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1
정강산
*직접인용문 내부의 ‘[]’는 모두 인용자의 주이다.
1. 퀑탱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그가 “선조성”이라 부르는 것, 즉 칸트적 상관주의 2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거나 상관주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유 발생 이전의 과학적 사실로서의 실재를 사유할 필요를 역설하며, 칸트의 이성비판으로 열린 공간을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이라 비판한다. 3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각각 지구와 외계로 유비했을 때, 주관의 표상작용으로 세계를 환원하는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기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메이야수는 문제의 ‘비판’ 이후의 철학은 상관주의 내부에서의 여러 변주들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절대자/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상론하는 것인데, 메이야수에 따르면 그러한 상론은 절대자의 필연성을 주장하며 이런 저런 대상을 실체화 시키는, 곧바로 주체로서 절대에 가닿을 수 있음을 주장하는 형이상학 및 소박한 실재론과 구별되어야 하며, 동시에 절대자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을 논의하길 거부하는 상관주의의 약한 모델, 사유 외부의 절대자에 관한 한 어떤 사유도 불가능함을 얘기하며 상관성 자체를 절대화 시키는 상관주의의 강한 모델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절대자에 대한 사유가능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절대를 실체화하지 않는 긍정적인(positive) 방식을 ‘사변적(speculative)’이라 부른다. 이 사변적 사유의 표면적 당위는- 실재적인 ‘절대성’을 포기한 채, 어떤 근거도 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 존재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며, 결과적으로 다신교적이라 할 법한 수많은 믿음체계의 무차별적인 난립에 제동을 건다는 데에 있다. 4 그와 같은 “신앙절대론”적 경향들에 맞서 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우연성 자체로 설정하고 긍정하는 것이 바로 메이야수의 전체 기획이다.
그리고 지젝은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메이야수의 작업에 개입하여, 그의 논의 구도를 비판적으로 전유하려한다. 예의 신앙절대론에 대한 메이야수의 비판은 그가 위장한 상관주의의 전형으로 꼽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하여, 그가 “병든 유물론”, “불발된 상관주의”라는 표현으로 암시한 레비나스에서부터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 데리다 등등의 철학에 모두 적용 가능한 것이지만, 지젝은 이를 교묘하게, 혹은 보다 정확하게-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적 신학”의 정전 레비나스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한 ‘신학적 전회’”를 향한 비판으로 읽으며, 5 이런 조건에서는 “(...)종교가 유럽에 독특한 모더니티로 간주되는 것의 여러 소외에 맞선 핵심적인 ‘저항지점’처럼 나타나”고, 이 속에서 신은 “어떠한 실정적인 존재론적, 목적론적 지위도 박탈당해 있다” 6고 얘기한다. 지젝에 따르면 이와 같은 비합리적 신앙절대론이 만연하게 된 것이 절대자에 대한 참조 일체를 몰아낸 칸트의 비판주의에서 연원한다고 보는 메이야수의 주장은 일견 합당하나, 그와 같은 혐의는 결과적으로 메이야수의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7 지젝은 근간 예정인 메이야수의 박사논문 “신성한 비존재(L'inexistence divine(1997))”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나, 『유한성 이후』에 국한한다 해도 우연성 자체를 절대자의 자리에 두려는 그의 기획이 신앙절대론을 원칙적으로 금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비모순원리/비모순율을 존재론적 진리로 단언하는 메이야수의 주장 8은 철학사 내부의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맥락에서 연역되어 나온다. 그가 “모순적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며, 이를 “존재자가 모순적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일 것이기 때문” 9이라 설명하는 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이성원리를 통해 신의 필연성을 논증하는 시도들이 결국 신을 모순적인 존재자로 정립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전능한 신을 상정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보다 지고한 차원에 있을 존재하지 않는 신을 상정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해된 절대자는 필연적이지만, ‘무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자가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 연장에서 메이야수는 모순을 실체화시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비존재가 존재에 통합되고, 비실존이 실존에 통합되는 무차별성으로 치닫게 됨으로써(이런 존재자들의 세계는 완전하기에 영원히 닫혀있을 것이고, 그런 한에서 필연적이다) 생성, 즉 있음이 나타나는 과정 혹은 다름이 있는 과정을 종별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10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은 결국 필연성의 형이상학에 그친다고 말한다. 여기서 메이야수는 암시적으로 ‘우연성’에 비모순율 및 동일률, 그리고 사변을 위치시키고, ‘필연성’에 모순율과 형이상학을 위치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헤겔을 변호한다:
“(...)메이야수는 헤겔적인 변증법적 운동의 요점을 놓치고 만다. 즉 모순은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유한한 사물은 다름 아니라 A인 동시에 비-A 일 수 없다. (...)심지어 순수한 개념적 추론의 영역에서도 움직임들의 연속은 결과들의 탈시간적 연쇄로 작용하지 않는다. - 일부 논리적 움직임들(...)은 오직 다른 (잘못된) 움직임들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헤겔에게서 ‘모순’은 동일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핵심임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모순’이란 그것 덕분에 어떠한 존재자도 완전히 자기동일적일 수 없게 되는 실재-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순수한 자기동일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간이 있고, 발전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대립물들이 [그 자신과] 직접적으로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
여기서 논의되는 ‘모순의 불가능성’이란, 모순의 항들을 동등하게 등치시키는 바에서의 완결적인 (모순 속) 동일성이 불가능한 것이 또한 ‘모순’의 핵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이미 헤겔의 『논리의 학』에서부터 이와 같은 바의 ‘모순의 (양 항의 ‘상호성’의) 불가능성’이 제기 되었음을 지적한다. 『논리의 학』에서 상론되는 존재론의 출발점은 ‘존재’와 ‘무’라는 대립물의 통일, 즉 존재와 무의 동일성으로서의 ‘생성(Werden)'인데, 이는 변전을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과정을 가리키며, 곧 규정된 존재로서 현존재/정재(Dasein)로 지양된다. 12 현존재란 특정한 질을 갖는 ‘어떠한 것’으로서,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통일이라는 계기를 갖는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편- 특수- 개별로의 도약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이행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바로 존재와 무가 적대할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서 서로 비동일적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주장에 덧붙이자면, 양극의 무차별적 통일로서의 모순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헤겔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메이야수의 주장대로 헤겔의 모순이 필연적이었다면, 위와 같은 이행의 시간성은 애초에 도입되지 못했을 것이다. 