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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자본주의 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

by 정강산 2024. 9. 20.

[2024. 2. 9_<문화/과학> 117호(2024년 봄)에 선게재된 글. 인용은 <문화/과학>을 참고.]

 

정강산

 

유토피아가 지평선에 보인다.

내가 두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

유토피아는 두 걸음 멀어진다.

내가 열 걸음 앞으로 걸어가면

유토피아는 열 걸음 앞으로 도망간다. (...)

유토피아는 우리가 걸어가는데 쓸모가 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우울, 비관, 낙담, 고립의 감상이 지배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식 표현을 빌리자면, 절망이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 같은 감정사(history of emotions)는 흔히 세대(generation)의 형상에서 집약된다.

한국의 경우 OECD 국가 중 자살률 1, 비정규직 비율 1, 합계 출산율 최하위 등의 부정적 지표는 ‘N포 세대의 모습에서 웅변적으로 드러난다. ‘N포 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삼포)에 이어 취업, 인간관계 등 전통적으로 인간 삶의 기본 구성 요소라 여겨져 온 모든 것을 포기한 청년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어령은 이를 두고 삼포는 생 자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자살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각주:1]  

일본의 사토리(さとり) 세대역시 비슷한 양상을 띤다. ‘달관/득도 세대라 번역되는 이 세대는 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자들로서, 욕망을 최소화하여 마치 해탈한 듯한 생활 양식을 지닌다. 이들은 필요 이상의 돈을 벌겠다는 의욕이 없으며,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도 없고, 소비에 대한 욕구도 없다. 사토리 세대는 최소한의 규모로 삶을 영위하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 진학·취직·직업훈련을 관둔 니트족, 부모 경제력에 의존하여 독신을 이어가는 패러사이트 싱글등 기대감소 시대의 군상들을 아우른다

중국의 탕핑(躺平)도 마찬가지다. ‘탕핑은 퍼질러() 눕는다()는 뜻으로, 자기계발·취업·소비·연애·오락 등 어떤 사회적 노력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최소한의 생존 이외에 무엇도 바라지 않는 젊은 세대를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바이란(摆烂)’이라는 삶의 태도 역시 병존하는데, 이는 사태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사회에 대한 절망 섞인 공격성과 자포자기가 결합한 위태로운 정동이 자리한다.

미국과 유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미국의 경우 세계를 극단적인 비관 속에서 조망하는 두머(doomer)’가 앞선 경향들의 등가물이다. 이들은 파멸이라는 뜻 그대로 극도의 염세성과 허무주의, 무력함, 둔감함, 목표 없는 상태를 특징으로 지닌다. 우울 속에 고립된 군상으로서의 두머는 주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 걸쳐있는 청년층이다.

한편 프랑스의 청년들은 스스로를 희생당한 세대(Génération sacrifiée)’로 정체화하는데, 이는 이전 세대와 달리 정상적인 학업, 취업, 복지 기회로부터 배제당했다는 자기인식을 표현한다. 2020년 프랑스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5-30세 사이의 프랑스 청년 85%가 자신들을 희생당한 세대로 간주하고 있다.[각주:2]

 

주체에 각인된 자본주의의 구조위기: 감정사의 단층으로서 암울한 세대

 

이들 암울한 세대가 출현하는 공간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경제 규모상 최선두를 달리는 명실상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다. 더불어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가 존재하나 이 암울한 세대가 회자되기 시작한 시기는 전부 2010년대 이후로서, ‘88만원세대’, ‘1000유로세대등 단순히 경제적 소득 수준에 따른 세대 구분을 넘어 우울, 비관, 절망, 고립감 등 정신심리의 부정적인 속성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공통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세대는 간혹 연관된 현상으로 조명되는 경우에조차 그 보편적 실체가 규명되지는 않는다. 양극화, 저성장에 따른 취업난, 저임금·불안정노동, 부동산 가격 상승, 미디어를 통해 가상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삶의 기준 등이 파편적으로 나열될 뿐, 이들 전체를 조직하는 기제는 베일에 싸여있다. 따라서 이 같은 사태에 대한 해결책으로 질 좋은 일자리의 제공이라는 손쉬운 처방이 난무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각주:3]

국민국가의 시공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관측되는 암울함의 제1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려면, 왜 이 같은 세대가 하필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나타나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암울한 세대로 예표된 감정사의 단층을 자본주의 특유의 주기적 경기순환이 후퇴·수축기에 빚어낸 산물로 간주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단계 자본주의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가 주체에 각인되는 양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규정이야말로 양극화, 저성장에 따른 취업난, 저임금·불안정노동, 부동산 가격 상승 등 암울한 세대의 출현 조건을 아우르는 규정적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순환은 자본주의에 내속적인 과정으로서, 전반 경제 상태가 확장-후퇴-수축-회복을 반복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현상이 자본주의에 종별적인 까닭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시장을 매개로 재화(상품)를 배분하는 자본주의 특성상 (많은 경우 과잉생산으로 나타나는) 총수요와 총공급 사이의 항상적인 불균형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총수요가 과소하든 총공급이 과대한 경우, 기업은 영업이익과 매출감소에 따른 생산·고용 축소에 나서고 노동자는 소득 감소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런 점에서 경기순환 과정 중 하강기란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삶 자체의 위태로움을 의미한다.

