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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970년대부터 본격화 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화

by 정강산 2017. 4. 1.

2017, 3, 16에 작성된 글


Kazimir Malevich, Complex Presentiment: Half-Figure In A Yellow Shirt(1928-32)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오늘날 양자의 실천이 교차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하고, 계급 모순 이외의 모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문화적일 뿐이고, 최종심급에 무지하며 성별환원주의적인 정체성 정치의 경향을 띤다”: 대략 이런 모양새로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이들이 상호협력적일 때가 있기나 했던 건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알다시피 볼셰비키는 10혁명에 뒤이어 곧바로 1918년의 1차 헌법에서, 북한은 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발족과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 승리 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더불어(물론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화민국의 1946년 헌법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제기되었으나, 헌법 반포를 전후하여 공산당과의 2차 국공내전에 돌입하며 헌정이 실질적으로 중지되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참정권을 전면적으로 천명했다.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은 초기 자유주의적 개혁의 흐름과 결합한 여성참정권운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후로, 세계 각지의 많은 좌파들과 급진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적 실천들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당대의 뛰어난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르 콜론타이 등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가능성을 증언하는 화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대략 70년대를 기점으로 깨지고 마는데, 그것은 객관적 측면에선 권위적인 관료들과 국가에 대한 반발에 잇따라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서 천명했던 68을 포함하는 당대의 정세적 측면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프레드릭 제임슨)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등의 영향으로부터 연원하며, 주체적 측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가사노동 논쟁”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경상대 경제학과 정성진 교수(이하 “필자”로 표기함)의 논문(󰡔가사노동 논쟁의 재발견: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페미니즘의 결합 발전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 10(1), 2013)은 이 가사노동 논쟁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다시금 양자의 연대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 가사노동 논쟁 당시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했던 “‘무급 가사노동 착취-> 자본의 잉여가치 증대’” 명제를 비롯한 ‘이중체계론’의 함의와 한계를 따져보는 것이 본고의 주된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비생산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필자에 따르면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지, 혹은 생산적 노동인지를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간에 상충하는 입장이 제출 되었는데, 이는
1. 가사노동의 생산물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 노동력상품이라고 간주하고, 따라서 가사노동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노동이며,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입장과,
2.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임금노동과 달리 가정 구성원의 직접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만 생산하며,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유지와 갱신에 기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생산적이지 않다고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당시의 논자들을 위의 도식에 따라 분류해본다면, 논의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칠게 묶어 전자에는 달라 코스타(Dalla Costa), 세콤베(W.Seccombe), 후자에는 벤스톤(H.Benston), 힘멜바이트(S.Himmelweit), 모훈(S.Mohun), 몰리뉴 (J.Molyneux) 등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위의 논자들이, 그 첨예한 대립에서조차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했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의 두 입장은 가사노동을 생산노동으로 간주하는지 여부에 대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 자본의 잉여가치 증대에 봉사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이는 당시 가사노동 논쟁 참여자 대부분이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 따르면 “무급 가사노동 착취->자본의 잉여가치 증대”라는 도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부장제 가족의 ‘이중체계’ 혹은 ‘접합’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도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Wages for Housework’)을 당면과제로 요구했던 당시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가사노동 논쟁의 주역들이 공유했던 위와 같은 명제의 문제의식과 어떤 수준에서의 설명력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으론 “가사노동이 자본축적의 진전에 장애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야”함을 지적하며, 원리상 이러한 도식이 마르크스의 가치론 속에선 “논증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그러한 논증의 비유효성을 열거한다. 우선 필자가 드는 첫 번째 예는, 굳이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아니라 스라파(P.Sraffa)의 생산가격 방정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예는 사용가치만을 만드는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을,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적 노동인 생산노동과 동일한 기준으로 상정함으로써 유발되는 개념적 혼란이다. 시장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 속에서 승인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적 노동이 구체적인 유용노동과 비교하는 순간, 상품에 관한 마르크스의 핵심적 진술, ‘가격 형성과 교환의 준거점으로서의 가치’라는 과학적 도식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에 동원할 수 없게 된다. 덧붙여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노동력 가치를 억압한다는 주장” 또한 한계를 갖는데, 그 주장에 따르면 무급가사노동의 축소 경향은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했어야 하나, 현실 속에서 “무급 가사노동의 축소는 자본이 이용할 수 있는 잉여노동의 풀을 증대시킴으로써 자본주의에 고유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 필자는 1980년대 이후 고소득 OECD국가를 비롯한 한국에선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급격히 증가했고, 가사노동의 시장화가 진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가사노동과 자본축적 사이의 관계는 이처럼 양가적이기에, 보다 세심하고 총체적인 접근이 요구됨을 주장한다.