메이야수는 필시 헤겔의 ‘절대정신’을 하나의 필연적 도달지로 간주하고, 이를 지양 속에서 변전해가는 존재의 우연적인 양태들이 어떻게든지 소급되어가는 목적론적 통로로 간주하는 듯하나, 헤겔의 절대정신은 진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즉 그에게 진리가 그러하듯이(헤겔은 진리가 상론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절대정신은 외려 실체화될 수 없는, 완성 없는, 동일화 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바에서 필연일 수 없는- 모순이 지양되어가는 부단한 과정을 가리키는 누빔점에 다름 아니다. 13 따라서 헤겔을 생산적으로 독해하고자 하는 이라면, ‘절대정신을 깨달았다’ 혹은 ‘절대정신에 도달했다’ 또는 ‘절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자는 기각되어야 한다’는 진술이 어째서 넌센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절대에 관한한, 그것은 즉자와 같은 것으로서 주어져 있지 않기에 우리는 그것을 항상 사후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매번의 우연 속에서 상론되는 사태의 전개를 통해서만 얘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헤겔의 절대란 알튀세르의 최종심급과 같은 것이다. 최종심급의 고독한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 바의 최종심급 말이다. 여기서는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독해가 전제하는 목적론의 주요 측면이 외려 역설적으로 헤겔의 철저한 반-목적론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14
그러나 지젝은 메이야수의 특장이 “불가지론적 상대주의”를 넘어 “상대성 그 자체(인간의 존재와 독립적으로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에 인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 15에 있음을 인정한다. 이는 칸트의 상관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즉자에 대한 무지’ 자체를 실은 즉자의 긍정적인 속성에서 연원하는 경험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유일하게 가능한 절대자를 우연성 자체로 둠으로써 오직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것임을 주장하는 메이야수의 접근을 염두에 둔 것이다. 메이야수는 위와 같은 상관주의로부터의 도약을 통해 칸트의 작업을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이라 칭하는 것을 합리화했다. 여기서 지젝은 프로이트와 칸트가 참칭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비교하며, 메이야수의 평가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프로이트를 통해 자아는 무의식 내지 이드라는 중심을 도는 방식으로 탈중심화 된다는 점에서 명백히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칸트의 경우 주체가 세계와 맺는 관계에 있어 외려 세계가 주체라는 중심을 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가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특징을 별무리의 회전이 아닌 ‘관찰자를 회전시킨다는 것’으로 정의한바, 칸트는 주체를 안정적인 것으로 실체화시켰다기보다는 외려 선험적 통각의 주변을 도는 “소용돌이의 순수한 실체 없는 공백” 16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그런 점에서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칸트적 의미에서 독해될 수 있고, 따라서 에고에서 이드와 무의식으로의 축의 이동은 빗금 친 주체 즉 욕망의 자기 관계적인 “부정성의 소용돌이” 17로 주체를 떠미는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다소 갑작스럽게 프로이트와 라캉이 등장하는 까닭은, 본 장의 후반부에서 지젝이 상관적 현실 이전에 위치하는 주체 내부의 어긋남, 즉 현실의 일부라는 이유로 인해 내적 완결, 닫힘이 실재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주체의 위상을 통해 메이야수 논증의 빈 구멍을 상론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한편 지젝은 절대에 있어 초월론적 상관주의가 맞이한 교착상태를 해소하는 메이야수의 방법론이 사회의 적대에 대한 아도르노의 분석에서 이미 보다 구체적인 수준으로 상론되었음을 암시한다. 사회를 개인의 합으로서 간주하는 유명론적 입장과, 사회를 전(pre) 개인적인 총체성으로 간주하는 유기체적 입장의 지난한 대립은 일견 사회를 물자체와 같은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도르노는 바로 그러한 화해불가능한 양 극을 구성적으로 갖는 것이 사회임을, 즉 적대와 같은 것이 사회라는 개념에 이미 실재적으로 주어져있다는 점을 상론했기 때문이다. 18 유한성의 초월 불가능한 한계로서의 회의주의적 사실성이 이미 절대로서의 우연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상론할 때, 메이야수는 위와 같은 구도를 인식론과 존재론적 버전으로 단락시킬 뿐이다.
상기했듯 메이야수의 그와 같은 단락은 무지가 전제하는 사실성의 ‘그저 있음’이 이유의 부재의 절대성,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우연성의 절대성, 즉 그가 비이성원리 혹은 본사실성 19이라 부르는 것의 절대성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상론함으로써 이뤄진다. 여기서 지젝은 “보편성과 그것의 구성적 예외라는 라캉의 성 구분 공식의 남성적 측면” 20을 발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우연적이며,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우연성 자체’라는 메이야수의 주장은 아버지의 법이 성립되는 과정이 함축하는 논리적 위상에 비견된다. 즉 ‘모든 남성은 상징적 거세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법에 복종한다(보편성). 그러나 어떤 남성은 남근에 종속되지 않는다(예외).’ 여기서 보편성의 구성적 예외의 자리에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법’을 정립하는 아버지 자체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지적한바 있는 법의 예외자로서의 원초적 아버지인데, 이 아버지는 근친상간금지/법이라는 모든 보편적 준칙으로부터 벗어나 부족의 모든 여성을 취한다. 이처럼 남근의 보편성이란 결국 모든 보편적인 것이 성립하기 위해 의존하고 있는 예외를 은폐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21이에 착안하여 지젝은 메이야수에게 “필연성은 보편적 우연성의 외적 보증물이” 22되기에, 외려 우연성, 그리고 필연성의 비-전체(not-all)라 할법한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상징계의 틈, 상징계의 불가능성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개념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관계가 성구분 공식의 여성적 측면에서까지도 상론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남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전적으로 남근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여성은 (남근에 대하여) ‘전체가 아닌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자리한다. 여성은 남성의 부정항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여성,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따라서 지젝은 ‘(보편성으로서)우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적으로 우연성에 종속되지는 않는다’라는 인식을 통해 필연성을 말소처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우선 사태의 출발점이 되는 우연성의 비전체로부터 출발해야 하나, 필연성은 우연성의 구성적 예외라기보다, 우연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인과성으로서 사고되어야 하며, 따라서 필연성의 비전체를 통해 가능해지는 필연성 속의 우연성까지도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비전체가 우연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필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비전체가 필연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비전체는 필연적이다.” 23
