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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대한민국 발전의 몽타주

by 정강산 2023. 11. 29.

[공간 힘 전시 <주피터 프로젝트 no.2>(2022. 12. 6 - 12. 23)아카이브 섹션을 위해 발췌한 노트] 

아카이브 페이지: https://spaceheem.com/jupitr/

 

주피터 프로젝트 JUPITR PROJECT

 

spaceheem.com

 

 

대한민국 발전의 몽타주

 

 

1(민족의식: 한국전쟁)

전쟁 초기를 다룬 취재는 매혹적이며 많은 것을 알려준다. 전쟁의 본질적인 성격을, 즉 그 [내전]의 성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섯 달 동안 한반도는 전쟁으로 격렬하게 들썩였으며, 온갖 것이 다 드러났다. 이후 2년간의 전쟁은 비무장지대를 따라 전개된 진지전이었고, 서방 사람들은 한국인을 거의 적이나 군인, 하인, 매춘부로만 접촉했다. 톰프슨은 장군부터 사병까지 미국인들이 어디서나 드러낸 일상적인 인종차별주의와 기가 막힐 정도로 한국을 무시하는 행태에 기겁했다. 미국인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을 gook'[동양인을 가리키는 멸칭]이라는 말로 불렀는데, 특히 북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많이 썼다. 중국인을 따로 구분할 때는 칭크chink’[중국인을 가리키는 멸칭]를 썼다. 수십 년 뒤의 구술사 연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말을 쓴다. 이 인종차별적 비방은 먼저 필리핀에서 발달했고, 이어서 태평양전쟁을 거쳐 한국과 베트남으로 전파되었다. 벤 앤더슨은 을 적군의 이름 없는 찌꺼기의 저장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두드러진 것은 한국인의 익명성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도널드 녹스의 방대한 구술사는 한국인의 이름을 좀처럼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은 실제로 저들의 국이 필사적으로 싸웠던 반면, “우리의 국은 비겁했고 도망쳤으며 결코 신뢰할 수 없었다는 역설을 이야기 했다. 반식민주의 투사들에게는 싸워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알지 못했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조행복 역. 현실문화. 2017. 131-132.

 

 

2(대한경제원조: 합동경제위)

“1950년대 미국 대한경제원조는 한국의 자본 축적 근원이며 한국 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방비 증가가 미행정부에게 큰 재정 부담을 가져왔다.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재정 적자를 극복하기 위하여 건전한 재정을 도모하는 New Look 정책을 세웠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을 비롯하여 저개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확립된 상태에서 미국은 한국의 군사, 정치 적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감안하여 미국은 경제안정화, 군사지원, 해외 민간투자 등에 중심을 두어 대한경제 원조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걸쳐서 경제 안정을 위해 반인플레이션 정책이 지속적으로 실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제원조의 상당한 부분이 국방비로 전용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미국의 대한경제원조가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1950년대는 한미관계의 출발점이며 현재까지 한미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기본 틀을 만든 중요한 역사적 시기이다. (...)1950년대 한국은 미국과 경제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지원받고 경제정책의 방향을 확정하였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정부의 경제정책 형성에 결정적인 뒷받침이 되었고 1950년대 한국 경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자본축적의 근원이었다는 점을 대부분 연구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

1952년에 결성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 CEB, 이하 합경위로 약칭)는 한미 간 의견을 조율하고 원조물자의 가격결정과 분배, 원조 자금의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는 심의기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원조 수혜국들에게 제공하는 경제원조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미국의 대외정책과 더불어 어떻게 원조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미국은 원조수혜국 현지에서 경제 원조를 운영하는 원조기구들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합경위를 중심으로 경제 원조를 운영하였다. 합경위의 주요 논의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대한원조 프로그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또 한 합경위는 한미 간의 원조협정을 통해 제시된 기본 방침을 보다 구체화함과 더불어 1952년부터 1961년 해제될 때까지 원조운영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한국 경제정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2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의 원조가 지속되는 동안 미국은 합동경제위원회와 같은 조직을 통해서 한국의 경제정책에 관여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협의나 합의 없이 한국의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한국 경제성장의 방향과 그 특징은 한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결정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1950년대 미국의 대한경제 원조 통제에 대한 합동경제위원회의 중요한 역할을 가늠할 수 있다.”

 

레미지. “1950년대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에 대한 연구: 한미 합동경제위원회 회의록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16. 국문초록, 1-2. 강조는 인용자. 일부 문장 교열.

 

3(대한경제원조: 포인트포 프로그램)

“(...)에드워드 메이슨(Edward Mason)은 한국(...)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포인트포 프로그램과 같은 원조정책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도구이며 미국안보정책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오게 되면 포인트포 프로그램에서 강조한 기술지원에 군사기술이 포함되면서 미국원조의 전략적이고 안보적인 특성이 더욱 강화되고 포인트포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던 인본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취지가 더욱 퇴색하였다. 결국 포인트포 프로그램은 인도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권의 팽창을 저지해야 했던 당시 미국의 급박한 안보적 필요와 원조정책의 경제적 효과에 비관적인 국내세력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전략적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볼 수 있다.”

 

박종희. “국제개발협력의 기원과 구조적 변화: 연속성과 불연속성.” 서울대학교국제문제연구소 편. 개발협력의 세계정치. 사회평론아카데미, 2016. 86.

 

 

4(베트남파병: 안보와 번영)

우리나라가 해외파병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첫째, 도의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위기에서 받은 국제사회의 도움에 보답하고, 둘째, 평소에 세계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여 유사시 국제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며, 셋째, 유엔 회원국으로서 필수적인 의무를 완수하고, 넷째, 해외에서의 연합작전 능력을 배양하는데 있으며, 우리 군은 해외파병활동을 통하여 이러한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越南戰參戰)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파병이었으며,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남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무력적화통일을 기도하고 있는 북한의 재침에 대비하는 등 국가안보태세를 튼튼히 하여야 했으며, 국가예산의 절반 정도를 외국원조에 의존하였으므로 경제를 일으켜서 실업자를 해소하고 가난을 극복하여야 했다. 특히 한국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국가들의 도움으로 김일성이 일으킨 공산침략을 일단 저지하였으나 정전상태(停戰狀態)에서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으로써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한국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참전요청을 받게 되자 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의 차단은 곧 한반도의 안보와 직결되며, 한국전쟁시의 우방의 은혜에 보답 한다는 명분으로 비전투부대(非戰鬪部隊)의 파병을 결정하였고, 그 후 전쟁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베트남전용(轉用)을 저지하여야 한다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전투 병력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한국은 베트남참전으로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군 장비의 현대화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케 하여 북한의 재침을 억제함으로써 국가안보를 달성하였고, 외화수입을 통한 투자재원 마련과 기업 및 경제 인력의 해외진출 등 베트남 전쟁 특수(特需)를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경제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환언하면 한국군은 베트남 참전으로 안보와 번영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폐쇄적이고 수구적이었던 국민들의 기상을 진취적으로 바꾸는 계기를 조성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세계 속의 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礎石)을 놓았던 것이다.”

 

이영호. “한국군 해외파병활동의 회고와 전망.” 군사연구125. 2008. 81-82. 강조는 인용자.

 

 

5(베트남파병: 존슨)

존슨행정부 시절(1964-68) 한미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박정희정권과 존슨행정부가 밀월(honeymoon)에 접어들었다는 낯뜨거운 표현이 자주 사용될 정도였다. 이유는 물론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다. 한국은 남베트남에 2개 사단과 1개 여단, 도합 5만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연한 결과지만, 베트남 파병은 한미관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전까지 한미관계에서 미국은 항상 주는 입장(patron)이었고, 한국은 늘 받는 입장이었다(client). 그러나 베트남 파병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부탁할일이 생긴 것이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던 1967년과 1968년에도 존슨 대통령이 계속해서 한국군의 베트남 증파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공개문서로 보는 미중관계와 한반도. 창비, 2012. 80.

 

 

6(베트남파병: 정치적 무의식)

“1. 중대 전술기지 ()

 

밤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불꽃놀이 하듯 명멸하는 포화의 불꽃들,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면 이 모든 것이 교통호에 기댄 채 죽어있는 병사의 동공에 비친 풍경임이 드러난다.

전술 기지로 올라오는 베트공들.

베트공의 총탄에 하나 둘 씩 쓰러지는 소대원들.

소년병이 그 아비규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바닥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얼굴과 몸 곳곳에 출혈이 심한 모습이다.

 

최태인

뭐하는 거야...?

 

소년병

(울먹이는 얼굴로) 군번줄이 없어졌어요... 군번줄이 없으면 안 되는데... 뼛가루라도 제대로 고향에 가려면... 군번줄을 찾아야 하는데...

 

뺨을 갈기는 최태인.

 

최태인

정신차려!

 

소년병

(그대로 울먹이는 얼굴로) ... 하지만... 군번줄...

 

다시 한 번 뺨을 갈기는 최태인.

소년병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최태인

우린 안 죽어... 죽지 않는다....

책임진다... 우린 살수 있다...... 알겠나?”

 

공수창, 필영우. R-point 시나리오: 2004 한국시나리오선집7.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1.

 

 

7(베트남파병: 정치적 무의식)

앞서가던 오병장이 사격자세를 취하며 수신호를 보낸다.

모두 긴장해서 바위나 나무 뒤에 몸을 숨기며 총을 겨눈다.

 

배낭을 끌러내는 진중사. 정글도를 들고 빠르게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소대원들이 곧바로 뒤를 따라가 보면 섬뜻한 모양의 비문이 눈 앞에 나타난다.

 

소대원들

뭐야 이거” “씨발... 기분 나쁘게

 

최태인, 지도를 보다가 진중사에게 건네준다.

 

진중사

여기서부턴 R-point.

 

박하사

얼추 온 겁니까?

 

이상병이 비문에 손을 얹고 기대어 서 있다가

 

이상병

뭐라구 쓴 거냐, 이거?

 

다가가는 조상병, 비석 앞에서 더듬더듬 읽어 나간다.

 

조상병

네가 있는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손에 ...피를... 묻힌 자는... 다음은 안 보이네..

 

박하사

새끼가 뻥은...

 

조상병

진짜에요...

 

이상병

맞아요... 얘가 우리 중에서 한문을 가장 잘하는 놈이라구요...

 

박하사

구라까지마 새꺄..,

 

최태인,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소대원들 뒤로 나타난다.

 

최태인

맞아! 조상병 말이...(저만큼 안개 쌓인 정글을 바라보며) ! 가자...”

 

공수창, 필영우. R-point 시나리오: 2004 한국시나리오선집7.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31.

 

 

8(베트남파병: 정치적 무의식)

조상병

(이상병에게) 얌마, 뭐해... 그러지마...

 

이상병이 비문에다 오줌을 갈기고 있다.

 

이상병

까지 말라 그래... 그런 거에 쫄 내가 아냐...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소대원들.

그 뒤를 따라 소대원들, 이동하는데 소대원 하나가 멍하니 석상에 정신이 팔려 있다.

 

진중사

(뒤돌아보며) 야 임마!...

 

진중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소대원들의 행렬을 따라잡는 정일병.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소대원들.

덩그러니 홀로 있는 비문이 더욱 기괴한 모습이다.

 

곧이어 비문에 묻은 오줌으로 이끼에 묻혀 보이지 않던 글자가 나타난다.

 

不歸

 

- 자막 - 손에 피 묻힌 자 돌아가지 못 한다

 

(...)

 

공수창, 필영우. R-point 시나리오: 2004 한국시나리오선집7.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33.

 

 

9(베트남파병: 2전선)

북의 제2차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는 당시 북이 처한 대외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김일성은 이날 보고에서 1960년대 남한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5.16 쿠데타, 근대화정책, 한일협정 타결을 모두 군사적인 측면, 다시 말해 북한의 안보문제와 연관지어 해석했다. 5.16쿠데타로 남한의 군비증강이 이루어졌고, ‘근대화정책은 경제의 군사화정책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1960년대 북한은 군사,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그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을 군사비에 투여하였다.(...)

중소 분쟁도 문제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일본은 단합하여 자신을 압박해오는데, 사회주의권은 중소 이념분쟁에 휘말려 분열되어 있으니 더욱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트남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한 사회주의권의 단결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이 베트남전쟁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남한에 대한 무력도발을 강화하여 국군의 추가파병을 막고,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이른바 제2전선의 구축이었다.

남한이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면 북한은 베트남을 돕기 위해 대남 무력공세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부무는 19653, 남한이 베트남에 파병하면 북한이 대남 군사도발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실제로 196610월 제2차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계기로 북한은 대남 무력공세를 강화하면서 한반도에서 제2전선을 구축할 의도를 명확히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베트남 전선과 한반도의 전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만약 베트남전에서 공산측이 승리하게 되면 그 여파가 반드시 한반도에도 미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베트남전은 우리의 제2전선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박정희는 베트남이 남한을 방위하는 제2전선이라 했는데, 북은 한반도에 제2전선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공개문서로 보는 미중관계와 한반도. 창비, 2012. 62-63. 강조는 인용자.

 

 

10(베트남파병: 민족의식)

전우 가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한테 죽는데 가만히 보고있나 만간인을 가장한 배트콩놈들 인데 이사람은 동료들을 학살범으로 몰아 가는구나 이 사람은 해병대 자격이 없다 특히 청룡 부대 당신이 지금 살아 있는 건 동료들 덕인데 전사한 동료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물레방아

 

"저런사람은 국가유공자 대우해줄필요가없다

국가유공자 자격을 국가에반납하라

본인이 입었던제복에 욕하고침뱉는사람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혜택과 도움도 받을필요가없다"

송전무

 

"피해자들에게는 마음이 아프지만

전시에서 베트공 시민 파악 할수있나 베트공은 평상복에 총들고 공격 하고 툭하면 마을숨고 땅굴 파고 그러는데 책임과 사과는 좀 무리수……

희생한 분 전사한 분 모두가 피해자 입니다

월남 파병 군인들 두번 죽이지 마세요"

roker park

 

전쟁에서 베트콩 특징이 민간인들 끌어들여서 자살 기습인데 그건 생각을 하지를 안하네 참전용사분들 자랑스럽습니다.”

타춤

 

BBC News 코리아. "전쟁: 끝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유령."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0.4.30.의 덧글.

 

 

 

11(베트남전쟁: 남베트남 장군)

비공식적으로, 당신들은 우리를 버리려는 거요. 그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밤낮없이 비행기들이 공항에서 떠나지. 미국인들과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출국 비자를 원하고. 그들은 비자를 얻으려고 당신네 대사관에 가. 당신들은 자기들 여자는 철수시켰어. 갓난아이들과 고아들도 철수시켰고. 미국인들이 손을 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미국인들뿐이지? 클로드는 만일 철수가 공표되면 도시 여기저기에서 폭동이 일어날 테고 이어 온 도시가 남아 있는 미국인들에게 등을 돌릴 거라고 설명할 때, 예의 바르게도 난처해하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이런 일은 다낭과 나트랑에서 이미 벌어져, 미국인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방치된 주민들은 멋대로 서로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런 사례가 있었음에도 사이공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 대다수 시민들은 아무도 간통의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서로 끈덕지게 매달린 채로 물에 빠져 죽기조차 마다하지 않으면서 실패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적어도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역할을 수행하며 미국인들을 위해 일하는 중이거나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의 구두를 닦는 일부터 그들이 만든 부대를 관리하고 피오리아(미 해군의 뉴포트 급 상륙용 주정의 명칭)나 포킵시(미 해군의 타코마급 소형구축함의 명칭) 안에서 햄버거 하나 사 먹을 돈을 받고 펠라티오를 해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이긴다면- 그들이 일어날 거라고 믿기를 거부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교도소나 교수형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처녀들은 야만인들과 강제 결혼을 해야 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CIA가 퍼뜨리고 있는 소문들이었는데요.”

 

비엣 타인 응우옌. 동조자 1. 김희용 역. 민음사, 2018. 18-19.

 

 

12(박정희: 귀족노조)

박정희 18한강의 기적이 노동자의 희생 위에 이뤄졌다고?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로 기능공을 양성했고,

그들이 중산층으로 성장하여 민주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의 후예가 마침내는 노동귀족으로 변질했다.

박정희는 노동자를 결코 착취하지 않았다. 이들을 마이홈’, ‘마이카’, 그리고 휴가철에 해외여행을 누리는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정희 백 년이 공산주의 백 년을 압도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업 노동자는 더 이상 해방이 아니라 세습의 대상이 되었다.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들의 고용을 보장받은 것도 이들이었다.

이제는 국가를 위해 보답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류석춘.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 대한민국 기능공의 탄생과 노동귀족의 기원. 기파랑. 2018. 책 뒷표지.

 

13(박정희: 경제기적)

유신 선포를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은 그가 무덤까지 안고 가며 부담해야 하는 과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오를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를 경제발전에 국한시키고, 그 경제 업적마저 생채기 내려는 시도들도 끊임없이 있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는 주장이다. 한국이 이룩한 이른바 경제기적은 박정희가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감행해서 일부 재벌로 대표되는 기업만을 살찌운 착시효과 때문에 느껴지는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장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세계 최고의 노동 강도를 자랑하면서 저발전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북한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노동을 혹사시키기만 해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북한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경제기적을 만들어야 했다.”

 

류석춘.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 대한민국 기능공의 탄생과 노동귀족의 기원.. 기파랑. 2018. 5-6.

 

 

14(대북제재: 미국)

“1950년 이래로 미국은 북한의 수많은 불법적이고 위협적인 행위를 처벌하고, 이와 관련된 북한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경제제재 및 기타 제재 조치를 도입해왔다. 아래와 같이 광범위하지만 서로 연관되는 4가지 문항 중 하나 이상의 항목에 해당되는 경우 제재 조치에 착수하였다.

 

(1) 무기 개발 및 확산

(2) 테러리즘에서부터 사이버 공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거나 도발적으로 무력을 과시

(3) 높은 군사비 지출을 보장해주기 위한 다수의 불법적 경제 활동

(4) 비민주주의적 통치 체제 및 인권 침해

 

이러한 제재 조치는 미국 주도 하에 도입되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기타 동맹국들의 의사결정에도 반영되었고, 때로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같이 유엔을 통한 전 세계적인 제재 조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시장으로의 접근권 및 외부 지원 수혜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된 조치는 북한의 호전적 행위와 핵확산을 처벌하는 경제제재 조치로 변질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경제제재가 북한의 여러 못마땅한 정책에 관여한 단체 및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금융제재로 진화되었다.”

 

패트릭 크로닌. “미국의 대북제재와 북한 문제.” 임여원 역. KINU통일+통권 제2(2), 2016. 55-56.

 

 

15(대북제재: EU)

유럽 ​​연합

유럽 ​​연합은 2006년부터 북한에 대해 일련의 제재를 가했으며, 이는 이하의 항목들을 아우른다.

 

*무기 및 관련 재료들의 봉쇄.

*북한에 대한 항공 및 로켓 연료 수출 금지.

*북한 정부와의 금, 귀금속, 다이아몬드 거래 금지.

*석탄과 철광석 등 일부를 제외하고 북한으로부터의 광물 수입 금지.

*사치품 수출 금지.

*북한과의 무역에 대한 재정 지원 규제.