물론 확장-후퇴-수축-회복의 한 주기에서 다른 주기로의 이행이 순탄하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각 계기에는 공황(위기)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각주:4] 이는 자본 간 경쟁 과정에서 기계설비에 대한 투자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이윤 원천인 노동력의 전유가 줄어드는 장기 위기 메커니즘(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하에서, 주로 호황기에 누적되는 과잉생산으로 수요-공급 간 불일치가 간단한 조정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벌어질 때 발생한다. 공황은 경기순환 상 급격한 수축을 표현하는 바, 막대한 규모의 도산과 파산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국면이다. 이 국면에서 대중의 삶은 불가능의 수준으로 접어든다.

이 같은 자본주의의 원리론으로서 경기순환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이 자리하는 한편, 원리적 경향 위 역사적 형세로서 축적체제 자체의 위기 또한 존재하는데, 이를 구조적 위기라 할 수 있다. 동시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확장적 재정정책과 금융통제를 기조로 한 케인스주의의 한계 속에서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위기로서, 금융화, 자본자유화, 공공부문의 민영화, 긴축재정 등을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프로그램들이 경기 안정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실물부문 축적 둔화-금융부문 팽창-금융을 통한 실물경제 견인과 성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선순환 구조가 실물부문 축적 둔화-금융부문 팽창과 투기-금융위기의 형태로 악화하는 양상이 바로 현재의 구조적 위기다.[각주:5]

다시 암울한 세대로 돌아가 보자. 이들 세대는 구조적 위기를 표현해온 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겪거나 그 여파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또한 그 위기들로부터 비롯된 바, 경기순환 상 후퇴·수축기의 지속에 따른 장기불황·대침체의 한복판에서 주요한 생의 경험을 겪고 있다. 달리 말해 여기서 삶의 현상학은 위태로움과 불가능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좀처럼 지적되지 않는 것이지만, N포 세대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결합한 IMF 구조조정, 사토리 세대는 주식·부동산 과열로 인한 90년대 일본 버블경제 붕괴, 탕핑족은 2015-2016년의 중국 증시 폭락, 두머 세대는 2000년대 초반의 닷컴버블 붕괴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희생당한 세대는 2008년 금융위기의 영향 속에서 코로나19와 결합한 경제침체를 고유한 계기로 두고 있다.

이들 구조적 위기의 표징은 명실상부 금융화와 관련된 것인바, 경제위기가 주식·은행·외환 등 금융위기의 형태로 발생하는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한계를 노정한다. 암울한 세대의 조건으로 셈해지는 양극화, 저성장에 따른 취업난, 저임금·불안정노동,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은 바로 이 같은 축적체제의 조건이자 그 구조위기의 특징으로, 주체의 심상에 삶의 불가능성이라는 비관을 새겼다. 이것이 바로 암울한 세대의 실체이자, 현시기 감정사의 단층에서 우울, 비관, 절망, 고립의 감상이 관측되는 원인이다.

구조위기에서 야기된 장기불황으로부터의 완전한 회복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 않다. 경제지표로 볼 때 미국경제의 호황은 2012년부터 관측되나, 이는 당시 양적완화를 통해 공급된 유동성으로 인해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며, 202310월 발표된 IMF의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조차 경제침체 우려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수십 년 만의 최저 수준 정체를 예견했다.[각주:6] 외려 구조위기의 파열들은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위기와 중국 부동산시장 위기에서 보이듯 더 짧은 주기로 터져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뒤덮은 암울함은 당분간 지속할 것이라 해도 좋다.

물론 이는 세대를 초과하여 편재하는 실재이지만, 이 같은 감정사가 특히 세대의 형상에서 지층화하는 까닭은 특정한 시간성이 순수하게 결절되는 단위가 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결과를 주의 깊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암울한 세대의 등장은 자본주의가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음을 알리는 징후일 뿐만 아니라, 인간 리비도(libido)를 상호 연결하고 확장하는 에로스(Eros)의 상태로 견인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생과 사랑에 관계하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충동인바, 인간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가능케 하는 주관적 차원의 실체이다. 그런 점에서 암울함이 오늘날 지배적인 정동이 되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경향으로서의 불안정성에서 비롯하는 위기가 인류의 자기보존 및 재생산과 근원적으로 불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현시대는 전방위한 리비도의 퇴행으로 조건 지어지며, 불안에 내몰린 개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아로 리비도를 철회하는 경향을 만듦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리비도를 공격성 및 파괴와 관계하는 죽음충동으로 굴절시킨다. 이는 후술할 숱한 병리적 현상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윤율저하 경향과 공황보다는 정동의 쇠락 경향에서 파생된 소요들로 붕괴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각주:7][각주:8]

 

주물된(molded) 암울함: 리비도의 순환로로서의 사회구성체

 

