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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Distracted reception: time, art, and technology(주의 산만한 수용: 시간, 예술 그리고 기술)

by 정강산 2019. 3. 30.

Distracted reception: time, art, and technology(주의 산만한 수용: 시간, 예술 그리고 기술)

 

Osborne, Peter (2004) Distracted reception: time, art, and technology. 

In: Time zones: recent film and video. Morgan, Jessica, ed. Tate Publishing, London, pp. 66-75. 

 

 

정강산 역

 

 

예술에 의해 제공되는 종류의 주의 산만함은 그에 대해 의식된 지각/통각(apperception)의 새로운 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범위에 대한 은밀한 기준을 나타낸다. ...주의 산만함에서의 수용...[] 점차 예술의 모든 영역들에서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종류의 수용이고, 의식된 지각/통각에서의 심오한 변화에 대한 징후이다.

 

-발터벤야민, 1936 1

 

 

예술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주의 산만함 속에서 수용된다. 1930년대 글에서, 벤야민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주의 산만함의 상태에서 수용되는예술작품의 원형을 제공했던 것은 건축이지만, 그는 주의 산만한 수용의 동시대적 훈련장은 영화(film)라고 간주했다. 혹은 외려, 그는 그것이 -특정한 건축적 공간이자 영화의 시간적 특성들에 대한 사회적 용도인- 영화관(cinema)이라고 생각했다.2 1960년대에 이르면 주의 산만한 수용의 문화적 훈련장은 영화관에서 텔레비전으로 장소를 바꿨다. 상업적인 영화관은 주의 산만함을 유지했지만, 관람자를 흡수하는 규칙화된 서사적 스펙터클로서, 그것은 대중들이 주의 산만함을 추구한다는 오래된 비탄’-벤야민은 이로부터 단호하게 스스로 거리를 유지했다-의 부활로 이어지면서, 의식된 지각/통감에 대한 새로운 임무를 거의 마련하지 않았다.3 오늘날, 디지털에 기초한 음향-시각적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의 집중성(convergence)과 함께, 주의 산만한 수용의 훈련장은 텔레비전에서부터 증식하는 사이트들과 상호작용적인 컴퓨터 디스플레이 화면의 사회적 기능들에 이르기까지 다시 이동했다. 우리는 인터넷과 아직 예술적이지는 않은- 명백한 경제적 중요성에 대해 새롭고 더 공간적으로 분산된 주의 산만함에 대한 숭배를 경험하고 있다.4

 

예술 공간에서의 영화와 비디오에 대한 새로워진 -새롭게 역사적인- 관심의 오늘날의 맥락에서, ‘예술에 의해 제공되는 종류의 주의 산만함과 이에 대해 그것이 증언하는 지각의 새로운 임무는 다시 한 번 문제가 되었다. 문화산업의 경제적 논리가 그 자신을 예술 기관들에 부과하게 되면서, 그들을 문화산업의 재생산 사이클로 포섭하였고(광고와 디자인 조사개발 부서처럼), 어느 특정한 역사적 계기에서 어떤 집중과 경험의 양식(modes)들이 예술에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기술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비디오처럼) 예술적으로 전위적이었던 기술은 이제 흔하게 되었고, 반면 쇠퇴하고 있는 (16mm 필름 등의) 근 과거의 흔한 것들은, 더 불명료하고 덜 즉각적으로 수용되는 예술적 재료들을 추구하는 퇴영적인(backward-looking)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오노요코가 <Sky TV>(1966) -여기서 지붕위 카메라는 하늘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아래에 있는 갤러리의 TV 모니터로 전송한다- 에서 갤러리 공간으로 실시간 라이브 이미지를 내보내기 위해 처음으로 폐쇄 회로 비디오(closed circuit video)를 사용한지 거의 40년이 지났다. 오늘날 그러한 이미지화(imaging)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반면, 매튜 바니(Matthew Barney)<Cremaster> 연작은 1960년대와 70년대 상업 영화의 특정한 형식과 생산 기술 양자를 사용한다. 한편 더 젊은 예술가들은 1960년대에 개념예술가들에 의해 특징적으로 사용된 ()공식적 영화기법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 이는 어떤 철지난 것의 혁명적 힘과는 관련이 적다. 그것은 오히려 더 일반적인 실험적 재분절과 지각(perception)기술 및 예술적, 사회적 사용의 패턴들의 재작동과 가까운 것이다.

