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관계성을 중심에 둔 새로운 유물론적 경향: "존재론적 전회"

by 정강산 2017. 4. 1.

2017, 3, 3에 작성된 글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1915)


과연 유물론은 무엇일까? 사회구성체에 대한 경제의 결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인가? 물질이 관념에 앞선다는 말인가? 재화 등의 부를 말하는 것인가? 사실 이 개념의 용례에 대한 명백한 합의는, 여타의 개념들이 그래왔듯 공백상태로 남기 일쑤였고, 그만큼 물질성 자체 혹은 그에 대한 메타인식으로서의 유물론을 비롯한 개론적 연구는 적어도 한국에선 보기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최근 대두되고 있는 유물론의 새로운 경향을 비롯한 물질성의 개념 전반을 탐구하는 김환석 교수의 논문은 더 없이 훌륭한 자료가 되어 줄 것이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그의 작업을 개론적으로 소개해온 김환석 교수(이하 “필자”로 표기함)가 본 논문(“사회과학의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을 위하여”, 경제와 사회 112호, 2017)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질성 개념의 다수성과 복수성을 사회과학 연구의 대상으로서 관철시키는 것이다. “다원적 물질성”(225p)과의 관계를 필자는 논문의 곳곳에서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시도는 종래의 유물론적 범주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소요들의 다원성과 이질성”(같은곳)과 대중들의 “일상적 경험”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서 사유가능하게 만드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가 제시하는 종래의 유물론의 범주들은 3가지 경향으로 요약되는데, ‘윤리적 유물론’, ‘존재론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이 바로 그것이다:


윤리적 유물론에서 물질을 사유하는 경향은 일상적 상황에서 주로 관측되는 것으로서,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추동력이 삶의 물질적 쾌락과 육체적 안락을 위한 자기중심적 분투”(211p)라는 아이디어에 기대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이기심과 탐욕에 대한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던 유물론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컨대 주로 종교인들이 구사하는 어휘들 속에서, 혹은 주류 경제학의 전제(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이성적으로 생산/소비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지탱하는 문제설정 속에서 지속되어온 경향이다. 허나 필자에 따르면, 이는 근본적으로 소비를 추동하는 요인이 사물 자체(‘사용가치’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닌 모델이며(212p), 물질과 관련된 가치판단이 아닌 물질성 자체를 사유하진 못한다는 점에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215p)


존재론적 유물론은 ‘세계의 근본적인 기원이자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은 물질’이라는, 요컨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정신이 아니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215)는 생각에 기반하며, 원자와 같이 질량과 부피를 지니는 물리학적이고 실재론적 단위로서의 물질 개념을 가진다. 허나 존재론적 유물론 또한 한계를 지니는데, 그것은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물질이란 영구적 실체 또는 파괴 불가능한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진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216)이고, “행위의 상이한 규모들(scales)사이의 매개”(같은곳)를 사유해야하는(예컨대 국제적 분업과 체감 경제사이의 관계와 같이)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적절히 전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적 범주로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그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고 사회를 조직하며 역사를 구성해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동시에, 토대-상부구조의 모델을 통해 경제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법, 질서, 제도, 문화, 정치 등을 비롯한 이데올로기를 연역해낸다는 점(217p)에서(역사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대중적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형태를 띤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겠으나, 이런 평가는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거듭된 쇄신의 성과물들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환원주의라는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필자는 이들 모든 유물론적 범주들을 물질성의 구체적인 다수성, 내지는 물질성의 관계론을 사유하기에 부적절한 모델이라 주장하며, 물질성을 새롭게 사유할 모델이 요구됨을 지적한다. “전기 또는 음악의 물질성은 분명히 다중적이고 분석하기 쉽지 않다. 이것을 그저 골치 아픈 문제로 보는 대신에 물질성의 문제에 대면할 좋은 이유로 간주할 수 있다. 우리는 행위와 경험을 위한 많은 조건들을 창조하는 데 상이한 요소들이 참여하는 방식들을 연구해야만 한다. 또는 보다 정확한 말로 표현하자면, 상이한 요소들은 불변의 조건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교직하고 그 과정에서 재생산 및 변형이 된다”(218p). 이후의 논의는 최근의 지적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라투르의 작업에 착안하여 전개되는데, 그는 이른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로 표기함)’을 구체화 시키는 작업을 선도적으로 진행시켜온 프랑스의 학자이다. ANT의 핵심적 특징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존의 유물론을 지탱해 온 개체론적이고 독립적이며 실재론적인 단위로서의 물질성으로부터, 관계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질성으로 논의의 벡터를 전환시키겠다는 것이다. 과학기술학, 물질문화연구, 도시연구 등의 학문 분야에서 주로 식별되는 이러한 흐름을 ‘존재론적 전환’, ‘사물지향적 유물론’이라 일컫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소여의 유물론을 지탱해 온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허물고, 그들을 “행위자(actor)”라는 개념 속에서 상호적이고 통합적으로, 관계론적으로 사유하겠다는 것은 주체-객체, 개인-사회, 신체-사물의 대립을 ‘존재’라는 초월적인 범주 하에 통합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에 따르면, 주체이든 객체이든, 인간과 그 이외의 모든 대상들은 그것이 사변적이고 초월론적인 범주로서의 “비은폐성의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시간성을 지니는가에 무관하게 “현존재(현존자)”로서 셈해진다(진태원, “시간과 정의: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 철학논집 34집, 2013.)).