이를 상론하기 위해 우리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리비도는 성을 그 심급으로 갖는 인간의 정신적·생리적 에너지이자 생명력 자체인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주재하며 자기보존을 가능케 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는 성장기에 구강, 항문, 성기 등 여러 신체 부위에 집중되는 과정을 거치며 순환한다.[각주:9] 허기에서부터 변의에 이르기까지 원초적인 욕구를 해소하고자 신체 부위에 집중되던 리비도는 점차 다양한 외부 대상으로 투여되며 승화(sublimation)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은 여러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은 곧 사회화 과정에 다름아니며, 자아를 가진 주체가 세계에 등록되는 프로이트식 계기이다. 사회화된 주체는 삶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차원으로 리비도를 적절히 분배할 수 있다.[각주:10]

그러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리비도 운용은 불가능한데, 이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억압(repression)이 발생하기 때문이다.[각주:11] 억압된 리비도는 주체가 사회 내 여러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조건인 동시에, 무의식에 저장되며 히스테리·강박증·공포증·불안증 등의 신경증과 더불어 도착증, 정신병을 유발한다. 또한 성장기에 (부모로 표상되는 사회의 대리인을 통해) 적절히 처리되지 못한 리비도는 구강, 항문, 성기 등 유아기의 애정 대상에 머물러 고착(fixation)됨으로써, 성인이 되어서도 악순환적인 경험을 반복하는 미성숙한 성격 유형을 형성하게 한다.[각주: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비도의 타율성이라 할 법한 것으로, 리비도는 일차적으로 사회의 규제 속에 놓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문명 속 리비도의 운용에는 사회의 존재가 그 조건으로 각인되어 있다.

리비도는 무한히 뻗어 나가고자 하지만, 언제나 사회의 규제 내에서 그렇게 한다. 이때 사회란 공시적인 인간 공동체로서의 추상적인 사회이기도 하지만, 여러 구체적이고 통시적인 정치·경제·문화적 특징을 지닌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회구성체의 그 다양성만큼이나 다기한 리비도 배분의 순환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각주:13] 이는 무엇보다 리비도 경제의 가변성을 의미한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티즘과 결합하여 금욕주의를 그 심적 동력으로 삼아온 초기 자본주의의 리비도 경제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 말까지 리비도 억압의 한 갈래는 성엄숙주의의 형태로 관철되었으며, 이는 프로이트가 주로 여성들에게서 나타난 히스테리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된 본질적인 계기였다.[각주:14] 그러나 이 같은 리비도 경제는 20세기 초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으로 요약되는 포드주의의 도입에 따라 대량생산된 물량을 소화할 이데올로기적 조정의 필요가 대두되며 급격히 사그라들게 되었고, 1960년대 영미와 서유럽 일대의 소비사회로의 진입과 더불어 발생한 성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 결과 21세기에 이르러 히스테리 증상의 여성적 특징은 상당 부분 희석되어 과거와 같은 무게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런 한에서 프로이트가 자신의 시대에 상대했던 것은 단순히 개별적 신경증들이 아니라 당대의 리비도 경제의 형세 자체였다고 해도 좋다.

이런 지평에서 우리는 암울한 세대를 감싼 시대의 정동이 동시대 자본주의에 특유한 리비도 경제의 도관(pipe)이 지니는 내용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앞선 절에서 지적한 자본주의 구조위기와 경기순환 상의 후퇴·수축은 현재의 리비도 경제를 규정하는 기층의 최종심급이라 할 수 있으며, 이제 이 지반 위에 형성된 리비도 경제의 형세를 보다 자세히 상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앞서 적시한 바, 현시기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리비도 퇴행의 징후들과 더불어 삶충동(에로스)의 약화에 따른 죽음충동의 우위가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증상들: 시추에이션십, 대중심리학, 공격적 부/모성애

 

동시대 리비도 경제의 한 축이 나르시시즘적 경향으로 조형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그것은 전지구적으로 등장한 암울한 세대가 다양한 지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연애와 결혼 등 성애적 관계에 대한 무심함과 더불어 낮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데서 웅변적으로 드러난다.[각주:15] 나르시시즘은 성장 과정을 거쳐 신체 외부의 대상으로 적절히 분배될 수 있게 되었던 리비도가 다시 자아로 후퇴한 상태, 프로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대상 리비도가 자아 리비도로 회귀한 사태를 가리킨다. 자아로 정향된 리비도는 외부로 향할 수 있는 심적 에너지의 총량을 낮춘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즘은 우정, 성애, 사랑이 매개된 사회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한다.[각주:16] 이 같은 나르시시즘은 고통 속에 놓인 주체로부터 원형적으로 관측된다.

 

“(...)통증과 불쾌감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대상이 자신의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그 대상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또 우리 역시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서도 관심을 철회한다(...) 고통을 당하는 동안엔 사랑을 중단하는 것이다.”[각주:17]

 

여기서 예시가 되는 것은 신체적 고통이나, 우리는 그 같은 고통이 사회심리적 수준까지 포괄한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애와 양육, 우정을 비롯한 사랑과 거리를 둔 암울한 세대의 나르시시즘적 습성은 불안정한 현대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조형된 결과이자 고통의 증표라 해도 좋다.

