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힘 전시 <눈부신 멀미와 흐릿한 지도>(2024.11.5-12.1)에 설치된 글.]
정강산
가속주의의 멜랑콜리
2013년 이후, 윤리적 정념이 넘치는 텍스트 <가속주의 정치를 위한 선언>과 함께 ‘가속주의(accelerationism)’라는 개념이 전 세계의 독서 대중을 휩쓸었다.1 그 전까지 그 개념은 그다지 균일한 용례를 지니진 않았다. SF작가 로저 젤라즈니(Roger Zelazny)의 소설 <빚의 군주(Lord of Light)>(1967)에서 과학기술을 독점한 지배계급에 맞서 과학을 촉진하려는 세력의 이념으로 제기된 후, 2010년 비판이론 연구자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에 의해 ‘자본주의 내 특정 역학을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해) 가속하길 제안하는 68혁명 직후 나타난 프랑스 철학의 조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맥락화 된 바 있던 정도였다.2 또한 ‘가속주의’라는 개념으로 표명되지는 않았으나 영국 워윅 대학교의 원생들을 기반으로 한 일단의 연구그룹(CCRU; 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에서 활동했던 닉 랜드(Nick Land)의 작업들 역시 사후적으로 가속주의의 성좌 한구석을 배정받는데, 이는 그가 90년대부터 2000년대 전반에 걸쳐 디지털 컴퓨팅 기술을 위시한 사이버네틱스의 편재-포화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될 탈인간적 세계의 가능성을 탐닉하며 인간 주체의 종별성을 위악적으로 용해시키길 추구했던 데서 기인한다.3 그러나 이 무렵까지 분석적이고 서술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가속주의’가 가능한 주체화의 한 경로이자 생산적이고도 논쟁적인 프로젝트로 성립하게 된 데는 <가속주의 선언>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그려진 가속주의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가속주의자들은 잠재적인 생산력을 해방하길 원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플랫폼은 파괴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재활용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술의 진화 과정을 가속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아니다. 기술유토피아주의자들이 가속이 자동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속을 주장한다면, 우리의 입장은 기술이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는 데 필요하기에 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이든 포스트(post) 자본주의적 계획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산, 금융, 물류, 소비의 물질적 플랫폼들은 포스트 자본주의 목적을 향해 재프로그래밍되고 재초기화될 수 있으며, 이내 그렇게 될 것이다.”4
이를 통해 가속주의의 의미는 한결 선명해졌는데, 생존을 위한 사적 자본들의 각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달되는- 자본주의 특유의 과학·기술·경영의 거침없는 진화가 이행을 위한 생산력 발전의 잠재태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 전유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그 요체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 그 자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를, 자본주의 하 기술 발전의 속성을 중심으로 재서술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특정한 과학·기술을 널리 보급하는 것, 그것의 독점을 막는 것, 그 같은 기술을 좌파의 정치적 프로그램(생산수단에 대한 민주적 통제 및 민주적 생산·분배 등)에 결합해 내는 것 등은 가속주의의 내용이 될 수 있다.5 그렇다면 담론으로서의 ‘가속주의’의 가능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조건에서 가속주의는 이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1970년대 이후 전 세계를 집어삼킨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의 파고에 이어 1991년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하에서 좌파의 영혼이 오랜 절망을 겪어온 배경이 있다. 그전까지 가속주의는 전면에 대두될 필요 없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로서 잠재돼있었다. 달리말해 좌파에게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전망, 전략이 존재할 때 ‘가속’은 자본주의의 급진적인 잠재적 속성으로 이해될 따름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이 공산주의의 조건이 된다는 마르크스의 사유6, 후진적 소농 경제의 기반을 허물고 공산주의로의 도약을 위해 현대화된 산업기반을 요청한 레닌의 전기(electronic) 공산주의론7, 국유화된 기업들과 중앙 정부 시스템을 컴퓨터로 연결하여 빅데이터에 기반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구축하려 했던 아옌데의 사이버신(Cybersyn) 프로젝트8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바, 여기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전유는 다만 계급투쟁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조건으로 사유되고 있다. 그러나 가능한 대안이 스러진 뒤 비전과 주체가 부재한 채- 공고해진 자본주의만이 소여로서 주어지게 되었을 때, 좌파는 그 같은 폐허 속에서 역설적인 반전을 발견하는 데로 기운다.9 배면에 있던 조건이 실체화되는 것이다. 가속주의 담론의 주석가 로빈 맥케이(Robin Mackay)의 진술은 이 같은 진실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가속주의는 비관주의를 거스르기 위한 장치다. 활용되지 않은 가능성을 생각하면, 현재에 관해 덜 우울할 수 있다.”10
요컨대 암울한 초기자본주의에 생시몽(Saint Simon)·푸리에(Charles Fourier)·오언(Robert Owen) 등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 구상들이 제기됐듯, 침체된 좌파적 실천의 토양 위에서 이성은 현실보다 앞질러 나가 희망 섞인 거대한 청사진을 필요로 했고,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직전의 금융위기를 수습하면서도 건재함을 알린 2013년경 가속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호명된 배경이 된다. 좌파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계급 전선 역시 희미해져 발디딜 곳 없는 폐색감이야말로 예의 선언이 나온 직후 폭발적인 호응을 설명하는 셈이다. 그것은 거친 형태로나마- 주어진 기술적 조건을 전유하기만 하면 도달 가능한 유토피아적 전망이 좌파의 프로그램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환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정치적 운동이 수렁에 빠져있는 조건에서 앞서 나간 비전의 한계는 명확했다. <가속주의 선언>은 좌파적 프리즘으로 ‘가속’의 의미를 소급해낸 강력한 시도였으나 결코 그 기의를 독점할 수 없었다. ‘가속’을 수행할 1차적 주체가 이미 사적 자본과 경쟁 동학으로 구성된 시점에서 당파성은 거세되고, 주체의 개입 공간은 최종심급에서 자본 자체에 붙들린 채 모호함 속에 침잠해야 했기에- 가속주의는 그 출발에서부터 여러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분기할 운명을 내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가속주의는 예의 <선언>이 명료화시킨 의미가 무색하게도, 자본주의적 역학의 모순과 속도를 그 내재성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심화하거나, 과학 기술을 탐닉하며 그것이 유발한 소외를 전도된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범 미래주의적 사유들이 난립하는, 전장과도 같은 기표가 됐다. 아래 적시한 사례는 그 개념이 지닌 가능성과 더불어 혼란을 증언한다:
가속주의에 주체를 기입하려는 시도에 맞서 탈주체적인 ‘과정의 가속’과 ‘양성 피드백(positive feedback)’ 과정 자체를 가속주의의 본령으로 내세우며 반실천(antipraxis)을 주문하는 무조건적 가속주의(Unconditional Acceleration)11 인공지능(AI) 기술의 무제한적 혁신을 필두로 일체의 규제와 제약을 제거하고 ‘의식의 진화’를 촉진하길 촉구하는 실리콘밸리 매파의 이데올로기인 ‘효율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12, 트랜스 여성성(trans femininity)이 동시대의 기술자본을 전유하여 ‘거세’를 결핍이 아닌 생산으로 의미화함으로써 여성성을 긍정하면서도 남성성의 재영토화를 막는 방식으로 가부장제를 내파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젠더 가속주의13, 이민자들에 의해 유럽에 파국이 닥쳤다고 주장하며 폭력적 수단을 통해 인종간 분쟁을 심화함으로써 백인 민족국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극우 가속주의14. 상품/자본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었던 노예제 자본주의 초기의 흑인성에 내재한 비인간성이야말로 가속주의가 자신의 운동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비인간적 주체의 모습임을 강변하는 흑인가속주의(blaccelerationism)15 + etc.
