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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율리안 헤첼과 역사적 상황주의의 흔적들

by 정강산 2018. 8. 30.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Benefactrory>(2018; MMCA 다원예술 프로젝트)는 자신의 전작들을 발전시킨 작업으로서 <후원자The Benefactor>(2011)와 <죄책감공장Schuld Fabrik>(2016)을 전거로 삼는다. <후원자>가 2000유로의 예술 지원 기금으로 매일 1유로씩 콩고의 어린이를 후원함으로써 예술을 곧 바로 사회의 이용요구에 편입시키는 프로젝트였다면, <죄책감공장>은 적출된 인간의 지방으로 만든 비누를 판매할 수 있는 공정을 설계하는 작업이다. 전자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선물경제와 일치하게 된 예술 작품이 드러내는 한계와 예술 본연의 무능함 사이의 긴장이고, 후자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죄책감과 선의가 자본순환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동원되는 역설적인 풍경이다. 물론 강조하는 지점은 다르지만, 양자 모두 기부를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고 자본주의적 경제와 증여, 기부, 후원 등의 공모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수렴하며, <베네팩토리>는 그 결과들을 종합적으로 보고하는 렉쳐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베네팩토리>에서 퍼포머로 분한 헤첼은 자신을 유망한 벤처사업가라 소개한 뒤, 예술 기금을 기부에 직접 투여하고 그것을 예술 작품이라 호명함으로써 예술이 ‘–’가 아니라 ‘+’를 생산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어 그는 이러한 무용한 것들로부터 ‘+’의 계기를 찾고자 하는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로서 시작된 본인의 사업이 소비자들의 죄책감을 동력으로 하여 어떻게 기부와 동시에 이윤을 확보하는지를 강변한다. 요컨대 그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 F(at)=E(nergy), 다시 말해 지방은 에너지이고, F=G(uilt), 동시에 죄책감이다. 허나 죄책감 또한 동시에 인간의 순수한 에너지이다. 따라서 G=E라는 식이 성립한다. 우리는 이러한 에너지로서의 죄책감과 지방을 낭비해선 안 되며,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 


 이러한 문제설정 속에서 최종적으로 그가 만들어 낸 것은 ‘모종의 순환 구조’로서, 이는 성형외과와 제휴하여 제1세계에서 지방 제거수술을 통해 나온 지방을 기부 받아 비누를 만들고, 그것을 판매하는 매장을 만들어 그 수익금을 제 3세계에 대한 기부에 투여하는 원환의 모양을 띤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누는 상품이지만, 공교롭게도 법적으론 예술품으로서 거래된다. 제 1세계의 풍족함의 지표 혹은 자기 관리부재의 척도로서 ‘죄책감’은 지방을 적출하는 이들이 지방을 기증하는 데에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이 그 지방 비누를 선뜻 구매하는 데에도 필요한 연료로서 이용된다. 퍼포먼스는 그가 열렬히 선전해온 지방비누 팝업 스토어를 개장하고, 상품을 시연할 부스를 개시하는 지점에서 피날레에 접어든다. 그렇게 죄책감을 통해 만들어낸 상품이 얼룩을 씻어내는 비누라는 사실은 동시대 버전의 면죄부가 바로 상품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알레고리다. 요컨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불평등을 지양할 수 있는 윤리적 소비? 상품형식은 윤리를 모른다. 기부와 증여가 담지하는 호혜성? 자본 집중을 통해 세계 최고 부자가 된 빌 게이츠는 또한 최대 기부자이기도 하다.”