나아가 지젝은 칸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절대를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메이야수의 방향이 이미 헤겔의 작업에 의해 선취되었음을 주장한다. 헤겔에게는 칸트의 범주와 시공간이라는 직관의 선험적인 형식 또한 이미 객관적인 실재의 일부로 간주되었기에 물자체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제약은 다만 가상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말하자면 메이야수가 절대자에 대한 앎을 긍정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절대로서의]카오스의 전능성의 자기한정, 또는 자기-정상화” 24를 논하며 ‘존재자가 우연적으로 남아 있기 위해, 카오스가 존재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규칙에 복종하도록 한다’는 점을 이끌어내는 대목은 헤겔의 철학에 있어 이미 그 기초에 있는 것이다. 지젝이 주장하듯, 헤겔의 본질은 존재자들에 실존적으로 앞서지 않으며, 존재의 자기 매개를 통해 주어짐으로써 외려 자신의 전제조건들을 소급적으로 정립한다(지젝은 이러한 과정이 라캉에게 있어서는 미분적인 덩어리로서의 존재가 의미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덧붙인다). 이에 따르면 헤겔에게 있어 그러한 필연(본질)이 다수성- 즉 비-일자, 차이, 비동일성을 구조화 하는 것은,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우연적(...)투쟁의 결과” 25에 가깝다. 더불어 헤겔의 자연 철학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헤겔은 명시적으로 ‘자연은 그 현존에 있어 필연성과 우연성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자연 내부에서의 개념규정의 여부에 따라(이때 헤겔의 개념은 주관을 경유하나, 자체로 그와 무관한 객관적인 운동하는 보편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념규정의 작용이 발생하는 필연의 차원이 있고, 개념규정의 작용이 없는 우연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26헤겔에게 이것이 현실의 사태 속에서 어떻게 상론될지는 선험적으로 규정되어있지 않은바,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져 있다. 27
이어 지젝은 메이야수적 도식이 지닌 위상학을 대상 a를 둘러싼 욕망과 사이의 충동의 간극을 통해 다시금 변주하여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욕망은 칸트적이고 충동은 헤겔적” 28인데, 이는 욕망의 운동이 대상 의존적이라면(마치 대자를 설명하기 위해 물자체라는 ‘문제적 개념’을 필요로 하는 칸트처럼), 충동은 자기 원인적 재귀성을 지닌다(최종적인 목적지 없이 즉자-대자-즉자대자를 운동하는 의식을 설명한 헤겔처럼)는 라캉의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대상과 상실 사이의 관련성이 핵심적이지만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의 대상 a의 경우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상실과 일치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출현하는 반면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 a의 경우 ‘대상’은 직접적으로 상실 그 자체이다. (...)충동은 부분 대상으로 고착되어 들어가는 물에 대한 무한한 갈망이 아니다. -충동은 모든 충동의 ‘죽음’차원이 들어 있는 그러한 ‘고착’자체이다. (...)충동의 기본적인 모체는 모든 특수한 대상을 물의 공백을 향해 초월하는 것(그런 다음 환유적 대리물 속에서만 접근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리비도가 특수한 대상에 ‘고착되어’ 그것 주위를 영원히 순환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29
말하자면, 아이가 상상적 완전함이라는 상상적 남근을 박탈당하고, 어머니의 욕망이 전적으로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으며 어머니의 욕망이 정향하는 곳으로 간주된 남근을 향해 이동하는 이 주체화(타자에 의한 소외)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욕망과 대상 a이다. 한때 라캉이 물(das Ding) 30이라 부른 바 있는 대상 a는 억압을 통해 형성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끊임없이 찾게 하지만- 사실 실제로 우리로부터 박탈된 적도 없는 ‘무언가’이다. 실정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무(nothing)’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의 원인-대상이자 충동이 향하는 곳이며, 충동에 의해 순환되는 곳이자, 상징계를 구조화하는 틈이며, 동시에 공백, 간극, 결여를 가리는 기능을 도맡는다. 누군가 무언가를 무목적적으로 탐닉한다면,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 충동의 편에 놓인 대상 a로서, 부분대상(미분적인 덩어리가 사회화/상징화 즉 의미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리비도의 고착이 이뤄지는 신체의 각 부분으로서의 눈, 귀, 항문, 입)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치환되며 어떤 대상을 향하는 욕망과 달리, 재귀성을 갖는 충동에 있어 그러한 대상으로부터의(대상에 기인한) 충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보다 정확히는 충동은 욕망과 같은 방식으로 환유하지 않으며, 대상으로 전이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지젝은 충동이 물/대상 a라는 공백의 주변만을 돈다면, 욕망은 부분 대상에의 리비도 고착이 ‘무언가에 대한 것’으로서 실정화 된다고, 따라서 욕망은 고착을 “초월론화” 31 시킨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하다. 지젝은 여기서 이 같은 충동에 대한 고려의 부재로 인해, 사변적 실재론 32은 전(pre)비판적 형이상학이 갖힐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그대로 갖게 된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본인 고유의 입장이라 할 법한 라캉주의적 비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지젝이 앞서 갑작스레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라캉의 입장에서 상론했던 이유가 상론되는 대목인데, 이에 비하면 메이야수에 대한 지젝의 여타의 평가들은 외려 지엽적이다. 그렇다면 끝내 칸트의 문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그 아포리아,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변적 실재론을 비롯한 신 유물론 전반이 “존재와 로고스의 동일성” 33을 충분히 비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려 하는 것이 메이야수가 말한 바의 상관주의(각이한 신 유물론‘들’은 일관되게도 주체를 격하한다) 혹은 이로부터 파생된 극단적인 반토대주의(메이야수가 “신앙절대론”이라 표현한 바의, 또한 여기서 지젝이 “탈속적 사유”라 부르고 있는)이고, 그들이 수립하려는 것이 즉자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positive)앎이라면,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형이상학자들이 가정해온 존재와 사유하기/말하기의 동일성으로부터의 발본적인 단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와 상관하는 것(따라서 우리가 사유하고 말하는 것)은 존재와 같지 않다’는 것을 한층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외려 사유하기/말하기와 비존재의 동일성으로- 즉 ‘우리의 사유와 말은 비존재와 같다’는 주장으로 바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 내부의 구멍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된다. 공백으로서의 실재의 중핵이라는- 심원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언어라는 점에서 언어는 이미 구조적으로 존재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주장은- 사유하기/말하기와 비존재의 동일성의 모델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상관주의의 극복에 있어 결정적인 인식이다.