동시에 리비도 경제의 도관이 주체성과 관계하는 한, 오늘날 나르시시즘은 어떤 측면에서 생산적인 가치로까지 전화(transformation)하는 양상을 띤다. 이는 사랑에 대한 포기가 외려 욕망함직한 것으로 체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수준과 무관하게 연애를 하거나 자식을 낳았을 때 현재 누리고 있는 자신의 삶을 잃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피하는 청년들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경향은 2020년대에 이르러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이라는 새로운 성적 결속의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는 일자적인 낭만적 관계를 거부하고 상황(situation)에 따른 간헐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문화를 가리킨다. 이 속에서 주체는 자연스레 연인과 같은 관계규정이 없는 채로 비헌신적인 만남을 갖는다. 시추에이션십에 따르면 그때그때의 데이트는 가능하나 연속적이고 항구적인 의미에서의 관계는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의 발전은 물론이고 관계의 정립 자체가 거부되고 있는바, 타인에 의해 삶이 흔들리는 것을 감내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 제거된 독특한 ()관계의 패턴이 형성된다.[각주:18] 이는 자본주의 구조위기에서 비롯한 불안정성에 대한 미메시스인 동시에, 대상 리비도의 후퇴가 빚어낸 나르시시즘의 한 단면이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배분의 배관이 헤게모니를 쥐었음은 대중심리학의 수준에서 나르시시즘에 대한 전세계적 관심에서도 나타난다. 근래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나르시시스트를 조심하라는 문화콘텐츠는 넘쳐난다.[각주:19] 여기서 나르시시스트는 감정적이고 물질적인 착취를 일삼으며, 공감능력이 결여된 채 과대한 자신감 속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모욕하길 즐기는 일상의 악으로 표상된다. 이에 대중들은 평소 자신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그와 같은 특징을 찾아내며 인간관계 속에서 본인이 겪어온 고통들을 설명하거나, 더 이상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선언한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통속적이고도 열렬한 소비는 여러 오독과 작위성으로 점철되어 있으나, 일말의 진실 역시 담고 있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와 더불어 나르시시스트가 대중심리학적 문화상품으로 불티나게 가공되는 현상은, 그 자체 인간이 서로에게 이해 불가능한 적이자 절대적 타자로 현상하는 사회적 위기 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또한 실제로 병리적인 자기애를 지닌 인간군상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병리적 자기애의 실존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된 교사자살 사건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나르시시즘은 대상 리비도를 후퇴시키는 만큼 성애적 관계와 그에 따른 출생을 억제하지만, 일단 자식이 태어나고 나면 자식은 성장과정에서 지양된 나르시시즘이 다시 활성화되는 대표적인 창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민원과 폭언 등으로 과도한 공격성을 내비쳐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간 부모들의 행태는 사회의 안정성과 확장성이 위협받는 구조위기의 조건에서 나르시시즘적 기질이 활성화된 주체가 보일 수 있는 자기애적 격노(Narcissistic Rage)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자식에 애정을 쏟는] 부모들의 그런 태도가 그들이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던 그들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다시 부활시키고 재현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아주 완벽한 존재로 여기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며, 자연히 자식의 모든 결점을 감추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자신들의 경우는 스스로가 지닌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억제하면서까지 어쩔 수 없이 존중해 왔던 전통문화의 습득도 자식들에게는 유보하며, 그들 스스로가 오래 전에 포기했던 모든 특권을 자식에게 다시 부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질병이나 죽음이 자식들에게 닥쳐서는 안 되며, 재미있게 놀지 못하게 하거나 기를 꺾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적인 법칙의 적용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각주:20]

 

이어 그는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 자아의 불멸성이 위협을 받는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자식에게서 피난처를 찾아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데,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양상임을 고려할 때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도관이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이 같은 자기애가 훨씬 증폭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각주:21] 이런 측면에서 동시대 부모들의 공격성은 분명히 도의를 벗어난 사회적인 법칙의 적용에 대한 과감한 포기이지만, 그것은 근대적 시민을 양성하는 장소로서의 학교에 대한 심상이 쇠락하고, 학교가 희소한 자원을 쟁탈하기 위한 예비 전투장임이 명백해진 신자유주의 구조위기의 단계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취해진 합리적인 선택지이기도 한 셈이다.

이 같은 나르시시즘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결국 리비도의 퇴행이다. 특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주체에 가해진 심대한 위협으로 인해, 외부 세계의 대상에 투여할 리비도가 소진되거나 방향을 틀어 자아로 후퇴함으로써 자폐적인 유아론(solipsism)적 감응의 형태를 영속화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이 같은 추세는 우울증과도 관련된다.

 

우울의 징후들: 우울증 유병률의 우상향 곡선과 자살률

 

우울증의 구조 역시 나르시시즘과 마찬가지로 대상 리비도 집중이 퇴행하여 자아에 고착된 양상을 띤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은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등 나르시시즘과 여러 특징을 공유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고통스러운 낙심과 더불어 자애심의 추락이라는 또 다른 특징을 내보인다.[각주:22] 나르시시즘이 자기애의 과잉이라면, 우울증은 자기애의 빈곤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으로 향했던 리비도가 그 대상의 상실로 인해 철회된 상황에서,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자아로 귀속되는 병리적 사태이다. 대상은 특정인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이념과 실천일 수도 있다. 한편 대상의 상실은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하는 현실적인 요구를 가리키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실망이거나 낙담일 수도 있고 대상의 실제적인 소멸일 수도 있다.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자기애의 빈곤은 곧 자아의 빈곤인바, 이는 일시적인 감정인 슬픔과도 구별되는 특징이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자면 우울증 환자의 자아는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이며, 우울증 환자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추방되어 처벌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각주:23] 이처럼 우울증에서 관측되는 망상에 가까운 과도한 열등의식은 거식증, 불면증, 자살을 동반하는 수준까지 악화하며 심각성을 더한다.