*투자 및 금융 활동 규제.

*북한으로 수입 및 수출되는 화물에 대한 검사와 모니터링.

*북한 국민 개인의 EU 입국 금지.

*석유 수출 및 투자금지.”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16(대북제재: 안보리)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 안보리는 2006년 북한의 첫 번째 핵실험 이래로 많은 결의안을 통과시켜왔다.

 

*2006년 통과된 결의안 1718호는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하고 일부 군수품과 사치품의 대북 수출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전문가 패널의 지원을 받아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20092차 핵실험 이후 통과된 결의안 1874호는 무기 금수 조치를 확대했다. 회원국들이 북한의 선박을 검사하고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화물을 파괴할 것을 권장했다.

*20131월 북한의 위성발사 이후 통과된 결의안 2087호는 군사연구개발을 목적으로 북한을 오가는 것으로 의심되는 화물을 압수·파기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를 명확히 함으로써 기존 제재를 강화했다.

*201333차 핵실험 이후 통과된 결의안 2094호는 송금을 제재하고 북한을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차단하는 것을 겨냥했다.

*201634차 핵실험 이후 통과된 결의안 2270호는 기존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이는 금, 바나듐, 티타늄 및 희토류 금속의 수출을 금지했다. 순전한 "생계 목적"을 위한 거래를 예외로, 석탄과 철의 수출도 금지되었다.

*201611월 통과된 결의안 2321호는 북한의 석탄 수출을 제한하고 구리, 니켈, 아연, 은의 수출을 금지했다. 20172, 한 유엔 패널은 193개 회원국 중 중국이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116개국이 이러한 제재 이행에 대한 보고서를 아직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178월에 통과된 결의안 2371호는 석탄, , , 해산물의 모든 수출을 금지했다. 또한 결의안은 북한의 대외무역은행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부과하고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의 수를 늘리는 것을 금지했다.

*2017911일 통과된 결의안 2375호는 북한의 원유 및 정제 석유 제품 수입을 제한했으며, 합작 투자, 섬유 수출, 천연 가스 응축액 및 액체 수입을 금지했다. 더불어 북한 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해외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후 20171222일 통과된 결의안 2397호는 북한의 원유 및 정제 석유 제품 수입을 연간 50만 배럴로 제한하고 식품, 기계 및 전기 장비의 수출을 금지할 것을 촉구했으며, 해외에서 소득이 있는 모든 북한 국민을 24개월 이내에 본국으로 송환했다. 결의안은 또한 불법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석유 또는 기타 금지 제품을 제공하는 것으로 밝혀진 자국 영해의 선박을 압수하고 검사할 수 있는 권한을 회원국들에게 부여했다.

*유엔 기구는 제재 때문에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원조가 제한되어 있으나, 영양, 건강, , 위생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17(대북제재: 호주, 중국, 일본)

호주

호주는 20178월부터 북한에 대해 일련의 제재를 가해왔다. 호주 방위군은 대북제재를 실행하는 데 기여하고자 아르고스 작전(Operation Argos)을 통해 정기적으로 선박과 항공기를 배치하고 있다.

 

중국

20172월 중국은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북한으로부터의 모든 석탄 수입을 금지했다. 중국은 또한 유엔 결의에 따라 북한으로부터 일부 석유 제품의 수출과 직물 수입을 금지했다.

 

일본

2016년 일본은 다음과 같은 대북 제재를 가했다.

*100,000엔 미만의 인도주의적 목적을 제외하고는 송금을 금지한다.

*북한 국민의 일본 입국을 금지한다.

*북한 선박의 일본 항구 입항 금지를 갱신하고 그 조치가 북한을 방문한 다른 선박을 포함하도록 확대한다.

*북한에 다녀온 핵·미사일 기술자의 일본 입국을 금지한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18(대북제재: 러시아)

러시아

2010330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 대통령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를 강화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대통령령은 현재 러시아 관할 하에 있는 관공서, 기업소, 은행, 단체 및 개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무기 및 관련 자재를 구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러시아 영토를 통한 무기 및 관련 물질의 운송 또는 북한으로의 수출을 금지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확산 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모든 재정적 지원과 교육 훈련도 금지되었다.

201312월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에 도입한 대북제재(결의안 2087)에 동참했다.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해당 법령에는 러시아 기업이 탄도 미사일 개발 및 생산에 있어 북한에 기술 지원 및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러시아 항구에 기항하는 북한 해군 함정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또한 당국은 북한 외교관을 예의주시할 것을 지시했다.

2017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 결의 2321호 채택과 관련, 북한에 제재를 가하는 "20161130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2321호 이행 조치에 관한" 대통령령(우카즈) 484호에 서명했다. 이 법령은 제한 대상이 되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또는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개인 및 법인 목록을 포함하는 많은 법령적용을 보완한다. 안보리 결의 2321호에 의해 제공된 조치는 북한과의 무역, 경제, 은행업, 금융, 과학 및 기술 협력에 대한 추가 금지를 도입했다. 무역 및 경제 분야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구리, 니켈, 은 및 아연 구매는 금지되었다. 동시에 20163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270호에 제공된 예외조항은 제3국으로의 후속 수출을 위해 북한 나진항을 통해 러시아 철도로 러시아 석탄을 운송하는 계획에 관해 유지되었다. 또한 의료 분야의 교류를 제외하고 북한을 대표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참여하는 과학기술 협력을 중단해야 했다. 더불어 북한으로의 수출입이 금지된 "사치품"을 포함한 제품 목록뿐만 아니라 다수의 북한 개인 및 법인에 대한 표적 제한이 확대되었다. 또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거나 대북제재 체제를 위반하는 행위로 인해 북한으로의 수입이 금지된 이중용도 물품 및 기타 품목의 목록을 확대했다. 또한 이 문서는 북한으로부터의 섬유 제품 수입에 대한 완전한 금지를 명시했다. 운송 부문의 협력에 대한 추가 제한이 법령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헬리콥터와 선박을 북한으로 이송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북한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모든 항해 선박은 국가 등록에서 제거되어야 했다. 유엔 회원국 영토에 대한 북한 항공기 및 선박 검사 조치가 강화되었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19(대북제재: 한국)

한국

2010년 대한민국은 5·24 조치로 알려진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응하여 대북 제재를 가했다. 이러한 제재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북한 선박의 한국 영해 출입을 금지한다.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을 중단한다.

*대부분의 문화 교류를 금지한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은 1월 핵실험과 2월 로켓 발사에 대한 보복으로 개성공단 폐쇄를 지시했다.

2019년 유엔 패널은 한국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사용할 석유제품 인도에 대해 안전보장이사회에 통보하지 않음으로써 제재를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북한의 불법 해운 관행에 대한 갱신된 지침 부록에는 한국 선박이 북한 유조선과 선박 대 선박 이송에 관여했음이 추정된다고 기재되어 있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20(대북제재: 대만)

대만

2017년 대만 역시 유엔 회원국이 아님에도 불구, 유엔 결의를 준수하기 위해 북한과의 무역을 금지했다. 북한은 대만의 174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이며 20171월부터 7월까지 120만 달러를 수입하고 36,575달러를 수출했다. 1년 후, 전직 고등법원 판사인 장궈화(Chiang Kuo-hua)와 그의 아들 장헝(Chiang Heng)은 그해 여름 베트남에서 무연탄 4개를 수송하기 위해 배를 전세 내어 대북 제재를 회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과 다른 두 명의 중국 국민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21(대북제재: 미국)

미국

195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과 북한 간의 무역은 1917년의 적성국 교역법에 따라 제한되었다. 2008년 이후에는 국제비상경제권법과 관련된 일부 제한이 유효하게 유지되었다. 20162, 아래와 같은 2016년 대북 제재 및 정책 강화법이 통과되었다.

*대통령은 북한의 대량 살상 무기 프로그램, 무기 거래, 인권 유린 또는 기타 불법 활동에 기여한 것으로 밝혀진 단체를 제재할 것을 요구한다.

*북한의 대외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광물 또는 금속 무역에 관여하는 단체에 대해 의무적 제재를 부과한다.

*미국 재무부는 북한에 대해 강력한 새로운 금융 규제를 촉발할 수 있는 "주요 자금 세탁 우려 국가"로 분류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북한 인권 및 사이버 보안 공격과 관련된 새로운 제재 조치를 부과한다.

20177, 관광객 오토 웜비어가 사망한 후 미국 정부는 201791일부터 미국 시민이 특별한 승인 없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했다.

20178, ‘제재 조치를 통한 미국의 적에 대한 대응법이 통과되었다.

2017921,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과 상품, 서비스 또는 기술을 거래하는 모든 회사, 사업체, 조직 및 개인의 금융 시스템을 중단하거나 자산을 동결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 13810호를 발동했다. 북한에 입국하는 항공기나 선박은 180일 동안 미국에 입국할 수 없다. 북한 선박과 선박 대 이송을 수행하는 선박에도 동일한 제한이 적용된다. 스티븐 므누신(Steven Mnuchin) 재무장관은 "외국 금융기관들은 앞으로 미국이나 북한과 사업을 할 수 있지만 둘 다 할 수는 없다"고 엄명했다. 백악관의 성명은 "외국의 금융 기관은 미국과 사업을 하거나, 북한 또는 북한이 지정한 지원자와의 무역을 촉진하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7925일 미 재무부는 북한 국적자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다.

한국어선 납치 사건에 이어 사형, 고문, 강제 노동을 포함한 "노골적인" 인권 침해가 정점에 이르자 20171026일 재무부는 추가 제재를 명령했다. 7명의 개인과 3개의 북한 단체가 제재의 영향을 받았다.

2018711일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NATO 지도자들은 북한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과 지속적인 제재 시행을 촉구했다. 미국을 포함한 29개국은 최근 이 지역에서의 외교적 진전도 환영했으나, 회원국들이 북한에 대한 압력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20181113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제재를 유지할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20181220일에는 미국이 북한 여행 금지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보도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제재를 환영했다.

2022112,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및 탄도미사일 관련 계획안을 조달한 혐의로 북한 관리 5명을 제재했다. 또한 국무부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활동을 광범위하게 지원한 또 다른 북한인, 러시아인, 러시아 기업에 대해 제재를 명령했다.”

 

Wikipedia contributors.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2 Sep. 2022. Web. 18 Oct. 2022.

 

 

22(대한경제원조: 전환)

한국전쟁 이후 세계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고, 많은 발전도상국들이 심각한 경제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황은 발전도상국들의 주요 수출품이던 1차 산업제품의 가격하락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시작되었고, 선진공업국과 발전도상국 간의 경제적 격차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른바 남북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반둥회의에서는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이 긴급한 과제로 강조되었고, 국제경제협력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68)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서 미국 역시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원조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75,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의회에 보낸 대외원조특별교서에서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을 제안했다. 미국의 새로운 원조정책의 기조는 첫째, 기존 1년 단위의 무상원조방식을 장기 유상원조방식으로 바꾸어 증여를 차관 형식으로 전환한다. 둘째, 이전의 프로젝트 원조방식 대신 국가개발계획을 지원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피원조국의 발전능력과 자조노력 정도를 중시한다. 셋째, 경제원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선순위 방식으로 원조를 배분하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 피원조국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부를 만한 방침을 세운 것이다. (...) 전환된 미국 원조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71-72)

미국의 전환된 원조정책은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개발계획을 중시하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한국정부 또한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정권은 19594월 자립경제 기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60-62)’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미국정부의 권고에 따라 구상된 것이었다. 계획의 담당자였던 이기홍(당시 부흥부기획국 기획과장)미국의 원조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1957년 중반부터 AID 관리가 한국정부 정책담당자(김현철 부흥부장관)에게 장기경제개발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62년부터 이를 실행했다. 이는 미국정부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특히 지원과 원조를 확보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81)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23(베트남전쟁: 수출지향공업화)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이 경제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대아시아 경제원조 동향을 살펴보면, 60년대 후반 들어 남아시아의 비중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확대되고 있다. (...)

베트남전쟁이 확산되면서 아시아로의 편중 경향은 군사원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원조액을 살펴보면,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원조 누계액은 60년대 전반(1961-65) 39억 달러에서 후반(1966-70)에는 107억 달러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전반기 49%에서 후반기에는 거의 82%까지 확대되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이러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재정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어 이를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90-92)

베트남전쟁의 효과였던 경제원조의 확대를 통해 동아시아 나라들은 수입대체공업화에서 수출지향공업화로 전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립적 경제발전에서 외향적 경제발전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대외의존형 경제발전 경로에서 내향적전략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97)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24(대한경제원조: 성장 트라이앵글)

“60년대 초 한국의 원자재 수입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의존도가 28%에 불과했지만, 65년 이후 급속도로 증가해 70년대 초에는 58%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수출용 원자재는 절반가량을 대일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우수한 기계도입과 고품질의 수출용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 등을 통해 촉진되었고, 그 결과 생산과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생산재 수입을 통해 고정자본을 형성하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공업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뒤 이렇게 획득한 외화로 다시 생산재의 수입을 늘린다는 순환메커니즘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 자본재를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조립가공한 후 완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하는 이른바 성장의 트라이앵글이다. '성장의 트라이앵글은 수출지향형 공업화의 발전과 일치한다(...).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127-128.

 

25(대한경제원조: 바이 코리아)

“(이른바 바이 코리아(Buy Korea)정책으로 전환한) 미국정부는 19655월 열린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우대하는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박정희-존슨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의 수출 진흥을 지원할 것임을 밝혔는데, 기본적인 결정사항과 관련된 비밀조약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의 한·미공동선언문에 명시된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과 관련해 별도의 각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한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258.

 

26(대한경제원조: 전자산업)

“19666월 한·미협정을 근거로 한국과학기술원(KIST)과 바텔기념연구소 간에 자매결연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이 협정에 의해 바텔기념연구소에 다음과 같은 지원업무가 부여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 KIST의 창설 업무와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 2. 상임연구원 모집과 기술훈련에 대한 지원, 3. 연구시설 및 기기 선정에 관한 협력, 4. 기술정보 제공, 5. 연구 및 조사프로젝트를 위한 전문가 파견 등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 소장이 KIST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KIST가 바텔기념연구소에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과 노하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해 줄 최고의 스폰서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KIST의 연구활동이 한국의 산업계에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때까지 바텔기념연구소의 지원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미국외교문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281)

(...)특징적인 사실은 196738일에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심의, 검토된 전자공업육성방안이 한국정부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성, 입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실제로 (바텔의 주도로 16개 산업기술부문을 점검한) 산업실태조사보고서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치하고 있어서 사실상 바텔기념연구소가 정책을 수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시기 산업정책은 관료적 통제의 색채가 확실히 강했지만, 정부 내에 전자분야의 정책과 관련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산업에 관한 정책 수립이나 검토·조정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자산업은 당시 최첨단 산업의 하나였고, 한국에는 전자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과학기술자 그리고 최신기술정보 등의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국이 전자산업의 육성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307-308)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27(베트남전쟁: 쇼윈도 국가)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그리고 미국정부 고위관계자들의 회담결과, ·미 두 나라는 단순한 우호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 관계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방미 당시 대통령비서실이 대미교섭을 위해 작성한 ·미 양국의 현실적 입장과 박 대통령의 방미목표 에는 군사쿠데타정권의 정당화, ·미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의 쇼윈도화등이 열거되어 있다. 1.현 정권과 한국국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확보한다, 2.극동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만든다는 미국정부의 확약을 받아내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를 획득한다, 3.·미 간 여러 현안들을 고차적으로 해결한다, 혹은 조기해결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낸다는 등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을 쇼윈도로 만든다는 구상이 외교정책의 주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과 미국정부의 확약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338-339)

(...)여기에서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개발독재체제강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미국의 더 많은 깃발캠페인이 파탄을 맞이한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 정권만이 베트남 파병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모델은 공업화를 경제개발의 중심으로 두고 설계되었는데, 그 개발체제의 필수적인 담당자를 군사정권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계획수행 능력을 갖춘 안정된 정권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한국모델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가 한국모델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나아가 장기화시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스트노선이었다.” (346-347)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역. 회화나무. 2017.

 

28(신남방정책: 양상)

“1992년 한국과 베트남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이후 외교 관계와 한국기업의 베트남 투자 프로젝트로 양국 관계가 강화되었다. 한국은 베트남의 선도적인 파트너 중 하나이며, 투자 측면에서 1, 공적 개발 원조에서 (일본에 이어) 2, 무역에서 (중국, 미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현재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국가이다. 동시에 베트남은 한국의 해외 투자규모에서 네 번째로 큰 투자 파트너이기도 하다. 한국은 베트남의 총 등록 자본과 총 투자프로젝트 수에서 1위를 차지한다.(...)

1991-1996년 기간은(...) 베트남에서 외국투자의 획기적인 시기 또는 베트남에 대한 최초 외국투자의 파도로 간주되었다. 베트남 지역의 일부 국가에 비해 낮은 투자 및 비즈니스 비용, 풍부한 노동력, 낮은 인건비, 신규 시장으로 인해 베트남 투자 및 비즈니스 환경이 한국 투자자를 유치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따라서 외국직접투자는 빠르게 성장하여 다른 경제 분야에 파급 효과를 가져 오고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목표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삼성, 대우, 한국 건설과 중공업 회사, 금호, 코오롱, 현대 그룹, LG그룹 등 7개 주요 경제 그룹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각 프로젝트는 천만 USD가 넘는다. 대우, LG, 삼성 한국의 3대 주요 기업은 주요 프로젝트에 투자하며 투자금액이 12.75USD로 한국 기업의 전체 투자금액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 기업들은 부동산 및 인프라 건설에서 전기, 전자, 자동차 생산, 제약 등 분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투자했다. 대우 그룹은 이 기간 동안 총 등록 투자금액이 7USD로 베트남 최대 투자 그룹이다.”

 

도안만끄엉. “한국 기업의 베트남 외국직접투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9. 1-5. 일부 문장 교열.

 

 

29(민족의식: 베트남)

 

베트남? 거기 그냥 황제투어 하러 가는데 아님?”

주린이

 

 

호치민 여행갔을때 하루에 한번은 같이 사진찍자고 달려들던 친구들이...누구보다 한국인의 하얀피부를 부러워하더만ㅋㅋ베트남 좋은건 망고 망고스틴 쌀국수 이게 다야...”

위급할땐앞구르기



“3개 내용 다 팩트긴 한데, 팩트를 기반으로 감정을 날조하네 쌍거풀 없고 혐오로 가득 차 있어도 베트남은 안부러운데..ㅠㅠ

G0ranii

 

 

내가 제일 역겨워하는 족속이 짱과 베트콩년들인데 부러워해? 욕박아도됨?”

왓슨탐정

 

 

ㅋㅋ 음식 좃같던데 시발 베트남있다가 어제 입국했는데 시발 뭔개소리여.

확실히 부러운건 여자애들 다리긴거랑 가슴큰거 빼곤 없던데??”

악날거북

 

봉준호식이두마리치킨. “한국인이 베트남을 부러워 하는 이유 ㄷㄷ.” DogDrip.net, 2022.7.21.