즉 여기서 지젝이 주장하는 것은 “(의식적인)주체와 현실 사이의 초월론적 상관관계 아래에는 (무의식의) 주체와 그것의 실재/불가능한 대상적 대위법, S-a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 34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주체와, 언어 이전- 따라서 의식 너머의 실재의 편에 놓인 대상 a 사이의 상관관계 말이다. 이러한 대위법은 일견 이미 세계 인식의 제한적인 주관을 전제하고 있는, 따라서 상관주의적인 지평 내에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야수는 프로이트와 라캉(그리고 아마도 지젝)을 바로 그러한 논리로 비판한다. 35 그러나 지젝의 반비판이 언지하는 바, 이 대위법은 미분의 존재가 주관에 앞서는/주관을 초월해 있는 현실 내부로 등록되는- 객관적이고도 실재적이며 따라서 비상관적인 과정이다. 이를 지젝은 “(...)그 자체로는 초월론적이지 않으며(...) ‘생성 중인 주체’를, 주체의 출현의 초주체적 과정을 구획하는 시도” 36라고 요약한다.
이 지점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항상적인 것으로서 전제하고, 그 속에서 절대를 찾으려는 메이야수의 기획이 어째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지가 명백해진다. 이미 주체 자체가 주체의 객체적 속성 37/ 주체의 내적 불가능성/ 주체 이전의 현실/ 현실의 일부로서 주체의 등장을 조건 짓는 실재적 과정 자체에 매개되어 있는바, 이에 대한 고려가 없는 메이야수의 절대는 어떤 측면에서든지 선험적 주관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변적 실재론은 칸트로부터 도약하였으나 “물 자체에의 접근 가능성이라는 칸트적 주제에 사로잡혀 있” 38으며, 역설적이게도 전(pre) 비판적 형이상학의 틀로 끝내 빨려 들어가 버린다. 우리는 외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체 자체가 이미 즉자다. 지젝의 표현으로 거듭하자면, “초월론적 상관성 자체가 현실 자체 속에 기반하고 있어야”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우리 정신)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가 측정하는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39 칸트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표상에 맺힌 대자/객체를 정초하는 물자체로 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외려 주체를 향해 한 번 더 나아가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관의 한계를 돌파하여 즉자에 가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실은 자신을 이중화해 자신에게 나타나기 시작하는가(...)” 40이다. 지젝은 메이야수의 작업을 현실 자체에 대한 실정적 파악을 긍정했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 유비하며, 그러한 구도 속에서는 “주체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내속적 비틀기/휨”과 “주체와 [상징적] 현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구성적인) 불일치 또는 비-상관성”이 고려될 수 없다는 점을 반복하여 주장한다. 41 바로 이렇게 주체와 객체, 의식과 대상 사이의 분열의 수준을 넘어- 분열을 주체의 편에서 다시금 상론함으로써, “‘가상들의 베일을 넘어선 곳에는 주체 자체가 그곳에 놓아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라캉은 “접근 불가능한 즉자존재를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즉자 존재를 주체 자체 내의 분열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42
이와 같이 라캉의 돌파가 상론해낸 바, “주체는 외부 현실의 일부인 대상들과 관련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대상적 그림자에게 사로잡힌다.” 43 결국 우리를 현실의 일부로 있게 하는 대상 a는, 그러나 동시에 ‘물자체’와 같은 실체에 대한 접근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며, 이는 “인식론적 실패 자체가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 우리가 현실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자 결과인 것이다.” 44 그래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상징계에 동반될 수밖에 없는 (라캉적) 실재는, 그런 점에서 우리 현실(혹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존재 또는 무의식의 주체)의 구조화 원리에 있어 원초적 아버지와 같은 외부의 ‘예외’가 아니라- 그 원리의 비전체라 할 수 있다. 반면 상징계의 제1작인으로서의 주인 기표/남근은 그러한 현실을 서열화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칸트의 ‘직관’에 상응한다. 즉 칸트식 초월론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실재/대상 a에 대한- 따라서 비전체에 관한 것으로, “주체를 내부로부터 탈중심화시키는 실재의 얼룩” 45의 부재가 바로 그를 특징짓는다. 따라서 지젝에 의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물자체/주관 외부의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주체 그리고 실재의 일부로서의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장 전체” 46인 것이다.
2. 상술한 바, 여기서 우리는 지젝이 근본적으로 헤겔적 태도로, 라캉에 입각하여(혹은 헤겔적 라캉주의라 할법한 방식으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을 해부했던 개요를 살펴보았다. 주체 이전의, 주체에 작용하는 현실이 있다는 것- 미분의 덩어리에서 (언어적)무의식의 주체로의 도약에서 상관주의의 도식을 다시금 탈구시키는 비상관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의 논의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47그러한 접근은 상당히 정교한 방식으로 주체의 차원을 쉽사리 말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유물론적 비판을 위한 우회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부족한데, 왜냐하면 라캉의 정신분석은 그 자체로는 사회적 실재의 헤게모니와 객관적 이행들을 실정적으로 섬세하게 분석하고 역사화 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변적 실재론이 현재 역사의 국면에서 등장해야만 했던 이유와 같은 것에 대해서, 정신분석은 침묵해야한다/하게되어있다. 하이데거에게서 은폐와 탈은폐의 구도를, 결정적으로는 라캉에서 상징계와 실재계의 구도를 전유하여 만들어진- 바디우의 진리로서의 ‘사건’ 개념이 철학적 담론으로서는 유용하지만, 결국 메시아적 순간의 현현이라는 사건 이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은폐’ 속으로 추상화시키는 데에 머무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젝이 그 자신의 메시아적 공산주의라는 기획에 있어 현실적인 이행을 위한 과정을 사유하는 일 없이, 마치 후기 라캉이 주체적 욕망에의 윤리를 강조한 것과 유사하게- ‘결단’이라는 주관주의로 답을 내리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는 모두- 주체의 충동을 통해 사회적 실재의 조각들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우회적이고 48,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실재 자체의 운동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구조적으로 한발 물러나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일종의 단자로서 정신분석의 위상을 사회와의 매개 속에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최종심급에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변적 실재론을 비판할 수 있는가? 독일관념론에 익숙한 이라면 우선 메이야수의 주장 전체가 칸트의 본체/예지체(noumena)론의 요란한 버전에 불과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칸트에게 본체란 오성의 대상이며, 감각적/감성적 직관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직관, 즉 지적 직관에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감각적 직관은 객관적인 대상, 즉 실정적으로 주어진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비감각적 직관은 대상에 대한 직관이 대상을 넒은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취하는 바, 여기서 대상은 어떤 지(intellect)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체란 직접적 직관이 불가능한, 감성의 초월적 형식으로서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대상에 대한 생산적인 개념이다. 49 그것은 이미 주체의 선험으로서의 범주의 표상작용과 시공간적 직관형식을 초월해있다. 