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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국가를 역사화하기: 사회 계약에서 생명정치까지

by 정강산 2021. 4. 22.

(<옵.신> 9호에 선게재된 글입니다. 인용은 출판물을 참고하셔요-)

 

 

국가를 역사화하기: 사회 계약에서 생명정치까지

 

정강산

 

국가는 사회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자체의 모순을 갖고 있으며,

해소될 수 없고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자백이다.”

-F. 엥겔스

 

 

1. 들어가며: 다시 국가를 생각한다

 

 최근 미국 대선을 둘러싸고 다시금 국가론을 독해하는 흐름이 불거져 나왔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버니 샌더스가 집권했을 때에 좌파가 전유할 수 있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의 경계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후퇴했던 국가의 기능들이 코로나19의 확산 이후 과감한 재정 지출과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국유화를 통해 대대적으로 복구되는 듯한 국면은 국가의 역할과 그 한계를 다시금 주목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치 위기의 시기에, 혹은 축적 구조 이행의 시기에 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해서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형태, 기능은 자본주의와 어떤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동안 국가의 위상에 대해 주목할 만한 여러 연구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결론은 잠정적인 수준에서라도 합의된 바가 없다. 한때 논의가 치열했던 것과 별개로, 현재의 맥락에서 이는 부분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국가가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자연으로 나타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국가 소멸 테제와 같은 것은 이제 진지한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며,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의 공간이 국가 장치 내부에 있으리라는 전제는 이제 공기와도 같은 것이 되어 국가는 더 이상 유의미한 분석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란 자본가 계급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도구주의와, 정치를 사회의 제 관계들로부터 떨어져 실체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험주의적 정치주의의 평행선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주어진 자연적 실체가 아니다. 어째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내에서 통치의 형식은, 그것이 느슨한 씨족 공동체일 수도, 종교 공동체일 수도 왕조 국가일 수도, 제국일 수도, 도시 연맹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형태로 나타나는가? 즉 자본주의의 국가는 왜 하필이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상기한 맥락 위에서, 이 글은 다시금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국가의 위상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실재의 여러 층위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력의 외연을 넓히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참조되는 것은 소위 권력의 일반 이론을 제시했다고 간주되는 푸코의 작업이 될 것이다. 정치의 작동을 얘기해 온 여러 논자들 중 특별히 푸코를 상대하는 까닭은, 그가 제시한 근대의 국가가 수행하는 근대 정치의 특징으로서의 생명정치가 그 자체 생산 양식과 별도의 역학 속에서 설명되어 온 유력한, 그러나 자율적인 정치이론이라는 점, 그가 주목한 생명을 관리하는 실천과 전략의 총체로서의 생명정치가 자본주의의 내적 요구를 현상학적 수준에서 잘 파악하고 있기에, 그 맥락이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서 보정된다면 보다 수월하게 국가와 자본의 관계 및 자본주의 내에서의 국가의 기능에 대한 일원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2. 국가와 자본주의, 혹은 정치와 경제?: 근대 국민국가의 축으로서의 사회 계약과 언어

 

 생산이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삼척동자도 안다고 말했던 마르크스를 따라, 국가가 정지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국가가 멈추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간단한 사고 실험을 통해서도 국가가 법을 통하여 강제하고 보장하는 사유 재산 제도와 현재의 생산관계가 매 순간 관철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가능해지며, 자본 관계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생산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계쟁들을 처리할 국가의 보장이 없을 때, 세계 도처의 작업장과 일상적 공간들에서 벌어질 소요에 관해 생각해 보라. 이미 국가에 대한 공공선(common good) 이론 자체가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의 대두에서 근대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된다는 점을 (형식적으로는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시인하고 있다. 공공선 이론의 핵심은 개개인의 물질 소유에 대한 욕구로 인한 무질서와 열정이 사회 계약 및 국가, 주권의 양도를 가능케 하며, 이렇게 성립된 국가의 질서는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을 천명한 공공선 이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 상태에서 사회 계약의 근간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홉스, 로크 등의 정치사상에서 대표적으로 찾아질 수 있다. 그들에게 물질 소유에 대한 욕구란 일종의 소여이고, ‘자연 상태는 무질서와 동일시되며 이는 주권적 국가가 요청되는 논리적 전거가 되는데, 이때 이러한 무질서에 대한 이념 자체가 시민 사회, 시장 질서와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어째서 홉스와 로크에게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혹은 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나타났을까? 어떤 법과 공동의 습속으로부터도 벗어나 물질적 재화들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으로 전제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투쟁을 준비하는 인간의 무리는 어떻게 자연적인 것으로서 드러났을까? 여기서 홉스와 로크가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제시하는 공동성과 집단적 삶의 부재라는 극단적인 상황은 실은 그들의 창의적인 가정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들이 활동했던 17세기의 잉글랜드 왕국에 도래해 있던 실재의 단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6세기 중반부터 노예 무역을 시작한 잉글랜드는 일찍이 13세기부터 진행되어 온 인클로저가 점차 심화되는 지역이자[각주:1], 이미 선대 제도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를 도입한 바 있으며, 17세기 말 점차 상부 구조들을 제국적으로 재편하며 이어 산업 혁명이 태동한 지역으로 거듭날 만큼 성공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초 축적을 이뤄낸 장소로서, 주권의 범주에 포섭되길 미묘하게 거부하는 도시적, 자본주의적 영역으로서의 시민 사회가 일찍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각주:2] 이는 소위 의회 민주주의’, 근대적 부르주아 의회를 가동시키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변곡점이 되었던 1688년의 명예혁명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명된다. 즉 그들의 시야에서 시민 사회의 등장 이전의 유기적인 집단적 삶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고, 이런저런 물질적 욕구를 지닌 채 대립하는 개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회 계약론자들의 회의주의에 깊이 흔적을 남겼으며 그들의 방법론[각주:3]과 테제를 조형해 내기에 이른다. 이런 측면에서 공공선으로서의 국가를 조명하는 정치 이론 자체는 실정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지만, 시초 축적 단계의 초기 자본주의는 그들의 작업 전체에 걸쳐 어른거리고 있다.[각주:4] , 공공선 이론가들이 제출하게 되는 실정적인 정치 영역에 대한 이론은 이미 자신을 초과하는 실재, 즉 특정한 자본 축적 과정에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정치이론의 기원을 역사화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 내에서 국가의 자리를 사고하고자 했던 여러 시도들을 평가하고, 새롭게 위치 지을 수 있는 유용한 준거점이 될 수 있다.[각주:5] 그것은 국가의 자율성이 암묵적으로 기대고 있는 초월 불가능한 실재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가치 및 이윤 원리에 매개되기 시작한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것으로, 홉스를 비롯한 초기 정치 철학자들은 정치의 공간을 실체화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성립의 논리적 당위를 설정함에 있어 이미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그들의 무의식으로 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정치를 자본주의 생산 양식 속에서 새롭게 맥락화하는 시도로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사회 계약은 허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하에서 객관적으로 타당한) 참이다. ‘시민 사회의 다른 표현으로서의 무질서한 자연 상태는 공공선을 위해 통제되고 조절되어야 할 정치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는 시민 사회라는 자율화되어 가는 영역을 적절히 다루고, 계측하고, 관리하는 단위로서 요청되게 된다. 가정과 작업장의 분리가 자본주의의 특징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로서의 시민 사회에 조응하는 정치적 범주로서의 근대 국민국가가 서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뚜렷이 분리되는, 정치와 경제의 자본주의적 분할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각주:6] 자본주의가 바로 이와 같은 분할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망각한 채, 각 영역이 자율적으로 현상하는 그 표층에만 주목할 경우 우리는 독자적이고 실정적인 영역으로서 경제()’정치()’라는 별개의 범주를 갖게 되나, 이는 경제와 정치가 자본주의적 총체성 내에서 모순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는 물화된 사고로 귀결된다.[각주:7]