‘감속’의 전위부대로서의 탈성장
이 같은 가속주의 자체의 모호함에 더불어, 2010년대 후반기에 걸쳐 기후위기로 표상되는 생태위기의 감각이 편재하게 된 까닭에서 담론장을 뜨겁게 달궜던 때가 무색하리만치 대세가 ‘감속’으로 기운지도 꽤 됐다. 이때 감속이란 자연을 경제의 ‘외부’로 상정하는 경향에 대한 반대이자 어떤 방식으로든 과학기술에 인류가 처한 위기를 돌파할 역량이 있음을 부정하는 회의론이며, ‘탈성장’ 등 생태주의 정치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개빈 뮬러(Gavin Mueller)는 이 같은 감속을 좌파 정치의 본령으로까지 격상시킨다:
“(...)나는 급진적 좌파가 감속주의 정치(decelerationist politics)를 내세울 수 있고 또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변화를 늦추고, 기술적 진보를 침식하며, 자본의 탐욕을 제한하는 한편으로 조직을 발전시키고 전투성을 함양하는 정치다. 월마트나 아마존이 전 세계를 장악하게 두는 것은 착취적인 생산 및 유통 모델을 더욱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원을 반동적인 억만장자들에게 흘러가게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해 세금 감면, 학교 민영화, 동성 결혼 반대와 같은 보수적 대의를 지원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상대적 위치를 더욱 약화시킨다. 기술이 그 흐름대로 나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평등한 결과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초부유층은 남은 우리들에 대한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종말 이후의(postapocalyptic) 벙커, 무장된 요트, 개인 섬, 심지어 우주로의 탈출에 그들의 자원을 소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속주의는 단순히 느린 삶의 속도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머지를 대가로 한 엘리트들의 진보에 대한 적대감의 표명이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의 비상 브레이크이며, 톱니바퀴에 던져진 렌치다.”16
여기서 가속은 벤야민에게 “지배자들의 역사”로 비판되어온 “진보”와 동일시 되며, 감속은 자본주의적 시간의 폭주를 멈추는 역사철학적인 기획으로 성립한다. 뮬러와 마찬가지로 감속주의를 주창하는 마리솔 코르테즈는 생태운동의 구호로서 감속주의를 제시하며 이를 탈성장과 동일시한다.17 그 연장에서 가속주의적 경향에 관해 이런저런 이유로 (기술 발전을 통해 성장과 환경적 외부효과 감소를 동시에 이뤄낼 수 있다고 간주하는) 에코모더니즘과 동류 취급하며 비판적 주해를 다는 것은 명실상부 동시대 지식장의 유행이 됐다.18 동시대 헤게모니적 담론이 된 생태주의의 진보적 공통감각이 탈성장으로 좁혀지는 국면에서 가속을 외치는 것은 자살행위처럼 보일 정도다. 대세는 감속이며, 여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게토화된 한 줌의 ‘진보좌파’ 풀을 벗어나면, 여전히 탈성장조차 급진적으로 보일 만큼 성장지상주의가 득세하는데 이는 그 담론이 함의하는 갈급함에 비해 좀처럼 저변을 넓히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뜻한다.