암울한 세대를 비롯 동시대인들의 헤게모니적 정서가 우울에 정향되어 있다는 것은 급증한 자살률에 더해 임상적 판단 수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의 경우 2023년 자살사망자 수는 50,000명을 상회하며, 이는 2000년의 29,350명에서 약 70% 증가한 수치이다.[각주:24] 이 모든 자살이 우울증과 관계된 것은 아니라 해도 우울증은 사망률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2023년 갤럽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삶의 어떤 시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던 미국 성인의 비율은 29%10명중 3명 꼴이며, 현재 우울증을 겪고 있는 비율은 17.8%에 달해 대량 10명중 2명에 근사한 수치를 보였다.[각주:25] 이는 2005년의 값과 비교할 때 각각 대략 50%, 169%가 증가한 수치다.[각주:26]

자살률 OECD 최상위 국가인 한국의 자살사망자는 202212,906명으로, 당해 10만 명당 자살률 25.2명은 30년 전 1992년의 8.3명과 비교할 때 203% 증가한 수치다. 비슷한 시기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바, 20022.8%에 달했던 우울증 유병률은 2020년에 이르러 5.3%89%가량 증가했다.[각주:27] 다른 국가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자살률과 더불어 우울증 유병률이 최근 수십 년간 전 세계적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구조위기의 징후들이 전 지구적으로 출몰했던 최근 20-30년간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간대는 무엇보다 실질GDP의 하락과 실질임금 하락 추세에 따른 삶의 축소, 소비주의와 결합된 임금·자산불평등에서 비롯한 열패감, 사회적 공동성의 해체, 자기 파괴적인 능력주의 등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복합체인바, 여기서 리비도 순환의 도관은 자학을 통한 자아의 고갈을 특징으로 하는 우울증을 향한 길을 낸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 어떤 측면에서 우울증에서 보이는 자아의 고갈이란 상실한 대상에 자신의 자아를 순진하게 투사했던 결과로서, 리비도를 투여할 대상선택의 과정에서 나타난, 대상에 관한 나르시시즘적 동일시가 원인이 된다. 즉 우울증 환자의 증상이 슬픔에서 발견되는 대상상실에 대한 침통함을 넘어 자아 자체의 상실로 전화(transformation)하는 까닭에는 대상과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가 있는 것이다(물론 이때 동일시에 복무하는 나르시시즘이란 앞선 절에서 살펴본 경화된 형태의 이차적이고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이라기보다는 주체의 자기보존을 위한 근원적인 나르시시즘에 가깝다는 점을 덧붙여둬야 할 것이다). 우울증에서 대상상실이 급격한 자아상실로 전환되는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울증적 주체에게 있어 나르시시즘적 동일시가 이뤄진 대상은 더 높은 임금, 더 많은 자산,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상품, 더 많은 사회적 관계, 더 많은 성과 구조위기의 국면에서 근본적으로 도달 불가능하거나 얻기 어려운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실 그것만이 현시점의 우울증적 주체에게 상상된 상실을 설명한다. 만일 이들 대상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면, 우울증은 발생하지 않았거나 상당 부분 경감되었으리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 삶의 재생산이 걸려있는 대문자 대상이며(라캉식 표현을 빌자면 주인기표’), 그런 한에서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의해 자연(nature)처럼 현상하는 욕망의 경로인 만큼 그에 대한 동일시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초탈을 강권하기보다 정신분석적 치료의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다.

결국 동시대 리비도 배분의 도관을 구성하는 심급의 차원에서 우울증은 앞서 살펴본 병리적 나르시시즘의 상호의존적인 짝패다. 우울증 그 자체가 기초적 나르시시즘의 한 표징이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병리적 나르시시즘에 동화되지 못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우울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요컨대 지금의 세계에는 과도한 자기애 속에서 타자를 내치고 모든 것을 거머쥐지 못한다면, 동일시했던 대상의 포기에 따라 자학 속에서 자아를 소멸시키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죽음충동의 강세: 강력범죄의 증가 추세와 혐오의 문제계

 

이들이 동시대 리비도 도관의 상류를 형성한다면, 그 하류에서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강화되고 있는 것은 죽음충동이라 해도 좋다. 죽음충동은 리비도의 궁극적 퇴행·긴장의 절대적 해소를 지향하는 충동인 바, 생명의 본원적 상태인 무기체로의 복귀로 나아간다. 이는 강박 신경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쾌락과의 표면적인 관련 없이 불쾌를 끊임없이 재상연하는 정신의 운동에서 관측되며, 에로스와 융합하여 사디즘·마조히즘 등 무해한 형태로 지양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대표적인 표현은 증오의 정동 혹은 자아와 대상을 향해 돌려질 수 있는 분해와 해체의 힘으로서 파괴충동에서 드러난다.[각주:28]

