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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사(middle-layer history): 20세기 이후 한국의 민족적 알레고리 계보_공간힘 <주피터 프로젝트>(2021.12.3-12.30) 아카이브

by 정강산 2022. 2. 11.

중층사(middle-layer history): 20세기 이후 한국의 민족적 알레고리 계보

 

1908. <혈의누> (이인직)

1918. <무정> (이광수)

1919. <불놀이> (주요한)

1924. <만세전> (염상섭)

1925. <진달래꽃> (김소월)

192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 <님의 침묵> (한용운)

1928. <임꺽정> (홍명희)

1931. <삼대> (염상섭)

1932. <토막> (유치진)

1934. <> (유치진)

1935. <김강사와 T교수> (유진오)

1936. <무녀도> (김동리)

. <동백꽃> (김유정)

. <금삼의 피> (박종화)

1939. <탁류> (채만식)

1940. <빛 속에서> (김사량)

1941. <토끼이야기> (이태준)

1945. <광야> (이육사)

1946. <미스터 방> (채만식)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 <낙조> (채만식)

1955. <얄개전> (조흔파)

1956. <층계의 위치> (손창섭)

1957. <해방촌 가는 길> (강신재)

. <쑈리킴> (송병수)

1958. <경고구역> (남정현)

. <지옥화> (신상옥)

. <해도초> (전광용)

1959. <깃발없는 기수> (선우휘)

. <동행> (최일남)

1960. <황선지대> (오상원)

1961. <광장> (최인훈)

. <흑색 시말서> (김성일)

. <오발탄> (유현목)

1962. <꺼삐딴리> (전광용)

. <가주인산조> (권태웅)

. <임진강> (유주현)

. <자수민> (남정현)

1963. <바람 타는 깃발> (정연희)

. <안나의 유서> (오영수)

. <왕릉과 주둔군> (하근찬)

. <어느 동네에서 울린 종소리> (정한숙)

1964. <시장과 전장> (박경리)

1965. <엘리제 초> (박순녀)

. <분지> (남정현)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8. <맨발> (천승세)

1970. <> (황석영)

. <나목> (박완서)

1972. <해벽> (이문구)

. <대낮> (조해일)

. <아메리카> (조해일)

. <분노의 일기> (신상웅)

1973. <타이거 메이저> (조정래)

. <태풍> (최인훈)

1974. <황구의 비명> (천승세)

1977. <돛대도 아니달고> (윤흥길)

1978. <머나먼 쏭바강1,2> (박영한)

1979. <중국인 거리> (오정희)

. <동두천> (김명인)

. <순이 삼촌> (현기영)

. <아베의 가족> (전상국)

1980. <마케팅: 지옥도> (오윤)

1981. <사랑하는 사람아> (장일호)

1982. <깊고 푸른 밤> (최인호)

. <누님의 겨울> (최일남)

. <철조망 속 휘파람> (박석수)

1983. <낮과 꿈> (강석경)

. <밤과 요람> (강석경)

. <하얀 전쟁> (안정효)

198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배창호)

. <대동세상1-광주 5월 연작> (홍성담)

1985. <외로운 증언> (박석수)

. <가자, 우리의 둥지로> (윤정모)

. <밤길> (윤정모)

. <파도야 파도야> (강용준)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1986. <길소뜸> (임권택)

. <겨울 나그네> (곽지균)

. <갈쌈> (안정효)

1987. <동거인> (박석수)

. <황색인> (이상문)

. <다시 그 거리에 서면> (박호재)

. <문신의 땅> (문순태)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장호)

. <칸트씨의 발표회> (김태영)

1988. <무기의 그늘1,2> (황석영)

. <남부군1,2> (이태)

. <깃발> (홍희담)

. <여기 식민의 땅에서> (정도상)

. <새벽 기차> (정도상)

. <내가 그린 내 얼굴 하나> (유순하)

. <내가 그린 네 얼굴 하나> (유순하)

. <생성> (유순하)

. <성조기 앞에 다시 서다> (김인숙)

. <태백산맥1,2> (김달수)

. <> (윤정모)

. <고삐1,2> (윤정모)

. <공존의 그늘1,2,3> (이윤섭)

. <핵반응> (남정현)

. <황무지> (김태영)

1989. <태백산맥1-10> (조정래)

. <바람 타는 섬> (현기영)

. <겨울 꽃> (정도상)

. <! 꿈의 나라> (장산곶매)

1990. <공존의 그늘4,5> (이신현)

. <아메리카 드림> (정도상)

1991. <녹슬은 해방구> (권운상)

. <한라산의 노을> (한림화)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장길수)

1992. <살아나는 임진강> (오연호)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1993. <허허 선생 옷 벗을라> (남정현)

. <지저스 크라이스트 주니어 1,2> (홍파)

1994.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복거일)

. <토지1-20> (박경리)

1995. <뺏벌> (안일순)

1996. <아리랑 1-12> (조정래)

. <혼불 1-10> (최명희)

. <베이비> (윤이나)

1998. <J-1비자> (박완서)

. <아름다운 시절> (이광모)

1999. <쉬리> (강제규)

2000.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1. <수취인 불명> (김기덕)

2003.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2005. <웰컴투 동막골> (박광현)

2006. <거대한 뿌리> (김중미)

. <괴물> (봉준호)

. <얄읏한 공> (노순택)

2008. <카인의 정원> (정철훈)

2011. <싸인> (장항준, 김은희)

2016. <아메리칸 빌리지> (나미나)

2018. <그 해안은 말이 없었다> (나미나)

2019.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정여름)

2021. <긴 복도> (정여름)

 

 

 

백낙청. “3세계의 문학을 보는 눈.” 백낙청, 구중서 외 저. 3세계 문학론. 한벗, 1982.

먼저 우리는 제 3세계론도 민족문학론이나 마찬가지로 철저히 역사적인 입장에 설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류 전체의 역사와 동떨어진 어떤 초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내세우는 일은 우리의 민족문학론이 특히 경계하는 복고주의·국수주의로 빠지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나머지로부터 특정 지역을 고립시켜 어떤 3의 세계를 실체화하는 것은 3세계주의라고도 부름직한 새로운 허위의식을 낳을 위험이 크다. (...)‘3세계라는 용어는 세계를 셋으로 갈라놓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로 묶어서 보는 데 그 참뜻이 있는 것이며, 하나로 묶어서 보되 제 1세계 또는 제 2세계의 강자와 부자의 입장에서 보지말고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는 것이다. 15.