 더불어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정치를 가동시키기 위해 문화의 제 영역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피기 좋은 사례는 언어일 것이다. 적잖은 현대 유럽어는 자본주의적 발전에 맞춰 성립되었다. 예컨대 16세기 루터의 종교 개혁을 통해 라틴어로 된 성경이 중동부와 상부 독일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력을 일반 언어를 통해 세속화, 평준화시키는 과정이었고, 이는 수많은 독일어 방언의 각축 사이에서 고지 독일어(High German)를 오늘날 독일의 표준어로 삼는 계기가 된다.[각주:8] 이러한 일반 표준어의 성립은 그 자체로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에서 전개된 인간의 균질화 작업의 예비 작업에 가까운데, 인권 선언이 인간 권리의 보편성을 천명하며 앙시앵 레짐에 대한 부르주아적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면, 루터의 성경은 그에 앞서 언어의 보편성을 천명함으로써 특권적 언어라는 앙시앵 레짐의 강한 고리를 타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편성의 실행이 ‘(근대적) 국민의 동일성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기획된 언어의 단일화 및 도량형의 통일에서 또한 극적으로 드러난다. 자코뱅은 집권과 동시에 언어를 통일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켈트어와 로망스어, 라틴어 등의 여러 어족으로 나뉘어 있던 다양한 프랑스어를 베르사유 궁정의 언어이기도 했던 파리 지역의 언어로 통일시켰다.[각주:9] 이어 그들은 지구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척도를 설정한 미터(metre)법을 재정하여, 그 객관성과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이내 전 세계가 채택하게 될 도량형을 제안하기에 이른다.[각주:10]

 근대의 여명기에, 어째서 언어와 도량형은 통일되어야 했을까? 이는 앙시앵 레짐을 청산하고 정치의 영역을 정비하며, 부르주아적 세력 관계의 우위를 관철하기 위한 시도와 관련된다. 지방의 장원 및 영지마다 사용하고 있었던 각이한 도량과 방언들은 인격적 예속에 근거한 봉건적 잔재의 온상이었고, 이를 척결하기 위해 다양한 권역의 봉건제와 구습을 계량화하고 동질화할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적 통일성과 언어적 통일성 사이의 내적 연관은 바로 이 지점에 자리한다. 달리 말해, 가용한 노동 인구의 원활한 보급과 상이한 산업 부문들의 상호적 결속의 과정에서 언어적 단일화와 도량형 통일에의 요구가 있다. 더불어 원활한 자본 축적을 보조하고, 자본 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국가는 중앙 집권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일정한 권역 내의 총체성과 보편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적 생산의 관철 및 통일적인 사회 재생산을 위한 총체성/보편성.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프랑스에서 표명된 언어와 도량형의 통일은 그 자체 자본의 운동을 예비하며, 각 지역의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길드, 수도원, 교회, 자치 도시 등으로 분산된 권력을 회수하여 중앙 집권적 행정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각 사회마다 정도와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각주:11], 대략 이와 같은 모델을 거쳐 이뤄진 앙시앵 레짐의 청산 이후 통일된 지평 내에서, 집합적 덩어리로서의 인간은 신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국민국가의 대상으로서의 국민으로 호명되게 된다. 이는 언어(국어) 및 역사(국사)에 대한 의무적인 교육과 더불어, 단일한 도량형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동질성과 함께 체계적인 정책과 제도들을 통한 통일적인 국가적 문화를 성립시키는 것과 함께 이뤄진다.[각주:12] 여기서 일종의 범주로서의 국민은, 마치 자본가와 노동자가 경제라는 표층에서 인격화된 군상이듯, 물화된 정치영역에 자리하는 표층의 단위이자, 필연적인 가상이다. 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범주로서의 국민은 오늘날 국가의 작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의 정책적, 기술적(technical) 측면이 바로 푸코가 분석한 바 있는 인구이기 때문이다.