 

집중(attention)’이 교육과 소비, 노동의 새로운 형식들에 적합한 주체성의 새로운 관념적 유형에 대한 광범한 제도적 구조로서, 심리적 대상이자 사회적 문제로 처음 주제화 된지 120년이 지났다. 그 자체로, 집중의 역사는 철학적 분야라기보다는 오히려 경험적인 것으로서, 실험적인 심리학과 미학 양자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실제로, 조너선 크래리의 말을 빌자면 모더니티 자체를 이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

 

계속 진행 중인 주의집중(attentiveness)의 위기. 여기서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형태(configurations)는 새로운 상품과 자극의 원천, 정보의 흐름과 끊임없는 연속과 함께, 집중과 주의 산만함을 새로운 경계와 한계점으로 몰고 가며, 또 지각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새로운 방법들에 반응한다.5

 

이러한 측면에서, 주의 산만함은 주의집중을 만들려는 시도의 부작용인 반면, 집중은 주의 산만함에 대한 두려움에서 만들어진 기준이다. 이 부작용은 주의집중을 만드는데 대한 실패의 부정적 결과이거나, [주의집중을 만들려는]그 시도에 의해 반응적으로 유발된 긍정적인 조건이다. 실로, 주의집중을 만들려는 모든 시도들은 규율에 대한 더한 요구를 발생시키고, 스스로 자라나는 주의 산만함을 다시 보내(rechannel)거나 다룬다. 독일어 단어 ‘Zersteuung’(역주:원문에는 잘못 표기되어 ‘r’이 하나 생략되어있다. ‘Zerstreuung’은 분산, 산만, 휴식, 기분전환을 뜻하며, dispersiondistraction의 의미를 모두 갖는 단어이다.)의 이중적인 의미는 이러한 과정의 모호함을 포착하는 데에 본보기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분산(dispersion)이나 지각의 흩어짐(scattering)에 대한 심리적 현상과, 오락적인(diverted) 집중, 즉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주요한 사회적 객관 양자를 언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6 예술은 이 과정에서 독특한 역할을 맡는데, 그것은 단지 집중과 산만함을 복잡한 방식으로 결합시키면서 지각의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능력의 척도로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주의 산만한 검사(examination)’의 대상이라는- 그들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숙고(reflection)의 장소로서의 역할이다.7

 

예술은 주의산만하게 하고, 예술은 주의 산만함 속에서 수용된다. 이것은 초기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갤러리 공간에서의 예술에도 해당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사색적인 침잠혹은 작품에의 몰두라는 이데올로기는 그 수용을 계속해서 제한하지만, 주의 산만함은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집중에 대한 요구에 관련되어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세계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산만해지기 위해[관심을 멀리하기 위해] 갤러리에 간다. 그렇게 산만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전시된 작품들에 몰두해야만 한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작품에 의해(그리고 제도적인 맥락에 의해) 요구되는 종류의 집중 사색적인 침잠- 은 그 자체가 주의 산만함에 대한 요구를 발생시키는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발전되는데, 이는 작품이 그러한 집중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아마도 그 요구 자체의 훈련적인(disciplinary) 특징 때문일 것이다. 주의 산만함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갤러리에 의해 쉽게 충족된다. 소리들, 움직임들, 다른 관람자들의 시선들, 갤러리 공간의 매력적인 건축, 창밖의 풍경, 큐레토리얼 인포메이션 카드, 안내원들, 그리고 다른 작품들에 의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동일한 시각적 공간에서 작품들을 함께 배치하는 일의 기능일 것이다. 즉 그들은 주의 산만함의 정신적인 공간을 제공하며, 이 공간은 [관객들이]자신을 특정한 작품에 넘겨주는 일과 관련된 긴장을 경감해준다. 다른 작품들은 관람자의 시간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만들고, 가능한 주의 산만함이라는 안심을 제공하면서 등 뒤에서 관람자를 응시(gaze)’한다.)

