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riticism

화이트 큐브의 종언과 ‘컬러풀 홀’로의 이행: 동시대의 미술관은 무엇을 꿈꾸는가

by 정강산 2023. 11. 30.

(부산시립미술관 《과거는 자신이 줄거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2023.9.26-12.17) 전시 연계 비평프로젝트 [미술관과 그 친구들]에 선게재됨) https://www.bma.reviews/

 

미술관과 그 친구들

 

www.bma.reviews

 

 

화이트 큐브의 종언과 컬러풀 홀로의 이행: 동시대의 미술관은 무엇을 꿈꾸는가

 

 

 

정강산

 

관리되는 세계에 의해

완전히 주조되지 않은 사람만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다.”

 

-T.아도르노

 

 

20224,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 <나는 미술관에 OO 하러간다>는 휴양공간으로서 미술관을 전면에 내걸었다. 전시 자체가 예술을 즐기는 공간이자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여가를 탐문하는 공간을 표방한 만큼 각종 관객 참여형 프로그램이 핵심이었다. 전시장 내 요가, 체조, 명상, 강연 등이 이뤄지는 공간이 할당되어 전시 기간 내내 가동된 것이다. 더불어 전시 도입부에는 선우훈 작가의 <시험시간>(2022)이 배치되어 관객들이 여가활동 추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전시 동선의 끝에는 무용가 안은미의 <자화자찬>(2022)과 함께 자화자찬의 공간이라는 구역이 마련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자기 성애적 침잠을 유도했다. 윤필남, 이우환 등 몇몇 작품이 걸려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작품이 차지하는 맥락은 주변적이었다. 달리 말해, 여기서 작품은 적당한 배경 정도로 밀려난 반면, 엔터테이너(entertainer)로서의 미술관 모델은 전면화되었다. 또한 전시에선 모종의 기능 요구에 대한 미술관의 화답이 두드러졌는데, 예컨대 전시를 관람한 뒤 갖게 되는 심상은 어떤 적성검사에 참여했다는 감각, 혹은 각박한 사회에서 상처받은 자아를 치유할 것을 권하는 뉴에이지 힐링센터에 다녀온 듯한 감각이다. 이는 명확한 기능을 떠맡길 거부하는 데에서 존립 근거를 찾았던 근대적 미술관과는 사뭇 다른 공간을 시사한다.

 이 같은 흐름은 20209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전시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에서 선취된 풍경이기도 하다. “철저히 인간 위주로 구축된 미술관이 과연 타자와 비인간(non-human)을 고려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며 “‘소중한 타자성을 확산시키고자 한다는 전시 서문의 행간 너머에는, 개를 끌고 산보하며 여가를 보내는 이들을 위해 엔터테이너화된 미술관이 있었다. 전시는 반려견의 시선에 맞춘 작품설치에서부터, 반려견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반려견 스케일의 의자와 구조물 등으로 점철되었고, 관객들에게 배변봉투가 배부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도 개개의 작품은 사실상 배경으로 밀려난다. 더불어 기능 요구에 대한 미술관의 적극적인 응답을 발견할 수 있는바, 그것은 견주들의 실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반려견 카페의 기능이라 할 법한 것이다.

 

 

미술관의 엔터테인먼트적 전회: 대중화, 오락화, 기능화

 

위 두 사례에서 우리는 동시대의 미술관이 고급형 디즈니랜드와 같은 공간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관측할 수 있다. 이 같은 전환은 보편적인 과정이다. 영미에선 일찍이 80년대 중반부터 미술관이 재활시설, 유흥시설, (...)찻집과 같은 다른 기관과 매우 유사하게 기능한다는 관측이 나온 바 있다.[각주:1] 이에 더해 뉴욕현대미술관(MoMA), 브루클린 미술관, 루빈 뮤지엄(Rubin Museum of Art), 크리거 뮤지엄(Kreeger Museum), 대영박물관 등 미국과 유럽의 주요 미술관들은 2010년대 중후반부터 상설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들 요가 프로그램은 많은 경우 멤버십 제도와 결합하여 오프닝 리셉션 참가, 음악 공연 관람, 각종 강연과 체험형 워크샵 참여 등과 함께 패키지로 제공된다.

