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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문화와 적대 / "적대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있는가?- 정강산의「문화와 적대」에 관한 토론문"(정용택)

by 정강산 2022. 4. 30.

(뉴래디컬리뷰 2022년 봄호에 선게재된 글입니다.)

 

 

문화와 적대

 

정강산

 

소비자가 직접 분류할 무엇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생산자들이 소비자를 위해 그러한 분류를 다 끝내놓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는 문화 산업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진다.”

-Th. W. 아도르노.

 

1

문화란 무엇인가? 이것은 동시대의 문화 양상을 논하기 위해 선취되어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문화의 정의에 따르는 애매함과 곤란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각주:1] 문화의 범주에 관한한 수많은 모델들이 각축해왔고, 여전히 각축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하여 실정적인 대상으로서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문명생활양식에서부터 규범상징체계에 이르는 모델들의 언저리에서나마 잠정적인 규정에 도달하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문화란 칸트식 취미판단(미적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 실천의 총체라 하겠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암시적이며 비규정적인 영역으로서,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라 불러 온 것이 명백히 편재하게 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문자 문화가 언어를 비롯한 커뮤니케이션의 기술들, 시청각적 예술, 미디어 생산물 등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것이 정치’, ‘생활’, ‘국가등의 낱말 뒤에 붙을 때는 해당 장(field)의 관행과 습속 등을 의미하게 된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언어와 예술에서 표현은 언제나 무의식을 전제하며, 관행과 습속은 설명되지 않은(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남아있어야 성립하게 된다.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순수이성으로도, 실천이성으로도 적절히 포착되지 않는 제 3의 지반에 놓인다. 달리 말해 많은 경우 문화는 거기에 그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통속화된 마르크스주의에서 특정한 신사회운동의 경향을 단지 문화적이라고 표현할 때, 거기에는 그 실체와 대상의 모호함에 대한 불만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좋을 것이다.[각주:2] 물론 제국주의의 문화적 동화정책에서부터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 문화혁명 등에서 사고된 것처럼 역사 속에서 아주 첨예한 전장으로서 부상하게 되기도 했지만, 합목적성이 없이, 자족적인 취미판단의 대상으로 성립하는 문화는 그 자체로 상대주의를 내재한 경향과 함께 초월적인 경향을 띠곤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자족적인 문화는 전장으로서의 문화가 성립하기 위한 선차적 조건이었다.

물론 우리는 문화라는 대상의 모호성을 그저 성토하는 데에서 그칠 수 없으며, 문화를 실체화하여 구체적인 대상들로 범주화된 문화의 목록을 제시하는 경향과도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를 전체 역사와의 관계 하에서 내속화함으로써, 문화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게끔 한 실체를 살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참된 변증법적 접근은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문화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근대성, 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제 조건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문화란 정확히 근대/자본주의의 증상이며, 근대/자본주의의 문제계이다. 이는 무엇보다 중세에 편재했던 신적 총체성 속에서 인간은 어떻든 간에 문화라는 별도의 생활영역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예증된다. 반면 농업 생산성 발전에 따른 원거리 교역의 증가에 의해 추동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의 발현과 함께- 인간 고유의 생활세계의 기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두드러지게 되고, 이어 생산과 소비, 작업장과 가정의 분리 자체를 구심으로 하여 분화되고 물화된 인간의 표현과 창조성의 영역이 나타나게 된다. 근대의 전개는 곧 문화의 생성과정이라 할 수 있다. 미분의, 막연한 삶의 영역들이 문화로서 소급되고, 이내 문화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문화 개념의 성립과정을 볼 때도 명백히 드러난다. 문화의 범주를 최초로 명문화한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B.Tylor)의 작업에서, “문화는(...) 지식, 신념, 예술, 도덕, , 관습, 그리고 사회구성원에 의해 획득된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각주:3]로서 규정된 바 있다. 이때 지식, 신념, 예술, 도덕, , 관습, 능력, 습관이 함의하는 포괄성과 보편성에 주목한다면(대관절 이 범주들을 벗어난 인간사의 문제가 존재할 수나 있겠는가?), 여기서 문화는 세속화된 인간의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문화는 애초의 도입에서부터 그 자체 물화된 제2의 자연으로서, 신 이후의 시간대로서, 근대성의 효과로서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하여 문화라는 것이 예술에서 가장 높은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중론이 옳다면, 그 까닭은 위와 같은 인간의 모든 실천들이 예술을 통해 집약되며, 그 모습 그대로 흔적을 보존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예술은 물화된 인간의 실천 전반을 사상(abstraction)하며 그들을 자신의 재료로 삼는 특수한, 그러나 근대의 제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물화된 실천이다. 문화의 대표적 담지자로서의 예술은 또한 취미판단이 작동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즉 문화는 세계의 제 부문과 떨어진 자율화된 예술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현하게 된다. 노동과 놀이라는 대립쌍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예술의 대립을 표지한다면, 문화는 그와 같은 분리를 전제로 하는 취미판단적인 생활의 영역들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는 언제나 향유(enjoyment)의 문제를 동반했다. 대상을 누릴 만한 것, 즐길 만한 것으로 여기고, 취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문화의 영역에서는 결정적으로 된다. 이는 시설적 편리함과 오락적 여가에의 접근가능성이 담보된 상태를 문화생활이라 부르는 일상적 용법에서 웅변적으로 나타난다.[각주:4] 여기서도 문화는 (자본주의적)발전의 과실로서, 혹은 그러한 발전의 필연적인 후과로서 주어지며, 이미 모종의 잉여에 관련된 것임이 전제되고 있다.

즉 문화는 (무자비한)생산에 기대면서도 생산과 일치하지는 않는, 과잉이(). 칸트식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필연이라기보단 자유의 영역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누림직한 잉여로서의 문화는 단지 물질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요컨대 세잔(P.Cézanne)농부는 [심미적인]풍경을 모른다고 단언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한편으로 문화와 같은 것이 이와 같은 세계로부터의 잉여적이고 관조적인 거리(혹은 생활세계로부터의 분리)를 확보하는 주체성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 민중문예운동의 실천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예컨대 작업의 네러티브를 계급적 당파성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든, 향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든, 그와 같은 문화의 생산을 민주화하는 것이든) 그와 같은 문화의 자율성과 관조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왔다.