나는 여기서 가속주의가 외려 의도치 못한 지점에서 탈성장 등 감속주의의 제 요인들과 포개어지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대다수 독자에게 아이러니로 다가올 사고실험을 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감속의 강력한 근거로 작용하는 탈성장을 해부할 필요가 있다. 탈성장은 1972년 생태사회주의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에 의해 지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가설적 개념으로서 개진된 이후19 엔트로피 개념을 응용하여 천연자원의 고갈을 분석한 경제학자 니콜라스 조르제스쿠-로겐(Nicholas Georgescu-Roegen)의 선집 제목으로 제시된 바 있다.20 그러나 그것이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성립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반(anti)성장주의 성향의 프랑스 생태운동과 결합하면서부터다. 이 무렵부터 탈성장은 안티 광고(anti-advertising),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지역 농업, 환경- 운동들이 확립하고 참조하는 공동 전략이 됐으며, 이내 2008년 이후 격년으로 국제회의를 주관해온 ‘연구와 탈성장(Research & Degrowth)’ 등의 씽크탱크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 스펙트럼은 생태주의자에서부터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를 넓게 아우르며, 단일하고 일관된 프로그램으로 소급되지 않는 느슨한 담론이지만, 개념 자체에 적시되어 있듯 대개 탈성장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인 성장지상주의가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왔다고 간주하며, 따라서 생산력 발전과 소비주의를 배격하는 새로운 지표로 경제 전 영역을 재구조화하길 요청한다. 또한 자연 대상의 절대적 희소성과 지구의 생태수용력(biocapacity)의 한계를 강조하며 급진적인 수요감소를 세부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만큼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담론과도 거리를 두며, 구체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으로 소급되지 않는 사회적 지표(행복지수, 건강지수, 불평등지수 등) 및 생태적 지표(온난화지수, 삼림파괴지수, 오염지수 등)에 따른 경제운영과 협동조합, 유기농업, 지역 화폐, 재생에너지, 탈핵, 탄소세 부과, 투기 제한, 최고임금제, 기본소득, 장거리 여행·무역 제한 등의 정책이 있다.21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의 제안은 이 같은 복잡다단한 탈성장의 논리적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자율적인 탈성장 사회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거대한 변화는 서로를 강화하는 상호 보완적인 여덟 가지 변화들의 체계적이고 야심찬 연결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여덟 가지 ‘R’의 ‘선순환’으로 통합될 수 있다: 재평가(re-evaluate), 재개념화(reconceptualize), 재구조화(restructure), 재분배(redistribute), 재지역화(relocalize), 감소(reduce), 재사용(reduce), 재활용(recycle). 이 상호 의존적인 여덟 가지 목표는 침착하고 쾌활하며 지속가능하게 될 탈성장 과정을 촉발할 수 있다.”22
여기서 ‘재평가’는 근대성을 형성해온 “낡은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으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관성에 대한 재평가, 이타심에 앞서온 이기심, 협력에 앞서온 경쟁, 여가의 즐거움에 앞서온 노동에의 집착, 사회적 관계에 앞서온 소비주의, 지역에 앞서온 세계 등에 대한 재평가를 의미한다. ‘재개념화’는 “부와 빈곤의 개념을 재정의/재측정”하고 “경제적 가상이 근거하는 결핍/풍요라는 지독한 개념쌍을 해체”함으로써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는 작업이다.23 ‘재구조화’는 앞선 가치의 변화에 조응하도록 “생산적 장치와 사회적 관계”들을 조정하는 일이고, ‘재분배’는 북반구 및 상층계급 중심의 글로벌 소비 계층의 부를 줄임으로써 지정학적이고 계급적인 생태부채를 청산하는 실천이다. 한편 ‘재지역화’는 무제한적 생산을 지탱하는 글로벌 수출을 지양하는 지역 기반의 생산을 의미하며, ‘감소’는 연간 수십억 톤의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과소비와 그를 뒷받침하는 항상적인 과잉생산을 축소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재사용’과 ‘재활용’은 전체 소비재의 준 영구적인 사용을 위한 긴 호흡의 점유 방법이다.
이 같은 가이드에 근거해 라투슈는 다음과 같은 9개 선거 전술을 내놓는다: 1.광고, 포장, 운송 등 중간소비를 대폭 줄임으로써 1960-70년대 수준의 생태 발자국으로 복귀, 2.교통·운송 등 외부비용으로 처리되어온 오염 등에 적절한 생태적 세금 부과, 3.높은 탄소배출량과 오염을 유발하는 상품과 인간의 장거리 운송을 지양하는- 활동 전반의 재지역화, 4.지역에 기반한 계절적이고 자연적인 소농 농업의 활성화, 5.생산성 향상이 일어난 부문의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공유, 6.지식의 나눔, 이웃됨(neighborliness)과 우정 등 ‘관계적 재화’ 생산의 장려, 7.에너지 낭비 4배 감축, 8.광고 지출에 대한 페널티 부과, 9.현행 기술과학의 전면적 재고를 통한 생태적 재정향.24
이는 실행만 된다면 현행의 파괴적인 탄소배출과 더불어 생태에 대한 부정적 외부효과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기획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관철에 관련된 문제로 넘어오면 사정은 다소 복잡해진다.
자본주의의 그림자 인형극
여기서 근사하지만 실행 주체가 모호한 생태적 개혁 구호들의 백화점식 나열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탈성장론이 여느 생태주의 정치가 빠져드는 함정을 답습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거센 저항과 반동을 무릅쓰고 특정 산업에 고강도 세금을 부과하거나 중간소비 부문 자체를 없애버리는 등의 급진적 개혁들을 총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좌파적 헤게모니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요구될 것이나, 탈성장론은 그 이행 방법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 마치 생태위기에 각성한 자본가들이 순순히 사업을 철수하고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이 자발적 퇴사를 택하여 시민들의 숙의가 저절로 모이게 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현실에서 위 같은 수준의 개혁이 일국적 수준에서라도 발생한다면, 자본가들은 해당 부문을 매각하고 생태적 개혁이 닥치지 않은 국가로 내달려 갈 것이며, 해당 산업의 지분을 소유한 서방 국가들은 칠레, 쿠바, 베네수엘라 등에 하듯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생태주의의 탈을 쓴 공산전체주의”라 규탄하며 금융자산을 동결하거나 침공에 나설 것이다. 노동자들은 반동화되고, 탈성장의 책임자들은 고립될 것이다. 여기에 탈성장론의 역린이 자리하는 바, 탈성장은 자본주의의 강고한 역(power)관계에 대한 고려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만큼 자신이 제시한 기획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로 또한 불분명하다.
이 같은 한계는 어느 정도 개념 자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탈성장은 옳게도 성장지상주의와 생태위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포착했으나, 그 본질 개념에서 ‘성장’에 반한다는 부정(anti-thesis)이 있을 뿐 성장 너머의 지향을 위한 생산적 명제(thesis)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화폐에서부터 기본소득에 이르는 21세기 대안 경제의 맹아적 프로그램으로 회자되는 거의 모든 ‘좋은 정책’들을 두서없이 나열한 ‘탈성장 패키지’는 그들을 유기적으로 소급해 일원론적 중심 아래 일관되게 배열할 명제가 없는 한 맥없이 부스러질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한편 탈성장론의 대표주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이 제기하는 국내총생산(GDP) 지표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 사이의 괴리에서도 이 같은 추상성이 발견된다.