 

예술은 주의 산만함에 관한 긴장을 부여하는 집중과 함께 수용된다. 작품으로부터 [멀어지는]주의 산만함과, ‘산만함으로부터 멀어지는 주의 산만함양자는 곧 작품에 대한 집중이다. 여기서, 집중은 곧 (산만함으로부터의)주의 산만함이다. 또한 주의 산만함은 곧 (다른 것들에 대한)집중이다. 그들의 변증법은 구체화된, -원근법적인, 산만함의 바로크적 공간을 발생시킨다.8 그러나 만약 예술이 -예술로서 비판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관람자로부터 산만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단지 세계에 대한 염려나 걱정이 아니라, 점점 더 주의 산만함(엔터테인먼트) 자체를 향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그것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 주의 산만함으로부터 산만해지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예술은 단지 또 다른 산만함이 되지 않으면서 산만함 속에서 수용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예술은 산만함과의 접촉을 끊지 않으면서, 다른 산만함들과 관계없이 전적으로 또 다른 영역 사색적 침잠- 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리 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동시대적이고 효과적이라면 예술이 연루되어야만 하는 바로 그 세속적인 경험의 구조로부터의 도피 수단이 되는 일 없이, 산만함으로부터 산만해질[주의를 돌릴] 수 있는가?

 

이들은 모더니즘 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이 1940년부터 고심했던 쟁점들이다. 그들은 특히 최근에 예술 공간에서 영화와 비디오를 사용하는 시간적인 측면에 의해 첨예하게 대두되었다. 집중과 산만함의 변증법은 지속(duration)의 변증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리듬에 대한 연속과 중단의 변증법이다. 그로서, 그것은 시간화(temporalization) -시간의 생산- 자체의 과정에 대한 특정한 굴절이다. 영화와 비디오 작품들은 관람자의 시간을 새로운 리듬과 형식으로 당기면서(syncopating) 예술공간들에서 이러한 시간의 변증법에 개입한다.

 

 

지속(시간)

 

19세기 후반기부터, 포스트 칸트주의 유럽 철학 근대 철학(modern philosophy) 전통의 분석적측면에 환원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현상학적인 대안이 되는- 은 무엇보다도 시간에 대한 철학이었다. 베르그송부터, 화이트헤드와 후설, 루카치를 거쳐, 하이데거와 벤야민, 레비나스, 리쾨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일련의 숙고와 함께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의 유럽 철학은 존재(being)’에 대한 물화 혹은 실체화에 반대했다. 철학적 주제로서의 시간에 대한 이러한 전환은 주로 주관적(subjective)’시간에 대한 독특한 특징과 함의에 대한 반성에 근거했다. 특히, 베르그송의 지속, 후설의 의식의 절대적인 흐름, 하이데거의 실존적 시간화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20세기 유럽 철학에서의 존재에 대한 시간의 선차성의 확립은 서구 사유에서 주관성의 읜리의 승리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결의(act)에서, 그것은 그것을 시간으로 용해시키거나 시간으로 부수면서 주관의 정체성과 경계들을 의심에 빠지게 했다.9 비슷하게, 집중과 산만함의 변증법에서, 공간적으로 상이한 구조와 시간의 기술에 의해 상이한 지각대상들에 대하여 그 관계들 도처에 분산되고 퍼진 만큼 주체는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발견한다.

