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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잊혀진' 미라이(Mỹ Lai):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학살

by 정강산 2023. 11. 29.

[공간 힘 전시 <주피터 프로젝트 no.2>(2022. 12. 6 - 12. 23)아카이브 섹션을 위해 번역한 글] 

https://spaceheem.com/jupitr/

 

주피터 프로젝트 JUPITR PROJECT

 

spaceheem.com

 

1972년 베트남의 나트랑 근처 작전 지역을 공격하는 중 대한민국의 군인들이 진격하고 있다. 한국은 1954년부터 1975년에 걸쳐 이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두 번째로 큰 외국세력이었다.

 

 

'잊혀진' 미라이(Mỹ Lai):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학살

 

 

By James Griffiths, CNN

Published 8:55 PM EST,

Fri February 23, 2018

 

 

쩐 티 드억(Tran Thi Duoc)은 군인들이 그녀의 마을에 왔을 때 16살이었다.

 

그들은 위장 군복과 헬멧을 착용한 채 길고 검은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군인들 뒤편으로, 그녀와 다른 마을 사람들은 북서쪽 이웃 마을의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연기가 밝은 한낮의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은 동양인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구사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서 나와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그 뒤 사격이 시작되었다.

 

(Tran)이 나중에 미군 조사관에게 말했듯이, 그녀는 땅에 쓰러졌고, 죽은 척을 시도했으나, 한 군인이 그녀를 보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그 군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쏴버렸죠.”

 

총알이 그녀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팔과 상반신을 찢어놨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쩐은 기절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부모님과 두 형제가 죽고 3개월 된 여동생이 다친 것을 발견했다.

당시 16세의 퐁니(Phong Nhi) 마을 주민이었던 쩐 티 두억(Tran Thi Duoc)은 한국군에 의해 이뤄진 학살혐의에 대해 미국 조사관들에게 증언했다(명료함을 위해 원본 이미지가 보정됨).

 

위장 군복을 입은 한국군들이 212일에 우리 마을로 왔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집에서 나와 다른 장소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쪽 어딘가에서 그들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경고 없이 쏴버렸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동시킨 마을 사람들 무리에 끼어있었고, 곧 그들은 우리를 향해 총을 쏘길 시작했다.

그 사격 장소에서 나는 엄청난 공포에 질렸고, 마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한 한국군이 나를 봤고, 나는 두 손을 가슴팍에 모은 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나를 쏴버렸다. 그 총알로 인해 내 손가락들은 부러졌고, 내 양팔이 찢겼으며, 나는 기절하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정신을 차려 일어났을 때, 나는 내 부모님 두 분이 죽임을 당했고,

내 두 형제들도 죽임을 당했으며, 내 어린 여동생(3개월)은 칼에 맞아 다쳤음을 알게 됐다.

 

수십 년 간 기밀로 유지되어 왔던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9682월의 그날 퐁니와 이웃마을 퐁낫(Phong Nhat)에서 총 69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한 달 후의 미라이 학살에 의해 가려지게 될,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에 대해 행해진 수많은 베트남전의 잔학행위 혐의 중 하나였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에 대중에 알려진 미라이 학살과 달리, 퐁니와 퐁낫에서의 살육은 21세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미군이 아니라 한국 군인들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기밀 해제된 미 정부 해외전보 및 보고서, 생존자들과 퇴역 군인들의 증언으로 기록된 잔혹한 행동 패턴의 일부이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의 잔학 행위에 대한 폭로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미국이 주도했던 그 분쟁에 관한 한국의 책임 논쟁을 촉발했다. 외국의 열강들에 의해 한국이 당했던 혹사 및 학살의 역사와 괴리되는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진행 중이며 여전히 매우 민감한 주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결정적인역할

 

19659, 당시로부터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했었던 전 육군 장성인 박정희 대통령은 수천 명의 한국 전투병을 베트남에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스페인과 대만 등의 군대로 이뤄진, 있음직하지 않은 그룹인 자유세계군사원조단(Free World Military Assistance Forces)의 대부분을 형성했다.

 

미 고등 군사 연구 학교(US School of Advanced Military Studies)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군대는 미 육군의 작전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 1972년에는 그들의 협력 세력이었던 미군의 수를 뛰어넘었다.”

 

미 고등군사연구학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320,000명의 한국 군인이 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을 순회할 것이었으며, 그 정점에서는 한번에 50,000명 이상이 베트남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분쟁에서의 한국의 역할은 서방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서방에서 베트남 전쟁은 대중문화를 통해 거의 대부분 미군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다른 국가들은 주변적인 지원 역할로 축소된 채 묘사되곤 한다.

