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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죽지 않고 산다는 것

by 정강산 2017. 5. 11.

젊은 PD 이한빛, 그의 죽음은 그의 섬세하고 고결한 심성 때문이었을까, CJ의 열악하고 모욕적인 노동조건과 살인적인 노동량 때문이었을까, 혹은 비대해지고 정교해지며 추상적으로 된 '사회'적 관계 때문일까, 그 과정에서 관철되어 온 분업 때문일까. 이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자본축적의 무의식적인 정언명령이 위의 범주들을 이미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허나 대답이 아니라 당장의 책임을 묻고 교정할 대상을 찾으라고 한다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전체에 맞선 개별시도의 본질적인 비대칭성 앞에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마는 것이다. 자살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사내 상담부처를 개설하고, CJ의 근무환경을 민주화 하고, 노동 시간을 축소하고, 타인에게 관심과 애정을 지니고, 생산을 통합적으로 이뤄지게 하며 고용유연화라는 경제적 추세를 다소간 제어해내는 등, 이 모든 것이 답이 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체계이자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이 관철되고 있는 역사적 국면에 우리는 실천에 관한 한 무수한 선택을 할 수 있으나, 그 중 하나를 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긍정적으로 담보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어떤 항목을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줄 대안으로 삼은 채 기대를 내걸어야만 한다. 때로는 내심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통해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믿는 척하며, 혹은 믿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기에 세계는 이미 너무나 거대해져버림으로써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다. 이런 생각에 침잠하는 순간 그 무엇도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허나 결국 역사를 산다는 것은 텅빈 형식, 기표, 심연, 무의미를 기꺼이 승인하고 긍정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간지를 목도하고서도 이성에 기꺼이 내기를 걸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내기를 거는 시늉을 하다보면 어느새 진지하게 내기를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