이어 필자가 소개하는 라투르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열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은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222p), “라투르의 주장에서 핵심적 사항은, 우리가 연구를 수행하기 전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선에 대한 지식을 괄호 쳐야(bracket) 한다는 것이다”(같은곳),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닌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이 아닌 사물들의 커다란 이질성을 ‘비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같은곳), “물질은 불변하거나 항상 인식 가능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또 절대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224p).


흥미롭게도 이는 “도구(장치)는 신체의 확장”이라는 맥루한 식 어구를 개념적으로 분할하여 풀이하고 이를 여러 방식으로 변주하는 일에 가깝다. 물론 맥루한은 근본적으로 주-객의 도식을 문제 삼는 데에 관심이 없었으며, 미디어와 도구, 장치 대 신체의 개념적 구분을 인정한 채 양자의 상호작용 및 결합적 효과의 현상학을 연구했다면, 라투르는 명시적으로 장치와 신체, 비인간과 인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은 채(보다 정확히는 데리다적 의미에서 “말소하에” 둔 채) 논의를 전개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제 본 리뷰에서 제시된 내용을 라투르 본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을 인용해보자: 
“인공물과 기술에서 우리는 물질의 효율성과 견고성이 순응적 인간에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각인시키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과속방지턱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과속방지턱은 자신들의 의지와 이야기를 자갈, 콘크리트, 페인트, 표준계산법의 의지와 혼합하는 엔지니어와 장관과 법률제정자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해하려고 시도 중인 매개 즉 기술적 번역은 사회와 물질이 서로의 속성들을 교환하는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것이다”(Latour, <Pandora’s Hope: Essays on the Reality of Science Studies>, Cambridge, Mass: Havard University Press, 1999, 190p/본문 226p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필자가 말하는 관계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물론의 경향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설명하게 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주-객의 개념 분할을 전제로 하는 유물론의 모델에서 단순한 ‘도구’, ‘객체’, ‘비인간’으로서 규정되었을 과속방지턱은, 라투르적 시각에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와해되며 여타의 요소들과 복잡한 매개를 수행하는 “행위자”로서 규정된다. 이 ‘행위자’로서의 과속방지턱은, 물질이지만 동시에 단순한 물질을 초과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유물론의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상호교직적인 물질성을 ANT에선 ‘관계적 물질성(relational materiality)’이라 칭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매개라는 개념 속에서만 사유가능한 이 “관계적 물질성” 즉 “사회와 물질이 서로의 속성들을 교환하는 사각지대의 스펙트럼”의 요소들은 끊임없이 추가될 수 있으며, 자의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에 따르면 라투르는 2004년 작업 <자연의 정치학>에서 이 단위(“집합체”)에 대한 제한의 필요를 인정했는데, 그(라투르)에게 “정치란 타협이며 한 집합체가 그것을 통해 자기인식을 갖게 되는 의사결정을 말한다”고 한다. 필자에 따르면 “포함과 배제의 정치학”(226p), ‘범주화’는 복수적 단위로서의 집합체(collective/그것이 비인간 행위자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라투르가 ‘사회’ 개념 대신 제창한 개념인)는 “행위자”들간의 상호교류와 작용들의 조건이자 그에 대한인지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행위는 어떤 수준에서 대상에 관한 인지를 중단시킨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어떤 매개의 양태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개념적 용법 속에서)가치중립적이고 양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때 집합체라는 개념은 라투르의 ANT를 가장 명백하게 요약하는 개념이 된다. 이는 한편으로 정치를 감각의 분할, 즉 어떤 것은 가시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조직하는 일종의 범주화체계로서 사유하는 랑시에르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데(아쉽지만 그 구체적인 영향사적 관계는 여기서 따질 수 없을 것이다), 까닭인즉 양자 모두 구체적인 정치의 대상과 작동방식을 서술한다기보다, 정치의 현상학적 순간을 사변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에 골몰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으로서의 새로운 유물론?
필자는 2절에서 일상 어휘로서의 ‘물질적인 것’의 용례를 간단히 소개한 뒤, 보드리야르적 문제의식이라 부를 수 있을 전제를 통해 3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말하자면 그는 라투르를 비롯하여 일부 학문분과들로부터 발의되는 ‘새로운 유물론’의 흐름을 소개하는 과정으로서 소비문화에서 발견되는 ‘물질성’의 범주가 실은 단일한 사물 자체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이며 간접적인 물질적 요인들에서부터 연원한다는 점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일상적 실천을 되돌아보면 사물의 물질성이 지닌 어떤 면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물질주의적’이라고 알려진 현대의 생활양식에서 추구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사람들은 브랜드들로 표상되는 좋은 삶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를 구매한다. 그런데 이들 이미지는 그들의 물질적 토대와는 부분적으로 독립된 그 자체의 삶을 지니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인공물의 수가 증가하는 건 분명하지만, 정작 우리의 생활양식에서 물질이 하는 역할은 이처럼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비가시성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인간들은 언제나 이미 비인간 사물들 가운데서 존재해왔다.”(213-214p)