바로 이런 지평에서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정치경제적 변혁 이후엔 문화에서의 변혁이 별도의 실천과 노력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르쿠제(H. Marcuse)긍정적 문화에 대하여에서 그와 같은 자율화된 부르주아 문화의 기만적이고 유보적이며 초월적인 특징을 비판했고, 홍위병들은 마오를 따라 혁명 이후에도 잔존하는 봉건성과 자본주의의 잔재를 문화에 돌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위와 같은 일련의 흐름에서는 문화가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배치 및 갱신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는 이해가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는 교육기구, 종교기구, 가족기구, 정치기구, 노동조합기구, 커뮤니케이션기구, [필시 예술의 생산과 배급과 관련되어 있을]‘문화기구등을 아우르는 사회적 장치의 총체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SA)를 논한 알튀세르(L.Althusser)의 작업에서 비교적 명확히 표명되었으며,[각주:5] 그보다 앞선 시기에- 동의에 의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을 규명한 그람시(A.Gramsci)헤게모니론에서 또한 대두된 바 있다. 이러나저러나 이 모든 접근들은 문화가 세계 그 자체는 아닌 바의 별도의 생활영역으로 성립되어 있는 근대적 조건 하에서 착안된 기획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장기 지속하는 근대의 지평에서 현상하게 되는 문화는 암묵적인 동조에 의한 비 의식적 실천들과 이데올로기가 상연되고, 주체의 자기 동일시와 지양이 이루어지는 바의, 향유와 취미판단의 공간이다. 이 같은 문화의 외견상의 자율로 말미암아, 문화에 관한 모든 의미 있는 논의는 그 배면의 타율을 규명하는 데에 집중해왔다. 그 연장에서 마찬가지로 문화는 전체 사회의 여느 부문들이 그러하듯 적대로 균열된 세계를 표지할 수 있는 한에서 생생하고 의미 있는 장소가 되어왔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문화의 구체성과 현실성은 자율과 타율의 변증법을 규제하는 적대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는, 문화를 비롯한 부분들의 자율은 적대라는 ()전체를 통해서만 타율적으로 규정될 수 있기에, 개별의 문화적 실천과 그에 대한 논은 그러한 조건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같은 인식에 근접한 여러 작업들을 알고 있다. 예컨대 자율적인취미판단의 영역들이 계급적으로 층화되어 있음을 논증함으로써 주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기호(favor)와 문화가 미적 감각을 재분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매개규정을 받게 된다는 점을 역설한 부르디외(P.Bourdieu)의 작업에서야말로, 문화는 지고의 순수한 형식이라기보다, 세속의 맥락에 놓인 더 없이 생생한 대상으로 나타난다.[각주:6]

혹은,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재현의 역사적 체제가 자본주의의 각 발전단계와 더불어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을 상론한 제임슨(F.Jameson)의 작업을 경유할 때 문화는 비로소 초월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하에서 제 조건을 정초하는 구체적인 장으로서 거듭난다.[각주:7] 또는, '새로움'을 천명하며 과거의 형식들과의 철저한 단절을 표방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적 당파성에서야말로 문화는 덧없는 자기표현의 악무한을 벗어나- 유효한 사회적 실천이라는 진무한으로 도약한다. 한국 아방가르드의 황금기였던 1970-1980년대의 민중문예운동은 전체와의 관계 속 제 자신의 철저한 타율성을 인식함으로써 문화를 첨예한 적대적 전장으로 상상하고, 또한 꽃피울 수 있었다. 달리말해, 적대는 문화의 활력과 생기의 원천이며, 문화가 (모순에 의해 균열난) 전체와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는 근대소설이 주체와 객체의 봉합 불가능한 적대라는 실재의 조건을 감지한 채 이를 어떤 식으로든 지양하려는 충동 하에서 성립했던 것과도 관련된다. 이때 적대란 대문자 역사, 대문자 세계의 모순과 그로부터 나타난 전선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는 적대를 내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든 적대를 가리킬 수 있는가? 오늘날 적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 바로 문화가 아닌가? 일찍이 아방가르드의 소멸이 공표되었으며, 그리하여 정치적 전위와의 공명 속에서 과거로 표상된 기존의 세계와 적대하려는 미학적 기획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각주:8]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후 미적 실천의 최전선을 자임했던 관계미학은 그러한 총체적 부정(적대)의 불가함을 인정한 채 실정적인 관계들에 자족하는 시대적 경향을 표지하는 것이었다. 한편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장소들은 자본수출과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점차 동질화되어 왔다.[각주:9] 이 과정에서 환원할 수 없는 차이로서 적대하던 공간들은 동일한 문화적 평면 내에 융화된다. 하비(D.Harvey)가 지적한 세계화 이후의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은 문화의 평면화 또한 시사했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화의 광범한 보급으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뚜렷한 층화는 진즉 사라졌으며, 부르디외 식 아비투스의 적대는 점차 무화되었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의기양양하게 선언한 슈퍼플랫의 세계에서, 하위 계층이 클래식과 미술을, 상위 계층이 힙합과 애니메이션을 탐닉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나아가 산업 전체는 미학을 중심으로 가치실현의 전략 일체를 재편해왔고, 상품은 그 어느 때보다 심미적인 대상이 된다. 이내 서동진이 주목했던 바와 같이, 노동력 상품조차 문화의 초월적이고 미적인 언어 하에 재배치된다.[각주:10] 산업생산과 문화라는 적대적 구분은 서로를 향해 완전히 허물어진다. 여기서 문화는 세계와 분리된 특정한 생활영역이라기보다는 세계 전체, 세계 일반으로서 나타난다. ‘기체상태의 예술은 이 같은 상황을 요약하는 효과적인 개념일 수 있을 것이다.[각주:11] 이제 문화는 공기와도 같은 것으로서 편재하며, 모든 것이 취미판단의 영역으로 소급된다. 순수이성 속에서 파악 가능한 대상으로서 성립했던 대문자 세계는 스러진다. 제임슨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이 새로운 단계에서 문화 자체의 실제 영역은 확장되어, 문화적인 것은 더 이상 초기의 전통적이거나 실험적인 형식이 아니라, 쇼핑, 전문적 활동, 종종 시청각적 형태의 다양한 레저, 시장을 위한 생산과 시장 생산물의 소비, 실로 가장 비밀스러운 층들과 일상의 장소들을 아우르는- 일상적 삶 자체의 도처에서 소비되는 방식으로 시장 사회에 겹쳐진다. 사회적 공간은 이제 완전히 (...)문화로 포화된다.”[각주:12]