 그렇게 동시대의 미술관은 명실상부 작품 아닌 것에 집중하며 복합 엔터테인먼트가 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미술관의 대중화, 오락화, 기능화로 요약할 수 있다. ‘대중화란 쉽고 평이한 내용과 형식을 지향하는 경향이고, ‘오락화는 즐길만한 것, 지루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며, ‘기능화란 특정한 체험과 이벤트를 대리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왜 그럴까? 여기엔 미술을 둘러싼 주/객관적 요인의 변화가 자리한다. 요컨대 미술관의 엔터테인먼트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동시대의 주체로서 큐레이터, 작가, 관객의 변화를 살피고, 그에 따른 작품의 변동을 관측하며, 미술관의 운영 메커니즘이 변화하는 상황을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 주체의 모습은 어떠한가? 일찍이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이 지적했듯, 소비사회는 내부지향적 주체를 기각하고 그 자리를 타자지향적 주체로 대체해왔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 단계의 내적 귀결인 바, 영미와 서유럽 등은 1950-60년대, 일본은 1970-80년대, 한국은 1990-2000년대 전반에 걸쳐 소비사회의 도래를 맞이했다. 그러한 사회적 전환과 불화하는 내부지향적 주체는 전근대 공동체의 관습/규율과 무관하게 내면의 독립적인 신념과 가치를 지향하는 군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이들은 근대문학을 작동시켜 온 주체이기도 했다. 그를 대체한 타자지향적 주체는 내면과 무관하게,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고 흔들리는 군상이다. 이들의 욕망과 자아상은 소비사회의 다채로운 상품 기호에 의해, 혹은 매스 미디어상의 여론과 문화산업에 의해 철저히 대리되고 규제된다. 타자지향적 주체가 편재함에 따라, 세계와 합일되지 않는 고유한 내면을 가진 주체의 갈등을 형식화했던 근대문학이 자취를 감추고 어떤 부정, 거부도 없이 유유자적 세계를 부유하는 무갈등의 군상을 묘사하는 포스트모던 문학이 나타난다. 고진이 보기에 여기서 문학은 오락과도 같은, 대중적이지만 무해한 여가 거리가 된다.

 

 

거세된 화이트 큐브(white cube)와 컬러풀 홀(colorful hall)

 

우리는 이 같은 과정이 미술에서도 관측된다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다. 상품과 서비스로 포화된 세계에서, 휘황찬란한 스펙터클에 매개된 균질한 욕망이 주인기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근대 특유의 내면지향성이 세계와 불화하며 만들어낸 급격한 거리감을 조건으로 갖는 모종의 반성적 공간, 비판적 감상의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무해하고 친근한 일상의 기능들이 그 자리를 파고든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기관이 커피 강습에 나서고 라이브 음악 공연, 파티 등에 매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미술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텔레비전과 개인용 컴퓨터를 넘어 이제는 스마트폰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급되는 문화산업의 이미지 십자포화를 뚫고 관객들을 미술관에 입성시키고자 한다면, 정적인 감상이상의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정동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미술()을 작동시켰던 내면은 사라지고, 타자지향의 유희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제 작품을 감상하러 미술관에 가는 이들은 점차 소수가 된다. 감상하고 반성하며 침잠할 내면을 갖지 않는 동시대의 주체들은 미술관을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둔 자기 현시를 위한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일찍이 자신의 에세이 후기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논리를 통해 이 같은 현상을 감지한 바 있다. 당시 크라우스는 미니멀리즘이 감상이 아닌 체험에 방점을 두고 있는 데에서 즉자적 신체의 현전을 읽어내곤, 이를 상품의 수열적 연쇄가 지배하는 후기자본주의적 생활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보상행위로 간주했다.[각주:2] 동시대에서 이는 2000년대 이후로 가속화되어온 작품의 포토존화라 할법한 현상으로 관철되고 있다. 미술관에는 작품이 있다기보다, 작품을 감상하는 를 타인들의 수열 속에서 확인하는 자기 성애적 과정이 있다. 이는 타자지향적 주체가 자신의 소외된 경험을 보상하는 방식이다. 휘발되고 말, 그러나 즉각적인 자기 현시의 감각으로 강력한 쾌락을 보장하는 타임라인 상의 셀피(selfie) 뒷편으로 모든 작품은 명멸한다.

