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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뱀파이어와 좀비, 혹은 자본주의와 종말을 사유하기”에 대한 토론문

by 정강산 2023. 11. 28.

[2022 한국문화연구학회 11월 월례발표회(2022.11.15.) 토론을 위한 글]

*김형식의 뱀파이어와 좀비의 조우, 혹은 자본주의와 종말의 관계: 짐 자무쉬 영화와 맥스 브룩스의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뱀파이어와 좀비, 혹은 자본주의와 종말을 사유하기에 대한 토론문

 

 

정강산

 

 

우선 괴담이 일단 대중적인 코드로 성립하기 이전에, 그 발생론 자체에서도 자본주의의 규정을 읽어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제임슨의 표현대로, 정치적 무의식이 표현되는 최초의 순간을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문화적 대상물들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며, 그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형식의 다른 저작들에서는 그 발생론에 관한 부분이 비중있게 다뤄지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본 작업에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 본 토론문은 그와 같은 부분들을 보충하는 것으로 출발할까 한다.

 18세기 초엽 경 현재의 세르비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동남유럽 등지의 시골에서는 시신들을 꺼내 뱀파이어를 퇴치하는 관행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놓은 시체들이 죽지 않은 채로 마을에 해를 끼치고 나쁜 짓을 할 거라 생각했다. 18세기 초의 관행이 대대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일종의 괴담처럼 번져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 뱀파이어이다.

동방정교회의 세가 강했던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처럼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했던 요인을 중심으로 본다면, 뱀파이어는 신이 떠난 자리에서 죽음과 관련된 공포들을 이해함직한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신적인 질서하에서, 죽음이 영생의 피안으로 가는 수순이 아니게 되었을 때, 가축이 죽어나간다거나 마을의 좋지 않은 일들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꾸민 알 수 없는 흉계로 상징화되었던 것이다.

 투르크 제국의 영향이 보다 커 오늘날까지도 대략 60퍼센트가 무슬림인 알바니아를 기준으로 하면, 무슬림 특유의 사후세계론인 입관 전 영혼 결합설로 인해 땅에 묻혀 신앙을 시험받는다는 교리가, 근대의 전개 속에서 변형된 것일 수 있다. 무슬림적 세계관에서는 죽음과 동시에 영혼은 육체에서 빠져나가 천국과 지옥의 단편들을 체험하고, 땅에 묻히기 전에 다시 육신에 결합하여,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는 신에게 생전의 죄업을 시험받으며 그 죄과에 따라 천국 혹은 지옥에 가게 된다. 모종의 세속화 과정으로 인해 이런 순환이 의심받거나, 불순물이 끼어 변형되게 될 때, 영혼과 함께 묻힌 육신은 논리적으로 다시금 지상에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러나 저러나, 그처럼 땅에 묻힌 시체를 다시 파올려 심장에 말뚝을 박거나 입에 마늘을 쑤셔 넣어가며 뱀파이어를 퇴치하는 관행이 18세기 초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 그랬겠는가? 그것은 뱀파이어로 상징된 것이- 결국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표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점차 성장해가는 시민사회와 자본주의적 제도들로 인해 견고한 봉건적 세계가 무너져 내려갔던 유럽의 18세기는 계몽의 세기였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혼란과 실존적 위협이 대두된 세기이기도 했다. 그 세기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신이 죽은 이후의 세계에서 가능한 사유 방식, 가능한 도덕적 행위의 토대를 찾고자 했던 것이 칸트 기획의 요체였다. 근대의 제 문제를 칸트와 같은 방식으로 벼려내고 반성할 기회가 있던 사람들이 있던 반면에, 그것을 해명하지 못한 채 적절히 물화된 형상을 찾아야만 했던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뱀파이어는 그렇게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뱀파이어가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의 변방에 있었던 동남유럽에서 시작되었던 것도 설명 가능하다. 이 지역들은 유럽 내부에서도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발전이 느렸던 곳이기에, 이곳의 민중들은 변화된 세계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고 이성적으로 반성하기보다는, 음험하게 자신의 삶을 알 수 없는 힘으로 위협하는 실체를 다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상징적 상징화의 기회에서 밀려나있던 이들이 그와 같은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상상적 상징화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18세기 초 해당 지역의 관습이 유럽 전역에서 보도되자마자, 문화적 관행을 뛰어넘어 하나의 서사로서 뱀파이어가 유럽등지를 휩쓸 수 있던 것도 설명이 된다. 대중적 수준에서 느끼고 있던, 냉혹한 시민사회에서의 막연한 삶의 공포와 시대적 문제들이 뱀파이어라는 인격화된 대상으로 투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뱀파이어는 그 시대의 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뱀파이어의 모습은 초기에 동남유럽에서 상상된 것과 같은 거무스름하고 어두운 피부톤에 몸 전체가 부어있는 형상에서, 점차 깔끔하고 매력적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형상으로 변모해간다. 그와 같은 변용을