이후 필자는 가사노동을 비생산노동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을 반복하며, 생산노동과 비생산노동의 개념적 구분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노동은 무엇보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판매와 이윤을 목적으로 가치와 잉여가치, 즉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인데, 가사노동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무급노동이기 때문에, 가치 생산 노동이 아니다”. 허나 이는 가사노동의 위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가사노동이 (상품교환의 근거가 되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것과, 그것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양립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론의 계승이냐,
가치론의 확장이냐


따라서 우리가 필자의 논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떤 유일하고 소중한 것을 명시하기 위한 일상 용법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엄밀한 개념으로서의 ‘가치’가 가사노동 논쟁에서 상당부분 오해되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 소모되는 상품들을 생산하는 일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이때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총노동과 개별 노동 간의 관계 속에서 비교를 통해 수렴하는 평균값’이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이 평균값 언저리에서, 사회적 관계와의 매개를 통해 규정된다. 허나 가사노동(가정 내부에서의 빨래, 밥 짓기, 설거지, 육아 및 돌봄, 청소 등)은 그것이 외주화 및 시장화 되지 않는 한, 평균으로 수렴하기 위한 비교대상을 갖지 않으며, 그 노동의 과정과 산물이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한 것도 아니다. 즉 가사노동은 시장에서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작동하는 ‘추상적 노동’이 아닌, 구체적 노동인 것이다.


경험세계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노동은, 이런저런 신체적 소요를 야기하는 다양한 구체적 노동이 있을 뿐이다. 허나 그것이 고용관계 속에서 이뤄지며 화폐와의 교환 속에서 수행되는 임금 노동인 이상, 구체적 노동은 자본주의적 추상화를 거쳐 이중화되고, 동시에 생산, 교환, 유통, 분배의 전 과정에 유기적으로 참가하는 추상적 노동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을 구분한 까닭이며, 전자를 사용가치에, 후자를 교환가치에 조응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그 자신의 업적을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구분해낸 것’이라 설명한 이유이다. 즉, 마르크스에게 (상품)‘생산’개념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매개된 것이며, 그 속에서 특징적인 것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생산노동’이란 그 앞에 ‘(자본주의적)’, 혹은 ‘(가치를 생산하는)’이란 표현을 생략한 상태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를 염두에 둔 이론적 기획 속에선 오히려 가사노동은 비생산노동이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히 합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요지이다. 즉, “가사노동은 마르크스가 말한 ‘진정한 노동(reale Arbeit)’이라 할지라도 노동력상품의 가치 규정에는 정의상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제도들의 역할과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던(B.Dunn)등이 시도하는 가치개념의 확장을 비판하며, 그와 같은 주장을 “초역사적인 가치 개념”으로 간주하고 “리카도의 투하노동가치론으로 역행”하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사노동과 같은 비상품 비자본주의 영역을 설명하는 데는 마르크스 가치론의 설명력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이에 따른 가사노동의 시장화 현상이 “마르크스 가치론의 적용 범위”를 확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가사노동 논쟁의 내적 한계와

페미니즘의 체제 내화


그가 보기에 가사노동 논쟁 자체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1. 남성과 여성간의 분업과 차별이 발생했던 이유를 증명하고자 했던 여성주의의 애초의 목표를 망각하고, 성별분업과 차별을 전제로 삼은 채 진행된 논의(한편 이는 남녀임금격차를 성별대립의 관점으로 독해하는 최근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2.(주로 여성이 수행하는)무급가사노동 이외에 유급 여성노동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
3. 논의 전개 속에서, 주제는 당초 가사노동 논쟁의 쟁점이었던 가사노동이라는 토픽을 벗어나 ‘재생산 노동’과 ‘사회재생산론’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임금노동-생산, 가사노동-재생산이라는 도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양자 모두가 함께 “현재와 미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재생산에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하는 것이었으며, 성인 남자노동자의 유지에만 강조점을 둠으로써 남성노동 재생산 이외의 세대재생산의 문제를 간과했다.
4.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양자를 결합하는 방식으로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역사적 산물로서의 가부장제 모두를 강조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이중체계론’을 제창한 하트만(H.Hartmann)에 이어 이를 체계화 시킨 델피(C.Delphy)의 ‘가내 생산양식론(domestic mode of production)’에 따르면 “가내생산양식에서 남성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착취자 계급”이 되는데, 이에 입각한다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양자를 동시에 평등한 심급들로서 인정하는 것이 당위적으로 요청되어 ‘전제’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양자의 관계와 그 구체적인 역학을 규명하고자 했던 가사노동 논쟁 본래의 문제의식이 흐려진다.