 

 

3. 인구의 거울상으로서의 국민, 재생산의 담지자로서의 국가

 

 이런 견지에서, 본 절에서는 푸코 국가론의 핵심적인 대상, 즉 인구와 생명정치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전제되는 것은 일찍이 독일의 국가 도출 논쟁을 통해 드러난 접근으로서, 국가의 형태와 그 전개를 분석함에 있어 결정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자본 축적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각주:13]

 푸코에 따르면 인구(population)는 직접적으로 주권의 명령이 적용되는 신민과 같이 주권자의 행위가 미치는 어떤 물체, 주권자와 마주하고 있는 물체가 아니[각주:14], 그와 직접적으로 관계하지는 않는 계산, 분석, 고찰 등을 통해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들로서 가닿을 수 있는 어떤 단위이다. 또한 인구는 욕망을 지닌 것으로 가정되는 소여인데, 이때 욕망은 억압되거나 금지되는 것이라기보다 장려되고 조절되며 적절히 배치되어야 할 자연에 가까운 것으로 조명된다. 인구에 관한 한 이 욕망의 자연성과 자생성은 결정적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소여야말로 시민 사회 내부에서 스스로 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행위하는 개인 혹은 부르주아 주체의 등장을 표지하며, 홉스와 로크를 비롯한 사회 계약론자들이 국가를 요청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 푸코는 인구에 대한 통치를 주문하는 식의 사유가 프랑수아 케네를 비롯하여 18세기 중농주의자들의 작업에서 정제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각주:15] 그들은 통화의 흐름에 대한 조절, 수출과 수입에 대한 조절과 같은 세심한 통치의 기예를 작동시킴에 있어 언제나 인구를 염두에 두었다. 그에 따르면 인구는 이런저런 상이한 환경 속에 놓인 법 권리적 주체와 구별되며, 근대의 권력으로서 통치성이 상대하는 대상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권력이 행사되는 완전히 새로운 단위의 발생이자, 권력 형태의 점진적이지만 대대적인 전환이다. , 인구란 근대국가가 인간을 상상하는 독특한 종류의 인식이자 단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구를 축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군주의 군림이 아닌,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바의 근대국가의 생명정치로서, 이러한 정치적 전환하에서 인간은 생명체의 집적으로 현상하게 되고, 권력은 생명으로 환원된 어떤 추상적인 인간의 집합을 표적으로 삼게 된다. 인구의 출현은 바로 그에 조응하는 (푸코가 안전장치라 부른 바의) 근대적 국가 장치의 부상을 암시하며, 이는 곧 자본주의에 종별적인 생산과 재생산의 분화를 예증한다. 푸코는 사회 재생산 기능에 국가의 역할을 할당하는 것에 비판적이었고,[각주:16] 따라서 인구의 위상과 의미를 생산 양식이라는 범주 내에서 철저히 역사화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인구라는 대상을 정치 경제학적 지식을 통하여 안전장치라는 수단으로 통치하는 정치의 출현으로서 그의 생명정치론의 실체는 결국 재생산에 대한 자본의 요구로서 파악되지 않으면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푸코의 생명정치가 마르크스의 추상 노동을 축으로 맥락화될 경우, 그것은 그동안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국가의 역할을 생산적으로 규명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구에 대한 이론적 정립 내지 인구에 대한 전례 없는 고찰이 국민국가의 형성기였던 17-18세기에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구란 그 자체 모종의 총체성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이는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전근대적 신분제와 인구가 양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범주 속에서 인간은 여러 구체적인 특성들을 소거당한 채, 생명을 가진 개체로서 환원되며, 투명하게 계측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인구의 특징은 사망률표, 출생률표, 출산율표 등 당대 관료들의 보고서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인구가 성립되는 과정은 현실의 여러 각이한 인간들이 국민이라는 총체적인 기표하에 호명되는 과정과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어떤 인구의 소속을 명확히 하는 데에 있어 국민이라는 대상은 필수적이고, 이어 국가의 영토에 대한 체계적 파악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 인구에 대한 파악은 그 본질상 인구를 일정한 권역 내에 정착시켜, 해당 인구가 산개해 있는 특정한 권역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다: 달리 말해 인구를 구체적으로 작동 가능한 이념으로 다듬어 내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국가와 국민이라는 항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 성립된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유럽에서 형성된 최초의 국제법으로서, 각국의 법적 동등함과 침범 불가한 내정권, 국가들 사이의 지리적 경계를 명시했다. 국가 간 권역을 명확히 성문화하는 법이 17세기 중엽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조약이 성립되기 이전까지는 국제라고 할 법한 국가 간의 체계적인 권역이 나뉘지 않았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정치를 인구의 조절과 배치에 가까운 것으로 상상하기 시작한 중상주의자들의 작업이 이 조약과 동시기 17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영토에 대한 구획, 국가적 단위의 분화, 국민과 인구의 부상이 동시에 전면화되고 있는 어떤 분수령이다. 여기서 가시화된 국가 간 체계는 동시기 중상주의의 ‘(국가에 의한) 무역 독점에 대한 요구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는 바, 중상주의의 이념은 식민지에 대한 개척과 의 집중적인 권역을 확립하기 위해 화폐의 흐름을 국가적 영토 내부로 제한해야 했고, 따라서 국가영토의 구획을 명확히 해야만 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 위에서 성립된 것으로, 역사상 가장 뚜렷한 형태로 등장한 (국민국가 간의) 국가 체계를 등장시키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모더니티의 한 중대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적 상부 구조의 맹아의 발생이자, 시초 축적 시기의 자본주의에서 재생산 영역(및 그 총괄자로서의 국가와 그 내용)이 분화되어 가는 과정 자체인 것이다.[각주:17]

 이것은 자본주의적 물화의 과정이라 할 법한 것으로, 경제와 정치가 여타의 사회적 삶과 독립된 별도의 단위로 성립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혹은 근대 국민국가의 출현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작인은 이윤 원리 혹은 이윤율의 성립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내적 분할을 허용할 만큼의 방대한 인간의 집적을 요구하며, 이는 곧 인구라는 생명의 집합적 단위와 그를 매개할 국민국가에 대한 요청으로 가시화된다. 여기서 국민-인구에 대한 고려는 생산성을 일정 규모로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획득되는 잉여 가치의 크기에 결정적이며, 사적 자본들의 각축에 따른 무정부성과 사회의 공백을 해소하고 이완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다. 즉 그것은 재생산 영역 전반에 투여될 세수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고, 노동력의 절대적이고 안정적인 확충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인구의 부, 수명, 건강 등을 증진시키는 것[각주:18]을 목표로 하여, 다양한 안전장치들을 통해 출산, 보육, 교육, 보건 등에 개입함으로써 일국 내 총자본의 크고 작은 위기를 돌파하는 데에 기여하는 재생산 장치의 총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가 자율적인 단위로서 나타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조건들과, 그 축으로서의 이윤율이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의 총체로 환원된 인간의 집합으로서 인구를 대상으로 갖는 생명정치의 내용이란 사적 자본이 지닌 결여와 공백을 보완하고, 사적 자본의 운동을 안정적으로 완성시켜 내는 재생산 기능으로 수렴한다.[각주:19]