 

이와 같은 조건을 하나의 개념으로 총체화하고자 했던 시도는 그에 앞서 기 드보르(G.Debord)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제시한 스펙터클이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의 단순한 볼거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후기자본주의 하에서 한층 높은 강도로 물화된 문화 일반의 양태와 위상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그리하여 이하의 구절에서 스펙터클대신 문화를 대입하여 읽었을 때, 우리는 그의 텍스트의 핵심적 의미가 얼마나 명증하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 스펙터클은 사회자체, 사회의 부분 그리고 사회 통일의 도구로서 동시에 제시된다. 사회의 부분으로서 스펙터클은 특별히 모든 시선과 의식을 집중시키는 영역이다. 스펙터클은 이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악용된 시선과 허위의식의 장소이며, 그것이 실행하는 통일은 보편화된 분리의 공식적 언어에 불과하다. (...) 총체적으로 파악된 스펙터클은 기존 생산양식의 결과이자 동시에 그것의 기획이다. 스펙터클은 현실세계에 과도하게 덧붙여진 부가물이나 장식물이 아니다. 스펙터클은 현실사회의 비현실성의 중추이다. 스펙터클은 정보나 선전, 또는 광고물이나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이라는 특정한 형태 아래 사회를 지배하면서 오늘날 삶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각주:13]

 

실로 사회자체이면서도 사회의 부분이자, ‘사회통일의 도구로서 나타나는 바의 문화란 실로 오늘날에까지 유효한 문화의 모습인바,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이 야기한 효과로서, 조작된 향유라는 새로운 문제계를 제기한다. 기존의 이미지와 텍스트, 오브제들이 처한 맥락을 재편성하는 전용(détournement), 무목적적인 방식으로 도시공간을 누비는 표류(dérive) 등 드보르를 비롯한 상황주의자들의 핵심적 실천들이 매개되지 않은 경험을 발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던 것은 조작된 향유의 배면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문제를 가장 주의 깊게 경계했던 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Th.Adorno)일 것이다. 그의 논의는 때로 전통적인 기악과 클래식, 교양소설 등의 고급문화를 엘리트주의적으로 옹호하며 영화, 라디오, 잡지, 만화 등의 대중문화를 막연히 비난한다는 오명을 사곤 하지만, 그가 주목했던 실재의 단면은 보다 심오하다. 문제는 대중문화 자체가 전통적인 문화적 대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적 산업의 동학에 깊게 연루되어 생산된다는 사실이며, 그로서 고전적 예술 형식들이 부르주아적 세계의 논리의 효과로서나마 보존하고 있던 유토피아적 계기를 압살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화 산업의 생산물은 여가 시간에조차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노린다. 개개의 문화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휴식 시간에도 잡아 놓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환이다. 어떤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이건 언뜻 보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작용을 사람들에게 가하려 한다.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 든다. (...) 중세의 건축 감독도 교회 창문이나 조각품의 주제를 의심의 눈초리로 면밀히 조사했겠지만, 오늘날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가공하여 최종적으로 유통시키기 위해 대단히 위계화된 구조를 지닌 스튜디오가 이들 소재들을 검토하는 치밀성에는 못 미칠 것이다.”[각주:14]

 

문화산업의 대두는 아도르노에게 있어 총체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주도면밀한 촘촘함과 매개의 심화를 시사한다. 요컨대 문화산업론이 의미하는 것은 문화가 이윤원리에 의해 규제되는 바의 생산 대상으로서 고찰되고, 계측되고, 인식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성립하며, 전례 없는 수준의 물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서히 학제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문화연구와, 뒤이어 문화를 과학적 탐구의 중심으로 격상시킨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은 문화와 생산이 포개어진(그리하여 세계에 관해 논하려 할 때 문화를 우회할 수 없게 된) 후기자본주의의 증상을 맥락화하는 동시에, 시장을 통해 실체화된 문화의 위상을 긍정하기 위한 일종의 마중물로서도 기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현상학인 바의 경제를 경유하여 스스로 자체의 완결된 세계로서 몸집을 불릴 때, 사유는 그것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재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화는 시장을 통해 어디에나 있는 것이 됨으로써 ‘(생산의 외부에서)그저 있는 것이라는 그 고전적인 위상을 상실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의 고통에 둔감하게 하고, 모순을 견딜만한 것으로 봉합시켜주는 통치의 기술로서 강화되며, 거의 무한에 가까워 보이는 자유로운 향유의 공간을 가장한다.

 

4

오늘날 그 풍경은 유튜브의 알고리즘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사회 내에서의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와 무료함, 소외감이 자리하는 곳에서, 막간극처럼 언제 어느 때나 간편히 소비되길 기다린다. 요컨대 그것은 출퇴근의 지옥철이 만들어내는 열기를, 저녁의 적막을, 고립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고요를 파고들며, 그것을 참을만한 것으로 벼려낸다. 더불어 유소년에서부터 중년, 노년에 이르는 모든 이들이 그 체계의 생산과 소비에 수평적으로 참여하며, 반려동물, 부모, 연인 등과의 일상에서부터, 조두순이라는 에 대한 단죄라는 윤리적 테마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 사고까지- 가능한 거의 모든 실재의 단면들은 문화 컨텐츠로서 재가공된다. 그리하여 삶 자체가 잠재적인 이윤의 원천으로 성립한다. 그 생산과정에서의 최대한의 자율과 다양성 이면에는 특정한 플랫폼 기업의 이익과, 광고로 표상되는 기업들의 가치실현 과정에 기생하기 위한 처절한 자발적 노동이 우겨넣어져 있다. 요컨대 11미디어 시대라는 문화의 황금기를 웅변하는 유튜브는 모든 노동과 지배의 흔적이 탈각되어 있는 형태로, 문화의 바다를 구축한다. 알고리즘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향유의 원환운동에서 일견 무엇을 어떻게 향유할지에 관한 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나, 그 속에서의 감각적 경험은 알고리즘의 배치 및 그것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이윤원리에 의해 철저하게 조절된다.