 

30(민족의식: 베트남)

안마를잘함

흑검

 

 

쌍커풀을 부러워해도 미주, 유럽애들을 부러워하지

동양인 등급중에서도 제일 밑에있는 동남아 쌍커풀을 누가 부러워해

어제보다오늘

 

 

ㄹㅇ 눈보다는 빻은 코에 눈길이 먼저 가서 실패

신촌엔바나나가없구나

 

 

반미 쌀국수

말고는 없다 응우옌들아

샤이너스

 

 

물가저렴한거는 부러워 한국돈으로 저기 물품사서 한국에서 살고싶어..”

창원시진해구이동거주중

 

 

여자가 친절한건 맞음.

우리나라남자한테 친절해서 어떻게든 엮여서 결혼할라고.

22살짜리가 나 이혼남이고 나이많다해도 좋다는걸보면 사기기확실함

바쿠스에프

 

봉준호식이두마리치킨. “한국인이 베트남을 부러워 하는 이유 ㄷㄷ.” DogDrip.net, 2022.7.21.

 

31(민족의식: 베트남)

응 공산주의

고양이네마리

 

 

쟈들 요즘 깔짝거리는거 봐주라

우리나라가 베트콩을 좀 적게 죽인 것도 아니고

그래 그런 이미지네 베트콩년아

프로쎾써

 

 

근데 쌍꺼풀이라도 백인특유 눈썹뼈 돌출로 인한 섹시하고 샤프한 입체적인 눈을 원하지, 동남아 쌍꺼풀은 그 외 이목구비, 피부색 영향탓인가 똥내나게 생겼던데.”

寅蔵

 

 

베트남애들 가슴크고 몸매 좋음. 그리고 잘대줘. 좋은 나라는 맞다 ㅋㅋㅋㅋ

망고와망고

 

 

우리나라는 그래도 gdp만달러 언저리일 때 국뽕 존나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쟤들은 5천달러 언더이면서 벌써 저런다고? 역시 인터넷이 애들을 망친다

그렇게

 

봉준호식이두마리치킨. “한국인이 베트남을 부러워 하는 이유 ㄷㄷ.” DogDrip.net, 2022.7.21.

 

 

32(신남방정책: FDI)

“(...)일반적으로 외국인직접투자 기업에서 사용되는 기술은 베트남의 동일한 산업 및 동일한 제품 기준보다 높다. 적지 않은 외국인직접투자자들은 베트남 법률의 허점 또는 국경 출입구 검사 및 감독의 약점을 악용하여 다른 국가들의 낙후되거나 폐기된 기계류와 장비를 수입해왔다. 이는 점차적으로 베트남을 세계의 산업 쓰레기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베트남으로의 기술 이전을 위한 보완된 법적 틀이 있지만, 실제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기술 이전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기획투자부에 따르면 201312월 기준으로 총 등록 자본금이 2,360USD에 달하는 거의 16,000개의 FDI(외국인직접투자)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 중 상당수는 기술적으로 구식이며 기술 이전 활동에는 관심이 없다. 베트남 자동차 산업의 발전 현황은 외국 기업들에 비해 현지화 비율이 20-25%인 주로 몇 가지 제품군을 갖춘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6%이하의 현지화 비율로 조립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안만끄엉. “한국 기업의 베트남 외국직접투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9. 51. 일부 문장 교열.

 

 

33(아류제국주의: 노사분규)

외국인 투자청 통계에 따르면, 현재 2,000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전체 투자금액은 211USD이다. 한국은 베트남에서 선도적인 투자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기업에서는 노동 분쟁의 상황이 점점 더 많이 발생했다. 그리고 한국 기업들의 노동 위반 상황은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

베트남 노동 총동맹의 통계에 따르면 19951월부터 2009년까지 (...) 집단 노동자의 약 3,000건 가량의 파업이 발생했고, 그 중 FDI기업에서 발생한 파업의 수는 72.4%로 항상 가장 높았으며, 그 중에 한국 기업이 평균 27.7%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파업의 원인은 대부분의 노동법 규정에서의 한국 기업의 위반으로 인한 것이다. 주로 급여 비례 규정 부족, 보너스 또는 급여 지불 규정 부족, 또는 급여 연체, 사회 보험 기피 및 회피와 같은 사안으로 인해 발생했다. 파업은 주로 남부 지방에서 발생하며 많은 한국 기업이 활동하고 있는 호치민시에 집중되어 있다. 많은 기업들에서 임금은 근로자의 노동과 일치하지 않고 노동 협약은 제대로 준수되지 않고 있다. 또한 안전 조건, 노동 위생, 과도한 초과 근무, 근로자 불법 해고/근로자에 대한 노동 계약의 불법 해지 등이 노동 분쟁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안만끄엉. “한국 기업의 베트남 외국직접투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9. 52-53.

 

 

34(노사관계: 무궁화훈장)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2, 문재인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전태리 씨와 전순옥 전 국회의원을 청와대로 초청, 훈장과 부장, 꽃다발을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했는데, 무궁화 훈장은 국민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이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노동계 인사가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수연. “전태일 열사 50주기와 노동존중 사회.”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0.11.13.

 

 

35(아류제국주의: 소매시장)

베트남 국내 제품을 선호하고 자주 구매하는 소비자의 비율은 2017년의 조사 결과와 비교하여 급격하게 하락했고 2017년에 27%, 현재 32%가량이 감소했다. 베트남 소비자들은 수입품, 특히 한국산 제품을 점점 더 좋아한다. 2017년 조사에서 한국 제품은 소비자가 3%미만으로 구매한데 이제는 10%로 증가하고 심지어 제과류, 음료수가 비율이 17%로 상당히 높다.(...)

외국소매업체의 시장 침투 전략은 매우 신중하다. 소매 시스템은 제품이 소비자와 연결되어 단계적으로 소비자를 정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핵심 요소이다.

강력한 재무 능력을 앞세워 한국 소매 그룹들은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대형 소매 업체의 소매시스템을 석권함으로써 베트남 시장을 독점하려는 야망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수십억 USD에 달하는 일련의 석권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베트남의 대형 슈퍼마켓은 VinmartCoopmart를 제외하면 외국 기업 소유이다. 한국기업은 14개의 슈퍼마켓이 포함되는 롯데, Emart 시스템이 있으며 최근에는 Son Kim그룹과 협력하는 GS25가 있다.(...)

이와 함께 한국 당국의 효과적인 지원은 베트남 시장을 정복하기 위한 제품을 도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도안만끄엉. “한국 기업의 베트남 외국직접투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9. 62-63.

 

 

36(해외직접투자: 여성)

“* 전자산업은 베트남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산업이며 2016년에는 530억 달러, 삼성 단독으로도 360억 달러의 수입을 거두었다. 현재 삼성 휴대전화의 50%는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다.

 

* 베트남에서는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전자제품 표준 개발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작업장 안전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 베트남 전자산업 노동력은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노동자의 약 80%가 여성이며, 이들은 관리체계 상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조립라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 베트남 정부 조사에 따르면 전자산업체의 약 3분의 1은 초과근무에 대한 베트남법을 위반하였다. 17개 전자산업체에 대한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2개 업체의 초과근무는 생산량이 많을 때 월 100시간 이상, 다른 세 업체는 50~60시간이었다. 베트남법은 초과근무를 월 30시간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정부 조사에서는 지나치게 긴 초과근무는 전자산업체 산재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였다(베트남 노동장애사회부 Ministry of Labour, Invalids and Social Affairs, 2016).

 

* 이 연구를 위해 인터뷰에 참여한 삼성의 여성 노동자 45명 중 자신의 근로계약서 사본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는 베트남법 위반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근로계약서를 회사가 보관하고 있으며 사본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Research Centre for Gender, Family and Environment in Development. 베트남 전자산업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다산인권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역. 2017. 6.

 

37(해외직접투자: 여성)

“* 베트남 전자산업의 건강 영향은 연구된 적도 알려진 바도 없다. 그러나 정부는 전자산업의 심각한 건강 문제 개연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 “전자산업 노동자 안전 문제들은 화학물질, 방사선, 전기파 노출로 인한 암이나 심장마비를 유발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는 단지 추론일 뿐이며 실제 납중독과 직업병들이 존재한다 하여도 통계상 입증된 것은 아니다.”(베트남 노동장애사회부 Ministry of Labour, Invalids and Social Affairs, 2016)

 

* 여성 노동자들은 4일간의 주야 교대근무, 9~12시간 내내 서서 일해야 함, 통상 베트남 법적 허용기준을 초과하는 높은 소음 수준 등 고단한 노동조건에 대해 말했다. 임신한 노동자들은 근무 내내 서서 일하지만 휴식을 취하는 것은 허락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휴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이들이 너무 많이 쉰다고 삼성이 생각하면 임금을 삭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생산라인에 최대한 머물게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려면 화장실 카드를 요청해야 할 정도로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

 

* 이 연구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다양한 건강 문제를 보고하였다. 45명 모두 근무 중 실신 혹은 어지러움을 보고하였는데, 이런 증상이 교대근무의 정상적인결과라고 표현하였다. 유산은 젊은 사람이라면 매우 정상적인일로 보고되었다. 그 밖의 문제들로는 시력 손상, 코피, “커지는 종아리(다리 부종을 이렇게 표현함-역주)”, 외모의 변화, 위장과 뼈, 관절의 통증 등이 있었다.

 

* 노동조합 결성과 단결의 자유는 국제노동기구 협약 제87조와 98조의 요건이지만 베트남은 이들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 전국 산업 및 무역 노동조합(the Vietnam National Union of Workers in Industry and Trade)은 인더스트리올(IndustriALL)에 가입해있고 전자산업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은 무노조 정책을 갖고 있으며 노동조합이 필요하지 않은 경영 원칙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삼성의 내부 문건에 서는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기 위한 회사의 행위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Research Centre for Gender, Family and Environment in Development. 베트남 전자산업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다산인권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역. 2017. 7.

 

38(노사관계: 주주)

교과서적인 답이지만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주식회사는 주주가 출자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설립과 운영이 되는 물적 조직체다. 회사를 이끌어가는 경영자도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결코 주인이라 할 수 없다. 경영자는 주주로부터 회사 경영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고, 노동자는 고용된 직원이다. 회사에서 녹을 받는 경영자나 노동자 모두 주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이치다.

최근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왔다. 지금 노조의 모습을 보면 무리한 요구와 생떼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공격적인 투자로 지금의 위치를 사수하고 애플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노조에 발목이 잡힐까 걱정된다는 의견이었다. 애플에는 노동조합이 없으며, 최근 소매판매점인 애플스토어 노동자 일부가 노조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또 다른 주주는 노조가 '귀족노조'로 변질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현대자동차 사례처럼 삼성전자 노조가 국민에게 귀족노조라는 인상을 주지 않길 바란다는 의견이다.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걸핏하면 공장을 세우겠다는 것을 무기로 자기주장만을 관철하는 모습이 삼성전자에서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노조다운 노조,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영진다운 경영진, 다른 한쪽에 주주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주주가 노조를 비판한 배경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임금 교섭이 타결되지 못하고 초유의 '파업'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의 원인이 '노조의 무리한 요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4개 노조가 꾸린 공동 교섭단은 지난해 10월부터 15차례에 걸쳐 2021년도 임금 협상을 진행하면서 연봉 1000만원 일괄 인상과 영업이익 25% 성과급 지급, 성과급 지급 체계 공개 등을 요구했다. 급여 체계와 관련해 성과급 지급 기준을 현재 경제적 부가가치(EVA)에서 영업이익으로 바꾸고 포괄임금제와 임금피크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교섭이 결렬되자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두 차례 노동쟁의 조정 절차를 거쳤지만 결국 사측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태다. 노조는 중노위를 통해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는 쟁의권을 확보했고, 단체행동에 나서기 전 마지막 단계로 최고경영진과 대화했지만 간격이 여전하다. 주주 입장에서는 영업이익의 일정 부분을 성과급으로 지급하라는 것은 회사의 미래를 고려치 않는 이기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글로벌 선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천문학적 투자를 진행하고 회사를 믿고 투자하는 주주에게도 보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회사는 지속 가능한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여야 한다. 그런데 노조가 먼저 이익의 얼마는 자기 몫으로 챙기겠다고 주장하니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함봉균. “[ET시선]삼성전자 노조, 주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전자신문. 2022.3.18

 

39(노사관계: 광복절 사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재명 민주당 의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에 대해 찬성 여론이 더 높다대통령 고유권한이라 의견을 내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과거와 의견이 달라졌다며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9일 오전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진행한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에서 박 의원은 “8·15사면 때문에 논란인데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이 후보는 박 의원 의견부터 말씀해달라고 했다. 박 의원은 제 주도권 토론시간이라고 답변을 요구하자 이 의원은 박 의원 답은 어떤가, 그게 내 답이다라고 말했다.

박 의원이 재차 묻자 이 의원은 사안마다 다를 수 있는데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국민여론은 찬성 여론이 높은 것 같다“(사면은) 대통령 고유권한이라 이래라 저래라 의견을 내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어 국민여론을 판단해 권한있는 사람이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상 사면 찬성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장슬기. “사면 반대하던 이재명 이제는 이재용 사면, 찬성 여론 높아”.” 미디어오늘 2022.8.9.

 

40(노사관계: 광복절 사면)

정부의 올해 광복절 특별 사면 대상에 주요 기업인이 포함됐다. 그동안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던 기업인들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면서 대규모 투자와 M&A 등 미래 먹거리 창출에도 힘이 실릴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법무부는 2022년 광복절을 맞이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을 포함한 특별사면을 단행한다고 12일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이 특별 사면됨에 따라 삼성의 미래 투자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은 올해 5월 향후 5년간 450조원을 미래 먹거리 육성을 위해 투자하고 투자액의 80%에 해당하는 360조원을 국내 투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5년간 8만명을 채용하는 일자리 창출 및 미래인재 육성 계획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이 복권됨에 따라 삼성의 투자·채용 계획도 힘을 받을 전망이다.

(...)

이번 사면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그동안 저의 부족함 때문에 많은 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다는 말씀도 함께 드린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어 지속적인 투자와 청년 일자리 창출로 경제에 힘을 보태고 국민 여러분의 기대와 정부의 배려에 보답하겠다아울러 우리 사회와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법 리스크를 해소한 신동빈 롯데 회장의 행보도 주목된다. 신동빈 회장은 취업제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그룹 총수가 집행유예 중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아왔다. 롯데그룹은 경영자의 준법 경영과 윤리 정신 등을 중시하는 해외 기업 투자와 M&A 등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신동빈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해제되며 롯데그룹은 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양준규. “이재용·신동빈 특별사면... 대규모 투자 · M&A 이뤄질까.” 스카이데일리. 2022.8.15

 

41(K-컬쳐: 베트남)

“ "오징어 게임(SQUID GAME)을 봤나요? 드라마에 나오는 게임을 같이 해보실래요?”

 

요즘 베트남 현지에서 흔히 듣는 질문이다.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베트남에서도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매일같이 양산되는 패러디물을 비롯해 베트남 젊은 층에서 열에 여덟, 아홉은 오징어 게임의 주요 대사와 각 게임을 줄줄 외고 다닐 정도다.

비단 오징어 게임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한류 콘텐츠가 베트남에서 그랬다. 초창기 '대장금'부터 '런닝맨', 최근의 '이태원클라쓰'까지 베트남에서 한국 콘텐츠는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이제 '방탄소년단(BTS)'이나 '블랙핑크' 같은 한국 유명 아이돌 그룹의 앨범이 발매되면, 그 즉시 베트남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신곡이 퍼지면서 베트남 음악 차트 1위를 석권한다. 사실상 문화적으로는 한국과 베트남이 동시간대를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베트남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류(베트남어: Làn sóng Hàn Quốc·란쏭한꾸옥)'의 원조 국가로 통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콘텐츠는 이웃 국가인 일본과 중국 등에 먼저 뻗어갔지만, 단연 한류 열풍이 일어난 곳은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해외 공영방송이 한국 드라마를 소개한 곳도 베트남이다. 베트남 국영방송 'VTV1'은 지난 1995년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 '내 사랑 유미'를 전국으로 방영했다. 이후 '의가형제'(1998), '가을동화'(2001), '대장금'(2004) 등이 연속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베트남 내 한류 바람의 기반이 됐다.”

 

김태언. “[K-POP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꿨나?] 한류, 베트남의 보편가치로 우뚝 서다.” 아주경제. 2021.10.17.

 

42(K-컬쳐: 베트남)

주목할 점은 1990년대부터 인기를 끌어온 한류가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하다는 점이다. 다른 국가에서 한류는 양국의 정치 상황이나 기타 변수에 따라 기복이 있던 반면, 베트남에서 한류는 지난 20여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1990년대에 태어나 베트남의 문화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 신여성(Phụ nữ tân thời·푸느떤떠이) 세대'는 베트남 내 한류 공고화의 주역이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나 개인 성향이 높은 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한국의 K-POP(케이팝), 한국 드라마(K-Drama) 등을 접했다. 이미 한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상당하며 일부는 복수비자를 통해 수시로 한국을 방문하며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의 콘서트장에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게 익숙한 한류는 베트남에서 계속해서 자리 잡으며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고 한류 콘텐츠는 큰 어려움 없이 베트남 전체로 기반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석진영 베트남 한국문화원장은 "베트남은 이제 전 세계에서 한류를 선도하는 국가"라며 "이는 한류가 그만큼 베트남인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고 베트남과 한국의 유대 관계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이제 한류의 표본 모델이자 거점 국가로 여겨진다. 베트남에서 한류는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베트남에서 초기 얻는 평판은 그대로 다른 아세안 국가의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베트남 현지의 평가가 곧 한류 성공의 기본 척도가 되는 것이다.”

 

김태언. “[K-POP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꿨나?] 한류, 베트남의 보편가치로 우뚝 서다.” 아주경제. 2021.10.17.

 

43(K-컬쳐: 베트남)

"[앵커]

최근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에미상에서 6관왕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높아진 한국 문화의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는데요.

이렇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글자인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안동준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한창 수업 중인 교실에 베트남 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참관합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봅니다.

이들은 베트남에서 온 한국어 교사.

현지에서 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을 수료하고 우리나라로 직접 연수를 온 겁니다.

[마이 티 리엔 / 베트남 한국어 교사 : 학생이었을 때부터 한류 문화가 베트남에 유입되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노래를 들어서 한국이 아름답고 문화가 독특하고 현대적인 나라구나 생각했어요.]

수업 참관을 마친 뒤에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연구원에 들러 한국의 역사와 문화도 배워봅니다.

코로나 위기로 3년 만에 방한 연수가 재개되면서 참가한 교사들의 감회도 남다릅니다.

[팜 띠 마이 찐 / 베트남 한국어 교사 : 수업을 통해서 한국어 문법에 대해 깊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앞으로 베트남에 돌아가서 학생들에게 아주 뚜렷하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응웬 티 튀 응아 / 베트남 한국어 교사 : 제 인생에서 가장 꿈 같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베트남에 들어가서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케이팝이나 드라마 등 한국 문화가 베트남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레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초·중학생은 1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베트남 내 36개 대학에는 한국어 학과와 교양 수업이 개설돼 있고,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도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김 다니엘 / 한국어 교육 전문관 : 베트남을 비롯한 태국,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에서는 작년에 제1외국어 교육과정으로 한국어가 승인되었습니다.]