시대의 리비도 형세가 죽음충동에 의해 굴절되는 조건에 놓인다는 것은 사회 전반의 공격성이 증가하는 추세에서 확인된다. 한국의 경우 90년대를 기점으로 살인, 강도, 강간, 폭력, 절도 등 5대 강력범죄는 선형적인 증가 경향을 보여왔으며, 이전까지 유의미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았던 연쇄살인 역시 90년대 이후 1년에 1-2건씩 발생하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각주:29] 물론 5년가량의 짧은 주기로 보면 발달한 수사기법과 전자감독제도 등 반 경향을 만드는 억제요인에 의해 강력범죄가 억제되는듯한 착시가 생기지만, 30년가량의 긴 주기로 볼 때 강력범죄는 증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의 의도적 살인건수는 1990208건에서 점차 증가하여 1998378건에 달하고, 2009532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점차 하락하여 2020308건을 기록했다.[각주:30] 이는 파괴충동으로 발현된 죽음충동의 방출형태로 간주해도 무방하며, 이 증가 추세는 한국 구조위기가 심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이에 더해 2010년대 전반에 걸쳐 전 세계에서 문제적 개념으로 성립해온 혐오역시 죽음충동의 강화를 예증한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 죽음충동이 주재하는 정동은 증오이기 때문이다.[각주:31] 증오는 불쾌한 반복을 상연하는 외상성 신경증에서 (무능한) 자아를 향하거나, 사디즘과 파괴충동에서 대상을 향하며 죽음충동의 구조를 형성한다. 우리는 증오와 혐오 모두 생리적 반응을 동반하는 강렬한 거부감으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영어 ‘hate’로 번역 가능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혐오(증오)는 타자를 마주한 경험의 무반성적 수용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인바, 역사적으로 모든 학살과 전쟁은 혐오에 기대어 왔다. 허나 이방인에 대한 혐오(xenophobia), 동성애혐오(homophobia), 여성혐오(misogyny) 혹은 ‘-()’의 형태로 특정 다수 집단을 향한 혐오가 특히 동시대에 주목되고 부각되는 것은, 인간이 서로를 타자로 경험하는 빈도와 강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은 공동체의 위기이자 타자 조우의 경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능력으로서 이성의 위기로 나타나지만, 그 기저에는 자본주의 구조위기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이 자리한다. 그에 대한 상론은 나치의 유대인 혐오 이면에 대공황기로 알려진 1929-1945년 간의 (2)구조위기가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현재 반(anti)이민과 반이슬람주의를 내건 채 미국과 유럽 등에서 덩치를 불리고 있는 우파 정당들의 배경에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리비도의 고양을 위하여: 에로스의 장치로서 당(party)과 사회운동

 

지금까지 우리는 리비도 도관의 동시대적 형태로서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에 더해 이들 경향과 상호작용하는 죽음충동의 강화 양상을 살펴봤다. 이들 전부는 의미심장하게도 리비도의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퇴행을 제 조건으로 갖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병리들이 리비도 퇴행이라는 결과를 낳는 수준뿐만 아니라 리비도의 퇴행 자체가 상기한 병리의 토대를 놓는 지점 또한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의 리비도 퇴행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앞서 상론했듯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구조위기에 따른 대침체에 들어감으로써 생활세계와 삶의 재생산이 근원적인 불안정과 축소 국면으로 진입한 데 더해, 하나의 조건이 더 필요하다. 유토피아적 전망 혹은 미래의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어려움 자체는 리비도 퇴행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궁핍한 조건에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낙관 속에서 리비도를 고양해온 반례들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대상 리비도를 철회하며 퇴행에 접어든다. 세계로부터 퇴행한 리비도는 자아에 고착되는 바 그 자체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의 구조를 선취하며, 에로스의 쇠락에 따른 죽음충동의 상대적 우위를 보증한다. 미래의 상실에서 결정적으로 연원하는 리비도 퇴행은 개인의 생애주기에서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고원 현상(plateau effect)’등으로 나타나지만, 보다 심층적인 수준에서는 자본주의에 활력을 가져다줬던 계층상승 기대감의 소멸이나 대안 세계의 상실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구조위기와 역사적 사회주의로 표상된 유토피아적 전망의 상실은 실로 상호작용하며 리비도 퇴행의 필요충분조건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좋다. 신자유주의는 고용 유연화와 금융화를 통한 자산기반 축적으로 계층이동 가능성이 무망한 세계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대안 세계로서의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완전히 고삐를 푼 뒤로 그 위기 양상 역시 정점을 갱신해왔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무엇보다 광범한 기층 대중의 리비도 퇴행을 대가로 치른 셈이다. 그 퇴행의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연옥과도 같은 심리지리적 풍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리비도를 다시 세계로 향하게 할 것인가? 우리의 리비도는 어떻게 한갓된 신체와 자아 너머의 타자와 조우할 수 있는가? 타자를 향해 난사되곤 하는 반성되지 않은 공격성을 거두고 우리의 감각을 회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파괴충동으로서 손쉬운 분출구를 찾아 헤매는 즉자적 죽음충동을 거대한 체계를 향한 지속적이고도 이성적인 공격으로 지양해내는 길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들은 결국 에로스의 강화라는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에로스는 인간을 서로 결속하고 연결하며, 관계를 확장하고 연대하게 하는 삶의 충동으로서, 사랑의 정동에서 웅변적으로 나타나는 힘이다.