 

알다시피 영화는, 시간과 자아의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구조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재현의 기술이다. 벤야민에게, 그것은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예술의 모든 문제들이 자신의 결정적인 공식을 찾는매개체(medium)였다. 오늘날 그러하듯, 동시대 예술의 문제들이 재사유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음성적-시각적 디지털 기술들과의 관련이 있다.10 영화와 그 후계자들의 프리즘을 통해 보면, 동시대예술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시간과 주체성에 대한 그것의 이음매에서 나타난다. 시간에 대한 근대철학의 풍부한 영역은 따라서 동시대 예술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위한 개념적 자원의 광산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공하는 개념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에 대한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속은 시간적 연속-시간 속 존재의 경험-의 형식인데, 이를 통해 시간은 공간과 구별된다. 그것은 으레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삼중(three fold)현재라는 확장된 개념에서 첫 번째로 철학적 정교화를 성취했다고 간주된다. 각각 과거, 현재, 미래와 일치하는 의식, 그리고 기억(memory)에서는, 주의집중, 기대와 일치하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시간적 총체로서 -이러한 현재의 외부에는 어떤 시간도 없다- 확장된 현재는 (한 순간처럼)점과 같은 것이 아니며, 지속한다. 그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의 어떤 끊임없는 운동으로서, 집중[의 상태]에 부여된 것이 기억이 되는 것처럼, 새로운 집중의 대상이 나오고, 새로운 기대가 생기는 것 등처럼, 역동적으로 지속한다.11 그러나 주로 지속의 개념과 관련되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지속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공간적 용어로 재현되는 것에 대한 시간의 개념적 의존으로부터 시간의 완전한 구분을 주장했다. (예를 들면, 순간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익숙한 생각은 공간적으로 그것을 선으로 나타내는 것에 의존한다. 그리고 확장된현재에 대한 어거스틴적 개념은 이러한 공간적 유비에 달려있는 것으로 지탱된다.)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국역: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에서, 베르그송에 따르면, ‘동질적인 매개의 형식 하에서 인지되는 시간은 어떤 거짓된(spurious)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 대한 공간적 사고의 침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성적인(reflective) 의식을 배회하는 공간의 유령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면 순수한 지속은, ‘구별이 없는 연속이다.’ 그것은 양적 기준이 없는 순수한 질적 차이이다. 우리의 자아가 그 자신을 생기있게 만들 때, 그것이 그 현재의 상태를 그 전의 상태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삼갈 때, 우리의 의식적 상태들의 연속이 전제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지속적인 혹은 질적인 다양성(multiplicity)이며, 숫자와는 유사하지 않다.’ 그 이미지로서 그것은 곡에 대한 음표의 통일을 가지는데, 이는 의식과 분리되지 않고 '각각 다른 것에 침투'함으로써 연속성을 형성한다.12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간의 현상학적인 형이상학을 그의 작업 <문제>(Matter and Memory: Essay on the Relation of Body to Mind, 1896; )<진화(Creative Evolution, 1907; 국역: 창조적 진화)>와의 연관 속에서 정교하게 다듬었다. 정신과 육체(시간과 공간)의 이분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서, 그는 하나의 역동적인 충동, 생의 약동(Élan vital)에 기초한 새로운 삶의 철학으로 그것을 초월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던, 지속은 형이상학적으로 실제(virtuality)’에 대한 현실적인 영역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공간적)현실성은 창조적이고 변화의 힘이 있는 삶 자체의 과정에 의해 별개의 존재들과 관계들의 세계로서 끊임없이 생산된다. 지속은 발명, 즉 형식들의 창조,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계속되는 정교화를 의미하며 (...)조직적인 신체(...)는 중단 없이 자라나고 변화한다.’13 구체적인 지속은 따라서 상이한 유기체들의 삶에 특유한, 질적인 시간이며, 순수한 지속의 계속적인 흐름에서 의 자기 조직화에 의해 절단된다. 생의 역동에 대한 이 종교적인 자연주의가 프랑스 지성계를 지배했던 20세기 초엽 이후, 1930년대에 베르그송의 철학은 빠르게 망각되어 갔고, 단지 최근에야 질 들뢰즈에 의해, 주로 영화와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구제 그리고 철학적 유행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다.14 베르그송 스스로가 <창조적 진화>4장 제목에서 사유의 영화적(cinematographical) 메커니즘을 언급했던 1907년쯤에, [이미 영화와]이러한 연결을 만들었다. 현재의 논의로부터의 그 명백한 역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전용된)이러한 연결은 극장과 다른 한편 예술공간에서의 영화와 비디오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명확히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공간으로부터의 시간의 절대적인 독립성과 공간 이상으로 탁월한 시간을 통해 형이상학적 고유성을 확립하려는 베르그송의 시도는 탈-현실화된 이미지에 대한 영화적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상관물이다. 이것은 보기(viewing)의 공간적 조건들을 억압함으로써 작동하는 시각적 지각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유미주의에 의해 예술 관람자들에게 요구되었던 포퓰리즘적 모방으로, 극장 자체가 점진적으로 스크린을 제외하고 모든 산만함을 텅 비우는것처럼 말이다. 예술 공간에서의 영화와 비디오 전시 형식의 두드러진 공간성과, 다른 한편, 결정적으로, 갤러리 공간을 통과하는 관람자의 움직임은 영화가 갖기 쉬운 시간에 대한 잘못된 절대화를 약화시킨다. 게다가, 그것은 시간적 연속성의 수용된다기보다- 구성된 특징을 강조한다.