달리말해, 이성원리에 따른 인과율로 통합되지 않는 것이 바로 ‘본체’인 것이다. 이 칸트의 ‘본체’에 대한 논의가, 메이야수가 덧칠한 사유이전의 존재- 즉 절대적 즉자로서의 선조성에 대한 지의 긍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지젝이 암시했듯, 상관주의의 한계 자체를 절대의 긍정적인 속성으로 돌림으로써 비상관적인 앎을 선취하는 과정이 이미 헤겔에게서 이뤄지고 있으며, 따라서 메이야수는 헤겔 속에서 헤겔을 비판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전개할 수도 있다. 50 그러나 우리는 메이야수의 논의 지평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는 실정적인 비판의 수준을 넘어, 메이야수의 기획이 완벽히 단독적인 것이라는 점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가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을 상론하는 데에로 나아감으로써 메이야수를 역사화 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변적 실재론의 비판에 있어, 지젝 식의 정신분석 개념이 지니는 공백을 헤겔- 마르크스를 통해서 채워 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에 대한 앎을 즉자에 대한 앎과 등치시키는 그의 접근이 암시하는 바, 메이야수는 ‘절대’와 같은 개념이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세계에 내속적으로 되어왔다는 사실이, 따라서 ‘인간의 세계’를 지우면 ‘절대’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으로 정립되어 왔다는 사실이- 철학에 있어 그 자체 생산적인 도약이라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곧 이어 보게되겠지만 이는 이른바 ‘칸트주의의 성과’라는 것과 하등 관계없는 진술이다). 달리말해, 메이야수는 자본주의/시간성으로서의 근대 이후 존재의 운동과 본질이 제2자연이라고 하는 것의 매개 속에서 이뤄져 온 것에 대한 철학의 객관적인 반응이 바로 ‘내속화된 절대’였다는 지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스피노자-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스피노자에게서 절대의 위상은 절대적으로 (세계에 대하여) 내재화 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신, 즉 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혹은 무신론)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헤겔에 앞서 절대를 세속화시킨 기획에 다름 아니었다. 51 여기서 주체와 객체/물자체를 분리시키는 칸트적 구분은 이미 선취적으로 극복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자연이라는 총체가 절대의 지평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이미 모든 객체와 더불어 인간 및 인간의 이성 또한 그러한 실체의 일부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인식론의 수준에서 이해된 칸트의 이율배반을 실체 자체의 측면으로 돌리는 동시에 이러한 작업을 절대에 대한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기대어 수행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절대자를 세계의 편으로 이끌었다. 이때 ‘세계’란 상관주의적 표상에 맺힌 대상들의 총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인간적 지평으로서의)세계란 이미 객관적인 전체 우주의 한 계기(그러나 존재와 생명의 분절되고 지양된 모습에서 보이듯 ‘개념 규정된’ 것으로서의 계기)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즉 헤겔의 세계는 절대와 유리된 것이 아니라, 절대 속의 세계이다. 그러나 헤겔의 절대는 부동자가 아니라, 모순을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는, 절대 내부의 변천과 이행이 상론되는 바의- 운동하는 한에서의 절대이다. ‘모순을 가진 절대’라는 그 자체 모순적인 개념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자신의 전개 속에서 대립항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동시에 품는다. 즉 그것은 주-객 혹은 즉자-대자가 최종적인 수준에서 합일된, 화해를 이룩한 계기로 이해되는 바, 이때 주체와 객체란 인간의 사회적 관계, 혹은 제2자연의 양태들을 구성하는 객관적인 대상들과 행위들(객체)을 산출하며, 그들을 자기 속에 품은 의식의 전개를 통해 고양되는 방식으로 자기(절대)를 향해 (영구적으로) 나아간다. 가족-시민사회-국가를 도정하여 절대(자기)에 다다르는 정신은 곧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로서 절대는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이 전제했던 부동적인 일자가 아닌, 상론되어야 할 세계의 사태 자체의 편에서부터 구성되는 실체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르크스에게 이르러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는가?
마르크스가 자본의 운동을 설명할 때, 신비화된 형이상학적 개념의 흔적을 청산한 상태로 정제하여 전유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헤겔의 ‘절대 내의 모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상품-화폐를 축으로 하여 임금, 지대, 이자 등의 여러 형태로 변환되면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는, 모순 속에서 운동하는 절대자로서의 자본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러한 생산적 전유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현실추상’이라는 실재적 개념- 철학사의 돌이킬 수 없는 성취와 조우하게 된다. 현실추상이란 사변, 추상, 형이상학과 같은 것이 이미 상품교환이라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메이야수가 즉자의 사유가능성을 부르짖을 때 전제하고 있는 바의)인간의 사유가 아닌,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스스로 산출하고 있는 사유 자체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의 관계로 전도된다는 점을 적시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가치’라는 추상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현실의 존재자들이 운동하게 되는 바의 추상에 대한 비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노동의 본질이 되는 ‘추상적 노동’이란 바로 그러한 현실추상의 핵 자체이다. 52 물신주의가 ‘객관적 사유형태’라는 기묘한 개념으로 지칭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철학은 스콜라적 사변에 머물러 있었던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사회적 실재 자체, 운동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떠맡을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악명 높은 테제는 바로 (유물론적으로 지양된)철학의 철학비판으로 독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로 되돌아오는, 운동하는 절대라는 것은 분절화하는 실증적 사유 속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인 바의 무언가가 이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가 결국 이것이었던 자기 자신에로 되돌아온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는 가치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서술이 된다. 그것은 상품을 통해 화폐로- 즉 이윤, 지대와 이자로, 임금으로 변화하며, 결국 가치 순환(혹은 헤겔식 표현으로는 "자기전개")의 목적인(telos) 자체인 상품으로 다시금 되돌아온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이 단순한 재산(저량)과 구분되었다는 점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이다. 