<소비의 사회>,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부터 <시뮬라시옹: 포스트 모던 사회문화론>에 이르는 선회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던 보드리야르의 작업들을 관통하는 특징은, 그 분석의 범주를 생산에서 소비로, 물질에서 기호로 이동시킨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 인간은 실제 물질과 재화들의 형식, 양태에 큰 관심이 없기에, 상품은 근본적으로 사용가치와 가치에 조응하는 구체적노동과 추상적노동의 모순적 통일체가 아닌, ‘상징’이자 ‘기호’로서 독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런 전제에서 탄생한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소비의 현상학에 관한 한 독보적인 성취를 이뤘음이 명백한 만큼, 그의 문제설정에서 ‘노동’이 사유될 공간은 없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갈무리, 2011.에 대한 서동진의 비판을 참조할 수 있다). ‘노동’이란 개념이 여전히 말소 하에 둘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역사유물론의 “착취” 개념을 지탱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본 논문이 겨냥하는 “사회과학의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 혹은 그것의 다른 표현으로서의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에서도 마찬가지로 연결되는 문제로서, 이유인즉 위와 같은 흐름은 명시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처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세계와 생산양식 비판의 이론으로서 전유되어온 역사유물론의 그 지난한 전통은 과연 새로운 유물론을 통해 기각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찬찬히 따져볼 문제일 것이다.