 달리 말해, 인간들의 총체적 삶의 연관 체계로서의 사회로부터 분리된, 사회를 대상으로 갖는 국민국가(특유의 중앙 집권적 구조를 통해 국민과 영토 및 인구 조절 관리에 관여하는)의 출현은, 정확히 자본 관계의 빈 부분에 대한 보충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국가의 형식이 자본주의의 존속 가능한 재생산을 보충하기 위해서, (시민) 사회 제반을 관리하는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푸코의 현상학적 관찰을 지탱하는 배면을 마주한다. ,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전근대의 군주적 권력과 달리 근대 국가는 살게 하고죽게 내버려 둔다는 표현으로 푸코가 포착하고자 했던 통치의 실체는 우연히 그러한 모습을 취하게 된 것이 아니다.[각주:20] 푸코가 주목한 통치성의 전환, 생명정치는 사적 자본의 기능 조건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인구 개개의 삶의 재생산에의 요구가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며, 이는 자본의 제 요구로부터 다소간 자율화된 국가의 모습 및 형태의 중핵을 이룬다. 그런 한에서 푸코가 찾은 것은 아감벤과 같은 논자들이 오해하듯, 새로운 정치의 이론, 자율화된 권력의 체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재생산 체계의 단면이다.[각주:21] 근본적으로 이윤 원리에 추동된 개별 자본들의 각축과 경쟁, 분업에 따라 복잡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간 각 개체의 삶, 재생산을 책임질 수 없기에, 그 결여의 보충물로서 강력한 재생산 단위를 요청하며, 오늘날의 국민국가-사회와 인구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국가 형태를 규정해 내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국민국가의 소명은 (자본에 매개된) 사회의 재생산이며, 생산에서의 분업과 기아, 도농 격차, 산업 재해 등의 경쟁의 효과를 자동적으로 처리하려 진력한다. 추상화된 관리의 단위로서 인구는 총체적인 재생산을 위해 필연적인 단위가 된다. 이렇게 발명된 인간에 대한 국가의 상상 및 정책과 통제의 작동이 이른바 생명정치의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정치는 이윤 원리의 보충물이자, 논리적 등가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상기한 진술은 근대 국민국가를 재생산 장치의 총체로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해 준다. 국가라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가장 결정적인 항은 무엇인가? 정부? 군대? 경찰? 의회? 법원? 시민 사회? 이는 사적 생산의 부문들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느 산업 부문인지를 묻는 것과 유사하다. 산업 자본? 토지 자본? 상업 자본? 대부 자본? 정답은 그 모두가 가치 실현과 이윤율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조직된 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를 사유함에 있어, 영토, 주권, 인구, 국민, 장치 등의 그 요소들 모두를 어떤 체계의 동일한 지평 속에서 고려해야 한다: 즉 근대 국민국가는 자본 관계의 재생산과 더불어 사회의 재생산을 목표로 조직된, 행정, 입법, 사법의 권력과 그 장치들을 동반하는 총체적 체계이다. 이 체계는 자본주의의 제1명령, 잉여 가치의 생산이라는 축에 조응하여, 잉여 가치의 생산과 실현을 조건 짓는 제도적, 법적 환경을 마련하고, 동시에 그것의 부작용과 사각지대를 보완한다.[각주:22]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기능은 대략 다음의 구조적 틀 내부에서 행사된다: 이윤율의 관철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인구를 대상으로 *1. 가치 실현의 보조* : 국제 무역에의 참가, 전쟁의 개시, 집회 및 시위의 통제와 진압, 중앙은행 금리 조절을 통한 경기 조정, 기업 활동 면세 혜택 및 보조금 지원, 노동력 가치를 효율성 임금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중재. *2. 사회재생산* : a. 사회 보장 시행: 국민연금, 건강/고용/산재/요양보험, 각종 정책 보조금 지원. b. 사회 기반 시설 확충: 도로, 발전소, 학교, 보건소, 소방서, 경찰서, 병원 등 기본적인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와 관리. c. 이데올로기적 기능: 사법 제도들과 그 법적 내용들의 관철, 공공 교육을 통한 주체화/사회화.

 여기서 우리는 국가의 기능 및 역할, 자본 관계 속에서 국가에 부여되는 한계, 즉 그 자율성과 특수성에 대한 전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국가는 자신의 영토적 권역에 귀속된 자본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한계 너머로 자신을 작동시키지 않는 것이다.[각주:23] 일견 자본의 요구와 무관해 보이는실업 급여와 연금, 사회 기반 시설의 확충, 주거 지원과 기초 생활 수급 등의 사회 복지에 이르는국민국가 고유의, 자율적인 기획들은 자본 관계를 성공적으로 재생산하는 한에서 그 운신의 폭을 지니려 한다.[각주:24] 때로 국가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집약적인 폭력을 동원할 때조차 그것은 재생산 영역을 조정하려는 시도로서, 자본 관계의 성공적인 정비를 보조하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재개발 구역의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그 일상적인 사례인데, 일정한 권역 내의 총자본은 그 자체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위한 강제 퇴거를 도모하는 데에 있어 무능하며, 언제나 그들이 속해 있는 국가가 내주는 활주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영토적 권역 내의 총자본의 가치 실현을 보조하는 국가의 이러한 성격은 국제 관계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16세기 중상주의에서의 국가 간 무역 독점 경쟁에서부터, 18세기 이후로 완전히 가시화된 제국주의 전쟁은 각국의 총자본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국가의 시도를 보여 주며,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특징이다.