필자가 제시하는 이러한 모든 한계들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과정에서 식별된 것들인데, 그 결정적인 불화의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관철과 함께 이뤄진 정치의 보수화와 급진운동의 약화로 논쟁 당초의 문제의식들은 이어지지 못하고 “거의 소멸”되는데, 이에 따라 사회운동과 결합한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급격히 수축하여 많은 분파가 이론적 방향으로 선회하고 경도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와 공모하고, 엘리트화 되며, 제도화되고 협소해졌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반목인 동시에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의 공명이었으며, 자본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에서의 퇴보를 뜻했다. 필자는 포겔(L.Vogel), 기메네즈(M.Gimenez), 하우크(F.Haug) 등과 함께 이러한 과정에 주목하며, 페미니즘이 체제 내화 되어가는 과정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간의 연대 가능성을 긍정하고, 그 근거를 마르크스의 <기계와 대공업>(자본론 1권 15장)에 대한 독해로부터 찾는데, 이 속에서 마르크스는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 제시된다.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


“기계는, 근육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근육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육체적 발달은 아직 미숙하지만 팔과 다리는 더욱 유연한 노동자를 사용하는 수단으로 된다.(...)기계는 즉시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노동자 가족의 구성원 모두를 자본의 직접적 지배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임금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되었다.(...)기계는 노동자 가족의 전체 구성원들을 노동시장에 내던짐으로써 가장의 노동력의 가치를 그의 전체 가족구성원들에게로 분할한다”
(중략은 인용자. 󰡔자본I󰡕, 김수행 역, 비봉, 1991, 503-504쪽. 36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 전유를 위한 생산성 향상시도의 연장에서 이뤄진 기계설비의 도입이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며, 자본이 “여성노동을 대거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점과, 이를 통해 “성인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전가족 구성원으로 분할되어 성인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저하”되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율, 즉 이윤율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필자에 따르면 이는 가부장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 노동자와 남성 자본가가 합작하여 가족임금체제를 유지하고 노동시장에서의 배타적 지위를 누리겠다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사회 전체 측면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심화의 연장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마르크스가 동시에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의 시도가 열어젖힐 수 있는 긍정적 토대를 발견하기도 했음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래의 가족제도의 해체가 아무리 무섭고 메스껍게 보일지라도 대공업은 가정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에서 부인, 미성년자, 남녀 아동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족과 양성관계의 보다 높은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다.(...) 남녀노소의 개인들로서 집단적 노동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여기에서는 생산과정이 노동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위하여 존재한다)에서는 부패와 노예상태의 원천으로 되지만, 적당한 조건하에서는 이와 반대로 인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중략은 인용자. 같은 책 617쪽. 38쪽에서 재인용)


이때 마르크스가 가동시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논하는 “변증법적 비판”의 원형으로서, 이는 곧 대상의 모순, 양가성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전화가능성을 승인하는 인식론이다. 가부장제도의 와해와 여성노동의 문제들을 논하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요체를 종교비판과 물신주의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기계화 비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필자는 마르크스를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 규정하고, 페미니즘의 급진화와 반자본주의 투쟁과의 연대에서 여전히 마르크스의 원형적 사유가 일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그 구체적인 방식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으며, 양자의 연대 가능성 자체를 하나의 전제로서 간주하길 요청하는 데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현재화시켜낼 수 있을까? 혐오, 폭력과 관련된 담론이 여성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주된 개념어가 되어버린 오늘날, 사실상 성별분업과 남녀 임금격차, 차별 등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유물론적 설명의 모델은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유물론적 전제를 공유한 채 수행 되었던 가사노동 논쟁을 복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계급을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특수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력과 특권 관계를 계급억압으로 환원하지 않는”(J.Brenner/N.Holmstrom)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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