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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미완)번역: 아도르노와 블로흐의 대담_<Something’s Missing>(1964)

by 정강산 2018. 5. 31.

Theodor Adorno and Ernst Bloch

무언가 빠져있다(원제: Something’s Missing)//1964


번역: 정강산

 

 

 

호르스트 크루거(모더레이터): 블로흐 씨, 당신은 유토피아라는 용어의 쇠락이 기술적(technological)세계의 완성과 관련되어있다고 보십니까?

 

에른스트 블로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일단 그것은 기술적 세계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술적 완성은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완벽하거나 놀랄만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매우 선별된 꿈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는 것에 대한 매우 오래된 희망(wish)을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올바르게 상기한다면, 리차드 데멀(Richard Dehmel)은 이와 관련된 시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새들만큼 자유로워지길이라고 말했죠. 그 희망은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있습니다.

 

달리 말해, 어떤 잔여(residue)가 있는 것입니다. 그 충족(fulfillment)을 통해 완수되지 않고 진부해지는 많은 것이 있는데, 즉 더 깊은 관점에 관계없이 각각의 실현은 그것에 대한 충족의 우울함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그 충족은 잔여 없이는 실제적이지 않고, 상상할 수 없으며 혹은 상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쇠락을 초래하는 것은 단지 이것만은 아닙니다.

 

덧붙여, 저는 이러한 쇠락이 매우 오래된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단지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슬로건은 어떤 실현가능성도 없는 구름 속 성’, ‘부질없는 기대정도로 평가절하 되었으며, 진부한 의미로 무언가를 상상하고 꿈꾸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러한 쇠락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이것이 유발된 것이 우리 시대에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제가 확실히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우리 시대가 유토피아의 어떤 향상(upgrading)’을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라 불리지 않는 거지요.

 

과학기술(technology)에서 이것은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라 불립니다. 달리 말해 그것은 과학기술에서 이익의 원천(grist to one’s mill)이라 불리는데, 여기서 제가 중요하게 강조해온 희망의 원리가 어떤 역할을 맡습니다. 그것은 그랬다면 좋을 텐데라는 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는 무언가가 실제로 그렇고,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맥락에서의 현실(reality)의 역할을 압도합니다. 이 모든 건 더 이상 유토피아적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혹은 그것이 유토피아적이라 불린다면, 그것은 오래된 사회적 유토피아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허나 저는 우리가 유토피아에 관한 정형화된 표현(topos)과 매우 멀리 떨어져 살지는 않으며, 그 내용들이 관련되어 있는 한, 유토피아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은 곳에 있다고 믿습니다. 애당초에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유토피아를 어떤 공간, 즉 멀리 남태평양(South Seas)에 있는 한 섬으로 구상했습니다. 이러한 구상(designation)은 후에 변화를 겪고, 공간을 남겨두고 시간을 기입했습니다. 실로, 유토피아적인 것, 특히 18세기와 19세기의 그들은, ‘희망의 땅미래로 번안했습니다. 달리 말해, 공간에서 시간으로 정형화된 표현의 어떤 변환이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에게 희망의 땅은 멀리 떨어진 섬에 가만히 준비되어있는 것이었지만, 저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반면, 그것이 미래로 이항되었을 땐, 제가 거기에 없을 뿐 아니라, 유토피아 자체도 또한 그 자체로는 거기 없습니다.

 

이 섬은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 혹은 완전한 환상과 같은 무엇은 아닙니다. 즉 외려 그것은 아직 가능성의 의미에 있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오직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여행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곳을 여행한다는 점에서 가능한 것의 바다로부터 유토피아라는 섬이 생겨납니다. 즉 유토피아, 그러나 새로운 내용을 가진 유토피아 말이지요. 저는 이런 의미에서, 그것이 겪은 끔찍한 통속화(banalization)와 한 사회에 의해 배정 받았던 책무에도 불구하고-그 사회는 스스로 전적으로 유복하며 이제 이미 계급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유토피아는 전혀 그 유효성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저는 제 친구 아도르노에게 동의합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말한 것을 매우 지지하며, 당신이 암시적으로 제기한 근거를 사용하여 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조금만 교정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유토피아적 의식의 기이한 수축의 원인이 되는 기술과 관련된 절제를 만드는 것이 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훨씬 더 많은 것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그것은 총체성(totality), 특히,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특정한 기술적 성취와 혁신의 반대를 가리킵니다. 유토피아가 무엇이든, 유토피아로서 상상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총체성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총체성의 그러한 전환에 대한 상상은 흔히 말해지는 모든 유토피아적 성취들과는 기본적으로 매우 다릅니다. 말이 난 김에, 이는 실로 당신이 전부 말했던 것처럼, 매우 온건하고, 매우 제한된 것입니다. 제겐, 의식(consciousness)에 관하여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매우 단순하게도, 총체성을 완전히 다를 수 있을 무언가로 상상하는 능력인 것처럼 보입니다. 저 사람들은 이 세상에 관해, 그것이 원래 그렇다는 듯 맹세하며, 가능성에 관하여 이러한 막힌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매우 깊은 원인;근거(cause)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제가 생각하기엔 실로 매우 정확히 유토피아의 근접성(proximity)과 연결된 원인;근거입니다. 당신도 이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지요.

 

이에 관한 제 테제는, 그들이 이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인간들은 내심 그것이 가능 할 수 있다는 것, 혹은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빈곤 그리고 어쩌면 불안 없이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유로운 인간 존재로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장치(apparatus)는 그 자체로 인간들에 맞서 강고해져왔으며, 따라서 이룰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명백한 충족의 가능성으로서 세계 도처에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인간들에게 철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때 더 해롭지 않은 시기에 실리주의자(philistine)들을 위해 남아있었던 것을 얘기합니다.