 처음으로 표방한 것이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의 소설 <뱀파이어(The Vampyre)>(1819)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뱀파이어는 김형식이 주목하고 있는 바의 계급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보다 신사이며, 외관상 멀끔하고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흡혈에 대한 본능으로 요동치는 두려운 욕망이 있다. 따라서 뱀파이어가 가져다주는 공포의 실체를 자본주의에서 찾는 것, 그리고 부르주아적 세계의 등장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 대중화된 뱀파이어의 모습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매력적인 알레고리이다. 뱀파이어가 한동안 영향력 있게 소구되며 대중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와 같은 고전적 부르주아의 형상에 대한 기묘한 경계심과 미지의 공포가 있다. 따라서 엥겔스가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1845)에서 채택한 뒤로, 뱀파이어는 마르크스가 지속적으로 수용한 은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형상은 고전적이다. 김형식이 하듯, 동시대의 여러 문화적 작업들에서 생산되고 있는 뱀파이어의 형상에서 곧바로 오늘날의 자본가를 읽어내는 것은 다소 초월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다는 인상을 준다. 대중들은 자본가들에게서 더 이상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동시대에서 그들은 친근한 이웃이자 선량한 인간, 나아가 존경받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빌게이츠를, 또는 스티브잡스를, 혹은 일론 머스크를, 그도 아니라면 마크 주커버그를 두려워하겠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연이 될 때, 자본가 역시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뱀파이어는 이미 오래 전에 시효를 다한 과거의 상징일 뿐이다.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뱀파이어의 전성기는 사실상 존 폴리도리의 1819년 작업 이후로 약 100여년을 거쳐, 최초의 장편 뱀파이어 영화였던, 무르나우(F. W. Murnau)<노스페라투>(1922)를 기점으로 끝난다고 봐도 좋다. 20세기 초엽은 이미 제국주의 전쟁을 추동한 독점자본주의의 정점으로서, 부르주아적 사회관계 및 부르주아지의 형상이 어떤 이질감도 없이 대중적으로 소화되던 때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점에서, 최소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을 기준으로 하면, ‘뱀파이어는 현실의 모순과 공포들이 투사되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가 은유적으로 세간에서 통용되는 바의 뱀파이어적속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적으로 동시대의 공포, 정념, 모순이 투사되는 문화적 우세종이 뱀파이어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와 같은 우세종은, 지역별로 상이할 수밖에 없다. 북미라면 랩틸리언일 수도 있고, 일본과 한국의 경우 빨간마스크일 수도 있고, 팔척귀신일 수도 있고, 장산범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들 각각은 고유한 방식으로 동시대의 사회적 공포들을 응축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향력 있게 소비되는 상상적 상징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뱀파이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근과거의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히트에서 볼 수 있듯, 혹은 각종 서브컬쳐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캐릭터 데이터베이스로서 호출되는 뱀파이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이 동시대에 특유한 역사적 공포를 날것 그대로 받아 안는 대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와 