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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There Are No Visual Media(시각 매체란 없다)

by 정강산 2019. 3. 30.

There Are No Visual Media(시각 매체란 없다)

 

Article Information

Volume: 4 issue: 2, page(s): 257-266

Issue published: August 1, 2005

 

W. J. T. Mitchell(윌리엄 존 토머스 미첼)

 

정강산 역

 

 

시각 매체TV, 영화, 사진, 회화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일상회화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부정확하며 오해의 여지가 있다. 소위 시각 매체라 불리는 모든 것은, 자세히 보면, 다른 감각들을 수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특히 감촉(touch)과 청취(hearing)처럼). 모든 매체는 감각의 양상에서 볼 때, “혼합 매체이다. 이것의 자명함은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1) 왜 우리는 계속 어떤 매체를 마치 그들이 전적으로 시각적인 것인양 말하는가? 이는 단지 시각의 우위(predominance)를 논하기 위한 약칭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양적인 문제인가(청각적인 혹은 촉각적인 것보다 더 많은 시각적인 정보처럼)? 질적인 지각 즉 구경꾼, 청중, 관람자-청취자에 의해 알려진 사물에 대한 감각에 관한 문제인가? (2) 우리가 시각 매체라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무엇이 위험하길래?

 

우선 명백한 것을 설명해보자. 정말 시각매체란 없는가? 내 주장은 단지 하나의 반례로도 쉽게 논파될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이 순수하고 전적인 시각 매체로 제안할 것들을 한번 모아보자. 우선 무용과 연극 같은 퍼포먼스 미디어와 매스미디어의 전체 영역-텔레비전, 영화, 라디오-는 제외하자. 드라마가 lexis, melos, opsis라는 세 가지 질서(, 음악, 볼거리)를 결합시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부터 기호적 영역의 이미지- 음악- 텍스트분할에 대한 바르트의 주장에까지, 매체의 혼합적 성격은 중심적인 전제였다. 이 고대와 현대의 모든 매체, 그들에게 내부적인 감각적 요소와 기호학적 요소의 관점에서 볼 때와 무차별적인 청중 구성에 있어 외부적인 것에서 볼 때 순수함의 개념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만약 무성영화가 순수하게 시각적인매체라면 우리는 영화의 역사의 단순한 사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무성영화는 항상 음악, 연설을 수반했고, 영화의 자막(film texts) 자체는 종종 그들 위에 새겨진 글귀로 사용되었다. 하단의 자막(subtitle)과 중요한 장면에 사용된 자막(intertitle), 구어적이고 음악적인 부속물(accompaniment)이 바로 무성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순수 시각 매체를 찾고자 한다면, 회화가 확실한 후보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무엇보다 그것은 예술의 역사에서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매체였다. 문학적 고려에 의해 오염된 초기 예술 이후의 우리는 정화에 대한 규범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다. 순수한 시각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순수 회화라 불리는 무언가를 탐구하기 위해 회화 자체를 언어, 서사, 알레고리, 형상, 그리고 심지어 명명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정화 말이다. 가장 유명하게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널리 펴지게 된, 그리고 때론 마이클 프리드에 의해 공명하게 된 이 주장은 매체의 순수성과 특정성을 강조한다. 혼합 형식, 혼합 매체, “예술들 사이에놓여있는 어떤 것도 연극의 형식 혹은 진짜가 아닌, 2등급의 미학적 지위가 될 운명인 수사로서 거부하면서 말이다.1 그것은 가장 익숙하고 닳아빠진 모더니즘의 신화중 하나이며, 이제는 좀 쉬게 해줘야 한다. 사실은, 심지어 그 가장 순수하고 가장 한결같이 시각적인 경우에도, 모더니즘 회화는 항상, 톰 울프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려진 말들(painted words)”이었다.2 이 단어는 역사화(history painting), 혹은 시화(poectic landscape), 혹은 신화, 혹은 종교적 알레고리의 그것이 아니었고, 외려 이론, 즉 관념론적이고 비판적인 철학의 담론이었다. 이 비판적 담론은 성경이나 역사 또는 고전이 전통적인 서사 그림에 대해 그러하듯, 모더니스트 그림의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자가 없이는, 관람자(beholder)는 구이도 레니(Guido Reni)<처형 전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나날> 앞에서, 제목과 이야기를 모르는, 정보가 없는 관람자는 이것이 감기에 걸린 한 소녀 혹은 코피를 흘리려는 한 소녀에 대한 그림일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라 쓴 마크트웨인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3 전자 없이는, 숙지되지 않은 관람자는 잭슨 폴록의 그림을 벽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볼 것이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봤다).

