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립미술관 2025 JMS 예술정원 프로젝트_산책하는 집_2025.5.2-10.12
손민아 '산책하는 집' 전시 도록에 선게재됨(2025.11월)

집은 왜 움직이는가: 한국 자본주의의 공간적 조정과 예술적 응답
정강산
산책하는 집의 짧은 역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손민아의 <산책하는 집>(2016)은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에서 이뤄진 장소특정적 작업으로 제시된 바 있다. 설치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이 작업에서 그는 약 2평 가량의 파란색 집 구조물을 제작하여 ‘생태적 관광 유원지’로 브랜딩된 두물머리의 산책로를 따라 지게차와 함께 이동시켰다.
생경하리만치 눈에 띄는 단색의 집이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산책로를 따라 움직이는 장면은 인공적인 것이 외삽된 이질적 광경을 연출하며, 동시에 인공적으로 조형된 두물머리의 ‘자연풍경’이 지닌 아이러니한 역사를 환기했다.
두물머리는 오랫동안 소농들이 친환경 농업으로 밭을 일구던 비옥한 농지였으나, 2009년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두물머리 지역이 ‘한강 살리기 제1공구’가 된 이후 지역 농민들의 삶과 무관하게 ‘공공수역 정비 및 경관복원 대상’이 된 장소였다. 정부가 내세운 명목은 수질 보호와 생태복원, 수변공원 조성 등이었지만 실제로는 농지의 비농업적 개발과 공공사업용 수용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지극히 인위적으로 조형된 ‘자연풍경’이 지역에 착근된 농민들의 ‘자연적 삶’을 잠식한 것이다.
여기서 손민아의 이동식 집은 ‘인공성의 지표’로서 주변의 자연풍경과 충돌하며 두물머리의 아이러니한 ‘자연’을 응시하는 한편, ‘인공적 자연’을 위해 두물머리를 가로질러 내쫓긴 ‘자연적 삶’의 이주를 가리키는 장소특정적 예술(Site-specific art)이라 할 수 있다.
정주할 수 없는 시대의 집
그러나 전북도립미술관의 ‘JMA예술정원프로젝트’에 제시된 <산책하는 집>(ver.2025)은 장소특정성이 강조된 당초의 작업 맥락을 보다 장소보편적으로 재편한다. 집의 형상을 의태한, 단색의 파랑으로 채색된 구조물은 전북도립미술관의 야외 산책로를 따라 주기적으로 이동하며 ‘움직이는 집’을 보여준다. 이때 작업의 형식 자체가 달라진 측면은 거의 없지만, 두물머리라는 장소에 착근된 맥락이 소거됨으로써 ‘이주’라는 일반적인 문제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과거와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은 <산책하는 집>을 통한 퍼포먼스의 수행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2016년 두물머리에서 지게차를 통해서만 움직였던 이동식 집과 달리, 2025년 전주도립미술관에서의 이동식 집은 관객들이 함께 이동시킬 수 있으며, 크레인을 통해 공중에 매달린 채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산책하는 집>(ver.2025)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정박시키는 것은 이 퍼포먼스 과정이라고 해도 좋다.
관객들과 더불어 힘겹게 제 자리를 옮기는 이동식 집은 관객 자신의 노고 속에서 ‘정주’할 수 없는 동시대의 주거 경험을 수행적으로 환유하며, 크레인을 통해 위태롭게 허공에 떠올라 마치 물건처럼 다뤄지는 집의 풍경은 오늘날 거주에 내재한 취약함과 불안정을 환기한다.
결국 손민아의 <산책하는 집>(ver.2025)을 온전히 ‘감상’하는 일은 현재 주거의 광란적인 유동성이 어디서부터 연원한 것인지를 반성하는 작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어느 정도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 종별적인 것이다.
주택의 자산화와 개발주의 국가의 유산: 한국 부동산 자본의 계보
2024년 3월 말 기준 한국 가구의 평균 자산 5억 4천 22만원에서 주택·건물·토지 등 부동산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75.2%에 이르렀다(2024 가계금융복지조사). 이는 부동산 자산 비중이 46.2%에 달하는 영국, 37%의 일본, 28.5%의 미국에 견주면 실로 기형적으로 높은 수치라 할법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과거에서부터 착실히 쌓여온 정치경제적 조건이 자리한다.
1945년 해방 직후 여전히 농업에 깊이 착근되어 있었던 한국의 경제에서 토지는 ‘생산수단’이자 ‘생활터전’이었지, 오늘날과 같은 자산증식의 수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집권과 거의 동시에 이뤄진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정부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동시에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거쳐 토지의 ‘개발 가치’는 국가 정책의 핵심 요소로 편입되며, 한국 특유의 개발주의 국가는 개발 인허가와 기반시설(고속도로, 공단, 주택단지, 신도시 건설) 제공을 통해 토지 가치를 적극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기조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맞물린 강남 개발과 더불어 질적으로 강화되는데, 한국에서 부동산의 자본적 성격이 돌이킬 수 없이 고착되는 것이 바로 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인구 과밀을 명분으로 강남(영동지구) 개발을 국가 주도로 추진했는데(1968), 이는 영동대교 착공(1970),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 작업(1976), 강남을 염두에 둔 지하철 2호선 착공(1978) 등 대규모의 인프라 건설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토지수용권(강제 수용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논밭에 불과했던 강남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인 뒤, 해당 지역의 택지를 민간 건설업자나 개인에게 분양하는 동시에 공공 재원 투입으로 사회기반시설을 구축, 토지 가치를 상승시켜 민간에 엄청난 시세차익을 안겨줬다. 이때 분양의 수혜를 누린 집단은 정책 접근성과 초기 자본을 보유했던 정치인·관료·기업인·유지들로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불패 신화’ 패러다임의 개척자가 됐다.