 

베르그송은 순수한 지속을 어떤 절대적인 연속으로 취급하는데, 그로부터 구체적인 지속의 연속성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취급은 존재(그리고 특히 정신적인 연속성) 내부에서 어떻게 연속성이 가능해지는지에 대한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한 지속 자체의 실제성 내부에서보다는 시간적인 불연속성에 직면하여 또 그 불연속성을 가로질러, 또 그것에 맞서- (공간에서의)존재들의 차원으로 확립되어야만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 자신이 주장했듯, 시간은 오직 실제성으로서 연속적이고, 따라서 로서 그러하다. 즉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 내부에는, 따라서 항상 어떤 비연속에 대한 연속의 변증법적 의존이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Bachelard)의 표현으로는 정신적인 연속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들 간의 관계에 관한 시간적인 구조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은 그 자체로 다시 시작하는 데에 가장 좋은 것이다.’ 지속은 어떤 연속, 중단,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따라서 (베르그송이 생각했던 것처럼) 연속이 아니라, 리듬으로서의 시간화이다. 그리고 어떤 총체적인 주기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형식의 복원인 것이다.15

 

시간에 기반한 재현의 기술들은 기술적으로 특정한 그들 자신의 시간적 분화(differentiations)로부터 시간적 연속에 대한 자신의 형식들을 구축한다(예를 들면 초당 24프레임과 같은 식으로). 그리고 그 수용의 일시성은 이러한 작품의 일시성과, 관람자 영역에서의 영향에서의 다른 일시성들-공간적 관계들에 대한 구체화된 접합점인 일시성들-의 산물일 것이다. 따라서 각 작업은 공간과의 관계, 그러므로 다른 시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 자신들의 시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사전에 그것의 지배적인 수용에 특징적인 공간적-시간적 조건들 집중과 산만함의 변증법- 을 고려함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맥락적이다(contextual)’.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용의 조건에 대해 어떤 투사된 의미를 그것의 생산의 논리로 통합시킨다.