한편 각종 경연프로그램들이 실시간 시청자투표로 화자와 청자 간의 쌍방향적 소통을 내세우는 바로 그 순간에도, 시청률을 고려한 PD의 철저한 각본과, 방송광고 매출 점유를 숙고하여 그것을 승인한 이사진과, 이윤동기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의 생리는 민주화될 수 없다. 아프리카TV, 트위치 등의 플랫폼을 통해 개인 방송을 송출하는 스트리머(streamer)들에게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구독자들을 거느린 기업화된 스트리머들은 그때그때 변동되는 유행과 소비 패턴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여느 황색언론과 마찬가지로 즉자적인 충동들을 전유할 수 있는 장치들을 활용하여 컨텐츠의 목록을 만든다. 진실한 소통의 창구, 주류 미디어가 소화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기획이라는 찬양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끌지 못하면 버려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경쟁법칙은 일견 민주적으로 보이는 문화의 영역에서도 주목의 강도 및 규모를 축으로 여과 없이 작동하는 바, 패륜적이고 성차별적이며 폭력적인 언행들과 함께 극단적인 상황을 조작하여 방송을 진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켜 온 철구와 신태일 내지 로건 폴(Logan Paul) 등은 동시대 문화산업에 내재된 관성의 귀결이자 지표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더불어 서사의 전개와 결말, 편성을 시청자의 결정에 내맡기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드라마와 영화는 이제 소비자들의 정보와 기호를 파악하여, 차후에 맞춤형 컨텐츠를 소비하도록 유도하거나, 판매 가능한 데이터 자산을 누적시킬 수단으로서 설계된다. 최근 넷플릭스(Netflix)가 주도해온 이 같은 경향은 서사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결정의 분기점에 직접 현실의 상품을 개입시켜, 여기서 발생하는 정보를 마케팅의 재료로 삼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문화가 연이은 가치사슬 내부로 통합된 채 축적의 한 단계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사례이자, 주체의 능동적인 행위를 체계의 작동에 수동적으로 결합시키는 자본에 의한 이성의 간지(Cunning of Reason)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이 같은 드라마, 영화, 디지털 기반의 게임 등에서 이용되는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interactive storytelling)은 문화의 배분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만적인 충족감으로 가상을 심화시키며, ‘(상품을)선택하는 주체라는 소비사회의 피상적인 주체상을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여기서 호명되고 있는 것은 모더니즘적 실천들이 상대자로서 설정했던- 내면에 침잠하는 반성적 주체, 혹은 고전적인 스펙터클 장치가 표적으로 삼았던 수동적인 관객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관철시키는 포스트모던한 취미판단의 주체다. 그러나 조작된 향유라는 테마는 여지없이 반복된다.

아도르노가 적확하게 표현했듯, “대중에게는 각계 각층을 위해 다양한 질의 대량 생산물이 제공되지만 그것은 양화의 법칙을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미리 자신에게 주어진 수준에 걸맞게 자발적으로행동하며 자기와 같은 유형을 겨냥해 제조된 대량 생산물을 고른다.”[각주:15] 역사적 민중문예운동이 표명했던 문화 향유의 민주주의는 소비 대중의 가상적 참여에 의해 우스꽝스럽게 실현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와 작품의 탈중심화라는 문제계를 천명한- 콘스탄츠학파의 한스 야우스(H.R.Jauß)와 볼프강 이저(W.Iser), 프랑스의 바르트(R.Barthes) 등에 의해 전개된 1960년대의 수용미학은 그 자체 문화가 산업이 됨으로써 그것의 생산이 불투명한 지평으로 밀려난 조건과 함께, 전후의 발전된 생산력이 가능케 한 소비대중의 부흥을 반영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60년대 중후반에 걸쳐 연달아 등장했던 문화연구, 수용미학의 의미심장한 동시성은 그와 같은 사실을 예증한다.