한글에 대한 관심은 비단 베트남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84개국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의 수강생은 15년 전과 비교해 110배 넘게 늘었습니다.

또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 대중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오빠', '언니'와 같은 한국의 독특한 호칭 문화가 지난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한류가 짧은 '열풍'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YTN 안동준입니다."

 

YTN. "베트남 호찌민 한국어 수강생, 1년 만에 3..."한류, 이젠 '한글'이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10. 15.

 

44(민족의식: 베트남)

베트남은 단순히 한류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게 아니라 베트남 현지에 수많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있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우리나라 기업들이 다 철수하면 베트남 경제가 반토막이날정도로 한국 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죠.

빌리헐트Billy Hult

 

한글 특허로 한글 공통어된다. 한글 특허로 제2의 세종대왕 이태순. 한글 특허로 문맹자 없는 한글 공통어. 5세아기 하루에 한글 선생 만든 한글특허. 한글 최고 빨리 가르친다. 한글 특허로 한글로 세계어 다쓴다. 한글 최고 박박사 이태순.

한글특허 세종대왕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저들이 한국어를 배운 보람이 있을텐데.

그래도 제1외국어가 영어이고, 2외국어가 한국어겠지?

bb b

 

베트남 뒷통수의 달인들 조심하시길 ..

진라면면

 

불법체류 도망가지 읺게 잘 감시해라

madox 01

 

뒤통수에 달인들 왜?

jongsun kim

 

YTN. "베트남 호찌민 한국어 수강생, 1년 만에 3..."한류, 이젠 '한글'이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10. 15.의 덧글

 

45(민족의식: 베트남)

중국 베트남 사람들은 상종말아야함...그들은 언제든 뒤통수칠수 있는 사람들임...그들이 한국말을

배우는건 순수하게 바라보면 안됨...

왜 공산주의 나라들이 똑같이 행동하는 줄앎??.

Tyoung2017 G

 

공산국가는 잘해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저들이 고국 돌아가서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면을 많이 교육시킴. 이건 팩트임.

morisoo1

 

공산당 나라는 잘 가르쳐 놓아도 중공처럼 배신할까 두렵다... 불법체류자도 늘어나고 마약파티등 사회문제도 문제를 일으키고...

Kevin Koo

 

.

뭔 의도로 그리 싫어하는 나라 말을 배우려는지

j

 

세상에 좋고 좋은 나라 많은데 왜 한국에 오냐고

하이헬로

 

베트남애들 돈앞에 아무것도 없다 조심해야되

유튭사용자

 

오지마라 니들은 걍 즈그나라서 중공과 경쟁하며 사라다오

jama newang

 

YTN. "베트남 호찌민 한국어 수강생, 1년 만에 3..."한류, 이젠 '한글'이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10. 15.의 덧글

 

46(민족의식: 베트남)

설마 여기 연수온 사람들마저 중간에 사라지는건 아니겠죠? 저번에 베트남 총리인가 국회의원인가와 같이 입국한 수행원들마저 국내에 들어와서 종적을 감췄다는 보도를 듣고 제 귀를 의심했었는데요 이번엔 그런일이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

알서퍼

 

중국 손절하니 YTN이 베트남 쳐 올리네. 열심히다

JOOHYEONG SON

 

입국후 사라진 베트남인들...ㅋㅋㅋ

stive jeong

 

벳남 콩까이 가 무기지요 벳남 상종 못할 것들이여 왜와 동

성조 백

 

불법체류자들

QUEEN

 

베트콩애들 잠적하는거 아녀?

포텐자

 

베트남 불법체류자놈들 단속 안하냐?

살구

 

뻑하면 한국 개무시하고 도와준 기업이나 사람들 뒷통수치고 이젠 한글도 뺏어가려고?

달마

 

YTN. "베트남 호찌민 한국어 수강생, 1년 만에 3..."한류, 이젠 '한글'이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10. 15.의 덧글

 

 

47(민족의식: 미국)

최고

소니

 

바이든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지워진 이름

 

이름도 모르는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대한민국에 대한 공산집단

북한 중국 소련에 맞서서 피를 흘려주신 14만 국군 장병님들과

3만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의 목숨으로 지켜낸 우리 나라 대한민국 .

고맙습니다

미국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그 흔한,,,,,,,,,,

박수는?어디류갔나 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

Chong Kim

 

바이든 대통령 님 반갑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서태옥

 

한미동맹이 정상화 되서 다행이네

영영영영

 

YTN. “[에디터픽] 현충원 참배부터 공동 성명까지.."한미 동맹 더욱 격상"."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5. 22. 의 덧글

 

 

48(민족의식: 미국)

윤대통령님 응원합니다

바우

 

삼성은무엇인가?

?그는작은나라에와서제일먼저삼성에.자리했을까?

삼성은꽃일까?

삼성은상징일까?

삼성은결정일까?

우리만멀리두고

우리만애매할까?

우리만희미할까?

손에쥐고찾는걸까

?~~~~~

조승연

 

북미라고 하지 말고

미북이라 말하자.

 

한미라 하지 않나?

가까운 쪽을 먼저 말하고 먼 곳을 두번째에 말한다

 

여기에 가깝고 먼곳은 거리가 아니라

 

국가간 관계를 말한다.

 

북한은 제일의 적이다

 

국가간의 관계가 가장 멀다

박재열

 

한미동맹 강화 국가안보를 튼튼히

해야 경제발전을 할수 있습니다 ㆍ

바이든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화이팅 !

국민들이 응원합니다 !

이승우

 

YTN. “[에디터픽] 현충원 참배부터 공동 성명까지.."한미 동맹 더욱 격상"."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 5. 22. 의 덧글

 

49(한미동맹)

“[앵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최고 영예 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에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하기도 했는데요.

한미 양국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혈맹임을 부각시키며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했습니다.

홍선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바이든 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첫 만남의 자리로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94살의 노병,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에게 미군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수여한 겁니다.

그러면서, 한미동맹은 한국전쟁에서 맺어진 혈맹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조 바이든 / 미국 대통령 :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강력한 동맹은 미군과 한국군의 희생과 용기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문 대통령도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한미동맹은 퍼켓 대령과 같은 영웅들의 피로 맺어진 혈맹임을 강조했습니다.

[문재인 / 대통령 : 영웅들의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은 한반도를 넘어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이 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마친 뒤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했습니다.

높이 1미터 둘레 50미터, 추모의 벽에는 한국전에서 숨진 미군과 카투사 43천여 명의 이름이 새겨질 예정입니다.

내년 완공 목표인 추모의 벽은 우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문재인 / 대통령 : 1950년 낯선 땅에서 오직 애국심과 인류애로 자유와 평화의 길을 열었던 한 병사의 이름이 위대한 역사의 이야기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한미 양국은 정상회담 앞뒤로 한국전 관련 행사를 이어가면서 두 나라가 혈맹을 바탕으로 한 동맹이라는 점을 과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YTN 홍선기입니다.”

 

YTN. “'한국전 혈맹' 강조하며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1. 5. 22.

 

50(민족의식: 미국)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결코

헛된것이 아님을 또한번 상기시켜준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catoy

 

 

그렇습니다 한미는 피로맺어진 나라입니다 세계발전을 위해 한미가 더욱 우방국가간 발전을 기원합니다

허현

 

 

완벽하고 굳건한 한미동맹!

K Cool

 

 

한국전 참전 용사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평화롭게 살면서도 그 은혜를 잊고 있었습니다

 

 

멋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Patrick Jo

 

 

솔찍히 이번 코로나 퍼졌을때 국제사회에 대한 한국의 지원이 6.25 참전 기준으로 이루어진건 진짜 현명한 처사였던듯

뺑끼는내인생 퉷

 

 

미국단독으로 180만 미군, 35,000전사, 3,400실종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Phoebe

 

YTN. “'한국전 혈맹' 강조하며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1. 5. 22.의 덧글

 

 

51(민족의식: 미국)

한미동맹 화이팅

김만두

 

 

미국이 한국에게 정말 엄청난 예우를 갖췄네요..

Lockheed Martin [[ F-22 Raptor ]]

 

 

Thank you to who fought for South Korea. 참전한 이유가 무엇이든 대한민국을 중공과 북한으로부터 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MinKook DaeHan

 

 

멋있어요 너무

...ㅜ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이런 멋진일을 해내주어서..

H H

 

 

자랑스럽다

sts kim

 

YTN. “'한국전 혈맹' 강조하며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1. 5. 22.의 덧글.

 

52(민족의식: 미국)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신 모든 참전용사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웅쨩

 

 

피를 섞은 혈맹에 눈물 난다 감격이 차오른다

ㅇ ㅇ

 

 

단체사진의 미소에 맘이 뭉클합니다

늘바다

 

 

감사합니다 미군용사들이여~~

ppeppo81

 

 

미사일 한도 푼건 진짜 너무너무 잘했다 ㅠㅠ 중국이 덤벼도 이제 해볼만하다. 비대칭 전력만 사용안한다면

ano Dami

 

 

난 솔직히 문재인의 지금까지 행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작에 이렇게좀 하지

홍차맨

 

YTN. “'한국전 혈맹' 강조하며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1. 5. 22.의 덧글.

 

53(민족의식: 중국)

“'제로 코로나' 완화냐? 강화냐?중국 인내력 시험대 올랐다

(서울=연합뉴스) 중국에서 약 6개월 만에 코로나19 사망자가 잇따라 나오고 봉쇄 지역이 늘어나면서 완화 추세이던 '제로 코로나' 정책이 다시 강화돼, 중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21일 현지 매체에 따르면 최근 중국 내에서 코로나19가 빠르게 재확산하는 가운데 수도 베이징에서 1920일 코로나19 환자 3명이 숨졌습니다.

이번 사망자 발생은 장기간 봉쇄가 이어졌던 상하이에서 지난 5261명이 숨진 뒤 6개월 만인데요.

베이징은 전날 신규 감염자가 600명을 넘어서자 일부 지역의 사우나와 PC, 헬스클럽, 영화관 등 실내 밀집 시설을 폐쇄하고 식당 내 식사를 금지했습니다.

인구 1100만명인 허베이성 성도(省都) 스자좡과 후베이성 성도 우한 등 사실상의 봉쇄 지역도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열흘 전인 지난 11일 당국이 해외 입국자에 대한 격리기간 2일 단축 등 새로운 방역지침을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출구 전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는데요.

최근의 코로나19 재확산과 사망자 발생을 고려할 때, 이러한 방역 유연화 분위기가 이어질지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최근 3연임을 공식화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로 코로나를 치적으로 내세운 점도 신중론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강력한 제로 코로나와 부동산 경기침체 등으로 인해 중국 내수의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인데요.

블룸버그통신은 "중국 당국이 이달 초 일부 코로나19 관련 방역 조치를 줄이자 많은 이들이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에서 벗어나는 신호로 받아들인 바 있다"면서 이번 사망자 발생으로 당국의 인내력이 시험대 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영상으로 보시죠.”

 

연합뉴스 Yonhapnews. “'제로 코로나' 완화냐? 강화냐?중국 인내력 시험대 올랐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11.21.

 

54(민족의식: 중국)

중국정부의 제로코로나를 응원합니다!

국민들을 말잘듣는 착한개로 만들어 주세요!

No1즐겨듣기

 

 

진짜 올해는 미세먼지 뉴스한번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공기도 좋고 깨끗했던 하늘을 볼 수 있어 넘 좋았다.

한국.미세먼지의 주범이 중국이라는게 더 명확해지는구나.

제로코로나 계속되고 경제성장도 제로가 되길....

K HS

 

 

부디 더 봉쇄하여 중국 밖으로 나오지 말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family manager

 

 

중국 인구가 14, 1~2억 죽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것입니다. 제로코 정책은 계속되어야 겠죠.

mugum ahn

 

 

살다살다 시진핑을 응원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제로코로나 덕에 경제는 좀 힘들어도 맑은 하늘 맑은공기 마실수 있는 게 참으로 행복하다

이제는 기업들이 이틈을 타 중국의존도를 낮추고 인도 동남아 북미 남미 중동으로 사업지대를 다변화시켜야하고 중국제재에 동참해야한다!

브리샤르디

 

연합뉴스 Yonhapnews. “'제로 코로나' 완화냐? 강화냐?중국 인내력 시험대 올랐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11.21.의 덧글.

 

 

55(민족의식: 중국)

이참에 한국에 있는 중국인 조선족들고 싹 다 끌고다가 중국에 살게 시키고 제로코로나 정책을 더 강화하면 좋겠습니다~

민경희

 

 

중국이 미국의 지위를 위협할까 걱정했는데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워줘서 감사합니다^^

ㅅㅇㅇ

 

 

중국이 조만간 미국 제치고 경제 1국이 될 거라고 해서,

미국 상류층들이 중국어 배우고 할 떈 참 암울했는데,

우리의 시진핑 형님이 도로 70년대로 돌아가줘서 너무도 고맙다.

중국이 이끄는 세계판은 상상만 해도 괴롭다.

mohikenatogenga cetroneight

 

 

중공의 가슴웅장해지는 소식에 행복하네 계속 통제하기를

김동현

 

 

많은 중국인들이 착해지길 빕니다.

Slainator

 

 

끝없는 변이에 대처하는 아름다운 모습

이것이 문화 대파괴를 이룩한 위대한 중화민족의 인내력인가?

더욱 봉쇄와 통제로 끝없이 코로나 속에 살기를 ^^

sunny1247

 

 

중국인들 한명도 못다니도록 철저히 봉쇄시켜라 앞으로 10년동안

됴리당됴리

 

연합뉴스 Yonhapnews. “'제로 코로나' 완화냐? 강화냐?중국 인내력 시험대 올랐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11.21.의 덧글.

 

56(민족의식: 중국)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인점

몇년전 제가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두부공장에서

한달 반 정도를 일해서 그 돈으로 15일간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중국 상하이 평범한 대학생이 두부공장에서 한달 반을 일한후 유럽여행을 간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공장에서 한달 반 일해서 유럽여행경비 모으는것도 불가능수준이고,유럽여행 비자도 안나옵니다

 

중국 상하이가 이 정도면 다른도시는

말할 필요도 없죠

이게 바로 중국이라는 국가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지금 이 순간도 중국의 일반인민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노무이상한변호사현

 

 

해외로 나오는 중국인들이 없으니 너무좋습니다

악뚜앙

 

연합뉴스 Yonhapnews. “'제로 코로나' 완화냐? 강화냐?중국 인내력 시험대 올랐다.” Online video clip. Youtube, 2022.11.21.의 덧글.

 

 

57(베트남파병: 베트남특수)

미국이 베트남전에 막대한 군사비용을 지출하면서 참전국인 한국은 베트남 특수를 얻게 되었다. 베트남 특수의 항목에 대한 명확한 구분은 없지만, 선행 연구들은 한국이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간접 및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朴根好(1993: 19)는 베트남 특수를 베트남에 대한 수출, 한국군에 대한 군납 그리고 무역외수입(용역 및 건설군납, 군인 및 기술자송금, 특별보상지원, 보험금)등으로 정의하고, 1965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이 받은 베트남 특수 총액을 1022백만 달러로 추정하였다(...). 佐野孝治(1992: 213)는 한국이 베트남에 참전한 동기간에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 대한 군납을 포함하여 파월장병 및 기술자 송금액을 추정한 베트남 특수 총액을 약 17억 달러로 추정하였다(...). Baldwin(1975)는 베트남 건설과 용역, 파월기술자 송금, 군납 등 상업적으로 한국정부가 취득한 금액을 537백만 달러로 추정하였다(...). 또한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35백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95백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다.”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501. 2011. 138.

 

58(대한경제원조: 차관)

“1960년 후반부터 차관, 직접투자 및 은행차관들이 집중적으로 도입되었다. <-5>에 따르면 해외자본 도입액은 1965년 약 18천만 달러에서 계속 증가해서 1972년에는 82천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들 자금의 총액은 약 40억 달러에 달했으며 미국으로부터 받은 공공차관 및 상업차관 총액은 116천만 달러로 차관총액의 42%를 차지하였다. 특히 <-5>에 따르면 1965년도 공공차관 도입 실적은 57십만 달러로 그중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차관규모는 23십만 달러였다. 이것이 1966년에는 728십만 달러로 늘어났고 그 중 미국으로부터 534십만 달러의 공공차관을 제공 받았다.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공공차관 규모는 1년 사이 무려 20배 이상 증가하였다.”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501. 2011. 140.

 

59(대한경제원조: 한일국교정상화)

정부는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무상자금 3억 달러와 유상자금(재정차관) 2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제공받기로 하였다. 한편 국내금융기관에 의하여 은행차관이 도입이 시작한 시점은 1968년도 한국외환은행과 한국산업은행이 주도하였다. 동 기간 중에 이들 은행들이 도입한 은행차관은 차관협정규모가 25~5천만 달러의 소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만기도 5~7년의 단기 차관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금리조건은 스프레드가 거의 1.0%를 초과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재무 부한국산업은행, 1993).”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501. 2011. 140.

 

60(베트남파병: 기업해외진출)

“1960년대 후반 기업인의 해외 진출이 붐을 이루었다. 우리 역사상 기업인이 대규모로 해외에 나가 활동을 한 것은 이 시점이 사실상 처음이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 취업한 사람은 56,000명 수준이다(...). 그리고 베트남 특수와 수출확대는 재벌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진상사, 현대건설, 대림산업들이 베트남에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잡았다. 예를 들어, 한진상사는 66년 이후 베트남의 미군 군수 물자 하역 및 수송을 독점하면서 연간 25백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한진 상사는 베트남에서 축적한 자금으로 독점기업인 대한항공(KAL)을 흡수하였다. 또한 1950년대 설립한 현대건설은 베트남 항만공사에 참여하여 큰 부를 축적하면서 한국 건설업계 1위로 도약하였다. 현대건설이 축적한 자본은 1967년 현대자동차 등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대우는 1960년대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에 걸맞은 수출마케팅전략을 전개하여 신흥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대기업 집단에 합류하였다. 한편 삼성, 쌍용, 선경 등도 수출산업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건설업의 해외진출은 이후 괌, 타일랜드, 오키나와 등으로 확대되었고, 1970년대 중동진출하면서 이후 한국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佐野孝治, 1992).”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501. 2011. 142.

 

61(대한경제원조: 대미수출)

한국의 수출은 1965년을 기점으로 급증하였다. 1965년도의 수출증가율은 전년도에 비해 47.0% 증가였으며 특히 대미 수출증가율은 73.5%를 기록하였다. 당시 대미 수출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 파병 요구에 응했던 한국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한 우호적인 수출조건, 즉 보답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지만(정성진, 2000),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튼 전쟁이 종결된 1973년까지 대미 수출의 증가 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 대미 수출은 1964년 약 36백만 달러에서 197276천만 달러로 21배 증가했다. 일본과는 달리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급격한 대미수출 증가는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의 수출은 1965175백만 달러에서 19721624백만 달러로 동기간 연평균 37.5% 증가하였다.”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501. 2011. 142.

