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0일
스피노자-들뢰즈-네그리-마수미 등으로 이어지는 내재성, 역능, 변용역량, 욕망, 정동 따위에 특권을 부여하는 철학적 경향은 한 개체의 신체 내부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과 열정'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상기한 내재성의 철학의 계보는 어떤 의미에서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과 실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초월성과 거리를 둔 채, 일어날 수 있는 변화 혹은 변혁 또는 혁명의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해명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가 오래도록 종교와 초월적 주권에 양보해왔던 '유토피아(를 향한 열정)'를, 인간이 구성- 생산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전제할 수 있게하는 변증법적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제임슨은 정말이지 선구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결국 인간을 벗어나선,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 어떤 설명과 개입도 불가능하다는 점이, 대립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분기되고 증명 된 것이다.(들뢰즈가 그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자리매김 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사실들을 너그롭게 볼 수 있다면 말이다)
허나 알다시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접근은 첨예하게 구별되고 각기 다른 결론을 향해가는데, 들뢰즈의 경우 유토피아는 한 인간에게 소여된, 주어진(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물리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주어진) 신체 내부의 생리적 특질(알다시피 들뢰즈는 이러한 삶의 욕동으로 충만한 신체를 기관없는 신체라 표현한다)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것인 반면, 제임슨에게 유토피아란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그리고 헤겔적 계기에서) 역사의 모순에 의해 억압된 것의 전치에서 사후적으로 관측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전자의 모델은 결과적으로 유토피아(혹은 공산주의)를 신체의 현존이 가정되는 한, 그 신체의 내부에서, 신체를 통해 간취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지시하는 한편, 후자는 유토피아를 신체와 신체 간의 배치를 결정하는 조건을 규정하는 '역사'로부터의 거세; 탈락; 괴리로 인해 촉발되는 것으로, 따라서 역사를 구성하는 사회적관계의 실재가 가정되는 한 결코 도달 불가능한 성질의 것으로 제시했다.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세례를 받은 네그리, 하트가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공산주의의 토대는 생산이 사회화 되는 과정 속에서 이미 마련되었고, 남은 것은 수탈적인 상부구조를 전복시키는 일'이라는 식의 주장을 해온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는 엄연히, 그들(네그리, 하트, 그밖의 자율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모델 중 하나를 택한 시점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시적 욕망의 행위자로서의 '다중'이라는 주체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허나 알다시피 이 개념들이 가정하는 공통성과 집단성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본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도 하며(알베르토 토스카노), 각 개체에 고유한 변용역량과 역능에 특권을 부여하는 제스처는 스콜라적 일탈 이상의 집단적 실천으로 귀결되기 힘들 뿐 아니라, '조직화'라는 강력한 실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이 되기 쉽상이다. 여타의 정치적 집단, 과거의 좌파적 전통으로 표상되는 '외부'로부터의 '순수성'을 간취하려 하는 이대 시위의 경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하는 소통과 변용역량, 기쁨의 감정은 실상 현실 속에서 화폐의 보유정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변형되고 소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와 동시에 물질노동을 폐기하고 욕망의 행위자로서의 '다중'을 내세운다.(이는 욕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이대 학생들이 주체가 된 자율적인 시위와, 그에 따른 승리를 값진 것으로 평가하는데에 전적으로 동의하되, 탈-중심화된, 분열된 주체성으로 파편화된 집회양상(혹은 저항의양상)을 보이는 이들에 대한 찬양은 불편한 이유다. 그들은 신선한 척하지만, 그들 또한 하나의 흐름 또는 유행으로부터 규정되는 일정한 철학적, 정치적 편향과 독단에 따른 선택 속에서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 체 한다.
이에 대해, 상기한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은 여전히 완고하게 재현의 체계를 사수하며 여타의 탈-중심주의적 조류에 관해 대립각을 세워주는 것처럼 보인다. 매개되지 않은 직접성과 자율적 신체의 현존은 실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데올로기는 총체적 역사를 경유하고, 언제나 그것에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대 학생들의 탈-중심화된 정치의 역설적인 중심은 재발굴되고, 전유되고, 변형되어야 할 무엇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다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로서, 불순한 외부와, 역사와, 자본주의와 마주해야 한다. 적어도 내게 이대시위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Not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지 않고 산다는 것 (0) | 2017.05.11 |
---|---|
부르주아 연합으로서의 '자유와 재산 방어연맹'과 '전경련' (0) | 2017.04.01 |
이방인에 관한 노트 (0) | 2017.04.01 |
아도르노에 대한 노트 (0) | 2017.04.01 |
트럼프에 관한 노트 (0) | 2017.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