 

이제 나는 당신들 중 몇 명이 작품을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말들Ovid의 말들이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화가로서 풍경화에 집중한 가장 초기의 화가들 중 한명)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림 속에있는 게 아니라고 반대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물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고, 언어가 그림에 개입하는 상이한 방식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여기서 내 초점은 아니다. 내 현재 과업은 매체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사용을 예증하면서, “순수하게 시각적이라 불러온 회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언어가 정확히 이러한 순수한 대상에 대한 인식에 들어가는지에 대한 문제는 다른 지면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완전히 회화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해볼까? 나는 이것이 그림에 대한 제목의 관습적인 거부, 관람자를 향한 무제라는 불가사의한 항의에 의해 예고된 모더니스트 회화의 특징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관람자가 언어화 없이 볼 수 있고, (심지어 조용히, 내부적으로) 마음속에서의 연상(associations), 판단 및 관찰이 없이 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뭐가 남을까? 일단, 명백하게 남게 될 한 가지는 회화가 손으로 만들어진 대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기계적 생산의 모습이 종종 전경화되는 사진 매체와 (예를 들어) 구별되는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다. (화가가 광택 있는 사진의 기계적 모습을 모방하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올바른 기술을 가진 사진 작가도 마찬가지로 회화적 표면과 그림의 스푸마토를 모방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잠시 제쳐둔다.) 그러나 비 시각적 감각이 인코딩되고, 표현되고, 물질적 존재의 모든 세부 사항에 표시된다는 인식이 아니라면 손으로 만든 그림에 대한 인식은 무엇인가? (로버트 모리스의 블라인드 타임 드로잉은 종이에 흑연 분말을 손으로 그려서, 하단에 손으로 새겨진 텍스트에 정식으로 기록된 시간적 및 공간적 표적화의 엄격한 절차에 따라 그림의 문자 그대로 비 시각적 특성에 대한 반사의 강력한 사례가 될 것이다.)4 물론 그 실행에서의 비시각적 감각은 터치 감각인데, 이는 어떤 종류의 그림(‘처리(handling)’라는 임파스토와 페인트의 물질성이 강조될 때)에서 중시되고, 다른 것들에서 배경으로 된다(부드러운 표면과 선명하고 투명한 형태는 화가의 손 활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기적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느 쪽이든, 그림 뒤의 이론이나 이야기, 혹은 알레고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하나의 그림이라는 것, 수작업으로 만든 대상이라는 것, 즉 그것이 수동 생산의 흔적이라는 것, 누군가 보는 모든 것이 붓이나 캔버스를 만지는 손의 흔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림을 보는 것은 터치를 보는 것이고, 예술가의 손의 제스쳐들을 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실제로 캔버스를 만지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순수한 시각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다. 외려 요점은, 그것의 역사적 역할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고, 신화였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음에도 왜 모더니즘 회화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특성이 어떤 물신적 개념의 상태로까지 도달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시각 매체의 정화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어떤 형태의 오염이- 어떤 형태의 감각 위생이라는 이름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걸까?5

 