우리는 에로스가 찬란하게 피어난 몇몇 순간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계엄군에 의한 도시 전체의 봉쇄 속에서도 단 한 건의 강도와 절도 및 방화 없이 서로 주먹밥을 나누며 폭압에 맞섰던 1980년의 광주는 에로스로 충만한 절대적 사랑의 공동체를 창발시켰다.[각주:32] 여기서 우리해방을 바라는 인민 전체로 확장하고, 그 확장의 정도만큼 주변을 향하는 공격성은 거둬졌으며, 죽음충동은 역사를 전진시키는 동력으로 승화했다. 1871년의 파리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그 외 수많은 민중봉기는 그와 같은 순간들을 보여준다. 즉 억압에 대한 인식과 그에 맞선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한갓된 육신과 자아 너머로 확장하며, 그 목표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에로스는 활성화한다. ‘우리의 범주가 넓을수록, 공격의 대상이 당장의 기술적 조정으로 가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할수록 에로스의 강도(intensity) 역시 비례하여 강화된다.

그러나 에로스는 극적인 순간에만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리비도가 대상을 향하며 생산적으로 운용될 때, 거기에는 이미 일정하게 활성화된 에로스의 작용이 있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며 음식을 나누고 생각을 나눌 때, 그럼으로써 함께 있을 때, 그곳에는 에로스가 임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종교가 했던 역할은 때로 학살과 박해 등 무매개적인 죽음충동에 자리를 내줬던 과오에도 불구, 대개 일상 속에서 에로스를 강화하는 데에 있었다고 해도 좋다. 기실 칸트가 물자체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을 선언하며 신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차단하면서도 기독교 신자로서 영혼과 신 등을 규제적 이념으로 요청했던 것은 신적 질서에 복종하는 우리라는 표상을 떠나서는 리비도를 생산적이면서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할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신 이후의 세속종교로서 사회의 리비도 도관을 에로스의 상태로 돌려놓은 데에 있었다. 이 속에서 인간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토론하고 조직하며 실천하는 도정에 있었고, 광범한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거둔 채 그들 모두를 착취 받고 수탈당하는 동료로 인식했다. 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했던 동지라는 개념은 만국의 노동자로까지 확장된 우리를 명명하는 에로스의 결실에 다름아니었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결과적으로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현실화하고자 걸어갈 수 있었다.

우리의 시대는 다시금 그와 같은 에로스를 재건함으로써, 타자를 적으로 현상시키는 리비도 도관의 병리적 배치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구조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너머의 모델을 만듦과 동시에 우리의 감각을 회복하며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 것이 긴요하다. 축소되고 열화된 조건이라 해도 세속적인 집단성과 미래를 보존하고 있는 단위는 근대 이후 여전히 당(party)과 사회운동으로, 이를 떠나서는 에로스의 확장은 요원하다고 하겠다. 이 같은 지평에서 당과 사회운동의 공동체 내 자기의식을 성숙시키는 작업은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고 해체하며 공격하는 힘을, 통합하고 연결짓는 힘으로 돌려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암울한 세대가 자신의 신경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처방 역시 여기에 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엔 사랑을 해야하기 때문이다.[각주:33]