 오늘날의 관객성은 바로 이 같은 주체성 위에 서 있다. 큐레이터 역시 이러한 주체성의 자장 내에서, 근본적으로 이 같은 주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 큐레이터는 사유할 여력이 없는(혹은 사유와 같은 것을 강력한 의미에서 원하지 않는’) 대중들을 위해, 자기 현시의 수단으로 소급되는 이벤트를 제공하는 업무를 부여받는다. 이 같은 업무는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라는 기표 하에 추진되지만, 그 행간에는 더 무난한 오락거리와 더 세련된 포토존의 공급이라는 기의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부산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서도 확인되는바, 개개의 작품은 점차 그 자체 내밀한 가치와 아우라를 가진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어떤 체험을 위한 구실이나 배경으로서 동원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물론 작가 또한 이 같은 체제에 적극 가담한다. 많은 경우 작품은 미술기관의 의뢰나 기금 주기에 따라 준(semi)-정기적으로 이뤄지는, 그때그때의 구색에 부합하는 즉흥적인 조합물로서, 관성적으로 생산된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 한 채 정물화 한점을 완성하고자 6년의 시간을 쏟아붓거나 사전 작업을 100회 이상 시도했던 세잔의 결의와 같은 것은 사라진다. 동시대에서 세간의 평가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n년의 시간은 시시각각 갱신되는 이벤트의 행렬 속에서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간의 여론이 향하는 주제를 따라 관심사를 재빠르게 전환하며, 기관의 사업주기에 따라 하나의 작업에 1년 이상 매진하지 않는 속전속결의 작업방식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작가는 이벤트의 하도급 업자로서, 행사 취지에 부합하는 부품을 제공하거나 셀카봉을 든 관객의 산보를 위한 적절한 배경을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반성과 감상을 위한 초월적 공간으로서 상정된 전통적인 화이트 큐브와 같은 것은 모더니즘의 종언과 더불어 과거의 모델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포스트모던한 소비사회 속 동시대의 미술관은, 내면적 침잠을 위해 순백의 공간과 작품 이외에 모든 세속의 흔적을 비워내고자 했던 화이트 큐브를 가뿐히 초극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산만함(distraction)으로 무장한 채 세속의 모든 기능을 끌어들이며 적극적으로 관객을 호객하는 컬러풀 홀(colorful hall)’이다.[각주:3]

 

 

동시대 미술관의 정치적 무의식: 입장객통계

 

컬러풀 홀로서의 미술관을 지탱하는 논리의 5할이 주체성의 변화에서 기인한다면, 제도적 수준의 전환은 나머지 5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좋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흐름을 공조하고 관장하는 국가장치 또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부와 미술관이 맺는 동시대적 관계를 살펴야 한다. 요컨대 지자체(지방정부)는 중앙정부로부터의 예산 확보와 기업투자를 최우선으로 둔 채 작동한다. 이때 관광객 유치는 지방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명확한 성과이다. 이에 따라 지자체는 국가승인통계인 주요관광지점 입장객통계를 통해 대상지를 등록하고 방문객을 집계하여 중앙부처(문화체육관광부)로 보고한다. 주요관광지점 입장객통계는 지역에 대한 국가예산/민간자본의 투자를 어필할 수 있는 지표로서, 이를 충족시키고자 시장, 도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은 상이한 기관들을 관광지점으로 소급시켜 성과를 요구한다.