 

시간이 사회화되는 것은 시간적 관계들의 공간적 분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속으로 예술 영화와 비디오가 개입하는, 산만한 수용에 대한 시간의 변증법은, 심리적인 것인 만큼 사회적-공간적인 것이다. 실로, 벤야민이 산만한 상태에 있는수용에 관하여 썼을 때, 그는 그것을 집합성(the collective)을 통한수용, 즉 특정한 공공적 사용과 동일시했다.16 (누군가는 산만함을 두고 집중의 사회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동시대 영화와 비디오 예술의 산만한 수용에 있어 작품에서의 집합성의 특징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질문 내부에 새겨져있는,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더욱 넓고 역사적인 시간에 대한 질문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예술작품을 보는 간단한 행위에 압축된, 리듬의 복잡한 막(overlay)이 있다. 어떤 작품에 대한 판단에 대한 하나의 척도 통감의 새로운 어떤 과업- 는 시간적 연결에 대한 (정신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이 네트워크를 어떤 사색적이고 변형의 힘을 가진 시선에 열어주는 정도(extent)일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규모의, 유사-영화적인 비디오 설치는 동시대 예술의 주된 형식이다. 그것이 제공하는 종류의 산만함은 어떤 측면에서 초기 영화의 산만함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공간적 조건을 보기의 경험의 부분으로서 승인하기 때문이다 (비록 보통은 부정적으로, 자신을 갤러리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격리하지만). 그러나 여기서 집합성의 형식은 크라카우어의 영화관(picture palaces)의 영화적 대중(masses)의 집합성과는 매우 떨어져있다. 그것은 어떤 사유화된, 순차적이고 작은 집단의 일(affair)이다. 이때 작품은 자신의 이미지와 리듬을 부과함으로써 표준적인 관람자를 연루시키고 고정시키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을 갖는다. 물론 일단 [관람자를]사로잡으면, 암전된 영화적 조건은 관람자가 산만함에서 떠나고 그 다음의 산만함으로 이동하기 전에 오래 머무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뒤이은 산만함은 아마도, 이전에는 갤러리 구석에서 무시된 채로 서있는 모니터에 전시된 작품일 것이다. 생각건대,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산만한 지각의 심화이다. 분산(dispersal) 속에서의 정신적인 집중은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간단하게, 수용의 조건이다.

 

최선을 다해서, 동시대의 갤러리들은 몰입과 산만함의 새로운 사색적 리듬 및 지속, 중단, 시작, , 반복, 지연의 새로운 분절들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인 이미지-공간의 대립하는 다양성을 재생산한다. 무엇보다 부리오(Bourriard)가 주장 했듯, 이러한 경험의 기본적인 단위가 되는 것은 전시이지, 개별적인 작업이 아니다.17 전지구적 정보의 수도인 도시의 -공간은 전시의 맥락이다. 즉 디지털 기술들은 사용가능한 기술들의 기초인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시간의 철학은 그것의 해석을 위한 열쇠를 쥐게 된다.

 

 

/본문과 관계 없는 코멘트- 

->점차 작품의 수용이 산만한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고, 이것이 전통적인 관람의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 이때 벤야민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영화 및 복제/재현 기술의 발달이 열어젖힌 지각의 변화이다.

 

