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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T.W.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세창출판사, 2014. 3강. 45-63p. 발제문

by 정강산 2017. 5. 11.

 

Olja på duk, Textilarbeterskor(1927)



핵심어: 사회, 실증주의, 객관적인 운동법칙, 현상, 본질, 부분, 전체, 개인, 사회, 매개

 

3장에서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변증법적)사회학의 대상 설정과 사회학의 목표, 이를 통한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우선 아도르노는 사회학의 대상들을 선택함에 있어 본질적인 것에 대한 파악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그러한 본질은 확실한 직접성에 본질적인 물음들이 향하는 것보다도 훨씬 완벽하게 본질이 나타나는 현상들”(45)에서 나타날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 본질적인 것은 언제나 현상형태로써, 현상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상들 자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며, 이는 그가 상정하는 개인과 사회, 주체와 객체의 대립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단순한 대상에게서 그것이 본질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 것인지의 여부를 선취적으로 알아차릴 수는 없”(ibid)으며, “불변적인 것에 대한 결정은 일반적으로 실행에(...)놓여있다”(46)는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인 접근은 객관적, 실제적 세계의 모순에 대처하는 아도르노의 변증법적방법론의 반영인데, 그에겐 교환이 지배적으로 된 사회에서, 총체적인 사회적 기능의 연관관계가 형성되고, 이는 곧 사회의 운동법칙으로서 스펜서가 말한 통합의 증대경향으로 나타나며, 화폐의 힘, 교환원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들을 동일화하는 데에 모순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순수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매개된 현실을 인지하고 비판하기 위한, 매개됨을 사유할 수 있는 변증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그가 실증주의와 공허한 관념론 양자를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증주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거부”(46)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증주의의 특징이 형이상학과 배후의 본질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일종의 대안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사회학이 받아들이는 기이한 선회”(47)를 아우른다고 말한다. 이 선회는 기대되는 통찰의 중요성을 향해서는 안되”(ibid), “중요한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ibid)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함으로써, 사회학내 관리의 모멘트라 할 법한 경향의 원인이 된다: , “어느 정도 확실하게 관리적이며 위에서부터 설정된 과제에 종속된 것을 특징이 사회학에 들어오게 되는 것”(ibid)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경향에 내재한 효과들이 독일 사회학 대회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이라 간주하며 적대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가 실증주의의 패악으로 꼽는 것은 첫 번째로 실제개념의 전도와 축소인데, 까닭인즉 그에게 실제란 주어진 사실들 자체라기보다, 그로부터 나타나는 본질과 절합된 한에서의 대상들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사회학자의 직원화로서, 이는 자율적인 학문 연구자의 자리에 조사-기술자를 채움으로써 사회학으로 하여금 사회의 객관적 운동법칙을 규명하고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통치의 테크놀로지로 전락하도록 한다(푸코가 말년에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더 일찍 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만일 그랬다면 연구의 상당부분을 우회하지 않은 채 진척시킬 수 있었으리라 회고한 대목을 떠올려 보면 좋을 것이다).

 

허나 실증주의적 경향을 내재한 관리의 인식론으로서의 사회학은 사실 사회학의 시작점에서부터 예고 되어있었는데, 애초에 윤리학과 독립된 자율적 체계로서 분과학문들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체계화 과정과 조응하며 19세기 말 공화국의 자기 갱신 시도로서 사회적인 것에 응답하는 속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학이란 애초에 사회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며, 이는 뒤르켐의 연대(주의)가 공화국의 이념으로 체계화되며 복지 국가의 모델을 성립해온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아도르노는 아마 이러한 점을 몰랐다기보다, 이른바 변증법적 사회학의 윤곽을 전달하기 위해 사회학 내 관리적 계기들을 의도적으로 지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더불어 아도르노 자신이 설명하는 사회학 내의 위험요인은 바로 단순한 사실 확인”(50)이거나 잘못된 본질성에 대한 구속력 없는 미사여구”(ibid)로 양극화된 경향들의 대립 자체다. 양자 모두 본질에 대한 통찰들을(...)역사적인 조건들에서검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본질적인 것은 사회의 객관적인 운동법칙들”(51)이며 이들이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운동법칙은 가변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ibid)는 동시에 사회적인 현상들에서 표현되었을 때만이 그 통용성을 갖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아도르노가 드는 예시는 일종의 상부구조로서의 계급의식과, 객관적인 운동법칙의 한 축으로서의 계급의 실재적 존재 사이의 괴리인데, 여기서 그는 개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라고 느끼고 있는지”(52)의 여부과 관계없이 생산과정 자체에 내재한 근본적인 위상차와 비대칭적인 층들은 실재적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개념 자체가 점차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되는 상황의 모순을 언급한다. 요컨대 사회의 객관적 운동법칙은, 여타의 이데올로기적 양태들이 규정하는 사회의 상을 결정하면서도 그들과 떨어져 있는 것으로, 공공연하게 숨겨진 것으로 되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현상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렇게 상황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회학자들은 본질 개념을 폐기하고 단순한, 주어진 사실들의 삽화적 나열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소멸과 같은 것을 사회의 객관적인 법칙들과 본질 법칙들로부터 도출해내는 시도”(54)가 필요하며, “계급들에 대한 본질 규정들처럼 확실한 본질 규정들을 붙드는 것이 사회학에 주어진 과제”(55)라는 점을 논증하고, “최소한 계급들과 같은 근본 사실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에서 출현하지 않는 결과에 이르도록 그러한 변경들을 이해하는 것이 사회학의 임무”(ibid)임을 피력하는 것이다. 이는 결정적인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명적이고 투시되지 않는 경제적인 진행 과정들에 의존되어 있”(ibid)는 과정의 한복판에 계급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매개되어 있지 않은 본질 개념들이나 일반 법칙성들을 포기하는 용기는 사실상으로 갖는 것이 바로 사회학에 부여된 임무”(56)이며, “사회학의 중심 개념은 사회의 개념”(59)자체임을 강조하며 강의를 정리한다. 결국 4, 5강에서 적시되는 것처럼, 아도르노에게 사회의 객관적 운동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의 동역학이며, 동역학의 모순을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비판적, 변증법적 사회학이다. 3강에서 검토된 것은 이를 이해하기 위한 교량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