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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짧은 편지_"예술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by 정강산 2017. 5. 11.


3월 19일에 작성된 글


내색은 못했지만, 여러분들께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화두에 나름의 대답들을 준비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계신 것은 사실 제게 그 자체로 고무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뜬금없는 고백을 하자면, 이전에 집단오찬에 모인 몇몇 친구들과 의절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이에 대한 고민이 딱히 없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친구들은 수시로 교체되는 미술계 내부의 시시콜콜한 가십과 전시들을 창의적으로 독해하는 데에 관심을 쏟으며, 세련된 작업을 통해 이전의 미술사조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미적사조를 제창하는 일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는 그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러한 ‘새로운 사조’라는 것이, 미술적 실천 내부의 어휘들과 담론들을 바탕으로 하여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명백한데, 당장 역사를 보더라도, 당대의 사회적 기류와 정세, 변화 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발생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나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학도들이 예술을 독자적인 사회적 실재로서 전제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런 전제는 결과적으로 내실이 없는 작업들로 이어지거나, 더 나쁘게는 기회주의와 공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예술이 그 자신의 내적 규범들을 통해 완결될 수 있다는 전제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까지도 가닿지 못합니다. 혹은 그러한 질문에 이르는 순간 손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뿐,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전제를 의심 없이 수용하게 될 때, ‘세계’는 사실상 말소처리 되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폐적인 예술일 따름입니다.


반면 예술이 사회적 실재가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태동하는 것은 반영론입니다. 하지만 예술은 세계를 반영하기만 하면 된다는, 무미건조한 기계적 반영론으로부터 예술의 존재근거를 찾기도 어려운 일임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충실한 기계적 유물론에 따르게 될 때의 귀결은 어쩌면 스탈린주의 치하의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물론 그로이스의 생각과는 다소 상반된, 상식적인 주장일 테지만요). 혹은 작가들의 반지성주의에서도 역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실재가 아닌, 일종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효과로서, 광의의 물적 토대로부터 규정되는 예술의 위상을 인정하되, 그 객관적 토대의 내부에서의 순수한 효과 자체로 환원되지만은 않는 틈, 주체적 계기 또한 긍정해야하는, 다소 어려운 인식론을 간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술과 세계의 거리, 혹은 예술과 사회의 이용요구 사이의 거리를 언제, 어떻게 취할 것인지와 관련된 쟁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비롯하여,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사실, 예술과 사회의 거리를 벌리고 자율화되고자한 유미주의에 맞서, 예술과 사회의 거리를 극도로 좁히고자 했던, 사실상 양자 간의 구분을 허물고자했던 시도이기도 했습니다(물론 이는 아방가르드를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하는 학자들에 따라 달라지긴 합니다. 예컨대 아방가르드를 넓은 의미에서 ‘신사조’로서 정의한다면 유미주의까지도 아방가르드로 셈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과 사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이 사실상 예술적 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배움을 통해서, 혹은 내부의 합의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일 겁니다. 


결국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포지션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자 사이의 거리를 극도로 좁히고자 하는 것인지, 혹은 벌리고자 하는 것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전자를 예술의 타율성의 모델, 후자를 예술의 자율성의 모델이라 한다면, 둘 중 하나를 끝까지 밀어붙여보는 것도 좋겠지만 정세에 따라 양 모델 사이를 오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론 모더니즘적인 형식주의의 편을 들어주다가도 때론 기꺼이 재현을 통해 대상을 의지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의 편을 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문예론적 실천의 역사를 직접 파악하고자 한다면, 아도르노, 루카치, 브레히트, 랑시에르 등의 작업들을 참조하며 함께 공부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들의 작업들과 논쟁을 보면 결국 예술의 자율성/타율성 간에 어디에 방점을 찍는지가 결정적인 분기점이 됩니다.


아무튼 다시 ‘예술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이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는 것이 현재의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위에서라야만, 정세적으로 적절한 미적 실천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이 질문은 굉장히 원론적인 것인 만큼,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효과로서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관한 스터디의 와중에 나온 것인 만큼, 예술적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할 것인지, 예술과 사회 양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예술의 존재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과도 연결되어있을 것이란 점에서, 자신의 존재 기반에 대한 성찰 없는 예술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외려 시의적절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