“자본주의를 역사상 대부분의 다른 경제시스템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지속적인 확장, 즉 ‘성장’의 명령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는 점이다. 이는 산업적 추출, 생산, 소비의 끊임없는 증가를 의미하며, 우리는 이를 국내총생산(GDP)으로 측정한다. 성장은 자본의 주요 지침이다. 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그 성장 자체를 위한 성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논리가 있는데, 모든 산업, 모든 부문, 모든 국가 경제는 언제나, 끝을 알 수 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25
여기서 히켈은 성장이 자본주의에 내속적인 과정임을 적시하면서도, 그에 대한 해결책을 아래와 같은 소박한 방식으로 제안한다.
1.상품의 연장 보증과 내구재의 임대 사용 확대를 통한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의 금지, 2.광고 지출 상한선제와 광고 기법의 제한, 공공장소에서의 광고 제거 등을 통한 광고 감축, 3.공동 작업장 장려와 대중교통 투자를 통한 소유권에서 사용권으로의 전환, 4.팔리지 않은 식품의 기부와 음식물 쓰레기 세금 부과 등을 통한 식량 낭비의 금지, 5.소고기 농가 보조금 삭감, 육류 세금 부과, 군수·항공 산업 축소를 통한 생태 파괴적 산업 부문의 축소.26
탈성장사회의 청사진에 생산구조에 대한 개입이 전무한 한에서, 우리는 히켈이 제시한 5개 제안이 완벽히 구현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화폐에 매개된 고용관계가 유지되는 한, 휴대폰, 세탁기, 자동차, 냉장고 등의 내구재 및 신발, 의류 등의 준내구재의 장기사용과 전반적인 수요감소는 성장을 일시적으로 감축시키는 효과를 지닐 뿐 이내 규제되지 않은 다른 부문에서 터져 나올 ‘성장’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GDP를 중심으로 한 성장이 사적(private) 생산의 필연적인 효과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의 본질 규정이라 할- 상품판매를 목표로 한 사적 생산은 ‘성장’을 자신의 그림자로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특정의 생산양식이 가능케 하는 재화 축적의 양상에서 명약관화하게 나타난다. 요컨대 직접적인 상품생산보다는 가족노동을 통해 농사를 짓고 그 산물로 자급자족하던 소농 중심의 생산이 지배적이던 전(pre) 자본주의 시대에 축적은 농사를 짓고, 풍작으로 곡식이 풍성할 때 비축량을 늘리며, 육포, 치즈, 젓갈, 건조 해산물과 나물, 분말 등 장기보관 식품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같은 세계에서 성장은 근원적으로 제한되는바, 대부분의 필수재가 자체 충족되어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낼 동인이 약하며, 설령 잉여생산물이 있다 해도 미발달된 국소적인 시장은 그 같은 잉여를 소화할 만큼 보편·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과 더불어 소농생산자들이 몰락하고 시장을 매개로 한 상품생산이 지배적으로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적은 더 많은 상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시장 교환 시스템에서 미지의 재화 x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는 것은 농사를 더 많이 짓거나 비축량을 늘리거나 식품을 장기보관하는 것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여기서는 자가소비를 위한 직접 생산은 이뤄지지 않으며 타자에 의해 고용되어 생산의 대가로 일정한 화폐를 취득하는 과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 취득을 위해 노역을 제공하고, 노역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상품을 생산하며 미래 시장에서의 구매 가능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제 삶을 위한 축적은 화폐의 축적으로 되는데, 필수재 일체를 시장에서의 구매에 의탁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화폐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이 성립하며 전 자본주의적 소농생산에서 가능했던 생산량의 자가적 조절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성장이란 특정 기간 내 일국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증가를 가리키는바- 생산량의 제약이 생산자의 손을 벗어난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노역의 대가로 지급될 화폐량이 고정되어 있는 한,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피고용자의 신체로부터 최대한 많은 노역량을 차출하는 것이 이득이고, 이는 곧 재화와 서비스 총량 증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의 일반공식 [M-C-P-C’-M’]으로 포착한 것을 피고용자의 시점으로 소급한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고용주가 화폐를 투입하여(Money)-
피고용인을 포함한 생산수단 등의 재화(Commodity)를 구매하면-
피고용인이 노역을 제공하고(Production)-
그 노역만큼의 가치증가분을 재화에 더함으로써(Commodity+’)-
이것이 후일 시장에서 최초 화폐 투입분 보다 많은 화폐량으로 교환되는 과정(Money+’)
이 자본의 일반공식이다.
이 과정을 간추리면 [M(화폐 투입)-C(재화 구매와 생산)-M’(화폐 증가분 취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만약 고용주가 화폐 증가분을 자신의 소비에 투여하고 최초의 화폐량만큼을 다음 차수의 생산에 투입한다면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은 일정할 것이고, 성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단순재생산). 그러나 고용주가 요트 구매와 타워팰리스 입주를 원한다면 사업은 확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사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현상유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동종 산업부문의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해 끊임없이 규모를 키워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따라서 [M-C-M’]의 결과물인 화폐 증가분은 다시금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확장된 상품생산 주기(cycle)에 복무한다. 화폐 증가분이 추가적인 재화와 피고용인 구매에 할당되는 것이다(확대재생산). 이 과정이 영속하면 마르크스가 “자본의 증식”이라 불렀던 [M’-C’-M’’-C’’-M’’’···]과 같은 무한한 확장이 일어나는데, 실로 이는 자본주의의 상수(constant)라 할 법한 현상이다.
이 같은 자본증식은 개별 자본이 화폐 증가분(이윤)을 다음 차수의 순환에 투여하는 자본축적에 의해 이뤄지며, 그 진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무한한 팽창이 동반된다.27 즉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증식의 총량을 국가적 단위에서 집계한 것을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주지하듯 국내총생산(GDP)은 특정 시간 동안 일국 내에서 생산된 최종생산물의 시장가치 합계다. 따라서 자본축적을 가능케 하는 구조에 개입하지 않은 채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브레이크를 당기지 않은 채 기차를 멈추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품, 화폐에 매개된 자본축적을 멈춘다는 의미다. 나아가 국가적 단위의 성장을 추동하는 국가 간 경쟁체계를 극복한다는 의미이며, 무엇보다- 고용 관계를 벗어난 생산 체제를 확립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성장이 사적 생산의 그림자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이다.