 

62(노사관계: 무노조 전략)

삼성은 국내에서 수직적 하청구조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무노조 방침을 하청업체까지 관철시켜 저임금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공장에서도 일관된다. 삼성의 이러한 전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국내와 해외에서 물량과 공장 이전 위협을 통해 노동자들을 바닥으로 향한 경쟁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전략은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연대구축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국내의 삼성 및 주요 하청업체 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이 주요 과제인 상황이지만 조직화 초기 단계에서부터 국내외 노동자들 간의 정보 교류와 지지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단결의 초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1.

 

63(해외직접투자: 아시아)

아시아 지역의 삼성 공장은 최종제품을 제조하여 거의 대부분 수출한다. 제품 제조에 들어가는 부품 다수는 수입하거나 한국에서 현지로 동반 진출한 부품업체로부터 조달한다. 최종제품 제조 과정 전반이 조립과 같은 노동집약적 공정이다. 때문에 노동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수익성의 관건이라 임금이 낮은 아시아지역에 삼성생산 거점이 대거 분포한다.

인도네시아는 LCD TV, DVD, 홈시어터 TV등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며 생산물의 70%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전자부품은 인도네시아에 동반진출한 부품업체로부터 조달하며 인도네시아 삼성공장은 조립을 포함한 최종공정을 맡는다. 인도는 가전을 생산하는 공장과 휴대폰을 생산하는 공장 등이 있다. 부품의 거의 대부분은 수입한다. 말레이시아는 모니터와 텔레비전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데, 핵심부품인 LCM 패널은 중국에서 반조립한 것을 수입하여 말레시아에서 조립해 텔레비전 제조에 쓰거나, 완조립 한 LCM패널을 태국, 베트남, 인도의 삼성 공장으로 수출하기도 한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3.

 

64(해외직접투자: 비정규직)

아시아 지역의 삼성공장 대다수에서는 계약형태에 따라 임금과 복지에 차별을 두면서 노동비용을 절감하려는 시도가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견습생과 같은 고용계약 제도를 위계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계약직과 파견직은 이주노동자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견습생 제도는 직업훈련을 명분삼아 노동자를 저 임금으로 쓰는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삼성공장의 2800여명 노동자 가운데 70%가까이가 자바와 수마트라 섬 출신의 이주노동자다. 이 중에서 800명은 아웃소싱 노동자고, 800명은 계약직 노동자다. 아웃소싱/계약직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교해 임금과 식사 수당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또한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종종 초과근무를 하더라도 한 달에 30달러를 받는 견습생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 직원이 운영하는 직업학교에 지원한 학생들로서 17~19세이며 견습생으로 투입된다. 견습생 제도는 삼성에 안정적으로 숙련된 아웃소싱 노동자와 파견직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3.

 

 

65(해외직접투자: 생산력)

인도네시아 삼성 공장은 생산목표 시스템을 도입하여 매년 목표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생산단위당 각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평가할 수 있는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매년 성취를 평가하고 있다. 2011년 블루레이 생산을 위해 로봇과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생산조가 포장을 포함해서 각 8시간 동안 4,000개를 생산해야 했다. 이것은 한 세트를 완성하는데 7.5초 이상이 소요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 삼성공장의 조립공정은 고도로 자동화 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기계의 속도에 맞춰 빠르고 지속적으로 일할 것을 요구받는다. 조립라인에서 제품당 소요시간 고정을 통해 생산목표량 달성하는 방식이다. 노동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휴대폰 조립 라인에서 3.5초에서 4초 동안 한 단위를 제작해야 하는 수준이다. 화장실을 갈 틈도 물 마실 시간도 없어서 노동자들이 요령을 만들어야 할 정도다. 이 같은 고강도 노동은 노동자들을 탈진시키고 두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4.

 

66(해외직접투자: 초과근로)

베트남 2010년 노동자 인터뷰에 따르면 초과근로는 상시적이다. 어떤 달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돈을 모으고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초과근로를 선택한다고 한다. 두 시간 초과근로는 평균적이고, 피크 타임에는 4~5시간 초과근로를 했으며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피크 타임에는 초과근로를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한다.

기본급이 175달러로 베트남 법정최저임금을 넘지만, 최근 높은 물가상승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임금은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수입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은 초과근로를 하고 있으며 12시간에서 15시간 초과근로를 했을 경우 250~350[한화 약 400,000] 달러의 임금을 받게 된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5.

 

67(해외직접투자: 하청)

한편 삼성은 국내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의 하청업체를 관리하고 있다. 복수의 업체로부터 동일한 부품을 납품 받으면서 납품 단가 인하 경쟁을 시키고, 한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이 하청업체에 단가 인하를 요구할 때, 하청업체는 임금 삭감과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면서 생산단가를 줄이게 된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17개의 삼성 하청업체에서 아웃소싱 또는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 고용 및 최저임금도 위반하는 등의 노동권 침해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이 없는 삼성의 다른 하청업체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6.

 

 

68(해외직접투자: 노동조합)

삼성이 노동비용 절감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낮은 기본급으로 인해 장시간 초과근로를 해야 하고, 일이 없으면 적은 임금을 받아야 하며, 고강도 노동을 요구하는 생산목표치를 군말 없이 달성해야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성은 아시아 삼성공장과 하청업체들에 무노조 방침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으며, 노동조합 설립을 탄압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삼성하청업체 중 17개 사에서 노동조합이 성공적으로 건설하였고, 2012년에는 삼성공장에서 일하는 아웃소싱 노동자와 계약직 노동자 200여명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국에서도 삼성공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사례가 있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6.

 

69(해외직접투자: 노동조합)

인도네시아의 삼성공장과 삼성 하청업체들은 베카시의 시카랑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지역의 노동조합의 광범위한 투쟁으로 삼성과 하청업체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121021, 삼성전자의 아웃소싱된 노동자와 계약직으로 이루어진 약 200명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은 한 달 뒤 정식으로 등록되었고 인도네시아 금속 노동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탄압으로 인해 모든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곧 탈퇴하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 같은 삼성의 노조파괴에 맞서 20121119, 인도네시아금속노동자조합연합(FSPMI)은 삼성공장을 점령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당일 공단지역에는 기업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그 지역의 수백 명의 폭력배들이 무기를 들고 배치되었다. 또한 경찰들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트럭과 살수차, 최루가스 발사기와 총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전부터 삼성공장 주변을 보호하던 경찰은 삼성공장에서부터 노동자들을 해산시켰다. 당일 오후 늦게, 노동자들이 폭력배 무리 중 하나를 쫓아내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았고 폭력배들이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도 해산했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7.

 

70(해외직접투자: 산업재해)

삼성의 국내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백혈병과 같은 직업병을 얻어 사망한 사례가 발생하였고 산업재해로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작년에는 삼성공장에서 불산 가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시아 삼성 공장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작업하면서 유해물질에 노출되거나,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도네시아 최소한 하루에 8시간 일하는 PCB 플라크 세척 구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액체 알코올과 접촉한다. 그러나 고무장갑과 천 마스크 하나만 갖추어져 있다. 그들에게 액체 알코올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장비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 구역의 많은 노동자들은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호소하고 있으며, 눈이 따가운 증상을 가지고 있다. 2010년과 2012년의 기간 동안 이 구역에서 3명의 노동자들이 폐렴으로 사망했다. 지금까지 100퍼센트 알코올에 대한 노출 때문에 폐질환의 원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세 명의 노동자들은 평균 10년 동안 PCB 플라크 세척 구역에서 일해 온 파견 노동자들이었다.”

 

이유미. “삼성의 아시아 생산 공장 실태와 특성.”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3), 2014. 8.

 

71.(박정희: 반공주의)

박정희는 자신의 권위주의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과 국가안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강조했다. 특히 국가안보를 집중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 북한이고,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적지 않게 무력도발을 감행했기 때문에, 국가안보는 대내외적으로 북한을 주 대상으로 한 반공·반북주의로 응축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세력은 1961516 군사쿠데타를 결행한 직후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속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이를 정당화한 바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공약의 제1조에서 무엇보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선언했다(김삼웅 1997, 256). 나아가 19617월 박정희는 자신이 최초로 행한 공식적인 연설인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사>’에서도 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하겠다고 밝혔다(1961/07/03, 1: 4).”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88.

 

72(박정희: 국가안보)

유신체제 선포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할 때에도 박정희는 안보위기의 관점에서 이를 정당화했다. 그는 중국이 유엔의 안보이사국이 된 사실, 미국의 주한미군 추가 감군 논의, 북한의 전시동원체제 등 대내외적인 안보상황을 지적하면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 보장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고,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 이것을 수호하기 위[] 필요할 때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하고, 이에 대처해 나아가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1971/12/06, 4: 90). 물론 안보위기론은 이러한 세력균형의 변화 자체보다는 그것이 북한의 무력도발 의지를 부추긴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88.

 

73(박정희: 반공주의)

북한의 위협이 상존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보수주의가 반공과 국가안보를 강조한 것은 나름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확보했다. 그러나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가 공산주의가 신봉하는진보”, “인간본성과 사회의 궁극적인 완성 가능성및 국가개입에 의한 경제적 계획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철학과 정책 지향의 측면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했고, 또 국가안보를 중시한다고 해도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체제경쟁과 국방력 강화를 지지하는 등 대외지향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던 데 반해(...), 한국의 보수주의는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론 국내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기 위해서도 반공과 국가안보를 수시로 동원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89.

 

74(박정희: 국가안보)

모든 보수주의가 그런 것처럼 박정희의 보수주의 역시 법과 질서의 유지를 통한 국내 질서의 안정을 강조했다. 그리고 서구의 경우 이는 범죄예방과 치안유지의 필요성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시민적 질서의 유지를 주목적으로 하는민생치안의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우에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 정권에 대한 반대를 탄압하기 위한 시국치안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유지라는 일상적 치안의 문제 역시 빈번히 국가안보와 같은 차원에서 다뤄졌다.

이러한 지적은 박정희가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연두기자회견을 한 후 다른 어떤 행사보다 먼저 전국 치안 및 예비군관계관 중앙회의를 챙겼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유시>에서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국가안보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학생 데모 등으로 정치 불안이 조성되면 북한이 도발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국가안보가 단순히 국방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유지(국내의 정치적 안정)와도 직결됨을 각별히 강조했다. 이 점에서 이 회의는 연초에 국가안보는 물론 시국치안을 강조하고 점검하는 연례행사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유신이 절정에 이른 1976121일 행한 중앙회의 <유시>에서는 모든 불안과 혼란은 물론 심지어 퇴폐적인 풍조마저 국가안보적인 차원에서 다룰 것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89-190.

 

 

75(박정희: 군사주의)

반공으로 무장한 국가안보사상은 군인의 집권으로 파급된 군사문화의 일상화로 인해 권위주의와 강고하게 결합되었다. 19681월 청와대 부근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한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1969년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가관을 확립하고 안보 의식을 높이기 위해 군사교육에 해당하는 교련수업을 실시하였으며, 1975년에는 각급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생과 교직원으로 구성된 학도호국단을 발족시켰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정계와 경제계 중앙정보부와 공화당 조직 및 정부 내각에 침투한 군사문화, 전시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추진된 경제개발계획 및 수출증대 등 를 중심으로 시작된 군사문화가 점차 일반사회와 학교로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의 병영사회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총화체제로 규정된 유신체제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신년사>, 1974/01/01, 5: 193-195). 박정희는 군대와 경찰, 향토예비군과 학도호국단, 민방위대 등 민이 혼연일체가 [] 유비무환의 정신자세를 당부하고 이를 총력안보의 생활화로 규정함으로써, 전시를 방불케 하는 안보의 일상화를 정착시켰다(전국 치안 및 예비군관계관 중앙회의 <유시>, 1976/01/21, 6: 35).”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89-191.

 

76(박정희: 발전주의)

사실 경제발전이야말로 다른 어느 것보다 박정희 체제를 지탱한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집권기에 연일 신문의 1면 또는 경제면을 장식하던 수출 신장 및 경제성장을 위주로 한 눈부신 경제실적 보도는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 기사 못지않게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연두교서, 연두기자회견, 일반적인 기자회견, 예산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 수출의 날과 각종 기공식·준공식 등에 행한 연설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의 성적을 부모 앞에서 자랑하는 초등학생마냥 항상 구체적인 수치와 업적을 장황하게 나열하여 경제발전의 성과를 과시하는 한편 앞으로 달성할 경제발전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지지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발전주의야말로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창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이념적 자원이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92-193.

 

77(박정희: 발전주의)

경제발전의 목적은 <5 16 혁명공약>에서 밝힌 것처럼 무엇보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또한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이라는 측면에서 반공·승공 통일과 맞닿아 있었다(김삼웅 1997, 256). 박정희에게 경제발전은 사실상 최우선 과제였으며, 군정기인 196211국민에게 보내는 <연두사>’에서도 당면한 우리의 지상목표는 경제재건을 위한 산업개발이라고 강조했다(1: 157). 그리고 같은 해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 <치사>’에서는“516 혁명의 진의는 …… 오로지 이 겨레로부터 빈곤을 구축하고, 자손만대를 위한 영원한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할 경제재건을 성취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궐기했던 것이라고 하면서 쿠데타를 정당화했다(1962/02/03, 1: 177-178). 빈곤에 시달리던 당시 한국 민중에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매진하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제일주의는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고, 군사쿠데타에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온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93.

 

78(보수주의: 근대화)

“19세기 초 유럽의 보수주의는 산업혁명과 자유주의적 프랑스 혁명, 근대화에 반대하는 것을 1차적 사명으로 삼으면서 봉건적 농업사회 및 귀족적 질서를 옹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1848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대두 및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보수주의는 종래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수정 자본주의적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면서 개인적 자유와 제한적 정부를 옹호하는 것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결국 근대화의 결과를 일정 부분 수용하여 고전적 자유주의에 수렴하는 현대 보수주의로 변모하게 되었다(...). 반면 해방 후 집권한 남한의 보수세력은 세계사적 시간대가 일국사적 시간대를 압도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의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수행하기 위한 산업화를 추진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자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이 점에서 근대화와 관련하여 한말 위정척사파가 19세기 초 서구 보수주의와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면, 해방 후 남한의 보수세력은 제한적이나마 서구의 현대 보수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94.

 

79(보수주의: 권위주의)

신생국가의 보수세력이 근대화를 위로부터 추진하면서 채택한 근대화 보수주의서구 따라잡기의 일환으로서 민족의 절대적인 생존전략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화 보수주의는 서구 근대사상사의 맥락에서는 형용모순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비서구 신생독립국가에게는 역사적 당위이자 (우파) 민족주의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현대 보수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광범위한 경제 개입에 반대한 것과 달리 한국의 근대화 보수주의는 국가주도에 의한 위로부터의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국가의 광범위한 시장 개입을 당연시하면서 경제활동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적인 제약을 주도하고 용인했다. 반공과 국가안보에 바탕을 둔 권위주의적 통치가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억압했다면,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은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중소기업이나 자영업 등 일반 서 민의 경제적 자유를 일정 부분 제약했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94-195.

 

80.(박정희: 냉전자유주의)

“19세기 후반 근대 서구문명의 본격적인 동북아시아 공략과 함께 외생적으로 비서구판 근대화의 계기를 맞이하면서, 한국은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위해 서구적 근대화의 과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인한 유교적 전통은 물론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과 식민지의 경험 및 일제가 부과한 파시즘과 국가주의적 교육, 해방 후 겪은 민족분단과 동족 간의 참혹한 625전쟁 등 민족과 국가가 당면했던 존망의 경험과 위기는 국가나 사회 또는 민족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온전한 수용을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치가로서 박정희 역시 이 모든 경험으로 인해 자유주의 이념을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민족과 국가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는 사고를 체화해야 했던 군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은 개인적으로도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추가적인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 헌법에 명기된 민주주의는 물론 서구의 개인적 자유주의 역시 박정희와는 거리가 먼 사상이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에 대한 박정희 사상의 주된 특징은 공산주의를 주된 적으로 설정하는 냉전자유주의, 개인의 자유 보다 민족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민족적 자유주의,’ 그리고 개인의 인권에 대한 폄훼로 요약된다.”

 

강정인, 하상복.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현대정치연구. 512012. 198-199.

 

81.(베트남전쟁: 동아시아정책)

미국은 1950년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동아시아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소련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을 승인하려 했지만,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패전국 일본과의 동맹을 추진하며 소련에 이어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01월 중국과 소련이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이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미국은 이에 맞서 프랑스의 괴뢰정부인 남베트남 다이(Bao Dai) 정부를 승인했다. 그리고 수송기와 탱크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의 프랑스 군부에 지원하기 시작하며, 1952년 프랑스가 북베트남 또는 베트남 독립동맹(Viet-Minh)과 종전 협상을 벌이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트루먼(Harry Truman)정부는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반드시 막고 싶었던 것이다. 나아가 1954년까지 약 14억 달러를 프랑스에 지원하면서 거의 80%에 이르는 전쟁 비용을 부담했지만,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인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이기지 못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3.

 

82.(베트남전쟁: 제네바협정)

“19545, 1946년부터 시작된 제1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불(抗佛)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 또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났다. 이에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정부는 미국이 직접 베트남과 전쟁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핵무기 사용까지 검토하면서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를 북베트남 통킹만(Gulf of Tonkin)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병력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며 프랑스가 반대하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19547월 제1차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사국들과 4대 강국 가운데 미국은 반대했다. 나아가 남베트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추구해온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만약 선거가 실시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80% 안팎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되리라 예상했다. 이에 미국은 195510월 남베트남에 디엠(Ngo Dinh Diem)을 앞세워 반공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1957년엔 특수부대까지 보냈다. 제네바협정에 따른 베트남 총선거가 끝내 실시되지 못했던 배경이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주변 국가들도 공산화하리라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반대한 것이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4.

 

83.(베트남전쟁: 통킹만 사건)

“1961년 남베트남에서 흔히 베트콩(Viet-Cong)'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조직인 인민해방군이 결성되고, 사회 혼란 속에 디엠 정권의 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자 케네디(John Kennedy) 정부는 196311월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디엠이 항복했지만 그와 동생이 살해당한 뒤 공교롭게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민(Duong Van Minh) 정권이 베트콩 세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추구하자 존슨 정부는 19641월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Nguyen Khanh)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사회 혼란과 베트콩 세력의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존슨은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을 유지하면서 군사 개입을 확대해나갔다. 19647월부터는 북베트남 통킹만에 함정을 보내 정찰활동을 펼쳤다. 이에 19648월 북베트남이 미국 함정을 공격하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7년이 지난 19716월 미국의 유력 일간지가 국방부 비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밝혀졌지만, 미국은 이를 빌미로 19653월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였다. 2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미(抗美)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4.

 

84.(베트남전쟁: 서한)

“(...)19616월 정일권 주미대사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청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 운명체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양국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한국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19617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특히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 세계에 걸친 방위에 대한 당신의 언급을 환영합니다. 우리 역시 평화를 원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전쟁이 강요된다면 한국은 싸움에 참여할 미국의 첫 번째 동맹국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5.


85.(베트남전쟁: 회담)

“(...)196111월 박정희가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와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3개월 전 매카노기(Walter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에 그의 비공식 실무방문(informal working visit)을 제안해 이루어진 회담이었다.