(...)세계경제가 자본주의적 경쟁의 원칙에 지배되는 한, 그리고 이 경쟁이 개인간의 경쟁뿐 아니라 민족국가를 그 주요 무기로 삼는 대규모 집단 간의 경쟁인 한, 민족주의는 단지 불가피한 현상일 뿐 아니라 현단계 세계사 발전의 없어서는 안될 동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민중의 입장에 충실한 하나의 세계는 기성 강대국·부국들의 이념에 따른 획일화를 거부하고 수많은 약소민족들의 자결권과 자주성을 일단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룩되어야 한다는 제 3세계 민족주의의 주장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떠나서도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민족문학론의 일견 모순에 찬 입장도 여기서 나온다. 70년대에 전개된 우리의 민족문학론은 한편으로 주체적인 민족의식과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민족을 신비화하고 전통문화를 절대시하려는 일체의 움직임을 경계해 왔다. 또한, 스스로가 하나의 이념임이 분명하면서도 생활하는 민중의 기본 욕구의 충족을 떠난 일체의 관념을 배격해왔다. ‘순수문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물론이요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을 내세웠을지라도 그것이 다수 민중의 생활상의 욕구와 거리를 둔 이상주의의 성격을 띠는 동안에는 또 하나의 허위의식으로 머물기 마련이라고 주장해온 것이다.

물론 민족문학론의 이러한 입장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결합은 바로 오늘날 제 3세계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며, 작품 속의 현실로 구체화되지 않은 일체의 관념을 배제함으로써 작품의 진실성과 통일성이 확보된다는 것은 비평의 기초 원리에 속한다. 단지 우리의 민족문학론은, 이처럼 구체화된 작중현실이 오늘날 우리 민족구성원 다수가 체험하고 여타 제 3세계의 민중들과 공유하는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

3세계론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민족문학론으로 되돌아온다고 할 때, ‘3세계 문학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쓰는 것이 곧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다양하기 그지없는 문학을 획일적으로 파악하는 결과가 된다는 생각은 오해임이 드러난다. 물론 획일화의 유혹은 모든 이론적 작업에 늘상 따르게 마련이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제 3세계론은 무엇보다도 각 민족문화의 존엄성과 주체적 발전능력을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제 3세계문학론이야말로 문학이 당연히 요구하는 다원성을 충분히 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따져보면 여러 가지다. 하나의 세계경제가 비록 불공정한 형태로나마 이미 성립된 시대인데도 여전히 지역주의 또는 복고적 민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다원주의를 우리는 인정할 수 없으며, 각양각색으로 서로 다른 상황에서도 민중과 민중 사이의 국제적 유대를 한껏 다져 나가려는 제 3세계의 노력 자체를 획일주의로 비웃는 태도 역시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다원론인 것이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다원주의를 표방한 획일주의야말로 오늘날 제 1세계의 특징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예술의 분야에서 그것은 특정 작품이 당대의 역사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인간다운 관심을 전달하는가의 문제를 배제 또는 왜곡함으로써 온갖 종류의 불성실한 예술을 다양하게포용하며, 낡은 삶의 부분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예술의 새로움 그 자체로 부추김으로써 기성문화의 무궁무진한 창조성다양성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제 3세계의 민족문학자·민족예술가들이 비판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사이비 다원주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비 다원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우리는 지나간 식민주의시대의 신고전주의적 획일주의와 구별되는 신식민주의시대 특유의 획일주의적 미의식이요 문학이념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17-19.

 

 

이광수. 무정. 신문관, 1918.

, 지금 우리는 장차 무엇으로 조선 사람을 구제할까 하고 각각 제 목적을 말하려던 중일세.” “, 그러면 저도 좀 듣지요.” 처녀들은 그의 말하는 모양이 우스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떡 참는다. 영채 하나만 어찌할 줄을 몰라서 얼굴을 잠깐 붉히나 우선은 영채를 보면서도 모르는 체 한다. “어느 분 차례입니까?” 하는 우선의 말에, “내 차롄가 보이” “, 그러면 말하게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들을 준비를 한다. 병옥은 영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살짝 고개를 돌린다. “나는 교육가가 될랍니다. 그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무론 생물학이라는 참뜻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형식은 병옥을 항하여 무론 음악이시겠죠?” “, 저는 음악입니다.” “, 영채씨는?” 영채는 말없이 병옥을 본다. 병옥은 어서 말해라, 하고 눈짓을 한다. “저도 음악입니다.” 선형씨는,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형식은 가만히 앉았다. 여러 사람 웃었다. 선형은 얼굴을 붉혔다. “선형씨는 무엇이오? 무론 교육이겠지하고 병옥이가 웃는다. 모두 웃는다. 형식도 고개를 수그렸다. 선형도 병옥이가 첫마디에 , 저는 음악이외다라고 활발히 대답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저는 수학을 배울랍니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서 말하였다. 학교에서 수학을 잘한다고 선생에게 칭찬받던 생각이 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수학이 좋은 것인지는 알았으나 수학과 인생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모른다. “그 다음에는 자네 차례일세.” “나는 붓이나 들지.” 한참 말이 없었다. 제가끔 제 장래를 그려본다. 그리고 그 장래의 귀착점은 다 같았다.