그러나 광고 제한부터 에너지 감축, 준·내구재 장기사용, 유기농업, 생태적 세금개혁 등 앞서 살펴본 세르주 라투슈와 제이슨 히켈의 탈성장 아이디어는 대체로 자본축적의 속도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M-C-M’]이라는 자본시스템에 개입하는 데는 실패한다. 결국 탈성장론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양식(post-capitalism)’이라는 과업을 짊어지길 피하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무고(false accusation)와 에코 테러리스트의 필라 운동화
이외에도 여러 난점들이 남는데, 걔중 탈성장론이 좌파 러다이즘(Luddism)에 기울어 있다는 것은 문제적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적대심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예컨대 후기 마르크스의 테제가 ‘탈성장 코뮤니즘’이었다고 강변하는 탈성장론자 사이토 고헤이(斎藤 幸平)는 기술과학 일체를 ‘성장’의 세포핵으로 간주하며 “프로메테우스주의”라 비판한다.28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후 변화의 전면적인 영향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었던 근대의 프로메테우스적 꿈의 최종적 실패를 의미”하며, “(...)성장의 한계에 대한 반-프로메테우스적 통찰은 환경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으로 가는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는 식이다.29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성장을 추동하는 것은 기술과학이라기보다는 자본축적이며, 생산 일체의 생태적 영향을 외부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한한 자본증식이다. 기술에서 맹목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하나의 편향이듯 기술에서 무차별한 자연지배의 욕망을 읽는 것 역시 역방향의 편향을 지닌다. 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한 이후로 역사는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를 부정적인 개념으로 삼는 순간- 근대 이후의 반 생태주의적 발전 국면보다는 인류 전 역사가 추상화된 과녁 위에 놓인다는 점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입장은 인간의 복지 및 보건과 건강에 직접적으로 유용한 기술과학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술과학 전체를 도매금으로 청산하게 되는데, 이는 시원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생태주의 정치를 정교화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컨대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비난은 전 인류의 전염병을 막고 양질의 물을 공급하는 근대적 상하수도 시스템과 등 탄도미사일 시스템을 구분하지 못하며, 천연두와 흑사병, 나병, 홍역, 인플루엔자 등을 가볍게 극복한 현대의학의 이기(beneficial technology) 및 친환경 에너지 기술과 석탄 화력 발전 기술을 구분하지 못한다. 가속주의가 기술을 선으로 가정하며 기술이 다양한 표정을 띤다는 사실을 망각하듯, 탈성장 역시 가속주의의 정반대편에서 그것을 악으로 가정하며 기술의 다양한 낯을 망각하는 셈이다.30
이와 관련해서 종종 ‘에코 테러리즘’으로 묘사되는 풍경을 살피는 것은 유익할 수 있다. 유럽의 기후활동가들이 미술관을 점거하고 작품에 음식물을 끼얹을 때, 그들은 문화유산의 소중함에 위악을 보이는 모습으로 생태유산의 소중함을 환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종의 순간에조차 그들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안경, 의복과 신발, 손목시계 등은 대량생산된 것들로서 고분자 물질 합성기술, 석유 및 합성섬유 기술, 플라스틱 중합 기술, 금속 합금 기술 등에 기대고 있으며, 일찍이 각 기업들의 이윤에 복무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열렬한 반자본주의 집회를 한 뒤 근처 편의점에서 상품을 사는 순간 그들이 지양하고자 했던 가치법칙과 공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탈성장론자들 역시 대량생산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한 순간 그들이 넘어서려 했던 프로메테우스주의와 성장 지표에 복무한다. 달리 말해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청산은 담론에서는 손쉬울지언정 그 실질에서는 탈성장론의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담론과 실제의 괴리는 다른 방식으로도 탈성장론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탈성장은 자신의 프로그램이 저성장 같은 식의 축소가 아니라 성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경제를 추구하는 것이라 강변하지만, 생산적인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성장에서 벗어난 경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중은 매우 잘 알고 있다. 요컨대 현재 국면에서 탈성장의 첨단을 실천하고 실험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천가들 말이다. 우리는 풍부한 근거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번이 노숙자이고, 2번이 니트족이며, 3번이 해고자·실업자, 4번이 산업기반을 갖추지 못한 저발전 국가의 시민이라고 말이다. 실로 이들은 자생적인 탈성장주의자이며, 한갓된 담론을 넘어 자본주의 하에서 실질로 탈성장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그 외 지식인과 활동가들,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한 진보적 소시민들의 경우, 그들이 자본주의 하 건실한 주체로서 특정의 법인에 고용된 채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한 용역을 제공하고 있는 한, 결코 탈성장의 실천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세미나를 위해 매주 사용하는 A4용지와 교통, 이들이 구매하는 책과 발행하는 책, 줌 미팅에 드는 전기, 해외 심포지엄 참석을 위한 비행기 등은 제지회사, 운수회사, 출판사, 전력회사, 테크 기업, 항공사들의 이윤이 되며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반면 노숙인, 니트족, 실업자의 극소화된 삶의 패턴은 전적으로 성장 외부에 있다. 바꿔 말해, 화폐를 통한 고용 관계가 유효한 생산 방식으로서 건재하는 한 탈성장은 곧 삶의 정지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성장이 멈췄다. 우리 모두 춤을 추자”는 녹색평론 편집인 (故)김종철의 발언은 현재의 생산관계로 소급되자마자 “노숙자와 해고자와 니트족이 늘었다- 춤을 추자”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된다.31