예술사의 관심을 끄는 다른 매체는 순수 시각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훨씬 적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것들 중 가장 순수하지 않은 매체인 건축은 다른 예술들을 종합예술(Gesamtkunstwerk)에 통합시키고, 일반적으로 어떤 집약된 주의집중 속에서 보게 되는 게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썼듯, 산만함의 상태에서 지각된다. 건축은 주로 보는 것에 관한 게 아니라, 머무르고(dwelling) 거주하는 것(inhabiting)에 관한 것이다. 조각은 너무나 분명히 촉각의 예술이기에, 그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보인다. 이것은 소위 시각 매체라고 불리는 것이지만, 사실 시각 장애인에 대해 직접적인 접근성을 가진 종류의 것이다. 예술사의 매체 목록에서 후발주자인 사진은, 바르트에서부터 빅토르 버긴(Victor Burgin)이 보여주었듯, 보통 언어로 너무나 구멍이 뚫려있어서, 그것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매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조엘 스니더(Joel Snyder)비가시적인 것을 묘사하는 일이라 부른 것에서 사진의 특정한 역할은- 우리가 맨눈으로는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빠른 신체 동작들, 물질의 작용, 평범한 것과 일상 등) 그것을 어떤 확실한 의미에서도 시각 매체라 생각하는 걸 어렵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볼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을 어떤 것의 그림처럼 보이는 무언가로 번역하는 장치로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여명기의 예술사의 입장에서, 마지막 반세기가 결정적으로 어떤 순수 시각 예술에 대한 생각을 허물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설치, 혼합매체, 퍼포먼스 아트, 개념 예술, 장소 특정적 예술, 미니멀리즘, 종종 주목되는 회화적 재현으로의 재전환은 순수 시각성이라는 개념을 백미러에서 후퇴하고 있는 신기루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예술사가들에게, 가장 안전한 결론은 순수 시각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이 일시적인 예외였고, 혼합 매체와 혼성 매체의 더 지속적인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 꺾이는 것처럼 보일 만큼 너무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은 반대하겠지만, 만약 기본적이고, 순수하고 독특한 미디어가 있고 그로부터 혼합을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어떤 혼합 매체 혹은 멀티미디어 생산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모든 미디어가 항상 그리고 이미 혼합 매체라면, 혼합 매체에 대한 개념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순수 기본 요소들로부터 어떤 특정한 혼합도 구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양쪽 끝들에서의 난문을 붙잡아야만 하며 시각 매체란 없다는 주장의 필연적 귀결이 모든 매체는 혼합 매체이다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바로 매체의 개념 그리고 매개의 개념이 이미 어떤 감각적인, 지각적인, 기호학적 요소들의 혼합을 수반한다. 순수하게 청각적인, 촉각적인 혹은 후각적인 매체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한 매체를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혼합물의 더 정확한 분화이다. 만약 모든 매체가 혼합 매체라면, 그들은 모두 같은 방식, 같은 비율의 요소들로 섞여있지 않다.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제시했듯, 매체는 어떤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실행, 실제;practice)”6이며, 어떤 (물감, , 쇠 등의)기본적인 물질성이나 기예 혹은 기술에 의해 좌우되는, 명기할 수 있는 본질이 아니다. 재료와 기술은 매체에 포함되지만, 솜씨와 습관, 사회적 공간, 제도, 시장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매체 특정성이라는 개념은 결코 단일한, 기본적인 본질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요리법과 관련된 특정성과 더 비슷하다. 많은 재료가 있고, 이들은 특정한 순서에 따라 특정한 비율로 결합되고, 특정한 방식으로 혼합되며, 특정한 온도에서 특정한 시간 동안 조리된다. 결국 누군가는 시각 매체가 없다는 것, 모든 매체는 혼합 매체라는 것을 매체 특정성의 개념을 잃지 않고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과 미디어에 관한 고려에 있어, 마샬 맥루한은 상이한 매체에 대한 상이한 감각의 비율을 일전에 제기했을 때 이런 지점을 훑은 바 있다. 하나의 약칭으로서, 맥루한은 시각적 매체와 촉각적 매체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길 즐겼으나, (거의 잊혔거나 무시되는)그의 놀라운 주장은 텔레비전이 실제로 촉각적인 매체라는 것이었다. 맥루한의 관점에선, 시각적 감각을 분리시켜온 매체와 가장 가까운 인쇄된 말과 달리, “TV의 이미지 (...)는 접촉의 확장이다.”7 그러나 맥루한의 더 큰 요점은 고립되고 물화된 감각 채널을 통해 특정 매체를 식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특정 매체의 특정한 혼합물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체를 감각기관의 확장이라고 불렀을지 모르지만, 이런 확장을 또한 절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매개된 감각의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특징을 강조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8 전기가 감각 신경계의 확장(그리고 절단)을 가능하게 한다는 그의 유명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 감각(sensus communis) 개념, 즉 전 세계적으로 확장된 사회 공동체, “지구촌의 조건으로 외삽된, 개인의 감각에서 조정된 (또는 혼란스러운) ‘공동체의 확장된 버전에 대한 주장이었다.

