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매체로서의 매개>
비평이 다루는 매체는 세계의 특정한 사태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 행위는 필연적으로 개념을 경유하기에, 나는 ‘매체로서의 개념’에 관해 얘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간과된, 혹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논의되고 있기에 ‘무시된’ 매체 중 하나는 바로 ‘매개(mediation)’라는 개념이라고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때 ‘매개’라는 낱말이 가닿는 내용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사회적 관계, 공적인 것이며, 혹은 사회, 국가, 시장, 화폐이고, 또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시간 등이다. 다시 말해 매개는 매 순간 인간의 경험과 행위를 규정하는 기제이며, 논리적 수준에선 발단 혹은 원인, 전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매개’라는 개념이 오늘날 간과되고 있는 상황은, 현재의 담론적 우세종이 바로 주어진 오늘만을 아는 ‘현재’의 시간, ‘지금-여기’의 시간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는, 오늘날만큼 사회적 관계가 심화되고 자연화된 때는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회적 관계 속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은 지양된다. 정치의 장에서 이는 ‘-ist’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예술의 장에선 예술적 매개(혹은 미적가상)를 포기하는 것으로, 철학의 장에선 인식론을 포기하는 것으로, 일상적 관계에선 존칭과 존댓말 혹은 선/후배의 계보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진지함과 진정성은 가벼움과 속물에 의해 대체되는데, 이는 탈권위주의와 냉소주의의 수사를 빌림으로써 이뤄진다: ‘그놈이 그놈이야’, ‘그 작업은 관객을 해방하지 않아’, ‘이데올로기 비판은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체계에 복무할 뿐이지’ ‘너나 나나 똑같아’,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편하게 말 놔, 나는 직접적인 게 좋거든’.
허나 과연, 사회의 제 영역과 부문들에서 관측되는 이러한 직접적인 것, 무매개적 상태에 대한 갈망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어쩌면 그것은 21세기 판본의 원시주의적 충동으로서, 퇴행과 무기력에 대한 증상은 아닐까.
일상적인 친분관계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사회적 매개가 소거된 상태로, 가까이서 보면 모든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다. 그들은 내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속물스럽고, 동물적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통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 배울 수 있는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항상 그와 적당한 긴장과 거리를 지키는 것, 즉 사회에 객관적으로 매개된 그의 역할을 승인하는 것이 좋다. 사회적 역할과 민낯 사이의 간극을 허물고 가까이 가는 순간, 사회적 매개는 사라지고 동물적 육신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는 마치 정신분석가가 스스로 점한 '분석가'의 위치에 머무르며, 무매개적인 관계, 날것의 대상에 대한 충동을 제어 할 때만이 모종의 분석이 수행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분석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 환자는 그를 '분석가'로 대해야 하며, 분석가는 그를 '환자'로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즉 환자에게 스스로의 내밀한 욕동과 사적인 얘기를 하는 순간 분석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전이’를 분석의 시작점으로 설정하되, 분석자의 ‘역전이’를 경계했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신경의학과 뇌과학이 심리적 증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서 헤게모니를 쥔 이후로 정신분석을 논하는 것은 어필할 구석이 많지 않다. 헌데 내적 수준에서 정신분석의 몰락은 그것이 지닌 비과학성과 비실증성에서 설명되겠지만, 외적 수준에서 그것은 한편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더 이상 ‘전이’를 경험하지 않을 만큼 냉소적인 데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심리적 증상을 여타의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공적인 혹은 상징적인 관계 속에서 분석하고 완화시켜주겠다는 제안에 선뜻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정신은 화학적 호르몬 전달과 뉴런의 적절한 작동여부라는 수준의 층위를 분명히 한 축으로 둔다. 이는 정신분석이 충분히 천착하지 못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 및 심리 작용을 전적으로 물질로 환원시키는 것은 실재의 위상이 층위 지워져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마찬가지로 오류이다. 예컨대 가까운 사람과 사별한 이가 슬픈 기분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세로토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죽은자와 맺고 있던 사회적 관계의 상실에 대한 미련과 회한 때문이기도 하며, 지독한 고문을 겪은 자가 주기적으로 발작 및 환청에 시달리는 것은 단지 그의 호르몬 전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고통과 충격을 상징화 시켜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경의학적 접근의 공백은 정신분석이 다룰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며, 이는 물질적 실재와 사회적 실재의 구분을 통해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이 암시한바,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가 애초에 (기계적 인과성의 영역에서)실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처럼(노동의 이중성, 혹은 착취라는 개념을 어떻게 실증할 수 있겠는가), 정신의 구조 또한 실증적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임은 분명하다. 알튀세르는 꿈, 말실수, 증상 등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무의식의 영역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증에 매혹되었기에, 증명 불가능한 무의식을 소급적으로 구성해낸 정신분석 특유의 인과성과 마르크스주의를 유비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무매개적 관계에 대한 집착을 정신분석상의 분석 실패의 전형과 관련짓는 것이 그다지 무리한 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매개되지 않은 관계를 맺고, 그의 배면을 보고자 하는, 혹은 자신의 배면을 곧바로 공개해버리고자 하는 욕망은 한편으로 필연적이다. 이를 바디우식 표현을 빌려 '실재를 향한 충동'이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듯, 사회적 관계가 심화될수록 실재에의 충동은 거세진다. 