이 연장에 놓여 있는 문제는 탈성장의 장소특정성(site specificity)과 관련된 것이다. 요컨대 탈성장은 북반구에 의한, 제1세계를 위한 것으로 협소한 지리적 마크가 찍혀있다는 말이다. 개별의 탈성장론자들은 성장의 원죄를 북반구 중심 제1세계의 고도발전에 돌릴 만큼 영리하지만, 앞서 살펴봤듯 그들의 프로그램 자체에 북반구와 남반구의 관계 조정 문제나 남반구를 축으로 한 제3세계가 참조할 기획은 없어 보인다.32 물론 탈성장은 세계적인 담론인 만큼 남미, 필리핀, 인도, 튀니지, 터키 등에도 활동 단위가 있으나, 제3세계의 문제계가 탈성장 담론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 영향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확대하긴 어려울 것이다.33 요컨대 ‘남반구는 좀 더 성장해도 좋다’는 식의 방치를 넘어서서, 식민지배를 시행했던 제1세계 국가들이 자신들의 식민지 유지 기간과 자원 수탈 규모, 폭력적 탄압에 대한 비용을 함수화하여 그에 상응하는 공동발전기금을 조성하고 탈성장의 이름으로 제3세계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는 한, 탈성장은 북반구 특정적 담론이 지니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성장의 신경증을 넘어: 탈성장을 가속하기
결국 앞서 살펴본 탈성장론의 한계는 한편으로 감속주의의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성장의 반테제에 자족하며- 위험할지언정 선을 넘은 실정적인 수준에서 새로운 경제를 확립하는 데로 나아가길 포기하는 탈성장론의 내적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읽힌다. 달리 표현하자면 탈성장에는 부정의 힘은 충만하나, 유토피아적 열정이 부족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이들은, 성장을 멈추기 위해 자본축적을 멈춰야 하고 이를 위해 자본가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하여 고용관계를 벗어난 생산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이후 좌파에게 남은 트라우마와 자기검열의 영향이 보인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실패로 말미암아, 모든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냐 야만(성장-자본주의)이냐”와 같은 거친 사고(crude thinking)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탈성장이 가속주의와 만나야 할 필요가 제기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탈성장식 감속에는 인류가 현재 도달한 생산력을 전유하는 것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에 이를 수 있다고 단언하는 거친 사고가 필요하다(여기서 내가 <가속주의 선언>을 통해 가시화된 좌파 가속주의의 전통을 참조하고 있음을 유의하라). 기술과학의 조건이 그 조타수와 무관하게 자연을 외부성으로 착취하는 데 머무를 거라는 비관을 벗어나야 한다. 탈성장의 주요 프로그램인 수요감소를 위한 역량과 기예(art)를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러다이즘과 거리를 둬야 한다. 탈성장론 스스로가 강변하듯 수요의 감소는 여태 인류가 했던 것을 뭔가 덜 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외려 그 목표를 향해 우리가 도달한 기술과학과 이성을 총동원해야 하는, 생산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속주의는 이 지점에서 탈성장론의 공백을 메우는 훌륭한 보완제가 될 수 있다.
당장 동시대에 편재한- 생태에 대한 첨예한 감성 자체가 특정한 종류의 과학, 특정한 방향의 이성의 활용에 빚지고 있다. 2000년대 발전한 나노입자 측정 기술과 전기적 저저항법(ELPI)에 더해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실시간 초미세먼지 측정은 불가능했다. 미세먼지 측정기술 발달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기 공해에 더욱 예민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 퍼져나간 라만 분광법, 2010년대 중반 자동화된 샘플분석을 가능케한 현미경-FTIR 이미징 기술의 발전, 2010년대 후반 나노 플라스틱을 검출하는 동적 광산란법(DLS)의 발전이 없었다면 초미세 플라스틱의 존재는 베일에 싸여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발전을 통해 우리는 해양영역에서 인류세(Anthrophocene)의 실재를 파악했다. 마찬가지로 1970-80년대에 발전한 빙하 코어 분석 기술과 90년대의 고해상도 위성 이미지를 통한 지표면 온도 분석 기술, 2000년대의 빙하 및 해빙 변화 측정 기술이 없었다면 지구온난화의 가속을 증명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라는 생태운동의 결절점과 기후정의 운동을 갖게 됐다. 이 모든 것은 가속주의의 탈성장적 적용의 현실성을 타진하는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기술과학을 경유하여 확장될 시선은- 소급되기에 따라 한갓된 기술을 초과하는 거대한 운동이 될 수도 있다.
가속주의의 유토피아적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의료, 주거, 복지, 과학, 인프라 등 성장을 통해 이룩된 제1세계의 여러 발전 수준들을, 제3세계가 성장이 아닌 방식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성장을 벗어나 가능한 생산을 조직하고, 축소되고 간소한 형태로도 전 세계 인류의 필요를 더욱 균등하고 평등하게 나눔으로써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특정한 과학으로서 가속주의의 이상은 광고 제한부터 에너지 감축, 준·내구재 장기사용, 유기농업, 생태적 세금개혁 등 탈성장 기획이 실행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녹색계급(classe écologique)’론에 대한 응답을 일정 부분 포함하는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위한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니콜라이 슐츠(Nikolaj Schultz)가 잠정적으로 제안한- 지구차원의 거주가능성을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녹색계급”은 담론적 요청일 뿐 세력화된 적이 없다.34 앞으로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인간 사회에 속한 이상 자연의 제 문제에 기민한 공감능력을 지닌 생태 친화적인 주체가 되는 것은 가능해도 자연 일체와 제 운명을 동일시하는 ‘생태적 계급’으로 주체화하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프킬라로 자신의 집에 출현한 바퀴벌레를 잡는 생태근본주의자에게 ‘당신은 가짜이며 학살자’라 지적해 줄 사람이 있는가? 도심의 불빛에 인지체계가 교란되어 사방의 가로등과 형광등에 달라붙은 채 죽어가는 날벌레들을 위한 종평등주의자가 있는가? 모든 생태위기 담론의 핵에는 인간 자신의 생활세계 파괴 가능성에 대한 공포만이 자리한다. 타종에 대한 염려는 아름답지만 언제나 인간주의적으로 편향된 인지적 오류(‘철새’의, ‘북극곰’의, ‘팽귄’의 보금자리 파괴)를 노정한다.