 

따라서 매체의 특정성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등과 같은 물화된 감각적 표식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다. 그것은 오히려 실제, 경험, 전통 및 기술 발명에 내포된 특정 감각 비율의 문제이다. 우리는 또한 미디어가 감각의 확장, 감각 비율의 눈금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들은 또한 상징적이거나 기호학적인 조작자이며, 기호 기능의 복합체이다. 기호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피어스의 아이콘, 색인, 기호(유사성, 원인과 결과 혹은 "실존적 연결"에 의한 기호, 그리고 규칙에 따라 지시되는 전통적인 기호 등)의 기본 삼중항을 이용해서 미디어에 도달하면, 우리는 또한 "순수한 상태"에 존재하는 기호, 순수한 도상(icon), 순수한 지표(index), 혹은 순수한 상징(symbol)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도상이나 이미지는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상징적인 차원을 취하며,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묻는 순간 지표적 구성 요소를 취한다. 음성 알파벳의 개별 문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징적 표현은 반복 가능한 코드인 반복성(iterability)을 허용하기 위해 동일한 문자의 다른 모든 글귀와 충분히 유사해야한다. 이 경우 상징은 도상적인 것에 달려 있다. 맥루한의 "감각 비율"로서의 미디어 개념은 어떤 매체를 무언가가 되게끔하는 기호기능의 특정한 혼합물, "기호적 비율"이라는 개념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시야와 소리의 비율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단어, 그리고 음성, 음악 및 소음과 같이 구별되는 다른 매개 변수들의 비율이기도 하다.

 

시각 매체가 없다는 주장은 실로 미디어 분류의 새로운 개념으로 이어질지 모를 첫 실마리일 뿐이며, 이는 시각적혹은 언어적매체라는 물화된 전형을 버리고 훨씬 더 미묘하고 고도로 차별화된 미디어 유형 조사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런 분류학에 대한 완전한 고려는 이 에세이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몇 가지 예비적인 관찰은 순서대로 이루어진다.9 첫째, 감각적 또는 기호학적 요소는 경험적 또는 현상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그들의 논리적 관계 측면에서 훨씬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한다. 두 개의 삼중 구조가 매체의 본원적 요소로 등장했음을 독자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어떤 감각적 매개의 주요한 소재로서, 헤겔이 "이론적 감각"-보기, 듣기, 만지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두번째는 퍼스의 삼중 기호작용이다. 어떤 종류의 감각- 즉 어떤 기호학적 '비율'이 배치되더라고 그것은 적어도 이 6가지 변수의 복합체가 될 것이다.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한 또 다른 문제는 '비율'자체의 문제이다. 우리는 감각적-기호학적 비율이란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맥루한은 이 질문을 실제로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이 질문을 통해 여러 가지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지배-종속의 관계, 즉 수학적 비율에서의 분자-분모관계를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종류의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10 둘째, 한 감각은 공감각의 현상에서 가장 극적으로 활성화되거나 다른 감각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서 훨씬 더 만연하기로는, 예를 들어, 쓰여진 단어는 시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만 즉시 청각(마음 속에서 말하기에서처럼)과 공간적 확장의 2차적 인상을 활성화하는데, 이 공간적 확장은 촉각적이거나 시각적일 수 있고, 맛과 냄새와 같은 다른 "하위이론적인(subtheoretic)" 감각들을 포함할지 모른다. 셋째, 내가 둥지 틀기; 중첩시키기(nesting)”라고 부르는 밀접한 관련 현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한 매체가 다른 매체의 내부에서 내용처럼 등장한다(악명 높듯, 텔레비전은 Network, Quiz Show, Bamboozled, 그리고 Wag the Dog같은 영화에서처럼 영화의 내용으로 취급된다).