 특히 국제 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자본가들의 갖은 로비와 실천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이윤율에 매개된 국가의 위상을 드러내는데, 이는 이윤율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 중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윤율을 결정하는 변수들은 제품의 가격, 노동 강도, 노동 효율, 원료와 기계의 가격, 원료와 기계 사용량, 임금, 자본재의 가격, 설비 가동률, 자본재의 양 등으로서[각주:25], 국제 무역에서는 완제품이든 원료이든, 일차 소비재든 상대 국가의 제품 가격을 최대한 낮추고 자국의 제품 가격을 최대한 높임으로써 국내 총자본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거래되는 상품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이 다시 이윤율에 미치는 효과는 다양하며, 근대 국민국가는 이 효과까지도 염두에 둔 채 무역에 임한다. 예컨대 그 대상이 생필품과 같은 것이라면 이를 가능한 한 낮은 가격에 들여옴으로써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할 수 있고, 원료와 기계와 같은 설비의 경우에는 이를 싸게 들여옴으로써 상품 가격을 낮춰 이윤율 상승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위와 같은 사실은 자본의 한계를 규명해 주기도 한다. 즉 국가는 자본이 특정하고 구체적이며 지역적인 권역에 의존하며, 그 권역 각각이 허용하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우리가 으레 이데올로기라 불러 온 것)을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예증이다. 특정한 권역에 거주하는 공동체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 문화, 그들이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 그들이 서로 만들어 내는 관계의 배치, 그들이 집단적으로 만들어 낸 교통의 기반들을, 자본은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자본이라는 자연 상태는 사회 계약에 따른 국가를 소환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가 각 민족국가 내의, 각 민족국가 간의 총자본의 요구에 기대어 인종적, 우생학적 이데올로기를 심화시켰다는 점, 결과적으로 승전국의 국민 경제에 이바지하며 각국 자본 세력의 관계 재조정을 위해 관철되었다는 점은 자본의 한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자본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 의지하고, 또 국가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재생산이 문제가 되는 지점, 생명정치가 문제가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국, 독일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1960-70년대에 (사회) 재생산에 대한 질문과 국가에 대한 질문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그러나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와 재생산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라는 전체내부에서 필연적인 내적 인과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배 관계 규정을 생산의 관계 규정으로부터 도출하고, 생산의 효과로서 분배를 바라본 마르크스의 기획이 기본적으로 옳았음을, 그리고 그 속에 정치와 경제 사이의 관계를 규명할 단서가 있음을 예증한다. 요컨대 정치, 국가 혹은 재생산의 매개 장치는 이윤율의 구성적 외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공공 부문의 축소와 재정 지출의 후퇴로 특징지어졌던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은 국가가 관장하는 재생산 범위를 하향시키려는 기획이지만, 결코 국가의 사회적 기능 전체를 마비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한 구성적 외부가 없이는 자본주의는 곧바로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 역할의 축소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신자유주의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1980년과 2000년 사이에 국가 재정에서 세금이 증가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듯 자본주의 생산 양식하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어 물화된 재생산 기능을 떠맡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기획이, 모든 사적 생산을 재생산 장치 내부로 포섭함으로써 생산과 재생산의 이와 같은 분할을 발본적으로 폐지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이 결국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세계 체계 속에서 경쟁해야만 했던 것은, 그리하여 군비 증강과 중국과의 국경 분쟁, 일당 독재, 소수 민족 강제 이주, 생산성에 대한 집착으로 혁명의 이상으로부터 후퇴한 듯이 보였던 것은 스탈린 개인의 일탈 혹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연원한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국민국가라는 형태가 취하는 한계 때문이다. 즉 많은 이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폐단 자체로 물화시켜 파악하는 스탈린주의는 바로 국민국가의 제약 속에 놓인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이자 한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각주:26] 그런 점에서 레닌이 살아 있었더라면...?’과 같은 가정은 무의미하다. 국가 간 체계라는 형식은 자본주의의 중핵인바, 그 체계가 지양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형식이 지양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광의의 물적 조건이자 총체로서의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내적 계기로서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입각한 진단이다.

 

 

4.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 혹은 인민과 인구라는 분할

 

 그럼에도 국가가 완전히 닫힌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는 그람시적 의미에서 헤게모니적 실천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사회주의적 실험들이 증명했듯, 그것은 자신의 조건이 되는 토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는 와중에도 국가를 향한 개입과 전유가 없었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형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근대 국민국가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기초행정과, 이윤에 매개된 한에서의 가치 실현 및 사회 재생산의 지휘 통제실이라는 모순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요컨대 근대 국민국가는 인민들의 기초 행정을 담당하던 상호 원조 기구들의 기능을 대체해 왔다. 물론 이것은 단 한 번의 단절로 이뤄진 과정은 아니었으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침투한 곳은 어디에서나 전근대의 지역 공동체 중심의 상호 부조 체계의 해체가 이뤄졌고, 2. 여기서 발생하는 사회적 유대의 부재는 노동자, 농민의 반란과 소요를 가져왔으며, 3. 이는 수천 개의 상호 원조 기구의 범람으로 이어지고, 4. 결국 이 기능들을 흡수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체계가 등장하는 것이다.[각주:27] 현재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시행하고 있는 사회보장은 바로 그 결과이다.[각주:28] 공동체의 상호 부조 및 상호 원조 기구의 사회 재생산 기능이 점차 국가에 의해 전유되었던 것은 앞서 보았듯 필연적인 것으로, 이 기능의 이양과 전환은 근대 국민국가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상호 원조 기구들에서 근대 국민국가로의 사회 재생산 기능의 위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추상적 사회 재생산과 구체적 사회 재생산의 분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하의 노동이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형태로, 자유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키는 전일적인 실천으로서의 노동과 소외된 노동으로 분열된 채 동시에 수행되고 있는 것과 조응한다. 여기서 생산 과정을 통해 소요되는 노동은 사실상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내는 구체적 노동과, 총노동으로 수렴되어 무차별한 인간 노동으로 셈해지는교환 가치를 만들어 내는추상적 노동은 서로 분리되어 하나의 노동 과정 속에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삶에 필요한 교통수단을 관리하고, 물과 가스, 전기 등의 에너지를 공급하며,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여 지적 격차를 줄이고, 궁지에 몰린 이들을 지원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기능은 구성원 개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구체적 사회 재생산과, 자본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으로 수렴하며 국민/인구를 셈하는 추상적 사회재생산으로 분열되어 있다.