여기서 가능한 답은 녹색계급을 외삽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문제계를 선명한 좌파적·인간주의적 프로그램에 내속화하는 것이고, 이는 탈성장과 가속주의의 결합으로 도달될 수 있을 법한 지평이다.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국의 전기화이다”라는 레닌의 잠언을 복기하자면- ‘21세기 생태사회주의는 탈성장 더하기 가속주의’라고 해도 좋다.
-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in Dark Trajectories: Politics of the Outside. ed. by Joshua Johnson (New York: Name Publication), 2013. 이하 “가속주의 선언”으로 표기. [본문으로]
- Benjamin Noys. The Persistence of Negative: A Critique of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0. 여기서 노이스는 68혁명의 자장에서 고전적 좌파 기획의 한계를 벗어나 자본주의를 그 내재성에서 심화하여 내파하려는 경향을 ‘가속주의’라 명명하며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1974), 보드리야르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을 그 대표적 텍스트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 Nick Land. Fanged Noumena: Collected Writting 1987-2007. (New York: Sequence Press), 2011. 이는 “CyberGothic”(1998), “Circuitries”(1992), “Mechanomics”(1998), “Meat”(1995) 등의 텍스트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언뜻 난해해 보이는 그의 입장은 ‘포스트구조주의적 미래주의자’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이버네틱스에 이르러 사회와 일체화된 기술의 흐름을 비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이에 저항하는 일체의 인간주의적 시도들을 “데카르트적 비명(Cartesian howl)”(p.249)이라 조롱한다. [본문으로]
-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op.cit., pp.145-148. [본문으로]
- Ibid., p.145, p.148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 예컨대 <독일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인간해방의 전제조건” 절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 허구적 개념들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고 해서 “인간”의 해방이 한 걸음이라도 진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현명한 철학자들에게 부러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진정한 해방은 오직 실제 세계에서, 실제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 증기 기관과 뮬 방적기가 없이는 노예상태를 폐지할 수 없고, 발전된 농업 없이는 농노제를 폐지할 수 없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충분한 양질의 음식, 음료, 주거, 의복을 확보할 수 없는 한 해방될 수 없다는 것도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해방”은 역사적 행위이지 정신적인 행위가 아니며, 이는 역사적 조건, 즉 산업, 상업, 농업, 통상의 수준에 따라, 이어 그들의 다양한 발전 단계에 따라 이뤄진다.” K.Marx and F.Engels. The German Ideology.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8. p.44; 한편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르주아지는 불과 백 년의 지배 기간 동안, 이전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막대한 생산력을 창출했다. 자연의 힘을 인간과 기계에 종속시키고, 화학을 산업과 농업, 증기선 항해, 철도, 전신에 적용하며, 대륙 전체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만들고, 강을 운하화하며, 땅에서 솟아난 듯한 전체 인구를 끌어낸 것 등, 이전의 어떤 세기가 이러한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품 안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예감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K.Marx and F.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ed by Samuel H. Beer (Newyork: Appleton Century Crofts) 1955, p.14. [본문으로]
- 제8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연설문 “인민위원회 임무에 관한 보고”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쓴다. “농촌에서의 삶을 도시에서의 삶과 비교하여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자본주의의 뿌리를 뽑지 않았으며 우리 내부의 적이 근거하는 토대와 기초를 허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허물어뜨리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이는 곧 농업을 포함한 국가 경제를 새로운 기술적 토대, 현대적인 대규모 생산에 두는 것이다. 오직 전기만이 그 기반을 제공한다.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권력에 전국의 전기화를 더한 것이다. (...)오직 이 나라가 전기화되어 산업, 농업, 운송이 현대의 대규모 산업의 기술적 기초 위에 놓일 때에만, 우리는 완전히 승리하게 될 것이다.” V.I.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1, April-December 1920, ed. and trans. Jullius Katzer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6. pp.487–518. [본문으로]
- Eden Medina. “Designing Freedom, Regulating a Nation: Socialist Cybernetics in Allende’s Chile.”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38(03), 2006. [본문으로]
- 컴퓨팅 기술에 근거한 고도로 효율적인 유통체계와 경영으로 미국 내 소매시장을 압도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자유시장 경제를 죽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월마트를 유토피아적 세계의 맹아로 제시하며 정치적 상상력을 촉구하는 제임슨의 작업 역시 그 같은 동기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Fredric Jameson. “Utopia as Replication.” in Valences of the Dialectic. (London: Verso), 2009. pp.410-434; 태양에너지 기술, 자동화 기술, 우주개발 등 동시대 기술혁신의 주요 성과들이 희소성의 문제를 제거하고 있다고 간주하며 이를 전유하길 제안하는 아론 바스타니(Aaron Bastani)의 작업도 유사한 결이다. 아론 바스타니.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황소걸음. 2020. [본문으로]
- Andy Beckett, “Accelerationism: how a fringe philosophy predicted the future we live in.” The Guardian. Thu 11 May 2017. [본문으로]
- Edmund Berger. Unconditional Acceleration and the Question of Praxis: Some Preliminary Thoughts. Obsolete Capitalism. 27 March 2017. https://url.kr/88hqum ; Matt Colquhoun. “A Further Fragment on Unconditional Accelerationism: What is Anti-Praxis?” Xenogothic. 14 September 2020. https://url.kr/5bon8v [본문으로]
- 물리학자이자 양자 컴퓨팅 기술을 연구하는 기업가인 기욤 베르동(Guillaume Verdon)이 2022년 주창한 뒤로 효율적 가속주의(e/acc)는 실리콘 밸리의 거물들에게 지지를 받아왔다. ‘e/acc’를 지지했던 실리콘 밸리 벤처투자사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의 공동창업자 마크 안데르센(Marc Andreessen)은 성장의 유일한 원천으로 기술을 지목하며 ‘기술 낙관주의 선언(Techno-Optimist Manifesto)’(2023)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본문으로]