우선이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형식이가 왜 오늘은 그렇게 점잖아졌나하고 온다. 우선이가 고개를 들더니, “언젠가 자네가 날더러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나는 인생을 희롱으로 본다고 그랬지. 진지하게 생각지를 않는다고.” “글쎄 그런 일이 있던가?” “과연 그게 옳은 말일세.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장난으로 보아왔네. 내가 술을 많이 먹는 것이라든지 또 되는대로 노는 것이 확실히 인생을 장난으로 여기는 증거지. 나는 도리어 자네가 너무 마지매한 것을 속이 좁다고 비웃어 왔지만은, 요컨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야.” 여기까지와서는 형식도 우선의 말이 오늘은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 정색하고 우선의 얼굴을 본다. 세 처녀도 정색하고 듣는다. 과연 우선의 얼굴에는 무슨 결심의 빛이 보인다. 우선은 말을 이어, “오늘 와서 깨달았네. 오늘 정거장에서 음악회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네. 나는 차타고 지나오면서 내 기슭의 사람들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나기는 났지만은, 그 꾀죄하고 섰는 양이 우스워서 웃기부터 하였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건지나 하는 생각도 아니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도 아니 흘렸네. 그러고 차를 내리면 얼른 구경을 가리라, 가서 시나 한 수 지으리라 하고 울기는커녕 웃으면서 내려가지고... 그 말을 들을 때에,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네. 더구나 젊은 여자가...”하고 감격한 듯이 말을 맺지 못했다. 듣던 사람들도 묵묵하다. 우선은 말을 이어, “나도 오늘 이때 이 땅 사람이 되었네. 힘껏, 정성껏 붓대를 둘러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함이 있으려 하네. 이제 한 시간이 못하여 자네와 작별을 하면 아마 사오년 뒤에나 만나게 되겠네 그려. 멀리 간 뒤에라도 내가 이전 신우선이가 아닌 줄로 알고 있게. 나는 자네와 떠나기 전에 이 말을 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하네하고 손을 내어 밀어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도 꼭 우선의 손을 잡아 흔들며 기쁜 말일세. 무론 자네가 언제인들 잘못한 일이 있었겠나만은. 그처럼 새 결심을 한 것이 많이 기쁘이.” 우선은 한참 주저하다가, “영채씨, 이전 버릇없던 것은 다 용서합쇼. 저도 이제부터 새사람이 될랍니다. 부디 공부 잘하셔서 큰일 하십시오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선형은 이제야 형식에게 영채의 말이 모두 참인 줄을 깨달았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 70(6), 1926.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김동리. 무녀도. 을유문화사, 1947.

이 도깨비굴 같이 낡고 헐린 집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낭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경주읍에서 칠십리 가량 떨어져 있는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가계를 보고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낭이를 세상에 없이 끔찍이 생각하는 터이므로 봄 가을철이면 분 잘 핀 다시마와 조촐한 꼭지 미역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녀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욱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도깨비굴 속에 그녀들을 찾는 사람이라야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과, 봄 가을에 한번 씩 낭이를 찾아주는 그녀의 아버지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왕래도 없이 살아가는 쓸쓸한 어미, 딸이었을 것이다. (...)모화는 굿을 할 때 이외에는 대개 주막에 가있었다. 그만큼 모화는 술을 즐겼고, 낭이는 또한 복숭아를 좋아하며 어미가 술이 취해 돌아올 때마다 여름 한 철은 언제나 그녀의 손에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욱이가 돌아온 뒤부터 이 도깨비 굴속에는 조금씩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부엌에 들어오기 그렇게 싫어하던 낭이도 욱이를 위해서는 가끔 밥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오직 컴컴한 어둠과 별빛만이 차있던 이 허물어져가는 기와집 처마끝에도 희부연 종이등불이 고요히 걸려지곤 했다. 욱이는 모화가 아직 모화마을에 살 때 귀신이 지피기 전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사생아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무척 총명하여 신동이라는 소문까지 났으나 근본이 워낙 미천하여 마을에서는 순조롭게 공부를 시킬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아홉 살 되었을 때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어느 절간으로 보낸 뒤 그동안 한 십년간 소식조차 묘연하다가 얼마전 표연히 이 집에 나타난 것이었다. 낭이와는 말하자면 어미를 같이하는 오누이뻘이었다.

(...)모화는 장에서 돌아와 욱이를 처음 보았을 때, 그 푸른 얼굴에 난데없는 공포의 빛이 서리며 곧 어디로 달아날 것 같이 한참동안 어깨를 뒤틀고 허둥거리다 말고 별안간 그 후리후리한 키에 긴 두 팔을 벌려 흡사 무슨 큰 새가 저희 새끼를 품듯 뛰어들어 욱이를 안았다. “이게 누고, 이게 누고? 아이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오마니, 오마니욱이도 어미의 한쪽 어깨에 왼쪽 볼을 대고 오래도록 울었다. (...)그러나 욱이는 며칠을 가지않아 모화와 낭이에게 알 수 없는 이상한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음식을 받아 놓거나, 밤에 잠을 자려고 할 때나, 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반드시 한참 동안씩 주문 같은 것을 외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틈틈이 품 속에서 조그만 책 한 권을 꺼내어 읽곤 하는 것이었다. 낭이가 그것을 수상스레 보고 있으려니까 욱이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너도 이 책을 읽어라.”하고 그 조그만 책을 낭이 앞에 펴보이곤 했다. (...)그리하여 낭이가 알아들은 말이라고는 겨우 한 마디 하나님이었다.

(...)이러한 욱이의 하나님은 며칠 지나지 않아 곧 모화의 의혹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욱이가 온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밥을 받아 놓고 그가 기도를 드리려니까, 모화는, “너 불도에도 그런 법이 있나?” 이렇게 물었다. 모화는 욱이가 그동안 절간에 있다 온 줄만 믿고 있으므로 그가 하는 짓은 모두 불도에 관한 일인 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요, 오마니. 난 불도가 아닙네다.” “불도가 아니고 그럼 무슨 도가 있어?” “오마니, 난 절간에서 불도가 보기 싫어 달아났댔쇠다.” “불도가 보기 싫다니, 불도야 큰 도지.... 그럼 넌 뭐 신선도야?” “아니요, 오마니. 난 예수도올시다.” “예수도?” “북선 지방에서는 예수교라고 합데다. 새로 난 교지요.” “그럼 너 동학당이로군!” “아니요, 오마니. 나는 동학당이 아닙네다. 나는 예수교올시다.” “그래, 예수돈가 하는 데서는 밥 먹을 때마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나?” “오마니, 그건 주문이 아니외다. 하느님 전에 기도드리는 것이외다.” “하느님 앞에?” 모화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을 내셨으니깐요.” “야아, 너 잡귀가 들렸구나!” 모화의 얼굴빛은 순간 퍼렇게 질리었다. 그러고는 더 묻지 않았다. (...)”