헤겔에게 '절대'가 독립된 신이라는 한갓된 이름 자체와 구별되는 운동하는 실체였듯(실체는 주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정태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여러 현상 형태로 드러나며 운동중인 무엇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를 경유한 헤겔에 이르러 명백해진 것은 부동의 절대로서의 셸링적 동일성과 같은 것은 (이미)없었다는 것이고, 절대라는 절대, 즉자라는 즉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통해 여러 현실태로 드러나고 상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마르크스에 이르러 명백해진 것은 개념과 같은 것이 이미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산출되고 있으며, 철학의 대상은 바로 이러한 바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보편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여타의 작인들과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즉자란, 오히려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체계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가상에 불과하다. 결국 ‘절대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라는 추상적인 외면적 판단으로부터 출발하여 메이야수가 얻게 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 사유 가능한- 개념으로서의 절대(메이야수의 “카오스”)이다. 그러나 그로서 그가 잃게 되는 것은 사회적 실재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 이후 철학의 존재론적 조건 자체이며, 인간의 사유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사회의 사유에 대한 사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품 앞에서 그 자체로서의 즉자와 대자, 절대를 말하는 것은 스콜라적 독단으로의 회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윤, 임금, 지대, 이자는 그러한 절대(상품-화폐)의 다른 현상태들이며, 절대 속에서 나타나는, 절대를 품은 것들이다. 53 지극히 역사적으로 우연한 계기들을 거쳐, 제 2자연과의 상관성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실재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세계에서 절대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이다. 이러한 제 2자연은 이미 우주에 객관적으로 등록되어 있는바, 그 자체 이미 즉자이기도 하다. 메이야수는 사회 자체(이때 사회란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 고발하는 것의 유물론적인 표현이다)가 즉자의 일부라는 점을 보지 못한 채 사회와 즉자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가 발휘하는 소급적 힘 자체가 이미 자연이라는 사실에 관해 침묵한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비상관적(비인간적)절대에 대한 사유를 구축하려는(혹은 회복하려는) 메이야수를 물구나무 선 것으로 규정하고 다시 바로 세울 수 없을까? 메이야수가 신앙절대론과 다신교적 사유들의 각축이라 부른, 여러 믿음 체계 간의 난삽한 대립이란 결국 자본주의의 효과인데, 이는 절대자가 객관적으로 세계에 내속화 되었지만-마치 착취의 원천을 경험세계 속에서 가늠하지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그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실재적 구조로 인해 관념적 실천들이 그러한 절대의 바깥에서 그 자체로 합리화되며 자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상황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그러한 실재의 교착 상태를 관념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절대라는 절대- 외부적 절대에 대한 충동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상관성의 실재성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객관적 우주 속으로 자본이 깊게 등록될수록, 그와 무관하게 그저 존재하는 순진무구한 (세계에 비(non)-내속적이고 비인간적인)절대를 보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은 객관적인 것이 되어간다. 54 그런 점에서 메이야수의 작업은 그 실정적인 내용 이전의 착상 자체가 이미 세계에 대한 변증법을 구현하고 있는바, 이성/자본/역사의 간지를 예증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메이야수가 주관적 관념론이라 비난하는 절대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들은 역설적으로 관념적 극복을 통해 청산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달리 말해, 문제의 ‘상관주의’마저도 그러한 세속적 절대의 세부 작인에 불과한데, 근대적인 교환 및 생산 관계와 더불어 세속화된 지식과 신을 매개하고자 했던 당대의 이신론적 실천 자체가 실은 칸트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관주의가 구성주의적 환상에 가까운- 도달 불가능한 절대에 대한 개념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당대 실재의 변화가 절대자를 새로운 맥락으로 정초시키도록 상관주의적 사유를 발아시켰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를 유념하지 않을 때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낮은 수준의 관념론에 머문다. 즉 절대에 대한 일련의 실재적 문제계가 상관주의 자체에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에게 절대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체에 대하여 괄호쳐진 문제가 되었던 실재적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칸트의 시대가 탈속화와 세속화의 경계,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 봉건제와 자본주의의 경계에 있었던 시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즉 칸트는 과거 형이상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절대자의 존재를 실정적으로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계몽적인 시대에, 동시에 헤겔과 마르크스와 같은 방식으로 절대자를 철저히 내속화 시키기에는 아직 제 2자연이 철저히 자율화되지 못했던 시대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55 그러나 그러한 바의 계몽주의는 이어지는 실재적 절대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정확히 자본주의적 요소(선대제, 시장, 분업, 공납의 화폐화 등)의 증대의 다른 표현이었다. 칸트의 철학은 다만 그 높은 수준의 의식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분별하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칸트주의적 계몽의 명령은 이미 그 자체 부르주아 주체의 등장을 개념을 통해 맥락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이었다. 교환관계의 심화와 근대적 과학에서 연원한 신의 후퇴 속에서- 칸트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절대적인 것/객체의 본질로서의 물자체의 후퇴를 소묘하는 데에 바쳐질 수밖에 없었고, 그 빈자리를 이성 원리로 지탱시켜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상관주의는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여러 관념적 표상 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조건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했던 바, 그 자체 실재적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마르크스의 현실추상은 초역사적 존재론이 아니며, 초역사적 사변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자본주의, 그러나 존재의 규정에 있어 제 1의 작인이 되어버린 즉자로서의 제 2자연에 대한 대자적인 규정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추상이란 영구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전적으로 내속적인 실재의 문제계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실재하는 철학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는 비로소 최전선에 서게 된 철학의 유물론적 성취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후퇴하는 방식으로 절대라는 절대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나름의 진리가를 갖지만, 절대의 위상과 실재의 사태를 온전히 분별함에 있어 전비판적 몽매로 빠질 위험이 크다.