균질한 문화 자체에 의해 미적 실천의 갱신과 미적 실천에 대한 역사화의 가능성은 점점 요원해진다. 체계에 이미 촘촘히 매개된 경험은 무언가 다른 조건과 다른 출처를 가진 바의 감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이미 작가들 자체가 경험이 부재한 환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작품은 더 이상 세계를 감지하지 못하며, 작품이 변화된 실재의 지평을 포착하고 문제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점차 사라지고(이와 같은 구상은 비평의 존재조건이었다), 작품이 실재와 맺는 관계에 있어 구별되는 지점을 공들여 찾을 동인도 사라진다(이것이 바로 비평의 부재, 비평의 위기에 있어 제 1원인이다). 미술의 경우로 보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에서부터 상황주의와 플럭서스 등에 이르는- 20세기 전반을 숨 쉴 틈 없이 채웠던 다채로운 미적 경향의 각축이 사라지고, 90년대 이후로 현재까지 글로벌 아트라는 무미건조한 기술적(descriptive) 용어가 군림하고 있는 풍경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달리말해, 소비대중의 일상적 양식이자 소비사회의 재화로서 기체화된 문화는 시간에 대한 감각에 뿌옇게 들러붙어, 그것을 굴절시키고 재조직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선포한 바 있는 근대문학의 종언은 긍정적인 문화의 포화에 의해 시간성(혹은 역사라고 해도 좋다)을 간취하는 문학의 역능이 무너지게 된 데에 관한 진단이기도 했다. 시간성을 간취한다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사건들과, 그것을 가능케 한 어떤 구조를 감지함으로써 현재라는 미분의 연속성을 분절하는 것, 그리하여 ‘(현기증나리만치 정치적인)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문학은 알레고리적으로 역사를 지시함으로써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으나, 오늘날 그 작업은 거의 사멸에 이르렀다. 그와 같은 신호를 가시화한 8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적대로 얼룩진 역사적 과거를 억누른 채(혹은 망각한 채) 문화로 채색된 유사(pseudo) 과거에 침잠한다. 과거는 내밀한 기호(favor)의 기억으로 덩어리져, 분절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든 사건으로 격상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진의 지적대로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취미판단과 관계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인바, 그것은 애초에 문화에 고유한 것이었으나, 이제 실재하는 역사를 잠식하는 수준으로 거대하게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미일상호방위조약에 저항하는 안보투쟁이 있었던, 1960년이라는, 일본사회의 구체성과 현실성을 구성하는 단독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해 무화된다. “1960, 보비 비가 러버 볼을 부른 해다.”[각주:16] 과거 전체는 시간의 지평에서 탈각되어, 취미판단의 미분적, 자족적 형식으로 화한다. 취미판단의 형식이 거하는 곳은 분절되지 않은 비(non) 시간으로서 영원한 현재라 할 법한 무엇이다. 그것은 애초에 객관적 표상과 무관하며, 따라서 어떤 분절도 허용하지 않는 정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초월론적 자기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긴 하나, 이처럼 미분된 시간으로 유폐된 주체에 관해 제임슨은 일찍이 의미작용(혹은 의미상의 분절)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의 정신분열증자(schizophrenic)”[각주:17]라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이는 보편적인 증상으로서, 한국에선 1990년대가 그 같은 문제계가 가시화된 분기점이 될 것이다.[각주:18] 예컨대 2021년을 BTS의 빌보드 4관왕, 도쿄올림픽, 무야호, 머니게임, 아이유의 뮤비, 오징어게임, 제로투 댄스, 유재석의 MBC 방송연예대상 수상 등의 집적으로 요약하는 흔한 연말 서사는 문화적 향유의 연속체에 의해 잠식된 역사를 보여준다. 이제 문화가 세계 그 자체가 되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향유의 연속체가 21년의 실재 자체를 요약한다고 할 때, 문화는 세계의 부분이면서도 세계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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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대에 멀끔히 전시된 상품은 애초에 적대를 표백함으로써 성립하는 대상이다. 마르크스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생산이라는 장소에 다다라서야 그 균질한 표면 너머의 적대와 균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품이 된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문화는 자유의 왕국에서 필연의 영역으로 떨어진다. 역사의 전장이었던 문화는 사적 자본의 각축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과잉과 과소가 병존하는 동시대의 역설적인 현상의 실체이다. 컴퓨터 게임, 웹소설, 웹툰, 음원 스트리밍, SNS에서부터 유튜브,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온갖 종류의 전시장과 체험관, 영화관, 레저 시설까지- 어디에서나 누림직한, 향유를 기다리는 문화적 대상들이 범람하는 동시에, 부정과 적대라는 일체의 전선은 추방되어 봉합 불가능한 실재의 지평에서 구체적으로 맥락화되는 문화는 부재한다. 작품들은 유의미한 연속적인 경향으로서 대두되기보다 단발적인 수준에서 명멸하며, 세계를 형식화하기보다 자폐적인 자체의 논리 내에서 공회전한다. 이를 덮어 가리기 위해 문화연구는 실체화된 문화의 목록을 나열하며 마치 애초에 일관된 전체로서의 문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균열도 없었다는 듯, 실정적인 문화영역들을 강박적으로 호출한다. 마르쿠제의 표현을 빌자면 문화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지반 위에 놓인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화의 왕국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경험과 향유, 여가와 삶 일체를 포섭하고 규제하는 자본의 심화된 지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포스트모더니티, 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혹은 순수자본주의, 절대자본주의 등으로 예표되어온 총체성의 핵심축을 구성한다. 적잖은 좌파들마저 BTS, 기생충, 오징어게임, 지옥 등 K-컨텐츠들의 약진 앞에서 사유를 멈추게 된다 할지라도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문화를 둘러싼 이 모든 착시와 난관은- 가치의 생산이든, 실현이든, 가치사슬의 한복판에 문화가 자리하게 된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면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의 특정한 발전을 제 조건으로 삼는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의 해방이란 그러한 조건으로부터의 절단을 의미할 것이다. 향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대라는 실재 자체가 직시되고 지양됨이 없다면 문화는 가상에 머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폐적인 문화의 원환운동을 멈추고, 동시에 문화를 소생시킬 방법을 모색해야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관된 실체로서의 문화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 해결책은 문화 자체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문화연구학회 4월 월례발표회 ∥ 2022.4.29

적대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있는가?
—정강산의 「문화와 적대」에 관한 토론문

정용택 (『뉴래디컬리뷰』 편집위원)

1. 질문: “문화와 적대”에서 적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의 제목이 ‘문화와 적대’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제목 그대로 ‘문화와 적대’의 관계 내지는 문화에서 ‘적대’가 갖는 위상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것이 중심적인 논점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진술들을 통해 우리는 발표자가 문화와 적대의 내재적 관계 또는 문화와 적대의 실천적 조우를 얼마나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화를 전체 역사와의 관계 하에서 내속화함으로써, 문화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게끔 한 실체를 살피는 일…”(1쪽); “문화는 전체 사회의 여느 부문들이 그러하듯 적대로 균열된 세계를 표지할 수 있는 한에서 생생하고 의미 있는 장소…”(3쪽); “문화의 구체성과 현실성은 자율과 타율의 변증법을 규제하는 적대 속에서만 발견…”(3쪽); “문화를 비롯한 부분들의 자율은 적대라는 (비)전체를 통해서만 타율적으로 규정…”(3쪽); “문화를 첨예한 적대적 전장으로 상상…”(3쪽); “적대는 문화의 활력과 생기의 원천이며, 문화가 (모순에 의해 균열난) 전체와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3쪽); “오늘날 문화는 적대를 내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든 적대를 가리킬 수 있는가?”(3쪽); “정치적 전위와의 공명 속에서 ‘과거’로 표상된 기존의 세계와 적대하려는 미학적 기획…”(3쪽); “산업생산과 문화라는 적대적 구분…”(4쪽); “적대로 얼룩진 역사적 과거를 억누른 채(혹은 망각한 채) 문화로 채색된 유사(pseudo) 과거…”(7쪽); “진열대에 멀끔히 전시된 상품은 애초에 적대를 표백함으로써 성립하는 대상…”(7쪽); “문화적 대상들이 범람하는 동시에, 부정과 적대라는 일체의 전선은 추방되어 봉합 불가능한 실재의 지평에서 구체적으로 맥락화되는 문화…”(8쪽)