한국은 굳건한 반공국가로서 극동의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부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잘 훈련된 백만 병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규부대에서 훈련받았는데 지금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하면 한국은 베트남에 자체 병력을 보낼 수도 있고, 정규부대를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병을 모집해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세계 국가들 사이에 행동 통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나는 출국 직전 이 문제에 관해 고위 장교들과 협의했는데 모두 열광적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군사자문관들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보도록 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5.

 

86.(베트남전쟁: 서한)

“(...)19623월 송요찬 국무총리가 해리만(Averell Berger) 주한미국대사에게 한국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3-4천 명의 병력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정일권 외무부장관 역시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원한다면서 한국의 해외파병을 막는 장애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에 버거 대사는 그러한 조치의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데,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 일본과의 협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와 함께 남한은 남베트남과의 접촉도 늘려갔다. 19643월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가 사이공을 방문했고, 4월엔 남베트남 군사사절단이 남한을 방문해 군사훈련 및 군사정권의 민정이양을 시찰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5.

 

87.(베트남파병: 정권 승인)

“(...)남한은 미국이 1965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인 19615.16쿠데타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그 배경이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한과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정책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잡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신임이나 지지를 받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한이 1980년대 말부터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는 위정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지지를 얻는게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40년대 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박정희가 19615.16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운 것은 미국에 보내는 신호였을 것이다. 냉전 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반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중앙 정보국(CIA)과 주한미군사령부는 늦어도 19604월 중순부터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쿠데타 세력 가운데 반미나 친공 감정의 증거는 없다. 실제 지도자 박정희는 과거에 공산주의에 물들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형을 받았던 강력한 장교다. 그에 따라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고, 반공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쿠데타 동료들 중에서도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터였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6-97.

 

88.(베트남파병: 반공주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밖으로 미국의 신임을 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면, 안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성장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111월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기에 앞서 러스크(Dean Rusk) 국무부장관을 만나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비추어보아 한국은 60만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60만 병력의 가장 확고한 반공국가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될수록 많은 경제원조를 얻는 게 필요하다.”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을 앞세우는 한편, 경제성장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7.

 

89.(베트남파병: 한일 국교 정상화)

한편, 케네디는 베트남에 군사침략을 감행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1961년엔 4월 쿠바의 카스트로(Fidel Castro)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바 남부의 피그스만(Bay of Pigs)을 침공했다가 1,000aud 이상이 죽거나 생포 당한 참담한 패배를 겪은 터였다. 또한 그 무렵 미국이 남한에 가장 원했던 것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재정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비와 대외원조를 감축해야 했다. 국방비를 줄이려면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 및 대외 군사원조를 축소해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던 나라 가운데 하나인 남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줄이려면 남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일본이 미국 대신 남한에 경제원조를 할 수 있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군비감축 뿐만 아니라 한일수교도 반대했기 때문에 4월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일본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환심을 사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앞세우면서 베트남 파병을 적극 제안했고, 베트남에 대한 군사침략을 준비하지 않고 있던 케네디 정부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한일수교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부정적으로 검토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7.

 

90.(베트남파병: 경과)

“1963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정부가 베트남정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한 가운데(...) 미국은 19643월부터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해, 4월 베트남에 될수록 많은 국기를 꼽는 운동(More Flag Campaign)'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존슨 정부는 19645월 남한을 포함한 25개 우방국들에게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을 패배시키기 위해 병력이나 물자 또는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남한 정부엔 야전병원 1개 부대를 요청함으로써 19646월 남한이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나아가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왜 베트남에 아직 군사침략을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전투부대를 보내고 싶어 했지만,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아직 요청하지 않은 데다 게릴라전쟁의 특성상 특히 제 3국으로부터의 지상군 운용이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19647월부터는 미국이 북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활동을 펼치면서 8월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는 19649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인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8.

 

91.(베트남파병: 정권승인)

“1964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 하워즈(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과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군 2개 사단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주었다. 미국이 박정희와 공화당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인상을 피하겠다는 뜻이었다. 며칠 사이에 민간인 1,344명과 학생 523명이 체포되고, 학생 191명이 수배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대로 김종필을 미국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1964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미국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반미주의자들에 의한 쿠데타나 봉기가 일어나면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8-99.

 

92.(베트남파병: 경과)

“1964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남한의 파병을 요청했다. 물론 남한이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원하던 터였다. 196412(Winthrop Brown)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뜻이라며 공병이나 건설부대 또는 수송이나 의료부대 등을 베트남에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박정희는 필요하다면 2개 전투사단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미국은 아직 전투부대를 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1,000명을 요청했어도 남한은 2,000명 규모의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을 편성해 19652-3월 베트남에 보냈다. 1월의 국회 동의과정에서 야당은 반대했는데, 국방부장관이 파병안을 남한 정부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 하기도 하고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며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남한은 파월 장병들의 수당을 남한 정부를 통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은 수당을 미국 정부가 지급한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용병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8-99.

 

 

93.(베트남파병: 대북인식)

남한의 제2차 파병이 이루어지던 19653월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남한의 전투부대 파병도 검토하기 시작했다. 1개 사단이 파병되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북한이 남한에서의 항의시위를 부추기거나 비무장지대에서 군사적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북한 지상군이 북베트남에 파병되지는 않더라도 기술관들이나 고사포요원들이 파병될 수는 있으리라 예상했다.”

 

이재봉.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한국동북아논총762015. 99.

 

94.(대북제재: 테러지원국 지정)

미국정부에 의한 테러지원국(state sponsors of terrorism) 지정과 경제제재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방법으로 테러를 사용하는 국가를 고립시키기 위한 제도(mechanism)이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정책은 테러지원국을 압박하고 고립함으로써 그들이 테러리즘을 포기하고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원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며 테러리스트들을 법정에 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테러행위가 언제 발생했는지와 관계없이 테러행위자들과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자들을 체포하도록 허용되었다. 미국은 시간의 경과만을 이유로 테러리스트의 명단을 목록에서 삭제하지 않으며 테러리스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국가들은 범죄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공범과 같은 평가를 받게 된다. 미국은 테러지원국들이 자신의 테러와의 관련성을 종료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경우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북한 및 수단을 테러지원국의 명단에서 제외하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다.”

 

최철영. “미국의 대외경제제재관련법제 연구.” 한국법제연구원, 2001. 82-83.

 

95.(테러지원국 지정: 팔레스타인해방전선)

미국의 국무장관에 의해 테러지원국가로 지정된 국가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쿠바, 시리아, 수단 그리고 북한 등이다. (...)미국은 이들 국가에 대하여 수출관리법 등을 통한 경제제재 외에도 개별 입법에 의한 제재를 행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경우 국제법상 국가(state)가 아니기 때문에 테러지원국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O)의 지원에 의한 테러 행위를 제재하기 위하여 PLO반테러법을 제정하여 미국 내에서 PLO 및 관련단체로부터 미국 내에 신문, 잡지 등을 제외한 재산적 가치가 있는 것의 수령금지, 자금수령금지, 미국 내 PLO관련 사무실 및 본부 등 설치 금지 등을 규정하고 있다.”

 

최철영. “미국의 대외경제제재관련법제 연구.” 한국법제연구원, 2001. 84.

 

96.(대북제재)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628일 수출통제법에 의거하여 북한에 대해 금수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195077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에 입각하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을 파병하였다. 미국은 또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에 대응하여 국가비상사태시 적용되는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에 의거 19501217일 해외자산통제규정(Foreign Assets Control Regulations)을 발효시킴으로서 대북한 경제관계를 전면적으로 단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해외자산통제규정에 의해 미국내 북한자산을 동결시키는 한편 대북교역 및 금융거래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였다. 그 후에도 미국은 무역협정연장법, 국제무기거래규정, 대외원조법, 통상법, 수출관리법, 수출입은행법 등에 의거하여 미국기업은 물론 다른 서방국가의 기업들이 북한과 거래할 수 있는 품목을 더욱 제한하였다.”

 

최철영. “미국의 대외경제제재관련법제 연구.” 한국법제연구원, 2001. 84-85.

 

97.(베트남전쟁: 미국의 민족의식)

베트남의 아픈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기억은 향후 미국이 관여한 대부분의 전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걸프 전쟁에서 그랬고, 보스니아 전쟁이나 소말리아 전쟁에서도 그랬으며, 9/11 사건이후의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한 포드 대통령이 바라던 악몽의 종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미국인에게 불편한 기억으로 출몰했다.

전쟁은 한 나라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이며,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 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세계사를 주도하는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냉전체제 속에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자유 민주주의 세계를 수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자임했고 이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이러한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찬반을 놓고 갈라졌고 서로 반목했다. 전쟁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이든 전쟁은 당대 미국인들 모두에게 하나의 공분모(common denominator)"였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13-214.

 

98.(베트남전쟁: 미국의 민족의식)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실패한 전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대다수 미국인들은 베트남의 실패라는 개념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을 양분했던 매파(hawks)'비둘기파(doves)'의 대결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매파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는데, 국내의 반전운동으로 뒤통수(stab-in-the-back)'를 맞아 이기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무기력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둘기파는 반대로 베트남 실패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에 대한 책임은 베트남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군사적 관점에서만 베트남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던 매파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16-217.

 

99.(베트남전쟁: 레이건)

“1980년 대통령 선거 때 처음으로 정치권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한 정당성이 재기되기 시작했다. 공화당 후보 레이건(Ronald Reagan)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정당한 전쟁에 참전하여 자신을 희생했으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진실로 숭고한 목적이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라고 선언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레이건은 계속해서 베트남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미국은 결코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베트남의 경험을 교훈삼아 미국의 우방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이는 그 동안 부정적이며 패배주의적인 베트남의 기억을 긍정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기억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른바 수정주의 사고의 도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베트남 전쟁을 2차 대전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집단 기억에서 좋은 전쟁으로 분류되게만들었던 것이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19.

 

100.(베트남전쟁: 보수주의)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1980년대는 보수주의가 활개 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베트남에 대한 기억에도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사고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수정주의 사고에 따르면 미국의 참전은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으려는 숭고한 목적에서 이뤄졌으며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지만 미국 내 분위기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전쟁 수행이 어려워서 이기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주로 베트남 주둔 미군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와 같은 고위 군사지휘관들이나 닉슨(Richard M. Nixon) 전 대통령이나 키신저(Henry Kissinger)와 같은 정치지도자들이 주도했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20.

 

101.(베트남전쟁: 닉슨)

“(...)미국인 저변에 깔려있는 베트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계속되었다. 국민들은 전쟁 개입에서부터 전쟁이 마무리되기까지 미국 지도자들이 국민들을 기만하면서 비밀스런 전쟁을 했다고 생각했다. 의회에서는 19738월부터 닉슨 행정부의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말 닉슨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하고 전쟁권한법(War Powers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해서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분쟁 지역에 미군을 파병할 수 없게 되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했고, 더 이상 그러한 실패가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24.

 

102.(베트남전쟁: 수정주의)

“(...)레이건의 등장은 베트남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의 등장을 의미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의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미국은 베트남 신드롬때문에 더 이상 우방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했다면 그것은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없게 뒤통수를 쳤던 국내의 반전 세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남 신드롬때문에 미국의 국익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신드롬의 배경에는 베트남 전쟁에 따른 일종의 죄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레이건은 더 이상의 베트남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미국 정부가 이기기를 두려워하는 그러한 전쟁에 다시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는 다른 말로하면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을 때 개입한다는 얘기며, 또한 일단 전쟁에 개입한다면 기필코 승리를 이끌 것이라는 새 정부의 약속이었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25-226.

 

103.(베트남전쟁: 부시)

“(...)베트남의 기억은 부시의 걸프 전쟁에 크게 작용했다. 1991227, 지상전이 시작한 이래 정확히 100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쿠웨이트 해방이라는 전쟁의 목표가 달성되자 부시는 종전을 선포했고, 미군을 즉각 철군시켰다. 걸프전 동안 부시 대통령은 의회의 협조를 구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다각도의 외교를 펼쳤다. 그 어디에도 베트남 전쟁과 등치되는 이미지였던 황제적 대통령의 모습은 없었다. 부시의 참모들 역시 걸프전은 국민의 지지와 국제사회의 협조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합참의장 파웰(Collin L. Powell)전쟁은 정책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국민들이 이해하고 지지해야 하는 목표가 분명해야하며 일단 이러한 국내의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미국은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하며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개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트남의 뼈아픈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후, 베트남 전쟁 이후 20년 만에 드디어 우리는 단번에 베트남 신드롬을 없애버렸다고 기뻐하는 부시의 모습에서 걾프전 내내 부시 행정부는 얼마나 베트남의 기억에 억눌려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김봉중.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미국 외교.” 미국사연구34, 2011. 228-229.

 

104.(아류제국주의: 글로벌기업)

세계시장과 국제적 생산, 그리고 글로벌금융 부분에서 브라질·한국·인도·호주·터키·남아공은 더 이상 종속적이거나 심지어 반주변부라고 할 수도 없는 지위를 확보했다. 이 지역은 데이비드 하비의 지리-역사학적 유물론에 영향 받은 마이클 스토퍼(Michael Storper)와 리처드 워커 같은 이들이 말하는 이른바 지리적 생산 복합체’(Territorial Production Complexes)의 거점들이 되었다.

냉전 시기 강대국의 원조와 시장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룬 일부 국가들이 단지 글로벌판매법인과 글로벌생산법인을 가지는 글로벌기업들을 육성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 남한·브라질·호주·인도는 500대 글로벌 기업 순위에 오른 글로벌 대기업들을 소유하고 있다.

선진국을 제외한 국가의 다국적 기업 분포 현황을 보면, 남한이 10개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고 매출액 총계에서는 10, 브라질은 7개로 매출액 총액은 12, 호주는 8개로 매출액 15, 인도는 10개로 16, 대만은 8개로 17, 호주는 3개로 26, 터어키는 한 개로 31, 사우디아라비아가 1개로 33위이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16.

 

105.(아류제국주의: 요한 갈퉁)

제국주의적인 열망을 갖는 반주변부 국가들을 아류제국주의로 규정한 연구들은 1970년대부터 발표됐다. 평화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요한 갈퉁(Johan Galtung)도 반주변부 일부 국가들을 아류제국주의(Sub-Imperialism)로 규정했다. 그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아프리카의 남아공과 나이지리아,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을 대표적인 아류제국주의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는 칠레 좌파 정권이 19739월 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브라질이 지지함으로써 남미 내에서의 아류제국주의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남아공은 남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 강대국에 해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줌으로써, 이란은 중동 내에서 중요한 군사적 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 내에서 패권적 지위를 얻으려 한다고 분석한다. 요한 갈퉁은 독일도 이탈리아가 공산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탈리아를 긴급구제함으로써 유럽 내에서 지역 패권을 추구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4-5.

 

106.(아류제국주의: 마리니)

아류제국주의라는 개념은 1964년 브라질 군사 쿠데타 이후에 남은 생애를 망명으로 마감한 브라질 좌파 경제학자 마리니(Marini)에 의해 분명하게 체계화됐다. 그는 브라질 군부 독재가 국내 자본이 해외 자본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주변 국가들에 진출하고 개입해서 이윤을 수취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아류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에게 아류제국주의는 종속 경제가 독점과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취하는 하나의 형태다. 아류제국주의는 두 개의 기초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는 세계경제 내에서 중간 규모의 경제력을 가진 국민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생산체계에 통합되는 해당 국가가 펴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팽창 정책이다.

마리니는 아류제국주의의 반열에 오르려 했던 당시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오로지 브라질만이 아류제국주의로 규정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마리니는 브라질 아류제국주의는 1964년에 권력을 잡은 테크노크라트와 군부가 당시 세계경제 및 세계정치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당시에 브라질 경제는 세계자본주의의 경제적 팽창 덕분에 최고의 금융호황을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브라질 자본주의는 국제금융자본을 유인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다. 브라질이 생산적 자본을 통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자본 운동에 경제를 통합시켜야 했던 브라질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은 제국주의에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철·석유·천연가스 수출량을 대폭 늘리면서 수출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5-6.

 

107.(아류제국주의: 마리니)

마리니는 자본보다 우위에 선 브라질 국가가 강력하게 추진한 수출확대 정책을 아류제국주의 출현의 뿌리로 규정했다.

마리니는 1960년대 중반부터 브라질에 서방의 금융자본이 범람하고 대거 유출되면서 브라질 경제 나름의 경제 팽창이 있었고 브라질 군부와 테크노크라트가 이 과정에서 주변 나라들에 패권을 행사하는 국가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지만 그 과정은 제국주의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과정이었다고도 분석한다.

세계경제에 통합되면서 국내 자본이 해외로 팽창하고 그것이 아류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는 마리니의 설명은 한국자본주의의 아류제국주의적 성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분석의 틀을 제공한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6.

 

108.(아류제국주의: 알렉스 캘리니코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초강대국들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누려 온 것과 같은 종류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지역적 차원에서 갈구하는 제3세계 강국들의 등장”(...)을 아류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이런 국가들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중동을 들고 있다. “중동은 1945년 이래 가장 불안정한 지역으로서 불행히도 이러한 역할을 놓고 다투는 나라-이스라엘, 이란,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터키-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캘리니코스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아류제국주의 국가로는 인도, 베트남, 남아공, 나이지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가장 중요한 실례들이다.

캘리니코스는 아류제국주의 현상에는 3세계의 부분적 공업화와 그로 인한 제국주의 중심부 이외의 지역에서 새로운 자본축적 중심의 출현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아류제국주의 역할이라는 야망을 품을 수 있는 자율적 자본가 계급이 제3세계에서 출현하는 데에는 첫 번째로 유럽 식민 제국들의 해체가 주요한 계기였다고 말한다. “개발 식민 제국들이 식민지 반식민지 경제에 배타적인 통제를 행했던 것이 이제 여러 서방 국가의 다국적 기업들이 같은 나라에 투자하면서 그 현지 국가에게 다국적 기업들 사이에서 기동을 펼 여지와 토착 자본의 확장을 도모할 세금 수입을 가져다주는 보다 유동적인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7-8.

 

109.(국제외교: 탄약거래)

대한민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보내지 않기로 한 정책은 변하지 않으며, 탄약은 미국의 사용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살상무기 지원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으며 탄약의 최종 사용자가 미군이 될 것으로 예상됨에도 불구, 한 미국 관료는 미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한국이 만든 포탄 10만 개를 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이 거래에 긴밀히 연루된 미국 관리들을 인용하며, 우크라이나에 인도될 155mm 포탄 10만발을 구매하기로 하는 한미 양국의 합의가 성사직전이라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국 관료는 금요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한국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보내길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

지난 금요일에 한국 국방부는 탄약 거래에 대한 보도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으며, 포탄 판매에 대한 '기밀' 협상은 미국이 최종 사용자라는 전제하에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날 성명을 내어 미국 내 155mm 탄약 재고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한미 양국 기업 간 탄약 수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

지난 목요일, 안토니우스 블링켄(Antony Blinken) 미 국무장관은 미국이 대한민국 국방부의 무기, 탄약, 기타 장비에 관해 400만 달러를 추가로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US to buy South Korea artillery shells ‘for Ukraine’(‘우크라이나 지원용으로한국의 포탄을 구매하려는 미국).” Aljazeera. 2022.11.11.