같은 뱀파이어 소비에 관한 한, 정념의 투사라기보다는 유럽; 서구의 문화에 경로 의존적인 수용이 보다 부각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김형식의 연구 대상과 방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작업을 한다면,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일본과 한국에서 하나의 컬트이자 사회적 현상이 되었던 빨간마스크에 관한 분석(이에 대한 여러 2차 창작물들의 깊이와 버전은 어마어마하다), 혹은 현재 여러 음모론들과 결합하여 북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랩틸리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적대는 결국 다기한 사회구성체를 경유하여 상상적 해소에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이는 느슨한 제언으로 남겨두고, 이하로는 우선 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쥔 형상이 좀비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전개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좀비는 어떤가? 아시다시피 좀비의 최초 모티프는 아이티의 부두술과 관련된 민담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19세기 초 최초로 관측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좀비는 이미 아이티에서 만개하여 18세기 전반에 걸쳐 아이티를 비롯한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전되어온 문화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시기적으로는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 지역의 관습과 더불어 나타난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부르주아 세계의 공포에 대한 식민지에서의 그 대응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좀비는 그 발생론적 수준에서는 민족적 알레고리로 독해 가능하다. 당시 좀비는 주술사의 강령술에 의해 되살아난 죽은 사람으로서, 정신은 죽어있지만 맹목적으로 주술사의 명령에 따르게 되는 시체였다. 아이티를 비롯한 인근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중들은 좀비가 되길 두려워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그들이 마주한 자본주의적 세계에 대한 역설적인 공포였다. 그들은 노예로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삶에 대한 공포와, 시체가 된 자들마저도 가혹하게 부리는 노예주들에 대한 정념을 좀비라는 형상물로 만들어 이해할 만한 것으로 벼려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좀비는 자본주의 초기에 만개한 노예제도 및 제1세계와 제3세계 간 모순의 반영이다. 그 현실적 조건은 역시 프랑스에 의한 강점(1697-1804)과 통치에 더불어, 아이티의 무장 독립 운동시 발생한 피해를 빌미로 프랑스에 의해 청구된 살인적인 수준의 배상금으로 인해 해방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예와도 같은 삶을 이어나가야 했던 역사적 실재가 있는 것이다. 영혼마저 식민화될지 모른다는 공포야말로 최초의 좀비의 모습을 만들어낸 규정적 계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주술의 섬(The Magic Island)>(1929)에 의해 영미에 소개된 뒤, 빅터 핼퍼린(Victor Halperin)에 의해 <백인 좀비(White Zombie>(1932)로 만들어진 후,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1968)을 거쳐, 대중문화를 통해 폭발적으로 재생산되며 대중의 공포와 정념이 투사되는 대상으로 성립해나갔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좀비가 대강 1960년대 말 이후로 폭발적인 각광을 받으며 성장해 온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미를 중심으로 점차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더불어, 그 이데올로기 소(ideological factor)로서 소비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시기이다.