부동산의 금융화와 계급 재생산의 경로
이 같은 과정은 전두환 정부에서 목동 신시가지, 상계동, 구로·가리봉, 개포지구 개발을 통해 마찬가지로 반복되며 신흥 중산층을 만들어냈고,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을 중심으로 한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에서 가공할 규모로 관철되기에 이른다. 서울 과밀 해소를 명목으로 이뤄진 모든 개발과 신도시 정책은 결과적으로 서울과 생활권을 공유하는 ‘확장된 수도권’을 형성함으로써 수도권 집중 심화를 야기했고, 수도권의 인프라 집중을 가속하며 집값의 우상향 그래프를 만들어왔다. 그리하여 초기엔 정책결정층이, 이후엔 신흥 중산층이 부동산 개발 구조에 편입됨으로써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계급 재생산의 경로 의존성’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풍경을 조형하게 되는 것이다.
외환위기에 따른 IMF의 구조조정이 한국을 강타한 이후 이 같은 경향은 보다 심화하는데, IMF의 요구에 따라 금융시장 자유화, 은행 민영화가 추진되며 기존의 공공주도 주택금융 체계가 민간은행의 경쟁체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은행은 적극적으로 주택자금대출을 공급하며 소득 대비 훨씬 큰 규모의 부채로 집을 살 수 있게 했고, 이는 다시 부동산 수요를 늘려 가격 폭등을 유발했다.
동시에 IMF 구조조정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고용유연화’는 상시적 해고와 비정규직 채용을 가능케 함으로써 불안정노동을 자연적인 패러다임으로 만들었고, 이는 근로소득의 하향평준화로 이어져 재테크를 시민적 삶의 소명(vocation)으로 등록시켰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주택의 소유는 자기 존립을 위한 성취로 격상되어, 투기와 생존이 구분되지 않는 윤리적 전도가 하나의 표준이 되고, “무주택자는 무능하다”는 통념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이 같은 지평에서 주택은 사회적 지위와 위신 자체를 보증하는 ‘상징자본’으로 전환되어, 그 소유 여부가 결혼·친교·취업·승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이 되었다.
불균등발전의 증상: 산책하는 집
손민아의 <산책하는 집>(ver.2025)은 이 같은 파고의 한복판에 놓인다. 관객의 노역에 의지하여 이동하도록 설계된 손민아의 집 구조물은- 부동산 계급의 성채(acropolis)로서 모든 인프라와 기회가 집약된 수도권을 향하는 ‘지방’의 도도한 행렬을 지시하는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집값으로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유목민적 삶을 환유한다.
결국 <산책하는 집>(ver.2025)이 상대하는 실재는 앞서 살펴본바 ‘주택’에 매개된 한국 자본주의의 독특한 역사 그 자체이자 계층상승의 욕망이며, 유동적이고도 불안한 삶의 조건 자체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산책하는 집>의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집을 힘들여 옮겨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집을 옮겨다니는 실천’은 그러나 한국에 전적으로 고유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맨해튼(Manhattan), 영국 런던의 쇼디치(Shoreditch), 프랑스 파리의 10·11구, 일본 도쿄의 가마타(蒲田) 등은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의 사례들이다. 이들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다기한 세부에도 불구,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패턴을 따른다. 1. 구도심 낙후 지역의 낮은 임대료로 말미암아 예술가·청년·진취적인 창업자 등 초기 입주자들이 모여 트렌디한 카페, 디자이너 샵, 개인 레스토랑, 공방 등을 차림으로써 지역에 활력이 돈다. 2. 외부 자본, 중산층, 관광객이 유입되며 임대료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유발한다. 3. 높아진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게 된 기존 주민들은 퇴거하고, 지역 전체의 계층 재편이 이뤄진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가 공간을 조형하는 구조적 방식으로서의 ‘불균등발전(uneven development)’을 마주한다. 불균등발전의 요체는 이윤 극대화를 통한 자본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제1 원리 자체가 내재적으로 자본의 공간적 집중을 심화하며, 균형발전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에 투자를 집중하게 되어있으며, 이는 해당 지역의 산업단지, 관공서, 학교, 도로, 철도, 교량, 상하수도, 파이프라인 등 광범한 인프라의 구축으로 표현된다. 이로써 특정 지역은 ‘발전된’ 모습을 띠는 반면, 이윤 창출이 어려운 지역은 ‘낙후한’ 모습을 갖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자본이 과잉 축적되면 이윤율은 낮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본은 기존의 자본 순환 공간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시공간적으로 재배치하게 되는데, 이는 a. 낡은 산업지대를 재개발하거나 도시를 재구조화하는 공간의 재구성, b.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저비용 고이윤의 새로운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지리적 이동, c. 도로, 항만, 주택, 신도시를 건설하는 인프라 투자 등으로 수렴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라 부른 이 같은 과정은 ‘정주’와 같은 것이 자본주의에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까닭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손민아의 이동식 집은 당분간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현실성(reality)을 담보하는 역설적인 집이다. 손민아의 집이 영영 멈추는 순간, 혹은 손민아의 집이 생경해보이는 순간은, 우리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진입하는 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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