오늘날의 도시가 온전히 대상으로서 묘사될 수 있기 위해서는 애초에 경험적인 지평을 초월하여 작동하는 도시의 체계와 감각적 장 자체를 포착해야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추상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즉 김세은은 본질적인 수준에서 추상적으로 작동하는 대상을 그려내고자 한다면, 그 현상형태가 가장 구체적인 곳에서조차 추상적 소묘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하고 명증한 외관을 띤 채 구체적인 도시의 부분들 기저에서 작동하는 추상에 가닿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방법론은 지배적인 동시대적 지각(perception)이라 할 수 있는 히스테리적 숭고의 가장 온전한 표현이기도 하다. 차마 표상해낼 수 없을 만큼 파편화되고, 촘촘히 구획되며, 빠르게 순환되는 포스트모던한 도시의 제 환경에서 주체는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정박시킬 수 없게 되며, 외부 세계를 어떤 봉합 불가능한 충격으로 감각한다. 이때 주체의 표상행위 속에서 구상적 대상(object)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무언가(thing)로 전화(transformation)한다. 동시대적 환경 속에서는 더 이상 경험적으로 주어진 대상을 리얼리즘적 태도로 충실히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지하는 것- 이와 같은 구상적 추상이라 할 법한 형식이 오늘날의 도시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가장 현실적이고 적법한 방법 중 하나 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술했듯, 김세은의 작업에서 우선적으로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구상에서 구상적 추상으로, 2자연의 매개로부터 제2자연의 내적 균열으로 향하는 전회이다. 이러한 단절속에서도 유지되는 일관성은 그의 작업경향의 기저에 있는 연속성을 암시할 텐데, 그것은 제 2자연의 위상에 대한 긍정이다. 달리 말해, 김세은에게 있어 작업의 연속성은- 1자연이란 제 2자연의 분화 이후에 사후적으로 소급되어 나타나는 투사(projection)에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담담한 서술이다. 그의 작업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상실한 전일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돌아갈 곳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추상의 리얼리티를 통해, 히스테리적 숭고를 직시하며, 그것을 빚어내는 실재에 머무르기, 그러나 그 외부에서 가능한 감각을 노려보기- 어쩌면 김세은 작업의 요체는 이즈음에 있을 것이다. 마치 그의 구상적 추상으로서의 도시가, 역설적으로 추상 속에서 구상을, 상징화 시켜낼 수 없는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부터 명증한 장소와 대상을 찾도록 하는 과정 또한 요청하듯이 말이다

  1. Kenneth Clark, Landscape into Art (Boston: Beacon Press, 1961), 121-127. [본문으로]
  2. 강성은, 김세은, 이븐더넥 콜렉티브, “자주 보던 숲(갤러리 175)” 전시도록, 20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