 즉, 물신주의의 현상학의 실체-가치를 생산하는 추상 노동으로 결속된 총체적인 매개의 체계는 그 속에서 수행되는 어떤 노동도 자신의 논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토대의 수준에 근거하는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이라는 이 자본주의의 제 1의 분할은 자신의 흔적을 상부 구조의 차원에서 재상연한다.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이 각각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모순으로 귀결되듯, 구체적 사회 재생산과 추상적 사회 재생산은 인민과 인구의 분할로 귀결된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추상 노동은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 행위를 매개하는 실천으로서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원천이자 그 소외의 표현이며, 인구는 인간 스스로의 삶을 재생산하는 실천으로서의 생(life)과 정치를 소외시키는 원천이자 표현이다. 추상 노동이 총노동으로 수렴된 무차별한 인간 노동의 지출이라면, 인구는 정확히 그와 동일한 논리에 의해 총인간으로 수렴된 무차별한 인간 삶의 환원이며,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자추상 노동과 인구는 정확히 서로를 비추며, 서로에 의지하고, 마치 연결된 원자처럼 서로 조응하는 궤적을 지니고 있다. 이 분할 속에서 현실의 인민은 단순히 인구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스스로의 삶의 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결정할 정치적 주체이자, 이데올로기적 차원으로 환원 불가능한 틈으로서의 인민은 인구로 셈해지는 순간 어떤 실천과 결정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이러한 추상적 사회 재생산과 인구의 논리는 강제 이주, 강제 퇴거라는 폭력적인 형태에서부터, 주민 등록을 통한 시민권의 배타적 부여, 출산 장려 캠페인, 금연 캠페인, 선별적 복지, 여론 조사, 징집 검사에 이르는 느슨한 정책적 양태 전반을 아우른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을 염두에 둔 채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생명정치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논의들은, 생명정치를 철저히 역사화시키지 못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각주:29] 생명정치는 이미 인민과 인구의 분리, 인민에 대한 인구의 우위를 표현하는 개념인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급진적인 생명정치급진적인 추상 노동과 같이 이율배반적인 이름이다. 생명정치란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 국민국가 특유의 기관, 제도, 실천, 인식, 전략과, 그 기예들이 인간을 매개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며, 인구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추상적 사회 재생산의 요체이다. 문제는 생명정치 자체의 폐지이며, 이는 국가의 지양, 현재 자본 관계의 지양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결국 구체적 사회 재생산과 추상적 사회 재생산,[각주:30] 즉 구체적인 생명의 자기 배려(self care)와 추상적인 생명의 피통치성의 이러한 모순적 결합은 자본주의하에서 국민국가를 매개하여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는 객관적인 형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민국가는 인민과 인구의 분리를 통해 작동하며, 인민에 대한 인구의 지배를 관철시킨다. 낱낱의 생명으로 환원되어 계측, 분석, 고찰의 단위로 셈해진 대상화된 인간의 무리로서의 인구는 구체적 노동에 대한 추상적 노동의 지배 과정의 거울상인 것이다.[각주:31] 과거 국가 도출론자들이 강조하고 파악하고자 했던 국가 내부의 모순은, 정확히 이 분할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국가 형식 자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로 근대 국민국가가 전유하는 재생산이란 위와 같은 모순 내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바, 이 모순은 조직화된 정치 세력이 개입하는 한에서, 북한의 무상 주거 제도에서부터 쿠바의 의료에 이르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여러 흔적들이 보여 주듯, 진귀한 장치로서 지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정치는 인구라는 총체 내의 여러 부분들을 갖지만, 전체를 갖지 않는다. 달리 말해, ‘인구에서 전제되고 있는 총인간으로의 무차별한 환원은 이런저런 생명의 부분들로 분할 가능하지만, 그와 같은 부분으로 환원 불가한 인간 자체를 셈하지는 못한다. 계측 불가한, 인간이라는 인간이야말로 전체인바,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들의 보편적 주거, 의료, 교육 등은 이미 인구의 논리를 초과한 어떤 인간의 모습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인구를 단순히 수량화, 수치화된 인간 집합으로 파악하지 않고, 푸코가 그 현상학적 수준에서 잘 파악했듯 이런저런 관리와 조절, 배치의 실천 및 장치들 속에서 이해되고 드러나는 인간의 형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발명품으로서의 인구, 관리와 조절의 대상으로서의 인구, 통치의 대상으로서의 인구는 전적으로 근대 국민국가가 자본 관계 내에서 인간의 무리를 셈하는 과정으로부터 나타난 것이었으며, 여기에 수반되는 여러 관리의 장치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국민국가 이후에 공동성을 중재하고 사회 재생산을 매개할 모델에서는, 그에 조응하는 새로운 집합적 인간의 형상이 발명되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5. 나가며: 인구 너머의 인간의 형상을 상상하기

 

 이 글에서 나는 근대국가는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는 푸코의 현상학적 진단에 주목하여, 그가 여러 이유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그 실체에 관해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구해 보고자 했다. 즉 근대 국민국가는 어째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며 인구를 관리하기 시작했을까? 그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노동력 관리와 자본관계의 보존이라는 목적하에서의 재생산에의 요구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생명정치와 인구란 곧 추상 노동 혹은 이윤 원리의 정치적 등가물이라는 점이 내가 얻게 된 결론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인간 생적 활동을 다루는 모든 인식과 제도의 총체가 생명정치이며 여기서 인구라는 범주가 도출되기에, 우리가 관에 매개된 재생산 일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추상 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현실의 임노동 관계 속에서 파열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세계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마찬가지이다. 생명정치는 각각의 사회적 실천들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들 속에서 규정되며, 그들 실천을 통해서만 관철된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일순간이지만 생명정치를 극복하는 파열을 목격하게 된다. 예컨대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행해진 쿠바의 의료 지원은 민주적 생명정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너머에 있는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나토 가입국으로서 쿠바에 대한 온갖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가담해 온 이탈리아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혹은 경제적 합리성-자본주의적 이성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의 의료 지원은 비합리 자체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실천이 상상하는 대상은 인구의 논리를 초과한, 인민이라 할 법한 어떤 인간의 형상이다. 더불어 최근 낙태죄 폐지 운동을 통한 페미니즘적 실천의 흐름 또한 출산율을 고려하는 생명정치 너머에서 인간의 몸을 상상하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너머를 사유함에 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내부의 파열들에 있다.

