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수원 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 4기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수원지에서의 보고>(2024.10.18-11.10)를 위해 작성된 글.
수원문화재단 레지던지 도록에 선게재됨.]
정강산
1.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에서 제시된 일련의 작업을 논하기에 앞서 최은철의 전작들로 돌아 가보자. 적어도 2017년 이후 현재까지, 최은철이 매료된 주제는 ‘문명과 시간’으로 비친다.
우선 수백 개의 동그란 시멘트 원판 위에 순백색의 녹인 설탕을 올려 에메랄드빛 색소를 덧입힌 작업 <Polar Substances>(2017)에서 그 같은 기류가 포착된다. 이 작업은 자잘하게 나뉘어가는 빙붕(ice shelf)과 빙산(iceberg)을 연상케 하며, 시멘트로 표상되는 ‘문명’ 위에서 설탕으로 조형된 채 ‘시간’에 따라 녹아 사라지는 극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같은 연상작용은 문명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을 압도하거나 짓누르는 심상으로 도착한다.
<유동적인 흐름의 프로세스>(2020)도 그렇다. 이 작업은 설탕과 색소로 정교하게 제작된 조선시대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와해되는 과정을 시연한다. 본 작업의 요소가 되는 미니어처 건축물 <숭례문>(2020)과 <근정전>(2020)은 관객들이 직접 시식함으로써 점차 허물어지고, 관객들의 혀에 남은 식용색소는 전시장 벽면에 실시간으로 수집된다. 이로써 생겨나는 의미망은, 문명의 시간 속에서 일순간 확립된 실체가 우발적이고 다기한 실천을 통해 무너지고 이내 형질변환됨으로써 새로운 실체를 향해 순환하는 패턴이다.
유적지에서 나올법한 도자기들과 사금파리들이 형형색색 설탕으로 조형된 채 널부러져 있는 장면을 연출한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2022)과 새 모이로 제작된 프로메테우스의 두상(head)이 비둘기에게 쪼여 와해되는 과정을 담은 <Prometheus>(2022)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에서 화려하게 빚어진 도자기들은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우리에게 도달한 유물으로 읽히지만, 그 또한 결국 시간의 흐름 앞에서 와해될 만큼 연약하다. <Prometheus> 속 두상 역시 문명의 보고로서의 그리스 조각상이 지닌 위용은 찾아볼 수 없이 비둘기와의 대사작용 속에 스러지기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문명의 시간이 자체로 무너지며, 끝내 자연의 시간 앞에 굴복하는 심상을 마주한다.
요컨대 그의 작업은 근과거에서부터 최근까지 ‘문명’과 ‘시간’을 축으로, 통시적이라기보다는 공시적인 스케일의 반성(reflection)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한 반성의 결과는 대체로 문명의 막대한 규모와 위력에 더해, 그 배면의 무상함, 무용함, 덧없음, 허무 등을 체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달리 말해 그의 작업을 보고 난 후,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집요하게 쌓아 올린 것들(예컨대 고층빌딩, 백화점, 상하수도, 컴퓨터, 고속철도, 비행기에서부터 국가, 시장 그리고 역사와 과학 등)에 관해 ‘현타’라 할법한- 무언가 맥빠지는 감상이 들지 않는다면 작업을 잘못 독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미술사적 전통 위에 그를 정초해보자면- 그의 작업을 추동해온 것은 문명·이성·과학·전통에 대한 거부와 부정을 요체로 하는 다다이즘적(Dadaist) 영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일찍이 모든 예술 형식이 뒤섞여버린 포스트모던한 동시대 미술의 장 속에서 최은철의 다다적 제스처는 기존의 예술 형식에 대한 해체적 의지보다는 일련의 정제된 과정을 확립하는 데로 기운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과거 역사의 아이콘에 대한 주목->설탕 등 가변소재의 질료로 재가공->‘시간적 조각’이라 할법한 것의 형식화).
2.
전시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2024, 광명, 오분의일)에서 선보인 뒤 푸른지대창작샘터 결과보고전에 제시될 작업들 역시 위 맥락의 연장에 있다. 여기서 최은철은 예의 다다적 제스처를 통해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구사회를 풍미한 골상학(phrenology)과 작곡가 하이든(Haydn)을 연결짓는 기이한 일화에 주목한다:
1809년 사망 직후 매장되었던 하이든은 두 골상학 신봉자(피터와 로젠바움)에 의해 묘지에서 파올려져 머리를 도난당했다. 이들은 하이든의 부패한 머리를 이리저리 측정하곤 음악과 관련된 두개골의 융기부가 고도로 발달했다는 결론을 내린 후 살점을 발라내어 그의 두개골을 비밀리에 전시했다. 이들에게 고이 간직되던 하이든의 두개골은 수차례 주인을 바꿔 돌아다니다 145년이 지난 뒤에야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위 사건을 모티브로, 최은철은 유골과 음악, 골상학적 도표가 뒤섞인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백토로 빚은 척추뼈들을 고리 모양으로 이어 월계수 잎과 엮은 <척추월계관>(2024)과 바로크풍 창이 뚫린 직사각형 구조물 위에 골반뼈와 갈비뼈 등을 배치한 <Bergkirche(베르크키르헤)1>(2024), 발뼈, 다리뼈 등과 함께 바로크풍 장식 조각을 간이 선반에 올린 <유해>(2024)는 하이든의 머리를 둘러싼 기괴한 에피소드에 입장하는 가교적 의미망을 만든다.