그런데 글의 시작부터 “문화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고, 문화를 정의하는 것의 애매함과 곤란함에 관해 지적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문화란 칸트식 취미판단(미적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 실천의 총체”(1쪽)라고 명확히 그 정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정작 적대(antagonism, Streit, Widerstreit, Kampf)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선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발표자가 말하는 적대란 정확히 무엇인가? 물론 적대에 관한 다음과 같은 반복되는 진술들은 적대에 관해 발표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주체와 객체의 봉합 불가능한 적대라는 실재의 조건…”(3쪽); “적대란 대문자 역사, 대문자 세계의 모순과 그로부터 나타난 전선…”(3쪽); “마르크스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생산이라는 장소에 다다라서야 그 균질한 표면 너머의 적대와 균열을 발견…”(7쪽); “적대라는 실재 자체…”(8쪽)

하지만 이때도 “문화란 정확히 근대/자본주의의 증상이며, 근대/자본주의의 문제계”(1쪽), 또는 “문화는(...) 지식, 신념, 예술, 도덕, 법, 관습, 그리고 사회구성원에 의해 획득된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2쪽), “문화는 애초의 도입에서부터 그 자체 물화된 제2의 자연으로서, 신 이후의 시간대로서, 근대성의 효과”(2쪽), “문화는 (자본주의적)발전의 과실로서, 혹은 그러한 발전의 필연적인 후과로서 주어지며, 이미 모종의 잉여에 관련된 것 (…) 즉 문화는 (무자비한)생산에 기대면서도 생산과 일치하지는 않는, 과잉”(2쪽) 등등, 문화에 대해 주어지고 있는 규정과 설명의 구체성에 비해 전반적으로 모호한 상태로 나아 있다. 결국 문제는 적대가 무엇인가로 귀착된다.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이론 전통에서 적대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닌 개념적 다면체이다. 당장 발표자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현상학으로서 문화를 이해하는 이론적 준거점으로 삼고 있는 문화산업론의 창시자인 아도르노만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방대한 저작에서 적대의 다양한 개념적 본질규정과 이를 입증하기 위해 동원되는 현상형태들을 포착할 수 있다. 

첫째, 루카치로부터 시작된 소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일원으로서 아도르노는 자본과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집단들 간의 적대, 특히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적대를 집요하게 강조했다(다렌도프의 갈등 사회학에 대한 논평에서 말하길, “객관적인 적대는 통합에 의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급을 유발시키는, 사회의 경제적 근본 과정들은 주체들이 모두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았다. 이론도, 그리고 일시적인 현상들도 물신화시키고 싶지 않은 사회적 인식은 객관적으로 현존하지만 이중적 의미에서 배제된 계급들의 적대가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확인해야만 한다. 이러한 형태가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추측은 불가피하다. 객관적인 대립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매개되어 있는 적대이며, 가상이다.” Adorno, 1957/2017: 192f/248, 2019: 65–66). 

둘째, 그는 체계적 비판이론의 선구자로서 사회의 제 영역들 간의 적대적 상호작용을 이론화한다(Adorno, 2019: 81). 사회적 총체성에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공존에 대한 아도르노의 이야기 일부는 이러한 집단들이 의도적‧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그 영역들이 합리적 계획의 영역들인 반면에, 그들의 적대적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총체성은 대체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개인 대 전체로서의 사회 간의 적대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오늘날 이는 개별 행위자 대 사회 구조 간의 적대로 사회학 이론 내에 정립되어 있다. 

셋째, 발표자도 언급하고 있는 주관(주체) 대 객관(객체)의 적대이다. 더 정확히는 모든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주체적인 “매개”라는 관념론의 유산과 “객관적인 것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유물론적 유산 간의 적대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직접적이며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미 주체의 사유 및 경험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차이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가정된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직접적인 현실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상학적 본질직관Wesensschau이거나 기초적인 감각 자료에 대한 경험적 인지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은 오류이다(그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유물론은 신유물론에 적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도르노는 또한 모든 객관적인 내용은 주체에 의해 가정되거나 생산된 것이라는 구성주의적 관념론도 거부한다. 그러한 입장은 또한 주체성 그 자체를 주어진 직접성으로 물신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객관성/객체의 근본적인 주관적/주체적 매개와 유물론적인 “객관적인 것의 우선성”이라는 적대를 총체적으로, 변증법적으로 함께 사유해야만 한다. 

그 외에도 사회는 개인들 내부의 적대들을 수반할 수 있다(Adorno, 2019: 67)는 점, 즉 사회의 적대들은 개인들의 충동, 자극, 습관의 상호작용으로 계속된다는 서술이나 사회적 권력과 사회적 무력함 사이의 적대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그의 사회이론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Adorno, 1957: 218f, 2019: 67).

문화연구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적대의 개념이 그리 자명한 것이 아님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라캉-헤겔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슬라보예 지젝 간의 오랜 논쟁이 이미 잘 보여준 바 있다. 일찍이 샹탈 무페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는 적대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정확히는 자본-노동의 계급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적대는 생산관계가 아니라 동일성/정체성(identity)의 차원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주체의 위치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내에서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서, 즉 주체화 과정에 선행하여 객관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주체는 담론적 과정 자체의 우연성에 의해 사후적으로 생산된다는, 따라서 계급 주체들 간의 적대 역시 객관화할 수 있는 실재적 대립이나 모순이 아니라 동일성/정체성의 차원에서 나를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 동일성/정체성의 부정이라고 재규정하였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임금고용관계 내에서 생산자 혹은 노동자라는 주어진 사회적 동일성/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외적 타자인 자본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온전한 동일성/정체성 실현을 위해 그러한 자본가의 존재를 제거하고자 할 때,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노동자가 자신을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계급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로, 자본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계급적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적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 대한 논평(「담론 분석을 넘어서」, 1990/1992)에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무페가 적대라는 개념을 통해 라캉적 실재의 논리를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영역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시킨 최초의 기여자라고 인정하면서도 적대가 궁극적으로 우연적이며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로서 발명되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적대를 실재의 수준에서 상징계의 수준으로 후퇴시킨 것이라 비판했다. 