비판철학이 헤겔과 마르크스에 기대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재하는 지배와 체계의 운동을 상대하는 작업은 결국 어떤 수준에서든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적대적인 분할 속에서야말로 지배는 현실로 나타나며, 프롤레타리아트(혹은 노동자, 여성, 유색인종, 빈민, 자연...)는 객체로 전락한 자신의 위상을 인지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달리말해 주체와 객체라는 모순의 필연성이란, 가변적이고 이행 가능한 관계항 속에서 객체가 주체로서의 정립을 위한 투쟁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일성 내의 비동일성으로부터 후퇴하거나 모든 존재를 평탄화하는 작업은 모래밭에 머리를 파묻은 채 적의 실재를 외면하는 타조가 되거나, 모든 소를 검게 만드는 까만 밤에 머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존재론적 평면과 차이는 비판의 목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주어진 공리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세계와 무관한 절대에 대한 사유의 불능에 있어, 상관주의라는 지엽적인 작인에 모든 책임을 묻기보다, 외려 이 상관주의적 사유의 발아 과정 자체를 돌이킬 수 없는 제 2자연으로서의 절대의 위상변화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상관주의에 대한 메이야수의 물구나무선 비판은 이러한 지평으로 올바르게 끌어올려져야 한다. 즉 상관주의란 이미 그 자체 즉자이기도 한 제2자연의 절대화에 있어 그 도입부의 흔적이자 지표이다. 그리고 이는 실재적이다. 이러한 바의 실재의 매개가 극심한 세계에서(심지어 외계 행성에 대한 지분을 거래하고 있는 세계에서) 세계 내 존재로부터 독립된 즉자 자체의 비상관성은 외려 가상으로 드러난다. 인간중심적 환상과 주관의 자폐성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즉자와 대자가 분리됨 없이 동일한 지평 내부에서 공존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무기의 비판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사변적 비판의 전제가 될 수 없다. 상관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러한 절대의 자기원환을 끊으면 된다. 현실의 운동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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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젝의 『라캉카페』 3부 9장에 수록된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1절)와 『유한성 이후』에서 제기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2절)으로 구성된다. 1절의 주해는 지젝 특유의 주체론에 입각한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을 해설하고 있기에, 논의의 세부를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독자들은 2절의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만을 읽어도 무방하다. [본문으로]
- 상관주의란 선험적인 직관의 형식과 범주를 통해 주체의 표상작용을 경유한 현상(phenomena)만을 이성의 대상으로 한계 짓는- 칸트적 도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인식론 내에서 주체와 객체는 언제나 상관적이며, 그 외부의 실재는 말해질 수 없다. [본문으로]
-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정지은 역, 도서출판b, 2010. 202. [본문으로]
- 같은 책, 78-79. [본문으로]
- 슬라보예 지젝, 『라캉 카페』, 조형준 역, 새물결, 2013. 1111. [본문으로]
- 위의 책, 1112. [본문으로]
- 같은 책, 1113. [본문으로]
- 『유한성이후』, 119. [본문으로]
- 위의 책, 113. [본문으로]
- 같은 책, 116, 117, 118. [본문으로]
- 『라캉카페』, 1114-1115. [본문으로]
- F. 헤겔, 『大論理學』, 林錫珍 역, 벽호, 1983. 85, 104. [본문으로]
- 예컨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절대자를 주체로서 표상하고자 하는 욕구는 신은 영원한 것이라거나 도덕적 세계질서 또는 사랑이라는 등등의 명제를 사용했다. 그러한 명제들에서는 참된 것은 곧바로 다만 주어로서 정립될 뿐, 자기 자신 내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운동으로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 종류의 명제는 ‘신’이라는 낱말로 시작된다. 이 낱말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소리이며, 한갓된 이름이다.” G.W.F 헤겔, 『헤겔의 서문들』, 에르빈 메츠케 편주, 이신철 역, 도서출판 b, 2013. 35. "변증법적 운동 자체에 관한한, 그의 터전은 순수한 개념이다. 이리하여 변증법적 운동은 철두철미 그 자신에서의 주체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근저에 놓여 있는 주어로서 처신하며 그것의 의미가 술어로서 그에 속하는 그러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명제는 직접적으로 단지 공허할 뿐인 형식이다. 감각적으로 직관되거나 표상된 자기 이외에 순수한 주어, 즉 공허한 몰개념적 일자를 표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름으로서의 이름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예를 들어 신이라는 이름을 회피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낱말은 직접적으로 동시에 개념인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이름, 즉 근저에 놓여 있는 주어의 고정된 정지점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68. [본문으로]
- 동일성의 원리(여기서 동일성의 원리란 논리학의 동일률과 같은 것이 아니라, ‘같지 않은 것을 동일화 하는 사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를 비판하며 근대의 긍정적인 약속들을 철저한 부정과 비판, 반-목적론을 통해 조명할 수 있었던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이미 헤겔 변증법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적 전도 작업에 가까웠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본문으로]
- 『라캉카페』, 1116. [본문으로]
- 위의 책, 1119. [본문으로]
- 같은 책, 1120. [본문으로]
- 같은 책, 1122. [본문으로]
- 『유한성 이후』, 134. [본문으로]
- 『라캉 카페』, 1127. [본문으로]
- 문장수, "남녀성차에 대한 라캉의 구조적 정의와 그 문제," 철학연구 (129), 2014. 62. 63 참조. 문장수는 본문 곳곳에서 성차의 생물학주의적 설명을 지지하며 본인 작업의 신뢰도를 결정적으로 훼손시키고 있음에도, 라캉적 성차의 도식 전반을 비교적 충실하게 해석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앞의 책, 1127. [본문으로]
- 위의 책, 같은 곳. [본문으로]
- 『유한성 이후』, 110. [본문으로]
- 『라캉 카페』, 1131. [본문으로]
- L.G. 리히터, 『헤겔의 자연철학』, 양우석 역, 서광사, 1998. 131-141 참조. [본문으로]
- 위의 책, 140 참조. 리히터는 이를 “필연성의 총괄”로서 자연을 이해하는 경험주의와의 단절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 『라캉 카페』, 1132. [본문으로]
- 위의 책, 1132-1133. [본문으로]
- 이 개념은 “물”, “사물”, “물자체”, “큰 사물”, “이드” 등 다양한 개념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사물’은 한국어의 어감 상 객관적인 대상 및 실정적인 것을 가리키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물자체’는 칸트적 용례가 짙을뿐더러, 그 완전한 표기가 “das Ding an sich”라는 점에서 원 개념(das Ding)에는 없는 부가적인 의미를 덧붙인다는 혐의가 있다. ‘큰 사물’은 마찬가지로 사물이라는 어감을 비롯하여, 마찬가지로 ‘물’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독일어 Sache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큰’에 해당하는 형용사가 원 개념에 존재하지 않기에 부적절하며, 독일어 'Es'(그것)의 라틴어 표기 ‘Id'(이드)는 별도의 개념으로서 프로이트적 용례가 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연속성을 의식한 의역에 가깝다. das Ding이라는 개념이 라캉에 의해 상상될 수 없는, 즉 상징화되지 않는 외부로서 실재의 편에 있는 것으로 정립되었다는 점, 충동에 의해 순환되는 '대상 a'와 유사한 지위에서 논의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의 번역은 ’물‘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한편 대상, 물(건) 등을 의미하는 독일어 Sache와 Ding의 구별에 대해서는 From No Subject - Encyclopedia of Psychoanalysis, “Thing” 항목을 참고하라. https://nosubject.com/Thing#cite_note-1 [본문으로]