<척추월계관>이 명예를 기리는 월계관과 유해를 결합함으로써- 골상학으로 표상되는 ‘선진 유럽 문명’에 의해 능욕당한 하이든에 대한 유감과 헌사를 블랙유머의 형식으로 조형한다면(“유럽에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이든 씨”), 주요 부위의 뼈들이 부재해 듬성듬성 비어있는 <Bergkirche>는 유해가 온전히 모이지 못했던 하이든의 무덤을 암시하며, 자연물처럼 변형되는 듯한 갈비뼈를 통해 제의적 상황을 만든다(“이제 성불하십시오, 하이든 씨”).
여기 더해 <유해>는 마치 상점에서 사용할법한 상품 진열대의 디스플레이 구조를 차용한 간이 선반에 여러 부위의 뼈조각들을 배치하고 바로크풍 장식 파편들을 함께 둠으로써, 필시 다양한 두개골 표본을 자랑스레 전시하고 응시했을 과거의 ‘골상학적 시선’을 재연해보인다(“나는 두상의 형태와 재능·성격·지능 사이의 상관성을 증명하는 여러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네”).
한편 우리는 전시장을 가득 채운 기묘한 음악과 더불어 앞선 작업들을 살피게 되는데, 하이든을 연상케 하는 가발이 올려진 상자 설치물 <바로크 뮤직박스>(2024)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은 <골상악 드로잉>(2024)의 악보를 연주한 것이다. <골상악 드로잉>은 ‘긍정적이면서 정직한 사람,’ ‘모성애가 없는 사람,’ ‘전형적으로 게으른 사람’ 등, 두개골의 특정 형태로부터 인간 성격 유형을 도출한 과거 골상학 저작 삽화 이미지의 윤곽에 맞춰 하이든의 대표곡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의 음계들을 우겨넣고 변주한 일종의 유사악보다. 골상학 도판의 형태와 악보의 형태를 동시에 가진 셈이다. 이에 따라 경쾌하고 밝으면서도 진중한 심상을 전달했던 하이든의 역작은 장조에서 단조로, 협화음에서 불협화음으로 왜곡되며 간신히 원곡의 흔적만을 유지한다. 달리 말해 <골상악 드로잉>은 골상학에 의해 짓이겨져 기괴해진 비-음악을 그려 보이며, <바로크 뮤직박스>는 ‘하이든...이었던 것’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 뮤직박스>와 <골상악 드로잉>은 하이든의 수난사에 관한 위악적인 공감각적 서술이라 해도 좋다.
앞서 서술한 일련의 작업들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논평은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정물>(2024)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ly)의 <바니타스 상징물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1651)을 오마주한 페인팅으로, 얼굴 없는 하이든이 자신의 초상화를 든 채 마치 어두운 영안실과 같은 음울한 흑록(dark green)의 단색 속에서 여러 정물과 함께 화면 밖을 응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정물들은 베일리가 원작에서 의도했던 바와 같이 배치되어있는데,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 시들어가는 꽃, 죽은 자의 해골, 이들 옆에 놓임으로써 무색해지는 보석과 장신구들이 흐드러져 있는 식이다. 걔 중 한 귀퉁이의 두루마리에는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성경 전도서(Ecclesiastes) 구절이 적혀있다.
얼굴(머리)을 잃은 하이든은 눈, 코, 입이 제거되어 텅 빈 표정으로 본래 자신에게 머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듯 초상화를 잡고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의 베일리가 늙은 베일리의 초상화를 잡고 있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생의 무상함을 가리켰던 원작의 구도는, 자신의 머리를 찾아 헤매는 하이든의 블랙유머로 미끄러진다. 이 같은 바니타스 정물과 머리 없는 하이든이 빚어내는 몽타주 효과는 결국 문명과 이성, 역사에 대한 불신과 조롱으로 귀착된다. 요컨대 하이든의 그 모든 업적과, 파묘 후 머리를 도굴했던 이들의 광기와, 그 같은 광기를 지탱했던 ‘골상학’이라는 이름의 문명과 과학이 도저한 시간의 파도 앞에 무상하다는 것이다. 최은철의 시그니쳐라 할법한 설탕으로 빚은 해골 작업- <익명의 두개골>(2024)이 이내 녹아 곧 눌러 문드러지게 될 것처럼 말이다.
3.