 

맥루한의 격언인 "매체의 내용은 언제나 초기의 매체"라는 말은 중첩 현상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역사적 순서로 지나치게 제한했다. 사실, 나중의 매체(TV)가 이전의 매체(영화)의 내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순전히 이론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매체,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적 가능성(순간 이동 또는 물질 전달과 같은)이 초기 매체의 내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나는 The Fly를 이러한 판타지의 고전적인 예라고 생각하지만, 스타 트랙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스코티, 염력으로 날 이동시켜줘"라는 의례적인 요청은, 이 순전히 상상적인 매체를, 거의 문을 통과하여 나가는 것과 같이 친숙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매체든 다른 매체 안에 둥지를 틀 수 있으며, 이는 한 매체가 그 자신 내부에 둥지를 트는 계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메타픽쳐"라고 논의한 자기 참조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이론에 매우 중요하다.11

 

넷째, 내가 "땋아 묶기(braiding)"라 부를 현상이 있는데, 이는 한 감각 채널이나 기호학적 기능이 다른 감각 채널과 어느 정도 원활하게 결합되어 있을 때, 동기화된 소리의 영화적 기법에서 가장 현저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화 이론가들이 분리된 장면을 겉으로 보기에 연속적인 내러티브로 꿰매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봉합"이라는 개념은 영화적 상연에서 소리와 시선이 융합될 때마다 작동한다. 물론 땋기나 봉합은 풀릴 수 있으며, 간격(gap)과 방해물(bar)은 감각적-기호학적 비율로 소개될 수 있고, 이는 우리를 다섯 번째 가능성으로 이끈다. 즉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한 트랙 위에서 움직이는 기호와 감각은, 독자-관람자-구경꾼에게 "트랙을 뛰어넘는" 임무를 맡기고 주관적인 연결을 만들면서 서로 엄격하게 분리된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실험 영화는 소리와 시야의 비동기화를 탐구했으며,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ekphrastic)시 등의 문학 장르는 우리가 느슨하게 "언어적"매체라고 부르는 시각 예술을 환기시킨다. 에크프라시스는 시각적 재현을 말로 재현한 것인데, 전형적으로는 시각 예술 작품에 대한 시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아킬레스의 방패에 대한 호머의 묘사가 표준적인 예이다).12 그러나 에크프라시스의 중요한 규칙은 "다른"매체 즉 시각적, 그래픽적 또는 인공적 대상이 언어 매체를 제외하고는 가시적인 것이 되거나 형태가 있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에크프레시스를 접촉이나 봉합이 없는 둥지틀기의 한 형태이자 두 개의 엄격하게 분리된 감각과 기호학 트랙 사이의 일종의 원격작용, 즉 독자의 마음속에서의 완료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집합적 감각을 공격하기 위해 고안된 화려한 멀티미디어 발명품이 얼마나 많은지와 무관하게 시가 가장 미묘하고 기민한 공통 감각의 지배적 매체(master-medium)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시각 매체가 없다는 데에, 이 문구가 어휘에서 지워지거나 완전히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데에 계속 남아있는 어떤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매개되지 않은 시각 자체, "순수하게 시각적인" 시선의 영역과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한 간단한 발언으로 그 사건을 매듭짓자. 시각(vision) 자체가 시각적 매체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어떨까? 곰브리치가 오래전에 지적했듯이 순수하고 교육되지 않은 광학 기관인 "순수한 눈"이 사실 눈이 멀었다면 어떨까?13 물론 이것은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니라 시각적 과정 그 자체에 대한 분석에 있어 확고하게 확립된 교리이다. 고대의 광학 이론은 시각을 철저하게 촉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으로 다루었고, 눈과 대상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흐르는 "시각적인 광휘(fire)"와 환영적인 "허깨비(eidola)’의 흐름으로 다루었다.14 잘 알려져 있듯 데카르트는 두개의 지팡이를 가진 장님에 대한 비유를 통해 보는 것을 만지는 것에 비교했다. 그는 마치 시각 장애인이 수 킬로미터에 도달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각은 더 세련되고 미묘하고 확장된 형태의 접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클리 주교의 <새로운 시각 이론New Theory of Vision>은 시각이란 순수하게 광학적인 과정이 아니라, 일관되고 안정된 시야를 구축하기 위해 광학적, 촉각적 인상의 조정을 요구하는 '시각 언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내장 수술의 경험적 결과에 기초한 버클리의 이론은 시각적인 인상을 촉각으로 광범위하게 조정하고 나서 비로소 회복할 수 있게 되어 물체를 인식하는 데에 오랜 기간이 걸린 시각 장애인의 무능력을 밝혀냈다. 이러한 결과는 현대 신경과학과 일치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올리버 삭스가 오랜 기간 시각 장애를 겪은 후에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복원된 시력에 대한 연구인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To See and Not See>에서 전체 질문을 다시 검토한 것이다. 자연적 시각 자체는 광학과 촉각의 땋기이자 둥지틀기이다.15