지젝에 따르면 라클라우와 무페의 담론분석은 “단순히 작은 조각, 우리가 그런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불가능성을 ‘투사’하거나 ‘외화’하는 현실의 잔여물”에 불과한 “적을 실정적인 (비록 이 적이 유령 같은지라도) 존재론적 실체로 외부화/구체화하여, 그 적의 절멸을 통해 균형과 정의가 회복될 것이라 주장”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담론분석이 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고, 단지 의미를 해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실재로서의 적대에 대한 급진적 함의를 완화하고 축소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라클라우는 사회적‧상징적 적대에 선행하는 근본적 문제로서 실재의 차원에 위치하는 것은 탈구(dislocation)이고, 적대는 여전히 동일성/정체성의 문제로서 상징계의 차원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답하였다. 

라클라우와 지젝의 적대에 대한 대조적인 이해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에 그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역사 전체에서 자본주의 근본적 적대를 상반되게 파악하는 두 가지 주된 흐름을 상징한다. 바로 노동을 자본에 대한 비판의 입지점으로 삼는 자본주의 비판과 노동이 자본의 지배의 토대이자 원천이라는 점에서 자본 비판을 노동 비판과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비판의 양식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에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적대를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대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으로 양화되는)이라 불리는 사회형태 Ⅰ와 그러한 가치의 실체로서의 노동이 취하는 다양한 가치형태들, 즉 상품, 화폐, 자본, 임금, 이윤, 가격, 이자, 지대, 가공자본 등과 같은 사회형태 Ⅱ들 간의 점증하는 모순에서 찾아 왔다. 대표적으로 모이쉬 포스톤은 노동/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비판의 입지점으로 삼는 모든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를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라 규정하고, 반면에 자신처럼 그것들을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적 대상,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반드시 폐지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새로운 마르크스 해석’이라 주장한다. 포스톤의 진술은 “노동계급은 가능한 미래 사회를 구현하기보다는 고통당하고 있는 현재의 필수적인 토대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에게 노동은 자본의 타자이기는커녕 자본 안에서 자본의 총체적 지배에 스스로 복무하고 있는 자본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가치비판 그룹을 대표하는 로베르트 쿠르츠의 생각과도 매우 유사하다. “지난 세기 맑스주의 노동계급의 운동은 결코 자본주의의 저승사자(저 유명한 맑스의 은유)가 아니라, 정반대로 자본주의적 사회화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동력이자 그것의 발전을 돕는 조력자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포스톤과 쿠르츠에게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적대는 상품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의 기본형태”인 한에서, 나아가 그러한 상품이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상화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노동의 모순에서 발생하는—상품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질적인 기술과정, 즉 노동과정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거나 증식하는 양적인 사회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역사적 동역학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의 움직이는 모순(moving contradiction), 즉 가치화/가치증식의 영구적 ‘위기’를 재현/표상한다. 

마찬가지로 지젝이 계급적대/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면서도, 실제로는 “계급적대의 원천”을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간의” 특수한particular 적대에 위치시키기를 일관되게 거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계급적대에 관한 라클라우식의 이론화는 모든 동일성/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뿌리 깊은 장애물로서의 정신분석학적 적대 개념을 대립하는 정체성들 간의 특수한 관계로서의 적대라는 계급사회학적 통념과 융합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에, 지젝은 일관되게 이를 반대해온 것이다. 
 

2. 토론: 오늘날 문화산업에서 적대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발표자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의미하는 것은 문화가 이윤원리에 의해 규제되는 바의 생산 대상으로서 고찰되고, 계측되고, 인식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성립하며, 전례 없는 수준의 물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5쪽).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문화연구와, 뒤이어 문화를 과학적 탐구의 중심으로 격상시킨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은 문화와 생산이 포개어진(그리하여 세계에 관해 논하려 할 때 문화를 우회할 수 없게 된) 후기자본주의의 증상을 맥락화하는 동시에, 시장을 통해 실체화된 문화의 위상을 긍정하기 위한 일종의 마중물로서도 기능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문화산업론은 이제 문화라 불리는 일체의 활동 및 대상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형태와 목적, 즉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사적 노동의 연관이 취하는 독특한 노동의 사회적 조직 형태인 상품생산관계 속에서 상품이 되어,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자본의 가치화(가치증식, valorization) 운동에 부합하는 그런 형태로 생산되고 있고, 또한 계속해서 그래야만 존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산업에서 생산되는 모든 문화가 결국 상품이라는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 발표자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대변되는 ‘문화 컨텐츠’를 제시한다. 

“적잖은 좌파들마저 BTS, 기생충, 오징어게임, 지옥 등 K-컨텐츠들의 약진 앞에서 사유를 멈추게 된다 할지라도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문화를 둘러싼 이 모든 착시와 난관은―가치의 생산이든, 실현이든, 가치사슬의 한복판에 문화가 자리하게 된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면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의 특정한 발전을 제 조건으로 삼는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의 해방이란 그러한 조건으로부터의 절단을 의미할 것이다.”(8쪽)

그런데 이때 발표자가 문화산업의 범위 내에서 전 세계적인 빅히트 상품이 된 K-문화컨텐츠의 예로 제시하는 것들이 과거에 극장에서 개봉하던 영화, 카세트 테잎 및 CD 등의 물리적 저장장치로 대량유통되던 음반 같은 것이 아니라 “재화나 서비스를 한 단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을 뜻하는 한계비용(marginal cost)이 기본적으로 제로 수준이 되어 상품의 가격을 거의 공짜로 만드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상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발표자가 예로 든 음악과 영화는 모두 유튜브와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시에 유통된다는 점에서 상품화된 지식 및 정보, 즉 지식상품(knowledge-commodities), 정보상품(information commodities), 정보재(information goods) 등으로 불리는 디지털 상품들과 형식상 동일한 것들이다. 일찍이 프레드릭 제임슨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영역판(1984/1992) 서문으로 기고한 글에서 문화상품과 정보상품을 노동가치론으로 접합하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향후 이론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런 식의 기술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산업’ 개념 및 상상력과 정신영역 속으로의 상품물신숭배의 침투현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상상력과 정신영역들은 독일고전철학 이후 언제나 자본의 도구적 논리에 대항하는 최후의 불가침 요새로 생각되어 왔다. 물론 그런 논리들—‘상품물화의 최고 단계는 이미지다’라고 말한 기 드보르의 개념과 같은 매개적 정식화—에 문제로 남는 것은 문화상품과 정보상품을 노동가치론으로 접합하는 데 발생하는 난점이다. 이것은 양적 분석, 그중에서 특히 노동시간(혹은 수많은 단위들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에 의한 분석과 ‘정신적’ 노동의 그리고 정보비트, 미디어 또는 오락 ‘생산물’과 같은 비물리적이고 측정불가능한 유형의 ‘상품’의 본질을 조화시키는 데서 발생하는 방법론적 문제이다.”(Jameson, 1984/1992: xv/22-23; 번역 수정; 강조는 인용자)