 

 

채만식. “낙조.” 잘난 사람들. 민중서관, 1948.

황주 아주머니는 땀을 물 쓷듯 흘려가며 후루룩후루룩 먹성 좋게 칼국수를 자시면서 어깨가 으쓱하였고, 아버지는 담뱃대에 담배를 붙여물고 앉아

그래 이승만 박사가 아주머니 예언대루 대통령이 되구 했으니깐, 인전 그럼 우리 조선 사람이 살길두 생기겠군요?”

살길이 생기구말구요

아주머니, 오시는 길에 싸전이랑 나뭇장이랑 들러보섰읍디까?” “싸전엘요? 나뭇장엘요?”

쌀 금세가 천 원 넘든 것이 한 5백 원으루 떨어지구, 남구두 한 마차 한 2천원으루 떨어지구, 광목두 한 자 5,6십 원으루 떨어지구, 다 그랬어야 할 게 아녜요?” “무슨 물건 금새가 별안간 그렇게 떨어지구 합니까?”

이런 답답한.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혀야만 조선 사람은 살게 되느니라구 접때두 그리섰죠? 오늘두 방금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혔으니깐, 인전 살 길이 생겼느니라구 하시구.” “그야 그렇죠.”

그동안 백성이 못 살구 죽을 지경을 한 것이 달리 그랬나요? 쌀은 한말 천원이 넘구. 남군 한 마차 6,7천 원 이죠. 광목 한자에 4백 원이요, 설렁탕 한 그릇이 백 원이요, 다 이래,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웠든 게 여든요. 그러니깐 아주머니 말씀대루,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혀 백성이 살 길이 나서자면, 제일 첫째 백반 물가가 뚝뚝 떨어져야 할 게 아니겠냐구요?”

오온 우물에 가서 숭눙 달래시겠수. 오늘 겨우 대통령이 났는데, 오늘루 당장 물건 금세가 떨어지는 수야 있나요?”

들은다치면 외국선 나라가 어지럽구, 물가가 비싸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다가두, 훌륭한 사람이 임금이든 대통령이든 된다치면, 그 시각 그 당장에 물가가 떨어진다구 하길래 하는 말이죠.”

정부나 생기구 그래야죠. 자끔은 아직두 미국 사람이 자기네 맘대루 이럭저럭하는 군정 아녜요.”

옳아, 정부가 생기면이라…… 정부만 생기면 그땐 쌀 금세두 내리구, 남구랑 광목두 금세가 내리구 해서 백성들이 살게 되는 판이군요?”

그러믄요.”

작히나 고마운 노릇이겠소…… 저 거시키, 그 멀쩡한 도둑놈들———— 탐관오리, 그것들두 죄다 엮어 감옥소루 보낼 테죠?”

엮어 보내구말구요. ……지끔두 연방 붙잡히잖어요? 여니 관리들은 새려 이번참엔 즉 참 헌다헌 경찰관이 다 들려났나봅디다. () 무엇이라구, 수도경찰청 무슨 과장이라드냐……

노덕술이 말씀인감? 그 사람은 독직사건은 독직사건이라두, 뇌물 먹은 독직이 아니라, 사람을 붙들어다 고문을 해 죽인 사건이랍디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것두 죈 죄죠. 뇌물 먹은 거허군 좀 달라두.”

공산당을 고문해 죽였대지 아마?”

공산당을요? 그렇다면 잘했죠. 잘했죠. 죽여예죠. 고문 아냐 찢어라두 죽여예죠. 그리구 노씨 그인 상금을 줘서 당장 놔줘예죠. 공산당 때려 죽인 게 죄가 무슨 죕니까?”

닿으면 썩둑 베어질 만큼 졸지에 황주 아주머니의 기세는 맹렬한 것이 있었다.

과히 염려하실랸 마시우. 본다치면 대갠 앞문으루 묶어들면 뒷문으루 풀어놔 주군 하니깐.”

아버지는 그러고 나서 잠깐 사이를 떼였다 다시 이왕 그 공산당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나는 실상 금년허구 명년허구 이태만 지나구 나서 내명년쯤일랑, 거 공산당을 좀 해볼까 하는 참인데……

오온 말씀만이래두.” 황주 아주머니는 기급을 하게 놀란다. 입에 국수를 듬뿍 문 채 야단스럽게 고갯짓, 눈짓, 손짓을 갖추 하며 아버지를 가로막으면서 제발 덕분, 제발 덕분, 말씀이래두 그런 끔찍하구 숭헌 말씀일랑 애야 입밖에 내지두 마시우. 오온 글쎄, 어떡허시자구 세상에 그런, 세상에 그런.”(...) ”

 

 

최일남. “동행.” 현대문학 49(1), 1959.