  1. E. P. Thompson,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New York: Pantheon Books, 1964). 197-9 참조. 톰슨은 여기서 18-19세기의 전환기에 걸쳐 생겨난 변화들산업 혁명, 인구 증가, 집약화된 농업, 임노동 관계로의 장인의 흡수, 아동 및 여성 노동의 전유 등을 개괄하며 봉건적 예속 관계로부터의 자유가 노동력 새로운 예속의 조건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본문으로]
  2.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 사회의 이념은 스스로가 특수한 인격으로서 저마다의 목적을 안고 있는 구체적인 인격이 욕구의 전체를 부둥켜안고 자연의 필연성과 자의로 엉켜 있는 나날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시민 사회의 한쪽 원리이다라는 헤겔의 표현에서 가장 명확히 표명된 바 있다. G. 헤겔, 󰡔법철학󰡕, 임석진 옮김(파주: 한길사, 2008), 355를 참고하라. 많은 헤겔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이때 이 특수한 인격들은 부르주아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3. 널리 알려져 있듯 홉스의 방법상 특징은 정치에 대한 개념을 제안함에 있어 군주가 아니라 개인의 행동에서 출발하며, 세속화된 인간의 욕망을 정치 이론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때 일종의 자연으로 전제되고 있는 세속화된 인간의 욕망의 실체 및 그 가능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으로]
  4. 나는 여기서, 실정적인 수준에서는 어떤 제국주의의 흔적도 다루고 있지 않으나, 제국주의가 일궈 낸 식민지적 삶의 완전한 타자성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지각 불가능한 공간적 총체성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모더니즘 소설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필연화한 제임슨의 작업에 빚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Fredric Jameson, “Modernism and Imperialism,” in The Modernist Paper (New York: Verso, 2007). [본문으로]
  5.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배경 속에서 1960-80년대를 수놓은 영국의 구조주의 국가론과 미국의 기능주의적 국가론, 독일의 국가 도출론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들을 일일이 검토하는 것은 본 작업의 목적이 아니지만, 작업이 상론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입장도 간접적으로 상론될 것이다. [본문으로]
  6. 물론 경제와 정치가 분리 불가했던 과거의 모델은 일정한 권역을 통치하는 영주 소유의 장원 내에서 생산이 이루어졌던 유럽의 봉건제를 기준으로 해야 잘 이해될 수 있기에, 아시아적 생산 양식 하에서 경제와 정치의 위상 관계는 따로 분석되어야 할 쟁점일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자본주의 가치 사슬 속에서 국제 노동 분업에 참여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특징적인 조건인 경제와 정치의 명백한 기능적 분리는 전 세계의 지역을 망라하여 적용 및 관철되고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국민이라는 인구학적 대상을 다스리고, 개개인에 시민권을 부여하며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어떤 국가의 모델이 그랬던 것보다 경제 영역을 세심하게 조율하는 정치를 실행하는 단위로서의 국민국가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곳은 없다. [본문으로]
  7.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이항은 경제 결정론과 기계적 유물론이 가미된 일종의 편향적 인과론이라기보다, 총체로서의 생산 양식이 지니는 변증법적이고 상호 교통적인 매개를 구성한다. 토대(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축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에 조응하는 상부 구조적 형태 및 상부 구조상의 조정을 요청한다면, 정치야말로 개입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미국 정부가 보여준 천문학적인 구제 금융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본문으로]
  8. Ruth L. Dewhurst, “The Legacy of Luther: National Identity and State Building in Early Nineteenth-Century Germany,” Thesis (Atlanta: Georgia State University, 2013). 21-33. 참고. [본문으로]
  9. Ephraim Nimni, Marxism and Nationalism: Theoretical Origins of a Political Crisis (London: Pluto Press, 1991), 18-22 참고. [본문으로]
  10. M. E. Himbert, “A Brief History of Measurement,” The European Physical Journal Special Topics, vol. 172 (2009): 28-30 참고. [본문으로]
  11. 예컨대 영국의 경우 앙시앵 레짐의 청산은 명예혁명(1688)이후 100여 년이 지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중앙 집권적인 근대적 국가 장치의 부상과 함께 시작된다. 이에 대해서는 Heide Gerstenberger, Impersonal Power: History and Theory of the Bourgeois State, trans. David Fernbach (Boston: Brill, 2007), 277 참고. [본문으로]
  12. 베네딕트 앤더슨이 정의한바, “(..)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개념은 곧 영토적 권역 내의 국가 체계로서 규정되는 국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national state’를 국민국가로, ‘nation state’를 민족국가로 번역하기도 하며, 일부 논자들은 ‘nation’에 대응하는 적합한 한글 번역어가 없다는 이유로 네이션 스테이트로 음차하여 제안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3. 국가 도출론의 기본적인 입장은, 국가는 실정화된 영역으로서 경험적으로 파악되어선 안 되며,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내적 모순에서 그 기능이 도출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도출론자들의 주장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 존 홀러웨이·솔 피치오토 엮음, 󰡔국가와 자본󰡕, 김정현 옮김, 청사신서 29(서울: 청사, 1985).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요하힘 히르슈(Joachim Hirsch)의 작업을 참고하라. 한편 좌파가 집권한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남반구 국가들에서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가 번성했다는 것은 특정한 자본 축적의 조건과 국가 형태 간에 강력한 인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본문으로]
  14.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서울: 난장, 2011), 113. [본문으로]
  15. 같은 책, 113-117. [본문으로]
  16. 같은 책, 163-164. [본문으로]