 

110.(아류제국주의: 해외직접투자 증가율)

글로벌생산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생산이 국경을 넘어서 해외로 팽창하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해외직접투자액의 증가 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해외직접투자는 2000년 중반 이후 크게 증가했다. 2007년 해외직접투자는 275억 불로 200360억 불에 비해 네 배 이상 증가했다.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잔액 기준) 비율도 20054.6%에서 200913.9%로 늘어났다. 이것은 질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GDP 내에서 해외직접투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

이미 해외직접투자 증가율은 수출증가율을 상회했다. 투자의 글로벌화가 시장의 글로벌화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됐다. 2005-2009년 중 연평균 해외직접투자 증가율은 29.7%인 반면, 동일 기간 수출 증가율은 8.3%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 수출 시장 개척뿐 아니라 생산 및 연구 개발 등의 현지화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역의 증대보다 해외직접투자 증대가 훨씬 빨리 증가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에 무역보다 해외직접투자가 네 배가 빨리 증가했고 그 뒤로는 무역보다 두 배 더 빨리 증가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77-178.

 

111.(아류제국주의: 해외간접투자)

해외직접투자뿐 아니라 해외간접투자도 2006년부터 급격하게 증대됐다. IMF(2011. 12)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해외간접투자는 2006년부터 급격하게 늘었다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때 급감했다가 2009년부터 다시 늘어났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해외간접투자는 해외직접투자의 약 5배 정도다. (...)

이것은 외국자본이 국내에 유입돼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이제는 국내자본이 해외에 진출해서 벌어지는 각종 모순에 좀더 착목해야 하는 수준으로 한국 자본운동의 질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78-179.

 

112.(아류제국주의: 생산/판매 법인)

(...)해외직접투자의 증가는 단지 한국기업들이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판매 기지만이 아니라 생산기지를 해외에 급격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요 대기업들은 판매만이 아니라 생산 면에서도 국내를 벗어나 글로벌생산네트워크를 갖추었다. 글로벌생산네트워크 구축을 통해서 주요 대기업들은 판매시장 확보를 더 용이하게 하려 한다.

상품자본의 해외진출뿐 아니라 생산자본의 해외진출은 전자·반도체·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두 기업의 경우 1980년대 초반까지는 미국과 유럽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선진국의 기술력을 현지에서 습득한 뒤 시장확대를 위한 판매법인을 설립했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지생산법인을 만들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80.

 

113.(아류제국주의: 중동특수)

석유화학·플랜트 산업의 경우 해외진출이 활발한 편이다. 세계적인 자원 개발 기업체를 지향하는 SK네트웍스는 42개 국가에 210개 법인과 71개의 지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자·자동차 산업과 같이 생산 네트워크 구축 단계에 접어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석유화학산업이 대규모 장치 산업이라는 점과 관련있다. 그러나 플랜트 업계의 해외직접투자 증가 속도는 매우 빠르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글로벌 직접 투자에 더욱 적극적인 플랜트업계는 한국군 보호를 받으면서 총4백억 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레이트(UAE) 핵 발전소 수주를 얻어냈다. 군대까지 동원해서 핵 발전소를 만드는 가장 위험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석유화학 플랜트 산업은 2005년 이후로 중동특수를 맞이하고 있다. 포스코 건설 컨소시엄의 리비아 정유플랜트, 두산중공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라빅화력발전소, SK건설의 쿠웨이트 석유송출플랜트 등의 석유화학 플랜트 중동특수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인데, 가스·석유 정제시설과 담수화 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적극 뛰어들고 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82.

 

114.(아류제국주의: 양상)

해외직접투자의 목적이 무역장벽 우회 및 저임금 활용과 선진국의 신기술 도입 등에서 더욱 다변화되고 또 여러 동기들이 결합돼서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해외직접투자의 성격이 좀더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직접투자된 자본이 현지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려고 하거나 또는 경쟁 우위를 점하다 보니 수출촉진·비용절감·유통망 확보·현지 기술력 결합·현지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 형성·다른 산업 또는 기업의 동반 진출 등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자본의 해외진출이 공세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86-187.

 

115.(아류제국주의: 양상)

“(...)아시아는 현지시장 진출과 수출촉진과 저임금활용이라는 동기가 압도적이고, 북미는 수출촉진과 현지시장 진출이, 중남미는 자원개발과 현지시장 진출이 많았다. 유럽은 수출촉진과 현지시장 진출 순이다. 중동에서는 자원개발과 현지시장 진출이 많았고 아프리카에서는 자원개발이 61%에 이른다.

해외투자 결정요인들을 목적별 구조를 통해 기간과 투자금액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투자금액 기준으로는 수출촉진이 29.2%의 비중으로 가장 크고 다음으로 현지시장 진출 26.2% 자원개발 15.4%의 순이다. 신규법인 수 기준으로는 수출촉진이 여전히 가장 큰 26.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기타 22.0%, 저임금활용 19.5%의 순이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87.

 

116.(아류제국주의: 자본수출)

자본수출은 단지 낮은 생산비용을 향한 일계기로 고찰될 수 없다. 해외투자의 동기는 무역장벽 회피, 현지 시장 개척, 저렴하고 유순한 노동력 확보 등으로 다양하며 이제는 생산의 주요 클러스터를 만들어서 생산의 국제화를 주도적으로 꾀할 만큼의 글로벌화 수준에 도달했다. 한편 국내 알짜배기 기업들이 인수합병 당했던 IMF 당시의 쓰라린 경험에서 일정한 학습효과를 거둔 국내 대기업들은 이제 신기술과 각종 노하우들을 전취하기 위해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해외직접투자는 가히 국제적 가치의 체계적인 수탈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어진. “제국주의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 검토.” 박사학위 논문, 경상대학교, 2012. 191.

 

117.(자산격차)

“1997년 이전 한국 자본주의는 한국전쟁과 농지 개혁에 기인하는 재산(Property)의 해체를 토대로, 빠른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과 기회 창출을 통해 불평등 심화의 사회적 균열 효과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축적된 자산이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자산은 개발 연대가 마무리된 90년 중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확대, 축적되었다. 한국의 순자본스톡은 2010년 실질가격을 기준으로 할 때(...), 19954131조원에서 2017년 말 현재 138175000억원[국내총산산(17304000억 원)8.0]으로 증가하였다. 전체 순자본스톡에서 민간 부문이 약 75%이고, 이 중에서 가계 부문이 45%, 정부 부문이 25% 정도이다. 정부 부문의 순자본스톡 비율은 외국과 비교해 높은 수준이다.”

 

전병유. “한국에서의 자산 축적과 자산 격차.” 보건복지포럼270(4), 2019. 44-45.

 

118.(자산격차: 저축률)

정책적 요인을 차치한다면, 자산 축적이나 자산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요인은 저축, 자산가격 상승, 상속과 증여 등으로 볼 수 있다. 저축 불평등은 잠재적으로 거대한 부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자산 불평등이 확대된 1980년대 이후 중산층의 저축률이 크게 하락하였다. 일반적으로 저축률은 자산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하위 소득분위의 저축률이 크게 감소하였다. 반면, 상위 소득분위는 저축률 감소폭이 크지 않았다. 상위 소득자들의 경우, 저축을 통한 자산 축적 메커니즘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자산 축적에서 자산 가격 상승에 의한 요인이 커지고 있다. 주상영(...)은 한국에서 β[소득자본비율]값이 높게 나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저축률이 높게 유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본의 상대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주요국의 국부 상승 요인을 저축에 의한 요인과 자본이득에 의한 요인으로 분해했을 때, 실질 자본이득 요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의 경우 미국, 일본, 프랑스보다는 높고 영국보다는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병유. “한국에서의 자산 축적과 자산 격차.” 보건복지포럼270(4), 2019. 48.

 

119.(자산격차: 상속액 규모)

“(...)우리나라의 연간 상속액 규모는 1970년대에 국민소득의 5.7%였다가 1980년대에 5.0%로 바닥을 친 후 계속 높아져 2010년 이후에는 8%로 높아졌다. 과세 자료에 따르면, 연간 상속액은 국민 소득의 2%대에서 완만하게 상승하였다. 여기에 연간 증여액을 더하면 2.8~3.7%로 높아지고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다. 양자의 간격이 벌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연간 상속액보다는 증여액이 더 빨리 증가하였다. 추정 수치와 세금 수치의 차이는 탈세의 문제, 공시지가와 시가의 차이, 비영리 법인 자산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전병유. “한국에서의 자산 축적과 자산 격차.” 보건복지포럼270(4), 2019. 49-50.

 

120.(자산격차: 불평등 추이)

자산은 일반적으로 상위층으로의 분포 집중도가 매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상위 자산 격차 또는 자산 불평등은 지니계수와 같은 지표보다는 상위계층의 자산점유율 등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도 (...) 자산의 경우, 상위 10%의 집중도가 소득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난다. 하위 90%에서는 소득과 거의 유사한 분포를 보인다. , 자산은 상위 10%의 집중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실물자산의 상위 10% 점유율이 금융자산에 비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

한국의 자산 불평등 추이를 보면, 외환위기 이후 1998~2005년 사이에는 증가하다가 2005~2006년 이후부터 완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순자산의 지니계수, 순자산의 상위 10% 점유율, 순자산의 로렌츠곡선 추이 등에서도 확인되며,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재정패널 등 모든 조사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전병유. “한국에서의 자산 축적과 자산 격차.” 보건복지포럼270(4), 2019. 50-51.

 

121.(베트남전쟁: 경과)

“(...)우리가 베트남전쟁이라고 하면 흔히 1964-75년간 남북 베트남 및 지원국간에 열전이 치러진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1946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식민통치를 받다가 1940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귀속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마감짓는 일본의 항복선언이 있은 후 194592일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다시 식민 지배를 추구하고자 베트남에 개입하면서 1946년 말부터 베트남전쟁은 시작되었다. 1946-54년간 베트남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1964-75년간의 전쟁을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지만,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끝나며 체결한 제네바협정에서 남북 베트남으로 분단된 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주요 요인이 되었으므로, 두 전쟁은 상호 연계되어 있어 연속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쟁은 1946-75년간의 30년 전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6.

 

122.(베트남파병: 사상자)

한국은 19649월 비전투부대인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하여 19733월 철군을 완료하기까지, 연인원 32만여명을 파견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약 5,000명은 주검으로, 16,000명은 부상을 입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한 한국 및 한국민은 10년간의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베트남전쟁이 한국 및 한국민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7.

 

123.(베트남전쟁: 쟁점)

“(...)베트남전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 집단인 북부와 자유주의 국가인 남부간의 무력투쟁인가, 아니면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민족해방전쟁인가? 또한,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의 요인들은 무엇인가?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보답과 미국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하여 자본을 마련하기 위한 행위였는가?

(...)베트남전쟁이 한국사회에 남긴 문제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던 한국인 2, ‘라이따이한’, 참전군인들의 희생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19995월부터 한국 내에서 제기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베트남전쟁 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 전개되었고, 그 쟁점은 무엇인가?”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7.

 

124.(베트남전쟁: 도미노이론)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의 논리는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이론이었다. 이 논리는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50년 한국전쟁과 중공군의 개입 등으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의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개입의 기본 논리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따라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의 무력침공에 대한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자위권 발동이며, 남양(南洋) 지배를 위한 중공’(中共)의 전쟁에 대한 미국 및 연합국의 집단조치라고 규정하였다(...). 미국은 이 논리상에서 베트남과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루고 있던 프랑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였고, 1954년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창설을 추진하였다.”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8-109.

 

125.(베트남전쟁: 반공주의)

도미노 이론은 1964년부터 격화된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미국의 주장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여 남부에서 게릴라활동으로 남베트남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어, 이를 방지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베트남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당위성으로 중공의 위협과 공산주의 확장 도미노에 대한 경계를 언급하였다. (...)한국정부는 미국의 원조와 공약이 유지되는 것만이 전쟁으로 황폐된 경제를 복구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며, 한국의 지도자들은 자유세계의 국제적 연대가 공산침략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억지력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9.

 

126.(베트남전쟁: 자유수호론)

“(...) 자유수호론의 입장에서는 베트남전쟁이 공산 월맹’(북베트남)이 자유 월남’(남베트남)을 무력침공함으로써 발발한 것이고, 합법적 정부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부에 대한 침략전쟁이라고 본다. 또한 남부 베트남에서 조직한 베트남남부해방민족전선’(NLF)의 군사조직인 베트콩에 대하여 북베트남이 군사적으로 지원하였고, 소련과 중공두 강대국이 배후에서 무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했다는 점에서 월맹베트콩의 합작공격은 동남아시아에서 국제공산주의 세력 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베트남전쟁이 이러한 국제공산주의 세력 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베트남전쟁이 이러한 국제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09-110.

 

127.(이라크파병: 경과)

이라크 전쟁 파병과 관련하여 불붙은 국내적 논란은 참여정부 안에서도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국내 상황을 직접 관리하는 부서에서는 국민들의 반전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전체적인 국익 판단 앞에서 제약이 없을 수 없었다. 외교부, 국방부 및 청와대의 외교안보 부서에서는 파병의 불가피성을 주장했지만, 국민 여론을 고려할 때 미리 결론을 내놓고 주장하기는 힘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엇보다 북핵 상황으로 인한 한반도 안보정세의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에서 숙고를 하면서 관련 부처와 참모진으로 하여금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노 대통령은 319일 국회 국방위원과의 회동을 통해 파병 문제에 대한 초당적 협조의 당위성을 확인한 뒤, 320일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였다. 정부는 같은 날 대통령 주재 하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여 비상대책을 논의한 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청와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우리 군의 건설공병과 의무부대 파견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이 내용을 2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국회에 송부하여 동의안 표결을 요구하였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8-9.

 

 

128.(이라크전쟁: 배경)

미국은 9.11 테러 사태 이후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와 미사일 위협을 자국의 안보 문제와 직결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20021월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WMD와 미사일 보유, 테러지원 등의 이유를 들어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미국은 이들 세 국가 중에서 특히 이라크를 WMD의 보유 및 확산 의혹 국가이자 알 카에다와 연계된 국제테러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여 유엔에 의한 이라크 무기사찰을 강화하는 동시에 군사적 대응방안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미국이 이라크가 보유한 WMD의 위험성을 한층 강조하고 후세인 정권 축출 의지를 표명함에 따라 전면적인 이라크 공격 가능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1.

 

129.(이라크전쟁: 배경)

“(...)안보리 내에서 미국, 영국 등 소위 주전(主戰) 진영이 이라크 무기사찰 실패를 주장하며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 승인을 요청하는 새 안보리 결의안 상정을 추진하기 시작한 반면,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의 반전(反戰) 진영은 사찰 연장을 주장하며 즉각적인 군사력 동원에는 반대함으로써 양 진영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안보리 결의를 통한 이라크 문제 해결의 길이 험난해졌다.

결국 미국, 영국, 스페인은 317일 이라크 무력공격을 허용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노력 포기를 선언하고 이라크에 대한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48시간의 최후통첩 시한이 지난 2003320,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통해 자국 국가안보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영국 등 동맹국들과 함께 이라크 전쟁(작전명 “Iraqi Freedom")을 개시하였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2-3.

 

 

130.(이라크전쟁: 경과)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후세인의 은신 추정처 등 소수 목표물에 제한적인 정밀 폭격을 시작하였고, 이후 충격과 공포작전을 본격화하며 수도 바그다드 및 주요 거점들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함으로써 이라크군의 지휘 체계 및 방어망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은 410일 바그다드를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414일에는 이라크의 최후 거점인 북부 지역의 티크리트에 진입하면서 전면전이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부시 미 대통령은 51일 함상 연설을 통해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은 개전 후 약 40여일 만에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3.

 

 

131.(이라크전쟁: 전후 소요)

이라크 전후 복구 및 경제 재건 비용은 산출근거 및 주체에 따라 연간 최소 35억 달러(전쟁 직후 부시 행정부 추정치)에서 1,000억 달러(Center for Strategic and Budgetary Assessment : CSBA 추정치)까지 추산되는 등 정확한 총 소요액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경비 지출을 위한 재원 마련 계획으로서 그간 동결되어 온 해외의 이라크 자산 이용, 석유수출 수입이 대부분인 이라크지원기금(Iraqi Assistance Fund) 이용, 미국 정부의 추가경비 지출, 국제사회의 비용 분담 등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어 왔으며, 이라크 자체로부터 추출 가능한 경제 자산이 미미한 상황에서 결국 외부 지원 및 투자가 긴요한 상황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 각종 테러사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악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반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라크 사태 전개에 있어 점차 중요한 도전 요소로 부상하였다. 이라크 전쟁 종전 선언 이후 유엔 사무소와 외국 공관, 주요 시설 및 인원들에 대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으며, 200312월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체포된 이후에도 저항 세력의 폭탄테러는 계속 이어졌다. 또한 이라크에 중동 지역 이슬람 과격단체 테러리스트들까지 잠입하여 연합군은 물론 비군사 표적에 대한 무차별적 폭탄테러가 자행되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4.

 

 

132.(이라크전쟁: 경과)

미국은 200351일 이라크전 종전 이후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를 수립하고,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정부 수립 및 제헌회의 개최 등을 추진하였다.

 

-1 이라크 정치 일정

 

2003320: ·영의 공습으로 대이라크전 개전

 

51: 부시 미국 대통령, 주요 전투행위 종료 선언

 

61: 연합군 임시 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설립

-UN 결의 1483호에 의거 이라크 신정부 수립 시까지 이라크 내 제반 통치 권한 행사

 

713: 이라크 과도통치 위원회(Iraqi Governing Council) 발족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 등 각 종파를 망라한 총 25명의 이라크 종족 대표로 구성, 주요정책 및 인사에 대해 CPA와 협의권 행사

 

200461: 이라크 임시정부(Iraqi Interim Government) 구성

-Yawer 대통령, Allawi 수상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20051월 총선에 의한 과도정부 수립 시까지 관리형 정부로 통치

 

68: UN 결의 제1546호 채택

-이라크 점령 종식 및 임시정부 구성 승인, 향후 정치일정 승인

 

628: 이라크 임시행정처, 임시정부에 권력 이양후 해체

 

2005130: 이라크 총선 실시

-시아파 United Iraq Alliance 140, 쿠르드족 Kurdistan Alliance 75 , Allawi 전 총리계 40, Yawer 전 대통령(수니파)5

 

53: 이라크 과도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 수립

-대통령 Talabani(쿠르드), 수상 Al-Jaafari(시아파) 등으로 구성

-이라크 영구헌법에 따른 정식 정부수립 시까지 대내외 주권 행사

 

1015: 영구헌법 채택

 

1215: 이라크 총선 실시

-시아파 128, 수니파 59, 쿠르드 58, 범정파연합 25, 기타 5

 

2006520: 이라크 정식정부 출범

-대통령 Talabani(쿠르드), 총리 Al-Maliki(시아파)

-2명의 부총리 및 37개 장관으로 구성: 통합이라크연맹(시아파, 20), 이라크화합 전선(수니파, 7), 쿠르드동맹(쿠르드, 7), 세속정파연합(Allawi, 5)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5.