->재현 기술 및 광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수용적 감각이 점차 산만하게 변화되어온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영화 혹은 영화관에서 텔레비전, 그리고 오늘날의 컴퓨터 스크린에 이르기까지, 산만함이 가중되어 온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 더 읽다보면 이하에서 오스본은 이런 생각에 딴지를 건다. 산만함은 곧 집중을 전제하고, 집중은 곧 산만함을 뜻한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 수용의 조건은 단순히 산만함이 아니라 일종의 리듬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즉 과거의 기술들이 다시 소급적으로 호명되고 있는데, 이건 단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과거의 기술 및 기법들이 오늘날의 조건에서 새롭게 맥락화 된다는 의미. 허나 이 지점에서 저는 오스본과 달리 보는 것이 있는데, 저는 사실 예술에서 과거의 형식들이 계속 되돌아오는 것은 변화 불가능성의 어떤 퇴행적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제임슨이 언급한 혼성모방(패스티시)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이런 과거의 절취를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예술적 양식이라 할 법한 것은 과거의 것들을 맥락 없이 전유하는 행위로 대체된다. 이것은 새로움과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과는 반목하는 방법론으로서, 새로운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징후이자, 먹기 좋은 분위기만 남는 것으로 예술을 전락시킨다. 예컨대 뜬금없이 아이유가 부르는 김광석이 좋은 예이다. 혹은 빅뱅이 부르는 붉은 노을이라던가, 뜬금없이 고구려를 호명하는 태왕사신기라던가. 이런 측면에서 오스본 식의 낙관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집중의 상태에서의 수용에 생기는 변화를 통해 가늠할 수 있는 모더니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오스본은 조너선 크레리(24/7 잠의 종말: 미학자 겸 예술사가 정도 되는 포지션에서 자본주의 및 정보통신 기술의 변화에 따른 주체의 감각지각 디폴트에서 일어난 변화를 탐구)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즉 오스본이 보기에 예술은 현대적 경험에서 주의산만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하에서는 예술의 수용을 통해 볼 수 있는- 주의 산만함의 양가성이 언급됩니다.

 

즉 예술이 단순히 산만함을 재생산하는 문화산업 등의 엔터테인먼트와 구별되고자 한다면 산만함과 집중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하에서 오스본은 앞서 했던 얘기, 그러니까 영화가 지각적 수용의 기준이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영화의 이러한 성격과 지속의 문제를 관련시키려고 합니다.

 

즉 그 시간을 굳이 형상화 하라면, 그것은 어떤 점이 아니라, 악보에서의 음표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행이 한풀 꺾였지만 2010년 초반까지도 한국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들뢰즈의 시네마 1,2에서 다뤄지는 내용입니다. 시네마 1은 2002년 유진상 샘이 번역하셨죠. 시네마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공간과 시간의 유비를 영화분석에 적용시켜서, 새로운 주체성의 발생계기를 해명하려고 합니다. 크게는 운동-이미지가 있고, 시간-이미지가 있는데, 운동-이미지의 과정은 지각-변용-운동이고, 자동적 재인의 과정입니다. 사유가 개입할 공간이 없는, 지각과 동시에 행동이 일어나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이죠. 반면 시간-이미지의 과정은 지각-변용-사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주의 깊은 재인이 일어납니다. 운동-이미지에서 동일성은 전제되어 있으며, 완결된 체계로서 드러나지만, 시간-이미지에서 동일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해체된다. 따라서 제 1주체는 운동-이미지에서 나타나는 반면, 제 2주체, 이미 구성된 주체가 아닌 새로운 주체는 시간-이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여기서 오스본은 베르그송을 영화의 이데올로그로서 간주하는데, 이게 흥미롭습니다. 여타의 분절된 이미지들(사진 혹은 회화 등등)에 대해 영화의 지속성이 더 우월하다는 전제와 베르그송의 철학이 조응한다는 것이죠. 이를 좀 더 밀어 붙이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영화의 발명 없이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을 흥미롭게 역사화 시키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스본에게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한계가 있는 것인데, 오스본은 반면 예술 공간에서의 필름과 비디오 전시는 공간적 요소들과의 교류 속에 스크린을 둠으로써 베르그송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스본에 따르면 존재 내부에서 시간의 절대성, 즉 순수한 지속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분절을 고려해야만합니다.

 

당연한 말이죠, 사실 직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시간은 공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만함은 곧 몰입의 조건이고, 지속은 사실 무한한 연속이라기보다 중단을 포함하는 리듬에 가깝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또 동시대예술의 전시장에서 상연되는 필름과 비디오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고요. 따라서 이건 영화에 대한 갤러리에서의 필름 상영의 상대적 자율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딱히 문제제기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저자가 지나가면서 변죽을 올렸던 질문, 오락적 산만함에 완전히 공모하는 일 없이 어떻게 산만함을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혀 해명이 되지 않아서,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