- 『라캉 카페』, 1134. [본문으로]
- 여기서 지젝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범주 속으로 하먼의 객체 지향적 존재론, 그랜트의 신-생기론, 브래지어의 니힐리즘을 소급하여, 정신분석적 범주를 통한 본인의 비판이 이들 모두에 적용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른바 ‘신 유물론’의 분파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는 다음을 참고. 크리스토퍼 갬블, 조수아 하난, 토마스 네일,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박준영 역, 호랑이의 도약. http://tigersprung.org/?p=2494 [본문으로]
- 앞의 책, 1136. [본문으로]
- 같은 책, 1138. [본문으로]
-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p. 166. 같은 책 113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같은 책, 1138. [본문으로]
- 이는 라캉적인 맥락을 지닌 표현이지만 공교롭게도 주체는 객체라는 헤겔의 언명과 겹친다. [본문으로]
- 같은 책, 1139.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메이야수에게 즉자와 절대자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그러나 즉자란 절대의 한 속성일 수 있었겠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은 결코 즉자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즉자와 절대를 등치시키는 메이야수의 논변은 이미 그 자체로 칸트의 비판이 전제하는 문제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 같은 책, 1139. 한편 1143 쪽에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월론적 상관성의 자기폐쇄를 깨뜨리는 것은 주체의 파악을 벗어나는 초월론적 현실이 아니라 주체 자체‘인’ 대상에의 접근 불가능성이다.” [본문으로]
- 같은 책, 1140. [본문으로]
- 같은 책, 1141. [본문으로]
- 같은 책, 1142. 대상 a가 실정적인 수준에서는 무이며, 애초에 박탈된 적도 없는 대상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라. 혹은 엄밀한 의미에서, 상징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실재계로 가닿는 것이 아니라, 실재계조차도 동시에 삭제되는 것임을 떠올려보라. [본문으로]
- 같은 책, 1143. [본문으로]
- 같은 책, 1145. [본문으로]
- 같은 책, 1146. [본문으로]
- 같은 책, 1147. [본문으로]
- 지젝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 가능하다: 정신분석이 밝혀낸 것은 물자체와 같은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주체는 물자체의 한 계기로서의 객체를 알뿐인 지위에 머물렀다. 칸트의 주체는 표상작용을 통해 인간의 감각/직관을 경유해 온 대상의 세계 속에 놓인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시사하는 것은 간단하다. 주체는 주체 자신에게는 투명했는가? 주체는 이미 그 자체 물인바(프로이트가 Id, 라캉이 das Ding이라 부른 것은 주체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투명한 앎 속에서 완결된 상태로 남아있을 수가 없다. 여기서 주체는 대상의 세계에서 한층 더 물러나 스스로 어떤 간극 속에서 운동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함에 던져진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이는 불가지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가 그 구조적 미완결성으로 인해 우연적인 사건들에 존재론적으로 열려있다는 것, 따라서 주체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세계는 전적으로 가능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주체 또한 절대적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오랜 전통-모순에 따른 지양과 이행에 대한 우회적인 반복이라는 점에 주의해야한다. [본문으로]
- 이러한 우회성은 정신분석 페미니즘, 혹은 라캉에게 영향을 받은 알튀세르 및 제임슨을 비롯한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례와는 무관하다. 이들은 정신분석의 포용력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포용력에 의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 인간 정신이라는 대상을 벗어나 대상 자체의 운동에 적용되는 순간 만용에 가까워지는 까닭이 바로 이 우회성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프로이트적 범주를 통해 경제 자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다음의 작업을 보라. 토마스 세들라체크, 올리버 탄처, 『프로이트의 소파에 누운 경제』, 배명자 역, 세종서적, 2017. [본문으로]
- noumena/phenomena의 정확한 위상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 Nicholas F. Stang,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kant-transcendental-idealism/ [본문으로]
- Markus Gabriel and Slavoj Zizek, Mythology, Madness and Laughter: Subjectivity in German Idealism, A&C Black: London, 2009. “Introduction: A Plea for a Return to Post-Kantian Idealism” 참조. [본문으로]
- 클라우스 뒤징, 『헤겔과 철학사』, 서정혁 역, 동과서, 2003. 3부 1장 “스피노자” 참조. [본문으로]
- 가치 형태론과의 연속성 속에서 현실추상의 개념 및 추상노동에 천착하는 “가치 비판(Wertkritik)”의 개요를 설명하는 유용한 아티클로서 다음을 참조하라. Ernst Lohoff und Robert Kurz, “Was ist Wertkritik?.” Interview mit Ernst Lohoff und Robert Kurz. MARBURG-VIRUS, 1998.; 추상노동의 지배라는 테마를 통해 실정적인 정치의 영역을 생산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으로는 다음을 참고. Moishe Postone, “History and Helplessness: Mass Mobilization and Contemporary Forms of Anticapitalism,” Public Culture, 2006, 18 (1). [본문으로]
-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현상을 통해 드러난 본질이다. [본문으로]
- 서동진, “절대자본주의! 절대물신주의!,” 『문화과학』 (99), 2019. 참조. 여기서 서동진은 “물신주의의 절대적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정반대로 인격주의와 물성(Thingness)을 강변하는 문화(나아가 철학적 사변) 등이 커다란 지지를 받는 역설”(57)을 설명하며, “추상화가 증대되면 증대될수록 그와 짝을 이룬 물질적 현실 역시 배가된다”(61)고 주장한다. 이런 견지에서 사변적 전환(speculative turn)을 위시한 새로운 유물론은 그 자체 동시대 자본주의의 징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유한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식별할 수 있는 힘은 점차 야위어가고, 그것은 사람(person)과 사물(thing) 사이의 우연적인 마주침으로 치환된다. 추상화와 물화의 힘이 경험과 지각의 바닥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78) [본문으로]
- 칸트 시대의 이러한 실재의 상태는 18세기 당대를 풍미한 이신론에서 잘 드러난다. 신적 절대의 존재를 차마 청산하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인간의 세계(자연)에 현시하는 일은 없음을, 따라서 세계는 신적 예외의 우발성에 의해 조종되는 일없이 상대적 자율성 속에서 작동한다는 주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신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이 점차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자체이자,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이행의 매개이다. 칸트의 물자체론은 바로 이러한 실재의 변동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애매한 위상으로 후퇴했던 절대가 한층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헤겔에 이르러서인데, 여기서 절대는 이미 내속화되어, 모순을 통해 세계의 운동의 매순간 관철되는 어떤 원리(헤겔은 이를 정신이라고 불렀다)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절대를 셈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조건이자 전제로서 긍정되고 있는 것은 즉자로서의 제 2자연의 존재론적 위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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