  1. 송국건·이지용·최종무·김정률, “이어령 한국사회를 말하다,” 『영남일보』, 2015. 10. 8. 제10면. [본문으로]
  2. 프랑스판 ‘N포 세대극단적 선택 잇따르는 까닭,” 시사저널1637, 2021. 2. 28. [본문으로]
  3. 예컨대 다음을 참고하라. “[만파식적] 탕핑족,” 서울경제, 2021. 6. 10. 여기서 서울경제 논설위원 한기석은 다음과 같이 쓴다. “탕핑족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는 희망도,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사토리세대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삼포세대오포세대가 있다. (...)청년들이 삶의 의욕을 갖게 하는 최상의 대책은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4. 공황(panic)은 경제위기(crisis)의 정신심리적 파급이 강조되는 용어로서, ‘위기와 사실상 동의어이다. [본문으로]
  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박승호, “구조적 위기와 순환적 공황: 21세기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연구14(2), 2017. ; 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김덕민 역, 후마니타스, 2014. 여기서 뒤메닐과 레비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확인된 신자유주의의 위기19세기 후반 이후 발생한 자본주의 역사의 네 번째 구조적 위기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6. “World Economic Outlook,” International Monetary Fund, October, 2023. 10. [본문으로]
  7. 죽음충동(Todestrieb)’이란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유기체를 무기체의 상태로 돌리려는 충동을 의미한다. 이는 공격성, 가학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나타나는 반복강박 등에서 유추되며,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타나토스(Thanatos)’로 맥락화된다. [본문으로]
  8. 프레드릭 제임슨은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하며 앤디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구두(1980)와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1886) 비교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정동의 쇠락을 읽어낸 바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임경규 역, 문학과지성사, 2022. [본문으로]
  9. 익히 알려져 있듯 프로이트는 영아가 사회화되기까지의 과정을 각 신체 부위에 대한 리비도의 집중 단계로 분석하는 심리성적 발달이론을 전개한 바, 이는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로 특징지어진다. [본문으로]
  10. 지크문트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박종대 역, 열린책들, 2020. 72, 235-236쪽 참고. [본문으로]
  11. 근친상간 금기는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억압의 대표적인 사례다. [본문으로]
  12. 다음을 참고하라. 지크문트 프로이트, “스물 두 번째 강의: 발달과 퇴행의 관점들: 병인론,” 정신분석 강의, 임홍빈·홍혜경 역, 열린책들, 2020. [본문으로]
  13. 이는 프로이트주의에 역사성과 통시성을 도입했을 때 펼쳐지는 지평이다. 프로이트의 초자아현실원칙’, 혹은 라캉의 상징계란 주체의 조건이자 주체에 기입된 사회의 화신(embodiment)인바, 이들은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 형세에 놓인 채 접두사 어떤-’의 수식을 받는다(‘어떤초자아, ‘어떤현실원칙 등등). 이 지점에서 역사유물론이 결합된 정신분석학의 유용함이 있다. [본문으로]
  14. 다음을 참고하라. 지크문트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역, 열린책들, 2020. [본문으로]
  15. 출산율출생률로 고쳐쓸 것을 제안하는 페미니즘의 비판은 타당한 측면이 있으나, 양자는 사회학 및 인구통계학의 분과 내에서 엄연히 범주가 다른 개념이라는 점을 적시해둔다. [본문으로]
  16. 프로이트의 용례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의 범주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자아 출현 이전 자타가 분별되지 않는 유아의 근원적 나르시시즘, 개체 보존에 관계하는 자아 리비도로서의 (평균적) 나르시시즘, 자아 리비도의 과잉으로 임상적 수준에서 병리성을 띠는 이차적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에 대한 간략한 개론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지크문트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서론,”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역, 열린책들, 2020. [본문으로]
  17. 위의 책, 55-56. [본문으로]
  18. 다음을 참고하라. “‘Situationships’: Why Gen Z are embracing the grey area,” BBC, 2022. 9. 2. 이 글은 “2020-2021년 학기 중 150명의 학부생들에 대한 인터뷰에서 미국 툴레인 대학의 리사 웨이드 사회학 부교수는 Z세대가 관계를 규정하길 주저하거나 심지어 관계가 진전되길 바라는 것을 인정하기조차 꺼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쓴다. [본문으로]
  19. 예컨대 다음을 보라. MedCircle, “Narcissism | What You MUST Know,” Youtube, 2022. 5. 17. ; 닥터프렌즈,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보다 더 위험한 나르시시스트! 바로 알아보는 법 | 나르시스트 특징,” Youtube, 2023. 8. 8. [본문으로]
  20. 지크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67-68.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21. 위의 책, 68. [본문으로]
  22. 위의 책, “슬픔과 우울증,” 244쪽 참고. [본문으로]
  23. 위의 책, 247-248. [본문으로]
  24. “More than 50,000 Americans died by suicide in 2023 more than any year on record,” NBC News, 2023. 12. 31. 한편 2023년 미국의 10만 명당 자살률은 14.9명으로 2000년의 10.4명에 비해 43퍼센트의 증가 추세를 보였다. [본문으로]
  25. “U.S. Depression Rates Reach New Highs,” Gallup, 2023. 5. 17. [본문으로]
  26. Weinberger, A. H. · Gbedemah, M. · Martinez, A. M. · Nash, D.· Galea, S. & Goodwin, R. D. “Trends in Depression Prevalence in the USA from 2005 to 2015: Widening Disparities in Vulnerable Groups,” Psychological Medicine, vol.48(08), 2017. 이에 따르면 2005년 당시엔 미국 성인 중 10명 중 2명이 삶의 어떤 국면에서 우울증을 경험했으며, 당해 우울증 유병률은 6.6%에 달한다. [본문으로]
  27. Ga Eun Kim · Min-Woo Jo & Yong-Wook Shin, “Increased Prevalence of Depression in South Korea from 2002 to 2013,” Scientific Reports, vol.10, 2020. ;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 2021,” 국립정신건강센터, 2022. 133. [본문으로]
  28. 지크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자아와 이드,” 388쪽 참고.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불쾌의]반복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죽음충동자아와 이드”(1923),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1924), 문명 속의 불만(1930) 등을 거쳐 점차 파괴충동과 공격성을 축으로 정리된다. [본문으로]
  29. 최인섭, 주요 국가의 강력범죄 발생추세 비교분석,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04. 129-130. ; 권태연·전새봄, “한국의 강력범죄 발생 추이 및 통제 요인 연구,” 한국데이터정보과학회지27(6), 2016. 1513. [본문으로]
  30. 의도적 살인 건수 및 수감자 수(OECD회원국),” 통계청, 2023. 10. 5. 2020년의 수치는 1990년으로부터 약 48% 증가한 값으로,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19%)을 감안하더라도 높은 수치다. [본문으로]
  31. 지크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390쪽 참고. [본문으로]
  32. 다음을 참고. George Katsiaficas, “The Eros Effect,” Paper prepared for ASA National Meetings, 1989.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본문으로]
  33. 지크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6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