 

133.(이라크전쟁: 전후소요)

“(...)미국은 200310월 이라크의 정치일정 계획 수립을 규정한 대이라크 다국적군 파병 및 재건에 관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511호의 채택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2004630일로 예정된 이라크 임시정부 수립 및 주권이양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일정에도 불구하고 본래 다양한 민족과 종파로 구성된 이라크는 시아파, 수니파 및 쿠르드족 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한편, 종파 및 정파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특히 외부에서 유입된 테러 단체, 이라크 내 저항단체의 대미 무장 공격과 함께 계속되는 치안불안 및 고실업 등으로 인해 불만을 가진 일부 이라크 주민들도 저항운동에 가담하는 양상을 보여 정세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또한 이라크 내 테러 양상이 점차 외국인, 외교관, UN건물, 경찰서, 이라크 지도자, 국제적십자사 건물 등 쉬운 목표물’(soft target)을 대상으로 하여 자행되었으며, 후세인 잔존 세력의 미군에 대한 저항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라크 재건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민간 외국계 기업인을 노린 저격, 납치 등 테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금품을 노린 강도 및 납치도 늘어만 갔다. 또한, 미군정에 협조적인 사회 지도층 인사, 부유층에 대한 테러, 납치도 격화되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6.

 

 

134.(이라크파병: 노무현)

󰡒국내에서 여러 가지 비판적 의견과 반대여론이 있고 또 그것은 나름대로 명분을 갖추고 있는 것이나, 이 문제는 역시 국익이라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맹관계를 존중하고 또 오랜 동안의 우호관계와 미래의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미국에 대한 지지 의사와 지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2003.3.20, 국가안전보장회의시 노무현 대통령 말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7.

 

135.(이라크파병: 배경)

미국 정부는 전쟁 발발 가능성이 커지고 있던 200211월에 이미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 측에 인도적 지원, 戰後[전후] 이라크 복구, 비전투병 파견 등의 분야에서 대이라크 지원 가능 여부를 문의하여 왔다. 이에 대해, 당시 국민의 정부는 12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이라크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미측 지원 요청사항에 대한 우리의 긍정적인 중간검토 의견을 통보한 바 있었다.

그 후 이라크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310일 참여정부 출범후 처음으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통화하면서 이 문제가 다시 나왔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공식 입장 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의지를 밝혀달라고 함께 요구했다. 사실 당시 세계적 이슈로 이라크 전쟁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북핵 문제의 심화와 이에 따른 군사 충돌의 가능성에 대해 무엇보다 부심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노 대통령의 요구도 바로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고민을 대변한 것이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7.

 

 

136.(이라크파병: 배경)

“320일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에 우리 정부에 이에 관한 통보가 왔다. 과거 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의 외교안보수석실을 계승하여 출범 과정에 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이를 급히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 날 아침에 바로 부시 대통령과 노 대통령간의 두 번째 통화도 이루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곧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며 지지를 요청한다는 짧은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적 결단이 조속히 마무리되기 원한다는 정도로 답했으나, 이 문제는 이미 최대의 정책적 과제로 등장해 있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7-8.

 

137.(이라크파병: ·미동맹)

이라크 전쟁은 9.11 테러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계기이며 동북아 국제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사태였다. 우리 정부는 전세계적인 전환기에 처하여 무엇이 우리의 국가 이익에 가장 바람직한 결정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전략적으로 판단한 결과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세계적인 반전 여론과 국내의 심각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동향,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명분 및 한·미 동맹관계의 중요성 등 제반요소를 감안하였으며, 그 당시 북핵 문제나 경제 문제 등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국민의 정서도 함께 고려하여 미국 등 국가들의 노력을 지지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표결 당일 오전 국무총리가 대독해 온 관행을 깨고 직접 국회에 참석하여 국정연설을 통해 국익에 기초한 파병 결정과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직접 호소하였다. 결국 국회는 42일 본회의에서의 논의를 거쳐 건설공병지원단 및 의료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9-10.

 

 

138.(이라크파병: 양상)

우리 정부는 4월 및 5월에 건설공병지원단(서희부대) 600명과 의료 지원단(제마부대) 100명을 이라크 나시리아 지역에 파견하였다. 서희부대는 고려 때 거란과의 국경 분쟁에서 뛰어난 외교능력을 발휘한 서희의 이름을, 제마부대는 조 선 후기의 저명한 한의학자 이제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희제마 부대는 20044 월까지 3차례에 걸쳐 파견되어 이라크 남부 나시리아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 지원과 현지인 진료 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참여정부 출범 초인 2003년 봄에 이루어진 이라크 1차 파병은 미국 중심의 대이라크 군사행동에 대한 찬·반 양론, 국제사회의 동향,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그리고 한·미동맹 관계 등 제반 요소를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냉철히 숙고한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는 한반도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한·미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의 최대 안보현안인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한·미 간 긴밀한 공조 강화에도 기여하였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10.

 

 

139.(이라크파병: 추가 파병)

“20034월 이라크 나시리아에 파견된 공병 및 의료지원 부대인 서희·제마 부대가 성공적인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20039월초 미국은 우리측에 이라크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추가파병 요청은 무엇보다 이라크 상황이 조기에 안정되지 않고 테러가 확산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 해 819일에 바그다드에 있는 유엔 건물에 대한 폭탄 테러로 24명이 숨지면서 국제적 대테러 연대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 이라크 지원 강화를 위한 새 결의안을 제출하게 된다. (...)

당초 미국 정부는 롤리스 국방부 차관보를 통해 독자적 작전이 가능한 사단 내지 여단급 전투부대의 조기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같은 해 봄 비전투병 파병시에 엄청난 국내적 논란을 겪은 뒤에 나온 이 문제는 우리 정부에게 또 다른 심각한 정책적 도전이었다. 특히 이라크 내부 상황이 평온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동안 유사한 국제 평화유지활동(PKO)에 비전투 부대를 보내온 우리의 입장에 비추어 미국이 대규모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한 것은 큰 부담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우리의 국가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이라크의 평화정착 및 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11.

 

 

140.(이라크파병: 전투부대 요청)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적 의견 수렴을 지속하는 가운데 파병 관련 결정 과정을 다단계화하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대통령 주재 안보관계 장관회의 및 NSC 상임위원회 등에서 관련된 논의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노 대통령은 1017일 각계 원로를 접견하여 파병에 대한 정부의 신중한 입장을 설명하면서 최종 결정이 나오기까지 지속적으로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입장을 알렸다. (...)

당초 정부의 절충안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미국은 대미 협의단에 대해 최소한 5,000~6,000명 수준의 여단급 전투부대의 조기 파견을 거듭 주장했고,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확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술한 대로 라마단 이후 이라크 현지 정세가 급변하고 한국군 파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나시리아 지역에서도 동맹군을 겨냥한 폭탄테러가 실제로 발생하자 상황은 변했다. 미국은 20031117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 참석차 방한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통해 한국의 추가파병 방침 자체를 수용하면서 사의를 직접 표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14-15.

 

141.(이라크파병: 군납업체)

“(...)우리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을 통해 한·미 동맹관계를 보다 굳건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당시 북핵위기, 주한미군 재배치 등 산적한 안보 현안을 고려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굳건한 한·미동맹이 요구되었으며 미국은 이라크 전 이후 평화정착과 재건을 위해 한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은 미래 한·미 동맹관계의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라크 추가 파병이 결정된 이후 파병 준비가 진행되던 20046월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라크 주둔 미군에 용역을 제공하는 군납업체에 근무 하던 그가 무장단체에 납치, 살해되면서 이라크 정세에 대한 우려가 크게 확산되었다. 크게 혼란스런 현지 상황에서 정부의 철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인 안전이 확보 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기업활동의 결과였으나, 언론에서는 테러 정보 관리와 교민 안전 대책을 문제 삼으면서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라인 전체를 맹공격했다. 그 결과 김선일씨 피살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을 문제삼아 감사원 감사와 국회의 국정조사가 장기간 지속되었고, 국민 여론에서도 정부에 대한 불신과 국군 파병에 대한 불안감 증대로 파병 추진에 있어 어려운 국면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한국군의 파병이 이라크 현지 정부와 미국 등 동맹국에 공식 통보되어 있었고, 자국민 피살 사건을 이유로 국제적 약속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국민 여론도 정부의 파병 결정 이후 지지 의견이 소폭 증대한 상황에서 사건 발생 직후엔 크게 흔들렸지만 점차 안정되어 갔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16-18.

 

142.(아류제국주의: PKO)

1 장 이라크 파병의 의의와 성과

우리군의 이라크 파병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의 기여 *한국군 주둔지역의 평화정착과 재건과정 지원을 통한 한국의 경제안보기반 강화 *한미공조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새로운 토대 구축 등의 의의와 성과를 가진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

현대 국제사회에서는 다국적군 작전이나 국제평화유지활동(PKO/PKF)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어떠한 성과를 거두는가에 따라 각국의 대외 영향력 수준이 매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 강국들은 세계 어느 곳에라도 분쟁이 발발하면 다국적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병력을 투사하고 분쟁 종식에 기여한 戰果[전과]만큼 재건사업의 파이를 나누고 있다. 미국을 선두로,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와 스페인, 네덜란드, 호주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일본과 중국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오늘날 한국군의 임무 영역도 이미 한반도나 동북아 권역을 벗어나고 있다. 한국군은 걸프전 참전에 이어 소말리아, 앙골라, 그루지야에서의 PKO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전() 지구 차원에서 활약을 해왔다. 더욱이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파병 활동은 한국군의 국제적 역할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52-53.

 

 

143.(아류제국주의: 중동특수)

“2. 이라크 평화정착 및 재건 지원과 한국의 경제안보기반 강화

최근 중동지역에서 건설, 에너지, 조선, IT 등 다양한 분야의 수주 실적이 급증하고 있다. 걸프전 이후 의도적으로 한국의 입찰을 배제했던 쿠웨이트에서 최근 SK건설과 두산중공업 등 한국의 여러 기업들이 괄목할만한 수주 실적을 보이고 있음은 이라크 파병 효과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이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IMF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한 한국으로서는 중동 특수에 대한 기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파병 비용의 80%가 인건비와 국산 자재 및 물자 구입으로 국내로 환원됨으로써 연간 수천억원의 투자 효과를 창출, 우리 경제에 기여하였음도 부인 할 수 없다.

한편, 유전개발, 담수시설 건립 등 이라크가 전후 재건 과정에서 본격 추진할 대규모 사업의 규모는 10년간 1,00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렇듯 재건사업의 엄청난 규모와 이로 인한 파병의 경제적 가치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도 유전 개발권 확보를 비롯한 전후 재건사업에서 초래될 수 있는 불이익을 우려해 오늘날 戰後[전후] 안정화 작전에 직ㆍ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55.

 

144.(아류제국주의: 중동특수)

이라크에 대한 경제적 진출에는 우리의 에너지안보상 필요성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4위의 원유 수입국이자 세계 7위의 석유 소비국으로 에너지 수요의 대부분(96.5%)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2005년에 주종 에너지인 원유의 81.7%를 중동에서 수입하였다. 이 같은 중동 의존도는 1981년의 90.7% 이후 2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21세기 자원 고갈의 시대를 맞아 지구촌 에너지 수급질서가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에서 안정적 에너지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우리의 이라크 파병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특히 이라크는 미개발 대형유전이 산재해 있고, 개발환경과 개발비가 저렴하여 사업채산성이 높은 지역이다. 특히 20~40억 배럴급 초대형 유전이 산재해 있어 우리나라가 이러한 유전 하나만 확보할 수 있어도 석유 자주개발비율은 10% 이상 증대할 수 있어, 장차 안정된 석유 공급원 확보를 위해 획기적인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55.

 

145.(아류제국주의: ·미공조)

“3. 한미공조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새로운 토대 구축

한국은 이라크 파병이 한ㆍ미 동맹의 발전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의 토대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실제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타결이나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등 양국 간의 주요 현안을 다루는 데 있어 한ㆍ미 양국 간에 한층 더 발전된 공조관계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아울러 지난 수십 년간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한 에너지 수급망이 우리에게 있어서 경제발전의 기본토대가 되었던 사실과 이런 경제발전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중동의 교두보로 인정했던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기초가 되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최근의 이라크파병은 에너지ㆍ자원 확보를 위한 보이지 않은 전쟁 속에서 한미동맹의 발전을 통해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결정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56-57.

 

 

146.(이라크파병: 전우애)

설문조사 결과 지상이동작전 참가장병의 70% 이상이 작전간 죽거나 부상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장교ㆍ부사관ㆍ병사가 유사한 비율을 나타냈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50% 이상이 전우애’, ‘신앙생활’, ‘심리 상담등을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파병 지역에서의 전장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는 전우애를 돈독히 할 수 있는 단체활동, 종교생활, 상담 등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밖에도 군사적인 관점에서 우리 군이 이라크에서 얻은 교훈들은 실로 다양하다. (...)전쟁은 기술력만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수천억 불에 달하는 미군의 첨단무기체계도 적들의 저항 의지를 완전 꺾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고정밀 무기체계에 기초한 네트워크 중심의 전투(NCW, network-centric warfare) 역량도 요구하지만 전사들의 정신적인 무장 강도와 인터넷, 휴대폰과 전세계 매스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다변적인 능력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이라크 파병의 성과와 교훈: 국익과 세계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의 전말.”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008. 60.

 

 

147.(국제외교: 탄약거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한국의 무기 공급에 관해 경고하고 북한과의 군사협력을 언급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27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발다이 토론 클럽' 19차 연례 회의 마지막 날 일정에 참석해 "우리(러시아)는 대한민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쪽 모두와 대화할 기회를 항상 가져왔다"고 강조한 뒤 "하지만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것을 우리는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곧이어 "이것은 우리(-)의 관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아울러 "만일 우리가 이 분야(무기·군사)에서 북한과 협력을 재개한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물으면서 "과연 이것이 당신(한국)을 행복하게 할까"라고 덧붙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에 유의해주기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오종수. “푸틴, 한국에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 말라' 경고...북한과 군사협력 가능성 언급.” VOA, 2022.10.28.

 

148.(K-컬쳐: 양상)

한때는 한류가 동남아나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K-컬쳐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는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크게 흥행하며 K-컬쳐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요. 2019년 국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수많은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2021년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인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K-컬쳐의 엄청난 성장세에 힘을 보태고 있죠. (...)

K-컬쳐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광범위하게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국 가수 중에서는 최초로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 핫100에서 1위를 차지했던 방탄소년단(BTS)의 사례가 그동안 K-컬쳐의 주요 사례로 손꼽혔습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문화 콘텐츠 산업 수출액이 약 12조 원으로, 전년 대비 8% 이상 증가하였으며 한국 주요 수출 품목 중 12위였다고 하는데요. K-컬쳐의 부가가치 유발효과가 10조 원 이상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단순히 인기가 많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끄는 한 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요. 코로나 19로 인해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영화관 대신 집에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 OTT 콘텐츠가 크게 주목받는 상황에서 한국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 넷플릭스 TV쇼 부문 1위를 석권한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가 주목! K-컬쳐의 놀라운 소프트파워.” LX인터네셔널, 2022.1.11

 

149.(K-컬쳐: 오스카 시상식)

““디 오스카 고스 투패러사이트(The Oscar goes toParasite)!”

대배우 제인 폰다의 입에서 패러사이트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꿈과 현실 사이 중간계 어디쯤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이미 감독상을 받은 터라 최고 영예인 작품상은 대다수의 예상대로 <1917>에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이 대반전을 이뤄낸 것입니다. <기생충>은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4개 트로피를 품으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 자리를 꿰찼습니다.

지난해 5월을 떠올려봤습니다. <기생충>이 한국 영화 최초로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칸영화제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영화제입니다. 봉 감독은 지난해 10월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 20년간 한국 영화는 영향력을 행사했는데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좀 이상하긴 하지만 별것 아니다. 아카데미는 국제적인 영화제가 아니라 로컬 시상식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의 뼈 있는 말마따나 아카데미는 한 나라의 로컬 시상식일 뿐인데 왜 사람들이 더 열광할까요?

그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는 프랑스에서 나왔지만, 현재 전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은 미국입니다. 미국과 캐나다를 합친 북미 영화시장은 2018년 기준 119억달러 규모로 세계 시장의 29%를 차지하는 1위입니다. 이렇게 큰 시장에서 자국인 미국 영화 점유율은 90%를 넘습니다. 그뿐인가요?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는 자국뿐 아니라 전세계 영화시장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 모두 압도적 1위인 미국의 로컬 시상식이 단순한 로컬에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서정민. “‘기생충아카데미상 수상에 더 열광하는 이유.” 한겨레, 2020.2.15.

 

150.(베트남전쟁: 민족해방전쟁)

자유수호론이 베트남전쟁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이념전쟁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베트남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한 시각이 1970년대 중반부터 제시되었다. 그 선구적 학자로 리영희(1985)를 들 수 있으며, 이후 이삼성(1998), 강정구(1996; 2000; 2002) 등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이 공산주의 세력이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가로막는 프랑스 및 미국과 이의 후원 하에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베트남(1949년 수립된 베트남국, 195510월 이후 베트남공화국)을 한편으로 하고 베트남 민중과 북베트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민족해방전쟁이었음을 간파하였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열전이 치러진 1964-75년간의 전쟁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다시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하여 베트남 땅에 들어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1946-54년간의 베트남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맺어진 제네바협정에서 2년 이내에 총선거를 치르도록 규정하였고, 남북을 분단하는 17도선은 임시적 군사분계선이며 국경선이 아니었음에도, 프랑스는 총선 기한 직전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여 그 의무를 방기하였고, 그 의무를 계승한 남베트남이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전쟁이 계속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가 19496월 바오다이(Bao Dai) 왕을 앞세워 수립한 프랑스연방 내 베트남국을 19502월 승인하고 그 해 12월 방위 및 상호원조에 관한 협정을 맺고 군사적 지원을 하는 등 일찍부터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에 개입하였고, 제네바협정 이후에는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라는 반공, 친미 인사를 국가원수로 앉히는 등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깊숙이 베트남 내정에 개입하여 제네바협정을 위반하게 함으로써 분단을 고착화시켰다고 한다.”

 

이한우.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51, 2006. 110-111.

 

151.(해외직접투자: 종속심화)

베트남 경제는 20182분기에 작년 동기(5.78%)에 비해 높은 성장률(6.17%)로 긍정적인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보고서는 베트남 경제가 외국인직접투자 부문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출 활동에서의 FDI 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2009년에는 FDI 부문의 수출이 전체 수출의 32.9%를 차지하는데 비해, 2016년에는 70.2%, 2017년 상반기엔 72.4%로 상승했다. 그 결과, 베트남의 국내 제조업은 강화되고 있는 국제 통합 과정에서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일자리는 베트남 국내 기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반면 외국인투자 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특히 한국의 삼성과 같은 대기업은 수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근로자를 위한 많은 고용을 창출한다.

베트남 경제가 외국인직접투자 부문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동시에 국내 경제는 베트남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성장하지 못했고, 정부의 새로운 경제 정책 또는 경제 통합 과정에서 실제로 이익을 얻지 못한다.

FDI 의존도는 베트남의 미래 경제 발전에 있어 매우 우려되는 문제이다. 현재의 경제 성장은 내부 요인이나 베트남 국내 경제의 핵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외국인들이 베트남에 자본을 투자하지 않으면 그 결과를 예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도안만끄엉. “한국 기업의 베트남 외국직접투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9. 57. 일부 문장 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