 이렇듯 <베네팩토리>를 통해 헤첼은 소비를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죄책감을 통해 유지되는 기부와 후원이 바로 자본주의가 자신을 작동시키기 위해 운용하는 필연적인 계기라는 사실을 공모의 시늉을 통해 구현해 보인다. 즉 그는 자신이 예술과 호혜의 윤리라는 2항을 상품과 동시에 성취했다고 외치면서, 그 중 어느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가 적극적으로 구성해낸 것은 외려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불균등발전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헤첼의 작업은 체제에 대한 공모와 비판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위험한 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고, 죄책감을 통한 마케팅 기법이라는 블루오션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제스처가 역사적 상황주의자들의 전략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곤란하다. 이윤에 대한 관심과 벤처, 창업, 기부와 자선 등을 그 외부에서 비판하지 않고, 반대로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기예(art)를 전유하며 작업을 전개시키는 그의 방법론은 더 이상 거리를 둘 수 없을 만큼 대상의 논리를 충실하게 의태하는 동시에 대상을 둘러싼 기호들을 재맥락화 함으로써 상징적 수준에서 내파하고자 했던 전용(détournement; appropriation)의 측면에서 독해되어야 비로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회적 체계의 심화에 맞선 상황적 개입이라는 상황주의적 모티프는 그의 다른 작업들에서도 드러난다. 위트레흐트 퍼포밍 아트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공포 조각하기Sculpting Fear>(2015)와 <장애물Obstacle: Sculpting Fear>(2015) 연작은, 총체화된 사회 앞에서 주체가 느끼는 긴장과 혼란에 조응하는 묵시록적 붕괴에 대한 감각을 각각 공연과 해프닝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공연으로 시연된 <공포 조각하기>는 사무용의자에 앉은 퍼포머들이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쓰러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후의 시퀀스에서 그들은 손으로 바닥을 뜯어내지만 표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며, 설치된 강풍기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기에 아무것도 그러모으지 못한다. 결국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희뿌연 안개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에서 나타나는 것은 원근감의 상실 혹은 깊이감의 상실로서, 불가해한 세계를 마주한 주체의 감각지각에 대한 심상이다. 연이어 시연된 작업 <장애물>에서 헤첼은 퍼포머 10여명에게 지하철 플랫폼, 횡단보도, 대로 한복판, 상가 등 공공장소에서 단지 누워있을 것을 요청한다. 이때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말끔한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의미심장한 장소에 시체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관심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가거나 사진을 찍는 행인들의 태연한 모습을 통해 근대에 특정적인 도시의 기이한 합리성이 심화된 형태로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다. 누구나 쓰러져있는 퍼포머들의 주변을 배회하지만,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데 이는 도시적 공간에서 과밀해진 감각지각을 제한하기 위한 대문자 ‘개인’의 방어기제인 동시에 도회적 삶의 불문율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일상적 경험은 도시 한복판에 놓인 ‘장애물’들이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풍경에 방해받는다. 작업이 보다 첨예해지는 지점은 경찰들이 개입하여 퍼포머들의 무위를 중단시키려 하는 대목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방해하는, 혹은 장소의 목적에서 기대되지 않는 행위를 저지하는 경찰은 사회에 편재하는 치안의 조건을 가시화시키기 때문이다. 합리화된 도시는 추상화된 공간을 유지하고자 하며, 신체의 기입을 통해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헤첼이 드러내는 것은, 서로가 무신경한 상태에 있는 익명성과 그로부터 얻어진 도시적 자유인 동시에, 그 배면에 있는 통제와 규율의 메커니즘이다. 그가 여기서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조직화된 도시의 기능적 시간을 마비시킬 수 있는 ‘상황’이지만, 도시는 외부를 가지지 않는 빈틈없는 회로처럼 다시 작동하길 원하며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국가장치를 동원하는 것이다. 사회적 체계의 심화란 바로 이렇게 사회적 제도, 관습, 분업, 시장의 편재로 인해 더 이상 사회의 외부가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업의 부제가 암시하듯 ‘공포를 조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능을 드러낸 사회에 대한 주체의 공포와, 사회가 주체의 비규정된 일탈에 대해 갖는 공포를 중의적으로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들은 도시에 매개된 경험을 가시화하고자 했던 상황주의자들의 기획과 조응하며, 사람 모양의 비닐을 도시 벤치 곳곳에 세움으로써 동일한 효과를 내고자 했던 전작 <안녕 홈파인 공간Hello Hollow>(2014)보다 한결 첨예해진 형식을 보여준다. 


 <자동화된 스나이퍼The Automated Sniper>(2017)는 보다 명시적으로 봄과 보이는 대상 사이의 심연을 다룬다. 여기서 퍼포머들은 무대에 설치된 여러 오브제들을 서로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걸쳐둠으로써 예술의 미묘함과 심미성을 암시한다. 이윽고 총이 장착된 드론이 원격조종장치를 통해 조종되며 퍼포머들에게 페인트 볼 세례를 퍼붓고,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오브제들은 엄폐물이자 전장의 일부가 된다. 이 과정에서 퍼포머와 순백색의 무대는 페인트 범벅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는데, 이는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심미적 대상처럼 보이는 동시에, 서바이벌 게임 세트장 또는 피가 낭자하는 실재 전장의 풍경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현대전의 최전선을 규정하는, ‘봄과 조종’이라는 행위는 실재와 재현된 이미지 사이의 거리 혹은 현실과 표상의 거리를 벌려온 결과가 실체로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사례를 예증한다. 헤첼이 여기서 시도하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카메라렌즈의 응시와 스크린에 대한 인간의 응시 등을 가로지르며 예술, 게임, 전쟁의 배면에 있는 근대적 시각성을 재고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는 응시의 역전, 즉 우리가 스크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는 실재론적 지점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는 이미지화한 자본, ‘모든 경험을 표상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비판의 측면에서 독해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율리안 헤첼의 모든 작업이 상황주의적 전술을 원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나는 여기 없다’라고 공백이 말한다I’m Not Here Says The Void>(2014)는 무無와 암흑, 심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에세이를 본 듯한 심상을 전달하고, 전시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대가로 노숙자들에게 시급을 지급하는 <기다림의 경제The Economy Of Waiting>(2014)는 무위 자체가 화폐의 규정을 받는 상황을 구현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그가 작업을 전개해가는 중요한 축이 상황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의 언저리에 기대어 있음은 명백하기에, 매개된 경험으로서의 스펙터클에 대한 논의를 과거의 미술사적 담론으로 간주하는 이들에게 헤첼의 작업들은 고루해 보일 것이다. 허나 담론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라는 지표에 닻을 내린 것이라면, 오늘날 전례 없이 심화되어온 표상과 현실의 역전은 여전히 추적되어야할 사태이며, 상황주의의 흔적들을 간직한 그의 작업은 아직 그 시효를 다하지 않은, 예술이 간취할 수 있는 발본적 비판의 한 갈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트인컬쳐> 9월호 68 특집 지면에 선게재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