그런 점에서 발표자가 “가치의 생산이든, 실현이든, 가치사슬의 한복판에 문화가 자리하게 된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면”(8쪽)에서 이처럼 “문화가 연이은 가치사슬 내부로 통합된 채 축적의 한 단계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사례”(6쪽) 가운데 하나로 “특정한 플랫폼 기업의 이익과, 광고로 표상되는 기업들의 가치실현 과정에 기생하기 위한 처절한 자발적 노동”(6쪽)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한편으로 오늘날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문화상품이 곧 디지털 정보재의 형태를 띠며, 정보상품의 주류가 곧 디지털 문화컨텐츠가 되고 있는 “경제와 노동의 디지털화”의 맥락에서,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문화산업의 변화를 설명해야 할 이론적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관련하여 쟁점을 추가해보자면, 디지털 문화컨텐츠는 사실상 아무런 추가 비용과 직접적 인간노동을 투하하지 않고 온라인 플랫폼과 스마트 장치를 매개로 하여 무한히 재생산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가치를 지닌 상품이라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컨텐츠를 생산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오징어게임>을 시청하는 행위는 가치를 지닌 상품을 재생산하는 노동인가? 그것이 노동이 아니라면 유튜브 본사와 크리에이터에게 분배되는 이윤의 발생 원천은 무엇일까? 결국 노동가치론의 추상노동이나 사회적 필요 (재생산) 노동시간의 개념으로 디지털 문화컨텐츠의 재생산을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일각의 주장대로, 디지털 문화컨텐츠가 가치와 사용가치,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으로 대상화된 상품이 아니라 먼저 생산된 다른 상품으로부터 가치를 ‘이전’받았을 뿐 추가된 가치는 없는,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자산’(asset)에 더 가깝다면, 그래서 디지컬 문화컨텐츠의 높은 가격이 사실은 자본의 구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구의 주변부 지역들이나 다른 산업 부문에서 생산된 잉여가치(즉 착취된 잉여노동)로부터 추출된 ‘정보지대’(information-rent) 내지는 ‘지식지대’(knowledge-rent)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면, 오늘날 문화산업의 적대는 상품생산 및 상품소비를 특징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적대와는 다르게 그려져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어쩌면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진보평론』과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의 정보재 가치 및 인지자본주의 논쟁에서 제기되었(지만 끝내 해소되지 못했)던 쟁점들이 바야흐로 이제 K-문화컨텐츠를 중심으로 보다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제임슨의 제안을 따라 문화상품과 정보상품을 노동가치론으로 접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이론적 질문들을 결코 우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적대가 언제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면들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규정하는 관계의 구조적 제약, 자본축적의 위기와 결부된 역동적 모순을 가리키는 문제계인 한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이론적 비판 없이는 적대의 실천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Leslie A. White. "The Concept of Culture." American Anthropologist Vol.61(2) 1959. pp.227-228 참조. [본문으로]
  2. 주디스 버틀러. “단지 문화적.” 임옥희 역. 오늘의 문예비평통권 56 봄호 2005. 참조. [본문으로]
  3. Edward B. Tylor. Primitive Culture: Researches into the Development of Mythology, Philosophy, Religion, Language, Art, and Custom. Vol. 1 John Murray, 1920. p.1. [본문으로]
  4. 한편 영어식 표현에서도 'cultural life'는 예의 문화생활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증상으로서의 문화의 위상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겠다. [본문으로]
  5.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이진수 역. 백의, 1997. 156. 알튀세르는 여기서 이러한 ISA의 공간들이 사회적 전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6.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최종철 역. 새물결, 2005.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개념은 그 자체로 칸트식 취미판단에 근거한 자율적 문화에 관한 발본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ke University Press, 1991. [본문으로]
  8. 할 포스터.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 하는가?” 실재의 귀환. 이영욱 외 역.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0. 네오 아방가르드의 실천을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패한 반복으로 간주하는 뷔르거(Peter Bürger)에 맞서 아방가르드의 영구적인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 에세이는, 단순한 급진적 예술 경향과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종별성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선언과 형식적 단절을 경유한 총체적인 부정의 미학이며, 반복될 수 없다. [본문으로]
  9. 백기완의 시 아욱국”(2004)은 이 같은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맞이하게 된 자의 당황을 웅변적으로 표지한다. “(...)한숨이 안쓰러워 쫓기듯 정거장엘 다다르니 빼곡한 찻속은/ 귓속 찢어지는 알도 못할 미국노래로 더 만원이고/ 대학로 줄비한 간판들도 몽땅 미국말로 범벅을 했고/ 가분재기 온몸이 거꾸로 뒤집혀 왜괙거렸지만/ 더는 나올 게 없는 듯 신물만 나오는 아 나의 건강/ 나의 안정 나의 행복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거 어적이는데/ 가분재기 찌ㄱ 죽씬한 차가 재게 멎으며 소리친다/ ", 이 늙은 새끼 이거, 정신차려 임마" ” [본문으로]
  10.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돌베개, 2009. 135-140. [본문으로]
  11. 이브 미쇼. 기체 상태의 예술: 미학의 승리에 관한 에세이. 이종혁 역. 아트북스, 2005. 50-51. [본문으로]
  12. Fredric Jameson. The Cultural Turn: Selected Writings on the Postmodern 1983-1998. Verso, 1998. p.111. [본문으로]
  13.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역. 울력, 2014. 13-16. [본문으로]
  14. Th.W.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역. 문학과지성사, 2001. 193-194. [본문으로]
  15. 위의 책. 187. [본문으로]
  16.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 윤성원 역. 문학사상사, 2000. 140;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조영일 역. 도서출판 b, 2008. 17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7.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pp.26-27. [본문으로]
  18.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연구, 2018. 7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