 

시각의 감각 비율은 그 자체로 감정, 정서 및 상호 주관적 만남의 영역, "응시"와 관찰적 충동(scopic drive)의 영역에 들어갈 때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예를 들어 사르트르로부터)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처럼) 응시가 다른 사람의 눈이나 어떤 시각적 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간(텅 빈, 어두운 창문)에 의해 활성화되거나, 관음증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삐걱거리는 울타리 혹은 알튀세르적 주체를 호명하는 "이봐 당신"과 같은 소리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는 것을 배운다.16 라캉은 "선과 빛The Line and the Light"이라는 데카르트의 촉각성 모델조차 거부하고, 이를 액체(fluids)와 범람(overflow)의 모델로 대체함으로써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그림은 보기보다는 취해야 하는 것이고, 그림은 깃털이 빠지는 것과 똥칠을 하는 것에 비유되고, 눈의 주요 기능은 눈물을 쏟거나 보살피는 한 어머니의 가슴을 바싹 말리는 것이다.17 애초에 순수한 시각적 지각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시각적인 매체도 없는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중요한가? 왜 세상에서 일반적인 종류의 사물을 골라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 매체라는 표현에 대해 애매하게 트집을 잡는 것일까? 누군가 빵과 케이크, 쿠키를 구운 것이라는 항목 아래 함께 묶는 것에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사실, 그렇지 않다. 이는 그들 모두 오븐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유로 빵, 케이크, 닭고기, 키시, 카술레를 구운 것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에 반대하는 것에 더 가깝다. “시각 매체라는 용어의 문제점은 그것이 오븐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일관된 것들을 골라내는 환상을 준다는 것이다. 글쓰기, 인쇄, 그림, 손짓, 윙크, 고개를 끄덕이는 것, 연재만화는 모두 시각 매체이며, 이는 그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제안은 이 문구를 잠시 따옴표에 넣고, 새로운 조사를 열어젖히기 위해 "소위"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시각 문화의 신생 영역이 그에 대한 가장 좋은 계기라는 것이 정확히 나의 생각이다. 시각 문화는 시각 과정을 그 자체로 문제화, 이론화, 비판 및 역사화하는 것을 주장하는, 시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연구 분야이다. 그것은 단지 "시각적인 것"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개념을 단지 조금 더 반성적인 문화 개념-문화연구의 "스펙터클한" 날개로서의 시각 문화에 연결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 문화의 더 중요한 특징은 감각이었고, 여기서 이 주제는 순전히 문화주의적인 설명에 대한 저항을 요구했으며, 시각적 자연- 즉 광학 과학, 시각기술의 복잡성, 보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요구했다.