 

한 무리의 붙잡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함께 보이는 한국군 병사들.

 

역사학자 이길재에 따르면, 이러한 파병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이었는데,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향하지 않고, 그로부터 멀리 이탈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비용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던 미국 정부에게 그와 같은 파병이 박대통령 스스로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길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 속에 놓여있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전은 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규모 원조를 계속하기로 결정한 촉매제였다.”

 

그는 한국의 참전은 미정부가 한국과 한국군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바꿔놓았다, 베트남전에 뒤이어 한국은 모범적인 의존국이 됐다고 덧붙였다.

 

1968년 초의 구정대공세에서 대전차 총으로 작전 중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여성 병사

 

구정대공세와 잔인한 보복

 

남한의 지원은 1960년대 중후반 내내 증가했지만 전쟁의 흐름을 돌리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1968년 초, 미국에 의해 베트콩이라 불렸던 북베트남인들과 그들의 혁명 동맹국들은 맹렬한 구정대공세를 개시했다. 그것은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36개 도시에 대한 대규모 기습 공격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자유세계군사원조단 및 남 베트남군은 잔인한 반격을 개시했는데, 그 잔인성은 한 AP통신의 사진작가가 사이공 거리에서 비무장 베트콩 수감자를 즉결 처형하는 응우옌 응옥 로안(Nguyen Ngoc Loan) 장군을 찍었을 때 미국 대중들이 마음속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 정보부의 총감이었던 응우옌 응옥 로안은 남베트남의 패망 후 미국으로 가 여생을 보냈다(*원문에 없는 별첨 도판).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여라: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전쟁의 실재의 저자 닉 터스(Nick Turse)에 따르면, 구정공세에 대한 대응은 순식간에 학살의 소동으로 변했다.” 몇 달 내에 미라이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었다.

 

퐁낫(때론 퐁넛으로 발음되는) 마을 근처를 순찰하던 한국 해병대가 저격수의 산발적 공격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JR 실비아 미 해병 중위는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에서 발생한 학살 혐의에 대해 군사 조사관에게 증언했다(명료함을 위해 원본 이미지가 보정됨).

 

“두 명의 여성과 작은 소년만이 발견된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그들은 헬기로 수송되었다. 

정찰대는 불타 무너진 집의 잔해 아래에 묻혀있던 두 명의 노인을 발견했으며, 

아주 많은 수의 시신들이 도랑 근처에서 모두 잡목에 덮인 채로 발견되었고, 

그 외 몇몇 시체들이 잔해에서 수습되었다. 

그들 전부는 심하게 불타 성별을 식별하거나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흔적들 더 아래로는 또 다른 많은 무리의 시신들이 두 명의 부상입은 여성들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여성은 정찰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공포에 질린 채 내내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당시 사진들은 본(Vaughn) 상병에 의해 촬영되었다.”

 

미군 조사에 따르면, 그 한국인들은 마을을 소탕하기 위해 진입하기 전에 박격포로 마을을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인근의 퐁니로 향했으며,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은 한국인들이 떠난 후 마을에 들어왔다. 남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보고서는 마을 주민들이 명백하게 세 그룹으로 모아져 사격되었다고 전한다.

 

많은 수의 희생자들이 칼에 찔려있었고, 한 젊은 여성은 가슴이 잘려나가 있었다. 69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JR 실비아 중위는 미군 해병대와 남베트남군과 함께 마을 맞은편 위치에서 벌어진 학살을 지켜봤다. 그는 조사관들에게 “(한국인들은) 우리가 퐁니에 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다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마침내 마을에 들어갔을 때, “정찰대는 두 명의 노인이 불에 탄 집 잔해 밑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고, 풀로 덮인 근처 도랑에서 많은 수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잔해에서 다른 여러 시신도 수습되었다. 시신 전부가 성별을 식별하거나 확정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타있었다.”

 

길 더 아래쪽에는 두 명의 부상당한 여성과 함께 또 다른 큰 무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라고 실비아는 말했다. “한 여성은 순찰대가 자신을 죽일까봐 계속 신분증을 내밀었다.”