코리어에 온지 5개월, 고향 프리다 반도를 떠나올 때는 한 여름이었다. 코리어에 오자마자 바로 포 부대에 편성되어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어 왔었다. 부대가 평양을 지났을 때 전쟁은 다 끝난 것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부대가 개천에 이르렀을 무렵, 뜻밖에도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전세는 다시 악화되어 갔다. 후퇴명령을 받은 돕프 부대가 큰 무기를 불태워버리고 산골길로 후퇴할 때였다. 잠복해있던 한 떼의 패잔병들이 갑자기 협격을 해왔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허옇게 눈이 쌓인 산골짜기에서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어두운데다 길 위에 익숙지 못한 돕프 부대원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싸우고 있었다. 중대장 패롤 대위는 무엇이라고 대원들을 지휘하는 모양이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부대의 중심세력에서 혼자 떨어져 있던 돕프가 그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이젠 죽었구나 여기면서도 우선 피신처를 찾았다. 거기에서도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산속으로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숨어 있다가 힘이 없어 저절로 주저앉게 될 때까지 줄곧 걸었다. 돕프는 바람이 안들어올 만한 움푹 패인 곳을 찾아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누우니까 덜 추운 것 같았다. 춥고 더운 것을 알아내는 신경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눈앞에 정든 고향 풍경이 전개되어갔다. 향기가 코를 찌르는 오렌지 밭. 오렌지를 거두어들일 무렵이면 온 동네 젊은이들이 이 밭에 달라붙었다. 오렌지 수확이 한창 일 동안 또 한 쪽에선 면화 따기에 바빴다. 삯꾼으로 나선 수많은 니그로들이 자기키보다 더 큰 자루를 질질 끌면서 한 자루씩 따가지곤 밭 옆에 서있는 트럭의 커단 적재함에 넣는 것이었다. 그 트럭의 운전수인 익살꾸러기 톰맨 영감은 지금도 잘 있겠지. 그의 딸 미키를 자주 만난 곳은 담배밭이었다. ‘눈이 굉장히 예쁜 색시였지. 내가 돌아오는 걸 꼭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약혼도 안했으니까 이미 딴 곳으로 시집갔대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도 바쁘겠지. 동생은 학교에 잘 다니는지... 아버지는 가을엔 알지멘네 옥수수밭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코리어에서 돌아갈 때는 기념으로 긴 타바코 파이프를 사다드리려고 했는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데 어디선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돕프는 개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어둠 속을 해치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한참을 가다보니 뜻밖에도 저만큼 앞에 그럴싸한 집체가 보였다. 한눈에도 그것은 돕프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없이 보아온 초가집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개는 돕프를 보자 더 크게 짖었다. 돕프는 얼른 초가집 처마 밑으로 허리를 구부려 몸을 찰싹 붙였다. 개는 그러나 짖기만 할 뿐 그 자리에서만 짖어댔다. (...)개가 그렇게 짖는데도 아무 집에서도 인기척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 돕프는 개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돕프는 개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개 짖는 소리가 그치자 그때까지도 아무 인기척이 없던 것 같던 안방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돕프가 마루 가까이 갔을 때에도 애 우는 소리 외에 다른 인기척이 없는 걸 보고 그는 성냥불을 그어댔다. 허리를 90도로 굽혀 겨우 들어갈 만한 방문이 있었다. (...) 방 한 편에 담요로 몸을 둘둘 만 어린애가 누워 울어댈 뿐 아무도 없었다. ‘왈왈!’ 또 개가 짖어댔다. 얼른 되돌아가서 묶인 끈을 풀어주자 개는 꼬리를 흔들어 킹킹 거리면서 도프의 앞뒤로 쫓아다녔다. 그는 과히 크지 않은 개를 마루 위에 안아 눕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울던 아이가 돕프가 앉으니까 한순간 울음을 뚝 그치더니 또 맹렬히 울기 시작하였다. 성냥불을 그어 잠깐 본 짐작으론 아이의 나이는 생후 6개월쯤 되어 보이는데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돕프는 어쨌으면 좋을지 막막하였다. 우는 아이를 도로 뉘어놓고 그는 밖으로 나왔다. 이왕 집집이 텅 비었을 바에야 조용한 곳에 가서 이불이라도 있으면 덮고 푹 자고 싶었다. 마루 밑으로 내려 웅크리고 있던 개가 따라 나왔다. 옆집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었다. 자물쇠를 비틀어 방문을 열고 벌떡 누웠다. 덮을 것이라곤 낡아빠진 요때기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혼자 남겨두고 온 아이 울음소리와 방문 앞에서 끙끙대는 개소리에만 신경이 쏠렸다. (...)‘주인들이 모두 싸움에 휩쓸려 죽은 것일까. 그렇다면 앞뒷집이 한꺼번에 텅 비고 가재도구를 하나도 남겨놓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러면 모두 피난을 갔을까. 피난을 갔다면 오늘 낮에나 몇 시간 전에 떠난 흔적이 보였다. 중공군이 벌써 여기까지 온 것일까. 병든 아이와 개는 그들의 사생을 결단하는 마지막 행동에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에 두고 간 것이겠지. 이왕 죽어가는 아이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거다.’ 돕프는 다시 일어나 아이 있는 집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열에 들떠 우는 아이를 어떻게 한달 도리가 없었다. 밖에서 킹킹대는 개도 방안에 데려왔다. 돕프는 다시 잠을 청했다. 개를 옆에 눕히고 안고 잤다. 개도 다소곳이 돕프의 가슴에 제 등을 착 갖다 대었다. 몹시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까만 사람에게도 의지하는 걸 보면 진종일 얼마나 외로이 지냈을까. 하기야 밤이니까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렇지 날이 밝으면 내 살결이 까만걸 보고 이방인이 왔다고 또 짖어대면 어쩌나 하는 겁도 났다.(...)

눈을 떠보니 방문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싹 오한이 들었다. 돕프는 개를 밀치고 얼른 아이를 굽어다 보았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모기소리만한 가는 소리로 무엇인가 혼자 재잘거리고 있었다. 와락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담요에 싼 채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랬더니 벙긋 웃기까지 하지 않는가. 실오라기 같은 손을 쥐어보았다. 차디찬 중에도 몰랑몰랑한 살이 간질간질한 감촉을 주었다. (...)”

고동연. “전후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주한 미군의 이미지: 지옥화(1958)에서부터 수취인불명(2001)까지.” 미국사연구 30, 2011. 147-175.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발표된 각종 언론 규제법에는 (언론 정책 7개항)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의 보도를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원칙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법뿐 아니라 국가의 안보에도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1970년대 유신 체제를 통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대까지 한국 영화에서 미군을 비판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어 왔다. 미국이라는 우방국이자 절대적인 원조국을 결코 비판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후 한국 영화감독들은 주로 미군부대의 모습이나 댄스파티, 그리고 간간히 미군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미국 대중문화를 눈요깃거리용으로 영화 속에 삽입하여 왔다.” 152-153.

 

 

남정현. “분지.” 현대문학 123(3), 1965.

어머니.

아마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밤새 지우고 찢고 하면서 정성껏 만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날으는 듯한 걸음으로 무슨 환영대회에 나가시던 날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당신은 절망스럽도록 이지러진 표정으로 짐승처럼 해괴한 소리를 치시며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다만 아연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판인가.

흩어진 머리에 갈가리 찢긴 옷하며 벌겋게 독이 오른 눈, 그리고 피 묻은 자국하며 떨리는 입술.