 왜 60년대를 기점으로 좀비는 매력적이고, 사회적으로 소구되는 대상이 되었을까? 혹은 영혼이 없거나, 점차 맹목적인 분노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재구성되는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신자유주의 및 소비주의가 모든 이들을 그 개체의 내면에서부터 물화(reification)시켜, 철저히 서로를 견딜 수 없는, 혐오스러운, 끔찍한 타자로 현상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계발의 윤리와 더불어, 성과주의적, 자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편재하게 했으며, 노동자들은 점차 서로를 적대시하고(원청은 하청에,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국내 노동자는 이민 노동자들에게 등등), 스스로를 경쟁하는 인적자본으로 여기게 되며- 어떤 가능한 연대의 조건도 짓이겨버리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목적도 방향도 없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펼쳐지는 산지옥의 형상으로서, 여기서 인간들은 서로에게 이미 무차별적인 적이다. 좀비는 바로 이와 같은 세계에서의 실존적인 공포가 투사되는 대상으로 성립한다. 예외도 있으나 대체로 좀비는 영혼이 없다는 것이, 그 기원에서나 현재 대중문화를 통해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모습에서나 공통된 특징이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높은 안목과 지위, 세련됨을 갖췄으나 피에의 욕망을 숨기고 있는 뱀파이어와 달리, 좀비는 그 인적 구성이 평준화되어 있다. 즉 좀비는 자아가 없고, 맹목적으로 눈앞의 인간들을 먹어치우는, 내 곁의 존재이다.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좀비로 변함으로써 겪게 되는 에피소드는 숱한 좀비물의 공통된 레퍼토리이다. (evil), 혹은 적(enemy)은 이제 고전적인 뱀파이어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우리와 다른 세계의 행위자가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언제 어디서 돌변하여 튀어나올지 모르는 만인이다. 내 동료, 내 이웃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비롯되는 고립감이야말로, 현재의 좀비 서사를 구성하는 핵심 동력이다. 그래서 좀비를 다루는 숱한 문화적 재현물들은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꾸려진 소규모의 자폐적인 공동체를 상정한다.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유일하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을- 좀비는 그런 방식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와 좀비는 그 기원상 비슷한 시기에, 그러나 각각 동남유럽과 중앙아프리카라는 다른 공간에서 등장했으나, 그것은 양자 모두 자본주의적 혼란과 모순에서 명확히 상징화되지 않은 것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방식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도식화로 더 나아가보자면, 자유경쟁자본주의 시기 전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쥔 괴담의 형식이 뱀파이어였다면, 후기자본주의 시기 그것은 좀비에 의해 대체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 각각을 11의 대응 관계로서, 공시적으로 특정한 계급에 귀속되는 실체라기보다는(김형식은 뱀파이어를 부르주아에, 좀비를 프롤레타리아에 대입한다)- 역사적으로 부상하여 대중의 정념과 공포가 투사될 시기를 갖는, 시대적인 공포의 심상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그와 같은 상상적 상징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며, 대중의 공포와 정념이 투사되는 대상으로 성립하는 것이 다만 서사의 차원에서 그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와 같은 상상적 상징은 때론 위험하다. 상상적 상징화의 방식은 예술적 승화와, 배타적인, 물화된 적대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기 때문이다. 당장 뱀파이어라는 형상 자체가 18세기 초 동남유럽 등지에서 집단 히스테리 증상으로 문제가 되며 유럽 전역으로 폭발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만연한 뱀파이어 처단의 실천으로 인해, 지역주민들 전체가 신경쇠약에 빠져 서로를 의심하고 죽이던 사태가 있었고, 그와 같은 충격적인 실제 사건들이 그 괴담의 전파에 있어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일대에서 21세기 현재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마녀사냥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20세기 후반기 전체에 걸쳐, 21세기 초엽에까지 탄자니아에서 발생했던 마녀 사냥은 그 규모가 엄청나,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대략 60,000명이 죽어나갔고,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3,000여명이 죽어나갔다. 이때 마녀의 형상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국제 및 국내 질서에 대한 전치된 대응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와 같은 적대의 상상적 해소는 사실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북미지역의 랩틸리언과 관련하여, 이미 번듯한 가장이 자신의 자식들을 죽이고, 그에 대해 랩틸리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거나, 마찬가지로 인류를 위해 랩틸리언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린치하거나, 폭탄테러를 하는 등 어마어마한 사태들이 동반되고 있다. 운이 그나마 좋을 때는 뱀파이어이고, 좀비이고, 혹은 빨간마스크이고, 랩틸리언이지만, 역사의 운이 좋지 않을 때 그것은 유대인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현재 북미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듯, ‘아시아인으로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각각의 문화 내에서 물화된 괴물의 형상이, 중립적인 시대적 표징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재의 여러 모순들과 첨예하게 맞물려있는 직접적인 표현이라 할 때, 종말에 탐닉하는 것, 혹은 종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좀 더 토론이 필요한 지점인 거 같다. 달리말해 종말을 상상하기라는 제목이 가져다주는 함의와, 김형식이 이전 저작들에서 개진한 바와 같은, 종말론적 형상물들에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는 대목에서는, 가능한 미래에 대한 세속적인 변증법적 청사진을 그릴 여지가 없다고 느껴진다. 더불어 그렇게 각각의 문화를 경유해 전치되는 적대의 형상들이 특정한 괴물의 모습으로 집약되는 것을 다소는 관조적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대목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동시대의 문화적 작업들에서 종말이 두드러지게 관측된다면, 그것은 위태롭고 위험한 하나의 현상이자 증상으로서 분석되어야 할 문제지, 어떤 대단한 해방적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