  17. 근대 국가는 이와 같이 체계적으로 구획된 영토 내에서 국민을 형성한 이후, 여러 군주들 사이의 산발적인 정복이 아니라,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국가 간 체계하의 경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국가를 일종의 합목적성을 가진 체계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국가와 더불어 가장 높은 수준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18. 푸코, 󰡔안전, 영토, 인구󰡕, 159. [본문으로]
  19. 19세기에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전역에 확립되기 시작한 사회 보장 제도1848년의 노동자들의 봉기 이후로 가시화된 공화주의의 내적 모순을 봉합하는 시도로서 성립된 것임을 논증하는 동즐로의 작업은 근대 국민국가를 재생산 장치로서 조명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하자면, ‘사회 보장의 발명은 공화주의의 내적 모순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귀결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자크 동즐로, 󰡔사회 보장의 발명󰡕, 주형일 옮김(서울: 동문선, 2005). [본문으로]
  20. 생명을 자신의 관리 대상으로 삼는 통치성의 성립은 일견 마르크스의 작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크스적 문제의식 속에서만 뚜렷하게 그 함의를 드러낸다. 푸코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작업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어떤 조건 속에서 필연화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1. 반면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개념을 근대 국민국가 내에서 역사적으로 맥락화시키지 않고, 주권 일반이 전제하는 분할과 배제에 근거한 예외 상태로서 초역사화함으로써 실체화된 정치 이론으로 다듬어 낸다. 그러나 이는 생명정치가 자본주의 비판에서 의미할 수 있는 잠재력을 뭉툭하게 하는 피상적인 시도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서울: 새물결, 2008). [본문으로]
  22. 기존의 다양한 국가론은 이 국가의 한계이자 축으로서의 재생산 기능을 강조하는 데에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실정적으로 분할되어 총체화되지 않는 국가의 기능들을 기계적으로 늘어놓거나(영국 경험주의 국가론), 생산의 논리에서 자동적으로 파생되고 그에 종속되는 부속물(고전적인 도구주의 국가론)로 간주하는 데에 머물 뿐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분할이 경제와 정치, 혹은 생산과 재생산의 체계적 구분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을 놓쳤던 것이다. [본문으로]
  23. 자본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생산의 조직 자체에 깊숙이 작용한 국가 모델의 역사적 사례는 바로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나 그 모델들은 애초에 사회 재생산의 영역을 초과하는 범주를 국가에 할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 체계 내에서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김정은 이후의 북한 등을 보며 국가의 역할을 그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고자 했던 역사적인 시도가 저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24. 이런 점에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자본주의 고유의 규정적인 심급으로 셈한 고진의 파악은 옳다. 국가는 항상 다른 국가에 대하여 국가이기 때문에, 일국에서 국가를 지양하려고 해도 다른 국가가 있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서울: 도서출판b, 2012), 22-35. [본문으로]
  25. 이들의 상세한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새뮤얼 보울스·리처드 에드워즈·프랭크 루스벨트, 󰡔자본주의 이해하기󰡕, 최정규·최민식·이강국 옮김(서울: 후마니타스, 2009), 333. [본문으로]
  26. 한편 자본가 계급도, 노동자 계급도, 혹은 우파도 좌파도 온전한 사회 재생산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는 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국가는 실정화된 단위로서 전면에 나선다. 국가의 위상을 전면화했던 보나파르티즘, 혹은 파시즘과 같은 대중 동원 체제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 내에서 타율적인 자율성을 획득한 재생산 장치의 예증으로서, 사적 생산의 부실을 총체적으로 재조정하여 안정적인 자본 관계를 회복하려는 재생산 영역의 견인 시도 자체이다. [본문으로]
  27. 이와 같은 전개는 유럽과 미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참이며, 적잖은 남반구의 식민지들에도 해당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ean Allen, “Organizational Materialism: Considerations on Contemporary Leftism,” The Left Wind, 2018330. 여기서 앨런은 유럽을 중심으로 19세기 전반에 걸쳐 상호 원조 기구가 범람했다가 이들이 20세기에 걸쳐 국가에 흡수되어 간 과정을 개괄하며, 동시대의 급진적 운동들이 국가에 압력을 넣는 정도의 역할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본문으로]
  28. 동즐로, 󰡔사회 보장의 발명󰡕. [본문으로]
  29. 가령 다음의 글을 보라. Panagiotis Sotiris, “Against Agamben: Is a Democratic Biopolitics Possible?,” Critical Legal Thinking, 2020314. 이 글은 코로나에 대한 각국의 방역 대응을 두고, 벌거벗은 생명을 만들어 내는 예외 상태를 항구화시키려는 전체주의적 욕망이라 비판하는 아감벤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생명정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허나 소티리스의 기본적인 논조가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생명정치를 인구 전반에 대한 역사적인 정치 형식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좁은 의미의 생명 과정을 중재하는 정치정도로 협소화하고 있다. [본문으로]
  30. 추상적 사회 재생산이란 결국 생명정치를 통한 인구의 관리에 해당하며, 구체적 사회 재생산이란 각 인간이 자신의 신진 대사, 삶 자체를 조절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에서 구체적 사회 재생산은 국가의 기능으로 인해 추상적 사회재생산에 매개됨으로써만 이뤄진다. 자본주의가 추상 노동에 의한 구체 노동의 분할을 특징으로 한다면,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 사회 재생산과 구체적 사회 재생산의 분할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1. 이러한 모순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역사적 사례는 나치즘이다. 알다시피 나치즘의 수용소와 홀로코스트는 국가의 대상으로 객체화된 인간의 상태를 그 한계 끝까지 구체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인민과 인구의 이러한 분리야말로 집단 학살 뒤에, 그들의 건강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의 이면에 놓여 있는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감벤이 파악하듯, 실체화된 주권 권력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분할에 근거한 역사적 현상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