이렇듯이 전혀 엄마 같지 않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출현하신 당신을 대하고 분이와 저는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벌벌 떨기만 했었지요. 불과 한나절 사이에 엄마가, 아니 하나의 인간이 이렇게도 원 딴판으로 변할 수가 있을까. 무엇인가 졸연치 않게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던 저의 부푼 기대는 순간, 사지가 떨리는 불안과 공포의 덩어리로 돌변하더군요. 정말 졸연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철없는 저희들 앞에서 무슨 짓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참 망측스럽게도 당신은 우선 옷을 벗더군요. 연방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갈가리 찢어진 치마와 저고리는 물론, 속곳이며 내의 그리고 구겨진 팬티까지를 훌렁 벗어던진 당신은 알몸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여인의, 아니 엄마의 알몸, 저는 무서운 것도 무서운 것이었지만 공연히 부끄러워서 그만 온몸이 착 하고 눌어붙는 기분이더군요. 땀이 났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희들의 이 난처한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으시고 그 환히 들여다보이는 가랑이 사이의 그것을 마구 쥐어뜯으시더니, 고만 벽이 흔들리게 고함을 치시더군요.

아이고, 이 천하에 때려죽일 놈들앗, 내가 뭐 너희들을 위해서 밑구멍을 지킨 줄 아냐! ! 이 벼락을 맞을 되지 못한 것들앗. ! 어림없다, 아이고, 내사 원통해, 그러니 우리 남편만 불쌍하지, 아 글쎄 나도 사위스러워서 제대로 만져보지 않은 밑구멍을 아 어떤 놈 맘대로 찔러! 이 더러운 놈들앗, 아이고, 더럽다, 더러웟.”

연신 이렇게 더럽고 분하다면서 당신은 아무 데다나 대고 침을 탁탁 뱉으셨습니다. 당황한 저는 정말 말로만 듣던 지옥에 들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온통 무섭게만 보이더군요. 순간, 당신은 민첩하게 저의 머리를 낚아채시더니 아 억지로 저의 얼굴을 당신의 가랑이 사이에 바싹 갖다 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확 끼치는 악취, 그리고 두려움, 하나 당신은 잠시도 무슨 여유를 주지 않고,

, 보란 말이다. 이놈의 새끼야. 아 내 밑구멍을 좀 똑똑히 보란 말이엿. 아이고 분해, 이놈의 새끼야, 좀 얼마나 더러웠졌나를 눈을 비비고 좀 자세히 보란 말이엿.”

그러면서 밑에 갖다 댄 저의 골통을 사정없이 쥐어박으시더군요. 저는 아마 파랗게 질렸었지요. 저는 그때 광란하듯 흔들리는 당신의 손을 꼭 붙잡고는,

아이고, 엄마, 엄마.”

잘 울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기억만이 지금 어렴풋이 남아 있으니깐요. 하지만 어머니, 당시 저는 그렇게 수습할 수 없는 경황 중에서도 당신의 가랑이 사이에 참으로 예기치 않았던 기이한 형태의 기관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동시에 일종의 쾌감 비슷한 감정으로 하여 아랫도리가 다 자르르 흔들렸다면 그래도 당신은 저를 자식으로 생각하여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때 당신은 참 어린 저희들에게 너무하셨으니까요. 이제 와서 어떻게 생각하시건 별로 섭섭하진 않습니다. 관심도 없구요.

어쨌든 당신은 미군한테 겁탈을 당하고 미쳤다는 이러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가운데 알몸이 되어 얼마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시더군요. 그리고 연방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지르시며 사타구니만을 열심히 쥐어뜯으시던 어느 날, 당신은 갑자기 목구멍이 터져라 하고,

이 죽일 놈들아! 날 죽여다오.”

애절하게 외마디소리를 치시더니 영 그냥 눈을 감고 마셨습니다. (...)”

 

 

오정희. “중국인 거리.” 문학과 지성 35, 1979.

치옥이의 부모는 아랫층을 쓰고 윗층의 큰방을 매기 언니가 검둥이와 함께 세들어 있었다. 치옥이는 큰방을 거쳐가야 하는 협실과도 같은 좁고 긴 방를 썼다. 때문에 나는 아침마다 치옥이를 부르러 가면 그때까지도 침대 속에 머리칼을 흩뜨리고 누워 있는 매기 언니와 화장대의 의자에 거북스럽게 몸을 구부리고 앉아 조그만 은빛 가위로 콧수염을 가다듬는 비대한 검둥이를 만났다. 매기 언니는 누운 채 손을 까닥거려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으나 나는 반쯤 열린 문가에 비켜서서 방안을 흘끔거리며 치옥이를 기다렸다. 나는 검둥이는 우울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맥없이 늘어진, 두꺼운 가슴팍의 살, 잿빛 눈, 또한 우물거리는 말투와 내게 한 번도 웃어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

학교 갈 때는 길에서 불러라. 검둥이는 네가 아침에 오는 게 싫대.

치옥이가 말했으나 나는 매일 아침 삐꺽대는 층계를 밟고 올라가 매기 언니의 방문 앞을 서성이며 치옥이를 불렀다.

매기 언니는 밤에 온다고 그랬어, 침대에서 놀아도 괜찮아. (...)

커튼으로 햇빛이 가리운 어두운 방의 침대에 매기 언니의 딸인 제니가 자고 있었다. 치옥이는 벽장 문을 열고 비스켓 상자를 꺼내어 꼭 두 개만 집어들고는 잘 닫아 다시 넣었다. 비스켓은 달고, 연한 치약 냄새가 났다.

이거 참 예쁘다.

내가 화장대의 향수병을 가리키자 치옥이는 그것을 거꾸로 들고 솔솔 겨드랑이에 뿌리는 시늉을 하며 미제야, 라고 말했다. 치옥이는 다시 벽장 속에 손을 넣어 부시럭대더니 사탕을 두 알 꺼냈다.

이거 참 맛있다.

, 미제니까.

치옥이가 또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니가 눈을 말갛게 뜨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제니, 예쁘지? 언니들은 숙제를 해야 하니까 조금만 더 자렴.

치옥이가 부드럽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쓸어 덮자 제니는 깜빡이 인형처럼 눈을 꼭 감았다.