 

, 그건 그저 유토피아적일 뿐이야. , 그건 코카인의 땅에서나 가능할 거야. 기본적으로 그건 전혀 그렇게 될 수가 없어’.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백한 충족 가능성과, 그만큼 명백한 충족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을 단지 이러한 방식으로 억누르도록 강제하는 상황 때문이라고요. 또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이러한 불가능성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이러한 불가능성을 그들 자신의 일(affair)로 만들게 하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해,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스스로를 정당한 이유가 없는 공격자(aggressor)와 동일시하며’, 정확히 이것은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느끼지만 세계 전반의 사악한 주술(wicked spell cast)에 의해 그것을 획득할 수 없게 가로막힌 상황에 의해서, ‘이것은 그리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크루거: 블로흐 씨, 저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습니다. 유토피아의 내용은 실제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복입니까? 충족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토론에서 막 나왔던 단어대로라면- 단순히 자유입니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블로흐: 유토피아는 오랫동안 전적으로 사회적 유토피아들로서 등장했습니다. 즉 더 나은 삶에 대한 꿈들로 말이지요. 토머스 모어의 책 제목은 De optima statu rei publicae deque nova insula Utopia(라틴어: 국가와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한 최적의 조건), 혹은, <국가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한 최선의 조건에 관하여(On the Best Kind of State and the New Island Utopia)>입니다. 모어에게, ‘optima res publica’- 최선의 국가 는 하나의 목표로서 설정됩니다. 달리 말해, 최고의 가능한 행복, 사회적 행복의 실현을 향한 세계의 전환이 있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들이 여정(itinerary)’ 혹은 시간표와 무관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들의 내용을 고려할 때, 유토피아는 사회적 조건들에 의지합니다. 엘리자베스 시기, 영국 제정이 시작되었던 시기 동안 살았던 토머스 모어는 자신의 도민들 사이에서의 감정을 위해 자유주의적 조건을 설정했습니다. 100년 후, 필리프 2세의 시기, 이탈리아에 대한 스페인 지배의 시기 동안, 갈릴레오의 재판에 대한 기류가 있었던 동안, 캄파넬라(Giovanni Domenico Campanella)는 그의 <태양의 나라 La cittàdel sole>(1602)에서, 자유를 위한 대항모델을 구상했습니다. (...) 매우 합리적이고 잘 알려진 표현으로 제시했듯, 그는 최고의 가능한 질서가 통치하고, 모든 것이 보완된다면 모든 조건들이 질서 잡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어와 캄파넬라의 목표는 언제나 의식적인 꿈의 영역에 있었고, 거의 객관적으로 설립된 것 혹은 적어도 꿈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더 나은 삶에 대한 일상적인 꿈의 완전히 터무니없는 영역은 아닙니다. 덧붙여, 과학기술적 유토피아는 캄파넬라의 작업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베이컨의 <노바 아틀란티스>에서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의 ‘Templum Salomonis’(솔로몬의 신전)는 완전한 기술적 대학에 대한 기대인데, 여기엔 엄청난 발명품들과, 발명에 대한 완벽한 기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우리가 결코 잊지 않아야할 여전히 더 오래된 수준의 유토피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담;동화(fairy tale)입니다. 민담은 사회 유토피아, 달리말해 더 나은 삶과 정의의 유토피아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적 유토피아로도 채워져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동양의 민담들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마법 말(The Magic Horse)’이라는 민담을 보면, 마법 말을 위 아래로 조정할 수 있는 어떤 레버가 있는데, 이건 헬리콥터. 여러 곳에서, 누군간 <아라비안 나이트>를 발명을 위한 매뉴얼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베이컨은 이에 대해 다루며, 그가 의미한 것, 즉 실제적인 마법은, 알렉산더의 공적들이 아서 왕(역주: 유럽의 신화적인 인물로서, 5-6세기 경 영국 켈트족의 부족장이라 알려져있다)의 원탁의 공적과 관련되는 것처럼, 민담의 오래된 소망의 이미지들과 관련된다고 말함으로써 민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유토피아적인 것의 내용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합니다. 19세기 당시 사회와의 그 연결은 명백히 보일 수 있었는데, 이는 위대하고 정확하며 진지한 분석가였던 생시몽(Saint-Simon)과 푸리에(Fourier)의 작업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1808년 초에 자신의 저서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에서 독점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달리말해, 이 경우, 존재하는 것은 또한 부정적인 유토피아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변화하지만, 그 방향의 불변항은 있으며, 예컨대 이는 심리적으로 갈망하는 것으로서 표현됩니다. 즉 전적으로 내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충만한 것과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 존재의 오직 진실한 특성을 갈망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과 유보(qualification)가 시작됩니다. 나는 최선의 것으로서 무엇을 갈망할까요? 총체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 당신이 말했듯, ‘과학기술(technology)’이라는 이름을 갖지 않는 유토피아의 다른 영역들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근거지, 즉 사회적 유토피아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결코 지어지지 않은, 그러나 고안된 바 있는 건축물, 즉 위대한 양식의 꿈의 건축(wish architecture)이 있습니다. 우선 극장 건축이 있는데, 이는 판지로 저렴하게 세워졌고, 돈이 부족하거나 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않았을 때에도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로크 시대에, 빈 풍의(viennese) 바로크 극장에는 엄청난 건축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이 판지와 환영(illusion)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결코 누군가 거주할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양(appearance)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학적 유토피아도 있었는데, 이는 바로 죽음의 제거에 다름 아닌, 즉 완전히 어리석은 머나먼 목표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통의 제거와 경감처럼, 진지한 무언가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