- n1x. “Gender Acceleration: A Blackpaper.” Vast Abrupt. October 31, 2018. [본문으로]
- 2019년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에 총격을 가해 51명을 살해한 브렌튼 태런트(Brenton Tarrant)가 범행 직전 발표한 선언 “거대한 대체(The Great Replacement)”의 한 절 “불안정화와 가속주의: 승리를 위한 전략(Destabilization and Accelerationism: Tactics for Victory)”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안정과 편안함은 혁명적 변화의 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사회를 불안정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민자 추방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덧붙이고, 위기가 발생할 때까지 공적 생활 전 영역에서 이를 반복하라. 불안정화하고, 그런 다음 장악하라.” [본문으로]
- Aria Dean. “Notes on Blacceleration.” e-flux Journal. Issue #87. December 2017. pp.18-25. [본문으로]
- Gavin Mueller. “Conclusion” in Breaking Things at Work: The Luddites Are Right About Why You Hate Your Job (London: Verso), 2021.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 Marisol Cortez. “The Praxis of Deceleration: Recovery as ‘Inner Work, Public Act.’” Academic Labor: Research and Artistry. Vol. 2, 2018. [본문으로]
- Saito Kohei, Marx in the Anthropocene: Toward the Idea of Degrowth Commu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p.167. [본문으로]
- 앙드레 고르가 창간인이자 편집인으로 활동했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서 주최한 1972년의 토론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의 균형에서는 물질적 생산의 성장이 없거나 혹은 심지어 탈성장(décroissance)이 필수 조건인 바, 이 같은 균형이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과 양립할 수 있는가?” [본문으로]
- Nicholas Georgescu-Roegen. Demain la décroissance. Entropie - Écologie - Économie. Présentation et traduction de MM. Jacques Grinevald et Ivo Rens. (Lausanne: Pierre-Marcel Favre), 1979. [본문으로]
- Nick Fitzpatrick, Timothée Parrique and Inês Cosme. “Exploring degrowth policy proposals: A systematic mapping with thematic synthesis.” Journal of Cleaner Production Vol.365, 2022. [본문으로]
- Serge Latouche. Farewell to Growth. trans by David Macey. (Cambridge: Polity Press), 2009. p.33. [본문으로]
- Ibid., p.35. [본문으로]
- Ibid., pp.68-76. [본문으로]
- Jason Hickel. “Introduction: Welcome to the Anthropocene,” in Less is More: How Degrowth Will Save the World. (London: Penguin Random House), 2020. [본문으로]
- Jason Hickel. “Pathways to a Post-Capitalist World” in Less is More: How Degrowth Will Save the World. (London: Penguin Random House), 2020. [본문으로]
- 이 같은 자본축적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호전성과 시각적 화려함을 설명하는바, 여기서 국가는 생산한 상품(C’’’)가 그에 필적하는 화폐 증가분(M’’’)으로 환금 되지 않을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과 식민지 경쟁에 나서며, 마찬가지로 C’’’를 M’’’으로 환금하기 위한 사적 자본들의 각축이 시각적 광고를 고도로 발달시키는 중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Saito Kohei. op. cit. 가령 다음의 문장을 보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자연지배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친기술적, 반생태적) 옹호로 특징지어진다고 논해져 왔다.”(p.13); “자연에 대한 구성주의는 사회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일방적인 초점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특히 자연의 비동일성과 우위성에 대한 불충분한 주의로 인해, 자연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접근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p.110) [본문으로]
- Ibid., p.73, p.18. [본문으로]
- 독일 신우파의 반(anti)프로메테우스주의적 경향을 분석하며 극우 탈성장 정치와 프로메테우스주의 관계를 해부하는 다음의 작업을 참고하라. Bernhard Forchtner and Jonathan Olsen. “Against the promethean: Energy throughput and the far-right politics of degrowth.” Environment and Planning E: Nature and Space, 0(0). 2024. [본문으로]
- 『시사in』. “성장이 멈췄다 우리 모두 춤을 추자: ‘위기에서 길을 묻다’ - ②‘김종철에게 이문재가 생태적 상상력을 묻다’” 2009.01.17. [본문으로]
- Serge Latouche. op.cit., p.24. p.31-32; Jason Hickel. op.cit., Introduction 등을 참고하라. 여기서 라투슈는 이렇게 쓴다. “성장은 이제 자연, 미래 세대, 소비자의 건강, 노동자의 근로 조건, 무엇보다 남반구 국가들이 그 비용을 부담할 때만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 개념을 버려야 할 이유다.”(31) 한편 히켈은 말한다. “생태 위기는 모든 사람에 의해 동등하게 야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소득 국가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은 여전히 지구 한계(planetary boundaries)의 공정한 몫 내에 머물러 있다. 사실, 많은 경우 이들 국가는 시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와 자원 사용을 증가시켜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고소득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성장이 필요의 개념과 완전히 분리되어 인간의 번영에 필요한 수준을 오래전부터 크게 초과해 왔다. 전 지구적 생태계 붕괴는 거의 전적으로 고소득 국가들의 과도한 성장, 특히 극도로 부유한 계층의 과도한 축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반면 그 결과는 글로벌 남반구와 빈곤층에 불균형적으로 해를 끼치고 있다.”(“Behind the eco-fact”) [본문으로]
- Federico Demaria and Serge Latouche. “Degrowth.” in Pluriverse: A Post-Development Dictionary. ed by Ashish Kothari, Ariel Salleh, Arturo Escobar, Federico Demaria, Alberto Acosta. (New Delhi: Tulika Books), 2019. [본문으로]
-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역. 이음. 2022. 30쪽. [본문으로]
'Critic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자본주의 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 (0) | 2024.09.20 |
|---|---|
| 미완의 질문: 보도연맹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 (1) | 2023.11.30 |
| 화이트 큐브의 종언과 ‘컬러풀 홀’로의 이행: 동시대의 미술관은 무엇을 꿈꾸는가 (4) | 2023.11.30 |
| 윤석열 정부의 소수자 탄압 양상 (3) | 2023.11.30 |
| 절대자본주의와 미술: 심화된 매개 속 자유의 공간은 어디에? (2) | 2023.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