매기 언니의 방에서는 무엇이든 신기했다. 치옥이는 내가 매양 탄성으로 어루만지는 유리병, 화장품, 패티코우트, 속눈썹 따위를 조금씩만 만지게 하고는 이내 손댄 흔적이 없이 본디대로 해 놓았다.

좋은 수가 있어.

치옥이 침대 머릿장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반쯤 남겨진 표주박 모양의 병을 꺼냈다. 병의 초록색이 찰랑대는 부분에 손톱을 대어 금을 만든 뒤 뚜껑을 열어 그것을 딸아 내게 밀었다.

먹어 봐. 달고 화하단다.

내가 한 모금에 훌쩍 마시자 치옥이는 다시 뚜껑을 가득 채워 꿀꺽 마셨다. 그리고 손톱을 대고 있던 금부터 손가락 두 마디만큼 초록색 술이 줄어들자 줄어든 만큼 냉수를 부어 뚜껑을 닫아 머릿장에 넣었다.

감쪽같잖니? 어떻니? 맛있지?

입안은 박하를 한 입 문 듯 상쾌하게 화끈거렸다.

이건 비밀이야.

매기 언니의 방에서는 무엇이든 비밀이었다. 서랍장의 옷갈피짬에서 꺼낸 빌로드 상자 속에는 세 줄 짜리 진주 목걸이, 여러 가지 빛깔로 야단스럽게 물들인 유리알 브로우치, 귀걸이 따위가 들어 있었다. 치옥이는 그 중 알이 굵은 유리 목걸이를 걸고 거울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매기 언니가 목걸이도 구두도 옷도 다 준 댔어.

손끝도 발끝도 저리듯 나른히 맥이 풀려 왔다. 눈꺼풀이 무겁고 숨이 차 오는 건 방안이 너무 어둡기 때문일까, 숨을 내쉴 때마다 박하 냄새가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베란다로 통한 유리문의 커튼을 열었다.

노오란 햇빛이 다글다글 끓으며 들어와 먼지를 떠올려 방안은 온실과도 같았다. 나는 문의 쇠장식에 달아오른 뺨을 대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열린 덧문과 이켠을 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알지 못할 슬픔이, 비애라고나 말해야 할 아픔이 가슴에서부터 파상(波狀)을 이루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황석영. 무기의 그늘. 창작과비평사, 1988.

영규는 해병 PX앞에 있는 스낵바에 앉아 있었다. 기둥과 지붕만 있는 큰 홀이었다. 그늘이었지만 바람은 한점도 없었다. 아래편에는 거대한 고철 더미들이 잡동사니를 이루어 쌓여 있는 빈터가 내려다보였다. 녹슨 탱크며 부서진 자동차, 비행기 기체의 잔해, 포탄 껍데기 같은 쇳덩이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지구상에서 사라진 거구의 공룡들의 뼈대와도 같았다. 영규는 고정 근무자를 만나러 PX 안으로 들어가 그날 수령될 한국군 측의 물품 내역과 수량을 살피고, 한국군과 민간인이 얼마나 드나들며 무엇을 사갔는가를 체크했다. 오전 내내 번쩍거리는 상품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가 밖으로 나오면 영규는 현기증 같은 허탈감이 전신을 휩싸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주에 작은 사고를 저질렀다. 해군 PX에서 나와 MAC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해군버스인데 MAC 사령부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그는 다른 날처럼 무심코 버스에 올랐다. 운전병이 손을 들어 막는 것이었다.

너는 안 된다.”

나는 연합군 근무자다.”

이건 미군 전용 버스다.”

우리는 너희 부대의 같은 대원이다.”

모른다. 어서 내려라.”

영규는 뒷주머니에서 선임하사가 빌려준 리볼버 38구경을 꺼내었다. 그러고는 주근깨투성이인 운전병의 뺨에다 꾹 찔러댔다.

너희들이 오라고 해서 여기 왔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미군들이 웅성거렸고, 소령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 조심해라. 우리는 전우다.”

나도 집이 멀다. 이 버스에 타지 않으면 우리는 하노이로 가란 말이냐?”

그래, 운전병이 잘못이다. 너는 베트남인의 적이다. 내 자리에 가서 앉아라.”

영규는 권총을 내렸다. 그리고 열린 문을 향하여 땅바닥을 겨누고 두발을 쏘았다. 쇳소리가 버스의 낮은 천장을 쨍쨍 울렸고 미군들은 날렵하게 의자 아래로 상반신을 숨겼다.

나는 이 운전병의 적이다.”

영규는 버스 안에다 주절거리고 뛰어내렸다. 그는 먼지 나는 작전도로를 따라 한참이나 걸었다. 중대에서는 몰랐었다. 모래주머니의 방벽과 참호 속에 틀어박혀 총구를 겨누고 있었을 때는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이제 이 도시에 와서 남들과 섞이고 남 앞에 서자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규는 뒤늦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물 속에 목까지 깊숙이 빠진 것이다. 안영규는 학도병 식의 상투적인 감상주의와 작별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았다. 다만 이 전쟁에 책임 없이 참석한 징병군인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 제대할 뿐이다. 그가 저지르게 될 블랙마켓마저 정부가 참전을 결정했다는 대전제 속에 포함된 일이라면 아무 거리낄 게 없었다. 그의 파월이 결정된 서류가 애초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영규는 아침에 선임하사로부터 지시받은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규의 탁자 위에 놓인 코카콜라가 벌써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

 

 

봉준호. 괴물 시나리오. 2005. 1. 4.

 

# 14 둔치

미친 듯이 줄행랑을 치는 강두의 겁에 질린 얼굴.

뒤엉켜 함께 도망가는 사람들 틈에서 강두가 힐끗 뒤를 돌아보면 ...

한 뚱뚱한 남자가 둔치 주차장에 늘어선 차들 사이로 허둥지둥 도망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를 성큼성큼 따라가는 괴생물체 ...

 

당황결에 방향을 잘못 택한 뚱뚱남, 좁게 주차된 차와 차 사이에 몸이 꽉 - 악 끼어버린다.

터벅터벅 다가오는 괴물, 차 틈에서 몸을 빼내려고 꿈틀거리는 뚱뚱남.