이는 특히 대중 매체에서 두드러지게 관측되는데, 여기선 온갖 이들이 자신의 내밀한 욕망과 고통, 일상을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이는 단지 불우한 가정사와 슬럼프를 고백하며 눈물을 훔치는 텔런트들에 관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타의 각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리얼리티 쇼의 형식으로 일상적이고 사적인 풍경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것, 연예인들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것이 높은 시청률을 담보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으로 독해될 수 있다. 더불어 몇몇 이들은 문화생산물에서 으레 기대되는 표준적인 인과율과 서사를 붕괴시키며 이른바 ‘병맛’을 실천하고, 상스러운 말들, 천박한 말들, 필터링 되지 않은 행동들,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기꺼이 행한다. 이들은 사회적 매개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페르소나의 위선과 가식을 조롱하며 모든 인간은 동물임을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 여러 TV 프로그램들이나 대표적인 BJ들의 컨텐츠들을 보노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매개된 시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매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사람들의 시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이러한 무매개적인 솔직함과 직접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젝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한 칸트의 정의를 경유하여, 디지털 공간감의 편재로 인해 공적인 것이 점차 축소되고 사적인 것으로 대체되어 가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특정하게 구부려 읽자면, 이는 ‘매개’에 맞서 ‘직접성’이 실체화되는 경향에 대한 보론이 될 수 있다. 한편 서동진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참조한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혹은 정동론자들이 암시하는- ‘주-객 분할의 손쉬운 청산’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적 징후의 일종으로 읽는다. 요컨대 인식 이전의 것, 따라서 주체와 객체 이전의 것에 대한 충동은 (자본주의)사회로부터의 매개의 강도가 심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시대의 징후라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논의를 헤겔이 '즉자'라 언급한 상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본다. 전개되지 않은 직접성, 으레 부당하게 그 자체로 실체화되곤 하는 직접성 말이다. 즉자적인 것은 타자존재, 가족, 시민사회, 국가 등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양되지 않은 고립되어 있는 부분에 머무는 한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 상태 그대로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바로 헤겔적 의미에서 비변증법적인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인바, 그렇다면 실로 오늘날 실재를 향한 열망은 사회적인 것의 몰락, 공동의 규범에 대한 몰락, 공적인 것의 몰락, 역사의 부재를 암시하지 않는가? 어떤 가치는 기꺼이 위선이라는 오명을 감내하면서도 지킬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인권과 복지를 비롯한 공동선에 관한 개입은 사회, 국가의 존재 없이 무매개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승인할 수 있는 조건은 단지 가식적인 ‘시늉’인 것 마냥 부당하게 호도되곤 하는- 바로 그러한 ‘형식’이다. 우리는 외려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매개 상태를 인정한 속에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그로부터 후퇴하거나 퇴행하지 않고 그러한 매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안하는 것이 대항 이데올로기를 세우는 유효한 방식이라는 점을 말이다. 공적인 것을 보호하는 것은 사적인 것들의 총체를 실체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형식의 매개 혹은 이데올로기 장치를 고안함으로써 획득된다.
사회적 관계가 매개되면 될 수록 직접성에 대한 유혹은 깊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개의 수단을 고안하는 데에 진력하며 주-객의 분리를 ‘현실적으로 지양’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알튀세르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데올로기 장치’를 고안하는 것,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주-객 동일성’을 확립하는 작업 말이다. 바로 이러한 주-객의 근원적인 분화와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화해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동일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는 조건이 된다. 그와 동시에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의 효과로서 간취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일탈과 사리사욕을 충족하고자 하는 주관이 객관의 수준에선 결과적으로 이성의 발전에 복무하게 되는 것은 결국 매개의 힘이며, 이러한 매개 속에서 동일성과 비동일성, 즉 같음과 차이,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인간과 공동체-사회-국가는 동일하다. 누군가 사회적 실천에 있어 이러한 인식을 간취하지 못하는 한, 그는 마치 실증주의가 그러하듯 주객의 분할을 고정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기계론의 수준에 위치 짓거나, 존재론자들이 주장하듯 그것을 관념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퇴행과 공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낭만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에 맞서 영웅적으로 열어 보여줬던 길이며,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및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논증하고 이어 아도르노가 실증주의자들과 사변론자들에 맞서 논증했던- 변증법의 한 진리계기다. 그렇다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매개성과 직접성을 보다 진지하게 상대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가까이서 보면 매개되지 않은 것들이지만, 그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이미 객관적 수준에서 존재하는 매개를 못 본체 하는 일에 그칠 뿐이다. 모든 것이 심리적 개인의 투명한 기억과 경험을 얘기하지만, 이에 침잠하는 것은 그러한 기억과 경험이 객관적인 역사에 의해 이미 매개되어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체계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는 일과 공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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