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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그대들, 어떻게...살 수나 있겠는가: 복합 위기 속 지옥불반도

by 정강산 2024. 2. 15.

(뉴스페이퍼 제4호(2023.12.20)에 선게재됨.)

 

정강산

동시대 한국은 ‘지옥불반도’라는 수식이 약하게 느껴질 만큼 궁지에 내몰려 있다. 요컨대 사람들이 제도정치에 효능감을 가지지 못한다. 정치 위기다. 묻지마/쾌락형 살인과 도를 넘은 민원/갑질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속출한다. 윤리 위기다. 과로사가 줄을 잇고, 청년층은 자녀를 갖지 않으며, 노년층은 눈치와 빈곤 속에 목숨을 끊는다. 재생산 위기다. 
 이 모든 증상을 규정하는 하나의 메타적 위기가 있다면, 단연 변혁운동의 위기라 해도 좋다. 변혁운동의 위기는 곧 대안 서사의 망실이자 대항 주체의 소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나의 실존적 고통이 내 부족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현 세계로부터 부당하게 부과된 것이라는 서사와,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서사가 작동한다면 인간은 버티고, 싸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함께 다른 세계를 향한 도정에 나서는 광범한 타자들에 대한 공격성을 거두고, 지배와 파괴를 합리화하는 소여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구를 마련한다. 90년대 이후 서서히 가시화되어온 변혁운동의 위기는 그 같은 해방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소요를 예고했다.
 물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변혁운동의 쇠락은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현상이다. 성장의 과실로 다양한 상품을 향유하는 만큼 삶이 보수화되고, 복잡화한 계층 역학만큼 계급 전선은 혼탁하게 되며, 국가장치는 고도화되어 합법주의와 개량주의가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정체성에 기반한 신사회운동은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일정하게 성업한다. 
 그러나 ‘변혁운동’은 국가를 장악하고, 권력을 책임지며 정치·경제·문화 전 차원에서 기존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속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20세기 역사적 사회주의가 열어젖힌 이 운동은 특정 정체성의 집적을 초과하는 혁명 혹은 이행의 기획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2015년 이후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다. 2015년은 사회성격 논쟁이자 변혁운동의 이행 논쟁이었던 80년대 중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에 젖줄을 댄 세대가 완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그 문제설정 또한 ‘그야말로 완전히’ 해소된 듯한 세계로 진입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2015년은 사회구성체논쟁이 대두된지 30년, 딱 한 세대의 주기가 종료된 시점이다. 이 시기를 거쳐 변혁운동의 기억이 전무하며 소비사회의 과실과 신자유주의 파고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풍족하고도 역설적으로 음울한 세대가 사회 전면에 대두되었고, 부지불식간에 모종의 패러다임 전환의 징후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반까지 이어진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릴레이는 2015년 직전의 단말마로서, 사구체 논쟁에 기댄 변혁운동의 기억이 남아있는 학생사회의 마지막 결과물이었다. 당시 릴레이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자보는 희박해져가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문제설정을 처절하게 웅변했다.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후 학생운동에는 변혁운동의 어떤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이 시기를 거쳐 ‘국가’와 ‘자본’은 자연이 되어 학생사회의 어떤 의제로도 성립하지 못한 반면, 당사자 정체성의 순결주의는 시대정신이 된다. 2016년 이화여대 미래라이프 대학 신설 반대 시위는 그 같은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학생들은 ‘순수성’과 ‘비정치성’을 지키기 위해 놀랍게도 이화여대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연대를 철저하게 배격했고, 솔선하여 운동권 학생들의 참여와 발언을 막아냈다. 이는 주관적으로는 우발적인 전술상 판단일 수 있겠으나, 객관적으로는 의제의 발전적 확장에 대한 격렬한 거부와 당사자 정체성에 대한 물신적 고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위기의 징후는 다채롭게 터져 나왔다. 전통적인 변혁운동 진영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2021년, 급진적 사회운동 조직이었던 사회진보연대 기조를 따라 전국학생행진은 윤석열 지지를 천명했다. 민주당의 ‘위험한 포퓰리즘’이 파시즘으로 전화되는 것보다는 검찰 출신이라 법에 능통한 ‘법치주의자 윤석열’의 집권이 옳다는 기묘한 변증법적 판단이었다. 이는 검찰이 억압적 국가기구의 기능인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의 붕괴를 보여줬다. 
 2022년, 불과 수십 년 전 이한열이 산화했던 연세대 앞에는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학생이 등장했다. 이는 변혁운동의 기초적 프로그램인 노학연대(노동자-학생연대)가 완전히 잿가루가 되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조성주의 주도로 정의당 내 의견그룹 ‘세번째 권력’이 출범하여 당내 MZ를 중심으로 탈이념적 실용주의 노선이 대두되었다. 여기엔 장혜영, 류호정 의원 등이 합류했으며, 중앙대 대학기업화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김창인 청년정의당 대표 역시 힘을 싣고 있다. 이들은 이준석을 비롯, 오세훈 캠프에 합류했던 금태섭과 삼성임원 출신으로서 이재용을 두둔했던 양향자 등까지도 연대 대상으로 간주하는 반면, 진보당, 노동당, 녹색당 등과의 연대연합에는 부정적이다. 
 세계와 더불어 좌파와 변혁운동 진영 또한 표류하며, 바야흐로 모든 가치가 붕괴하는 중이다. 동시에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는 국면이지만, 그 양상은 퇴행이라 할 만큼 미심쩍다. 나는 사회의 총체적인 이행 비전을 세우는 작업만이 변혁운동의 위기로 말미암은 일련의 사태들을 넘어서게 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물론 모두가 헤매고 있을 뿐,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낸 세력은 없지만. ‘식민지 반자본주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넘어 갱신된 버전의 총체적 사회상의 ‘2.0’이 절실하다. 그 같은 사회상을 간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분간 지옥불반도의 복합 위기를 인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