 

조사관의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는, 미군이 촬영한 사진에는 근거리에서 총을 맞고 훼손된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그들의 집이 불타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당시 미 해병 부대의 역사는 그러한 행동이 일반적임을 시사한다. 래스본 톰킨스(Rathvon Tompkins) 소장은 한국 해병대가 총격을 받을 때마다 책임자들에게 말했다. “(해병대원들이) 한 마을에서 총격을 받았다고 생각해보라 ... 그들은 행군을 돌려 돌격하여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이고 ... 그것은 (베트남인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로버트 쿠시먼(Robert Cushman) 해병대 사령관은 한국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잔학 행위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가 사이공으로 보냈던 이들이다라며 덧붙였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 미국 장군은 한국의 잔학행위 혐의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진실을 위한 운동

 

기밀 해제된 미국 문서에 따르면, 퐁니 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두 달 후,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은 한국 측 책임자인 채명신 중장에게 긴급 대응을 요청하는 예비 조사문서 사본을 보냈다.

 

채명신은 웨스트모어랜드에게 한국군은 책임이 없다고 단언하며, 외려 베트콩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을 돌렸다.

 

채명신은 기밀해제된 해외 전보에서 베트콩은 한국 해병대가 일반적으로 입는 것과 유사한 위장 군복으로 변장한 채 여러 차례 그 지역에서 작전을 펼쳤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학살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모된 행위이자 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행된 것이라) 결론지었다.”

 

사건은 거기서 멈췄다. 한국의 비열한 거부를 대면했을 때, 채명신의 설명이 미 해병대, 베트남군 및 민간인들이 제시한 증거와 상반된다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조사관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터스(Turse)가 기록하여 정리했듯, 기밀 해제된 수십 개의 문서, 군법 청문회, 전쟁 범죄 조사에 따르면, 민간인 대량 살해가 전쟁 전반에 걸쳐 견딜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그 동맹군에 의해 벌어진 가장 잔학한 학살 혐의는 수사되지 않았고, 처벌되지도 않았다.

 

채명신 중장이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베트콩 게릴라들이 퐁니 학살을 수행했다고 비난했다(명료함을 위해 원본 이미지가 보정됨).

 

보고된 바- 한국군, 미군, 남베트남군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위한 베트콩 분파의 발악하는 시도와 함께 이 증거들은, 논리적으로 그 학살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모된 행위이자 무자비하게 결정된 것임을 결론짓게 한다.

따라서, 단지 위장 군복에 근거하여 그 사건에 대한 혐의를 한국군과 연관짓는 행위는,

사실상 적에 의해 고안된 악랄한 계획에 효과적으로 놀아나는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과

다름없음을 암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라이 학살은 좀처럼 없는 예외였는데, 그것이 전 세계의 1면 뉴스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미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가 책임자로 지목되었는데, 그는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3년 동안의 가택연금을 마치고 1974년에 석방되었다. 그의 상관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터스가 썼듯, 미라이의 공포는 대중의 기억에서 본질적으로 사라지게 되는다른 잔학 행위 혐의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 베트남 시민, 평화 운동가, 언론인, 미군 참전용사들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수년간 노력한 결과였다. 존 케리(John Kerry) 차기 국무장관이 1971년 의회에서 증언했듯이, “동남아시아에서 자행된 전쟁범죄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직급의 장교가 완전히 인지한 상태에서 일상적으로 저질러진 범죄였다.

 

반전베트남참전군인회(Vietnam Veterans Against the War)’가 주최한 윈터 솔져청문회에서 군인들은 증언했는데, 케리(Kerry)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개개인별로 강간하고, 귀를 잘랐으며, 머리를 자르고, 통신기에서 전선을 빼내 사람의 성기에 테이프로 묶어 전원을 켜고, 팔다리를 잘랐고, 시체를 폭파하고, 민간인에게 무작위로 총을 쐈으며, 징기스칸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마을을 파괴하고, 재미를 위해 소와 개를 쏘고, 비축 식량에 독을 탔으며, 전반적으로 남베트남의 시골을 황폐화시켰다.” 마크 하트필드(Mark Hatfield) 상원의원은 그 녹취록을 훗날 연방 의회 기록에 넣했다.

 

그들은 또한 동맹국의 행동에 관해 증언했다. 한 목격자는 윈터 솔져청문회에서 포로로 잡힌 북베트남 여군 간호사 4명을 한국 해병대에 넘겨준 과정에 대해 말했다.

 

해병대는 포로들의 손을 땅에 묶고, 그들의 사지를 벌려 묶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 명 모두를 강간했다.” 그는 한국군이 어떻게 여성들을 훼손하고 살해했는지에 관해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베트남 꽝남성의 퐁니 학살 희생자 추모비.