그러나 필사적으로 몸부림 칠수록 살들만 출렁일 뿐 ...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성큼 다가온 괴물, 차 사이를 벌리며 치고 들어가 뚱뚱남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

 

안전거리로 흩어진 인파들, 멀찌감치 둘러선 채, 처참한 순간을 지켜본다.

봉고차와 트럭사이에서 뚱뚱남을 조금씩 삼키는 괴생물체,

차체 너머로 괴물의 등라인과 몸체 일부만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이때, 인파 속의 덩치 큰 백인남자 하나가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뛰쳐나온다 !

애인으로 보이는 한국 여자가 뜯어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면서,

용감한 백인남자, 돌덩이를 괴생물체 쪽으로 힘껏 던진다 !

괴물의 등짝에 맞고 퉁 - 튕겨져 나가는 돌덩이.

괴물은 돌 맞은 등짝을 한번 꿈틀하더니, 뚱뚱남을 완전히 입 속으로 삼켜버린다.

 

그리고는 백인남자 쪽으로 뛰쳐나오는 괴물 !

질겁하며 도망치는 백인남자를 순식간에 따라붙어, 거칠게 남자를 덮쳐버린다.

왼팔을 물어 뜯기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백인남자, 주차된 트럭 밑으로 굴러들어간다.

 

피가 콸콸 흐르는 왼팔을 움켜지며 몸을 웅크린 백인남자의 시점으로,

조용히 머리를 낮춰 트럭 밑을 들여다보는 괴물의 기분나쁜 얼굴 ...

트럭 밖으로 흘러나온 백인남자의 땅바닥 피를 혀로 슥슥슥 핥고 있다 !

 

보다못한 강두, 아래에 시멘트 덩어리가 달린 도로표지판을 번쩍 집어든다.

의외의 괴력을 발휘, 투포한 선수처럼 도로표지판을 빙빙 돌리는 강두,

괴물 쪽으로 다가가며 도로표지판을 휘 날려버린다 !

날아간 표지판, 시멘트덩어리 부분이 괴물의 머리를 정통으로 강타한다.

끼에엑 - 괴상하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지르며 강두 쪽을 돌아보는 괴물

처음 보여지는 괴물의 정면 얼굴, 기묘한 느낌이다.

 

잠시 서로를 마주보는 괴물과 강두 ... 순간 강두를 향해 달려오는 괴물 !

화들짝 달아나는 강두, 사람들을 뒤따라 정신없이 도망친다.

이때, 도망치는 인파들을 정반대로 헤치고 달려오는 한 사람 ... 희봉이다.

(...) 희봉 : “( 뒤 돌아보며, 믿기지 않는 듯 ) 저게 도대체 뭐여 !” ”

 

 

장항준. 싸인 10[TV 드라마]. SBS. 201123일 방송.

 

정우진: 저스틴 쿠퍼, 당신을 두 명의 한국시민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한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의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변호인의 선임권을 갖는다. 이 권리들에 대해 이해했는가?

저스틴 쿠퍼: (고개를 끄덕인다)

정우진: 연행해.

저스틴 쿠퍼: 우리는 당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여기 왔다. 근데 당신들은 전부 우리한테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정우진: 나는 지금 당신이 미군이라서, 혹은 당신의 피부색이 우리와 달라서 체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에 체포하는 것이다. 그게 유일한 이유다.

(...)

뉴스리포터1: 검찰은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기지방검찰청 박모 검사를 조사하며 이 사건과 관련된 의혹들을 풀어낼 방침이지만...

뉴스리포터2: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자 양모씨를 부검했던 국과수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진상공개 요구가 거센 가운데, 또 남은 의문들이 어떤 방향으로 해결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

윤지훈: 주인혁 선생을 해임하셨다고요.

이명한: 양정수를 부검한 집도인이... 그 결과를 책임져야겠지...

윤지훈: 책임은 그 부검과 관련 있는 사람 모두가 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명한: 국과수가... 무너지길 바라나? (...)”

 

 

 

 

 

 

 

 

 

 

 

 

 

 

 

 

 

 

 

프레드릭 제임슨.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의 제3세계문학.” 김용규, 차동호 역. 김경연, 김용규 편.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현암사, 2014. (1986년 초판 발행)

 

"(...)‘3세계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나는 3세계라는 표현의 사용에 대해 비판이 있고 그 요지를 잘 알고 있다. 특히 3세계라는 표현이 광범위한 비서구 국가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 간의 깊은 차이를 지우고 있다고 지적하는 비판은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적 제1세계, 사회주의적 제2세계 진영,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경험을 겪었던 다양한 국가들 간의 근본적인 단절을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그 어떤 다른 용어도 잘 알지 못한다. 82.

(...)즉 제3세계 문화 중에서 그 어떤 문화도 인류학적으로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인 것으로 상상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모두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제1세계의 문화제국주의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화투쟁은 그 자체로 자본의 다양한 단계 혹은 간혹 완곡하게 표현해서 근대화의 여러 단계에 의해 침투당하고 있는 지역들의 경제상황을 반영한다. 바로 이것이 제3세계 문화에 관한 연구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시각, 특히 외부로부터 획득되는 시각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84.

(...)이제 나는 하나의 포괄적 가설로서 모든 제3세계의 문화 생산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또 그것을 제1세계의 유사한 문화적 형식들과 근본적으로 구별해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제3세계의 모든 텍스트들은 필연적으로 알레고리적임을, 그것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알레고리적임을 주장하고 싶다. 즉 제3세계의 텍스트들은 심지어 그 형식이 소설과 같이 명백히 서구적 재현 장치로부터 발전했을 때조차, 아니 특히 그러했을 때 내가 장차 민족적 알레고리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

나는 우리가 편리와 분석을 위해 주관적인 것과 공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것과 같은 범주들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 간의 관계가 제3세계 문화에서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3세계 텍스트들, 심지어 겉으로 볼 때 사적이고 리비도적인 역학이 투여되는 텍스트들조차 필연적으로 민족적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정치적 차원을 투사한다. 즉 사적인 개인 운명의 이야기가 항상 공적인 제3세계 문화와 사회의 전투적 상황의 알레고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3세계 텍스트들을 처음 접할 때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서구적 독서 방식에 저항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간의 다른 비율 때문이다.” 8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