본 전시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의 테마가 되는 ‘골상학’은 결국 ‘문명·이성·과학·전통’을 가리키는 알레고리인 바, 최은철은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역사적 과학’을 경유하여 기성의 것 일체를 향해 예의 냉소 섞인 다다이즘적 몸짓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선 동시에 그간 최은철의 작업 경향으로부터 일정하게 단절하는 새로운 패턴도 읽힌다. 이전 최은철의 작업이 그리스 조각상이나2, 유적지3, 도자기4, 시멘트5, 도시6 등 대문자 문명을 표상하는 직관적인 기호를 채택한 후 이들이 번성하고, 무너지고, 순환하는 논리적 구조를 만듦으로써 공시적인 문명비판(critique of civilization)을 수행했다면, 본 전시의 작업들은 ‘하이든과 골상학’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의 일화(anecdote)적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구체적이고 통시적인 문화비판(cultural critic)의 뉘앙스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이는 관조적인 철학자의 시선에 비친 ‘문명’과, 생기로운(vital) 저널리스트의 시선에 비친 ‘문명’ 사이의 간극이라 할법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형식상의 전환이 그간 일관된 태도로 문명을 비판해온 그의 작업 궤적에서 모종의 결산을 치르고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출발점일지, 주변적인 변주일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의 작업구성 원리가 상징(symbol)에서 알레고리(allegory)로 향할 가능성이 커졌음은 명백해 보인다. 상징은 보편적으로 확립된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의미작용이다. 그리하여 상징에서는 의미의 군더더기가 없이 표상과 대상의 직접적이고도 무매개적인 통일이 일어난다. 상징의 세계에서 십자가가 신의 현전을 나타내고, 태양이 생명력과 탄생을 나타내듯, 그간 최은철에게 그리스 조각상과 유물 등은 문명 일반을 가리키는 상징적 오브제로 사용됐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확립된 사회적 합의에 기대기보다는 특수한 맥락에 의해 성립하며 표상의 내적 요소들 간의 배치를 통해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의미작용인 바, 표상은 대상과 통일되는 일 없이 대상의 언저리를 가리키게 된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에서 등장하는 포도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기보다는 ‘우리가 욕망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대상-미지의 X’를 가리키는 것이 좋은 예시다.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는 정세적이고 우연적이며 구체적이다. 마치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에서 제시된 뼈 설치물들과 변주된 음악, 왜곡된 악보들이 곧바로 ‘문명’을 의미하기보다는 전시 자체 내 맥락을 통해 사후적으로 ‘문명’에 가닿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최은철 작업의 일관된 심상이었던 무상함, 무용함, 덧없음, 허무의 실체 역시 보다 구체적으로(여러 표상들의 우연적이고도 맥락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감지된다. 억겁의 우주적 시간 앞에서 연약하기만 한 문명의 시간은 이제 상징을 통해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관조되기보다, ‘골상학’이라는 유럽의 ‘역사적 과학’ 속에서 의미의 군더더기를 남기며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우주의 시간은 역사와 보다 격정적으로 대립하며 그것을 해체하는- 구체적인 비판적 항으로 성립한다.
《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 이후에 이 같은 알레고리적 구성을 더욱 밀어붙인다면, 최은철은 아직 상징으로 미처 성립하지 못한- 동시대인들이 섬겨 마지않는 표상들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 미래 배우자의 자산과 스펙을 내게 맞춰주는 결혼 정보회사, MBTI, 자기계발서, SNS, 선진국, 대기업 입사, 한미동맹, 자유시장 경제와 같은 표상들 말이다. 이들 표상이 항상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을 뒤에 지고 있는 최은철의 시야에 걸린다면 어떤 배치로 드러나게 될까. 그때 최은철 특유의 허무, 무상함의 표정과 시선은 한결 선명한 낯을 띠게 될 것 같다.
- 하이든이 최종 안장된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소재의 가톨릭 교파 성당으로, 하이든을 후원했던 에스터하지(Esterházy) 가문에 의해 18세기 초에 지어졌다. 본래 훈트슈투름 묘지에 매장되었던 하이든의 유해는 1932년경 이곳으로 이장됐고, 1954년에는 두개골 유해까지 합쳐서 최종 안장된다. [본문으로]
- <잠의 신>(2022), <Prometheus>(2022) [본문으로]
- <유동적인 흐름의 프로세스>(2020) [본문으로]
-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2022) [본문으로]
- <Foliated Rocks>(2022), <Polar Substances>(2017) [본문으로]
- <Wave>(2020), <설탕도시>(2022) [본문으로]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은철 개인전_〈요제프 하이든을 위한 골상악 세레나데〉(광명, 오분의일, 2024.9.3.-9.29)을 위한 노트 (0) | 2024.09.20 |
|---|---|
| 그대들, 어떻게...살 수나 있겠는가: 복합 위기 속 지옥불반도 (1) | 2024.02.15 |
| “뱀파이어와 좀비, 혹은 자본주의와 종말을 사유하기”에 대한 토론문 (1) | 2023.11.28 |
| “탈정치의 정치화 속에서 주체화된 이들과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0) | 2022.06.07 |
| 김세은 작가론: 제 1자연의 부재를 감내하기, 제 2자연에 머무르기 (0) | 2020.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