한편 이때의 관계론이란 헤겔, 혹은 후설 또는 마르크스의 의미에서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헤겔에게 관계란 모순을 구성하는 대립물로서 주어진 객관에 대한 주관의 작용을 통해- 점차 완전해지며 이성을 향하는 지양과 전화의 운동이고, 후설에게 관계란 개체론적 시각에서 파악 될 수 없고 “판단중지”를 통해 가늠되는, 현상에 대한 비배타적이며 상호적인 이해를 담지하는 상태였으며, 마르크스에게 관계란 경제가 작동되는 역사적이고 특정한 물적 조건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상충되기까지 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세계의 개념적 구분을 완전히 말소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허나 본 논문이 소개하는 ‘존재론적 전환’의 흐름은, 기꺼이 유물론을 자처하면서도, 일종의 초월적 관계론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제거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분을 동시에 삭제한다(물론 그것은 일종의 단서와 조건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매개”라는 개념 또한 종래의 유물론적 용례에서 이탈한다. 마르크스-아도르노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흐름에서 ‘매개’란 주체에 앞선 객체, 즉 개인에 앞선 사회(혹은 시장)의 결정적 위상이 주체와 개인을 ‘이미’ 관통하고 있다는 맥락으로 사용되어 왔다. 반면 라투르에게 매개란- ‘객체’와 ‘사회’는 거부 되는 것이기에, 수많은 미시적 경험과 현상들의 상호교차성 및 포개어짐을 지칭하는 개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정형적이고도 비정형적인 물질들의 중첩 상태를 가리키는 매개와, 주-객의 대립 속에서 “객체의 우위(아도르노)”를 지시하는 매개의 용례를 엄격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제 필자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자.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인 것과 비인간인 것의 구분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의 인성(personhood)이 비인간인 사물들과 대면하여 구성되는가에 관한 것이다.(...)흔히 인간성이란 비인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 행위에서 인간들은 비인간들과 얽힐(entangled)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21p. 중략은 인용자) 이는 언뜻 보기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고, 지식 사회학의 한 방법론을 소개하는 듯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주장이다. 허나 이러한 구절이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거부하는 이른바 ‘신 유물론’의 알리바이를 지탱하는 구절로 동원될 경우 문제는 다소 복잡해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난다.


“이 모든 분야들에 공통되는 것은, 윤리적/존재론적/역사적 유물론과는 달리, 물질성이 배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성에 대한 경험과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며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들에서 물질은 순수한 인간 간 상호작용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함께있음’이란 ‘사물과 더불어(with things)’ 함께 있음을 함축한다는 말이다”(219p).


허나 필자는 라투르의 맹점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라투르의 기획에서 아직 남는 의문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차이에 대한 전제를 우리가 정말 그렇게 급진적 방식으로 괄호 칠 수 있느냐이다. 우리의 명시적 목표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광대한 회색 지대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과 위치이동들을 연구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논의는 항상 양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전제를 수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222p).


그런데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다소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ANT가 현실 속에서 아직 유의미한 성과(결과물)를 내지 못한 채 몇몇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경향이 있으며, 필자가 지적하듯 “양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전제를 수반”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 무리 없이 현실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것이 주-객의 도식 속에서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 물질성에 대한 연구를 위한 시도임을 인정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 없다(앞서 적시했듯, 라투르는 ‘인간’ 개념에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라는 개념 대신 ‘비인간적 범주’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집합체(collective)”란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물질성에 대한 경험과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사실 객관적으로 묘사 가능한 실재가 없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설령 그 조야한 용법에서조차 현실개입적인 만큼 비판적인 과학의 개념으로서의 위상을 지니던 ‘유물론’이, 뉴에이지적인 영성주의 혹은 전근대적이고 탈세속적인 도교와 외려 친숙한 것으로 탈바꿈하게 될 과정의 단초를 식별할 수 있다. 이는 라투르의 작업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으로 요약되는 근대성에 관한 불신을 담지한 수많은 ‘post~ism’의 흐름의 연장에 있기 때문인데, 서동진은 이를 두고 ‘아도르노적 의미에서의 “객체의 우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일종의 불가지론으로서 객관의 불가능성에 침잠하는 유사 유물론으로의 퇴행’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망원사회과학 연구실의 세미나 <새로운 유물론의 시좌>와 관련된 텍스트들을 참조하라). 어떤 측면에서 그것이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가해진 최근의 전면적인 공격임을 감안할 때, 이와 관련된 비판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유기적 지식인,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라투르 식의 시도들을 소여의 유물론이 설명할 수 없었던 공백을 메워주는 새로운 유물론으로서 수용해야 할까, 혹은 외려 유물론을 가장한 현상학적 관념론의 한 경향으로서, 비판적 독해를 통해 바라봐야 할까?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2017.03,03)


같이 읽으면 좋을 책과 논문


홍성욱, <인간, 사물, 동맹>, 이음, 2010.
서동진, “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1), 2017. 
http://www.homopop.org/log/?p=1024#more-1024
서동진, ”사진이 사물이 될 때, 사진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 2016.
브루노 라투르 홈페이지: http://www.bruno-latour.fr/


(리뷰아카이브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