 

역사를 헤아리기

 

미국에서는 전쟁이 질질 끌어지고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전을 둘러싼 여론이 곤두박질쳤다. 결국 여러 대통령 행정부들이 국민에게 전쟁에 관한 거짓말을 해온 체계적본질을 폭로하는 [베트남전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스가 발간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구수정 한국-베트남평화재단 상임이사는 베트남 전쟁이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해외 (전투병력) 파병이었으며, 한국의 경제성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잊혀진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한국이 왜 전쟁에 참여했으며,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금지됐다고 말했다.

 

1999년부터 구수정은 주간 뉴스 잡지 <한겨레 21>의 베트남 특파원으로서 한국에 의해 벌어진 학살 의혹의 증거를 밝히는 데 일조했다.

 

2001,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은 방한한 베트남 정상들에게 불운한 전쟁에 참여해 의도치 않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들은 격분했고, 박정희의 딸이자 향후 한국 대통령이 되는 박근혜는 김대중이 이해득실을 위해 한국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66년 2월 20일 눈이 가려진 베트콩 용의자 10명이 줄에 묶인 채 한국의 호랑이 사단 병사에 의해 베이스캠프로 끌려가고 있다.

 

역사학자 이길재는 전쟁과 함께 제공된 막대한 양의 미국 원조가 한국이 경제 호황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로써 결정적으로 한국은 아시아 경제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으나, 그 성장의 근원을 인정하는 것이 민감한 주제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한국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전환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흘린 피가 아니라, 한강의 기적이라고 믿도록 고무되었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이 베트남 전쟁의 잔학 행위 혐의들에서 했던 역할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

 

사죄를 모색하기

 

구수정에 따르면, “남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 인식에 대한 요구는 지난 20년 동안 증가해 왔다.

 

베트남에서의 한국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민감성은 특히 첨예한데, 일본의 강점 하에 놓였던 한국 자신의 경험과, 2차 세계 대전에서 자국 병사들을 위해 일본에 의해 강제 징집된 소위 위안부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위안부 케이스에 관해 일본은 강력하게 반발해왔다.

 

베트남 전쟁의 유산을 완전히 진지한 문제로 받아들이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위안부의 상징적인 동상을 고안한 김서경, 김운성 작가를 비롯한 위안부운동가이기도 하다. 그 중 몇몇 작품은 항의 차원에서 한국의 일본 영사관 외부에 세워졌다.

 

지난해 김씨 부부는 한국-베트남평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한국의 제주도에 베트남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동상을 건립했다.

 

구수정은 베트남 피에타(Vietnam Pieta)”라고 불리는 이 동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를 모델로 한 것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에 기여한 요인 중 하나가 베트남에 30만 명의 군인을 파견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사에 아주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매우, 매우 폭력적으로 행동했다.”

 

이길재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의 피비린내 나는 어두운 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 있어 자기 검열의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전쟁에 대한 논의는 한국-베트남 관계에서도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으며,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이기도 한 한국정부(Seoul)와 베트남정부(Hanoi)는 대체로 이 주제를 피하고 있다.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무더위의 폭염과 밀림의 고난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관해 치하했을 때, 그는 드물게 베트남정부의 질책을 받았다.

 

이에 대한 성명에서, 베트남 외교부는 양국의 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향후 행동을 자제할 것을 한국정부에 촉구했다.

 

한국 제주도에 있는 베트남전의 민간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동상.

 

김서경은 자신과 남편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한국에 했던 일들을 사과하기 위해 집회에 모인 일본인들을 목격한 데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베트남전에 대해 우리의 방식으로 사죄하고자동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베트남과 한국에서 동시에 동상을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퐁니와 퐁낫 학살과 하미(Ha My) 학살에 집중하여,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해 이뤄진 전쟁범죄에 관한 시민법정이 4월 내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주최 측은 이번 비공식 청문회에서 모은 자료들을 연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민재판은 또한 지난 11월의 베트남 방문에서 다만 한국은 베트남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고만 말하며 이전 지도자들보다 더 나아가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운동가들을 실망시킨 문재인 대통령을 압박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한국 정부는 본 기사에 대한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시민재판의 주최자들 중 한명이자 변호사인 장보람은, “우리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지고 베트남 전쟁 당시의 우리(국가)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이 위안부와 여타의 제2차 세계대전의 폭력에 관해 일본에 대해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희생자들에게도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재판에 대한 우리의 원칙은 참전한 한국 군인들을 심판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그저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어쩌면 참전 용사들 역시 희생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