얼마 전 톰 크로우는 예술사와 뉴에이지 치유, "심령 연구" 혹은 "정신문화" 등과 같은 대중적인 유행의 관계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제안함으로써 시각문화의 희생에 대해 박장대소했다.18 이것은 약간 가혹한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고대 철학의 계보와 비교했을때 미술사와 같이 상대적으로 젊은 학문의 혈통을 부풀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크로우의 발언은 시각 문화가 일시적인 사이비과학으로 쇠퇴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 혹은 더 나쁘게는, 서신과 사무실 공간, 비서가 완비된, 너무 일찍 관료화된 학술 부서로의 전환을 경고하는 것만으로도 활력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데 전념하는 많은 훈육자들이 있고(미케 발, 니콜라스 미르조프, 짐 엘킨스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점성술이나 연금술 같은 지적 대응물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시각적 미디어"라는 개념의 해체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더 어려운 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 긍정적인 이점을 제공한다. 나는 이미 그것이 감각적이고 기호학적인 비율에 기초한 미디어의 더 미묘한 분류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그것은 "시각적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할 수 있는 기본 개념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분석적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시각적인 것"을 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시각적인 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물화된 개념으로서 강력해졌는지 질문하도록 우리를 북돋운다. 마틴 제이가 추적한 "내리깔린 눈"에서부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푸코의 "감시 체제", 비릴리오의 "감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라"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시각적인 것은 "최고의(sovereign)" 감각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보편적인 희생양으로서의 평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획득했을까? 모든 물신적 대상들와 마찬가지로, 눈과 응시는 과대평가되는 동시에 과소평가되어왔고, 우상화되고 악마화 되었다. 시각문화는 가장 유망한 방식으로 이러한 "관측(scopic) 전쟁"을 넘어 더 생산적인 비판적 공간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공한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것과 다른 감각들의 미묘한 땋기와 둥지틀기를 연구하게 될 것이며, 예술사를 바르부르크적인(Warburgean) 예술사에 의해 구상된 전망인 이미지 및 시각적 실천의 확장된 장으로 다시 개방하고, 불쾌한 눈과 관련하여 그것을 뽑아내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시각 문화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시각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1. Clement Greenberg’s ‘‘Towards a Newer Laocoon,’’ Partisan Review 7 ( July– August 1940): 296–310, is his most sustained reflection on the desired ‘‘purification’’ of the visual arts. Michael Fried’s ‘‘Art and Objecthood’’ is the classic polemic against the mixed, hybrid character of minimalist, ‘‘literalist,’’ and ‘‘theatrical’’ art practices. See ArtForum 5 ( June 1967): 12–23.

2. The Painted Word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75).

3. Life on the Mississippi, chap. 44, ‘‘City Sights’’ (London: Chatto and Windus, 1887).

4. See also Jacques Derrida’s Memoirs of the Blin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for a discussion of the necessary moment of blindness that accompanies drawing, and especially the self-portrait.

5. My own answers to these questions are outlined in ‘‘Ut pictura theoria: Abstract Painting and the Repression of Language,’’ in my Picture Theo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See, more recently, Caroline Jones, Eyesight Alone: Clement Greenberg’s Modernism and the Bureaucratization of the Sens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6. Williams, Marxism and Litera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158–164.

7. Understanding Media (1964; Cambridge, Mass.: MIT Press, 1994), 354.

8. See Understanding Media, 42: ‘‘any extension of ourselves’’ is an ‘‘ ‘autoamputation.’ ’’

9. The Chicago School of Media Theory, a student research collective organized at the University of Chicago in the winter of 2003, is currently exploring the possibility of such a media taxonomy, a ‘‘Media HyperAtlas’’ that would explore the boundaries and blendings of media. For further information, see the ‘‘Projects’’ section on their homepage: http://www.chicagoschoolmediatheory.net/home.htm/.

10. One might want to enter a caution here, however, that from a mathematical standpoint it is the denominator (spatially ‘‘underneath’’) that gives the expression an identity (as a matter of ‘‘thirds,’’ ‘‘fourths,’’ etc.) and the numerator is merely a supernumary counting aspect of the fraction.

11. See my ‘‘Metapictures,’’ in Picture Theory.

12. See my ‘‘Ekphrasis and the Other,’’ in Picture Theory, ch. 5.

13. This is perhaps the central claim of Gombrich’s classic, Art and Illusion (New York: Bollingen Foundation, 1961).

14. See David C. Lindberg, Theories of Vision from Al-Kindi to Kepl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15. New Yorker (May 10, 1993), 59–73.

16. Sartre, ‘‘The Look,’’ in Being and Nothingness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56).

17.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77).

18. October, no. 77 (summer 1996),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