 그로써 지자체는 관광지점 신규등록에 사활을 걸고, 각 관광지점은 방문객 유치에 사활을 건다. 동시에 점차 지역 내 예산 배분을 둘러싸고 랜드마크식 체험형 관광지들이 급증한다. 그리하여 안동의 유교랜드, 진주의 논개제, 보령의 머드축제, 화천의 산천어 축제 등이 경합한다. 최근 문제가 된 새만금 잼버리나 강원도의 레고랜드도 그 일부다. ‘관광지점중 하나로서, 국공립 미술관의 전시행정 역시 이 한복판에 서 있다. 오늘날 모든 미술기관의 무의식에는 입장객통계로 귀환하는 관객 동원에의 압력이 놓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관의 텔레비전화(televisionize)라 할법한 현상을 야기한다. PD들이 자신도 모르게 추상화된 시청률의 규제 하에서 움직이듯, 큐레이터는 부지불식간에 입장객통계의 허용 범위 내에서 충실하게 운동한다. 국공립 기관뿐 아니라 여타 예술지원재단의 기금이 수혈되는 곳도 이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일찍이 기금 신청단계에서 기대효과와 같은 항목을 작성하며 대중적 흥행에 대한 어필과 서약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미술관이 쉽게(대중화) 즐길만한(오락화) 이벤트와 체험(기능화)을 제공하는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작금의 주요관광지점 입장객통계는 1974관광객 이동현황 보고라는 이름으로 최초 시행되었다. 그러나 당시엔 투명한 계측 수단이 없어 통계 실효가 떨어질뿐더러 군사독재 시기인 만큼 치안행정을 위한 단순보고에 그쳤다면, 2003년 관광지 이용객 실측·집계 방법 개선 이후 이듬해 관광지 방문객 보고통계로 명칭을 변경하며 점차 과학적인 지역투자 지표로 거듭나기 시작한다.[각주:4] 여기서 우리는 지역투자 유치와 관련된 국가장치가 2000년대 초반에 정비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법리상의 지방자치가 문민정부를 거쳐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과도 관련된다.[각주:5] 그러나 공교롭게도 2000년대 초반은 한국의 소비사회/포스트모더니티가 문제의 ‘90년대를 거쳐 완성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달리 말해, 자유주의적 국가 체계가 형성한 심화된 제도와, 소비사회로의 전환이 야기한 주체의 등장 시점은 이렇게 한 시간대에서 포개진다. 여전히 지속하며 심화되고 있는 이 시간대야말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컬러풀 홀로서의 미술관의 조건이다.

 

 

관리되는 세계, ‘컬러풀 홀너머의 미술관

 

결국 이 모든 전환의 이면에는 관리되는 세계의 심화라 할 법한 현상이 놓여있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관리되는 세계는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비합리의 세계다. 앞서 지적한 바 중앙정부의 예산과 기업투자 유치를 위한 지역 간 각축과 관광지점들의 경합은 발전된 통계 기법과 계측 수단을 통해 과학적 체계를 갖춘 채 그 어느 때보다도 합리적으로 이뤄진다. 한정된 재원의 분배가 인구학적으로 추상화된 인간의 양적 집계로 판가름 나는 것은 합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합리성은 즉자적 대중욕망의 기호(favor)를 추구하게 함으로써 미술관을 급진성을 탈각한 기능적 테마파크로 열화시키고 있다. 또한 이 합리성은 큐레이터와 작가, 전시와 작업을 기관의 사업주기 및 기금 수급을 위한 지표에 종속시킴으로써 예술 생산의 종별성을 지우고 있다. 그로써 미술장(field) 내 모든 행위자의 움직임은 촘촘한 제도적 규칙에 의해 매개되고, 과거 유럽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나 한국의 민중미술이 보여줬던 미술 자체의 생명력과 폭발적인 자생성은 불모가 된다. 이는 합리성의 비합리라 할법한 것이다.

 더불어 동시대 소비사회의 작동방식 역시 지극히 합리적이다. 소비사회란 전 지구적 분업과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이 재화 전반에 대한 접근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상품의 촘촘한 사슬이 사회 전반에 편재하는 사회인바, 상품의 이동 경로가 훑고 지나가지 않은 지구의 좌표계를 찾을 수 없는 세계이다. 이 속에서 상품은 과학적 분석과 계측하에 촬영, 선전, 진열될 뿐만 아니라, 더 없이 체계적인 유통망을 거쳐 공급된다. 무궁무진하며 다채로운 상품이 언제 어느 때나 전광판으로, 옥외 현수막으로, 팜플렛으로, 텔레비전으로, 전자 메일로, SNS로 모습을 비춘다. 거의 모든 곳에서 언제나 원하기만 한다면 특정한 재화를 취할 수 있는 세계는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합리성은 한때 예술이 선점했던 감각장(field)을 상품과 문화산업으로 포화시켜 주체의 욕망을 전유하고, 상품 기호의 위계적 수열에 주체의 자리를 봉인했다. 내면을 잃은 주체는 온전한 의미에서 주체라기보다는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가 지적했던 바의 동물에 가깝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주체는 기본적 욕구가 만족되어 자연/사회를 향한 투쟁을 중단한 날것의 신체로 전락한다. 그로써 미술관은 자체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같은 신체에 감응할 즉자적인 강렬함의 정동을 이끌어내는 이벤트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 또한 합리성의 비합리이다.

 관리되는 세계의 심화는 결국 자본주의적 세계의 완고함을 가리킨다. 동시대 미술관의 헤게모니적 모델인 컬러풀 홀을 지양하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와 매개된 국가장치와 주체화 양식을 동시에 뛰어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델 또한 역사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무언가로 자연스레 이행하리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중세를 아울러 미술관은 제후와 귀족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격리된 사적 공간이거나, 교회와 수도원의 보물창고였다. 이 시기 작품은 특권을 표지하는 진귀한 장식이거나 신성을 품은 성물에 가까웠다.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근대적 미술관은 계몽주의적 기치하에 시민의 문화적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이 시기 작품은 자율적인 감상의 대상이자 세계의 흔적을 품은 알레고리적 대상이었다. 그리고 소비사회 혹은 후기자본주의로의 전환기를 거쳐 동시대의 미술관은 다수대중에 영합하고자 면밀한 수요조사를 동원하는 체험형 컨텐츠의 공장이 되었다. 여기서 작품은 엔터테이너 기능을 제공할 우아한 조립품이거나 적나라한 신체의 현전을 보증할 배경 이미지이다. 머지않아 역사는 그 너머를 보여줄 것이고, 급진적인 이들은 컬러풀 홀 이후의 미술관 모델을 창안하고 열어젖히려 할 것이다.

 이때 시대의 장막을 찢고 다음 장을 간취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이념과 그것을 구현할 조직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한국의 비판적 리얼리즘 등이 한때 미술의 정체(jam)를 깨뜨리고 각자의 시공에서 미술사를 견인했던 것은 세계의 논리와 급격히 불화하는 규정적 이념과 집단적 실천으로 가능했다. 그 같은 조직적인 예술적 실천이 감각장 속에서 갖는 힘은 정치적 장에서 (party)’이 갖는 파급에 비견되어도 좋다. 요컨대 미래의 미술()은 언제나 당과 같은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온갖 난관과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급진적 비전을 공유하는 작가와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지속적으로 공동의 기획을 생산할 때, 미술의 논리는 재편되고, 어쩌면 미술관은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며 역사를 선취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1. Nelson Goodman. “The End of the Museum?” The Journal of Aesthetic Education. Vol. 19, No. 2, Special Issue: Art Museums and Education (Summer, 1985), pp. 53-62. 여기서 굿맨은 옳게도 때로 미술관의 행태와 미술관 문서들을 보면 미술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를 통과하는지가 중요한 프로 야구장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본문으로]
  2. Rosalind Krauss. "The Cultural Logic of the Late Capitalist Museum." October, Vol. 54 (Autumn, 1990). pp. 3-17. 한편 클레어 비숍(Clare Bishop)은 여기서 개진된 크라우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들 새로운 유형의] 갤러리에서 관람객은 고도로 개별화된 예술적 통찰보다는, 공간에 대한 행복감을 먼저 경험한다.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Clare Bishop. Radical Museology: Or, What's 'contemporary' in Museums of Contemporary Art?. Koenig Books, 2013. p. 5. [본문으로]
  3. 직역하면 형형색색의 오락실,’ ‘다채로운 연회장정도의 의미가 된다. [본문으로]
  4. 이는 이후 더 체계적인 개량을 거쳐, 2012년에는 해수욕장 등 집계가 불명확한 관광지점은 통계 대상지에서 삭제되기에 이른다. ‘주요관광지점 입장객통계로의 명칭 변경은 2013년에 이뤄졌다. [본문으로]
  5. 1987, 민주화의 여파로 군사독재 시절 유예되었던 지방자치 재건을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8년 지방차치법 일체가 개정된 데 이어 1991년의 기초의원 선거와 광역의원 선거를 통해 30년 만에 지방자치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명목상의 지방자치는 단체장 선거가 있었던 문민정부 집권기인 1995년에 공식 출범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